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록 제1권

第一章. 춘풍 도령 (15)

*

 

“나랑 오 가吳 家에 같이 갈 후배 구함, 단 한 명!”

화방 문을 열고 들어오던 지성은 시선의 방향이 분명한 류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다 모르는 척 주위를 둘러보았다.

“선배님, 혹시 제가 본가에 다녀온 사이에 제 후배가 생겼습니까?”

“그럴 리가 있나! 내 특별히 자네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네.”

“기회요? 무슨 기회 말씀이십니까? 설마, 그 오덕구의 집에서 의뢰를 핑계로 그 집의 온갖 재보를 원하지 않게 감상해야 하는 기회라면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딱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나랑 같이 가면 안 되겠는가?”

자신을 바라보는 선배의 간절한 눈망울에 지성은 웃으며 뒤로 걸어갔다.

“나라면 거기서 더 가지 않을 걸세.”

“겁주셔도 소용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선배가 후배를 물귀신처럼…….”

지성은 더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제 뒤통수로 단단한 무언가가 닿은 까닭이다. 어쩐지 뒷덜미가 서늘해진 그는 뒤로 돌았다. 역시나, 예의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려운이었다. 지성은 입꼬리를 씩 올려 웃으며 다시 돌아 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가 화구들을 챙겨 한 아름 들고 그의 팔을 붙들었다.

“아하하, 선배님 가시죠.”

“어딜? 방금까진 나더러 물귀신이라 하지 않았던가?”

“아유, 선배님께서 잘못 들으신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나 그림 솜씨가 뛰어나고, 돈도 많고, 얼굴도 준수하고, 심신이 미약한 물귀신이 어디 있답니까?”

아하하하! 그의 능청스러운 말에 기분이 좋은 듯 미소 짓던 류가 뒷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도령, 뭔가 이상한데? 칭찬 맞는가? 지성은 그러나 제 선배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데리고 도망치듯 화방을 빠져나갔다. 려운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싱거운 놈.”

지성은 높은 돌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후광이 비치는 듯 눈이 부셨다. 의뢰인의 이름은 오덕구. 오 씨 집안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그는 양반은 아니었으나 대대로 장사를 하여 부를 축적한 덕분에 한성에서 손에 꼽는 거상이었다.

물론 축적한 돈의 구 할은 그의 조모인 김갑순의 덕택이다. 역관인 아버지를 따라 정晸 나라와 서역을 오가는 동안, 다양한 지위의 사람들을 만나 쌓인 인맥과 안목, 경험들이 장사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만약 오 씨 집안의 사람들이 갑순처럼 능력이 좋았더라면 지금쯤 그 돈의 세 배는 굴렸을 터이지만, 그의 두 아들과 손자에게 그 정도 능력은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라. 그러나 지금은 그것과는 별개의 일로 지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는가?”

“정녕 몰라 물으시는 것은 아니지요?”

“어쩌겠는가? 이미 받은 의뢰를 무를 수도 없고. 그리고 오덕구가 피곤하게 굴기는 하지만 돈은 후하게 주잖아. 별다른 이유 없이 의뢰를 거절하면 화방 평판에도 좋지 않고.”

돈이 된다고 그 후에도 엉터리 소학 필사 의뢰를 받았던 것이 누구였더라? 은근하게 눈썹을 씰룩이는 류의 모습에 지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생각해보면 그렇잖습니까? 예인들은 신선이 아닙니다. 고상하게 붓질 몇 번 한다고 서화가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이만큼의 실력을 갖출 때까지 피나는 노력을 했는데요. 우리 화방이야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지는 않지만 다른 화방들과 시세는 맞춰주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더 준다 하는 것을 마다할 이유도 없고요.”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들어가시죠.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덕구의 집 계단을 오르는 지성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돈은 돈이고, 싫은 것은 싫은 것이지. 제 후배의 모습에 류는 그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대문이 열리고 하인을 따라가니 정원의 의자에 의뢰인인 덕구가 있었다. 그는 차를 음미하는 척 온갖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지성이 인기척을 내자 그는 그제야 지성과 류를 바라보았다.

“오셨군요.”

모기처럼 가는 목소리에 쭉 째진 눈. 지성은 물론 사람을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한 버릇이기는 하나, 언제 보아도 그의 얼굴은 참된 간신배의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류와 지성이 자리에 앉자 덕구는 찻잔을 채웠다.

“자, 차 한잔하세요. 제 하인이 아침마다 꽃잎에 맺힌 이슬을 거두게 해서, 그 물로 끓인 차라 맛이 아주 좋습니다.”

그의 말에 류는 웃음을 참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의 하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주전자에 담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리라. 덕구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자 지성은 류의 팔을 조금 세게 꼬집었다.

“아!”

“왜 그러십니까?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지요?”

“아아……, 아닐세. 정원이 참 아름다워 감탄한 것이네.”

“그렇죠? 저의 집이지만 저도 참 마음에 듭니다.”

“그래, 오늘은 어떤 그림을 원하는가?”

“대단한 것은 아니고요, 먹으로 심심한 듯하면서 화려하게 이 정원 풍경을 화폭에 담아주실 수 있을지요? 이 연못의 연꽃이 두드러지게 말입니다.”

심심한 듯 화려하게? 게다가 이 계절에 피지도 않은 연꽃을 화폭에 담으라고? 지성은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지 짜증스러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차마 값비싼 호구, 아니 의뢰인에게 욕지거리를 하지는 못하고 싱긋 웃으며 류를 바라보았다. 류는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평상 위로 올라 화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선물할 그림이니 예쁘게 그려주십시오.”

“누구에게 선물하려고 하는가?”

그의 물음에 덕구는 갑자기 신혼 첫날밤의 수줍은 새신랑처럼 몸을 비비 꼬기 시작했다. 지성은 차마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이 제 두 눈을 비볐다. 마침내 하인마저 자리를 피하자 덕구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고는 목덜미를 긁적였다.

“홍화정의 연화입니다.”

“연화?”

지성이 중얼거리자 덕구는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윤 도령, 모르십니까? 도령께서 홍화정에서 구한 그 기생 말입니다.”

지성은 그제야 생각이 난 듯 아, 하고는 연못을 바라보았다. 과연, 그의 기명이 연화蓮花라 연꽃을 그려 선물하려는 모양이군.

“도령이 소문에서처럼 연화와 교분이 깊어 보이지 않아 다행입니다. 만약 연화와 도령의 정이 두터운 사이라면 그토록 고고한 여인이 제게 눈길이나 주겠습니까?”

그럼 그 연화라는 기생도 이런 소문에 엮여 피해를 보고 있단 말인가? 지성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오는 것 같았다.

 

*

 

단정한 흰 소매가 눈이 내리듯 사뿐히 가야금 열두 현 위로 내려온다. 연화의 세 손가락의 끝은 투박하게 굳은살이 박여있다. 수천수만의 연습과 연주를 통해 새겨진 흔적. 그것은 그가 살아온 기생으로 사는 삶 그 자체이기도 했다.

그의 연주는 듣는 이를 이끌고 전혀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뱉는 그의 모습은 마치 천상의 존재를 보는 듯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현을 튕기면 바람이 불고 현을 누르면 파도가 넘실댔다. 세상의 그 어느 바늘 끝도 그의 연주보다 섬세하지는 못하고 굽이치는 강물도 그의 연주보다 역동적이지는 못하리라. 곡은 곧 절정으로 치달았다. 숨이 가쁘도록 누르고 당기고 튕기던 그의 손이, 불에 덴 듯 일순 멈춘다. 제 앞의 마당에 풀썩 쓰러지는 것은 다름 아닌 소소였다.

“소, 소소야!”

마루 청소를 하고 있던 언년이가 화들짝 놀라 걸레마저 내팽개치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소소의 옷은 흙먼지투성이였고, 얼굴이며 손에 상처가 가득하니 매라도 맞은 모양새였다. 언년이의 목소리를 들은 기생과 일꾼들이 마당으로 모여들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소소야. 어쩌다 이렇게 다쳤어?”

연화도 가야금을 내려놓고 소소에게로 다가가 앉았다.

“그게…….”

“관아에 갔었어?”

“아씨…….”

“묻잖아, 관아에 갔었냐고!”

연화가 소리치자 소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달라고, 조사해달라고 말했어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들어보려고도 안 하잖아요.”

“그래서, 가서 그 관병들에게 억지라도 부렸어?”

그의 말에 소소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연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분노가 들어찼다.

“억지요? 억지는 그 사람들이 쓰고 있는 게 억지죠! 사람이 없어졌어요. 보름, 보름이나 지났다고요. 그런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요?”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잖아!”

“아씨가 뭘 하실 수 있는데요!”

소소가 소리치자 연화가 그를 때릴 듯이 손을 높이 쳐들었다. 단 한 번도 손찌검을 한 일이 없던 연화였기에, 일꾼들은 놀라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를 보던 소소는 목이 메는 듯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에 사라진 것이 그 치들이 천하다고 생각하는 기생이 아니라 대갓집 자제였다면, 아마 관아에 신고를 할 필요도 없이 금방 찾을 거예요. 제 말이 틀려요? 관아 문 앞을 지키는 별것도 아닌 보초들이, 어떤 결정권도 없는 말단에 말단 관병들이 기생은 찾을 필요가 없다는 판결을 내리고 상관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는다구요.”

“…….”

그 누구도 입을 열 수도 대답을 할 수도 없었다. 맞는 말이었기에 더더욱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분하고 억울하잖아요. 때리고 싶으면 때리라고 하세요. 저는 얼마든지 맞아줄 수 있어요. 몇 번이고 맞아줄 수 있어요. 뺨을 치든 발로 밟든 멍석말이를 하든 설기 언니가 돌아오기만 하면, 전 상관없어요.”

소소의 눈에서 기어코 말간 눈물이 흘러내렸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연화가 팔을 내리고 일어났다.

“네 말이 맞아. 그래, 저들에게 우리는 그저 천한 기생이고 너희는 천한 노비이지, 같은 인간이 아니야. 나도 분해. 화나. 억울해. 근데 소소야.”

연화의 부름에 소소가 붉게 변한 눈망울로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연화의 입술에 살짝 피가 맺혀있었다.

“이런 감정도 살아 있어야 느낄 수 있어. 죽어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연화는 울지 않고 곧은 시선으로 제 앞의 아이를 바라보았으나, 소소는 그가 꼭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너희는 소소를 데려가서 씻기고 상처를 치료하는 것을 도와줘.”

“하지만 아씨, 그럼 설기 언니는 어째요?”

언년의 말에 연화가 저를 보는 이들과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었다.

“말했잖아. 내가 찾을 거야.”

 

*

 

한편, 탁자에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던 지성은 갑자기 분 서늘한 바람에 눈을 떴다.

“깼는가?”

제 앞에서 자신과 똑같이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고 있던 류가 다정히 말했다. 하늘엔 어느새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류의 그림은 진작에 완성된 모양이었다. 덕구의 말을 들을 땐 무슨 헛소리인가 했는데, 그림을 보니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림의 주제는 연꽃이었으나 은근하게 그려 넣은 아름답고 화려한 정원. 티를 낸 듯 내지 않은 듯 그의 집안의 재력을 과시하는 것이 이번 의뢰의 목적임이 훤히 눈에 보였다.

“호구, 아니 의뢰인은 어디 갔습니까?”

“식사라도 대접하겠다고 하인들에게 말하러 갔네.”

“시, 식사요?”

지성이 질겁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식사라니. 류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늘어놓은 자기 자랑만으로도 이미 질리고 질린 판인데, 같이 밥까지 먹어야 한다니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안 되겠습니다. 전 이만 돌아갈 테니 선배님 실컷 드시고 오십시오.”

“윤 도령, 정녕 나만 내버려 두고 갈 참인가?”

“열심히 일하셨으니 허기가 지셨을 텐데, 드시고 오세요. 전 먼저 갑니다!”

지성이 웃으며 내빼자 류가 다급하게 그를 붙잡으려 일어났다. 그러나 계속 앉아있었던 탓인지 다리가 저려 움직일 수 없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덕구의 그림자를 보고는 절망스러운 표정을 하곤 지성에게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제발 나도 데려가…….”

류를 등지고 나온 지성은 시전으로 향했다. 저잣거리에 가까워질수록 등을 밝힌 집이 늘었으나 아직은 민가가 많아 골목이 어두웠다.

“뭐, 술이나 사갈까? 화방에 있던 술이란 술은 다 마셨으니.”

콧노래를 부르며 한껏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던 지성은 어딘가 묘한 분위기에 멈춰 섰다. 근처 골목, 분명하게 인기척이 느껴지는데 이상하게도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성은 화구 통 아래 숨겨두었던 단검을 꺼내 들었다. 별일 아니라면 그저 가던 길 가면 되는 일이지만 그의 나쁜 예감은 항상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는 발소리를 숨기고 벽 뒤로 몸을 붙였다.

“설기를 납치한 것이 너희들이냐?”

‘납치? 한데 이 목소리, 어디선가…….’

“설기? 야, 저 계집이 누굴 말하는 거냐? 주제도 모르고 땍땍거리던 것? 아니면 가련하게 떨던 것?”

“아아, 후자.”

지성은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위협받고 있는 이가 하나, 금수가 둘이라.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 아이들은 어디 있느냐!”

“뭐 그리 급해? 너도 그들 곁으로 보내줄 터이니 걱정 마라.”

저벅저벅, 다가오는 두 명의 걸음 뒤로 끄는 듯한 발걸음 소리가 하나. 더는 몸을 숨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지성은 그들의 앞에 불쑥 튀어 나갔다.

“웬 놈이냐!”

“선비님!”

“연화 낭자?”

그의 등장에 하얗게 질려있던 이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비쳤다. 그러나 그도 잠시, 곧 연화는 지성의 등을 떠밀었다.

“도망치세요, 선비님!”

“뭐냐, 대단한 영웅처럼 등장하더니. 널 구해줄 낭군님은 기생오라비냐? 딱 봐도 백면서생인 듯한데, 지금이라도 사죄하면 목숨은 살려주마.”

낄낄거리는 두 복면남의 말에 지성은 연화를 제 뒤로 감췄다.

“이야, 보기 좋네. 이 상황에 사랑놀음이라도 할 참이냐? 입이라도 맞추게 잠깐 자리 비켜주랴?”

지성은 제 팔뚝을 붙드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두려움에 잘게 떨리는 모습에 지성은 고개를 돌려 미소 짓고는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낭자.”

“계집 앞이라고 허세는!”

“틀렸다.”

“뭐?”

“허세라 하는 단어의 뜻은 실속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그 말은 내가 아니라 응당 너희들에게 쓰는 것이 옳지.”

그 말에 복면남 둘이 발끈하여 칼을 빼 들었다. 연화를 뒤로 물러나게 한 지성은 여유롭게 웃으며 손짓했다.

“덤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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