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티나의 악녀 (1)
001. 아직도 내가 몇 살인지 궁금한가?
세상은 인간들이 사는 언더(Under), 괴이들이 사는 오버(Over)로 나뉘어 있다.
그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걸 용납하지 않았다.
괴이들은 인간을 잡아먹고, 인간들은 그런 괴이들을 용병들로 하여금 토벌했다.
그리고 괴이를 토벌하는 집단인 '플라티나'는 기본적으로 몸을 숨기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플라티나'는 거대한 이슬레이 산맥에 버려진 대성당 안에 숨겨져 있으니까.
대성당의 외관은 버려진 지 오래된 낡은 옛 유적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 안에 마력으로 숨겨진 공간의 문을 열어야지만 '플라티나'로 출입할 수 있었다.
일단 그 문을 열고 들어오면 가장 먼저 1층의 넓은 로비와 높게 뻗은 서구식의 기둥과 인테리어,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커다란 파이프 오르간까지.
그 모양새가 빈말이라도 시시하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곳을 가득 채운 담배 연기와 술, 포커판을 빼면 참으로 완벽한 대성당의 모습일 텐데 말이다.
정말이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벌써 '죽음'을 피해 도망친 지 2년이나 지났다는 것도, 괴이인 자신이 같은 괴이를 죽이는 이곳에 속해 있다는 것도 말이다.
"으음..."
햇살이 눈을 찌르자 그녀는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불 깊숙이 머리를 파묻었다. 전날 들이킨 위스키가 머리를 울리고 있었다.
거기다 그녀가 질색하는 햇빛까지, 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대로 저녁까지 쭉 이불 속에서 쉬면 좀 나으려나 하고 있던 찰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레시아는 익숙하게 그 소리를 무시했다. 그러자 문밖의 상대방 역시 익숙하다는 듯 허락 없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오란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저 건방진 종자가 자신의 원래 신분이 오버(Over)의 도시. '피에타 백작 부인'이라는 걸 기억하고는 있는지 궁금해졌다.
여기가 언더(Under)의 땅이라고 해도 그녀는 엄연히 그보다 높은 신분이었다.
탁자 위로 달그락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건방진 남자, '늑대'의 목소리도.
"언제까지 잘 셈이지?"
단잠을 깨우는 목소리는 인정하긴 싫지만 퍽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이레시아는 한숨을 쉬며 이불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뒤집어쓴 이불이 얼굴 위로 그늘을 지어냈다.
곧이어 단정한 남자의 얼굴이 들어왔다.
인형처럼 시리도록 무표정한 얼굴, 금색 물감을 떨어트린 듯 얼룩덜룩한 눈이 아름다운 남자.
누구나 처음 보면 넋을 잃고 볼 신기한 눈은 그의 '원수'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눈이라고 했던가?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그 원수를 이레시아, 그녀라고 생각하는 것만 빼면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맹세코 남자를 만난 적이 없었다.
저런 반반한 얼굴의 남자를 봤다면 내가 기억 못할 리가 없지. 특히나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는 저런 금욕적이고 차가운 미남이라면 더더욱.
"당신..."
쟁반 위에 차가운 원두커피와 토마토로 만든 묽은 수프가 보였다. 그녀가 숙취 해소로 즐겨 먹는 음식들이었다. 짜증스럽게 한 마디 하려던 입술이 절로 다물어졌다.
'어제 술을 마신걸 어떻게 안 거지?'
의뭉스러운 기분에 이레시아는 술병이 깨져있는 방구석 한켠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어제 저걸 깨 먹었던가?'
머리가 지끈거렸다. 필름이 끊긴 모양이었다.
"... 아가는?"
이레시아는 저를 항상 졸졸 따라다니는 왠 겁 없는 어린 아이를 찾으며 물었다.
"쥰은 로비에 식사 하러 내려갔지."
쥰 세즈루. 아니, 지금은 쥰 디벨론이 맞겠지.
괴이에게 부모를 잃고 플라티나에서 돌보고 있는 고아 중 한명이었다. 쥰은 걔 중에서도 사람의 손길을 극도로 피하는 아이였다. 지금은 누가 봐도 이레시아의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고 있지만.
부모를 괴이에게 잃어 놓고, 따르는 유일한 사람이 하필 그녀라니.
도대체 어떻게 구슬려 낸 거냐고 플라티나의 간부인 '히아센'이 귀찮게 들러붙어서 물어본 것이 떠올랐다.
물론 그녀는 한마디도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플라티나'가 한동안 그 때문에 소란스러웠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지만 이레시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봤자 그녀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을 때의 소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으니.
괴이를 잡기 위해 괴이를 기른다, 라.
뭐 나쁘지 않지. 기본적으로 '플라티나'는 비밀리 움직이는 집단이고, 그 덕에 몸을 숨기기는 더없이 좋으니까.
"간단히 뭐라도 먹도록 해. 외출 허가 받고 올 테니까."
더 붙잡을 새도 없이 남자가 짧게 용건만 말하고는 침실을 나갔다.
"하아..."
이레시아는 머릿속이 정신 없이 울리는 걸 느끼며 천천히 탁상 앞에 앉았다.
차갑게 식힌 토마토 스튜를 몇 수저 배 속에 넣었더니 쓰리고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은 편해졌다. 멍한 기분으로 원두커피를 기울이던 이레시아는 찻잔을 내려놨다.
"... 그러고 보니 오늘이던가?"
습관처럼 파이프 담배를 꺼내 그 안에 말린 담뱃잎을 넣고 그녀가 마력어를 중얼거렸다.
"Brevis(간략한). Lampas(등불)."
파이프 끝에 마력 수식들이 피어나더니 순식간에 작은 불이 붙었다. 붉은 파이프를 따라 알싸한 박하 향이 빨려 들어갔다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각성 효과가 있는 박하 향을 한껏 빨아 마시던 이레시아는 탁 소리가 나도록 파이프 담배를 내려놨다.
"지겨워..."
그녀가 플라티나에서 하는 일은 간단했다. 괴이에 대한 의뢰가 들어오면 그녀의 힘과 지식을 빌려주는 것. 하지만...
"... 말이 간단하지."
실소처럼 혼잣말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는 다들 손 놔버린 풀기 어려운 문제를 대신 풀라며 던져주는 것과 마찬가지면서.
괴이가 언더(Under)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인간들은 가장 먼저 용병에게 의뢰를 한다. 대부분의 자잘한 사건들은 대체로 그들 선에서 정리가 되고는 했다.
그리고 용병들의 선에서도 해결이 안 되는 일. 예를 들어 용병들도 해결하기 힘든 상위 괴이나, 그들이 일으키는 이상 현상을 처리하는 일이 '플라티나'의 일이었다. 이래 봬도 그녀가 속한 이 곳 '플라티나'는 뒷배가 상당한 곳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뭣보다 그녀는 오버(Over) 출신이기에 괴이나, 그들이 일으키는 이상 현상에 빠삭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레시아는 '플라티나' 간부들의 불 같은 반대에도 이곳 소속이 될 수 있었다.
뭐, 반 이상은 그 남자가 간부들에게 압박을 가했던 게 크긴 하지만.
2년 전.
남자는 그녀를 자신의 원수라고 하며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들었다. 곱게 죽일 생각도 없다는 듯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몸으로 그녀는 지하 감옥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어야 했다.
제 손으로 자살을 택했건만... 죽음에서 도망친 곳에서도 죽음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대로 죽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죽기 위해 내던진 목숨. 이렇게 죽던 저렇게 죽던 아무런 상관 없었다. 그저 이 끝도 없는 죽음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는다면야.
'... 그런데, 이대로 죽고 눈을 떴을 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버리면 어떻게 하지?'
새까맣게 죽은 눈으로 심연의 끝을 바라보고 있던 뇌리에 문뜩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다시 모든 걸 잊어버린 채 돌아가겠지만, 그녀의 신은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온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 도망쳐야 해.'
정말 이게 끝일 리 없었다. 그녀의 신은 얼마든지 지금까지처럼 다시 죽음을 반복할 힘이 있었다.
살기 위해서는 계속 도망쳐야만 했다.
그래서 그녀는 결국 거래를 했다.
정말 자신이 그의 원수인 게 밝혀지면 깔끔하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대신 그때까지 그의 곁에서 그의 일을 돕겠다는 거래. 그때를 생각하자 온몸에 치가 떨리며 진절머리가 났다.
'잊자. 떠올려봤자 나만 또 사리 돋지.'
뭐, 결과는 순 나만 손해 보는 장사이긴 하지. 설마하니 하급 노예들이나 달고 다니는 '족쇄의 주술'을 내게 걸 줄이야.
'족쇄의 주술'은 주술자에게서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온몸이 난자당하는 고통을 주는 주술로, 절대 노예를 도망치지 못하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덕분에 길길이 날 뛰었지.'
평민도 아닌, 감히 '피에타 백작 부인'인 자신에게 이따위 정신 나간 주술을 박아넣었을 때는 분노에 눈이 돌아서 침실을 반쯤 박살 냈던 기억이 났다.
파이프 담배를 든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본래 가지고 있던 힘을 늑대에게 봉인해둔 지금, 그녀로서는 '족쇄의 주술'을 파쇄할 방도가 없었다.
이레시아는 의자에 기대어 흩어져가는 파이프 연기를 쳐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나는... 도대체 어디까지 도망쳐야 '당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까?
+++++
잠시 후, 식사를 마친 그녀는 샤워 가운을 두른 채 욕실에서 나왔다. 방에는 흙으로 빗은 시녀 인형들이 무표정하게 침구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제가 욕실에 들어간 사이, 늑대가 들여보낸 시녀 인형들이었다. 이레시아는 익숙하게 시중을 받으며 화장대 앞에 앉았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인형들이 수건으로 닦아내고 있던 그때였다. 별안간 문이 열리더니 작은 체구의 어린 아이가 뛰어 들어왔다.
"이레님!"
이제 다, 여섯살 쯤 돼 보이는 아이는 볼을 발갛게 물들인 채 이레시아의 허리에 매달렸다.
말끔히 다듬은 까만 머리칼에 어딘가의 귀한 집의 도련님 같은 옷차림을 한 아이는 까만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피곤한 눈을 느리게 깜빡거리던 그녀가 눈매를 휘었다.
귀여워라.
"쥰, 뛰면 못 써."
뒤에서 늑대의 잔소리가 들렸다. 아이를 따라 들어온 그의 한손에는 은쟁반과 드레스가 들려있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그녀는 익숙한 손길로 은쟁반 위의 의뢰장을 레터 나이프로 뜯어냈다. 그리고는 곧장 의뢰장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늑대는 드레스를 인형들에게 넘기고 그녀의 머리칼에 남아 있는 물기를 대신 닦아내기 시작했다.
"나간 김에 향료를 더 사야겠어. 다 떨어졌거든."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에서는 그녀가 좋아하는 '플뢰르 드 파츌리' 향료 냄새가 났다. 웃돈을 주고도 구하기 힘들다는 비싼 향료였다. 그는 의뢰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어디서 온 거지?"
"티파의 도시. 광산의 광부들이 사라진다네."
"티파의 도시라면 최근 '록하트' 광물 원석이 발견된 곳 아닌가?"
"맞아. 잘 아네."
그 광물로 인간들은 탈리스만 이라는 '마력 증폭기'나 '성물' 따위를 만들고는 했다. 애시당초 '록하트'는 고대 드래곤의 심장 파편이라는 말도 있으니 괴이라던지 이상 현상 따위를 일으키기에는 충분하겠지.
"드래곤의 심장 파편을 가지고 그런걸 잘도 만들어내다니, 인간들은 역시 신기하네."
"드래곤을 본 적 있나?"
"설마. 그들은 오버(Over)에서도 폐쇄적인 종족이라서 교류가 거의 없다시피 하는걸."
폴리모프로 인간 틈에 섞여서 교류한다는 드래곤들이 몇 있다는 소리는 들어봤지만.
이레시아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봤다.
"해츨링이라도 한번 볼 수 있음 보고 싶네 나도."
그녀가 정말 어린 용의 새끼를 보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란 건, 장난기 어린 붉은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왜?"
뜬금없이 드래곤을 본 적 있냐는 질문을 하지는 않았을 테고.
그녀의 웃음에 늑대는 미묘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직도 내가 몇 살인지 궁금한가?"
인간과 괴이는 흐르는 시간이 달랐다. 아무리 어린 아이의 모습이어도 인간들의 배 이상을 살았을 수도 있는 게 괴이니까.
물론 그 사실은 인간과 괴이의 혼혈인 그녀에게도 해당하는 것이었다.
쿼터.
인간의 피라고는 고작 반의반이지만, 분명 그녀에게는 약간이나마 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여성의 상반신과 뱀의 하반신을 가진 라미아와 밤의 몽마 서큐버스, 그리고 인간의 혼혈이었으니까.
라미아의 탐욕과 서큐버스의 욕정, 쾌락. 그리고 타락한 신의 아이인 인간.
아이러니하게도 섞인 것 그 무엇 하나도 순수를 상징하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섞인 피들은 저들끼리 어지럽게 섞여들어서 그녀를 조롱했다.
"알고 싶어?"
그녀는 사실 그보다는 훨씬 연상이었다. 그리고 연장자로서 이레시아는 자신을 욕정과 쾌락의 굶주림에 허덕이게 만드는 늑대에게 선심을 쓰듯 마음을 베풀었다.
"내 밑에 깔려서 제발 하게 해달라고 울어대면 말해줄 수도 있는데 말이지."
물론, 말이 곱게 나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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