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햄] 용설란 (龍舌蘭) - 4/10
1부: 순백의 산신
용설란 (龍舌蘭)
1부: 순백의 산신
w. 주인장
기현은 하루가 다르게 시들어 가는 듯했다. 그를 지켜보는 별궁의 궁인들은 어찌 대군의 건강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시는가에 대해 걱정을 금치 못하였으나, 그의 상태를 되려 기쁘게 받아들이는 이도 이 넓은 궁에 필시 있을 터이었다. 기현의 잔기침은 날이 갈수록 거세어져, 걸음을 걷다가도 멈춰 서서는 몸을 웅크리고 마른 숨을 토해내기도 하였다. 오늘은 유독 숨쉬기가 힘이 드는구나. 기현이 그리 생각하다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에 제 별궁의 문을 당연하다는 듯 열고 들어오는 이가 있었다. 기현은 무거운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것에도 자연스레 형원을 떠올렸다가, 이내 들리는 목소리에 얼굴을 굳히고 의복을 단정히 정돈한다.
"어찌 날이 갈수록 몸이 성치 않은 듯하구나."
언제 들어도 저 비아냥거리는 말투에는 쉬이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기현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그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저하께서 예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제 앞에서 '흐음'하며 여유를 부리는 사내가 오늘은 또 어찌 제 속을 뒤집어 놓을지 알 길이 없어 기현은 머리가 조여 오는 듯했다.
"몸이 약할수록 더욱이 움직여야 하는 법이니, 오늘은 내 친히 아우와 함께 활쏘기를 할까 하여 직접 걸음 한 것이다."
"…."
"내키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그럴 기력조차도 없는 것이냐?"
후자가 정답이었으나, 그의 마지막 말에 괜한 오기가 생겨 기현은 되려 웃어 보이며 그의 말에 맞받아친다.
"저하께서 친히 청하시는 것인데 어찌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기현의 '청'이라는 표현에 남자는 눈썹을 씰룩거리며 비릿한 미소를 짓고는 뒷짐 지고 있던 손을 꾹 쥐어 낸다. 의복을 갈아입고서 활터에 도착한 기현은 어서 이 시간이 끝나기를 바라면서도, 차라리 잘 되었다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도 다른 것에 집중하고 있자면 형원에 대한 생각이 쉬이 몸집을 부풀리지 않았기에. 남자와 기현이 각자의 활을 받아 들고, 세자가 먼저 활시위를 당기며 입을 연다.
"요양을 다녀 왔다지?"
매섭게 날아간 화살이 멧돼지 얼굴이 그려진 그림의 이마팍에 꽂힌다.
"예, 그러합니다."
"좋은 기운을 받았을 터인데도 이 모양이니."
기현이 팔에 온 힘을 주어 활시위를 당기고 손을 놓자 그림의 흰 부분에 화살이 꽂힌다. 그의 마지막 말이 꼭, 형원을 탓하는 것 같았기에 기현의 안에서 작게 짜증이 돋는다.
"좋은 기운을 받았으나, 제 그릇이 작았던 탓이겠지요."
필시 그의 탓은 아니리라. 그는 제게 활력을 주었으니. 남자의 차례가 되고, 남자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며 피식 웃어 보인다.
"산중으로 갔는데 별채가 있었다라… 게서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고, 우기인데도 불구하고."
기현은 남자의 말에 고개를 돌리고, 이내 시위에서 멀리 날아간 화살은 멧돼지의 이마팍에 다시금 꽂힌다.
"왜 전하께서 너를 그곳으로 보내셨을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모를 줄 알았더냐."
"…."
"중전께서 금상의 머리 위에 계시거늘, 게다가 궁에 입들과 귀들이 이리도 많은데 내가 그것 하나 모를까."
남자는 거만한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돌려 기현을 쳐다보며 어서 활을 쏘라는 듯 고개를 까딱거린다. 기현은 제 손에 쥐어지는 화살을 꾹 쥐었다가 시위에 걸고 힘껏 당겼다가,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힘이 탁 풀린다.
"용설란."
기현이 쏜 화살은 멀리 가지 못하고 땅으로 곤두박칠치며 떨어진다.
"용설란의 기운을 받았는데도 이리 힘이 없으니."
"그의 탓이 아닙니다."
"도사인지, 신선인지, 그가 네게 무슨 도술을 부리더냐?"
기현은 조소 어린 그 말에 아랫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선인이라더니, 별 볼 일 없었던 게지."
"저하께서 함부로 입에 올리실 분이 아닙니다."
남자는 '하' 하며 어이 없다는 듯 숨을 터뜨리고서는 크게 활시위를 당기고서는 놓는다. 화살은 맹렬한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일정한 위치에 큰 소리를 내며 꽂힌다.
"허면, 그가 대단한 것이라도 된다더냐?"
"…."
"얼마나 대단한 것이길래 나는 여즉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인지."
"그를 마주할 그릇이 되지 못하시는 것이지요."
기현은 세자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매서운 그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주변에 서리라도 서릴 듯이 차가운 분위기에 기현은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뭐라?"
"그분을 뵙기 위해서는 그의 허락이 있어야 하는 법이니, 저하께서는 아직 그분께 허락 받지 못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네놈이 오늘 내일 한다더니, 기어코 정신도 놓아 버린 것이냐?"
"허면, 어찌 이 나라의 주군도 아니며 왕위를 잇지도 못할 제가 그분을 뵈었을까요?"
남자는 활터에 있는 궁인들에게 호통 치며 그들을 물리고서 기현에게로 한 발짝 다가선다.
"첩의 자식인 주제에, 감히 내게 무슨 망발이냐."
"전하께서 정실이신 중전마마보다 현비를 더 아끼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전께서 권력이 막강하다 하시나 이 나라의 지존께서 버젓이 살아 계십니다. 그러니 저하께서도 매번 열등감에 이기지 못해 제 피를 말리시는 것 아닙니까."
기현이 한 글자도 빼 놓지 않고 힘 주어 말하자 남자는 화살을 꺼내 기현을 향해 활시위를 당긴다.
"다시 한번 지껄여 보거라."
기현은 제게 향한 화살을 보다가 문득 어지러움이 일며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낀다. 그대로 난간에 부딪힐 줄 알았던 몸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팔에 기대어지고, 이내 기현은 이 체온에 익숙함을 느낀다. 허나 어찌 쉬이 고개를 돌려 볼 수 있을까. 그가 제게도 말하지 못한 깊은 비밀을 알고 나서부터 수백 수천 번이나 그를 마음 속으로 밀어내었건만. 행여나 뒤를 돌아보면 밀어 두었던 마음이 다시 저를 덮칠까 두려워 기현은 덜덜 떨 뿐이다.
"나를 만나기를 고대하였는가?"
"…."
"고작, 네까짓 게?"
기현은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를 가만히 귀에 담는다. 분명 형원의 목소리였다. 제게는 단 한 번도 들려 준 적 없던, 한껏 낮고 지독하게 시린 말투였다. 기현은 여전히 제 쪽을 향해 있는 화살 뒤로 한쪽 입꼬리만 올린 채 웃고 있는 남자를 쳐다본다.
"궁에는 걸음 하지 않는다던 이가 직접 행차까지 하셨으니. 내 이를 어찌 받아들이면 되겠는가, 양현?"
"묻는 말에 답도 않는 걸 보니, 그 성품이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퍽 다정해 뵈는구나. 정인이라도 되는 것이냐?"
기현은 그 말에 가슴이 철렁거린다. 부정해야 하는데, 차마 부정할 수도 없는 까닭은 자신이 여즉 형원의 품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형원은 남자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에 의해 팽팽히 당겨진 활시위를 바라본다.
"아직 시위를 놓지 않는 걸 보니 그럴 베짱은 없는 게지."
그 말과 동시에 남자의 손에서 제 의지와 상관 없이 화살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지니 남자는 짐짓 당황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화살을 바라본다. 형원이 아쉬움을 가득 담은 채로 기현을 제 품에서 놓아 주고는 뒷짐을 진 채로 남자에게 다가가 그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는 그의 귓가로 입술을 옮긴다.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봅니다, 세자."
"이… 이게 무슨."
"헌데, 왜 그리 생각이 짧으실까요."
"…?"
"용설란은, 악인에게서 명을 앗아 간다는 것을, 잊으셨나 봅니다."
형원이 그의 정수리에 얹은 왼손에 힘을 주자 검은 연기가 일고 그는 꼭 깊은 잠에 빠진 듯 눈을 감더니 바닥에 쓰러진다. 기현이 놀란 눈을 하고서 세자에게 다가가려 하자 형원이 그의 앞을 막아선다.
"다가가지 마십시오. 아직 도술이 남아 있습니다."
"저하께 무슨 짓입니까!"
"죽은 것은 아니니 염려 마세요. 그의 명이 질기도록 길기에 일부만 끊어 낸 것이니."
형원이 뒤를 돌아 기현을 마주보자, 기현은 그의 눈을 마주하고선 이내 시선을 회피한다. 차마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도 없었다. 떠날 때보다 더욱 수척해진, 야윈 얼굴에 가슴이 저린 것이 행여나 그가 승천한 날이 멀지 않은 것일까 두려운 것이었다. 형원의 머리칼은 연분홍빛이 흐려져 잿빛에 가까운 색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어찌 좋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하께서 쓰러지신 것이 제 탓이라 또 물고 뜯겠지요."
"저 자에게는 제가 온 것에 대한 기억이 사라져 있을 것입니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릴 것이니 염려 마세요."
"하…."
"그리웠습니다."
"그리웠다고요?"
기현은 그제야 원망 섞인 눈으로 형원을 바라본다. 나를 잊으시기를 그리 간곡히 바랐건만, 하늘도 무심하시지. 기현은 그의 눈에서 더욱 짙어진 연정을 보고서는 아랫입술을 깨물고서 독하게 마음 먹는다. 어쩌면 스스로를 다스리려는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그리 매몰차게 내치셔 놓고는 그리우셨다고요?"
"대군, 내 그대에게 말 못 한 것이 있는데,"
"되었습니다. 그 연유야 무엇이 되었든 저를 내치신 것은 그대입니다."
"대군."
기현은 차오르는 울음에 목이 매여 제 목소리가 엉망으로 나오는데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우셨다면서 어찌 한 통의 기별도 없었을까요? 어찌 한 번도 저를 찾지 않으셨을까요?"
"찾아갔습니다."
"…."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여러 번 찾아갔습니다. 그대의 처소에도, 그대의 꿈속에도."
"…."
"그대는 알 수 없었을지 몰라도, 걸음 하였습니다. 그러니 노여워 마세요."
마음을 약하게 먹어서는 안 된다. 그가 나에 대한 연정을 모두 떨궈 놓아야만 그가 조금이라도 이 생에 더 머물 수 있을 테니.
"아뇨. 이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 하시지 않으셔도 되었을 텐데."
"대군."
"더는, 그대를 마음에 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대 또한, 그것이 연정이거든 접어 두세요."
"앞으로 자주 걸음 하겠습니다."
"형원!"
"그대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용히 찾아 뵙겠습니다."
부디 그러지 말아 달라 간곡히 청하고 있는 것인데도. 기현은 기어코 침아 내던 눈물을 뺨 위로 흘려 보낸다.
"저 또한 그대를 사모하고 있습니다, 비록 많이 늦은 대답이겠지만."
이 유약한 이 또한 알아 버린 게지. 그래서 제 속에도 없는 말을 이리 뱉는 것이지.
형원은 기현의 속내를 알면서도 주저없이 제 진심을 전한다. 이미 꽃은 만개할 준비를 하고 있으니, 떠나야 한다면 그대 곁에서 떠나는 것이 낫겠지. 차라리 그대가 몰랐더라면, 그대에게 어떠한 짐도 지우지 않고 홀로 떠났을 터인데. 형원은 얼마 남지 않은 생에 조금은 욕심 부려도 되지 않을까 하늘에 빌어 본다. 형원은 기현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서 활터의 문을 열고 나선다. 그가 자취를 감추고 나서 뒤늦게 기현이 그 문을 열어 젖혔으나, 그의 자취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한 궁인들만이 기현의 물기 젖은 얼굴을 보고서 당황하여 무슨 일이냐 물을 뿐이었다. 기현은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추스리고 천천히 입을 연다.
"저하께서 쓰러지셨으니 그를 부축하여 동궁으로 향하라."
기현의 말에 세상이 무너지는 얼굴을 한 이들은 황급히 활터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서 세자의 안위를 걱정하며 그를 추스른다. 기현의 식솔들이 그의 곁에서 괜찮으시냐 안부를 물었으나, 기현에게는 그들의 말소리가 웅웅거리는 소음으로만 들릴 뿐이었다.
허면, 내가 환각이라 여긴 것들이, 그저 한밤의 흩어질 꿈이라 여겼던 것들이 생시였다는 말일까. 깨고 나면 기억에서 옅어질 시간에 실로 그와 함께였다는 말인가. 기현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주저 앉아 버리자, 상궁 하나가 그를 부축한다. 왜 단단히 잡아 두었던 제 속을 흔드시는지. 이제야 찾아와 어쩌겠다는 것인지. 형원의 말대로 세자에게서 그날 용설란을 본 기억은 티끌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그가 한 시진이 지나 눈을 떴을 때, 양현께서 저하가 쓰러지심을 알렸다는 말에 그저 기현에 대한 핍박이 더욱 심해졌을 뿐이다. 기현에게 죄를 묻기도 하였으나, 활터 밖에서 듣는 귀들이 많았으며 세자께서 먼저 제게 활을 겨눴다는 기현의 진술로 그날 일은 그저 세자의 기가 허했던 탓이라 결론 지어졌을 뿐이었다. 그 일이 있고서 기현의 건강은 눈에 띄게 악화되어 갔을 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밤 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속에 응어리가 진 듯 답답하여 제대로 식사도 않으니 피골이 상접할 수밖에.
기현은 형원과의 재회 이후로 매일 밤 그가 제 꿈에 나타나지 않기를 빌었다. 차라리 그가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나았을까, 아니면 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더라면 나았을까. 제 꿈에 걸음 하여 그를 만났던 것이라면, 그가 걸음 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그가 연정을 키우지 않기를, 저를 잊고 생을 이어 나가기를 바랐던 시간들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기현을 무너지게 만든 것이다. 기현은 간만에 제 별궁으로 걸음 한 현비에게 절을 올리고서 그녀를 자리로 모시고 그녀의 앞에 정중히 자리한다.
"날이 갈수록 양현의 안색이 좋지 않으니, 이 어미 또한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차도가 있을 것이니 너무 염려치 마시옵소서."
요양을 다녀 와서는 생기가 돌던 얼굴이 푸석하기 짝이 없으니, 현비의 얼굴에도 그늘이 지는 것이다. 그녀 또한 금상께 양현의 요양을 청하였으나, 그 또한 하늘의 뜻일 것이라는 매정한 답만이 돌아왔으니 현비는 작게 한숨을 쉬며 기현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연다.
"근심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근래 들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들었습니다."
기현은 입을 다물고 쓰게 웃어 보인다. 제 속에 근심이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허나, 그 중 가장 큰 근심이라 한다면 오래도록 굳게 다짐했던 마음이 약해지려 한다는 것이었다. 야윈 그 얼굴을 감싸 주지 못한 것이, 저를 연모한다는 말에 저 또한 그러하다 답하지 못한 것이, 저를 향해 웃어 보이던 얼굴에 화답하지 못한 것이, 큰 덩어리가 되어 제 가슴을 짓누르는 것이다. 제 손을 쥐는 압력이 커지며 제 답을 재촉하자 기현은 입을 열었다.
"소자는 괜찮습니다. 그저 현비께서 평안하시다면 저 또한 무탈합니다."
"이 어미보다 양현의 몸부터 챙기세요. 그것이 저를 위하는 길입니다."
"말씀 새겨 듣겠습니다."
"탕약도 거르지 마시고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 어미는 모르시겠지. 이제 이 몸에 탕약도 들지 않는다 하여 이틀 전부터 탕약이 올라오지 않는다는 것을. 하여도 기현은 내색하지 않았다. 그것이 금상의 뜻이라면 받들어야만 했으니. 기현은 현비께서 가시는 길을 배웅하고 무거운 발을 옮겨 제 처소로 향하다가, 문득 형원을 스치듯 보았던 자리에 멈춰 선다. 오늘따라 유독 몸이 고된 탓인가, 그대가 이리도 사무치게 그리운 것을 보면. 매번 제게 다가오지 말라 속으로 다짐했으나, 오늘 만큼은 그의 체온에 기대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 기현은 작게 머리를 털어 내고 자신의 침소로 돌아와 매일 그랬듯이 벽에 걸린 매화가 가득한 정자 그림을 눈에 담으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형원은 뒷짐을 지고서 또다른 제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 보다가, 못에 비친 또다른 자신을 들여다 본다. 용설란의 꽃대가 솟아 오를수록 제 머리칼의 빛이 옅어지는 걸 보니 실로 얼마 남지 않은 것이지. 기현이 떠난 이후로 형원은 매번 뒤뜰로 향했다. 뒤뜰에는 기현이 머물던 그때와 같이 매화가 가득한 정원이 펼쳐져 있고, 호수 한가운데에는 정자가 있었다. 그가 그리워질 때면 그 정자에 앉아 듣는 이 없이 독백을 뱉어 내곤 했다. 그러다 오늘처럼 개화통이 극심하여 그에 대한 그리움을 참을 수 없을 때면 부채를 챙겨 들고 궁으로 향했던 것이다. 형원은 수풀을 걷어 내기 전에 욱신거리는 통증에 잠시 몸을 웅크렸다가, 그 통증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몸을 곧추 세우고 궁으로 걸음 한다.
일전에 보았던 그에게서는 처음에 보았을 때처럼 주홍빛 파장이 일었었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기현이 저를 밀어냄에도 굳이 걸음을 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가 건강히, 무탈하기를 바랐으니. 형원은 달빛만이 길을 비춰 주는 어둑한 밤길을 거닐다가 기현의 별궁으로 들어선다. 어떠한 소음도 없는 고요한 정적 속에 형원은 궁 안에 기거하는 궁인들의 눈을 피해 그의 침소 앞에 다다른다.
그대는 걸음 하지 않아도 된다 하였으나, 내 다 끝나 가는 생에 후회는 없었으면 싶어 온 것이니 노여워 마시길. 형원은 그렇게 소리 없이 제 뜻을 전하고서 부드럽게 문을 통과해 그의 공간으로 발을 들인다. 어두운 방 안에 홀로 누워 있는 이에게서는 그 주홍빛 파장마저도 제 기력을 내지 못하고 옅게 허공에 흩어지고 있었다. 형원은 다급하게 기현에게로 다가가 그를 조심히 깨워 본다.
"대군. 대군, 일어나 보세요."
파장이 옅어진다는 것은, 명이 다 해 간다는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형원은 기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잠든 그를 제 품에 안고 그를 다시금 흔들어 본다.
"대군, 기현아…!"
네가 눈을 떠야만 내가 너에게 숨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데.
형원이 기현을 품에 안았다가 다시 그를 내려다 보았을 때, 기현은 희미하게 눈꺼풀을 떠 올리고서 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 또한 꿈일까, 기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 또한 꿈이라면 차라리 영영 깨지 않는 편이 나을 텐데. 근데 어찌 저 이는 곧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저를 보고 있는지. 기현이 힘없는 손을 들어 형원의 뺨을 쓰다듬자 형원은 주저 없이 기현에게 입을 맞춘다. 그에게 생을 불어 넣어 주는 것이었다. 오직 용설란이기에 가능한, 함부로 아무에게나 부릴 수 없는 도술이었다.
형원은 아주 오래 그리고 깊게 기현에게 제 숨을 불어 넣어 주었고, 기현은 차오르는 숨에도 굴하지 않고 형원을 받아들이며 그의 백의자락을 약하게 손에 쥐어 본다. 아, 이리 생생히 느껴지는 것을 보면 꿈이 아니라 생시인가. 생시라면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했다. 시간이 멈추면 이 순간이 영원이 되어, 그대 또한 죽음을 면할 수 있지 않을까. 평생토록 그대와 내가 함께일 수 있을 테니. 기현은 아주 몽롱한 꿈을 꾼 듯했다. 꿈속에서 맞닿은 형원의 입술은 꼭 현실의 그것이었던 듯 그 촉감이 생생했고 그 체온 또한 자신이 그리워 마지 않던 따스함 그대로였다. 유독 오늘따라 몸이 개운하고 평소와 달리 활력이 넘치는 것에, 기현은 이불을 걷어 내고서 이불 위에 멍하니 앉는다.
꿈이라면 영영 깨지 않기를 바랐건만 기어코 또 현실로 돌아와 버렸구나. 기현은 매일의 일상이 그랬던 것처럼 상궁에게 강녕전에 세자가 들었는가 묻고는 그가 강녕전을 나섰다는 말이 들리기까지 몸을 단장하고서 제 별궁에서 순서를 기다린다. 오래 지나지 않아 아침 문안 인사를 갈 시간이라 알리는 목소리에 기현은 의복을 다시 단정히 가다듬고 걸음을 나선다. 매일 그리도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던 얼굴은 저를 보자마자 표독스럽게 바뀌며 다짜고짜 내 멱살을 쥐어 낸다.
"바른 대로 고하라."
"무얼 말씀이십니까."
"활터에게 내게 무슨 짓을 했던 것이냐!"
"무슨 짓을 한 이는 저하이십니다. 제게 활을 겨누셨던 것 잊으셨습니까?"
"이놈이 끝까지…!"
세자가 기현의 멱살을 더욱 세게 틀어 쥐자, 그의 손목 위로 새하얀 큰 손이 얹어지며 이내 그의 우악스러운 손을 치워 낸다. 주위에서 놀라 숨을 참는 소리에 기현이 고개를 들어 보면, 새하얀 머리에 백의를 입은 형원이 서 있다.
"궁 안에서 소란을 일으키시면 곤란합니다, 저하."
"네놈은 또 무엇이냐."
"제 존재에 대해 아실 필요는 없습니다. 곧 사라질 존재이니."
기현은 그의 말이 유독 아프게 들려서 작게 뒷걸음질쳤고, 형원은 기현을 향해 늘 그에게 지어 보이던 미소를 빙긋 지어 보이며 그의 손을 맞잡는다.
"나 또한 강녕전으로 향하던 길이니 함께 가자꾸나, 기현아."
기현은 제 이름을 부르는, 인간에게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이의 손에 이끌려 궁인들도 뒤로 하고 형원을 뒤따라 걸음을 옮긴다. 어찌 할 바를 모르는 것은 오직 저뿐인가. 당당히 걸음을 옮기는 형원의 뒤에서 기현은 멍하니 그의 등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털어 낸다.
"몸은 좀 어떠하느냐?"
"어찌 하려 이러십니까."
"너를 데려 가려 한다."
"어디로 말입니까?"
"내 별채로."
"그것이 무슨,"
"아직 네게 보여 주지 못한 것들이 많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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