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안 IF였던 것
카린x리안
만약 리안이가 칼을 휘두르지 않았다면
만약 카린이 마음을 밝혔다면
사실 그냥 둘이 꽁냥거리는 걸 보고 싶었습니다
워낙 옛날에 썼기도 하고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르겠고..
더 이상 안 이을 거 같아서 걍 미완성인 채로 올려요~~~
“형님, 안에 계세요?”
바깥쪽에서 조금은 하이톤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제 방 책상에 앉아 독서를 하던 형님이라 불려진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읽던 페이지의 모서리를 접어 표시를 한 뒤 책을 덮었다.
“들어오세요, 황태자님.”
그가 말하자 문 앞에 서있던 사용인이 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보여진 남자는 이 제국의 황태자, 딘이었다. 딘의 형, 리안은 사용인에게 차를 타오라며 손짓하였다. 사용인이 나가자 딘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둘만이 남은 공간에서 아까와는 다르게 리안은 딘에게 가벼운 어투로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어?”
“저번에 형님이 말씀 하신 거, 아버님께 얘기 드렸거든.”
딘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리안의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뭐라고 하시던?”
“제 부탁이니 생각해 보겠다고 하셨어요. 하여간, 잘나디 잘난 황제님께서는 편애가 너무 심해요. 형님이나 기사님이 그렇게 얘기할 때는 들은 척도 안 하더니.”
“..나야 마녀의 자식이고, 걔는 신하에 불과하니까.”
리안이 제 다리를 꼬며 말을 이어갔다.
“뭐, 내가 이렇게 목숨을 붙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마녀의 자식이 황태자를 해하려 하기까지 했으니까.”
어린 소년이 바들바들 떨며 제 호위기사 뒤로 숨는다. 갓 어린 티를 벗은 듯한 호위기사는 칼을 고쳐잡아 제 주군을 해치려는 남자에게 겨눈다.
“몸을 피하십시오, 황태자님.”
소년은 기사의 옷자락을 꼭 쥐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황태자를 습격한 남자가 칼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걸어온다. 그 남자의 초점없는 샛노란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기사는 손에 땀이 나고 온 몸이 떨려왔지만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기사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황자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반역죄에요.”
남자, 리안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기사, 카린은 여전히 경계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있다.
“망할 황제가 저 녀석의 어미에 눈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어머니를 보호했겠지. 그렇게 허무하게 사냥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거야.”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고 저 어린 게 제국을 이끄는 황태자라고? 이미 성년이 된 내가 있는데? 부당한 처사야. 옳지 않아. 난..”
리안이 칼을 치켜든다. 카린이 칼을 더 세게 쥔다.
“저 녀석이 죽으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까?”
“정신 차리세요, 황자님.”
카린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는 울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그 정 많던 황자를 저리 만들었는가. 여전히 소년, 어린 딘은 카린의 옷자락을 꼭 부여잡은 채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지켜야 한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임무. 카린이 머릿속으로 말들을 되뇌었다. 제아무리 가까운 친우이자 주군이었던 리안이더라도 황태자를 해하려 한다면 가차없이 베어버려야 한다. 카린이 한 발 한 발 리안에게 다가선다. 리안은 미동없이 저에게 다가오는 카린을 응시할 뿐이었다.
“날 죽일 거니?”
카린이 발을 멈추었다. 난 그를 죽일 수 없어. 카린은 온 마음이 갈가리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친구이자 주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세상 그 누구가 마음 깊이 품은 자를 베어버릴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카린도 마찬가지였다. 카린이 행동을 멈추자 잠시 그를 지켜보던 리안이 그에게로 다가섰다. 리안은 제 칼을 내려놓더니 카린의 손목을 붙잡아 칼을 제 목에 가져다 댄다.
“죽여.”
바싹 붙인 나머지 리안의 목이 얕게 베였다. 한 줄기의 피가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리안은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죽이라고. 반역죄를 저지른 황자를 죽이란 말이야.”
카린은 리안의 손을 내치고 칼을 떨궜다. 할 수 없다. 한 때 주군이었던 자를 감히 죽일 수 없다. 리안은 카린이 떨군 칼을 주웠다. 리안이 정신이 나간 사람마냥 하핫, 하고 웃었다.
"그렇다면 저 녀석이 죽더라도 할 말이 없겠지."
카린이 손을 뻗어 리안을 막았다. 둘 모두를 지킬 수는 없는 걸까.
"이런다고 돌아오지 않아요."
"왜 날 막아서는 거니? 못 하겠다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날 죽이지 않은 거 아니냐고."
"황자님."
"저 녀석 때문에 나의 모든 게 떠나갔어. 어머니도, 너도, 나의 정체성도."
"리안님."
카린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리안은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제 세계에 갇혀있다. 딘은 공포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저 녀석이 문제야. 모든 것의 원흉이라고. 없어지면 모든 게 나아질 거야. 이보다 더 나쁠 일은 없을 거야."
리안이 카린을 칼 손잡이로 세게 쳐 밀어버렸다. 카린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헉 소리를 내며 고꾸라지고 말았다. 리안이 칼을 높게 들었다.
딘이 제 형을 빤히 쳐다본다. 리안이 말한 것은 사실이기에 그는 감히 말을 얹을 수 없었다. 리안의 씁쓸한 표정 탓에 딘은 괜시리 저도 심란해졌다. 딘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다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형님, 기분 전환할래?”
“으응?”
“이렇게 맨날 방구석에서 책만 읽고 산책이나 하고 기껏해야 외출하는 건 사교회 정도인 건 너무 무료하잖아요. 그러니까 며칠… 좀 멀리 나갔다 오라는 얘기에요.”
“별장에라도 가라는 거니?”
“그것도 나쁘지 않지.”
“별로 나가고 싶지는 않네. 뭔가를 즐기는 건 이 방 하나면 충분해.”
리안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떨군 채 방금 막 사용인이 가져다 둔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딘은 잠시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형님 뜻이 그렇다면야.. 난 기사님한테 사흘 정도 휴가를 줄까 하고 있었는데.”
움찔. 리안이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그는 도로 딘을 바라본다. 딘이 다시 한 번 싱긋, 웃는다.
“둘이 좀 쉬다 오라고. 요즘 형님 고민 많아 보여서 휴식이 필요할 거 같은데, 형님이 제일 편안해하고 의지하는 게 기사님이잖아. 가장 가까운 벗이고. 그래서.. 둘이 가면 어떨까 해서 얘기 꺼내 봤어요. 기사님이면 다른 사람들 복잡하게 데려갈 필요도 없으니 형님이 마음도 더 편할테고… 기사님도 최근에 밤 샌 일이 많았어서 휴가 나가면 좋을 거 같기도 하고.”
“정말이야?”
리안의 표정이 밝아진다. 딘은 기뻐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딘.”
“왜 불러요?”
“고마워. 정말로.”
리안이 옅은 미소를 띄운다.
“에이, 겨우 이 정도 가지고 뭘. 난 기사님말고도 다른 지켜줄 분도 많고 또…”
“아니, 날 용서해준 거, 그리고 지금까지 내게 해줬던 거 전부.”
“낯 간지럽게 갑자기 무슨..”
“늘 고맙게 생각해.”
딘은 쑥스러운지 고개를 돌린 채 뒷통수를 긁었다. 리안은 찻잔을 들어 차를 들이켰다.
“리안.”
카린이 울먹이며 리안의 이름을 불렀다. 리안이 칼을 들어올린 손을 멈추었다.
“이건, 이건 아니야…”
“카린, 넌 날 평생 지켜주겠다 했었지.”
넘어져있던 카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리안의 얼굴은 분노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날 떠났잖아. 저 녀석 때문에. 저 녀석만 없으면 다시 내게로 돌아올 수 있어. 내게..”
“아니야. 아니라고.”
카린이 달려가 리안을 와락, 껴안았다. 품 가득히. 칼을 쥔 리안의 손이 툭, 떨궈진다.
“그만해 리안, 제발. 너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잖아. 황태자님 때문이 아니란 것도 알잖아. 내가 곁에서 다 들어줄테니까, 리안.”
리안의 손에서 칼이 떨어진다. 리안이 카린의 위로 엎어졌다. 카린은 자신에게 기댄 리안을 지탱하기 위해 더 세게 끌어안았다. 리안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 있던 딘도 덩달아 울기 시작했다. 공포감 때문인지, 안도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황궁의 뒷 문. 리안이 서있고 딘과 그의 기사가 건물 안에서 나왔다. 본래 황자가 어디를 갈 때는 어느 정도 규모의 기사와 시종들이 뒤따르기 마련인데, 리안이 요청한 탓에 그 누구도 함께하지 않게 되었다. 오로지 일주일 간의 휴가를 받은 호위기사와 리안만이 이 곳을 떠난다.
“황자님께 인사 올립니다.”
딘의 기사가 앞으로 나아가 리안에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격식을 차리지 않은 간결한 옷을 입고 있는 리안이 고개를 끄덕하고는 기사에게 일어날 것을 명했다. 기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가 지키는 황태자에게 예를 갖춰 몸을 숙였다. 딘이 웃으며 말했다.
“잘 다녀와.”
짐 가방을 둘러 맨 기사는 딘의 인삿말을 들은 뒤 말을 두 마리 끌고 돌아왔다. 딘은 그가 말을 끌고 오는 것을 확인한 뒤 곧 있을 일정 탓에 서둘러 건물로 들어갔다.
“..두 마리나 데려가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자원 낭비야. 한 마리에 둘이 탈 수 있는데 굳이…”
리안이 말끝을 점점 흐리며 중얼거렸다. 기사는 리안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짓더니 한 마리는 도로 마굿간에 데려다놓고 왔다. 그는 리안이 말에 오를 수 있게 도운 뒤 짐 가방을 안장에 매달고 말에 올라탔다. 그 뒤 손을 뻗어 리안의 허리를 거쳐 말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이걸 원하신 겁니까?”
“윽, 카린. 민망하니까 굳이 확인하지 말아줄래.”
딘의 호위기사이자 리안의 연인인 카린이 살짝 웃었다. 사실 둘은 몇 달 전부터 연애 중이었다. 가장 가까운 딘조차도 모르게. 딘은 둘을 그저 마음을 깊이 나눌 정도로 가까운 친구로만 알고 있었다. 카린이 발로 말 허리를 툭툭 차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은데 왜 그리 돌려말하십니까. 물론 이런 모습마저 사랑스럽기 그지 없지만요.”
리안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말이 앞으로 천천히 가더니 이내 속도를 올려 달리기 시작했다. 둘은 한참을 달려 무역항에 위치한 황가 소유의 작은 별장에 도착했다. 뭐, 일반적인 백성들의 집보다 조금 크기는 한 별장이긴 하지만 말이다. 카린이 먼저 말에서 내린 뒤 리안을 가볍게 들어 말에서 내려놓았다.
“잘 방만 대충 치워두고 시내 구경이나 하러 갈까.”
“좋아요.”
“이제는 둘 뿐이니까, 어릴 때처럼 말 편하게 해. 최대한 간결하게 입었으니까 우릴 황가 소속이라 생각할 사람도 없을 거고…”
“응, 리안.”
카린이 리안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은 뒤 먼저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 리안은 얼굴이 새빨게지더니 무어라 투덜거리며 뒤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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