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실패한 사랑꾼 또는 잊혀진 소설가 (3)
1차 HL 자캐 CP 주현여루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았다. 이토록 모순적인 말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사랑했지만 그리워하지도, 애타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뿐이었다. 하나 단 한 가지. 내가 진실로 연모했던 것이 있다면… 그가 만든 세계였다.
권여루는 자신의 아버지가 만든 세계를 사랑했다. 친애하는 소설가가 빚어낸 세상을 눈에 담았다. 어렸을 때는 그것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스마트폰은커녕 즐길 거리가 많지 않던 시절, 친구들과 동떨어진 소녀가 벗으로 삼을 건 책뿐이었다. 그리고 어린 소녀의 집은 그에 맞는 천국이었다. 집에는 온통 아버지의 책이 가득했다.
활자 중독자인 아버지는 글을 읽는 것도, 쓰는 것도 좋아했다. 대중을 끌어들이는 이름 있는 작가는 아니었으나 마이너한 취향을 가진 이들에게 알음알음 퍼진 소설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다작가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끊임없이, 숨을 쉬듯 책을 썼고 그가 창조한 세계가 현실을 적시는 행위는 항상 당연한 듯 벌어졌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실패한 사랑꾼이기도 했다. 연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남자는 그녀와 결혼해 곁에 두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마음을 얻는 것에는 실패했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딸인 여루가 보기에 부모님의 사랑은 양방향이 아니었기에.
실패한 사랑꾼이 쓴 소설이 잘 팔릴 리가. 물론 아버지는 연애 소설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모든 이야기에는 사랑이 존재하는 법이다. 이야기(話)란, 사랑을 먹고 피어난다. 사랑은 곧 말이었으며, 말은 행동으로 이어지기 마련. 그런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모여 사건을 만들고, 사건은 이윽고 이야기(說)가 된다.
- 마음속 바다에 여름을 묻었고, 기억을 묻었고, 추억을 묻었다. 감정을 묻었다. 연인의 비통함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 모든 의문과 답답함을 묻었다.
- 소녀는 죽었다. 그리고 소년도 죽었다. 오래전 죽은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그걸 알 때도 되었다.
- 지나간 것은 지나가게 두어야 했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비루한 책이 손에 들려 속살을 훤히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여루는 아버지가 쓴 검은 문장을 손으로 쓸었다. 손끝에 진득한 과거가 묻는다. 아버지를 사랑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시계(視界)에 비친 풍경을 나 또한 사랑했으니, 결국은 그의 영혼을 사랑한 것이나 매한가지이리라.
- 더운 계절에게 작별을 고하고, 절벽 끝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손을 놓는다. 안녕. 사랑하는 나의 과거여. 사랑했던 순간들이여.
“──권여루.”
“…!”
책의 마지막 문장을 더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고 여루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현실 세계로 붙들려 끌려 나왔다. 자신을 끄집어낸 이는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이었다. ─주현이었다. 채주현이, 노을빛을 받아 붉고 검게 빛나며, 애달프게 지는 햇살을 등지고 제 앞에 서 있었다.
“네가 어떻게, 여길...”
“오늘은 연습이 일찍 끝나서. 그냥 숙소로 돌아갈까 하다가, 네가 아직 학교에 남아있을 것 같아서 와 봤어.”
“...내가 이 시간까지 남아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여루 너, 수요일이랑 금요일은 항상 도서관이 문을 닫을 때까지 학교에 남아 있잖아.”
“……”
“알 수 있어. 아니, 알고 있어. 나는.”
주현아, 너는 언제나 나를 네 곁으로 끌어당겼다. 만유인력이 우리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처럼. 내가 어디에 있든 간에 나를 찾아냈다. 그거 하나는 네가 잘하는 거라고 나는 인정하고야 만다. 네게서 아버지를 겹쳐본다. 네 그림자에서는 잊혀진 소설가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혹은 그러길 내가 바라서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돌아갈까.”
어디로 가자는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었고, 호접지몽 가운데에 있는 소녀는 목적지를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덜 여문 소년의 뒤로 석양이 진다. 하늘이 빛을 잉태하고 사랑하는 달을 내보일 준비를 한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소녀는 눈을 감고 종이 냄새 가득한 과거로부터 도피한다.
──나는
마침내 사랑했던
기억을 놓아줄 준비를
마쳤다.
- “그를 향한 친애의 감정을 사랑이라 칭한다면 그렇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네. 육체를 떠난 정신은 마음속의 대해(大海)를 맴돌았고. 그곳은 삶의 목적지를 잊은 망망대해였으니. 떠다니는 것은 과거의 잔해뿐. 섬도, 배도 아무것도 없으며. <하물며 살아있는 것조차 없는, 감정의 파도만이 넘실거리는 남겨진 것들의 무덤>이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무덤이었으리.” (권주하, 『최초의 벼락이 서 있는 항구』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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