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인과 성자는 욕심 한 톨 차이

광인과 성자는 욕심 한 톨 차이 1화

나라를 구한 미치광이

“감히 바랍니다. 꿈꾸고, 간청하옵나이다.”

멀지 않은 예배실에서 앳된 목소리들이 자아내는 아침 기도 서문이 넘어 들어왔다.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은 성 나타는 언제나처럼 천진한 눈길로 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나이가 지긋한 사제가 예의 바른 태도로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성녀시여. 이번 알현을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봉헌하면 되겠습니까?”

나타는 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물었다.

“누구를 만나야 하지?”

“몰르의 피타 백작가의 아드님입니다. 오래전부터 성녀님을 꼭 뵙고자 몇 번이고 청을…”

상황에 맞지 않는 경쾌한 웃음소리가 휑한 방에 메아리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사제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으나 익숙한 일인지 그저 가만히 나타의 웃음이 멎길 기다렸다.

“그럼 뭘 받을지 정했다.”

드디어, 사제의 주름진 얼굴에 안도와 동시에 긴장이 감돌았다. 그의 입에서 이번엔 또 어떤 허무맹랑한 요구가 나올까. 나타의 개인실을 막 들어온 어린 수련 사제들 옆으로 옮긴것도 얼마전 성녀의 청 때문이었다.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큰 비밀인지 뻔히 알면서도! 사제는 다시 생각해도 괘씸해 이가 갈렸다.

하지만 설령 이번엔 정원 한가운데에 저만을 위한 제단을 만들어 달라 요구해도 들어줄 생각이 있었다. 피타 백작가의 영식은 수완이 무척 좋아 이민자들을 값싸게 부릴 줄 알았고, 옆 나라에서 가져오는 수출품 흥정에도 능해 조만간 제국 최고의 갑부가 될지도 모를 거물이었으니.

나타는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으로 창밖을 가리켰다. 품이 넓은 소매가 팔에 매달리듯 쳐졌다. 유리 없는 창을 타고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햇살이 그의 손가락을 비추었다. 이런 모습은 왜인지 아직도 사제에게 성스러워 보이곤 했다다. 물론 그 감상은 눈 깜짝할 새 사라져 버렸지만.

사제는 나타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가락 끝은 햇빛에 반짝이는 연못을 가리켰다. 바람에 쓸려 날아온 꽃잎이나 풀잎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꼭 한 폭의 풍경화 같았다.

“저 연못에 들어갔다 나온 다음, 젖은 손 그대로 추기경의 눈썹을 잘라 와. 그게 갖고 싶어.”

상상도 못 한 충격적인 요구에, 사제의 입이 체통 없이 헤 벌어졌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방 안에 한참 동안 침묵만이 감돌았다.

“내가 이곳에 찾아온 것은, 디메인자작 가에 맡길 엄중한 임무 때문이라오.”

어찌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아직도 땀이 흐르는 늙은 사제는 식탁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냈다. 식탁에는 늦은 밤에 어울리는 가벼운 요리들이(물론 가짓수와 주방 일꾼들의 수고를 생각하면 전혀 가볍지 않았다.) 차려졌고, 사제 바로 앞엔 시종도 물리는 바람에 무려 자작이 직접 따라준 차 한 잔이 하얀 김을 내뿜고 있었다.

디메인자작은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눈으로 자기 막내아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사제와 자작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합석한 인물이었다. 막 열여덟 살이 된 자작의 막내아들이 지금껏 다녀간 어떤 사교장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꼿꼿하고 자신감 넘치며, 믿음직스러운, 교본에서 튀어나온 것만같은 자세로 사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나설 희귀한 자리임을 분명히 아는 모양이었다.

자작의 막내 로톨로 디메인은 사교장만 가면 언제나 기가 죽어서 표정은 어둡고 목소리는 떨렸다. 빳빳하게 굳어 위축된 채 길 잃은 강아지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피기 일쑤였다. 처음보는 아들의 모습에 디메인 자작은 자못 놀라기까지 했다.

물려받을 재산이라곤 티끌뿐인 자신의 여생을 조금이라도 펼 다신 없을 기회다. 로톨로는 십 수년간 쌓아온 눈치로 이미 처절하게 알아차렸다. 사제께서 무엇을 부탁할지 알 수 없지만, 그를 들어주기만 한다면 평생 뼈 빠지게 일하고 작은 빵으로 버티는 우울한 삶에서 탈출할 수 있을 터였다.

“이 이야기를 듣는다면 임무를 무를 수 없네.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 해. 하지만 잘 해낼 경우, 분명한 보상을 약속하겠네. 또한 두 사람 모두 결코 외부에 발설해서는 안 되네. 알고 있겠지?”

사제는 나지막이, 그러나 빠른 말씨로 말했다. 그리고 차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로톨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각오가 되었느냔 뜻이었다. 로톨로는 신중한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나 마나 사원의 낯부끄러운 일의 뒤처리를 해달란 말일 테지.

말을 듣지 않는 말썽꾸러기 어린 귀족 자제 수련생의 뒤치다꺼리와 교사 노릇을 하라거나, 다 늙어 고집을 부리는 성기사의 시동 노릇을 하라거나, 사제의 추문을 불식시키거나, 잃어버린 성물을 복원하거나….

암암리에 그런 일을 맡는 장자가 아닌 귀족 집안의 자제들은 생각보다 흔했다.

지저분하고 모양 빠지는 일을 완수한다면, 신에게 헌신했다는 훈장과 함께 명예와 부가 내려올 테지. 그 때문에 사제들은 종종 몰락한 귀족이나 준 귀족에게 찾아가기도 했다.

이런 일에 동조하는 것이 유쾌한 일일 수 는 없다. 하지만 대서재같이 죽도록 바쁜 기관에 보내져 몇 날 며칠을 세우며 일하고 박봉으로 부려 먹히는 것보단 유쾌했다.

무엇보다도 이 일로 가문의 명예를 빛낸다면 드디어 어머니와 아버지가 로톨로를 인정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어머니와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는 일조차도 꿈만 같았으므로, 로톨로는 사실 아까부터 약간 흥분해 있었다.

물론 재수가 없다면 명석한 머리나 신묘한 말주변 탓에 아주 어려운 일을 받았다가 실패해 국물도 없이 버려지는 수도 있었다. 그러나 늙은 사제는 누구라도 상관없으니 제발 맡아주길 바라는 듯 절박했다. 게다가 로톨로는 특출한 재주가 있다고 알려진 바가 전무하니, 기술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일을 요구하는 것은 아닐 확률이 높았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요양을 가실 나타성녀님을 보필하는 임무일세.”

로톨로는 숨을 참았다. 구국 영웅, 성 나타를 보필하는 임무라니! 그런 엄청난 일을 이런 식으로 맡긴다고! 믿을 수 없었다. 나타성녀께서는 일 년 전 육신에 신의 뜻을 담아내 제국에 닥칠 재해를 예견하고, 기적을 일으켜 막아낸 유일무이한 위업을 이루신 분이었다.

그 이후 크게 쇠약해져 아주 가끔 귀족의 알현을 받는 것 외엔 외부 활동을 삼가셨는데, 아예 다른 곳으로 요양을 가신단 말인가?

그런 그건 아무나 붙잡고 해달라고 할 일이 결코 아니었다. 신성술 사용에 우수한 사제, 혹은 수많은 사람을 보살피고 회복하게 도와준 의사, 나타 성녀님만큼은 아니어도 위업을 이룬 성기사, 혹은 매우 신실하고 성 나타와 가까운 선임 사제쯤은 되어야 이야기나 꺼내볼 수 있는 일이었다.

로톨로는 혼란스러웠다. 디메인자작 또한 마찬가지로 매우 당황한 얼굴로 사제를 보다가 재차 물었다.

“성녀님을 보필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까? 정말 나타 성녀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사제는 어째선지 약간 피곤한 낯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디메인영식, 정말 이 임무를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겠지?”

로톨로는 최대한 엄숙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쓰며 답했다.

“그렇습니다. 영광스러운 일을 해낼 기회를 주신다면 기꺼이….”

사제는 의미가 불분명한 한숨을 쉬고 자작을 보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영식과 단둘이 하고자 합니다.”

자작은 자기 아들과 눈을 맞추었다. 처신을 잘하란 의미였다. 로톨로는 그러한 어머니와의 눈 맞춤이 두려우면서도 너무나 반가웠다. 평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기대 섞인 당부였다. 디메인자작은 사제에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굳게 닫았다. 자작이 떠나는 발소리를 확인한 사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는 그 누구에게도 말해선 안 되냬. 반드시 영식만 알고, 자작에게도, 자작부군에게도 발설해선 안 돼!”

“명심하겠습니다.”

사제는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통탄스럽게도 나타 성녀님의 상태는 몹시 심각하다네. 미록 육신은 충분한 보살핌과 신의 가호로 회복하셨으나…”

사제가 말을 흐리고 뒷말을 차마 내뱉기 망설여지는지 입맛을 다셨다. 로톨로는 침도 삼키지 못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런 변방의 자작 가까지 다급하게 찾아온 걸 보면, 성녀님께 보통 문제가 생긴 게 아님이 분명했다. 설마 기억이라도 잃으신 걸까? 혹시 그날의 영광이 너무 눈부셔 자꾸 정신이 흐려지는 증상이라도?

“…완전히 광인이 되셨다네.”

사제는 죄를 고백하는 것처럼 힘겹게 말을 이었다.

“광인이라니…”

“자네도 직접 뵈면 알걸세. 이전의 그분이라면 결단코 하지 않으실 언동과 기행을 일삼고 계셔.”

로톨로는 이 대화가 무척 불경스럽게 느껴졌다. 감히 신과 합일을 이루었던 분께 광인이라니. 그것도 신전의 높은 사제가. 로톨로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찻잔만 내려다봤다. 찻물 속에 또 사교장에서처럼 어두운 표정을 한 자신이 보였다. 모르는 새 고개를 계속 숙였던 건지 안경이 코끝까지 흘러 내려가 있었다.

혹시 지금 사제는 성 나타를 끌어내리자는 무시무시한 제안을 돌려 하는 걸까? 그렇다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완전히 낭패였다. 혹은 나의 신실함을 시험하는 건가? 로톨로가 한참 동안 대답이 없자 사제는 초조하였는지 헛기침하고 덧붙였다.

“믿기 어렵다는 것은 안다네. 하지만 정말일세. 감히 성 나타를 헐뜯는 짓은 할 수 없으니, 자네가 알현하여 직접 눈으로 보게나.”

성 나타를 알현하라고? 원래라면 몇번을 청하고 10년을 기다려도 턱이 없을 정도로 택도 없는 일이었다.

“바로 이틀 뒤에 페이스트 역으로 나오게. 장례식에 갈 때 입는 정장을 입고, 짐은 최소한으로. 남은 짐은 따로 보낼 테니 미리 싸두게.”

“이틀 뒤 말입니까?”

로톨로는 깜짝 놀라 격식 없이 높은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한시가 급한 사항이라네.”

사제는 모든 말을 다 쏟아내고는 미지근한 차를 단번에 들이켜고, 그로도 타는 목에 모자랐는지 직접 차를 따랐다. 로톨로는 하릴없이 그런 신선한 광경을 멍하니 쳐다만 봤다. 얼떨떨해 코끝에 감도는 식어가는 차의 꽃 향만 느껴졌다.

페이스트역에 갈색 트렁크를 들고 하인도 없이 서 있을 때까지도 로톨로는 자기가 제대로 선택한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정을 무를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난 이틀간 어머니와 아버지가 평생을 합한 것보다도 더 큰 관심을 보여주셨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로톨로에게 가문의 인장이 찍힌 금화가 든 주머니를 건네며 몇 번이고 잘 해내야 한다는 말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마지막엔 ‘네 용기가 자랑스럽다’는 칭찬을 들었다. 순간 로톨로는 눈물이 핑 돌아 그 자리에서 울 뻔했다. 아버지 또한 하인을 시켜 오늘을 위해 새 정장을 맞추어주시며, 두 손을 꽉 잡고 몇 번이고 행운을 빌어 주었다. 로톨로는 기쁨으로 마구 요동치는 심장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라고 믿을 뻔했다.

기쁨에 젖어 몇 번이고 사제께서 전해주신 사항들을 되뇌었다. 머릿속에 이미 단단히 박혀있음에도, 마치 감동적인 시를 연거푸 읽는 것처럼. 로톨로는 한산한 새벽의 역과 쭉 뻗은 기찻길을 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곧 성녀님을 만난다. 심장이 또다시 마구 뛰었다. 숨이 찰 지경이었다. 주변이 조용하니 제 심장 소리만이 귓가에 크게 울렸다.

멀찍이서 딱딱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로톨로는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사제가 말한 대로, 검은 베일을 쓴 성 나타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는 검은 벨벳 장갑을 끼고, 다소 남성용처럼 보이는 긴 부츠를 신은 나타는 제 나이보다 훨씬 어른처럼 보였다. 선선한 새벽바람이 그의 두꺼운 치맛자락을 느릿하게 흔들었다.

로톨로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나타가 겨우 몇 걸음만 남기고 로톨로 앞에 섰을 때, 하마터면 소리 내어 크게 숨을 들이켤 뻔했다. 정말 성 나타가 내 눈앞에 계신다. 로톨로는 마음을 다잡고 손을 모은 채로 나타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유감입니다.”

그리고 예의 바른 목소리로 정해진 문장을 말했다. 혹시 누가 보더라도 정말 장례식에 동행하는 두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서였다. 베일을 쓴 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 감사합니다.”

나타 또한 정해진 문장을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톨로는 긴장으로 잘게 떠는 손을 꽉 잡았다가, 나타에게 건넸다. 그러나 나타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로톨로의 손을 잡지 않고 기차 승강장을 향해 앞서 걸었다. 멋쩍어진 로톨로는 나타를 따라 역을 걸었다. 얼마 안 가 기적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톨로는 조용한 나타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사제가 한 말을 떠올렸다.

완전히 광인이 되었다, 보면 바로 알게 될 거다.

아직은 순전히 거짓말 같았다. 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며 손님이라곤 둘 뿐인 역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옷만큼 까만 석탄이 만들었을 매캐한 연기 냄새가 역 전체에 퍼졌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