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一章. 춘풍 도령 (14)
한 잔 두 잔 주고받다 보니 상 아래에 쌓인 빈 병이 제법 쌓였다. 아직 취한 기색도 없는 지성과 달리 류는 양쪽 볼과 귀가 붉은 것이 취기가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류는 지성을 보며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도령 대단하네. 정말 대단해. 어찌 그리 취하지를 않는가아?”
“선배님은 인제 그만 들어가 주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많이 취하셨습니다.”
“응? 아니야아아! 이렇게에 좋은 날, 조오은 사람들과 함께 있느은데에, 내 어찌! 벌써어 잠자리에 들 수 있겠나아?”
으히힛. 류가 말을 늘이며 수줍게 웃는 모습에 지성은 어쩐지 낯이 간지러워져서 잔을 가득 채워 술을 벌컥 들이켰다.
“매번 술 술, 노래를 부르시더니. 이렇게 주량이 약하시면서 고집은 어찌 부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고오집? 아하하! 고집으은 이 나라에 우―리 윤 도령을 따라올 사람이 없지이! 그렇지 않습니까아, 형니임!”
“자네 말이 맞네. 우리 지성이가 고집불통인 것은 내가 보증하지.”
지훈이 호탕하게 웃으며 류의 잔에 술을 따라주자 류가 해맑게 웃으며 지훈을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두 윤 씨 형제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류, 있냐?”
류의 방 앞, 익숙하고 불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을 구원해주러 온 것은 —물론 그는 그런 의도가 전혀 아니었겠으나 — 려운이었다. 방문이 열리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고 말했다.
“너 술 취했냐?”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류는 이제 질색하며 뒤로 물러나려는 려운의 허리를 붙들었다. 평소라면 류 정도는 가볍게 떼어 놓았을 려운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술에 취한 류는 제 벗의 단단하고 안정적인 허리를 놓아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자네 왔는가아, 나의 소오중한 벗.”
“이 자식, 도대체 이런 힘은 어디서 나는 거야?”
지성은 언젠가 들었던 려운의 말을 떠올렸다.
‘아무나 덥석덥석 안고 보는 그 버릇, 좀 고치지?’
그때 말한 것이 술주정이었나 보구나. 지성은 혼자 피식 웃고는 혼자 보기 아까운 광경을 눈에 담으며 잔을 기울였다.
“쥐방울 너는 뭘 또 실실 처웃고 있어? 와서 이 자식 좀 떼어내 봐!”
“려운. 사람이 말입니다. 부탁이라는 걸 하려면 정중히 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려운?”
지훈의 물음에 지성이 아차 하여 제 형님의 눈치를 보았다. 지성은 일단 려운에게서 류부터 떼어놓고 보자 싶어 류의 팔을 붙들었다.
“선배님, 정신 차리십시오. 술 좀 마셨다고 이렇게 사람이 변하는 게 말이 됩니까? 평소에나 이렇게 힘 좀 써 보시지—!”
그의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인지, 류가 휙 고개를 돌리고는 나른한 눈으로 지성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선배님?”
“사랑하는 나의 후배니임—!”
류가 려운을 결박하던 팔을 풀고 자연스럽게 제 후배 쪽으로 몸을 틀었다. 지성은 당황하여 어떤 대꾸도 반응도 하지 못했다. 마침내 류가 지성을 품에 안으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류의 몸에 힘이 풀리며 모래성이 무너져 내리는 듯 쓰러졌다. 지성의 볼에 달곰한 매실주 향이 훅 끼쳤다. 지훈이 류를 부축하고 눈짓하자 지성이 허둥지둥 이불을 깔아 그를 눕혔다.
“지금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걱정 말게. 류 공자가 편히 자게 해주려는 것뿐이니.”
널브러져 입맛을 다시는 류를 본 려운이 한숨을 내쉬었다.
“반갑네. 이 녀석의 형인 윤지훈이라고 하네.”
“려운이다.”
무례한 려운의 태도에도 지훈은 딱히 표정의 변화는 없었으나 지성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담지 않은 듯한 건조한 표정. 지성은 단 한 번, 지훈이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을 본 기억이 있었다. 어렸을 때, 몸이 약하던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들을 묵사발로 만들어 놓았을 때도 저런 표정을 짓지 않으셨던가. 지성은 소름이 돋아 제 팔을 쓸어내렸다.
“려운, 오늘 아니 들어오실 것처럼 구시더니, 어찌 들어오셨습니까?”
지성이 어떻게든 말을 돌려보려 살갑게 말을 붙이자 려운이 퉁명스레 답했다.
“스승님께서 돌아오셨단다.”
“스승님께서요? 벌써요?”
뜻밖의 소식에 지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당과를 입에 문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는 그의 모습에 지훈은 흐뭇한 듯 미소를 지었다.
“형제 사이가 돈독하시군.”
“자네는 그게 불만인가?”
“불만은 아니고, 그냥 내가 낯간지러운 것은 못 참는 성격이라.”
려운은 문에 기대고 서서 턱을 들며 말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지훈이 물었다.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글쎄, 나는 그쪽 얼굴을 오늘 처음 보는 것 같은데.”
툭툭 내뱉는 말들에 지성은 둘 사이를 번갈아 보았다.
‘안 되겠다. 얼른 려운을 내보내든지 해야지.’
“소식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서 쉬십시오. 정리는 제가—”
“그러지 말고 자네도 와서 한잔하지. 류 공자가 신경 써서 음식을 많이 준비했는데 아깝잖은가.”
“형님, 아닙니다. 형님도 많이 마시셨으니 인제 그만 돌아가시죠? 내일도 아침 일찍 나가셔야 하잖아요.”
“출출했는데 마침 잘 됐군.”
“려운? 아니 도대체…….”
지성은 속으로, 제 형님은 그렇다 치고 어제까지만 해도 시큰둥하던 려운이 왜 이제 와 이 자리에 합석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의 모든 술자리 중 오늘 이 자리가 제일 불편한 자리일 것이라고, 지성은 생각했다.
“아우에게서 자네 얘기 많이 들었네. 내 아우에게 아주 친절히, 상냥하게 대해 준다지?”
“내가 그랬나? 그럴 리가.”
“……, 자네는 참 솔직한 사람이군.”
“칭찬으로 듣지.”
두 사람 사이에 묘하게 불꽃이 튀자 지성이 과장되게 웃으며 잔에 술을 채웠다.
“아하하, 하하! 누가 보면 두 분이 싸우는 줄 알 겁니다. 자, 쭉 들이키십쇼. 려운도요.”
이것이 시작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잔이 비는 족족 술을 따른 지성은 한 다경도 지나지 않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다. 한식경째,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의 눈만 노려보며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음식이 아까우니 같이 마시자던 형님은 음식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미 초저녁부터 류와 함께 술을 마셨던지라 술은 금방 동이 났다. 술도 없겠다, 이제 끝났겠지 싶어 지성이 웃으며 상을 치우려는데 려운이 그를 힐끗 노려보며 말했다.
“어딜 치워?”
“술이 없는데 인제 그만하시죠?”
“술이 없긴 왜 없어? 내 방에 가서 가져와. 궤짝으로 몇 개나 있으니.”
지성이 황당해서 헛웃음을 짓고는 입을 열었다.
“려운은 그럼 계속 마시세요. 우리 형님은 이제 그만하실 거니까.”
“누가 그만한다던?”
“예?”
“가져와. 네 형님 아직 더 마실 수 있다.”
저 올곧은 눈빛. 이 무슨 억하심정인가. 형님의 말처럼 초면이 아닌가? 지성이 알기로는 분명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사이였으나 왠지 제 형님의 눈빛은 일생일대의 원수라도 만난 듯이 불타고 있었다. 지성은 당장 밖으로 뛰쳐나가 한성 땅이 울리도록 왜 이러느냐고 쩌렁쩌렁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꾹 눌러 참고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방을 나왔다. 투덜거리며 려운의 방문을 여니, 삭막 그 자체라. 방에 있는 것이라고는 류가 준 이불 한 쌍과 술병을 담아둔 궤짝 하나가 전부였다. 하긴, 화방에서 자는 꼴을 본 적이 없으니, 짐이 있을 리도 만무했다.
“더럽게 무겁네. 무슨 술을 궤짝으로 가져오래? 오늘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지성은 마루에 궤짝을 올려놓고 발로 툭 찼다가 고통스러움에 속으로 신음을 삼키고는 질질 끌어 류의 방문 앞까지 가져갔다.
무슨 말이라도 하라고, 이럴 거면 차라리 주먹다짐이라도 하라고 외치고 싶은 지성이었다. 지성은 많은 생각을 했다. 형님인 지훈은 자신이 려운에 관해 이야기한 바가 있으니, 그것 때문에 화가 나신 모양이다, 려운은 줄곧 지성 자신을 싫어해 왔으니 형님도 보기 싫은 모양이다, 하고 어떻게든 두 사람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반 시진 째입니다. 반 시진! 술시도 넘었단 말입니다! 그만 좀 하십시오!”
지성의 말에 지훈이 려운에게 말했다.
“그래. 무리하지 말고 인제 그만하지?”
“그쪽이야말로 그만하지. 딱 봐도 비리비리한 게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군.”
맙소사, 말 한마디 않고 술을 마신 것이 주량 싸움이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두 사람이 이렇게나 자존심이 세고 유치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된 지성이었다.
“미안하지만, 나는 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라 말일세.”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두 분……, 언제까지 마실 요량이십니까?”
“내가 이길 때까지.”
“이하동문.”
이 정도면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차라리 아주 잘 맞는 사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사실 이제 려운과 지훈 두 사람 모두 한계에 다다랐다. 눈이 감기고 몸을 가누기 힘든 지경이었으나 잔을 비우고 나서는 상대를 찢을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이 유치찬란한 대결의 사이에서 답답한 지성은 술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라리 지성은 자신이 먼저 술에 취해 뻗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원래도 주량이 많던 지성이요, 술이 잘 받는 날인지 마셔도 취하질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더러 고집이 세네, 어쩌네 하시더니, 이 화방에 들어앉는 사람들은 전부 고집불통인 사람들만 모였나.”
구시렁거리던 지성은 상 위의 음식이 두 사람인 양 잘근잘근 씹으며 노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고대하던 순간, 먼저 쓰러진 것은 다행스럽게도 려운이었다. 지성은 바닥에 뻗은 려운을 질질 끌어다 류의 옆에 눕혔다.
“내가 다시는 이 사람들이랑 술 마시나 봐라.”
씩씩거리던 지성은 잔에 남은 술을 마저 들이켰다. 지훈은 그사이 벽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형님, 일어나 보십시오. 저는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두 분 초면 아닙니까?”
“글쎄, 분명 어디선가 본 듯하단 말이야. 어디선가…….”
후우……. 같은 말을 반복하며 중얼거리는 형님을 보던 지성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어디서 봤더라, 처음인 듯 처음 아닌 처음 같은…….”
“거, 처음 처음 하지 마시고 이거나 쭉 들이키세요, 형님. 꿀물이에요.”
“고맙다, 지성아.”
“도대체 술을 어찌 이리 이기지도 못하실 만큼 많이 마신 겁니까? 쓸데없는 곳에서 오기를 부리시고, 형님답지 않습니다.”
그러냐? 지성이 타 준 꿀물을 한 번에 들이켠 지훈은 겨우겨우 눈을 뜨고는 온화하게 웃었다. 이제야 제가 아는 형님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다행이다.”
“예?”
“류 공자 말이다. 사실 소문으로 들었을 때는 그저 그런 한량일까 걱정했는데,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다. 려운 저놈은 모르겠지만.”
“려운도 성격이 좀 괴팍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리고 제가 누굽니까? 윤 씨 집안 막내아들 윤지성입니다. 상대가 누구든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 않습니다, 저.”
“그렇지. 이래야 내 아우지.”
지성은 려운과 제 형님을 한 공간에 둘 수는 없어 지훈을 부축해 려운의 방으로 데려가 눕혔다.
“뭐 더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없다.”
“아닙니다, 형님. 오늘은 예서 편히 주무십시오.”
지성이 문을 닫고 상을 치우려 다시 류의 방으로 돌아갔다. 지훈은 팔로 제 눈을 가리고는 숨을 뱉어내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성아. 나는 너만 있으면 된다, 너만…….”
“형님은 아침 일찍 나가셨고요. 그리고 저 다시는 두 분하고 술 안 마실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류는 일어나 앉아 고개를 갸웃하고는 눈을 깜빡거렸다. 려운은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주섬주섬 자신이 벗어 던진 옷을 주워 입었다. 류는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다 말했다.
“가만, 그럼 어제 술 싸움에선 형님이 이기신 건가?”
“그럴 겁니다. 우선 선배님이 한 병, 제 형님이 두 병을 드신 후에 류 선배님이 술주정을 하시다 기절하셨고,”
“혹시……, 내가 자네한테 실수했나?”
“뭐, 껴안는 거 말씀하시는 겁니까?”
지성의 말에 류의 입이 벌어졌다.
“으아아…….”
그의 얼굴이 다시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붉어졌다. 그는 화끈거리는 제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렸다.
“미안하네, 고의는 아니었네. 내가 술에 취하면 누구든 사람을 껴안는 것이 버릇이라, 자제하려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형님은 그런 정도는 별로 신경 안 쓰시는 분이라서요.”
“그대를 안은 것이……, 아니오?”
지성이 류를 보며 산뜻하게 웃자 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려운이 와서 각각 다섯 병에 여섯 병째 넘어갈 때 뻗으셨습니다.”
마루에 놓인 빈 술병을 세던 류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하면 남은 아홉 병은 뭔가?”
“뭐냐니, 제가 마신 술병이죠.”
지성은 꿀물 두 잔을 가져와 상 위에 올려놓았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그의 모습에 류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놀라기는 려운도 마찬가지였다.
“뭘 그렇게들 보십니까? 제가 원래 주량이 좀 셉니다. 려운, 그래도 너무 뭐라 하진 마십시오. 남은 술은 방에 가져다 뒀습니다.”
지성이 방을 나서는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던 려운이 류를 향해 말했다.
“허약하다며?”
*
따듯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사시 초의 홍화정. 지금쯤이면 동기들 교육에 한창이어야 하건만 방의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기생 설기가 실종된 까닭이다. 그믐밤부터 달이 다시 차오르는 동안, 설기도, 그를 보았다는 사람도 찾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행방불명. 그의 방 앞, 누군가 주저앉아 제 손톱을 물어뜯었다. 오랫동안 설기의 수발을 들었던 소소라.
“설기에게선 아직 소식이 없어?”
익숙한 목소리에 소소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연화였다.
“예, 감감무소식이에요.”
“큰일이구나. 애심이에 이어 설기까지…….”
“아씨도 아시잖아요. 설기 언니는 가까이 지내는 사내라고는 홍화정 일꾼들뿐이에요. 숫기도 없고 겁도 많은 사람인데, 야반도주 같은 것은 꿈도 못 꾼다고요.”
“소소야. 아씨라 부르지 말라 했잖아.”
“제가 어찌 그래요. 아씨는 귀한 사람인데.”
소소가 괜히 발장난을 치자 연화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안 되겠어요. 제가 다시 관에 가서 조사해달라고 말씀드리고 올게요.”
“소용없다는 것 너도 잘 알고 있잖니. 네가 가봤자 쫓겨날 것이 뻔한 일이다. 가지 마.”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
연화의 말에도 소소는 여전히 불안하고 초조한 얼굴로 주인 없는 방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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