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아들과 이혼하는 법

[BL] 1. 이혼을 하려면 일단 (9)

리마 by 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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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슬라는 원래 하슬란 저택에서 남아있는 사람들을 지키려했다. 두레 간부들은 제출할 서류를 챙기고 동해가 꺼내준 사브랑 전도를 폈다. 귀가하면서 하나씩 내려주다보면 살인범 눈을 피해서 안전하게 집까지 올 수 있지만 한 사람이 끝에 꼭 남았다. 간부들은 행도를 돌아보았다. 마니는 사람들 집을 짚어가며 가장 짧은 길을 찾다가 마지막에 지도 위 하슬란 저택에 손을 멈추었다. 간부들은 기회를 잡았다.

“이러면 형님 혼자 집에 가시는데요?”

“어떻게 하나 한 명 남는 건 똑같아요. 조심해서 가야죠.”

“실없는 소리 하지 마시고 아슬라님을 데려가면 어떻겠습니까?”

동해는 내심 누구 하나 말만 꺼내주길 기다렸다. 휴지기 전에는 부엌에서 침실로 가는 잠깐 사이에 연쇄살인범에게 공격받아 사망한 피해자도 있었다. 대로를 따라 온대도 안전하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아슬라가 함께 가면 남편도 무사할 것이다. 가족을 따라 갈 순례객들은 다른 말이 없었다. 남아있을 순례객들은 동해가 말이 없자 끼어들지 않았다.

양이 여덟 마리나 연결된 수레는 보기 드물어서 대로를 지나던 모든 사람들은 달려가는 수레를 돌아보았다. 동해는 이번에 들어온 아이들을 데리고 다른 손님들을 마저 배웅했다. 남은 순례객들은 그림자처럼 동해를 따라 인사를 드렸다.

서류는 문제될 것이 없었고 마리한은 마니를 보호하러 따라왔다는 아슬라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합당합니다. 행도께서 무사히 집에 돌아가시도록 호위하십시오. 대신에.”

형산이 고개를 돌리자 두레 간부들도 일제히 돌아보았다. 수리모는 동시에 여러 사람이 자신을 주목하자 굳었다. 순례를 돌고 궁에 들어오면서 수리모는 시선이 쏠릴 때마다 좋을 만한 일은 겪지 않았다. 마리한은 딸에게 남편을 눈짓했다. 두레 행도가 지금 마리한의 부군이 선정된 과정에 크게 불만이 있다는 이야기는 꽤 유명했다. 지금은 언급될 일이 없지만 어머니께서 마리한이던 시절에도 마니가 불복한 판결을 내리신 적이 있었다. 그 뒤에 마니가 행도가 되어서 마리한과 두레가 서먹하던 시절도 있었다. 마리한을 직접 공격하진 않겠지만 괜히 같이 있다가 마리한의 가족인 솔뫼가 불똥을 맞을 수도 있었다. 나정은 아빠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형산은 다시 아슬라를 향했다.

“수리모를 주방까지 데려다주십시오.”

누구도 과도한 보호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수리모는 마리한 앞이라서 사람들이 아무 말 없었으리라 여겼다. 수리모는 마침 아슬라가 떠오른 시각에 아슬라가 나타나자 심란했다. 거리를 두어야겠지만 손님을 홀대할 수는 없었다. 둘만 남아서 회랑을 걸을 동안 나지막한 목소리가 수리모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마음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간메도 이제 편안히 쉬겠지요.”

아슬라가 동행할 줄은 몰라서 상 하나를 새로 차리던 수리모는 차곡차곡 상을 쌓아올려서 재주부리듯 드는 아슬라를 보고 앞치마를 벗었다. 수리모가 말리기도 전에 아슬라는 상을 혼자 들었다. 수리모는 종종 따라가며 아슬라에게 애원했다.

“저도 한 상 들게요. 내려놔주세요.”

“아슬라님이면 됩니다.”

“아슬라님을 보내주십시오.”

농사를 앞두고 사브랑에서 두 명이 실종됐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두레 간부들은 아슬라를 지원담당자로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마리한은 저들 사이에 끼지 않는 마니를 보다가 생각에 잠겼다.

겨울이 끝나갈 때면 식량이 부족해진 사람들은 식량을 꾸러 빈번하게 나다녔다. 실종 시기가 아슬란 저택에서 벌어진 사건보다 훨씬 앞섰으니 살인범의 소행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학교도 가야 할 아이들을 두고 홀아비들이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사라진 사람들이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되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신임 조사관인 화정은 궁에서 보관하던 연쇄살인범 증거물과 사건 기록이 모두 사라졌다는 말을 듣자 미리가 남긴 기록을 조사관실에서만 봐달라고 청했다. 형산도 동의했다. 오늘 저녁에 기록을 보러가면서 마리한은 조사관에서 맡길 사건을 기억해두었다. 형산은 당장 처리해야 하는 일부터 살폈다.

“병영 군인들이 두레에 지원가길 많이 기다렸습니다. 공평하게 돌아가면서 지원해드리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같은 사람이 계속 와야 일도 잘 알아볼 거고…….”

으레 두레에서 자기 집 농사를 봐주면 밭주인이 새참을 내주었다. 형편이 되는 집은 얼마 없어서 행도를 배출한 하슬란에서 대부분 새참을 지원했다. 두레에 지원을 가면 군인들은 돌아가며 지어먹는 병영 밥보다 훨씬 맛있는 새참을 배부르게 먹고 잘하면 집에도 다녀왔다. 병영에 들를 때마다 병사들이 두레에서 언제 부르냐고 물어서 마리한이 모르기가 어려웠다. 두레와 척을 져서 좋을 일이 없다. 형산은 마니를 돌아보았다.

“아슬라의 근무지를 하슬란 저택으로 지정했으니 하슬란 집주인 어르신께 여쭈어보십시오.”

마니는 그제서야 마음이 놓였다. 마리한도 마니 얼굴을 보고 판단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이상하게도 오늘은 행도보다 먼저 간부들이 입을 연다. 손님상이 들어오자 회의는 잠시 중단되었다.

다과상이야 손님만 조금 드시고 남은 건 치워뒀다 저녁 때 먹는 것으로 알던 아슬라는 수리모가 조카랑 같이 준비해둔 상을 보면서 신기했다. 말린 오미자를 달인 차와 말린 생강을 달인 차에 곁들여서 간식이 다섯 가지 있었다. 아슬라는 고모부께서 집에 가서 점심을 드실 수 있을지 궁금했다.

손님들은 둘씩 앉을 수 있는 너른 의자에 한 명씩 앉아서 상을 기다렸다. 가장 높이 얹혀있던 상을 들어올렸다가 수리모는 휘청거렸다. 상에 올릴 때는 하나씩이었지만 놋쇠그릇이 모이니 제법 무거웠다. 아슬라는 들던 상을 내려두고 몸으로 수리모부터 지탱했다. 수리모가 중심을 잡도록 아슬라는 팔을 뻗어 수리모가 든 소반을 받쳤다. 아슬라와 소반 사이에서 수리모는 어쩔 줄 몰랐다. 소매로 덮여도 다부진 팔뚝으로 양옆까지 막혔다. 아슬라가 수리모 머리보다 높이 상을 들어주어서야 수리모는 아직까지 아슬라에게 기대어 서있었음을 깨달았다. 구기자보다 얼굴이 발그레해져서 수리모는 아슬라의 팔뚝을 지나 아래로 나왔다. 다행히 누구도 자신들을 지켜보진 않았다.

아슬라가 잽싸게 몸으로 수리모부터 받아주는 모습을 보니 마리한은 올바르게 짝지어주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야기를 나누고 가까이 있을 시간만 되면 수리모도 저어하지 않고 아슬라를 반갑게 받아들일 것이다. 형산은 일사불란하게 상을 놓던 두 사람을 불렀다.

“두 분 수고하셨습니다. 별채에서 쉬십시오.”

집무실을 나오면서 수리모는 주방에 들르길 원했다. 전에 아슬라가 방문했을 때는 손님상을 내가지 못해서 수리모는 이번에는 정말로 간식을 챙겨주고 싶었다. 하지만 아슬라가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수리모는 아슬라 뜻을 존중했다.

“아까는 잡아줘서 고마워요. 별채에서 간식 좀 드시겠어요?”

“외양간에 먼저 들르면 어떨까요?”

외양간은 정문에서 가까웠다. 바깥에는 주차된 수레들이 널널하게 놓였다. 양도 데려오지 않고 아슬라는 수레로 다가갔다.

아슬라는 고모와 고모부를 설득해서 기왕 다녀오는 길에 아슬란 저택에 들르기로 했다. 안부도 여쭙고 언제부터 문상을 가도 되는지 물어보러 들를 이유로 선물도 준비했다. 수리모는 속에서 모래 흐르는 소리가 나는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드시고 기운내세요.”

“고맙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고 속을 내보이지도 않았지만 수리모는 다른 사람과 나누는 이런 대화가 그리웠다. 가족들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만 자라온 환경도 다르고 자신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과 공감대가 있음을 확인할 때가 누구나 가끔 필요하다.

아슬라도 숨을 돌리고 다리를 쉬어야 한다. 수리모는 별채에 손님을 모시려 했다. 난데없이 양들이 울면서 아슬라와 수리모는 외양간 문가에서 자신들을 지켜보는 갈색 눈을 발견했다.

야옹이만큼 예민하지는 않지만 하슬란네 양들은 남의 집 외양간에 들어와서 날카로웠다. 가족들이 오는 줄 알고 오매불망 외양간 문가를 서성이던 양들은 오늘 자기 가족이 실은 보따리를 생전 처음 보는 남성이 들고 가는 장면만 보았다. 공격할 의도는 없었지만 하슬란네 양들은 상대방에게 경고는 하려 했다. 울음을 듣고 아슬라가 다가오자 양들은 반가웠다.

줄지어 나온 양들이 아슬라를 둘러쌌다. 여럿이 타고 와서 양들을 많이 매었으리라 알았지만 8마리일 줄은 몰랐다. 아이들에게도 그렇지만 수리모는 양이나 까마귀에게도 정을 주지 않고는 못 배겼다. 물이나 건초는 이미 먹었겠고 수리모는 품에 안은 보따리에서 답을 찾았다.

“간식 조금만 먹을까? 사과랑 배가 있네.”

양들은 낯선 손 안을 보고 잠시 고민했다. 말린 과일은 산을 돌아다녀도 쉽게 찾지 못했다. 말린 배를 손톱만큼 쪼갠 수리모는 양들이 안심하고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아슬라가 수리모 곁으로 다가가자 양들은 자연스럽게 아슬라를 따라서 수리모 주위를 둘러쌌다. 낯선 사람 곁에서 아슬라가 편안해보이자 양들은 낯선 이가 해롭지 않다고 판단했다. 말린 과일을 한 조각씩 먹은 양들은 수리모가 귀 뒤며 목을 문질러주자 편안히 자리잡았다.

“아슬란 양들은 털이 흰가요?”

“두 마리만 그래요. 어떻게 아시나요?”

양을 키워도 아슬란 저택에서는 정말로 필요한 일일 때만 외양간을 맡은 사촌형이 양을 내주었다. 아슬란 저택 바깥에서 아슬란네 양을 보기는 매우 힘들었다. 수리모도 궁에서 보내주실 때만 양이 모는 수레를 탔다.

“어제 수리모한테 사촌형 되시는 분을 만났어요. 옆에 있던 양들을 봤거든요.”

“흰구름이랑 솜사탕이에요. 형님께서 데리고 다니세요.”

건강검진과 세금 납부, 입대 혜택 소개 같은 매해 두레에서 구성원들에게 알려달라고 맡기는 일들까지 해결했다. 올해 회의에서 형산은 올해는 꼭 조언하려던 일만 남았다.

두레 가입 대상은 연쇄살인범과 해적을 거치며 나날이 줄었다. 두레가 농사를 돕지만 여성들이 농사를 쉬진 않았다. 노동인구를 적실하게 파악하고 운용하려면 두레에서 마리한의 조언을 받아들여야 했다.

“여성들도 정식으로 두레에 가입하면 어떻겠습니까? 함께 참여하며 일하는 것은 이제껏 같지 않았습니까.”

“두레 정관에 가입자가 정해져 있어서 어렵습니다.”

“두레라는 것이 원래 성인 남자들의 결속력을 다지고…….”

행도는 어이가 없어서 두레 간부들을 돌아보았다. 마리한의 말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두레에서 의논해볼 화제였다. 당장 답하기 어려우면 두레 구성원들이 모여서 의견을 들어볼 때까지 기다려달라고 할 수도 있었다. 오늘 회의하는 동안 간부들은 우두머리인 행도를 놔두고 벌써 여러 차례 자신들이 두레를 대표하는 양 뜻을 전했다. 자신만 제외하고 뜻이 같은 경우를 살아오면서 마니도 몇 번 보았다. 입을 맞추고 오는 경우가 흔했다. 이제껏 자신이 뽑은 간부들에게 크게 불만이 없던 마니는 간부들의 격렬한 반대를 끊었다.

“올해 첫 모임이 얼마 안 남았으니 그때 의논해보겠습니다.”

평소에야 양 입에 묻은 겨처럼 동해한테 붙어다닌다고 놀림받지만 마니는 아슬라보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만 작았다.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도 항변하려던 간부들은 마니 눈빛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눈으로 보기에도 불만이 가라앉자 마니는 형산을 돌아보았다.

“형님과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아슬란에 방문하셨어요?”

“학교에서 마주쳤어요.”

장소가 학교라서 의아했지만 수리모는 곧 사촌형이 집안일로 갔겠거니 짐작했다.

“둘이 친합니까?”

“크면서 사이가 좋아졌어요.”

태화와 수리모의 어머니인 덕현께서는 죽은 동생이 남긴 아들을 자식들보다도 아꼈다. 어머니께서 애지중지하셨는데도 어린 시절 사촌형은 온 사브랑에 소문날 만큼 심술궂었다. 수리모는 굳이 옛날이야기를 꺼내서 그때와는 달라진 사촌형을 창피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형이 나무에서 떨어졌을 때 곁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죠. 그 후로는 다퉈본 적이 없어요. 형님께서 반가워 하셨겠네요. 아슬라님을 정말 오랜만에 봤으니.”

“실없는 말만 들었어요.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다고.”

사촌형의 집에서 지내면서 나눈 얘기가 있어서 수리모는 사촌형이 무슨 말을 했을지 짐작갔다. 어련히 자신이 아슬라에게 말할 텐데 별 말을 다 한다. 부끄러웠지만 수리모는 직접 말하려 했다. 자신이 직접 말해야 아슬라도 이해하고 혼담을 단념할 것이다.

“젊을 때부터 제 주변에서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았어요.”

아슬라는 수리모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아슬라의 표정을 보고서야 수리모는 사촌형이 40년 전 연쇄살인범이 활동하던 당시 이야기는 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안심했다. 나잇대가 달라서 멀어지면 몰라도 자신을 주위에 살인범이 맴도는 사람으로 여기고 피하기를 바라진 않았다.

“아슬라님의 앞날을 위해서…….”

“할아버지! 좀 쉬셨어요?”

주방에도 없고 별채에도 없었다. 필사하고 말리던 종이가 남아있으니 할아버지는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 수리모가 있을 곳을 찾아서 궁을 헤매고 다니다가 나정은 외양간 앞에서야 수리모를 발견했다.

나정 앞에서 나정의 어머니가 주선한 혼인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수리모는 품에 든 보따리에 젓가락을 넣었다.

“아슬라님께서 선물을 주셨어요. 조금 들겠어요?”

나정은 자연스럽게 입을 벌려서 수리모가 넣어주는 말린 사과를 받아먹었다. 바깥이 소란스럽자 궁에서 살던 양들은 각자 방에서 나와 문가를 기웃거리다가 나정에게 먹을 것을 주는 수리모를 발견했다. 다른 집에서 온 양들도 같은 걸 먹었는지 오물거렸다.

아슬라는 외양간에서 나온 양들이 다가오자 등을 쓸어주었다. 아무리 냉랭한 양이라도 쓰다듬으면 돌아보기 마련인데 양들은 내색도 하지 않고 곧장 수리모에게 다가갔다. 더 오래 보고 산 자신들에게는 맛난 것을 주지 않아서 양들은 수리모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수리모가 입에 말린 과일을 넣어주자 얌전히 빈자리를 찾아서 자리잡고 말린 과일을 음미했다. 양들이 모두 만족하자 수리모는 보따리를 외양간 바깥 시렁에 올려두고 다른 간식거리를 찾아 꺼냈다. 아슬라만 아무 것도 먹지 못해서 수리모는 마음이 쓰였다. 수리모가 찹쌀부각을 꺼내오자 아슬라는 고개를 저으며 나정을 눈짓했다. 다른 손님들이 그랬듯 나정도 찹쌀부각을 좋아했다.

“이거 생일에만 먹어봤어요.”

“하슬란에서 보내드렸습니다. 마리한께도 생일마다 매번 보내드렸거든요. 입에 맞으십니까?”

“네.”

나정에게 간식도 먹였겠다 수리모는 찜찜한 구석을 해결하고 싶었다.

“마리한 부군께서는 혼자 계신가요?”

“아뇨, 부엌에 갔다가 살인범 만날까봐 병사들이 아침도 못 먹어서 밥해주고 계세요.”

병영 군인들은 막상 솔뫼가 나정을 놔두고 혼자 부엌으로 향하자 서둘러 신을 주워 신고 따라나갔다. 언제 살인범이 뛰쳐나올지 몰라서 밥을 못 먹어도 마리한 부군이 살인범에게 죽길 바라진 않았다. 장정들은 덜덜 떨면서도 꼬리를 물고 병영 부엌으로 향했다. 맨 끝 사람은 뒷걸음질을 치며 앞사람 등에 붙어 갔다. 몇몇이 용기를 낸 덕에 아점 만드는 속도가 올랐다. 막상 평소처럼 식사를 준비하자 군인들은 머쓱했다.

“안 오셔도 됐겠네요.”

“이제 점심 차리러 가보셔야죠.”

“아직 두레랑 회의가 끝나지 않았어요.”

말을 하고서야 솔뫼는 아차 했다. 두레 대민지원은 갑갑한 병영에서 나가서 민간인처럼 지낼 수 있는 기회라 군인들에게 휴가보다도 값졌다. 솔뫼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지고 군인들은 물어뜯듯이 달라붙었다.

“지원 누구 보낸대요?”

“저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아서 알지 못해요.”

“그래도 누구 보내달라는 말은 없었어요?”

“저번에 갔으면 좀 양심이 있어라. 돌아가면서 오라고 합디까?”

“마리한께서 나중에 알려주실 거예요.”

이맘때 병영에서는 두레 대민지원을 목 빼고 기다렸다. 부디 조카가 신중하게 말했기를 바라면서 수리모는 보따리에서 간식을 집어내 아슬라에게 보였다. 아슬라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 점심이 있었다. 아슬라가 눈으로 권하자 수리모는 단호박 찹쌀부각을 입에 넣었다. 달고 진한 맛에 바삭하고 짭잘한 맛이 곁들여졌다.

나정은 수리모가 찹쌀부각을 한껏 즐기고 나서야 할아버지에게 꼭 하려던 말을 꺼냈다.

“살인범이 돌아다니니까 오늘부터는 퇴근하지 말고 여기서 지내세요.”

“하지만 내일부터 문상오신 손님들을 모셔야 해요.”

“그럼 여기서 주무시고 아침에 수레로 모셔드릴게요.”

“밤에 불도 켜둬야 하는 걸요. 불이 꺼지면 간메가 무서워할지 몰라요.”

수리모는 양들에게 과일을 받쳐주지 않은 손으로 나정의 손을 감쌌다.

“집에 가면 가족들이 곁에 있어서 괜찮아요. 마음 써주셔서 고마워요.”

궁에서 키우는 양들이 그렇듯 나정도 자라면서 줄곧 자신을 돌봐주고 함께 지냈던 사람을 가족으로 여겼다. 어떤 사람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만 가족일 수도 있다.

집무실 앞 마당에 간부들이 모두 나오자 마니는 곧바로 이야기를 꺼냈다. 경험상 흐지부지 넘어가면 나중에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좀 봐요. 두레에서 의논을 하고 의견을 내야죠.”

흉흉하던 눈빛은 그새 잊었는지 간부들은 마치 마리한이 조언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말하는 투가 얼마 전 궁 앞에 모인 무뢰한들이랑 똑같았다.

“아슬라님은 무슨 일로 수리모 곁에 붙어다닙니까?”

“둘이 혼인 안 한다면서요?”

마니는 기가 막혔다. 혼인은 어디까지나 당사자나 집안 사람들이 논의할 일이지 무슨 다음달 마리한께서 내리실 새참마냥 입에 올린다. 순례객 없이 어제 집안 사람들끼리만 한 말이 어디로 새어나갈 일은 없었다. 마니는 방금 들은 말들을 없던 걸로 했다.

“마리한께서 두레에 지원을 해주시는데 덮어놓고 말씀을 거부하다니요.”

“형님께선 얍삽하다고 수리모 싫어하시잖아요.”

“그런데 둘이 친하게 놔둡니까?”

“내가 언제 수리모가 얍삽하댔어요?”

“몰래 아슬라님을 쫓아내고 조카를 부군 세운 게 얍삽하죠, 그럼.”

“아니, 수리모가 슬아를 쫓아냈다는 증거가 어딨어요?”

“형님 이거 마음 약해지셨네. 전에는 안 그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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