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은밀한 면접

3과의 기록 by 김밀
7
1
0

때는 사람들이 전부 퇴근하고 마지막 문을 잠그기 전의 시간대였다. 지부장인 피르메 씨는 건물의 보안 담당 부서에게 자신의 방의 문은 스스로 잠구겠다 언질하고는 그들에게 퇴근해도 좋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날의 담당 경비만 빼고. 모두가 화색하는 와중 담당 경비 여럿만 경비하면서 심심풀이를 뭘로 하면 좋을지를 따로 논의했다.

피르메는 은밀하게 자신의 사무실 문을 닫았다. 그리곤 또다시 홍차를 우렸다.

"너는 무슨 맛의 홍차를 좋아하지?"

"홍차같은 것에 관심 없는데."

"요즘 젊은 놈들은. 예의상 하나만 말해 봐. 아니면 좋아하는 색이라도 좋아."

"난.... 하늘이 좋아."

"지금의 하늘색은 검은색이지만, 네가 말하는 건 파란색이겠지? 좋아."

피르메는 사무실에서 조용히 물을 끓였다. 맞은 편 소파에 앉아있는 이는 검은 머리카락에, 노란 눈을 가진 자였다. 칼처럼 싹둑 잘린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자였다. 그는 후드가 달린 망토를 푹 눌러 쓰고 있었는데, 옷이 얼마나 입은 옷인지 어느간 헤져있는 게 보였다. 차마 조명은 전부 키지 못해 어두운 주변에서 오롯이 노란 탁자등불만이 빛을 냈다. 그리고 그 빛에 반사된 건 청년의 노란 눈이었다.

청년의 앞에 단아하게 생긴 찻잔을 내려놓자 청년은 가만히 이를 내려다보다 피르메의 눈을 바라보았다. 영 마시고 싶은 기색은 아닌 듯했다. 그는 눈빛으로 말하는 퍽 과묵한 타입이었는지 입을 쉽게 열지 않았다.

"썩 수다스런 편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난 널 만난 지 하루도 채 안 됐어. 그러니 텔레파시가 통할 거라는 생각은 그만둬 주길 바래."

"...... 뜨거운 걸 잘 못 먹는 편일 뿐이다."

"이런."

피르메는 이 상황이 웃겼는지 쿡쿡 웃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이 자는 아직 어리구나.

"그런 걸 말하기 위해 나한테 온 건 아니겠지." 청년은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졸린 반눈을 하고 있는 자였지만 어둠속에서 노란 눈만이 희번뜩하니 빛나는 게 꼭 야생동물 같은 눈빛을 갖고 있었다.

"난, 내가 있는 곳을 나가고 싶어."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심지굳은 눈빛이었다. 피르메는 눈을 낮게 떴다.

"그럼 나가면 되지 않나."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르메는 이 자를 떠보고 싶었다. 아직 어리지만 심지굳은 자, 그리고 어리짐나 어린 이가 해서는 안 될 일을 도맡은 자의 무거운 어깨를 시험해보고 싶기도 했다.

"내가 나가면 그건 그날로 죽을 거라고 생각해."

"살아남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니. 하지만 일평생을 쫓기면서 살고 싶진 않거든. 그렇다고 그런 이유로 내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여태까지 당신들이 한 짓은 어떡하고, 그런 발언을 잘도 하는군"

"변명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참작의 여지는 있어. 당신들에게 그 정보는 전달해 줄 테니까...."

"그럼 내쪽에서도 맨입으로 도와줄 순 없지. 요구사항이 있어."

"예상했던 일이다."

아침이 밝아오자 스루메는 햇살을 피하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헉, 이건 말도 안 돼. 지금 햇살이 내 머리위에 있다고? 지금까지 늦잠을 잤다고...?!'

스루메는 이불속에서 썩 기분이 좋았는지 온몸을 부비며 발을 파닥거렸다.

"나 진짜로 지금 늦잠 자고 있어! 평일에! 나 완전 개백수야~!" 스루메는 이럴 때가 아니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물론 백수이긴 하지만 대학생의 신분을 버린 건 아니었으니까. 여태까지 학교와 직업을 병행하느라 얼마나 힘이 들었는지를 모른다. 매일같이 시험, 과제기간에는 카페인 음료를 몇 캔이나 마셔야 했고 소위 말하는 도핑의 수준까지 가야 했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선, 또 대학교 등록금을 내기 위해서는 곧바로 구직을 다시 해야겠지만 당장에는 그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기뻤다.

오후쯤 되었을까, 스루메는 SNS에 퇴사했다는 상태를 업데이트하고 앞으로 어쩌면 좋을지에 대한 교수님과의 상담 일정을 잡았다. 친구들에게는 그 좋은 직장을 내팽겨쳤다며 야유섞인 축하를 받았다. 스루메에게 이제 할 일이라곤 주린 배를 채우고 주변의 아르바이트 자리나 알아보는 게 다였다. 그렇게 집에 함께한 지 하루가 채 안 되었을 때, 누군가가 행복한 자신만의 시간을 깨트리듯 자취방의 문을 두드리는 게다.

"누구세요? 올 사람이 없는데." 문 앞에서 스루메는 의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 앞의 누군가는 별 말이 없었다. 괜히 미심쩍고 기분이 나빠졌다. 설마 능력자를 향한 범죄?! 그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마저 스쳐지나갈 정도였다. 어색하리만치 긴 침묵이 지나가자 문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르메 씨의 연락으로..." 스루메는 그 얘기를 듣자 마자 문 앞으로 다가가 문걸쇠를 잠궜다.

"왜."

"급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복직에 관한 이야기죠?"

"비슷해."

"전 혼자서 일 절대 안 한다고 전해주세요"

"혼자가 아니야. 3과에 새로운 인력을 넣는다고 알려달라고 하던데. 그럼 난 이미 할 말 다 했으니까...." 스루메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렇게 금방 인력을 채워넣을 수 있는 거였어?! 일단은 스루메는 마음이 급했다. 저 사람이 그냥 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루메는 잠시만요, 하고 크게 소리치며 문을 급하게 열었다. 문 앞에는 검은 망토를 쓴 덩치 큰 청년이 서 있었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이 어두칙칙한 분위기와 인상은 대체 뭐란 말인가? 순간 현관이 어두워진 줄 알았다. 그 청년은 어느 위협 없이 스루메를 바라보았지만 스루메는 반쯤 감긴 눈매 때문이었는지 겁을 살짝 먹었다.

"같이 가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부장님한테 가는 거죠?"

"음, 그렇다만....." 스루메는 비장하게 말했으나 청년은 스루메를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청년은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지만 어딘가 낯이 익었다. 분명 처음 본 순간 누군가를 떠올렸으나 확실히 다른 사람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청년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스루메를 가리켰다. 그의 살짝 헤진 반장갑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성치 못하고 흉터가 그득한 것을 보니 이 사람은 분명....

"너, 방금 자다 일어났냐."

"례?"

"급하게 나온 건 알겠는데 잠옷 치마 뒤집어졌다." 스루메는 벙찐 얼굴을 한 채로 상황을 정리하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더니 비명을 지르며 잠옷을 정리했다. 지금 그런 걸 말할 때가 아니지 않아? 아니, 그치만 이걸 말하지 않았으면... 아니 그렇다고 사람 앞에서 바로 이렇게 말하는 건 아니지 않아?! 청년은 별로 신경쓰는 기색도 아니었지만 스루메가 온갖 난리법석을 떨고 나갈 채비를 하는 것을 묵묵히 기다려 줬다. 스루메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온갖 채비를 마치고 져지형 유니폼을 입었다. 버리기 아까워서 남겨놓길 잘 했지. 스루메는 청년과 함께 걷는 내내 창피함이나 무안함을 떨치려고 계속해서 수다스럽게 말을 걸었다. 청년은 조금 귀찮아하는 눈치였지만 꼬박꼬박 대꾸했다. 그 잠시간의 정신없는 대화에서 알아낸 것은 청년의 이름은 히레이며, 그는 노란색 피를 가진 자이고, 직원은 아니지만 임시로 동맹을 맺은 관계라는 것들이다.

둘은 지부장에게로 향했고, 또 그 여지없는 소파자리에 앉게 됐다. 스루메는 온갖 불만이나 불편함 들을 털어놓았지만 지부장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사실 여기에서 스루메의 불평을 제대로 귀담아 듣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3과를 다시 재건하실 생각이신가요?"

"음, 그렇지. 그래서 널 다시 부른 거고. 차고로 네 사직서는 내가 거절했으니까 넌 오늘 그냥 지각인 거란다."

"이럴 수가." 스루메는 허망한 표정으로 지부장을 바라보았다. 나름대로 출근은 지각하지 않고 제대로 잘 하는 편이었는데, 아니 그것보다도 사직서가 수리조차 안 됐다는 게 더욱 충격이다. 하, 교수님과 이미 면담 계획까지 다 짜 뒀는데.... 히레는 절망하는 스루메를 옆에 두고 별 생각 없는 얼굴로 정면만 응시했다. 그리고 피르메는 그런 히레에게 눈길을 주었다.

"하지만 3과를 다시 일으키게 된 건 좋은 소식이잖니! 자, 얼굴 피렴. 그래서 말인데 일단 3과에 새로 들어올 직원을 소개시켜줘야겠지."

"예... 사실 그 사람이랑 잘 어울릴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어요. 전 늘 1인 해결사만 보조해 본 경험이 있으니까..."

"같이 현장에 나가고 싶어하던 건 네 염원이었잖아."

"그렇지만, 그...약간, 설렘도 되고. 걱정도 되고. 그런 감정이 있잖아요."

"걱정하지 마렴, 그 사람도 만만찮게 강한 이니까. 하지만 네가 같이 다녀야 한다는 건 분명해." 피르메는 히죽 웃으며 스루메를 격려했다. 스루메는 약간 안심한 눈치로 그렇겠죠? 하고 작게 대꾸하고는 기대하는 듯이 출입문만 응시했다. 언제쯤 들어오는 거지? 어떤 사람일까? 히레도 약간은 궁금한 눈치였다. 강한 사람이라고 하니 구미가 당겼는지 함께 문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새 사람은 들어오지 않고, 피르메도 더 이상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 눈치였다. 그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 위해 스루메는 피르메를 재촉하듯 말했다.

"언제쯤 소개시켜 주시는데요?"

"이미 여기 와 있잖니."

"에?" 스루메는 눈썹을 팔자로 뜨며 입을 벌렸다. 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은 완전함 황당함을 표현할 때나 나오는 얼굴이다. 그리고 히레도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무언가를 알아챈 듯 벌떡 일어서며 눈을 크게 뜨고 피르메를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

"왜, 당신이 있는 조직을 나오고 싶댔잖아. 소중한 인력을 낭비할 순 없지."

스루메는 이 갑작스런 이벤트에 생각했다. '뭐야. 당신들만 아는 이야기 하지 말고 나도 알려 달라고요. 아니면 나 빼고 이야기하시던가.' 이 어색한 분위기가 어느정도 지속되자 스루메는 아주 무해한 얼굴로 히레와 지부장을 번갈아 봤다.

"설마요?"

"음, 그 설마지."

"이 사람이 제 새로운 파트너에요?"

"그렇지!"

"자자, 이제 분위기 파악됐으니 설명 시작하마."

"잠~시만요!!" 스루메는 히레와 같이 소파를 박차고 벌떡 일어섰다. 지금 나보고 초면부터 빤쓰를 깐 사람이랑 파트너가 되라고? 미쳤나? 물론 이건 내 실수긴 하지만. 조금,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분명 저 사람도 신입이 아니라 협력이라고...

"왜, 문제될 거 있어?"

"아니, 문제될 건 없지만. 그치만. 아니."

"그럼 설명 계속하마" 스루메는 거의 당황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히레는 일단 손을 스루메의 어깨에 얹으며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제스처를 취했다. 일단은 어떻게 상황이 돌아가는지를 확인할 필요성이 있었다. 둘은 얌전히 다시 소파에 앉으며 제각기의 당황과 황당함으로 피르메를 바라보았다.

"으음, 일단은. 스루메 너도 알고 있는 게 있을 거야. 유병자들의 권리증진을 위한 단체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 말야. 그리고 그 방식은 제각기 달라서 급진적인 전개를 추구하는 조직도 있고 우리처럼 영리적 목적을 겸하고 국가와 정치적으로 결합을 맺고 있는 이들도 있어."

"그 정돈 알고 있죠. 국가에서 자체 조직한 부분도 있고요. 보통은 영리적 이윤을 같이 추구해서 사회적으로 자립을 돕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단체가 주력이지만 완전한 권리증진을 위해 시위나 갈등에 초점을 맞춘 단체도 있으니까요."

"맞아, 그리고 네 옆에 있는 사람은 급진파 단체 리만의 제4부대 부대장이야." 스루메는 눈을 크게 뜨고 히레를 봤다. 히레는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는 게 거짓말은 아닌 눈치였다. 어쩐지 이 사람 손이 성치 않다 했더니, 사회운동가였구나. 그것도 급진적인, 어쩐지! 스루메는 이마를 팍팍 치기 시작하더니 얼굴을 양손으로 가려 마른세수를 했다. 선배, 당신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어요. 말뽄새는 더럽고 제멋대로에 꼴초였지만 당신은 적어도 이런 거대한 뒷사정은 안 갖고 있었잖아요. 스루메의 반응을 본 히레도 적잖이 놀랐는지 손을 들어 말했다.

"나는 나가고 싶다고 했지 너네하고 일한다고 한 적은 없는데...."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거기서 나가려면 죽어서 나가는 길 밖에 없어. 그리고 평생 도망치면서 살기 싫다면서? 그렇다면 차라리 여기서 보호해주는 게 나아. 우리라면 당신을 위장사망으로 처리시켜줄 수 있고, 새로운 신분도 줄 수 있어. 하지만 그러려면 서로간의 오가는 게 있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걱정하지 마, 우린 당신을 다른 능력자와 차별하지 않을 거야. 월급은 성과제니까 차등은 없을 거고, 복지도 똑같이 줄 수 있게 해 줄게. 그리고 당신이 당장 그 조직을 안전하게 나간다 해도 어떻게 취직하고 먹고 살 건데? 이게 그렇게 나쁜 조건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걸."

스루메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완전히 이 사람도 걸려 넘어갔군. 이건 지부장님의 거대한 함정이야! 그리고 그 이야기에 틀린 점이 없어서 더 화난다고. 사회적인 취약점을 이용해서 붙들어 놓는다니, 자율성이라곤 한 톨도 보이지 않는다며 스루메는 속으로 지부장의 행태를 비판했다. 하짐나 함부로 나설 수도 없었고, 타인의 일에 함부로 나서서도 안 되었다.

히레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곰곰히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을 내렸다. 입에서 나온 한숨이 차마 삼키지 못한 짙은 앓이 같았다. 스루메는 조심스레 그 이야기에 말을 얹었다.

"하지만 지부장님.... 사실 저희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 저희는 정부 소속이니까. 이런 급진적 단체가 개인에게 입힌 손해배상이라던가, 그런 것들, 그, 처벌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알고 있는데...하다못해 부대장이였다면, 더...."

"그거 아주 있을 법한 지적이네. 스루메. 하지만 우린 관점을 달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지부장 피르메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스루메와 히레의 앞에 다가왔다.

"결국 그 단체든 우리든 전부 유병자의 인권을 위한 단체였어. 우리 여기에 있는 모두는 유병자고 능력자다, 우리는 이들과 뜻을 함께하고 결탁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

"하지만 결국엔 방식에 있어서 불법적인 행태를 취한 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죽어나간 일도 심심찮게 있었어요. 이, 이건 그 유가족들에 대한 예의의 차원에서라도 법적인 결과가 필요한 거에요." 스루메는 당황스러웠다. 어쨌든 범죄자다. 제아무리 인권운동가라고 해도 급진적인 방법이란 말이다. 손에 피가 묻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나? 그 피의 주인과 가족들, 친구들. 모두에게 신의를 져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생명에 경중을 따질 순 없는 법이지. 생명에 대한 법적인 처벌은 엄하게 다뤄져야만 해. 하지만 그 목적성은 모두 하나, 사회적 약자로 규명된 우리들의 인권을 바로잡기 위해서야. 그것에 대해 참작을 해 주는 것 뿐이란다. 네가 지금 퇴사해서 떳떳하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대학에 다닐 수 있는 것, 혹은 네가 자취방을 구할 수 있을만한 집안의 재력이 있는 것도 전부 이러한 운동가들의 피묻힌 손으로 이뤄낸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 없어?

..... 말이 다른 곳으로 흘러갔군. 결국에 너는 그러한 사회운동의 결과로 생명을 해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잖아. 그렇지?"

스루메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히레의 눈치를 보곤 했지만 스루메는 하고 싶은 의문과 마주되는 토론을 무시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들한테서 받은 자료가 있었지. 그들이 개입하는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자들이 혐오주의의 주요 세력이라고 한다면 넌 어떻게 반응할 테냐? 결국엔 그들도 같은 생명이기 때문에, 유병자들을 학살하고 잔혹한 정책을 드민 사람을 죽였다고 하여 처벌받아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싶니? 아, 추궁은 아니고. 그냥 네 생각을 물어보는 거야." 스루메는 상당히 고민하는 눈치였다. 당사자의 옆에서 이런 토론은 무례하지 않을까? 하지만 무례하다는 이름으로 외면한다면 달라지는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문제는 직면해야 해결할 수 있다. 앞으로 이 사람과 나는 손을 잡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대화로 해결하고 지속가능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범죄자가 아니라 앞으로는 동료로서 함께해야 했다. 그러니 그의 혐의도 나는 올곧이 받아들일 필요성이 있었다.

"저는....그러니까.... 그 희생당한 사람이 결국 보편적인 도덕에 어긋나고... 공동을 추구하는 법칙에 반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자라면, 그 사람의 죄와 생명을 해한 죄의 여죄를 묻고 싶은 거에요. 알다시피 생명을 해한 죄는 무엇보다도 크니까요. 그것의 차....를 물을 수 있다면 물어야겠죠. 하짐나 그 여죄라는 것이, 희생자의 죄가 훨씬 더 커서 남지 않고 사람들에게 오히려 사회공헌의 이득으로 다가온다면, 저는 기꺼이 그를 받아들일 거에요. 여느 독립운동가나 사회운동가가 역사에서 비판받는 것은 옳지 못한 행태라고 저도 느끼고 있어요. 하지만 공적인 기관은 공적인 가관으로서 평등하게 표명해야 하기 때문에 유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죠...."

"그렇다면, 우리는 공적인 기관의 표명을 해야 할까? 아니면 사적으로 눈감고 흘려보내줄 수 있어야 할까."

"하지만 이렇게 찾아오는 모든 이들의 사적인 원한을 눈감아주게 된다면, 결국 그 생명손괴의 책임은 누가 지어야 하죠?"

"네가 말한 것들을 빌려보자고. 희생자의 죄와 운동가의 죄를 뺀 여죄를 벌하면 돼. 그렇다면 그 생명손괴에 해당하는 벌을 모두가 나누어 질 수 있겠지. 그리고 그정도라면 썩 부당한 판결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스루메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상적으로 생각할 때 그렇게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조직의 대장이라는 직책은 여죄가 적지 않을 텐데요." 히레는 그 이야기를 듣자 눈을 지긋 감았다. 그리곤 그 떼지지 않던 입을 열어 말하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나는 여기에 왔다."

스루메는 숨을 죽이고 히레가 다음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마음의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나는... 물론 대장으로 일했지만, 너희들도 우리 단체가 규모가 상당히 컸다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 단체의 일원이였어. 어쩌다 보니 고아인 내가 대장에 눈에 들었을 뿐이지만. 그 땐 단체의 대장은 유병자였다. 우린 소규모 조직일 때부터 유권자의 인권을 위해서 움직였어. 따뜻한 기후나 땅을 찾아다니면서 사회의 차별이나 원한에서 자유로운 땅을 찾아 이동하는 유목민처럼 굴었고, 그 과정에서 사람이 많아진 거야. 그래서 우리는 전투하는 사람 뿐만 아니라 아이가 있는 아낙네, 상인, 농부, 혹은 테러에서 살아남은 용병과 아이들. 그런 다양한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을을 만들기엔 충분했지만 땅이 남아있지 않았어. 그 때의 우리는 국가의 개념이 분명했고 마을의 개념도 분명했기에 새로운 마을을 여러 인종이 섞인 유병자 무리가 만들기엔 쉽지 않았다.

또한 국경이니 국적이니 하는 권리와 행정이 생기기 시작한 뒤로는 더더욱 그랬지. 사적인 제재로 몇 명은 행정에 의해 자국으로 송환되거나 국제범죄자로 규명되어 와해되고... 그런 과정을 번복하다 보니 자연스레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지만 불법입국자라던가, 난민, 혹은 불법 체류자 같은 이름으로 남아있었어. 그 모든 책임을 나에게 지라고 말한다면 나는 기꺼이 지겠다. 그리고 반발시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우린 네가 말한 것처럼 남은 여죄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궁극적으로 이곳에 온 것은 그런 여죄를 위해서만은 아니야."

"그래요, 그게 제일 궁금했어요. 당신은 대체 왜 여기로 온 거에요? 어릴 적부터 함께한 조직을 왜 자신의 손으로 배신하려는 거죠?" 스루메는 조심스럽지만 호기심을 참지 못한 채로 물었다. 히레는 자신의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우리의 인권을 증진하기 위함이라고 굳게 믿었어. 하지만 조직의 대장은 언제나 죽기 쉬운 직책이고 몇번이나 갈아치워졌다. 그리고 나는 너희들이 알다시피 낮은 직책이 아니야. 비록 나의 의견이 강하게 반영되지 못했으니 허울뿐인 직책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현재의 리더가 내리는 결정과 계획은 우리의 신념과 반대되는 것이 많아, 심지어는 유병자들을 위한 단체였던 곳에 일반인들이 리더격이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하면서 단순히 무언가의 이익을 위한 폭력적인 영리단체가 되기 시작했다고. 물론 일반인들이 주도권을 잡은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서 나는 대장이라는 이름을 달고 온갖 책임을 져야 하나, 내 목소리를 내어도 반영되지 않는 심심찮은 대우를 받아왔어. 이것 또한 견디기 힘들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의 행보와 계획은 유병자들의 권리 증진과는 관계없는 테러와 살인이 자행될 계획이라고 나 스스로 판단했다.

그리고 그런 곳에 내 손을 더럽힐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거다. 물론 여기도 깨끗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그런 계획을 감히 무력하게 손놓고 둔 채로 시행하고 싶지도 않았다..." 히레는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여태까지 한 말중에 가장 길었을 것이다. 그는 목소리가 낮고 진중한 편이였기 때문에 이 말 모두에 무게가 있었다. 피르메는 생각이 많아졌다. 이는 일종의 테러 계획의 누출이고, 그걸 막아야 할 책임이 있는 자였으니까. 그러나 이를 함부로 알린다면 세간의 움직임이 떠들석해질 것이고, 결국 또 유병자들에게 좋은 인식으로 다가올 리가 없다. 되려 유병자들이 또 난리를 친다며 언론에선 입다투어 유병자를 물어 뜯을 것이고, 사람들은 침이 마르도록 SNS에서 온갖 유언비어와 헛소문을 퍼트리며 혐오를 키워나갈 것이다.

스루메 또한 그것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히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충격에 눈을 크게 떴다. 들어선 안 될 이야기들을 들은 것만 같았다. 히레의 여죄를 물으려던 것은 아니였다. 스루메는 단지 자신이 이 사람과 손을 잡아도 되는지에 대한 불확신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 그 알량한 불확신으로 여기까지 왔다. 아마도 히레는 스루메의 토론에 여간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스루메는 자신이 유병자라고 생각했지만, 또 한켠으론 유병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병의 징후나 능력은 커녕 검사결과에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 취급 받는다고 생각했지 심히 차별받고 있다는 자각이 없었다. 따라서 숙고하지 못한 발언을 했다. 스루메는 당장의 거대한 일보다는 히레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히레는 스루메의 그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두고 시선을 한 번 줬다가, 다시 무시하듯 공허한 눈짓을 제 손으로 옮기더니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그 누구도 함부로 입을 뗄 수 없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