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몽

6. 상금인지 채권인지

수감자들을 계속 통제하기 위해, 경비시설에는 최대한 이전처럼 전기를 공급했다. 그러나 감방 안에는 변기와 세면시설만 가동하고 불은 켜주지 않았다.

수감자들 사이에 불만이 들끓었으나 교도소장도 난감했다. 이전처럼 하자니 없는 전기를 끌어와야 하고, 유언 주지사도 수감자들이 통제를 벗어날 것부터 걱정했다. 교도소의 무장은 대개 개인용 소형화기라 테이저건 같은 몇 가지 외엔 당장은 쓸만해서 다행이었다.

수감자들의 노역 역시 양상이 달라졌다. 이전까지 폐기되던 낡은 가구, 금속, 플라스틱 중에서 쓸 만한 것을 골라내는 작업이 추가되었다.

플라스틱 폐기물을 완전히 재가공해 새 플라스틱 제품으로 만드는 기술은 보편화된 지 오래였지만 이제는 그 공정에 필수적인 고온, 고압을 얻을 수 없었다. 단순 세척과 수리로 재사용할 수 있는 물건들을 최대한 빨리 확보해야 했다.

이 작업이 수감자들의 건강을 위협함은 물론 그들이 꼭 받아야 할 직업 훈련 프로그램이나 운동시간까지 잡아먹는 것을 알고 유비는 작년에 주지사에게 항의했었다.

노역은 징역형의 합법적인 일부분이고 지금은 비상사태라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주지사의 답변이었다. 유비도 운동 시간만 이전대로 되돌려주는 선에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즉 여전히 전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을 노동 착취의 현장이 유주 교도소였다.

“무모한 짓이기는 했어도 자네들의 공로를 그냥 넘어갈 순 없지.”

주지사는 그 일을 잊은 듯이 말했다.

“표창과 상여금이 주어질 걸세. 자네들 세 사람과 지휘한 소대 모두에게.”

“감사합니다.”

이 기회에 관우를 명예회복 시켜줄 수 없을까 가늠해보며 유비가 대답했다.

“그런데 말이지.”

지사가 갑자기 머뭇거렸다.

“표창장은 어떻게 수공업자에게 맡겨서 만들 수 있네만, 상금이 문제란 말이야.”

“아, 그러네요.”

“이건 무공훈장급인데, 처음 모병할 때는 쌀과 전기를 약속했지만 자네들 포상까지 곡물만으로 줄 수는 없어. 그걸 어떻게 다 탁현까지 지고 가며, 어떻게 여름이 다 가도록 보관하겠나?”

“그건 그렇군요.”

예전 고기와 복숭아를 나눠줘서 처분했던 것처럼 탁현에 쫙 돌리면 안 될까 생각하면서도 유비는 계속 맞장구를 쳐주었다. 탁현까지 수송이 어렵다는 것도 큰 문제가 맞았다.

“게다가 표창의 상여금이 크다고 해서 원래 약속했던 곡물을 안 줄 수도 없지. 그건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대원들도 전부 받을 텐데, 탁현에서 과연 다 감당할 수 있을까?”

“곡물 인플레를 걱정하시는 거군요. 탁현은 큰 시가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그럼 달리 좋은 수가 있으세요?”

“음, 자네들에겐 좀 어려운 이야기겠지만 기존의 지폐나 수표로 줄까 하네.”

세 사람이 항의할 틈을 주지 않으려고 유언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대신 그것으로 곡물이든 옷감이든 다른 생필품이든, 2231년 물가 기준으로 언제든지 주 정부에서 필요한 만큼 살 수 있도록 하겠네. 다시 말해 그 상여금은 내가 가치를 보증하는 화폐로 간주한다는 걸세.”

‘2231년 물가’라는 건 조폐청이 마비되기 전을 기준으로 삼은 유주 내의 표준 물가였다. 환율, 소비자물가, 도소매가 등이 ‘2231년 물가에 최대한 근접하는 것’을 목표로 조정되었다.

물론 희망사항이고 미봉책이었다. 그러나 조폐청이 기능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그런 기준이라도 필요했다.

유주는 아직 안정적인 주고 황건교가 퇴각했다는 소문이 나면 그 자체로 신용엔 호재였다. 대량의 재화가 ‘2231년 물가’에 맞춰 움직인다면 그 역시 현재의 불안정하고 기준을 잃어가는 실제 물가를 조정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게다가 이건 급료가 아니고 유주를 지킨 공으로 받는 포상금이니까, 설령 다 실속 차려 받아내지 못한다 해도 유주의 보전을 위해 도로 내놓은 셈 칠 수 있지.’

눈을 굴려 관우와 장비를 보았다.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그들도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그도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고맙네.”

유언이 후련한 표정을 했다.

“그럼 절차 밟는 동안 쉬면서 기다리게. 황건교의 재공격이 없는지는 군인들이 정찰하고 있으니 걱정 말고.”

근처에 있는 청소년 수련원이 탁현 의용군의 거처였다. 정부청사를 나오며 유비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간옹, 이대로 돌아가면 다들 우리가 어떤 포상을 받는지 궁금해 하겠지?”

“물론이지요. 연설문 써 드릴까요?”

“아니, 연설문이 문제가 아니고. 궁금하다고 해도 방에서 쉬는데 불러내서 연설하면 귀찮을 거 아냐. 회람판을 돌려도 어느 정도는 방해하게 되고. 그냥 공지사항 써서 복도 게시판에 붙이는 게 어때?”

“방송시설이 정말 그리워지는군요.”

간옹이 한탄했다.

“그래도 이런 일이 있었으니 다들 흥분했을 거야.”

관우가 한 마디 했다.

“저녁 먹을 땐 다들 식당에 모이니까, 그때 모두 보는 앞에서 한 마디 해.”

“아, 그러면 되는구나.”

유비가 끄덕끄덕 했다. 나이가 아직 젊어서 그런가 명색 시의원이 물정 모르는 애처럼 보인다고 관우가 생각했다.

“그리고, 간옹.”

조용히 뭔가 생각하고 있던 장비가 손짓했다.

“왜요?”

“주 정부가 지금 팔 수 있는 것들이 무엇무엇 있고 수량은 어느 정도인지 목록을 입수해줘.”

“알겠습니다. 중요한 일이니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 한 가지 요청으로 다 알았다는 듯 간옹은 꾸벅 해보이고 청사로 되돌아갔다. 유비는 간옹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장비를 쳐다보았다.

“언니 하는 생각이야 안 봐도 뻔하지.”

장비가 유비를 째려보았다.

“외계인 무기 앞에 자전거 타고 돌진해서 이겼는데 상여금을 국채로 받아놓고 웃음이 나와?”

“국채라고까지 할 건 아니......지는 않군. 그래도......”

“그러니까 최대한 받아내야 한다고. 쌀이 아니면 뭐든 보존 잘 되고 가져가기 편하고 나중까지 가치 있을 만한 걸로 잔뜩 사서 돈, 아니 임시 국채를 다 써야 받을 거 다 받고 국가 상대로 돈 떼먹히지 않은 게 되는 거야.”

‘국가가 아니고 주 정부 상대야’라고 대꾸할 때가 아니라는 건 유비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살 만한 상품이 무엇무엇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한 거구나.”

관우가 끄덕끄덕 하고 유비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은 동생 뒀네. 어쩌다 둘이 이렇게 친해진 거야?”

“내가 사기 당할 뻔했는데 결정적인 순간 장비가 나타나서 구해준 건 아니야.”

유비가 중얼거렸다.

“비슷하지. 선거유세 다니다가 빵빵한 물주를 만났으니.”

장비가 어깨를 으쓱였다.

“장세평 씨나 소쌍 씨 같은 사람들하고도 내가 연결해줬고.”

“굉장하네. 그때면 넌 아직 어렸을 때 아냐?”

“내가 좀 대단하거든. 물려받은 재산도 좀 있었고.”

다시 턱을 높이 치켜드는 장비를 관우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유비의 어머니는 만났고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그런데 장비의 양친 이야기는 못 들었다.

양친이 둘 다 없기엔 좀 이른 나이인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관우도 더 묻지 않았다.

자신의 양친은 불명예제대 후 혼자 떠나오면서 소식이 끊겼다. 원래도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던 터라 지금도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하고 있었다.

더 이상 군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자괴감 느끼며 안 자르고 놔뒀던 머리가 이제는 제법 묵직했다.

“덕분에 좋았지. 괜찮은 엄마랑 언니도 생기고, 선거는 신기하게 당선되고.”

관우가 침묵하는 동안 장비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이젠 다 잘 될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외계인 때문에 세상이 망했다고 단정짓긴 일러.”

유비가 강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적어도 외계인들은 이제 떠났다고. 어떻게든 나라를 복구해놓으면 외계인이 또 오지는 않을 거야.”

“그럴까?”

오랜만에 우울한 생각을 해서인지 관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외계인은 지구인을 당해내지 못해 도망간 게 아니야. 자기들이 돌아가고 싶어져서 돌아간 거지. 그러니 다시 오고 싶어지면 언제든 다시 올 수 있는 거 아냐?”

유비와 장비의 얼굴이 나란히 의기소침해졌다.

“......그래도, 또 오지는 않을 거야.”

유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말대로 그들은 오고 싶은 대로 와서 가고 싶어지니 갔어. 즉 원한 것을 다 가져간 거야. 그러니 금방 또 올 필요는 없어. 그들도 왔다갔다하는 게 쉽지는 않았을걸.”

이런 걸 근거로 희망을 말하자니 유비도 우울했다. 그러나 외계인의 압도적인 무력 앞에서 지구인은 실제로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민간인들이 마구 학살당하지 않은 것은 용감히 맞서 싸운 덕분도 아니고 눈치빠르게 항복해서 비위를 맞춘 덕분도 아니었다. 외계인들에게 지구인이 그 정도로 아무 방해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이제 화석 연료는 없으니까.”

세 사람이 더 이상 삽질하기 전에 다행히 숙소에 도착했다. 정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딱! 하는 폭죽 소리가 터졌다.

“유비 의원님 만세!”

“관우 부대장님 만세!”

“장비 부대장님 만세!”

사람들이 로비에 모여서 박수치고 있었다. 생일 케이크용 작은 폭죽을 손에 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탁자엔 희고 둥근 생크림 케이크가 있었다. 포도알과 휘핑크림으로 만든 장미꽃이 장식된.

“이런 걸 대체 누가.......”

유비가 말을 잇지 못하고 뻐끔거렸다.

지원자들에게 전공이나 전문 기술이 있으면 지원서에 적도록 했었다. 그 중에 제과 제빵 기술자가 둘 있었던 게 생각났다.

“탁현에선 요즘 만들 기회도 없지 않습니까. 큰 도시 나오면 꼭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스포츠 형으로 머리를 깎은 빨간 유니폼의 남자와 까무잡잡한 피부에 굵은 팔뚝이 인상적인 녹색 유니폼의 여자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유비는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힘드셨을 텐데, 정말 예뻐요.”

그리고 목이 메어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어쩌지?”

말을 잇지 못하는 유비에게 장비가 중요한 문제를 지적했다.

“이거 오백 명은 냄새도 다 못 맡겠는데?”

“아니, 활약한 건 세 분이시지 않습니까.”

유비 소대에 있던 중년 남성 하나가 호들갑을 떨었다.

“세 분 드실 수 있다면 충분한 겁니다.”

“세 분의 활약으로 놈들을 물리쳤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이미 다들 작정하고 있었다. 유비는 얼굴이 빨개져서 당황했다.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데 다 같이 나눠먹기엔 너무 작았다. 이럴 때 으레 그랬듯 장비를 돌아보았다.

“역시 우리 셋만 먹긴 아깝지.”

오랜만에 맡아보는 생크림 향에 침을 꼴깍 삼키면서도 장비가 체면을 차렸다.

“한 조각씩 작게 자르면 여기 로비에 계신 분들만이라도 다 맛볼 수 있을 거야.”

“그치?”

유비가 맞장구쳤다. 관우도 끄덕거렸다.

“아니, 뭘 우리까지....”

몇 사람이 사양하며 후퇴하려 했으나 장비가 잽싸게 퇴로를 차단했다. 관우가 케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어떻게 만드신 케이크인데, 고작 세 사람 먹고 끝냅니까. 다들 한 조각이라도 입에 넣기 전엔 방으로 못 돌아갑니다.”

오랜만에 입에 넣은 생크림케이크는 꿈처럼 보드랍고 달았다. 방에 돌아와 뻗은 뒤에도 세 사람 모두 입맛을 다시며 행복해했다.

“이 닦기 싫다......”

칭얼거리는 장비에게 유비가 일침을 놓았다.

“기분은 이해하지만 닦아. 치과 가기 싫으면.”

장비가 벌떡 일어나 짐에서 칫솔과 치약을 찾아들고 욕실로 달려갔다.

“아프고 무섭고 비싸서 치과 가기 싫던 시절이 그리워......”

욕실 문이 닫히는 걸 보며 유비가 우울해 했다.

“이젠 치과에 충분히 전기와 소모품이 축적되어야만 갈 수 있지. 보험도 휴지조각이고, 충치가 안 생기길 기도하는 수밖에......그런데 누구에게?”

관우가 고개를 저었다.

“케이크도 말이야. 설탕과 신선한 크림과 달걀과 밀가루와, 하여간 등등이 필요한 거지? 몇 년 전만 해도 그런 건 동네 마트에만 가도 있었어. 그런데 이젠........그 파티셰들은 꼭 한 번 만들어보고 싶었던 거야. 큰 도시에 와서 재료를 살 수 있을 때.”

관우가 유비의 머리를 토닥였다. 유비는 아이처럼 그 손길에 기댔다.

“우리 받은 상금인지 채권인지로 설탕도 사자. 사탕수수를 다시 살 수 있게 될 때까지 설탕을 먹을 마지막 기회야.”

“그렇군.”

관우도 진지하게 끄덕였다.

“밀봉포장된 설탕은 장기보관도 의외로 어렵지 않아. 보관해두고 천천히 배급하거나 팔면 돼.”

“하지만 지사님도 유주의 설탕을 전부 팔아주시진 않겠지.”

유비가 꾸물꾸물 일어나 자기 세면도구를 챙겼다.

“설탕 말고도 우리가 탁현으로 가져가면 좋을 게 뭐뭐 있나 생각해봐야 돼. 옷이라든지, 의약품이라든지.......”

카테고리
#오리지널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