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설란 (龍舌蘭)

[채햄] 용설란 (龍舌蘭) - 1/10

1부: 순백의 산신

용설란 (龍舌蘭)

1부: 순백의 산신

w. 주인장

언제 세상에 났는지, 언제 세상을 뜰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이런 나를, 인간들은 선인이라 불렀다.

어느 날, 하늘이 내게 말했다.

'연정을 다 하면 용설란은 만개하게 되리라.'

달가운 천명이었다.

내 그대를 만나, 그대로 인해 내가 눈을 감을 수 있으니, 내 삶은 그걸로 되었다.


이 나라의 왕이 네 번 바뀌는 동안 불로불사의 몸으로 살아온 이가 있다. 일반 민중들은 그를 깊은 숲속에 사는 이무기, 또는 신선이라 불렀다. 그의 존재는 구전으로 내려오기만 할 뿐, 백성 중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육안으로 확인한 이는 없었다. 구전 설화 속 그의 이름은 '용설란'이었다. '용설란'이라는 이름의 신선은 고약한 성미를 가진 악인에게서 명을 빼앗아 어진 성품을 지닌 이에게 명을 나누어 주는 선인으로 묘사되곤 하였다. 그의 외향 묘사를 보자면, 큰 눈에 둥근 이목구비를 가져 그 생김새가 뱀과 같고, 기골장대하여 키는 6척이나 된다고 하더라. 불로장생의 삶을 사는 '용설란'은 연꽃잎빛의 머리칼에 백의를 입고 다닌다 묘사되곤 하는데, 이는 역설적이게도 그가 죽음을 바라기 때문이라 전해진다. 그가 이승을 떠나 승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꽃을 피워내야 하며 그 개화통이 매우 극심하다 전해지는데, 그가 온 마음을 다해 연모하면 저절로 꽃이 만개한다 하더라.

기현은 이른 아침 기침하고서 몸을 단장하고 자신이 기거하는 궁 안을 그저 거닐고 있었다. 저를 보필하는 상궁이 전하께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러 가야 한다 이르면 강녕전으로 향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에, 세자가 문안인사를 다녀온 뒤에 강녕전으로 항하는 것이 기현만의 규칙이었다. 행여나 저가 먼저 걸음을 나섰다가는 그가 시기에 이기지 못해 또 제 속을 뒤집어 놓을 것이 분명했다. 중전의 장남이라는 이유로 세자가 된 자신의 배 다른 형을 원망한 적은 없었다. 그것이 도리라고 배워 왔으니. 허나, 그는 후궁의 자식인 저가 그저 못마땅했던 것인지 그의 자리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던 것인지 어려서부터 저를 못살게 굴곤 했다. 원체 몸이 약했던 기현은 말을 타는 것조차 버거워 했고, 사냥 놀이에서도 그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기현이 걸음을 멈추고 어지러움에 잠시 눈을 감고 서 있자, 궁녀가 상궁의 지시를 받고 곧장 탕약을 가지러 길을 나선다.

"대군, 괜찮으십니까?"

"예. 그저 잠깐 어지러웠을 뿐입니다. 괜찮습니다."

"산책을 멈추시고 잠시 들어가 쉬시는 것이…."

"괜찮습니다. 곧 강녕전으로 들어야 하니."

상궁은 기현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고서 궁녀가 탕약을 가져오자 그에게 그릇을 올린다. 기현은 흰 그릇을 들어서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는 탕약을 천천히 목으로 넘긴다. 어려서부터 매일 같이 마셔 온 것이나 언제고 지독하게 씁쓸한 맛에는 적응하기 힘든 것이었다. 인상을 쓰고 빈 그릇을 다시 쟁반에 놓으니, 자신의 궁으로 낯익은 상궁이 들기에 기현은 강녕전으로 향하기 시작한다. 제 위치가 위치인지라 강녕전과 멀리 떨어진 궁에서 걸음을 하면 꼭 동궁전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꼭 마주치고 싶지 않은 이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는 인사도 하지 않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어찌 전보다 안색이 더 좋지 않은 것 같구나."

기현이 슬쩍 고개를 들어 세자를 마주하면 그는 평소와 달리 기분 나쁜 웃음을 지은 채로 기현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다. 기현이 흠칫 고개를 뒤로 빼자, 그는 무엇이 즐거운 것인지 간만에 웃는 낯을 보이며 다시 입을 연다.

"궁에 있으니 근심이 많아 몸을 더 해치는 것이니, 현비를 생각해서라도 독립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세자가 먼저 걸음을 나서고 기현은 선 자리에서 입술을 깨문다. 저에 대한 어떠한 언사도 참아낼 수 있었으나, 제 어미를 그 입에 담을 때마다 당장이라도 저놈의 목을 치고 싶다는 생각이 번뜩인다. 자신의 뒤에서 걸음을 재촉하시라는 상궁의 말에 기현은 천천히 다시 발을 떼어 낸다.

"전하, 양현대군 드셨습니다."

기현은 엄숙한 목소리에 작게 심호흡 하고서 문이 열리고 왕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한 걸음 들인다. 그에게 절을 올리고 앞에 앉아 아침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남자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건강이 호전되고 있지 않다 들었다."

"그저, 전보다 조금 더 자주 어지러울 뿐이오니 염려 마시옵소서."

"대군에게는 달갑지 않은 소식일 수 있으나, 잠시 궁을 떠나 요양을 다녀오거라."

"전하, 소자는,"

"현비의 청이니라."

기현은 그 말에 입을 다물었다. 괜히 저라는 존재로 인해 제 어미는 늘 정쟁의 희생감이었으니.

"금일 가마를 보낼 터이니 다녀오거라. 너의 건강이 호전되면 그때 다시 궁으로 부를 터이니."

"전하의 명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기현이 강녕전을 나서고 제 궁에 들고서,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무렵 자신의 궁으로 왕께서 보내신 가마가 도착했다. 이미 궁인들은 자신이 궁을 떠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모든 채비를 마치고 수레에 자신의 짐을 싣고 있었다.

"…나 홀로 떠나는 것이냐?"

"전하께서 요양지에 대군을 보살필 이가 계신다 하시며, 그 어떤 이도 따르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잠시 현비께 다녀오겠네."

기현은 저를 재촉하는 말에도 대답하지 않고 제 어미의 별궁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급히 궁 안으로 들어가 마주한 현비의 안색이 좋지 못한 까닭 또한 저 때문이리라.

"어찌 곧바로 출발하지 않으시고 걸음하셨습니까."

"궁을 나서기 전에 마마를 뵈는 것이 당연한 도리이지 않겠습니까."

왕의 애첩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가채에 귀한 장신구를 꽂은 현비는 제 아들에게 애써 웃어 보였다. 그녀도 제 아들이 요양을 이유로 궁을 나서는 것에 근심이 큰 것이었다. 날 때부터 몸이 약했던 이가 장성하도록 건강이 낫질 않고 있었으니, 어쩌면 이를 계기로 궁을 떠나야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 어미는 염려치 말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소자가 없는 동안 무탈하셔야 합니다."

"대군은 그저 대군의 건강을 우선시 하세요."

기현은 가마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으로 저거 산길로 행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창문도 열 수 없다 하였고,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 물어봐도 저들 또한 모른다는 대답뿐이니 기현은 답답함을 거두고 그저 도성을 떠나 지방 별채에 가는 것이겠거니 생각만 할 뿐이다. 한참을 덜컹이던 가마가 멈추고 기현은 가마문이 천천히 들어올려지고 나서야 좁은 공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금방 도착했구나 생각하며 당연히 대문이 있을 줄 알았건만, 제 눈 앞에는 그저 푸르른 녹음만이 무성한 산속이었다. 기현은 짐짓 당황한 눈을 하며 저를 이곳으로 데려온 자들을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본다. 세자의 시기를 받는 왕의 핏줄. 허나 주군께서 저를 없앨 이유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세자의 계략이라기엔 그가 주군을 움직일 그릇이 못 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예가 어디냐."

"송구하옵게도, 소인들도 그저 명에 따라 걸음을 멈췄을 뿐이옵니다. 전하께서 산 중턱에 다다르면 가마를 멈추라 명하셨습니다."

"내 그 말을 어찌 믿으라는 것이냐."

"어명이옵니다, 대군. 그럼, 소인은 그만 물러나 보겠습니다."

기현은 제 쪽으로 다가오는 자들로부터 작게 뒷걸음질치다가, 실로 그들이 저를 지나쳐 가마를 들고 떠나자 되려 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분명 요양이라 하셨거늘. 아무리 둘러봐도 습한 산내음만 나는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기현은 몸을 돌려 빠르게 산을 내려가려 하였으나, 기척도 없이 나타나 제 앞을 막아서는 백의에 급히 걸음을 멈춘다. 고개를 들면, 인간이 맞는지 의심될 정도로 찬란한 외향의 이가 저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기골을 보아하니 사내 같기도 한데, 얼굴만 보자니 여인 같기도 한 것이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였다. 자객이라기엔 저리 얼굴을 훤히 드러낸 데다가 백의을 입고 있으니, 그 기묘한 행색에 기현은 그와의 거리를 벌리려 걸음을 조금씩 뒤로 옮긴다. 백의를 입은 이는 기현을 천천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욱 훑어 보고서는 뒷짐을 진 채로 기현과 눈을 맞춘다. 기현은 저를 보는 얼굴에 어떠한 표정도 없음에 마른 침을 삼킨다.

"어디를 가려는 게냐?"

평생 존칭만 듣고 살아온 자신 조차도 어색하다 느끼지 못할 말투에 기현은 잠시 멍하니 있다, 귀에 꽂히는 낮은 목소리에 저 이가 사내임을 확신한다.

"잔뜩 긴장한 걸 보니, 그대 또한 영문도 모른 채 온 게로구나."

"…."

"어디 보자. 왕께서 부탁을 하셨으니 필시 왕실의 핏줄일 테고, 세자인가?"

"예를 갖추시오."

"예는 그대가 갖춰야 할 것인데."

"…."

"긴장을 풀 생각이 없는 걸 보니, 일단 편히 쉬는 게 우선일 것 같구나."

뒷짐을 진 채로 백의를 휘날리며 저를 지나쳐 가는 사내를 쳐다보다 기현은 엄히 입을 열었다.

"내 네놈이 누군지 알고 따라간단 말이냐."

"허어, 네놈이라."

사내는 고개만 돌려 기현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는 엄색도 없었고, 표정 없는 나른한 얼굴뿐이었다.

"통성명은 들어가서 하시지요."

"출신과 이름을 밝히거라."

"설명하기 복잡한 것인데."

"묻는 말에 답하거라."

"고집이 센 도련님이십니다."

사내는 한숨 섞인 말을 뱉으며 기현에게 다가가려다, 쩝 소리를 내며 다시 걸음을 옮긴다.

"싫다면 재촉하지 않겠습니다. 이 엄한 산속에 산짐승이 득실대는 것도 모르진 않으실 텐데."

기현은 미련 없이 걸음을 떼는 연분홍 머리칼의 사내를 바라보다, 때마침 들리는 뱀의 기척 소리에 놀라 사내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가시오!"

외쳐 봐도 묵묵부답인 그가 수풀 사이를 헤치자 기이하게도 잘 정돈된 회색빛 돌바닥이 드러나고, 사내는 기현을 기다리는 듯 몸을 비켜 서고서 기현을 보고 있었다. 기현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로 사내와 눈 앞에 광경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히 그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기현이 들어서고 곧바로 사내가 들어와서 수풀장막을 거두자, 꼭 이승과 동떨어진 다른 세상에 온 듯했다.

선명하게 내리 쬐는 햇빛과 그에 상반되게 겨울인 듯 서늘한 공기,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은 돌바닥뿐만 아니라 작은 못도 마찬가지였고, 그 뒤로는 궁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휘황찬란한 별채가 놓여 있었다. 기현은 경이로움에 눈을 크게 뜨고서 그 모든 것들을 찬찬히 둘러본다. 분명 산속이었거늘, 울창한 수풀과 장대한 나무들은 흔적도 없으니 기현은 제 눈을 비비고서 다시 눈 앞에 광경을 확인한다. 사내는 한참을 신기해 하는 기현을 빤히 내려다 보다가 입을 연다.

"헌데, 기이합니다."

"이 장관보다 더 기이한 일이 있답니까."

"왜 왕이 그대를 내게 보낸 것인지."

기현은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내를 바라본다. 그러고 보니 실로 기이한 것은 제 눈 앞에 있는 사내라는 것을 이제서야 깨달았다. 연분홍빛 머리칼을 한 이가 세상 어디에 있으리까. 기현은 저도 모르게 긴장이 풀린 몸에 다시 힘을 주며 사내에게서 멀찍이 떨어진다.

"어명이니 깊은 뜻이 있으시겠지요. 요양이 끝나면 다시 도성으로 갈 것입니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별채 안으로 들어서려 걸음을 옮긴다.

"드시지요. 그대의 침소는 잘 정ㄷ,"

순간이었다. 기현은 그저 못 근처에 놓인, 날카롭게 생긴 생전 처음 보는 식물이 신기하여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뻗었을 뿐이다. 기현의 손끝이 잎에 닿기도 전에 사내의 손에 우악스레 저지당했지만. 당황한 기현이 사내를 돌아보자, 사내의 슬픈 듯 짐짓 화가 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손대지 말거라."

무슨 식물 하나에 이리 유난인가 싶었으나, 사내의 것을 함부로 만지려 한 것이 잘한 것은 아니다 싶어 기현은 따지려던 말을 거두고 손목을 비튼다.

"불쾌하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사내는 기현의 손목을 놓아 주고서 못 옆에 가시 돋힌 식물에 시선을 한번 던져 주고서는 다시 걸음을 돌려 별채로 들어선다. 흩날리는 백의자락을 바라보다가 아쉬움에 선명한 초록빛을 내는 것을 봤다가, 느리게 사내가 들어간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웅장한 별채 내부에 기현의 입이 다시 크게 벌어진다. 깔끔하고 넓은 복도는 은은하게 붉은빛이 돌았고 방의 문에는 금박 테두리가 둘러져 있었다. 기현은 사내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사내가 구석의 방문을 밀어 열자 고개를 빼꼼히 내밀어 내부를 확인하다 저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 나왔다. 높은 침상은 얇은 붉은 천으로 장식 되어 있고, 그 아래 고운 비단 이불, 침대 머리에 세워진 기둥은 호박으로 장식되어 있고 그 아래로 금박 자수가 새겨져 영롱히 빛을 내고 있었다.

"여기서 묵으시면 됩니다."

"아니, 어찌 이런 귀한 것들이…."

"불편한 것은 없을 텐데, 혹여나 생기거든 저를 찾으시면 됩니다."

기현이 침소로 발을 들이고 사방을 둘러보는 것을 사내는 그저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어 바라보고 있었다.

"통성명을 해야겠지요."

사내의 말에 기현이 빛을 내는 눈을 한 채로 사내를 돌아본다. 그 모습이 꼭 세상에 처음 난 찬란한 소년의 모습 같기에 사내는 뜸을 들였다가, 잠시 고민하고서 입을 연다.

"채형원. 그리 부르시면 됩니다."

제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어색했다. 어차피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기에, 말을 마치고 '형원'이라는 말을 작게 되뇌이는 남자의 말을 기다린다. 남자는 매무새를 가다듬고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금상의 둘째, 양현대군 유기현입니다."

"아, 세자가 아니다?"

"그것이 문제라도 됩니까?"

기현은 순간 작게 인상을 쓰는 형원이라는 사내에게 쏘아붙이듯 말을 내뱉었다. 제게 걸맞지 않은 신분과 호칭, 저를 바라보는 시선들에도 이골이 나 있는 기현이었다. 다만 다른 것이라면, 다들 저를 가엾다는 듯 보았으나 이 자의 얼굴에는 의문만이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문제라기보다,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

"도대체 금상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형원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구전설화로 전해진다는 것을. 그렇기에 제 본모습을 보는 이는 왕족, 그 중에서도 왕 또는 왕위를 이을 세자뿐이었다. 이 나라에 왕이 4 번 바뀌는 내내. 헌데, 제 영역에 발을 들인 이가 왕도 세자도 아닌, 왕의 유약한 아들이라니. 기현의 표정이 엄히 굳어지자 형원은 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인다.

"지존이신데, 나름의 뜻이 있겠지요. 물러날 테니 편히 쉬세요."

문도 닫지 않고 등을 돌려 떠나는 형원을 쏘아보다가 성난 걸음을 옮겨 탁 소리 나게 문을 닫는 기현이다. 원체 왕위에는 욕심이 없던 터라 자신의 계승 서열이 밀리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 여겼건만, 이런 식의 대접을 받을 때마다 유약한 제 몸이 원망스러워지는 것이다. 이 또한 천명일 테지만, 그것이 이리 저를 괴롭히니.

기현은 호화로운 침상에 걸터 앉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본다.

식솔도 없는 것 같은데 탕약은 어찌 챙길지. 요양이라고는 하나, 과연 저 자가 저를 잘 보필할 수 있을지.

그렇게 사사로운 본인에 대한 걱정이 들다가, 문득 뜰에서 처음으로 제게 엄히 명하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그리 엄히 손대지 말라 으름장을 놓은 것인지.


잠에 들 때면 기이한 꿈을 꾸곤 했다. 연분홍빛 하늘 아래 펼쳐진 초록색 들판, 그 위에 자라난 가시 돋힌 난. 기현이 양팔로 안을 수도 없을 정도로 커다란 그것은 기현이 한 걸음씩 다가갈 때마다 꿈틀거리더니, 기현이 그 앞에 서자 하늘을 향해 연노랑빛 꽃을 피워 낸다. 기현은 비현실적인 광경을 눈에 한가득 담다가, 문득 별채의 주인이 생각나 주변을 둘러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잿빛이 되어 버리고 푸르던 들판은 버석하게 말라 황야의 색을 띈다. 그리고 다시 제 앞에 난을 바라보면, 생기 넘치던 그것은 축 늘어진 채 오직 그 꽃만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것이다.

꿈에서 깨고 나면 저가 본 것이 꼭 생시였던 것마냥 기현은 창을 열어 밖을 바라본다. 그러면 여전히 서늘한 공기가 저를 감싸고, 언제나처럼 꿈에서 봤던 그 난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영롱히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기현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제 귀에 꽂히는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밖에 무엇이 있다고 매번 내다 보십니까."

형원의 한 손에 들린 쟁반 위에는 흰 사발에 진갈색 탕약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어찌 매번 물음도 없이 제 침소에 드나드십니까?"

"그야, 이곳은 제 별채니까요."

기현이 쏘아대듯 묻는 물음에 형원은 늘 그렇듯 빙긋 웃으며 답하고서는 사발을 기현의 손에 쥐어 준다.

"쭈욱- 들이키시지요."

이 탕약은 매일 마셔도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었기에 기현은 잠시 망설인다. 어디인지도 모를 이곳에 온 이후로는 건강이 나아진 것 같기도 한데, 실로 그러한 것인지 기분탓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할 뿐이다. 의원이라도 부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형원이 재촉하듯 기현을 바라보자, 기현은 마지못해 사발에 든 약을 단숨에 삼키고서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설탕과자라도 쥐어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애도 아니고."

"아직 애가 맞으시지요. 성년도 맞지 않으셨으니."

형원의 말에 기현이 그를 쏘아보았고, 형원은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그의 손목을 끌어와 위에 검지와 중지를 겹쳐 살포시 갖다 댄다. 기현이 손을 빼내려 하자 그의 손을 더 힘있게 쥐는 형원이다.

"계십시오. 맥을 짚는 것이니."

"맥을 짚을 줄 아신단 말입니까?"

"허면 금상께서 그대를 왜 제게 보냈을까요."

형원이 부릴 줄 아는 도술 중 가장 인세에 유용한 것이라 하면 맥을 짚지 않아도 인간의 파장이 눈에 보인다는 것이었다. 또한 도술을 부려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덕에 먼 옛날에는 의원으로 살아가기도 하였으나, 그저 왕실의 부름이 싫어서, 인간에 실증이 나 산속으로 숨어 버린 것이었다. 간혹 궁에서 저를 찾을 때면 왕께서 직접 오시라 하였으나 그 마저도 귀찮은 형원이었다. 하여 기현을 처음 보았을 때도 그의 건강이 나쁘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건강한 이들과는 달리 그의 가슴팍 부근이 주홍빛으로 일렁였으니 필시 폐부가 좋지 않을 터. 허나 그에게 도술을 부려 치료하지 않은 까닭은, 그가 있어 외롭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기현은 제 손목 위에 놓인 두 개의 긴 손가락을 내려다 보다가 시선을 들어 제 앞에 앉은 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 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이름뿐. 그에 대해 묻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 보다가 그가 제 손을 놓는 것과 동시에 그와 시선이 얽힌다.

"전보다는 분명히 잡히나, 여전히 맥이 약하네요."

이마를 덮다 못해 눈 바로 위까지 자란 앞머리를 보다가, 기현은 제 손목을 매만지며 입을 연다.

"원체 약한 몸이었으니, 쉽게 나을 리가요."

"환궁하시려면 한참은 더 계셔야겠습니다."

"꼭 겁박처럼 들립니다."

"그리 들렸다면 어쩔 수 없지요."

형원의 말에 기현은 약하게 미간을 찌푸렸고, 형원은 그런 기현이 귀여워서 작게 웃어 보인다. 놀리는 재미가 있는 소년이란 말이지. 제 말 한 마디마다 저리 정직하게 반응을 해 주니 심심할 겨를도 없고.

"제가 이곳에 온 지 이레가 지났지만 그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어차피 떠나실 분께서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기현은 곰곰이 생각하다 가장 궁금했던 것에 대해 입을 연다.

"앞뜰에 있는 저 식물은 무엇입니까?"

형원은 애써 편한 얼굴을 해 보이려 눈썹을 올렸다 내린다. 기현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꼭 한숨 같다 생각한다.

"제 본 모습이라고 해 둘까요."

"농이 지나치십니다."

형원은 쓰게 웃고는 기현과 눈을 맞춘다. 맑은 두 눈동자에 담긴 자신의 모습은, 실로 별채 앞뜰에 있는 그것인 것을.

"제가 가장 아끼는 난입니다."

"난이요?"

기현은 제 상식과 다르게 생긴 외형을 다시 확인하려 창밖으로 목을 빼고 그것을 눈에 담는다. 보통 난이라 하면 길고 얇은 잎이 곧게 뻗어 있는 형태인데.

"제가 그리 이름 붙였습니다. 물을 주지 않아도 쉬이 죽지 않고, 때를 기다려도 꽃이 피지 않으니. 그 고집이 난과 같아 그리 부릅니다."

"허면, 만지지 못하게 한 연유도 그대가 가장 아끼는 것이라 그런 것입니까?"

"…그렇지요. 녀석이 보기보다 예민하여."

"결례를 범할 뻔했습니다."

"그래도 고운 눈으로 봐 주세요. 생각보다 여린 것이니."

기현은 창밖을 내다 보던 것을 멈추고 다시 제 앞에 앉은 이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이내 그의 얼굴에 가득 찬 슬픔에 의아해지는 것이다. 늘상 장난기 섞인 웃음을 띄고 있던 이의 우울한 모습 또한 낯선 것이었으니.

"괜찮으십니까?"

형원은 저를 마주보고 있는 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다시 가면을 쓰듯 그를 향해 빙긋 웃어 보인다.

"무료하면 또 찾아 오겠습니다. 그러니 그대도 무료하실 때면 꼭 나를 찾아 주세요."

형원은 침상에서 일어서며 사발과 쟁반을 챙겨 들고 기현의 침소를 나선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복도에 난 창문 너머로 용설란이 꼭 저에게 인사하듯 고개를 내민다. 형원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그것을 눈에 담다가, 부엌으로 가 대야에 사발과 쟁반을 던지듯이 놓고서 뒤를 돌아 본다.

"꽃이 피지를 않으니 죽지도 않지."

형원은 한숨을 내쉬듯 읊조리고서 짜증을 담아 대야 담긴 것들을 씻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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