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보낸 선물
2022 별빛축제 기념 연성
-주의: 메인 퀘스트 5.3 크리스탈의 잔광 스포일러 / 특정 빛전 묘사 있음
축제를 앞두고 그라하는 들떠 있었다. 케이와 연인이 되고서 맞는 첫 번째 겨울이었다. 사람들은 으레 연인과 처음 겪는 무언가에 큰 의미를 부여하곤 하지만, 그런 감상을 제외하더라도 그라하에게 이 첫 번째는 특별했다. 그가 겪은 미래에서 케이는 이 겨울을 맞이할 수 없었으니까.
원초세계로 돌아온 뒤부터 그라하는 매 계절이 놀라웠다.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케이가 앞으로도 돌아오는 계절을 맞이할 수 있고, 자신은 그 곁에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관계로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야말로 경이로움이 가득한 한 해였다.
케이 역시 기대하는 눈치였다. 둘은 별빛축제를 기념하며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메뉴는 케이의 고향 집에서 명절마다 먹는다는 고기파이였다.
‘때가 조금 이르긴 해도, 원래 1년을 무사히 보낸 걸 기념하는 음식이니까.’
그러니 파이 같은 건 언제 먹어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케이는 말했다. 고작 음식 하나로 대신할 수 있는 세월이 아니라는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케이는 그저 그라하가 무사히 오늘을 맞이했음을 축하하고 싶었다. 그런 얘기와 함께 우리 뭘 할까, 계획을 세우며 즐거워했건만….
정작 약속한 날짜를 하루 앞두고 그라하는 바람을 맞았다. 이번에 맡은 의뢰를 여유롭게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할 일이 많다는 연락이 왔다. 링크셸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만으로도 그라하는 케이의 귀가 얼마나 누워 있을지, 유독 긴 꼬리는 또 얼마나 축 늘어져 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가벼운 투정도 부리지 못한 건 그래서였다. 섭섭한 마음을 삼키면 속에서 부풀어 오른다는 것을 당시의 그는 몰랐다. 그리고 약속 당일.
그라하는 케이의 아파트 문 앞에 서 있었다. 복도에 내놓은 화분 밑바닥을 더듬어보니 전에 일러준 대로 열쇠가 붙어 있었다. 이제 어쩔까 고민하다가 좀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어쩌면 케이가 금방이라도 의뢰를 끝내고 돌아올지도 몰랐다. 얼굴을 본다고 서운함이 풀리지는 않을 성싶었으나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바쁘다는 말이 사실인지 지난 며칠 동안 케이는 연락조차 잘 받지 않았다.
모험가 거주구의 공용 아파트는 두 시간마다 종을 울렸다. 종소리를 들은 뒤에도 그라하는 복도를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직 미련을 못 버린 자신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지던 차였다. 케이가 놀란 목소리로 외친 것은.
“라하, 왜 여기 있어?!”
케이는 복도 저편에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대체 무슨 의뢰를 하고 온 건지 등에 멘 가방이 묵직해 보였다. 그는 평소처럼 그라하를 껴안았다가 몸이 얼음장이라며 기겁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것과는 별개로 헛손질 없이 아파트 문을 열고, 할 일의 우선순위를 침착하게 정하는 모습이 무척 모험가다웠다.
케이의 아파트는 살림살이가 단출했다. 문간에는 빈 옷걸이와 조리 설비가, 화덕 근처에는 찬장이, 그 앞에는 의자가 두 개 딸린 작은 식탁이 있었다. 아파트 가장 안쪽에 놓인 1인용 침대와 작은 옷장을 끝으로 다른 가구는 없었다.
그라하가 한기에 뻣뻣해진 외투를 벗는 동안, 케이는 침대 근처에 둔 화로를 식탁 쪽으로 들고 왔다. 땔감 위로 손을 휘두르며 주문을 외자 대번에 불이 붙었다. 공격용 불 마법의 위력을 조절하는 솜씨가 기막혔다. 그라하는 식탁 의자를 끌어와서 화롯가에 자리를 잡았다. 불을 오래 쬐지도 않았는데 얼어붙은 뺨이 벌써 홧홧했다. 그동안 케이는 아파트를 분주하게 헤집으며 물을 데우고 램프를 밝혔다. 목욕물이 준비된 뒤에는 애인을 욕실로 떠밀었다. 수건과 함께 내준 옷은 케이 것이었는데, 그라하가 입으니 품이 낙낙하고 기장이 남았다. 그 탓에 소매와 바짓단을 두어 번 걷어야 했다.
그라하는 이불 안으로 자신을 집어넣고 싶어 하는 케이를 극구 만류했다. 담요를 단단히 두르는 걸로 타협을 봤다. 그제야 겨우 안부를 물을 틈이 생겼다. 의뢰는 잘 끝났는지, 무슨 일이길래 약속도 깨고 연락조차 못 받을 정도로 바빴는지…. 추궁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말을 이어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책망하는 투가 됐다. 마주 앉은 케이가 눈을 슬쩍 피하는 바람에 더 그런 분위기였다. 그라하는 당황했다. 상황을 수습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케이 쪽이 더 빨랐다. 사실은 말이지….
발단은 몇 주 전, 둘이서 별빛축제를 어떻게 보낼지 한창 계획을 세울 즈음이었다. 고향 집의 동생들과 르베유르 쌍둥이의 선물을 챙기던 케이는 그라하에게도 무언가 선물을 주고 싶었다. 뭐가 좋을까, 궁리하던 그는 자연스럽게 크리스타리움을 떠올렸다. 현재에 적응하려는 노력의 일환인지 그라하는 1세계에 관한 말을 아꼈다. 덩달아 케이 역시 관련된 화제를 꺼내지 않게 됐다. 하지만 축제의 즐거움 속에서라면 잠깐 정도는 그리움에 젖어도 괜찮지 않을까?
‘수정공에게 도시의 근황을 전하고 싶은데 편지를 써줄 수 있을까?’ 물었더니, 라이나는 의아해했다. ‘갑자기요?’ 그래서 케이는 별빛축제가 무엇인지 설명해야 했다. 왜 하필 어둠의 전사가 수정공의 선물을 챙기는지는 어떻게든 얼버무렸다.
‘저 말고도 수정공께 소식을 전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겁니다.’
라이나의 말에 케이는 편지 몇 통 더 전해주는 것쯤이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 그는 축제를 구실로 크리스타리움의 아이들한테(될 수 있다면 어른들에게도) 뭔가 챙겨주고 싶었다. 라이나는 필요한 자원이나 인력이 있다면 최대한 준비하겠다고 대답했다. 성실한 두 사람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수정공의 선물 준비가 순조롭게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마치 비탈길에 굴린 눈덩이처럼…. 그리고 케이가 바빠질수록 정작 수정공을 방치하게 된다는 사실도…. 약속 하루 전 바람을 맞은 그라하의 비극은 이때부터 예견된 바였다.
원초세계 귀환 직전까지 케이는 크리스타리움 시민들에게 연말 선물을 나눠주고, 수정공에게 보내는 편지를 수거했다. 애인이 약 2시간 동안 추위에 떨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그라하는 그제야 케이가 극성맞게 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에게 미안한 일이 한둘이 아니었던 거다!
아까까지만 해도 그라하는 사과할 필요 없다고 말하려 했다. 약속 취소를 알렸는데도 멋대로 찾아오고, 실내로 들어가지 않고 복도에서 기다린 건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사정을 알게 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물을 마련하려고 애쓴 건 고맙지만 그것 때문에 약속을 깬 건 섭섭했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서운한 마음이 더 컸다.
“내 선물 준비로 날 따돌리면 그게 무슨 주객전도야, 케이.”
게다가 그라하는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다. 그 얘기를 했어야지. 난 너랑 축제를 같이 보낼 생각밖에 없었단 말이야. 식사는 네가 준비하겠다고 했으니 후식을 사 가야지, 틀림없이 집이 휑할 테니 작은 트리라도 가져가는 게 좋겠지, 그런 생각만 했다고…. 그라하는 투덜거렸다. 케이는 너랑 같이 있는 게 내 선물인데, 라는 말을 애써 삼켰다. 사과 이외의 말을 꺼낼 면목이 없었다.
다시 종이 울렸다. 그라하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다. 겨울밤의 짙은 어둠 속에서 길가에 선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저녁도 못 먹었네, 중얼거리자 케이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그러곤 식탁에 아무렇게나 기대어 둔 가방에서 단단히 포장된 고기파이를 꺼냈다. 늦게라도 맛을 보여주고 싶어서 낮에 구웠다고 했다. 두 개 만들었으니까 내일 아침까지 문제없다고. 그라하는 케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밤도 늦었는데, 라는 말로 운을 뗀 연인에게 뚱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 아직 화났어.”
케이는 얼른 사과했다. 파이를 잘랐다. 둘은 침묵 속에서 식사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명절 음식답게 파이는 무척 맛있었다. 자기 몫의 조각을 모두 해치웠을 즈음 그라하는 약간 표정이 풀려 있었다. 나란히 서서 양치질할 정도까지는 아니었으나 케이는 그마저도 감지덕지였다.
케이가 씻는 동안 그라하는 ‘선물’을 확인했다. 가방을 뒤지자 대번에 묵직한 종이 뭉치가 손에 잡혔다. 그런 게 몇 개나 됐다. 그라하는 식탁에 앉아 편지 꾸러미를 조심스레 끌렀다.
편지들은 별다른 분류 없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크고 서툰 글씨체로 쓰인 아이들 편지부터 달필로 작성된 긴 편지, 글씨를 깨끗하게 쓰려는 노력이 역력한(그러나 결국 실패해버린) 편지, 몇 번이나 쓰다가 멈춘 듯 글씨가 군데군데 번진 편지 등등.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비슷한 이야기를 써냈다. 크리스타리움의 전반적인 생활상이나 자신이 최근 겪은 인상적인 사건, ‘저쪽 세계’로 돌아간 수정공에게 보내는 격려 같은 것들을. 최선을 다해 감정을 걸러낸 문장에서 오히려 그리움이 낱낱이 드러났다. 꾸러미를 풀어나갈수록 그라하는 수정공이 떠난 크리스타리움이 어떻게 변했고, 변해갈 것인지 그려낼 수 있었다.
라이나의 편지는 제일 마지막이었다. 케이가 이 편지를 제일 먼저 받아서인지, 아니면 일부러 마지막에 오도록 정리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내용은 다른 사람들과 비슷했다. 그라하는 위병단 개편 사항들과 차후의 운영 목표, 라이나가 최근에 친밀해진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즐겁게 읽었다. 후자의 경우에는 오히려 1세계에서 나눈 적 없는 종류의 화제라 생경한 기분도 들었다.
‘여전히 그립고 보고 싶어요.’ 라이나의 편지는 유달리 감정이 드러났다.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떠난 사람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늘 당부하셨던 것처럼, 저는 저를 잘 돌보고 있어요.’
편지를 모두 읽은 뒤에야 그라하는 케이가 마주 앉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씻고 왔을 텐데도 어느새 머리카락이 보송보송했다. 흩어져 있었을 종이들이 그의 손안에서 가지런히 정리된 채였다. 식탁 주변은 아파트 안에서도 유독 불빛이 밝았다. 다 읽었어? 묻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케이는 편지를 정리할 때 서류철 같은 게 필요하면 총사령부 비품실에서 몇 개 가져오겠다고 재잘거리다가, 그라하의 화가 아직 다 풀리지 않았음을 의식한 듯 말끝을 흐렸다.
그라하는 케이와 눈을 맞췄다. 눈썹 위까지를 부스스하게 덮은 머리카락은 아주 새까맸다. 그 탓인지 불빛을 받은 눈이 유독 선명했다. 금색은 예로부터 천체의 색이었다. 하지만 동공이 둥근 눈은 태양이나 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라하에게 케이의 눈은 별빛의 색과 같았다. 나의 별. 아주 오래전부터 지켜보았던….
그라하는 한숨을 쉬었다. 케이에게는 좀처럼 오래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선물 고맙다는 말도 아직이었다. 그는 짐짓 퉁명스러운 태도로 말을 꺼냈다. ‘바닥에서 자라고 하진 않을 거지?’ 케이는 신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라하는 연인의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다. 담요를 가져가겠지. 침대는 좁으니까 나에게 양보할 거고.
그라하는 케이가 바닥에 누울 틈을 주지 않기로 했다. 이리 와, 하고 잡아당기자 케이는 속수무책으로 끌려왔다. 연인을 침대에 눕힌 뒤 벽 쪽으로 슬쩍 밀었다. 그러곤 자리가 나자마자 파고들었다. ‘너도 피곤하잖아. 종일 돌아다녔을 텐데.’ 아직 툭툭 내뱉는 듯한 말투였으나 내용은 제법 다감했다. 잠시 후 케이는 조심스럽게 팔을 둘러왔다. 혹여 침대에서 떨어질까 싶어 배려하는 거였다. 그라하는 얼른 몸을 가까이 붙였다. 케이를 마주 껴안았다.
그라하는 생각했다. 케이는 알고 있었던 걸까?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아직 어려웠다. 지금의 선택을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그리움을 느끼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백 년이 넘는 세월은 얼굴에 쓴 가면도 달라붙게 만드는 법이었으니까. 한 번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면 다시는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라하가 두려운 게 바로 그거였다.
수정의 도시에서 온 소식을 마주한 뒤에야 깨달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자신은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크리스타리움이 키워낸 아이들의 태도가 그라하를 다잡아줬다. 라이나의 편지를 읽으면서는 완전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래, 수정공은 그렇게 가르쳤다. 슬픔을 억누를 필요는 없지만 그걸 핑계로 자신을 소홀히 여기지는 말라고. 어쩌면 그 말이 라이나의 길잡이별이 되어주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니 가끔은 뒤를 돌아봐도 괜찮지 않을까? 목적지를 잃을 염려는 없었다. 자신에게도 길잡이별이 있었으니까. 그의 별은 언제나 가장 밝게 빛났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자취를 감추는 법이 없었다. 그라하 티아는 별을 뒤쫓는 일이라면 익숙했다.
누구 하나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사고 없이 날이 밝았다. 거기엔 물론 케이의 빈틈없는 포옹이 큰 역할을 했다. 온몸에 단단히 얽힌 팔다리를 느끼며 그라하는 가위에 눌리지 않은 게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하룻밤 묵힌 고기파이는 의외로 맛있었다. 아침 식사 도중에 케이는 전날 저녁 풀지 못했던 이야깃거리를 내놓았다. 식구가 많아서 고향 집에서 만드는 파이는 훨씬 크다거나, 그래서 자매끼리 재료 손질을 분업한다거나. 자신은 동생들이 태어나기 전까진 막내여서 파이 껍질 장식을 주로 맡았는데, 알고 보니 제일 손 많이 가고 귀찮은 일을 떠맡은 셈이었다거나.
“내년에는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줄게.”
그라하는 단단히 다짐을 받아냈다. 약속한 거라고, 그때 가서 깨면 안 된다고 말이다. 케이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알았어, 미안해….’ 화가 풀려서인지, 눈에 띄게 풀죽은 연인이 좀 귀여워 보였다. 그라하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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