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열 두번의 작별 - 001
우리는 모든 생에서 조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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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든 생에서 조우했다.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나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말 것임을 알았다. 음울하고 조도 낮은 색채가 자꾸만 시선에 걸렸다. 눈꺼풀 사이에 갈고리를 끼운 듯 여러번 주의를 끌던 얼굴이 이내 마음에 뿌리를 내렸다. 험난한 시대였다. 목숨을 챙기기 급급한 곳에서 사랑은 사치였고 나는 사제관계라는 말 뒤에 숨어 마음을 감췄다. 그러나 모든 행동에 애정이 섞여나오기 시작하며 나는 자연히 이 추악한 사랑을 들키고 말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느냐고, 한 때 학생이었던 사람을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법이라며 사랑한다는 말만을 숨긴 모든 핑계를 내밀 때마다 되려 성큼 다가오는 당신을 나는 밀어낼 수 없었다. 당신이 다가왔다는 핑계에 숨어 나는 다시 마음을 꺼내었다. 좋아. 좋다고. 당신이 그러하다면 우리 한 번 만나자고. 나는 살아있는 한 성심성의껏 사랑을 할 테니 혹여 당신의 젊음이 나를 질려하거든 언제든 나를 떨쳐내도 좋다고.
그러니까, 우리의 모든 만남은 이렇게 시작한다. 두 손을 모으고 당신의 왼손을 어루만지며 자신없이 고개를 숙인 나에게 당신은 대답했다.
“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당신을 사랑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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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남았습니까? ”
“ 지금부터 집중 치료를 받는다면 3년, 치료를 포기하신다면 2년도 어렵습니다. 사실 이 기간도 보장할 수는 없어요. 언제 갑자기 나빠질 지 모르니까. 심장에 폭탄이 있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
“ … 2년이라. ”
아니, 1년이겠지. 당신이 그 안에 결혼하면 좋을텐데. 역시, 당신의 결혼식은 보고 떠나고 싶다. 죽음의 경력이 11회나 되니 이제와서 죽음이 두려운 것은 아니지만, 기억이 흐려지는 것은 무섭다. 환히 웃는 얼굴을 본 것이 도대체 몇 번의 생 전인가. 온갖 진통제로 범벅이 된 처방전이 곧 약물이 되어 돌아왔다. 손바닥에 감기는 약통의 감각이 익숙해 나는 슬며시 웃었다. 어쩜, 처음을 제외한 한 번의 생도 편하게 죽지를 못 하는구나.
열 두 번째의 삶. 영원한 사랑,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에도 지쳐버린 환생 경력자. 그러나 수 많은 작별을 거치며 나는 단 한순간도 서운하지 않았다. 두 번째 생. 처음 당신의 결혼식에 참가했을 때 나는 볼썽사납게 울지조차 못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울컥 차오르는 숨을 삼키고 인사하는 나에게 당신은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었다. 세네번째 즈음에는 내가 나서 당신을 유혹해 보겠다며 어색한 꽁지를 펴기도 했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당신을 괴롭고 귀찮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부터는 모두 그만두었다.
그럼에도 정말로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당신을 볼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연인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함께 할 수 있는 길은 많았다. 항상 먼저 태어나는 운명을 타고나 당신보다 늘상 연상이었던 나는 더러 당신의 선생이거나 선배이거나 지도자이거나 조력자였다. 당신이 걷는 삶의 길을 돕는 것이 좋아 그러한 자리를 꿰차기 위해 온갖 노력을 일삼았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다시는 당신의 연인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처음의 삶에도 그랬듯 언제나 당신보다 먼저 죽어 온전한 삶의 끝을 지켜봐주지 못한 채 떠나야만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따금 내가 아닌, 새 삶의 새로운 연인의 이야기를 하며 내게는 보여주지 않을 미소를 참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나는 못내 좋았다. 그리 행복합니까, 하고 물어 행복합니다, 하고 돌아오는 어색한 답변조차 사랑스러웠다. 노을을 등지고 새 아침을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에 나는 매번 손 흔들어 인사했다. 잘 가요. 잘 있어요. 잘 있어요. 잘 지내요. 정말,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반가웠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또한 운명의 장난인지, 당신은 내게 한 번도 작별인사를 해 주지 않았다. 잘 가요, 한 마디면 이보다 훨씬 괜찮을텐데. 멍청하게 뛰고있는 심장을 억누르는데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더는 미련을 갖고 태어나는 일 없이 소멸해 당신의 영원한 행복을 축복하고만 싶은데. 서운하지 않은 것은 서글프지 않은 것과는 달라 나는 자주 떨리는 호흡을 참았다. 그것이 버릇이 되어 어느 순간 나는 우는 법을 잊어버렸다. 다섯 번째에 나는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만큼 침착한 작별을 했다. 그 날 눈을 감으며 나는 내 수명에 대한 법칙을 알아내었다. 당신과의 재회는 내게 남은 삶을 재는 카운트다운이 되었다. 내 행운은 딱 재회까지라는 것 처럼, 나는 매 삶 당신과 만난 이후 남은 삶의 개수만큼의 햇수만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스물 아홉. 재회마다 1년씩 짧아진 수명이 턱 끝까지 나를 추격했다. 지난 삶 당신을 만난 뒤 2년을 살았으니 이번 생은 아마 한 해에 불과하겠지. 첫 번째의 삶을 일흔 노인에 마친 것 치고는 내내 박한 수명이지 않은가. 물도 없이 삼킨 진통제 너머 당신의 명함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떻게, 어떤 형태로 만나게 될 지 기대를 할 새도 없이 나는 어제 길을 걷다 당신을 마주치고 말았다. 횡단보도 건너편의 희미한 얼굴이 희미한 시야에 들어와 나는 목도리 속으로 턱을 파묻고 숨을 참았다. 나에 대한 일면식이 없어 그저 스쳐가는 당신을 멍청히 바라보던 나는 돌연히 기침했다. 식도를 타고 튀어나온 객혈이 방울방울 황갈색의 목도리를 물들였다. 손바닥으로 입가를 닦으며 나는 골목을 돌아 사라지는 당신의 뒷모습을 눈좇음질 했다.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었음에도 나는 결국 서글퍼지고 말았다. 반가움이 곧 헤어짐에 대한 아쉬움으로 바뀌며 불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을 괴롭게 했다. 때가 와 버렸다. 그토록 바라던 때가 정말로 와 버렸다.
만남에 이별이 따르는 것은 세상의 법칙이라.
이제 마지막 작별을 해야 할 때가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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