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로운 평화나라

ep1/ 퇴근하려고 했는데(1)

「대체 어떤 놈이야?」

아침부터 들려오는 고성에 몸을 일으켜 창밖을 본다.

흰 정장에 가죽 파우치.

8단지 901호 벤츠남이다.

사실 목소리를 듣자마자 예상은 했다.

벤츠남 말고 난리 칠 사람은 없으니까.

소동의 원인은 역시......

「누구 허락 맡고 내 자리에 주차를 하느냔 말이야. 앙?」

그럼 그렇지.

누군가 벤츠남 자리를 떡하니 꿰찬 모양이다.

물론 주차장에 따로 정해진 자리는 없다.

먼저 온 사람이 임자고 자리가 찼다면 빈 곳을 찾아 들어가면 그만이다.

이 8단지 최연소 경비원인 내가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다.

문제는 벤츠남이 그런 융통성을 발휘할 생각따위 눈꼽만치도 없다는 것이다.

철면피.

졸부.

소문에는 룸싸롱 사장이라는 말도 있는데 여하튼 험한 일에 몸담고 있는 건 분명하다.

벤츠남이 눈을 부라리자 지나가던 주민들이 서둘러 몸을 피한다.

결국 내가 나설 수밖에 없나?

주민의 분노를 잠재우는 것도 경비원의 업무 중 하나다.

어째 일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만.

처량한 기분으로 경비실을 나서는데 누군가 벤츠남 쪽으로 후다닥 달려온다.

「이거 제 찬데요. 무슨 문제라도?」

「문제라도오?」

「비어 있길래 주차한 것 뿐인데요. 뭐 잘못됐습니까?」

「하, 이 자식이 지금 뭐라는 거야?」

「이, 이 자식? 보자보자 하니까 말씀이 지나치시네. 당신 어따 대고 반말이야, 어? 여기 전세 냈어?」

차주로 보이는 안경잡이가 참다 못해 소리를 지른다.

달아오른 얼굴을 보니 당장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다.

벤츠남이 피식 웃더니 옷소매를 걷어올린다.

손목 부근에서 시작한 뱀 문신이 똬리를 틀며 이두박근 안쪽으로 자취를 감춘다.

문신으로 협박하기.

진부하지만 상대에 따라 효과적인 수법이다.

안경잡이 안색이 어두워진다.

「누, 누가 겁먹을 줄 알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잔뜩 겁먹은 얼굴이다.

게다가 시간은 안경잡이의 편이 아니다.

당장 출근해야 하므로.

그에 비해 벤츠남은 돌아오는 길이다.

실랑이를 벌일수록 손해를 보는 건 안경잡이 쪽이다.

잡아먹을 듯한 눈빛에 안경잡이가 꼬리를 내린다.

「지, 지금 빼려고 했어요.」

「진작 그럴 것이지.」

벤츠남이 킬킬대며 비웃는다.

그러고는 들으라는 듯 주민들을 향해 일갈한다.

「조심들 해. 오밤중에 길거리에서 객사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세상 일이라고. 뉴스도 안 보나? 쥐뿔도 없는 것들이 세상 물정이라도 밝아야 오래 살지. 에휴, 안타깝다 안타까워.」

뉴스라는 건 요새 빈번히 일어나는 사고를 말한다.

어젯밤에도 우리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뺑소니 사고로, 피해자는 맨발로 거리를 활보하다 달려오는 차에 치여 즉사했다고 한다.

아직 범인은 찾는 중이라고.

피해자가 왜 그 시각에 맨발로 쏘다니고 있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덕분에 내가 근무하는 아파트 단지가 유명해졌다.

일도 두배로 늘었다.

아파트 경비원이라는 게 그렇다.

임금은 그대로인데 주민 요구에 따라 할 일은 고무줄처럼 잘도 늘어난다.

야간 순찰을 몇번이나 돌아 몹시 피곤한 상태다.

그래도 하라면 해야 한다.

이런 직장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조금만 있으면 퇴근이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어제 하다 만 모바일 게임을 켠다.

교대자가 올 때까지 앉아서 시간이나 때우려는데 벤츠남이 아직 주차장을 서성거린다.

‘또 무슨 볼일이 남았나?’

방금 전 우락부락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느끼한 미소를 장착한 채 어딘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파트 단지 정문으로 후드 차림의 여자가 걸어온다.

검은 생머리에 청순한 얼굴.

302호, 피시방녀다.

그녀가 다가오자 벤츠남이 주인 만난 삽살개처럼 달라붙는다.

「이야, 우리 302호 동생 오늘도 예쁘네. 어디 다녀와? 피시방? 아이고, 야간근무였나 보네. 힘들었겠다.」

피시방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후드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넣고 걸음을 재촉한다.

「좀 떨어져 주실래요?」

「이크, 미안 미안. 오빠가 반가운 마음에 그만. 암 쏘리. 그건 그렇고 이제 들어가는 거야?」

「그런데요.」

「아휴, 쌀쌀맞기는. 누가 보면 겨울인 줄 알겠어. 아직 눈도 못 봤는데 말이야. 하긴 그게 우리 302호 매력이긴 하지. 눈 속에 피어난 그 뭐냐......해바라기 같다고 해야 하나.」

매화겠지.

난 경비실을 나와 슬그머니 두사람을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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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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