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운록 제1권

第一章. 춘풍 도령 (13)

*

 

약속 시각이 다 되어가는 즈음, 붓을 가만히 내려놓은 지성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도대체 이 의뢰인, 도대체 무슨 소학을 보았길래 이렇게 오자가 많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읽고 있던 류도 책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게 말일세. 이 정도면 오자 정도가 아니라 거의 다른 책의 수준이 아닌가.”

“의뢰를 받지 말 걸 그랬습니다. 요즘 학당에서는 이리 엉터리 책으로 배운답니까?”

“제대로 된 학당이라면 그럴 리가 없지 않나. 또 이상한 것이 어느 장에는 한 줄에 다섯 자도 넘게 오자가 있는데 어느 장에는 단 한 글자의 오자도 없다는 것이네.”

“아무리 내용이 많기로서니 이리 엉터리 책으로 숙제를 해가면 티가 나고 분명 혼이 날 터인데…….”

흐음. 책장을 팔랑팔랑 넘기던 류가 잠시 지성의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서탁에 팔을 얹어 턱을 괴고는 잔뜩 골이 난 지성의 미간을 펴주며 말했다.

“그리 열 낼 필요는 없잖소.”

지성이 류의 손을 쳐내려 하는 참이었다. 화방 문에서부터 뛰듯이 성큼성큼 다가온 누군가가 서탁 앞에 술병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류의 손목을 비틀었다.

“악!”

“내 아우에게 지금 무슨 짓이오?”

갑작스러운 상황에 지성이 고개를 들었다. 지훈이었다. 그가 놀라 일어나 제 형님의 손을 붙들었다.

“형님, 이거 놓으십시오! 제 선배님입니다!”

“그래, 이놈이 그 못돼먹은 려운이란 놈인가 보구나!”

보기보다 험한 말투와 손목을 짓누르는 강한 힘에 류가 신음했다.

“려운이 아니라 류 선배님이라니까요! 제발 이 손 좀 놓으세요! 이러다 손목이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아우의 말에 형님은 마지못해 류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붙잡혔던 손목을 주무르는 류의 앞에 지훈이 손가락질을 해대며 말했다.

“내 아우에게 다시 한번 함부로 손을 대면 그땐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요.”

“형님!”

“지성이 너, 내게 화내는 거야?”

“그게 아니라…….”

답답한 듯 풀썩 주저앉는 지성의 얼굴을 본 류가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도령과 함께 화방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편하게 류, 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렇게 무안을 당하고도 말갛게 웃는 류의 모습보단“도령과 함께”라는 말이 더 거슬리는 지훈이었으나 청해 오는 손 인사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그는 하는 수 없이 류의 손을 붙잡았다.

“사과는 않겠소. 이 녀석의 형님인 윤지훈이오.”

생긋 웃는 류를 보며 그는 손을 꽉 쥐어 놓아주지 않아 볼까 하는 생각도 했으나 만약 그리한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아우의 따가운 눈총에 그저 웃고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형님, 한데 이 술은 뭡니까?”

“뭐긴, 네가 좋아하는 매실주지.”

다정한 형님의 말에 지성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류가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셔서 아직 준비를 못 했습니다. 음식을 준비하라 일러두었으니 그동안 화방 구경이나 하시겠습니까?”

“그래요, 형님. 보시고, 어머니 아버지께도 꼭 잘 말해주세요. 윤 씨 집안 막내아들이 이렇게 잘 지내니 걱정 안 하셔도 된다고 말입니다.”

그래, 내 집에 가면 잘 말씀드리마. 두 사람의 대화에 류는 기다렸다는 듯이 의뢰받은 소학 책을 덮고 일어났다. 지훈은 류를 흘끗 보고는 지성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화방은 지성이 처음 왔을 때는 여섯 개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조금 손을 보아 네 개로 합쳐놓았다.

첫째는 그림을 그리는데 쓰는 채색 도구들을 파는 화방이었다. 실내는 습하지 않게 관리되고 있었고 크지는 않았으나 서역과 정晸 나라에서 건너온 값비싼 분채와 안료들이 있어 양반은 물론 종종 궁에서도 사람을 보내 필요한 것들을 사 가곤 했다.

둘째는 서화를 전시해둔 화방이었다. 본래 둘이었던 것을 합친 화방으로, 지성과 류가 의뢰 외에 시간 날 때 완성한 서화들을 전시해두고 자유롭게 구경을 하되, 마음에 드는 것은 살 수 있게 한 곳이었다. 지성과 류의 작품 외에도 전국 각지의 내로라하는 예인들의 작품을 걸어 팔아주기도 했다.

셋째는 스승인 최명선만의 화방으로 지성이 머무르는 화방의 바로 옆, 본 화방과 쪽문으로 이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곳이 저와 류 선배님, 려운이 지내는 화방입니다. 저희가 잠을 자는 공간과 작업공간, 부엌, 욕탕이 있고, 옆에 딸린 창고를 류 선배님이 고용한 일꾼들이 생활하는 방으로 고쳐 쓰고 있습니다.”

지성의 말대로 화방을 정리한 덕분에 화방의 일은 효율적으로 돌아갔다. 건물의 관리라든지, 화구들을 수입해오는 과정 같은 일은 류 집안의 사람들이 맡고 있지만, 화방의 관리인들은 모두 한 번씩 지성에게 도움을 청하고는 했다. 그의 수완이 좋기 때문이었다. 류는 지성의 말끝에 윤 도령 덕분에 화방의 수입이 두 배로 늘었다고 덧붙였다.

“기특하구나. 마냥 물가에 내놓은 어린아이 같았는데.”

지훈이 웃으며 지성의 머리를 쓰다듬자 지성이 목을 자라처럼 뒤로 뺐다.

“형님, 선배님도 계시는데 창피하게…….”

“왜, 부끄러우냐?”

형님도 정말…….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대는 지성은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류가 한없이 다정한 형제의 모습을 보고 있는데 일꾼이 다가와 말했다.

“음식이 다 준비되었습니다만 어디로 가져갈까요?”

“내 방으로 가져오게.”

류가 준비한 음식들은 기름기가 적고 담백한 것들이었다. 전날 지성에게 물어 지훈이 좋아하는 것들로 차려낸 것들이라, 류를 보는 지훈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

 

해가 땅끝으로 가라앉고 어떤 이는 솥에 밥을 짓고 어떤 이는 주막으로 나가는 저녁때였으나 조정의 대소신료들은 단 한 명도 퇴궐하지 못했다. 아니, 퇴궐할 수 없었다. 임금이 아침부터 지금까지 정전으로 행차하지 않은 까닭이다. 전국에서 상소가 해일처럼 밀려들고 학문에 정진해야 할 유생들이 술렁였다. 엿새까지는 상선이 돌아가라 하면 못 이기는 척 돌아갔으나, 이레였다. 꼬박 이레 동안 심신이 지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신하들을 돌려보냈으나 도성의 천한 백정마저 임금의 방탕한 생활을 수군거렸다. 더는 모르는 체하고 돌아서는 것 또한 신하 된 도리가 아니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꼭 용안을 신하들 앞에 비추게 하리라는 것이 정전에 모인 까닭이었고 그들의 다짐이었다.

“이렇게 하는데 오늘도 아니 나오시면 어찌합니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솔직히 전하께서 우리가 이런다고 눈 하나 깜짝하실 분입니까? 우리가 전부 관직을 내려놓겠다 하면 그리하라 하실 분이 아니오.”

“헹, 그럴 배짱이나 있으십니까?”

“신성한 정전에서 체통을 지키시지요. 춘령春領이 그리 언행이 경박하니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습니다.”

“그건 동령冬領도 마찬가지 아닌가? 아랫것들 간수나 잘 하십쇼. 신입은 언제까지 신입인지, 어제 또 저들끼리 싸움을 하다 한 명이 다리가 부러졌다지요?”

“싸움이 아니라……, 아니 가만 보면 춘령은 왜 항상 나한테만 시비를 겁니까?”

“두 분 다 그만하시지요.”

티격태격 주고받는 사이로 날아든 목소리는 다름 아닌 김이훈의 것이었다. 눈은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으나 그 속에 든 날카로운 빛에 두 령이 입을 꾹 다물었다.

“주상전하 납시오.”

문이 열리고 보이는 익숙한 그림자에 신하들은 고개를 숙였다. 용상에 앉은 한의 표정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았다. 무미건조한 시선으로 신하들을 내려다보던 그는 턱을 괴곤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든 해보아라.”

모두가 눈치를 살피던 때, 태학사가 앞으로 나섰다.

“전하, 전국에서 전하께서 국정에 소홀하시어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민심이 어지럽다는 내용의 상소들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하여 내 이리 조정에 나오지 않았나.”

할 말을 잃게 만드는 태도에 태학사는 고개를 들었다가 용안을 살피고는 뒤로 물러섰다.

“전하.”

침묵을 뚫은 것은 좌의찬인 김이훈이었다.

“이제 옥체 평안하신지요.”

그의 말에 한의 입매가 굳었다.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지자 이훈은 입가에 웃음기를 띠고 말했다.

“며칠 동안 궁녀 몇을 가까이하셨다 들었습니다.”

“좌상,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전하께서 용상에 오르시고 아직 후사가 없으신데 무려 이레 동안이나 조정에 나오지 않으시니 소신, 심중에 걱정이 가득하여 며칠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전하를 보필하여 나라를 돌보는 것이 신하 된 자의 도리요,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아뢰옵건대, 전하, 하루속히 후궁을 들여 이 나라의 대통이 끊이지 않게 하소서.”

이훈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몇 년간 왕실에 후사가 없으니 후궁을 들이라는 상소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승은을 내린 궁녀가 있는 것도 역시 맞았다. 그러나 한은 그의 말이 탐탁지 않았다. 본래는 당장 전날 승은을 내린 그 궁녀에게 첩지를 내릴 생각이었으나 어쩐지 불쾌하고 찝찝했다. 신하들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몇몇 사람들은 선뜻 그 말에 동의하지 못했다. 그것은 영의찬인 정주호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소신이 누구보다 태송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음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이훈의 고개가 숙어지자 다른 이들도 따라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새벽 해를 보고 나와 근 여섯 시진 만에 퇴궐하게 된 신하들의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 못했다. 정전에 남겨진 것은 왕과 상선, 영의찬뿐이었다.

“영상은 어찌 좌상의 말에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게요?”

“송구하옵니다.”

“그대는 내게 송구하단 말 빼고는 할 말이 없소?”

“송구하옵니다.”

“내게 바라는 것이 없소?”

“소신은 그저 전하께서 선정을 베푸시어 이 나라 백성들이 평안하길 바라는 것뿐입니다.”

“그 말은 내가 폭군이란 말처럼 들리는군.”

“……. 소신이 불충한 탓에 전하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죽여주시옵소서.”

주호의 말에 한이 화를 참지 못하고 찻잔을 집어 던졌다. 한의 음성이 애써 이성을 붙잡으려는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나는 아바마마가 아니오. 대신들에게 휘둘리는 겁쟁이도 아니고, 십 년 전, 힘없고 나약하던 어린 세자도 아니오. 하니 명심하시오. 이 나라의 왕은 돌아가신 아바마마가 아니라 나요.”

“……, 소신, 물러가겠사옵니다.”

주호가 물러가고, 상선은 그림자 밖으로 나와 왕의 곁에 섰다.

“침전으로 드시겠습니까?”

“잠시 예 있다 갈 것이다. 오늘은 침전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

상선은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남겨진 한은 눈을 감았다. 그의 주먹이 분노의 파도가 밀려오듯 잘게 떨렸다.

 

*

 

짹짹—.

새가 지저귀는 산뜻한 아침. 매실주 덕분인지 오래간만에 푹 잠을 잔 지성은 개운하게 눈을 떴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좀 괜찮으신가?”

꿀물이라도 타다 드려야 하나? 세수를 하고 몸을 단정히 한 지성은 류의 방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두 분 일어나셨습니까?”

지성의 목소리에도 방에서 별다른 기척이 없자 그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여전히 쥐 죽은 듯 고요해서 혹시 의외로 아침 일찍 일어나 어디 나갔나 싶어 실례합니다―하고 말하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아…….”

지성은 눈앞의 광경에 탄식했다. 류와 려운 두 사람이 꼭 붙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려운은 술버릇인지 잠버릇인지 웃통을 훌렁 벗은 채였고, 류는 얌전히 려운의 품에 폭 들어가 있었다. 조금 민망해진 지성이 헛기침을 해대자 류가 부스스 눈을 떴다.

“으악!”

“뭐야, 아침부터 시끄럽……, 이건 뭐야!”

“자네 도대체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건가!”

“뭐라는 거야? 저리 안 떨어져?”

“날 안고 있는 것은 자네라고, 려운!”

이 꼴 사나운 풍경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지금에서야 숙취가 몰려오는 것도 같은 지성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섯 시진 전, 화방.

지훈은 언제 류와 기 싸움 같은 것—일방적이었으나—을 했냐는 듯 살갑게 굴며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그것은 순전히 류의 말발과 처세술 덕분이었다. 류가 누구던가. 그는 전국 어느 지방 어느 신분의 어느 누구와 붙여놓아도 한나절이면 족히 친구가 될 수 있을 위인이었다. 까칠하던 지훈의 마음을 눈 녹듯이 녹이는 데는 상 앞에 앉아서 한 다경이면 충분했다. 물론 그것은 평소에 지성이 류에 대해서는 칭찬을 아끼지 않은 덕도 있었다.

“형님께선 그럼 관직에 나아가실 생각은 없으신 겁니까?”

“그래. 나는 그럴 그릇이 못 되거든. 그저 아이들 글공부나 시켜주는 것으로 만족해.”

부드럽게 미소 짓는 지훈의 얼굴을 보던 지성은 불현듯 무언가 떠올리곤 제 방에서 의뢰받은 소학 필사본을 가져왔다.

“형님, 이것 좀 봐주세요.”

“이건 소학이 아니냐? 이게 왜, 무슨 문제라도 있어?”

“이번에 어떤 의뢰인이 필사를 맡겼는데 오자가 너무 많습니다. 아무래도 잘못된 책을 구한 모양인데 만일 이 책의 내용이 본래 것과 같다 알고 공부를 하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혹시 학당에 다니는 아이 중에 이런 책을 들고 다니는 아이들은 없었습니까?”

지성에게서 책을 받아 장을 넘기던 지훈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니. 없었다. 이런 엉터리 책을 필사를 맡기다니, 소학은 돈벌이 수단이 아니거늘.”

“사실 돈벌이 수단으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고 벌……, 이랍니다. 수업에 소홀하니 스승님께서 벌로 소학을 베껴오라 하셨다더군요.”

그의 말에 지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제 아우를 바라보았다. 지성은 멋쩍게 웃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하하! 아무튼 형님, 혹시 주변에 이런 오자가 많은 소학으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으면 책의 출처를 좀 알아봐 주십시오. 어느 책방인지, 엉터리 책을 유통하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 흐르듯이 대화의 흐름을 돌리는 지성의 모습에 그의 형님이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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