[GL] [단편] 죽어도 못 보내
죽어도 못 보내
라고 생각하는 순간 조금 슬퍼졌다.
나는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언니의 카톡프로필은 그 사이에 누군가와 맞잡은 손으로 바뀌어 있었다. 언니의 손등에 포개어져 있는 커다란 손. 남자는 손이 크고 어깨도 크고 배포도 큰 사람이라고 했다. 약지에 끼인 반지가 딱 언니의 취향이다. 심플하고 얇은 링. 언니는 과한 디자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니가 고르는 물건들은 언제나 티가 났다. 가장 심플하고 가장 기본적인 것. 언니는 종이컵을 살 때도 가장 단순한 무늬의 것을 고른다. 언니는 그런 사람이다.
음식도, 음료도, 핸드폰 케이스도.
향수도, 블라우스도, 귀걸이도.
커피도, 부츠도, 사람도.
사람도.
사랑도.
그래서인지 언니가 사랑한 사람역시 심플한 사람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그랬다. 탁 까놓고 말하면 더없이 평범해서 미안할 정도로 무색무취한 사람.
그래서 오히려 언니의 그 선택이 특별해 보일지도 모른다.
언니는 나를 사랑했다.
그런 언니가 결혼을 한다.
죽어도 못 보내
1.
언니가 선택한 사람이 남자라는 점에서 나는 생각보다 덤덤하고 깨끗한 상태로 이승에 머물 수 있었다. 만약 언니가 사랑한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여자'라면... 그게 더 견디기 힘들 것 같았다. 죽음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상태가 있을 수 있을까 싶지만 죽고보니 알겠다. 오히려 더 잘 알겠다. 더 잘 알 수 있다. 나는 죽었으므로.
그래서 '죽을만큼 힘들어'하는 말을 할 수 없다.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을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 감정을 표현할 상대가 없다고 해야하는 걸까.
"넌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않아."
"......"
"왜."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시간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빨리'라는 말을 쓸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촉박함도 지겨움도 느끼지 못한다. 아마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감정은 아주 모호한 파동을 일으키는 진동처럼 울려서, 언니의 저 '않아.'하는 말을 들었을 땐 제법 영혼같지 않게 몸이 떨린다. 존재하지도 않는 몸뚱아리가 여기저기로 흩어져서 언니의 주위를 서성이게 되었다. 그건 오열이라는 말로 표현하면 딱 좋을 법했다. 언니가 갑자기 느껴지는 섬짓함에 잠시 자신의 팔을 쓸어만진다. 언니의 팔에 붙어있던 나는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언니의 그 단아한 옆얼굴을 본다. 보면서, 똑바로 쳐다보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하고 말했다. 외쳤다.
"넌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하고 묻는 저 여자는 연수다. 연수는 나와 언니의 관계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연수는 내 쌍둥이 친언니였고, 그리고 동시에 언니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연수는 다소 화가 나 있다. 그러나 연수는 그 화를 모두 드러내지 않는다. 한 30%쯤 드러내고, 30%는 감춰두고, 30%정도는 체념에 가까운 어떤 감정에 모든 마음을 맡겨두려고 하고 있다. 나머지 감정에선 미안함이 느껴진다. 연수야, 연수언니, 하고 이번엔 반대로 붙어 말을 걸어본다. 쌍둥이라고 맨날 장난만치고 "언니."라고 불러주지 못한게 후회가 된다. 연수는 어른스럽다. 그래서 충분히 언니라는 말을 들어도 되는 애다. 우리는 일란성이지만 성격은 이란성이다. 아니, 타인에 가까운지도 모른다. 그래서,
"솔직히 좀 충격이다. 네가 더 슬퍼할 줄 알았거든."
나와 달리 솔직히 말을 뱉어내는 친언니가 고맙다.
그리고 네가 더 슬퍼할 줄 알았거든, 하는 말을 듣고 있는 그녀는 답이 없다. 그녀의 마음은 읽을 수 없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30%의 감정, 또 다른 30%의 감정, 그리고 또 다른 30%가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그리움도 미안함도 슬픔도 느끼지 못하는 유리벽같은 여자는 내 친언니가 사라지고 나서야 꼬았던 다리를 푼다. 커피는 이미 식어있다. 머그잔의 손잡이를 톡톡, 손가락으로 한참을 두드리던 여자는 이내 몸을 일으킨다.
"슬퍼."
그리고 조용히 읊조리는 혼잣말.
그리고 언니가 사라진다. 언니가 사라진 카페의 안에서 나는 우뚝 섰다. 아니, 나는 영혼이기 때문에 설 수 없다. 다만 가만히, 급속도로 고체가 되어가는 어떤 화학물질처럼, 땅이라는 곳에 우뚝 뿌리를 내린 채, 이미 카페 문을 나서고 있는 언니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나의 친언니와 내가 사랑했던 언니는 이 날을 기점으로 만나지 않는다. 절교라고 하기에도 뭣한 자연스러운 이별이다. 사별한 연인을 만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죽었으니까. 그리고 사별한 연인의 가족을 만나는 것은 껄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언니가 연수를 만나지 않는 이유는, 아마 연수의 얼굴에 남아있는 나의 흔적들 때문일지도. 우리는 성격은 이란성이지만 외모는 일란성이었으니까...
그러나 정확히 11년 후, 그녀들은 우연히 만나 우연히 웃고 우연히 나를 찾아온다. 평화로운 오후에 프리지아와 칸나를 들고. 웃으며, 웃으며.
그리고,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기로 한다.
갑자기 분노도, 안타까움도, 슬픔도 갑자기 모두 한없이 가벼워져 버렸다.
2.
언니가 낳은 아이는 언니의 눈, 언니의 머리카락을 닮는다. 코와 턱은 그 남자를 닮았다. 비율로 따지자면 정말 딱 반반쯤 될까. 언니는 아들을 낳길 원했다. 그러나 아이는 딸이다. 나는 언니의 기쁨을 느낀다. 아들을 원한다면서 막상 딸을 낳자 안도하는 그녀를 느낄 수 있다.
아이의 머리맡에서 나는 이따금 언니가 아이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듣는다.
그건 영혼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평온하고 '빠른'시간이었다. 그 때 나는 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조심스레 추측해보기도 했다. 이런 영혼에게도, 시계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내게 있어 유일무이할 그 유한한 시간함에 잠시 아쉬워해본다. 아쉬워할 수 있는 망령이라니. 우습다. 우스우면서도 정말 아쉬워서 '엄마'의 얼굴을 한 언니의 얼굴만 한참을 바라본다. 언니는 여전히 웃지 않지만, 그렇다고 울지도 않는다.
시간의 감각을 모두 비껴낸 나는 영혼이다.
그리고 그 영혼도 잡지 못하는 것은 아이의 성장이다. 언니는 언니에서 엄마로, 아이가 성장할 때마다 그리 변해간다.
3.
"연서야."
"연서야."
"연서야."
언니는 아이에게 내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그건 나와 언니가 연인사이였다는 것을 모르는 대부분의 주위사람들에겐 평생동안 아름답고 서글프게 회자되는 이야기가 된다. "걔가 글쎄, 딸 이름을 최연서로 지었단다. 둘이 같이 붙어다니더니 딸 이름을 그렇게 지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어." 일찍 죽어버린 딸의 이름을 새롭게 태어난 딸의 이름으로 만든 그녀를, 내 부모님은 평생 고마워한다. 그녀와 나를 모두 아는 주변 사람들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렇게 '연서'는 아름다운 동정과 동경어린 관심으로 자란다. '연서'라는 이름이 불릴 때마다 나는 "네."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내, 정말 연서가 옹알이를 하고 그녀에게 "엄마'라는 말을 내뱉기 시작하자 나는 그 대답을 삼킨다. 삼키고 또 다른 연서를 바라본다.
본래 나는 언니와 아이를 보지 않으려 했다.
그 때 쯤 내가 머무는 곳은 우리 엄마와 아빠와 삼촌이 함께 일하는 서점이었다. 아빠는 내가 일할 때 입었던 앞치마를 버리지 않았다. 엄마는 이따금 그것을 입었고, 그래서 아빠에게 혼이 났다. 엄마는 일부러 꾸중맞으려는 아이처럼 자꾸만 내 앞치마를 입었다. "연서야...연서야..." 그리고 그 앞치마 자락에 내 이름을 말하며 눈물을 닦아낸다. 일을 하다가 종종 멈춰서 책을 읽던 내가 있던 곳. 소설코너에서 엄마는 지금은 절판이 단편집을 만진다. 엄마의 슬픔이 전해질 때마다 나는 마음이 아프다가도 상쾌해졌다.
엄마의 연서야...연서야...
라는 소리에 무덤덤해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영혼의 평화가 찾아 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망령에게도 평화가 있구나, 하는 생각에 우스워졌다.
연서야...연서야...
아마도,
"연서야...연서야..."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절박하게 들리지만 않았다면.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나는 언니가 낳은 그 아이의 머리맡에 있지 않을 것이었다. 의지도 무엇도 없이 나는 언니에게 끌려갔다. 마치 조건반사처럼. 아니 생존본능처럼.
아이는 열이 펄펄 끓었다. 엄지발가락에 꽂힌 링거가 거대해 보였다. 링거의 튜브로 새빨간 피가 올라와 있다. 아이는 꼭 개구리 같았다. 마른 팔다리와 달리 머리와 배만 볼록한 느낌이 들었다. 부은 눈두덩이 위로 뜨거운 열기가 보인다. 뽀오얀 볼이 점점 색을 잃어가고 울지조차 않은 게 내리 이틀이었다. 목에도 가득찬 열의 덩어리가 보인다. 나는 그녀의 아이의 주위에 가득한 병마를 본다.
"연서야..."
그 때, 문득 침대의 옆에서 아이의 작은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던 그녀가 나를 부른다. 아이의 이름이었으나 그건 내 이름이기도 했으니까. 아니 방금 그녀의 입에서 떨어져 나온 소리는 왠지 모르게 나를 부르는 소리라는 확신을 주었다.
"우리 연서 좀..."
끝내 말을 잇지 못하는 언니의 옆으로 그녀의 남편이 왔다. 잣죽과 속옷을 챙겨온 남편이 언니의 옷을 갈아 입혀준다. 블라우스를 벗기고 목을 쓸어 만져주고, 브래지어를 벗기고 가슴을 쓸어 만져주고, 그리고 툭, 떨어지는 언니의 눈물도 쓸어 만져주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나는 고개를 돌린다.
쌕쌕 거리는 아가의 눈두덩이 가만 보면 언니랑 똑같다. 언니는 쌍겹진 눈매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보단 눈매 자체가 아름다운 호를 가진 사람이다. 아이는 어리지만 예쁜 눈매를 가지고 있다. 언니의 아이다. 새삼 그런 생각에 묘해진다.
검은 병마들의 사이를 치고 들어간다. 나는 아이의 이마에 잠시 내 이마를 갖다댄다. 그 뜨거운 아이의 열을 내 안에 가득 담는다.
우리 연서 좀...
하는 언니의 그 말이 마치 문신같다. 무섭다. 죽은 나는 산 언니가 무섭다. 잔인한 사람. 잔인한 사람. 그리 되뇌며 아이의 봉긋한 볼에 입을 맞추어본다. 남자와 언니가 만들어낸 이 아이는, 그러나 나의 이름을 하고 있다. 무섭다. 잔인한 사람. 잔인한 사람. 수백, 수천 번을 더 그리 되뇐다.
"연서야."
그리고 이제 체념하듯, 나도 그리 불러본다. 언니가 불러보듯 그리 애틋하게.
아이가 대답이라도 하듯 목에 걸린 침덩어리를 뱉으며 운다. 눈은 꼭 감은 채. 내린 열에 놀라워하는 간호사들이 언니를 부르러간다. 언니는 또 연서야, 연서야, 한다. 그건 내 이름이 아니다.
4.
우리가 함께 있을 때, 언니는 내 이름보다는 "야.", "야.", "야."하고만 불렀다. 어렸을 때 부산에 잠깐 살았었다던 언니의 말투는 나를 "야."하고 부를 때 그 억양이 가장 여실히 드러났다. 나는 이름을 불러달라는 요청을 해본 적이 없다. 언니의 '야.'는 내게만 향하는 편한 습관이었다. 언니는 기분이 좋을 때도, 나쁠 때도, 배가 고플 때도, 그리고,
"야."
그리고,
"너 그럼..."
너 그럼... 하며 언니는 눈을 내리깐다. 무심한 척. 하얗게 질린 손목의 뼈는 감추지 못하면서.
"나랑 한 번 사겨볼래?"
의문문도 평서문도 아닌 모호한 말투였다. 되려 명령문에 가까운 말투였다. 끝을 올리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나즈막히 꾹꾹 눌러담는 듯 말해오는 그 말이 주문같이 아로 새겨진다. 대답 대신 나는 웃었다. 황당해서. 아니 당황해서. 물을 마시고, 또 물을 마시고, 또 다시 물을 마시는데,
"야."
또 야, 한다.
"체하겠다. 조심해."
슬쩍 내게서 물컵을 빼앗아드는 언니에게 나는 "네."했다. 무슨 말에 대한 긍정의 답인지 모호했지만 어쨌든 그 때부터 우린 사귀게 되었다. 그 때부터 언니의 '야."는 시작되었다. 나는 그녀의 그 습관을 고치게 할 수 없었다. 이름을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도 간절하게 들지 않았다. 언니의 '야.'는 나만을 지칭하는 말이니까. 난 그녀의 "야."가 좋다.
그녀는 남편에게도 그리 말하지 않는다. 현종 씨, 연서 아빠, 에서 그친다.
그녀의 딸인 '연서'가 결혼을 할 33년 후, 언니는 더이상 연서의 이름을, 내 이름을 자주 부를 수 없음을 느낀다. 언니는 집으로 돌아와 제일 먼저 욕실로 간다. 그리고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향해 "야."하고 부른다. 나는 꼭 그게 언니의 뒤에 있던 나를 보고 하는 말인 줄 알고 퍼뜩 놀라본다. 그럴 턱이 없는데도. 언니는 푸스스 웃음을 짓는다. 체념이 무르익은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서. 그리고 다시금 푸스스 웃는다. 푸스스, 푸스스, 계속 웃는다. 언니는 웃음이 흔한 사람이 아닌데도.
언니의 눈꼬리에서 조금 눈물이 비췬다.
그리고 '늙었나봐 정말.'하는 말을 끝으로 뒤돌아 선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도 예뻐, 하고 나는 되뇌어본다.
그 말에 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5.
연서는 잘 자란다. 아주 무럭무럭 큰다. 언니의 키는 168cm, 언니의 남편의 키는 179cm. 그리고 연서는 언니의 키를 고등학교 1학년 때 따라잡는다. 연서가 본격적으로 키가 크기 시작한 것은 16살 부터다. 중학교 3학년이다. 그 때쯤 연서는 언니의 눈, 그리고 머리카락, 그리고 내가 제일 좋아했던 언니의 동그란 이마까지 닮기 시작했다. 연서는 예쁘다. 다만 가끔씩 엄마보다 아빠가 더 좋다는 말을 하는 것만 빼면.
"연서야."
나는 내가 아닌 연서에게 '연서야.'하고 몇 번이고 말을 건넨다. 그러면 이따금 이 꼬마애는 공부를 하다말고 휙- 고개를 돌려 인상을 잔뜩 찌푸린다. 그리고 소름이 돋은 뒷목을 쓰다듬으며 제 뒤에 있는 침대 위에 부러 곰인형들을 턱, 턱, 세워놓고 성호를 긋는다.
"귀신아 물럿거라."
그리고 그 쪼그만 꼬맹이가 감히 저따위 말을 지껄인다.
감히. 나보고 귀신이라니. 후회할거다. 여섯 살 때 세탁소 배달 오토바이에 치일 뻔해서 왼쪽 뺨에 커다란 흉터가 생겼어야 했을 꼬마애. 지역 동요부르기 대회에서 리허설 중에 첫생리가 터져서 1등이고 나발이고 평생 저주스러운 기억을 가졌어야 했을 꼬마애. 그리고 앞으로 5년 후, 개똥차반같은 군인한테 꼬여서 예쁜 몸 예쁜 마음 예쁜 얼굴까지 다쳐야 할 운명까지 내가 다 어떻게 해주려고 하는데 뭐? 귀신아?
는 맞는 말이다.
나는 귀신이라면 귀신일 것이다. 그것도 미련하게 이승에 붙박힌 망령.
"아 진짜! 엄마! 아무리 생각해도 귀신이 있는 것 같다니까! 내 방에!"
"없어."
"아 진짜라니까. 심지어 내가..."
내가 언니의 딸에게 이따금 집중에 집중을 더해 "연서야."하고 꾹꾹 눌러담아 말을 건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연서는 감이 좋았다. 그 감이라는 게 직감이나 융통성 같은 것은 아닐지라도, 그러니까, 내가 주위에 맴도는 것을 제법 잘 알아챈다. 나는 그녀를 닮아가는 연서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 재밌었다. 연서는 명백히 듣는다.
"나한테 자꾸 연서야...한단 말이야!"
내 목소리를 듣는다.
"처음엔 목소리가 엄마랑 비슷해서 엄만줄 알았는데. 아 진짜 개무서워!"
"....엄마랑 목소리가 비슷해서?"
"어! 완전 똑같아. 아씨이... 아진짜 무섭단 말이야."
연서는 정말 감이 좋다. 그녀와 닮은 건 눈과, 머리카락과, 이마 뿐만이 아닌가보다. 언니도 감이 좋았다. 다만 연서가 느끼는 감은 아니었다. 언니는 내 감정을 잘 알아차리는 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그녀를 사랑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툰 내게 그녀의 감은 이따금 우리가 헤어질 위기를 막곤 했다.
"야. 너 뭐 때문에 지금 삐친거야."
커피를 마시다 말고, 밥을 먹다 말고, 이틀동안 전화가 없다가도, 불쑥 집 앞에서.
언니는 아무말도 못하는 내게 그리 말했다. 나는 감정을 표현하는데 서툰걸 넘어서 그걸 '못'했다. 입을 열고 숨을 들이키는 순간, 그 숨들이 모두 입밖으로 빠져나오면서 눈물까지 빼내왔다. 울기 시작하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언니는 늘 내가 다 울 때까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다 울고나서 민망해하면 그 때서야 슬쩍 다가와서, 팔짱을 낀 채 눈을 살짝 피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이유도, 이유도, 이유도 모른채 그녀는 미안하다고 했고, 그 말을 듣는 즉시 나도 내가 울었던 이유가 모호해져서 "....저도요."하고 말했다.
"...미안해."
그리고 연서가 학교를 가면 이따금 그녀가 그 빈방에 벌컥 들어와 팔짱을 낀채 한 참 서성인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정말 막연히 허공을 향해, 팔짱을 끼고 눈을 슬쩍 피하며 그리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보는 허공은 침대 위였다.
나는 항상 그녀의 바로 옆에 있다. 내가 살아있을 때, 그녀의 연인이었을 때 처럼. 그래서 종종 둘이서 대화를 하다보면 사람들은 비슷한 목소리 때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일란성 쌍둥이 언니인 연수보다 훨씬 비슷한 그녀와 내 목소리. 그리고 언니의 "미안해."하는 목소리는 꼭 내가 하는 말 같아서 나는 좀 불편해진다.
이제 연서에게 장난은 그만 쳐야겠다.
"미안해."
아직 이 곳을 벗어나질 못해서...
언니는 말 없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팔짱을 낀다. 그리고 이내 다른 공간으로 돌아가는 사람처럼 홱- 돌아서서 연서의 방을 나선다. 언니의 눈가에 아름다운 눈주름이 보인다. 잘 웃지 않아서, 언니의 눈가에 눈꼬리처럼 예쁜 눈주름이 생길까 고민했었는데 그건 쓸모없는 걱정이었나보다. 예쁜사람은 역시 다르다.
나는 언니의 눈주름으로 손가락을 뻗어보려 한다.
닿을 턱이 없는데도.
6.
연서가 대학에 가고 언니는 갱년기를 맞는다. 언니의 남편이 멕시코로 외근을 시작한 해였다. 별거라는 개념이 흔하디 흔해진 시대에서 언니의 부부생활도 소원해진다. 연서는 아빠를 사랑하고, 엄마를 좋아했다. 언니는 연서를 사랑하고 남편을 좋아했다.
"엄마가 있잖아..."
연서는 이때쯤 내 존재를 아는 듯 혼자 있을 때마다 중얼거리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언니의 곁을 맴돌다가도 연서의 옆으로 바짝 붙어서야했다. 연서의 조곤거리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나는 슬프고 기쁘고 안타까웠지만, 다른 의미에서 비워진 마음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도 들었다. 그건 영혼의 배부름이었다. 제를 지내거나 명복을 빌어주는 이외에도 망령에게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은 이를 기억해 주는 것이었다. 연서는 나를 모를테지만, 나는 연서의 부름에 언제나 가까이 다가선다.
"요즘 이상해. 아, 자꾸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이해해. 네 엄마는 요즘 신체적인 변화를 겪고 있단 말이야. 그건 사춘기인 애들이 겪는 변화와 다를 바 없어.
"짜증을 내. 자꾸만. 아 진짜 늙은 노파같아. 꼭 치매 걸릴 것 같은..."
푹푹, 제 방의 귀가 축 늘어진 토끼 인형을 눌러대며 연서는 혼잣말을 한다. 나는 가만히 듣다가 또 한 소리 덧붙인다. "어른의 사춘기가 시작되는 거야. 네가 받아주지 않으면 안돼. 아빠도 멀리 계시잖니." 들릴리가 없지만 나는 그리 말해본다.
"옷도 유치해. 유치한 옷 진짜 싫어. 화장도 무슨 무당처럼..."
나는 연서가 푹푹 눌러대는 풀죽은 토끼의 속으로 들어가본다. 연서가 푹푹 찔러대는 목이, 배가, 등이 아프다. 가슴이, 가슴이 아프다.
"아빠 싫어하는 티도 그만 냈으면 좋겠어."
푹푹,
푹푹,
가슴이 아프다.
"나 때문에 이혼 안한다는 거 다 아는데..."
푹푹,
푹푹,
연서는 자꾸만 토끼의 가슴을 눌러댄다.
"아빠 애인있는 것도 뻔히 알면서."
차라리 갈라서지, 하는 연서의 말에 토끼는 가슴이 푸욱 들어간 채로 더 축 쳐진다.
7.
"한 살 차이인데요."
"그게 음... 커."
"커요?"
"어."
우리가 연인이었을 때, 언니는 종종 "어떻게 그걸 알아?"하는 말을 하곤 했다. 날 너무 어리게 보는 것 같아요. 우린 그래봤자 한 살, 차이인데. 몇 번이고 강조를 하면 언니는 그렇게 말한다. 그게 커. 굉장히 커. 그러니까 넌 언제나 어렸으면 좋겠어.
그 때쯤 언니는 고모가 되었다. 언니의 오빠. 터울이 좀 있는 언니의 친오빠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고 갓 태어난 아이를 언니는 나와 함께 보러갔다. 신생아실에서, 또 언니의 새언니의 품에서 정말 갓태어난 핏덩이같은 아이의 자라고 있는 머리카락을 언니는 손가락으로 슬쩍 만져보면서 말했다. "신기하네." 아직 뼈가 다 아물지 않아 머리가 말랑말랑하다는 간호사의 말에 언니는 다시금 슬쩍 아이의 정수리를 콕 만져보았다.
"만지지 마요."
"아프게 안 만졌어."
"에이..."
장난스럽게 아기의 머리를 콕콕 눌러대는 언니의 손목을 잡아 내 옆으로 끌었다. 언니는 빙긋 웃더니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병원 근처에는 온통 기사식당이거나 고기집 뿐이라서 우리는 같이 버스를 탔다. 반은 홀로 앉는 자리, 또 반은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 버스였다.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들이 텅텅 비어있었다. 언니와 나는 꽤 오랫동안 그 버스를 탄다.
그 버스는, 목적지가 어디든 될 수 있는 길고 긴 노선을 가진 버스였다. 우리는 목적지가 없었다. 밥을 먹는 것보다 더더 배가 부른 시간이었다. 아마 내가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버스가 꼭 카페같네요." 언니는 아이의 이야기를 했다. "너 아기 좋아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언니가 피식 웃는다. "어떡해 그럼? 나랑은 아기도 못낳고..."
아기도 못낳고...하는 언니의 말은 사실 모순이었다. 그건 언니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그 버스에서의 대화가 어쩌면 이리도 잊혀지지 않는지. 가장 행복했던 언니와의 순간이 있다면 나는 그 때를 꼽을 것만 같았다. 언니의 씁쓸한 표정. 내리깐 눈빛. 그리고 다시금 얼굴을 들어, 가만히 햇빛이 비취는 내 옆 얼굴을 보더니 슬쩍 자기쪽으로 당겨주며 "주름 생겨."하고 손을 잡아주던 때. 그 때 버스의 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 언니가 "파스타 먹을래?"하며 내 검지손가락을, 손목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던 순간. 그 순간.
"아이를 낳는 건 참 대단한 일인 것 같아."
"왜요?"
"무조건적인 애정을 줘야하잖아."
".....그게 왜 대단한 일이에요?"
"난 못해."
못할 것 같은데... 하고 언니가 진지하게 고민에 빠진다. 난감한 일을 맞딱뜨릴 때마다 언니가 짓는 표정을 보이며. 나는 사실 언니의 그 표정을 보는게 좋았다. 꼭 주인에게 잠시 혼나는 강아지 같은 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맞아요. 아이들은 자기를 싫어하거나 자기에 대한 애정이 식은 걸 무서우리만치 잘 알아채니까..."
"어떻게 그걸 알아?"
"네?"
또,
또 이 말이다. '어떻게 그걸 알아?'
어린 주제에 제법 어른의 흉내를 내는 꼬마를 보는 어른의 눈빛. 나는 그게 귀엽고 우스웠다.
"한 살 차이인데요."
우리, 말이에요. 한 살 밖에 차이 안나는데? 나는 은근쓸쩍 언니의 팔과 어깨의 경계에 슬쩍 머리를 기대며 그리 말한다.
"그게 음... 커."
"커요?"
"어."
덜컹, 거리며 버스가 선다. 급발진과 급정거가 잦은 버스였다, 언니가 최대한 어깨에 힘을 주어 상체를 고정시킨다. 나도 언니의 어깨에서 내 고개를 내려놓지 않는다. 내려놓기 싫다. 신호가 길고 긴 오거리다. 버스의 노래는 아주아주 오래 된 팝송으로 바뀐다. Green Green Grass Of Home, 이라는 말이 반복되는 노랫가락이다.
로맨틱하지도 슬프지도 않은 노래가 1절이 끝나고, 2절이 끝난다. 광고가 시작되고 다시금 DJ아저씨가 돌아왔지만 방송사고인지 다시금 Green Green Grass Of Home, 이라는 노래가 나온다. 그 사이에 버스는 오거리의 좌회전 신호를 바로 앞에 두고 또 멈춰선다. 다시금 긴긴 도로위의 정체다.
내 관자놀이 위로 따땃한 무게감이 든 건 그 때였다.
언니의 어깨 위에 내 고개가, 내 고개위에 언니의 머리가 겹쳐진다.
"넌 점점 커가고, 난 점점 어려지는 것 같아."
실은,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게 음... 커."하던 언니의 속마음이 Green Green Grass Of Home에 섞여 들린다.
나쁜 마음이 든다. 이 순간 모든 교통신호들이 고장이 났으면. 민방위 훈련이라도 터졌으면. 그래서 이 시간이 조금 더, 조금 더 길었으면...
언니가 만지작 거리던 내 손은 이제 언니의 손에 깍지가 잡혀져있다.
8.
나는 가끔 당신의 그 시간 속 나를 갖고싶다.
그 때의 그녀가, 언니가, 가끔 정말 사무치도록 보고싶어서
나는 내가 과연 망령인지조차 헷갈린다.
9.
언니가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신도시로 갔다. 신도시는 특유의 어수선함과 설렘과 정돈되지 않은 한적함이 있었다. 언니는 그 때쯤 약을 가지고 다니기 시작한다. 하나는 갑상선 호르몬 조절제, 하나는 천식 스프레이, 또 하나는 항우울제. 연서가 2년 동안 중국으로 유학을 떠난지 2개월 만이다. 언니의 남편은 귀국했고, 언니가 원래 살던 곳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언니는 미련이 없었다. 오히려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사랑하지 않았음을 들켜버린 언니의 마음은 누구보다 건조하다. 언니는 표정조차 건조해져간다. 연서는 아빠와 함께 살기로 한다. 이 것만큼은 언니를 조금 슬프게 하는 일이긴 했다.
동네에 자리잡은 점포들이 하나 둘 씩 뿌리를 내릴 때 쯤, 언니는 의사가 권한 산책시간을 지키기 위해 나왔다가 동물가게 앞에서 멈춰선다. 아기도 동물도 심지어 꽃이나 나무에게도 관심이 없던 언니가 그 때쯤 강아지나 고양이들에 눈을 빼앗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언니를 보는게 기쁘지만 않았다.
"연서야..."
언니는 강아지에게 또 내 이름을 붙인다. 아니, 강아지의 이름은 세리다. 언니가 강아지를 샀다는 말을 듣자마자 연서가 전화가 왔다. "엄마, 걔 이름은 붙여줫어?", "아니.", "내가 지어줄래.", "응. 뭘로?", "세리. 세리로 하자." 언니는 이름의 유래도 이유도 묻지 않고 그리하겠다 했다. 그러나 강아지는 한 번도 언니의 입에서 세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연서의 세리는 제가 공부하는 보고서의 연구기관의 앞 글자를 딴 것이었는데도, 언니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리하겠다 했다. 그리고 부를 때는 꼭 연서야...했다.
내가 아닌,
연서가 아닌,
또 다른 연서가 언니의 유일한 친구가 된다. 남편이, 딸이, 그리고...
"연서야... 연서야..."
그리고 가끔은 내가 되는 것 같은 그런 착각을 하게끔 하는 존재가 된다. 강아지 연서는 언니의 옆에 같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바라본다. 초롱초롱한 눈으로 꼬리를 흔들고 앞발을 핥다가 내 앞에서 턱, 앉기도 하고 귀를 쫑긋 세우기도 한다. 언니는 조금 활기를 찾는다. 항우울제는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억지로 나오던 산책길에 한 명의 연서와, 한 마리의 연서가 더해졌을 뿐이다.
"연서야..."
나도 그리 말해본다. 강아지 연서는 킁킁, 코를 훌쩍인다.
"엄마를 부탁해? 응?"
그때쯤 나는 곪아가는 망령이 되고 있었다. 내 눈엔 더 없이 아름답게 늙어가는 언니를 더이상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나 같은 망령 때문에 언니가 아픈건 아닐까 하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저승으로 가는 길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당장 언니를 벗어나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참 우습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습다. 이미 죽어버린 내게 또 다른 죽음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그런데도.
10.
연서가 낳은 아이는 언니를 큰할머니라고 부른다. 그리고 언니의 남편과 함께 사는 여자를 작은할머니라고 부른다. 언니는 연서가 낳은 아이의 머리를 가만히 콕콕 눌러본다. 예전에 그 때처럼. 그리고 수고했다고 연서를 꼭 잡는다. 연서의 손을 잡은 언니의 손마디, 손가락의 한 가운데에 세월의 나이테들이 가득하다. 언니는 손톱도 꾸미질 않는다. 수수해진 언니는 다만 머리만은 늘 길게 하고 있다.
"엄마. 눈 아파?"
산후조리원에서 연서는 언니의 눈을 문득 보다가 혼탁한 눈동자를 보고 그리 묻는다. 부쩍 무언가를 잡지 못하고 놓쳐버리거나 깨뜨려버리는 언니의 일과를 연서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었다. 언니는 가만히 고개를 젓는다.
"늙어서 그래."
녹내장, 백내장, 노안, 이런 말들을 쏟아내는 연서를 보며 언니는 가만히 웃는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연서는 새삼 많이 늙어있는 제 엄마를 보며 조금 가슴이 아파온다. 연서가 비로소 언니의 옆을 자주 찾게 될 거라는 느낌에 나는 조금 기뻐진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그 시간이 너무 길었음이 야속하기도 하다.
"별로... 보고싶은 것도 없단다."
언니는 너무나 태연하게 그리 말한다. 연서는 너무나 태연하게 그리 말하는 제 엄마를 보며 한동안 같이 살기로 결심한다.
11.
새벽이 꼭 밤인 것 같다.
강아지 세리가, 연서가, 나를 깨운다. 나는 잠을 자지 않는 존재인데도 나를 깨우려한다. 너무나 가만히 있어서 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언니의 집, 씽크대와 냉장고가 이어지는 그 구석에서 한동안 가만히, 아주 얌전한 진동분자처럼 머물러 있었다. 한 달, 두 달, 그리 머물러 있었다.
언니는 이따금 설거지를 하다가 고무장갑을 벗고는 싱크대 물에 그대로 세수를 하곤 했다. 벅벅 얼굴을 마구마구 문질러대며, 눈을 문질러대며 씼었다. 그리고 스스스 주저앉는다.
새벽이 꼭 밤인 것만 같다, 연서야.
쫄쫄 언니의 주위를 서성이는 강아지에게, 언니는 담담히 그리 말한다.
12.
언니의 남편이 죽었다. 그러나 그는 이승에 머무르는 망령이 되지 않아서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해야할까, 나는 누구라고 해야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나는 조금 허무해진다. 언니는 화장터에서 대기를 하다가 까무룩 잠이 든다. 연서의 남편이 연서에게 속삭인다.
"자기야, 큰장모님도 나중에 장인어른 옆에?"
연서는 남편의 팔을 세게 후려친다.
"엄마 큰할머니 머리가 이상해."
연서는 아들의 팔도 툭 친다.
언니의 머리가 빠지기 시작한다. 긴 머리만을 고수해왔던 언니가 그 때즘 짧게 머리를 자르고 더이상 흑발로 염색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귀 뒤쪽으로 빠지기 시작하는 머리는 오랫동안 복용한 호르몬제의 영향이라고 했다. 언니는 화장터에서는 가발을 쓰지 않았다.
"엄마 괜찮아?"
추모공원에 안치된 아빠의 화장묘를 보며 연서는 계속 말이 없는 언니에게 마치 어린아이에게 질문하듯 묻는다. 언니도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그 입꼬리가 밑으로 추욱 쳐져있다. 언니의 입가에 검버섯이 조금 피어있다. 연서는 언니의 볼을 쓰다듬으며, "그래, 그래."하고 말한다. 연서의 두 눈은 부어있다. 언니는 연서의 슬픔이 이순간 가장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게도 전해져온다.
"너는."
언니가 연서에게 그리 묻는다.
"나도 괜찮아."
연서의 말에 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이내 픽 웃는다.
"그럴 수도 있구나, 얘."
"응?"
"아니... 아니야."
괜찮을 수도 있구나.
그리 말한 언니는 이틀 후에 공교롭게도 강아지 연서의 죽음을 맞딱뜨린다. 자는 듯 가버린 강아지는 새벽에 나를 깨우고는 사라진다. 내 눈에만 보이는 개의 영혼은 내가 본 어떤 영혼보다 맑고 맑고 맑은 빛이었다. 동그랗고 작고 빛나는 그 영혼이 한참동안 나와 잠자는 언니의 주위를 맴돌다가 사라진다.
언니는 비로소 울음을 터뜨린다. 그리고 다시금 싱크대로 가서 눈을 벅벅 씻으며 울어댄다.
13.
언니에게 간병인이 붙었다. 이 때 언니는 거의 일어나지 못한다. 가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 언니는 절대로 사람을 보려고 하지 않았다. 괴팍한 노인네, 라는 말을 듣기 시작한다. 언니는 가만히 입을 다물지 않고 앙다물기 시작한다. 입술만은 힘이 있어서, 자꾸만 치부를 보여주지 않으려는 '환자'가 된다. 그건 간병인과 병원의 입장에선 '나쁜'환자였다.
나의 형체가 점점 엷어지고 있었다. 이때쯤 나는 언니의 손등으로 들어가는 포도당처럼 묽어지고 있었다. 영혼의 농도가 있다면 나는 이제 공기보다 조금 더 진할 뿐인 하릴없는 망령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내겐 아무런 힘도 없었다. 언니의 병을 조금 더 늦출 수도, 말을 걸 수도, 심지어 언니의 옆을 가만히 지키는 것도 힘든 수준이었다.
궤종시계가 흔하지 않은 시대였다. 언니가 10초에 반걸음을 걸어 팽귄처럼 주춤주춤, 그 말라 비틀어진 몸에 환자복을 걸치고 병원의 로비로 나오면 궤종시계가 늘 새벽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언니는 가만히 그 시계를 한참본다.
아니 그 시계의 유리에 비췬 자신의 모습을 한참 본다.
궤종시계가 새벽 네 시 구 분을 가리키면, 내가 지상에 머무른지 딱 60년이 된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낸다
잘 있어요, 하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언니는 이미 듣지 않는다. 이미 들을 수 없다. 언니는 이젠 잘 보이지도, 들리지도, 말하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언니의 옆에 최대한 바짝 다가선다.
"예뻐, 언니야."
아직 예뻐.
아직 너무 예뻐, 언니야.
언니가 아주 오랜만에 웃는다. 궤종시계에 비췬 내 얼굴과 똑같다. 우리의 목소리만큼이나 닮은 입매가, 눈매가 보인다.
네 시 구 분.
새벽.
안녕.
14.
"최연서."
한 줌의 재가 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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