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들과 이혼하는 법

[BL] 1. 이혼을 하려면 일단 (3)

리마 by 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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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들의 향후 미래를 책임져주실 분께서는 문 앞에 놓인 문구를 보고 우두커니 서 계셨다. 하슬란에 올 순례객들과 그 가족들은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어르신께 말 많은 사람으로 기억에 남을까봐 침묵을 지켰다.

문구도 황당했지만 동해는 벽돌틀이 놓인 위치가 더 어이없었다. 오늘 수레 타고 나간 사람은 문을 막아두면 날아서 들어가나? 먼 옛날에는 하늘을 날며 선물을 주는 수레가 있었다지만 오늘날에는 그런 것도 없다. 벽돌틀은 측량기기보다는 무겁지도 않았다. 동해가 벽돌틀을 옆으로 치우자 사람들은 하나둘 내려둔 보따리를 짊어졌다. 고삐를 챙긴 동해는 문을 열다가 호통세례를 받았다.

“순례객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혹시라도 용감하게 집에 들어올 순례객이 있을까봐 문 앞을 지키고 섰던 마니는 멋쩍었다. 사람들 앞이라 동해는 남편을 책망하기 어려웠다. 대문을 닫고 외양간 안까지 쑥 들어와서야 동해는 마니를 돌아보았다.

“언제 우리가 순례객 안 받는다고 했어? 사람들 들여.”

“싫어.”

“한 해를 준비한 사람들인데 그냥 보낼 거야?”

“당신은 우리 슬아한테 그런 일이 생겼는데 남들만 생각해? 어떻게 그렇게 냉정해?”

외양간으로 들어오던 다른 하슬란 사람들은 돌아가는 상황을 보고 조용히 물러갔다. 가뜩이나 아슬라가 아버지뻘 동성을 짝으로 점지받아서 집안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불똥을 맞고 싶진 않았다.

동해도 마니가 무슨 생각으로 의논하지도 않고 순례객들을 막았는지는 알았다. 오로지 아슬라 뒤를 봐주려고 마니는 사브랑 두레에서 행도를 맡았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끄는 걸 싫어하면서도 말이다. 아마도 마리한이 뜻을 굽힐 때까지 마니는 순례객을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조카들 일이면 순하던 사람이 막 나가는 건 예순이 넘어서도 고쳐지지 않았다. 동해는 마니가 마음을 가라앉힐 때까지 가만히 남편을 응시했다.

“이러질 않으면 우리 말은 듣지도 않으시잖아.”

“아직 마리한께 말씀도 안 드렸어.”

아내가 보내는 시선에 비난이나 분노는 담겨있지 않았지만 마니는 조금씩 목소리가 낮아졌다. 마니가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준비가 됐다는 생각이 들자 동해는 마니에게 부탁했다.

“다음부터는 같이 이야기해보고 설치해.”

“알았어.”

“슬아는?”

“자고 있어.”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안 먹었어.”

“허기지겠다. 깨워서 뭐 좀 먹이고 재우든지 하자.”

일단은 순례객들부터 들여야 했다. 동해와 마니는 대문을 열러 갔다.

순례객들 중 일부는 문이 열렸을 때 마니를 알아보았다. 사브랑에 사는 성인 남성들은 모두 두레에 속해 있었다. 두레에서 모여서 집집마다 돌아가며 밭을 갈고 건물을 보수할 때마다 두레의 우두머리인 마니가 가장 앞장섰다. 마니가 무슨 일로 순례객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지 순례객들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하슬란네 대문이 다시 열렸다.

“순례객들은 마당에 들어오십시오.”

혹시나 말이 번복되고 문이 닫힐까봐 순례객들은 서둘러 일어났다. 따라왔던 가족들은 한참 지켜보다가 돌아섰다. 하슬란네에서 예고 없이 순례객을 받지 않겠다고 한 이유가 궁금했지만 혼자 온 순례객들이 몰려드는 와중에 괜히 질문을 해서 가족이 따라왔다고 주목을 받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갓 성인이 되고 하루빨리 좋은 집안에 들어가고 싶었던 남자들은 가족들보다 생각이 짧았다.

점심 때가 되어서 하슬란 사람들은 기름칠해뒀던 솥을 꺼냈다. 첫날은 순례객들이나 그들을 받아준 집이나 잘 먹고 쉬면서 안면을 익혔다. 첫인상을 좋게 남기고 싶어서 잽싸게 가마솥 아래 장작도 찾아 넣고 밥 지을 물도 떠오던 이들은 하슬란 사람들과 접촉하자마자 궁금증을 풀려 했다.

“아침에 와보니까 순례객을 안 받는다고 적어두셨더라고요.”

“그랬어요?”

“무슨 일이 있으셨어요?”

“별일은 없었어요.”

하슬란 사람들은 동해 말마따나 아직 확정되지 않은 혼인을 입에 올리고 싶지 않았다. 불을 보면서 둘러댈 말을 생각할 동안 자신들이 아침에 미처 막지 못했던 사람이 불을 지르러 올 때까지는.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꺼내다 동해 앞에 내놓은 마니는 동해가 점심만 먹고 곧바로 궁으로 출발하리라 여겼다. 순례객이 온 첫날에 집안 어르신인 동해는 인사하고 얼굴 익히느라 나갈 시간이 없었다. 순례객들 점심 식재료가 충분한지 확인하고 저녁에 쓸 침구를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마니는 동해가 오늘은 더이상 집밖에 나가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하루빨리 그 간악한 영감탱이를 조카아들한테서 떼어내고 싶었던 마니는 아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종소리마냥 같은 말을 반복해댔다.

"여보, 이제 마리한께 가서 아슬라 혼담 취소해달라 그래."

"여보, 이제 마리한께 가서 아슬라한테 서신 중매 취소해달라 그러자."

"여보, 이것만 하고 마리한께 가서 아슬라 혼담 취소해달라 그럴 거지?"

1.9미터가 넘고 어깨가 떡 벌어진 마니는 눈에 안 띄기가 어려웠지만 하는 말때문에 순례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안 그래도 이 집안에는 장군인 하슬라와 막 성인이 된 딸에 두레 행도인 마니까지 있었다. 순례객들은 하슬란 사람들에게 잘 보일 건수만 노리던 참이었다. 순례객들은 곧바로 순례객을 받지 않은 이유를 혼담과 연관지었다. 마리한께서 아슬라에게 넣은 혼담이 문제였다는 사실이 퍼지자 야심찬 순례객들은 하슬란 사람들에게 기억될 만한 일을 벌이려고 몸이 달았다. 식사를 마치는 순간 순례객 대다수는 앞다투어 집밖으로 달려나갔다.

마니한테 아슬라 점심 준비해달라고 부탁해서야 동해는 마니를 떼어냈다. 평소같으면 시무룩해져서 물러갔을 마니는 유독 오늘 끈질겼다. 손님들이 식사를 마칠 시간이 되면서 동해는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순례객을 받은 첫날에는 항상 자신을 비롯한 가족 구성원들을 순례객들에게 소개했다. 식당에 가까워져서도 말소리는커녕 그릇 소리조차 들리지 않자 동해는 의아했다. 식당에는 빈 그릇들과 수저만 식탁에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사람들은 주변에 보이는 수저며 그릇들을 주섬주섬 한줌씩 쥐어서 모으고 있었다. 이렇게 대다수가 밥 먹자마자 먹은 것도 치우지 않고 사라지는 경우는 처음이라 동해도 난감했다. 젊은 남자들이니 마당에서 공차고 놀겠지 싶어서 동해는 주변에 보이는 남자들을 불러서 마당에 모여달라고 일렀다.

보이는 대로 불렀음에도 남자들은 손에 꼽을 정도만 남아있었다. 첫날에 집안 분위기를 살피고 식사만 마치고 떠나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빈 방에 짐을 두고 가진 않았다. 자유시간에도 집에 남아 살살거리며 집안 식구들에게 인사하는 남자들이 동해는 더 익숙했다. 동해는 남은 사람들이라도 불러 모았다. 올해 모인 순례객 5명은 하슬라 저택과 가족들을 소개받았다.

같은 시각 아들을 하슬란에 맡긴 가족들은 드디어 마음 놓고 집에 돌아가던 중이었다. 이상하게 낯익은 남자들이 가족들을 제치고 대로를 따라 달려갔다. 장날이면 대로 끝으로 달려갈 만 했다. 하지만 오늘은 하슬란에 순례객들이 모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무사히 하슬란 대문을 넘어간 아들이 마리한 궁까지 이어지는 길을 달릴 리는 없었다. 가족들은 점심에 감자를 쪄먹을지 고구마를 쪄먹을지 의논하며 집으로 향했다.

상대방을 위한 행동이라고 해도 이 상황이 자신이 개입해도 되는 상황인지 잘 생각해봐야 할 때가 있다. 궁 앞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 중 누구도 동해든 하슬라든 자신들이 마음에 들고 싶어한 사람들 머릿속에 기억되는 사람도 아니었다. 더욱이 아슬라가 혼인을 하고 싶은지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마리한께서 부르시면서 아슬라는 누나인 하슬라 아래에서 마리한 아래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마리한께서는 어제 아슬라가 한 말에 ‘그렇다’고 답하셨다. 따로 부르기 전까지는 집으로 돌아가서 쉬라고 명하셔서 아슬라는 근 스무 해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슬라는 집에 돌아온 첫날부터 정말 행복했다. 저녁밥 먹자마자 잠들었지만 자도 자도 더 잘 수 있었다. 아침이 되어도 아무도 깨우지 않았다. 그래서 한낮에 잠깐 집안에 남자들 말소리가 가득할 때까지는 잠을 충만하게 즐겼다.

그래도 잠이 부족하긴 했다. 멍하니 누워 있는 동안 소리는 싹 사라졌다. 어쩌면 수영에 있던 기억이 꿈에 나왔나보다. 일어나서 방 밖을 살펴봤지만 그 많던 남자들이 순식간에 사라질 리 없었다.

아슬라가 일어나면 언제든 쓰도록 마니는 세숫물과 다린 옷을 준비해두었다. 혹시나 남의 새끼 챙기다 내 새끼 굶길까봐 마니는 잠든 아슬라 옆에 누룽지 쟁반과 물주전자도 놔뒀다. 막상 일어나니 배는 고프지 않고 할일은 없었다. 군 소속이니 아슬라는 두레일이나 집안일을 할 수도 없었다. 그러면 잠이나 더 자려고 누우려던 차에 어제 집에 와서 서랍장에 올려둔 화장갑이 보였다. 수리모는 이번 혼인을 두고 할 말이 많아보였다. 어제 도착해서야 수리모가 혼인 상대라는 사실을 알았던 터라 아슬라는 혼인에 대해 별 생각도 없었다.

수리모는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했다. 아슬라는 보자기를 찾아 누룽지를 죄다 쏟아부었다.

오늘 아침 태화는 식사를 일찍 끝내고 마리한궁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동생을 찾았다. 20살 넘어서는 알아서 순례도 다니고 궁에 들어가서 마리한을 보필해왔는데도 태화에게는 아직 보살필 동생으로 보였다. 수리모는 이제 60이 넘었다. 이전 마리한께서 남편으로 들이지 않으셔서 수리모는 공식적으로는 아슬란 사람이다. 딱히 바라는 것도 없고 집안과 마리한을 위해서만 봉사해온 동생이 나중에도 혼자일까봐 태화는 마음에 걸렸다. 자신이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자신이 밀어붙이면 집안사람들도 동의할 것이다. 태화는 동생이 뭘 바랄지 알고 싶었다.

“모야, 네가 하고 싶으면 혼인은 해도 돼.”

“누나, 무슨 말이야. 내가 그 애 아버지 벗이야.”

동생이 질색하는 표정을 보기도 전에 태화는 머쓱했다. 수리모가 예전에 아슬라 아버지인 덕우랑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이 그제야 기억났다. 어느 순간에 그이가 수리모 삶에서 사라져서 태화도 아슬라가 수리모가 먼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었다.

수리모가 출근하고 점심 먹을 때쯤 태화는 바깥에 다녀온 가족을 통해서 마리한 궁앞에 벌어진 상황을 들었다. 궁 밖에 모인 순례객들 얘기를 듣고 아슬란 사람들은 별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몇 사람인가가 어느 분께 혼담을 넣었길래 남의 집 혼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궁금해하긴 했다. 태화는 가족들이 혼담 상대를 알고 나서도 반응이 같길 바랐다. 몇몇 이들이 의논을 마치고 태화에게 다가왔다. 태화도 그들 생각에 동의했다. 집이든 궁이든 어디에서 동생이 잠들더라도 오늘은 괜찮은지 얼굴을 보러 가야 했다.

처음에 정문 경비는 몰려온 이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굳이 마리한께 말씀을 전할 필요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하슬란 사람도 아니고 혼인 상대 가족도 아닌 사람이 남의 집 혼사를 취소해달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었다. 경비가 청을 들어주지 않자 순례객들은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마리한의 지병을 아는 경비는 결국 잠시 문을 닫아걸고 집무실로 향했다. 그 사이 고함소리는 점점 커졌다.

“젊은 남자들이 마리한께서 아슬라에게 서신 중매를 취소해달라고 청합니다.”

하슬란에 잘 보이고 싶어하는 이들이 상황을 야무지게 악화시키는 동안 형산은 편두통이 도져서 옆머리를 꾹꾹 눌렀다. 보고받을 내용은 마리한도 짐작하지 못했다. 형산은 곁을 지키고 선 수리모를 살폈다. 남들은 수리모가 무던하다지만 형산은 태어나서부터 수리모를 곁에서 봐왔다. 수리모는 섬세하고 여렸다.

"본인들 혼사여야만 언급할 수 있다고 전하십시오."

직함은 서기지만 실제로는 온갖 잡무를 다 하는 수리모는 마리한께 올릴 점심을 차려왔다가 의도치 않게 바깥 상황을 들었다.

형산은 우두커니 서있는 수리모의 등을 두드렸다. 어릴 때부터 머리가 아프면 마리한은 수리모가 구워준 감자를 먹었다. 먹고 나면 두통이 가셨다. 샤로에서 으뜸가는 자리에 앉아있는 형산이지만 심란한 사람에게 자잘한 부탁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형산은 잘 먹겠다고 인사하고 수리모를 내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리한은 막 집무실에 방문한 딸에게 부탁했다. 소란은 멈추지 않고 이제는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까지 가세했다.

“나정아, 할아버지께 가서 감자 좀 구워달라고 말씀드려줄래?”

쇳소리는 순례객들이 집에서 가져온 가마솥과 국자, 가위가 부딪히며 나는 소리였다. 그냥 고함소리만으로는 마리한을 불러내기 힘들 것 같자 순례객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가족들은 가마솥과 국자, 가위, 곡괭이까지 챙기는 순례객들을 보자 어이가 없었다. 하슬란에서 가져오라는 것도 아니고 시키지 않은 쌩이질을 치러 간다는 말을 듣자 가족들은 애가 타서 순례객들을 따라가며 말렸다. 하슬라는 장군이지만 군 통수권자는 마리한이셨다. 이러다간 아들이 요즘 쓰는 의미가 아니라 진짜 순례객이 될 수도 있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밥을 먹고 고대인들이 남긴 유적에서 잠을 자는 남자로.

아슬라가 도착했을 때는 소란이 조금 가셨다. 정문이 닫아걸려있어서 아슬라는 담을 따라 빙 둘러갔다. 스무 해 전쯤 해적들이 침입한 후로 사브랑에 있는 모든 집들은 가족들만 아는 곁문을 달았다. 앞으로 마리한께서 부르시면 근무하러 올 곳이라 아슬라는 곁문을 미리 찾아두고 싶었다. 그리고 담 너머로 이제 확연히 흰 빛깔이 나는 폭닥한 머리꼭지가 보였다.

“수리모.”

수리모는 반사적으로 굳었다. 이미 궁 앞에서 진을 친 남자들이 외치던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아슬라의 혼인 상대가 누군지 알아냈을까봐 수리모는 심장을 졸였다. 샤로를 다스리는 마리한보다는 누구 남편도 아니고 서기인 수리모를 공격하기가 더 쉬웠다. 수리모는 남자가 자신을 불렀다면 좋은 일은 아닐 거라고 여겼다. 근거없이 이어질 비난을 피해서 숨으려다가 수리모는 재차 부르는 목소리가 누구 것인지 알아차렸다.

“수리모, 이야기 좀 할 수 있어요?”

아직 아슬라는 공식적으로 궁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곁문은 보안과 관련되어서 궁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수리모가 알려주기 힘들었다. 하지만 직접 마리한께서 대기하라고 명하시는 말씀을 들었던 터라 수리모는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담을 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수리모가 제안하자마자 아슬라는 담 안에 착지했다. 수리모가 자신을 말똥말똥 바라보자 아슬라는 머쓱해졌다.

“수영에 있을 때 밭에서 생활관 문까지 멀었거든요.”

그래서 담 넘는 법을 익히는 사람도 있나보다. 아슬라가 하는 행동이 꼭 제 아버지 젊을 적 하던 모양과 닮았지만 수리모는 편안하거나 즐겁지 못했다. 저들보다 아슬라는 20살은 많았지만 수리모에게 아슬라는 밖에서 고함치고 행패부리는 젊은 남자들과 더 가까운 나이로 보였다. 소음은 잦아들었지만 수리모는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아슬라가 자신에게 할 말이 두려웠다. 이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오기 충분한 때였다. 아슬라는 가져온 손수건 보자기를 내밀었다.

“누룽지 드실래요?”

보따리는 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제법 무거웠다.

동해가 아슬라 밥을 챙겨주라고 보냈을 때 마니는 차마 달게 자는 아슬라를 깨우지 못했다. 대신에 오늘 걸어둔 솥마다 남은 밥을 죄다 누룽지로 만들어 아슬라 옆 쟁반에 따끈하게 담아두었다. 그것들이 이제 마니가 경계하던 간악한 영감쟁이 손에 전부 넘어갔다.

잠시 폭닥한 머리꼭지가 보이더니 수리모가 수줍게 인사했다.

“잘 먹겠습니다. 집안 어르신께도 고맙다고 전해주세요. 제가 누룽지를 좋아한다고 말씀드려서 일부러 가져오셨나요?”

“따로 여쭤볼 게 있긴 해요.”

“하던 일이 잠시만 있으면 끝나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긴장이 사라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음이 차분해진 뒤에 생각을 가다듬고 말을 하고 싶었다. 수리모는 일단 아슬라를 별채 안으로 데려갔다.

회피하고 싶기도 했지만 실제로 수리모는 하던 일이 있었다. 아슬라가 오기 직전까지 수리모는 소설을 필사했다. 올해 아슬라 생일에 주려고 수리모는 매일 필사할 양을 정해두었다. 어제 바빠서 하지 못한 만큼 수리모는 정성 들여 한 글자씩 '한국 여성 작가 공상과학 단편 모음집 1권'을 따라서 써나갔다. 막 한 장을 마치고 종이를 옮겨두는데 바닥에 폭삭 주저앉는 소리가 났다.

아슬라는 어느새 바닥에 누워 고르게 숨을 뱉었다. 수리모는 아슬라를 이해했다. 자신도 어제 한참을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겨우 눈을 붙였다. 그냥 혼담이라도 가벼운 일이 아닌데 남성을 짝으로 점지받았으니 잠들지 못할 만 했다. 앉아서 잠들었다가 옆으로 쓰러진 모습이 측은해서 수리모는 철필을 걸어두고 살금살금 아슬라 곁으로 다가갔다.

형산이 태어났을 때 곁에서 돌보느라 집에서 가져왔던 수리모의 이불은 나정이 태어나서도 유용했다. 오늘도 그렇다. 아슬라가 무릎에 얹어둔 외투를 옷걸이에 걸어두고 수리모는 아슬라를 손쉽게 굴려 보료 위에 올렸다. 다행히 이불은 아슬라의 발끝을 덮을 정도는 되었다. 아직 날이 추우니 몸이 식지 않게 도톰한 이불을 목끝까지 잘 덮어주고 나서야 수리모는 책상에 돌아왔다.

종이 앞면과 뒷면을 확인하던 중에 수리모는 가볍게 빨래를 터는 소리가 들려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 아슬라에게 덮어준 이불이 날아가서 펼쳐져 있었다. 종이를 놔두고 수리모는 아슬라에게 돌아갔다.

아까 앞면을 찾아둔 종이에 문진을 얹다가 수리모는 똑같은 소리를 들었다. 아슬라가 많이 피곤했는지 심하게 뒤척이나보다. 두어 번 이불이 더 날아가고 나서 수리모는 아슬라도 쉽게 차지 못하게 보료 아래에 이불 끝을 말아넣었다. 바람이 아직 찬데 이렇게 이불을 차면 몸이 식지 싶었다. 좋은 생각이 들어서 수리모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슬라가 준 누룽지 보따리를 안아들고 수리모는 재빨리 별채를 나섰다.

이불이 크게 부풀기 시작했다.

편두통때문에 고생하시는 모습은 많이 봤지만 엄마가 거의 책상에 누울 듯이 웅크린 모습은 처음 봤다. 나정은 수리모가 봤다면 기겁할 경로로 별채로 향했다. 담 위를 걷고 창문을 넘어다닌 덕에 몇 걸음 안 가서 나정은 별채에 도착했다. 있을 사람은 하나라 나정은 디딤돌에 놓인 신 한 켤레를 보고 곧장 문을 열었다.

“할아버지, 엄마가 감자 구워달래요. 엄마 오늘 두통이…….”

문을 열자 열기가 훅 끼쳤다. 날이 풀려도 아직 쌀쌀하고 건조한데 방문을 열자 따뜻한 습기가 느껴졌다. 할아버지는 낮에는 방에 불을 때지 않았다. 이불 끝이 방문 안으로 보였다. 행여나 할아버지께서 몸이 아프셔서 누워 계신가 싶어서 나정은 신을 벗어두고 마루로 올라왔다. 오늘 점심을 차려주셨을 때 수리모가 유독 기운이 없어보이긴 했다. 막 방안으로 들어서자 창문을 닫아 어두운 방 안에 빛이 들었다.

사브랑에서 이렇게 잘생긴 중년 남성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희미하게 밝은 방안에서도 콧대와 턱선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날카로워보였지만 이목구비를 따로 놓고 보면 인상이 부드러워보였다. 옆으로 누워 있어도 어깨는 벌어지고 다부졌다. 볕에 잘 그을린 덕에 발달된 근육들이 갈라진 틈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융기된 광배근은 허리를 따라 올라오면서 피부에 맺힌 습기로 선명한 선을 그렸다. 전거근에 이어 잘 발달한 복직근은 반쯤 드러나려 하다 이불에 가려졌다.

할아버지는 볕을 잘 받지도 않고 이렇게 근육이 두툼하지도 않았다. 할아버지를 찾을지 엄마를 찾을지 고민할 새가 없었다. 일면식 없는 남성이 궁에 들어와있었다.

나정이 들어오면서 감자 냄새는커녕 탄내도 나지 않자 형산은 힘없이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편두통은 가라앉지 않고 이제는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할아버지 바쁘신가보네.”

“할아버지 방에 모르는 남자가 자고 있어.”

더 아프려던 머리는 딸이 덧붙인 말을 듣자 시원해졌다.

“한번도 못 본 아저씨인데 되게 잘생겼어. 키도 크고 근육질이야.”

형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앉았다. 마리한은 나정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근육질인 건 어떻게 알았어?”

“다 벗고 누워 있던데? 아픈 사람인지도 몰라. 방이 엄청 덥고 땀을 엄청 흘렸어.”

눈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리한은 의자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어 앉았다. 아슬라가 어제 수리모가 아버지 벗이 아니냐고 물었을 때만 해도 형산은 아슬라가 혼담을 거부할 줄 알았다. 이제는 마음이 놓였다. 별채에서 잠까지 든 걸 보면 아슬라도 40년 전에야 봤던 낯선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 결정한 모양이다. 사브랑으로 혼전에 전근시키길 잘했다. 마리한이 군 통수권자여서 아들 있는 집은 가슬란에는 순례를 보내지 않았다. 저 북쪽 아무도 가지 않는 곳에 배치시킬까봐 두려워서였다. 아슬라를 그리 보낼 일은 없지만 아슬라가 수리모와 남편을 도와준다면 나쁠 게 없었다. 소음도 그쳤고 마리한은 두통에 시달리는 와중에 오늘 처리할 일은 모두 끝냈다. 형산은 의자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 바쁘신가보다. 엄마가 구워줄게. 엄마가 할아버지 하는 거 옆에서 봐서 감자 진짜 잘 굽는다?”

“할아버지 안 계셨다니까?”

두통이 심했으니 엄마가 말을 이해하지 못 해도 나정은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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