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의 메두사 (11)

015. 현자의 돌에 대한 소문

늑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군가 찾아오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대였다.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늑대는 붙잡힌 옷깃을 보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똑똑.

그러나 다행히도 다시 한번 울리는 노크 소리에 이레시아가 뒤척였다. 반대편으로 돌아 누워 쥰을 끌어안은 것을 본 늑대는 문밖의 불청객을 응시했다.

이 시간에 객실 청소를 하러 오진 않을 테고.

소리 없이 침대를 빠져나가던 늑대는 이제는 등을 보이고 있는 여자를 보고는 작게 혀를 차며 상의 단추를 풀었다. 간밤에 샤워 가운만 입은 채 잠이 든 모습이 새벽 공기에 추워 보였다. 하여간 손 많이 가는 여자였다.

뒤이어 조용히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레시아는 줄곧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이불 위로 그가 벗어둔 사제복이 덮여 있었다.

+++++

"뭐야?"

새벽녘부터 문밖에 기다리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히아센이였다.

"자고 있었어?"

히아센은 얼굴을 반쯤 가리는 후드를 벗으며 물었다. 밝은 갈색 머리가 어딘가 이상한 모양으로 뻗쳐있었다.

머리는 또 왜 저래?

"머리..."

"응?"

"아니야."

늑대는 고개를 저었다. 알아서 하겠지.

"쥰이랑 마님은?"

"자."

하긴 이른 시간이긴 하지. 히아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종이 뭉치를 넘겨주었다. 저번 통신 아티펙트로 부탁했던 정보들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빨리?

늑대가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제대로 조사한 거 맞아? 너무 빠른데."

"뭐야? 불만 있으면 다시 내놔!"

다시 서류를 낚아채려던 히아센의 손을 늑대가 간단히 피했다.

"빠르다고 했지, 필요 없다고는 안 했어."

하여간... 빠르면 빠르다고 난리, 늦으면 늦는다고 난리지. 누구는 밤을 새우면서 일하는데 말이야.

히아센이 툴툴거리며 불만을 토했다.

"하여간 운이 좋았어. 적어도 2, 3일은 걸리는 일인데, 어떻게 지금 내가 알아보는 일이랑 딱 맞물리는 부분이 있더라고."

"맞물리는 부분?"

늑대는 서류를 넘기며 되물었다.

"요 근래에 몇몇 도시에서 '현자의 돌'에 대한 소문이 돌고 있는 모양이야. 소문의 경위는 조금씩 다른데 거의 대부분 외지인을 통해서 퍼지고 있다더라고."

"광산 안에 현자의 돌이 있다는 소문?"

"아니. 현자의 돌을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소문."

서류를 넘기던 손이 멈칫거렸다.

"그건 또 무슨 헛소리지? 그런 게 가능할 리가 없지 않나?"

인간이 직접 만들 수 있는 물건이었다면 진즉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록하트와 마찬가지로 현자의 돌 또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의 범위를 훨씬 넘어선 물건이었다.

"그런 게 가능하다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게 문제인 거지."

히아센의 말마따나 그가 건넨 서류에는 비슷한 사건들의 리스트가 주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지방 소도시에서 죄 없는 처녀들을 마녀로 색출해 화형을 시켜 그 뼛가루를 모아 현자의 돌을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이 적혀있었다. 늑대는 인상을 구겼다.

"정신이 나갔군."

이건 또 뭐야.

늑대가 혐오감 가득한 표정으로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여성들의 자궁만 적출해 그것으로...

그 다음 페이지는 고양이의 배를 갈라 그 안을 어린 아이의 심장으로 가득 채운 뒤...

그 다다음 페이지는...

"차마 못 읽어주겠군."

그는 결국 신경질적으로 서류를 덮어버렸다. 이건 뭐 거의 이레시아가 즐겨 읽는 고어 소설 속 미친 공상이 따로 없었다.

"이딴 소문을 믿는 얼간이들이 있다고?"

"믿기만 할 뿐이면 다행이게? 전부 실제로 일어난 일들이라고."

"현자의 돌이라는 게 실제로 있기는 한 건가?"

"내가 알기로는 마탑이 소유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에드워드 에릭이라는 연구원이 어린 아이 주먹 절반 정도 되는 현자의 돌을 발견해서 연구 중이라고 들었어."

반신이 날아간 마탑의 주인을 소생시켰다더라고.

히아센의 말에 늑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 좀비가 따로 없군."

"아쉽게도 사람을 뜯어먹거나 그러진 않는다 더라고 그 양반이."

록하트가 드래곤의 심장 파편이라고 한다면, 현자의 돌은 그 옛날 대현자가 이 땅을 구축할 때 사용한 지팡이의 파편이라고 했다.

"그딴 돌멩이가 도대체 뭐라고들..."

"그딴 돌멩이로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먹고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 쓸 돈을 벌어온다면 나도 그럴 거 같은데?"

물론 그 서류 내용처럼 미친 짓거리를 해서까지 실험해 볼 생각은 없다만. 히아센이 질색하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검증된 내용이면 하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설마! 아무리 그래도 죄 없는 여자들을 화형시키거나 배를 가르는 짓은 안 해!"

"고양이 배는 가르겠다는 거냐?"

늑대가 기가 찬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히아센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펄쩍 뛰었다.

"고양이는 근처만 가도 두드러기랑 재채기가 나오는데 그딴 짓을 하겠냐!"

"다행히도 아군인 모양이군."

늑대가 씩씩거리는 히아센을 무시한 채 서류의 뒷부분을 살폈다. 그러나 찾고 있는 정보는 서류의 맨 마지막 장을 넘기도록 나오지 않았다.

늑대가 혼자서 발을 쿵쿵 구르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히아센에게 서류를 흔들어 보였다.

"... 사제에 대한 정보가 빠졌군."

"없으니까 없지. 하필이면 쌍둥이 여신의 사제일 건 뭐야?"

그쪽은 정보를 구하고 싶어도 못 구한다고. 히아센이 한숨을 쉬며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어렴풋이 이유를 알 것도 같아 늑대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작게 혀를 찰 뿐이었다.

쌍둥이 여신은 테레사와 클레어 두 영지에서 섬기는 신으로, 지금은 그 중 반쪽만 남아있었다. 몇 년 전 클레어 영지가 폭삭 망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아니, 멸망했다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겠지.

원인 모를 괴이의 습격으로 도시는 온통 불바다가 되어버려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게다가 도시를 습격한 괴이들이 그 후 흔적도 없이 종적을 감춘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클레어 도시의 어딘가에 오버(Over)와 연결되어 있는 보이지 않는 루프(Loop)가 있다는 추측이 있었지만, 결국은 그 뿐이었다.

아무도 루프(Loop)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년 전, 이레시아가 떨어진 선녀샘도 그 루프(Loop) 중 하나고.

아무튼 쌍둥이 도시인 클레어가 그런 식으로 멸망하게 된 뒤, 테레사는 극도로 폐쇄적으로 변했다. 외지인들의 출입을 엄격히 관리하고 무역의 문을 걸어 잠갔다.

그러하니 아무리 히아센이라고 해도 쌍둥이 여신을 모시는 사제를 조사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었다.

"난 최선을 다했어..."

히아센이 머리를 긁적이며 변명을 뱉어보았다. 늑대 역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플라티나로 돌아갈 건가?"

"그래야지. 물이나 한 잔 줘. 목말라 죽겠으니까."

끄응. 히아센이 바닥에서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러던가. 아...

늑대는 문뜩 지금 떠올랐다는 듯 방문을 열려다 말고 다시 히아센을 쳐다봤다. 왜 그러냐는 듯 히아센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방이 엉망이어도 놀라지마."

"응? 방 꼬락서니가 어떻길래?"

끼이익.

히아센이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난장판이 되어 있는 방안 꼬락서니를 보고 그대로 말을 잃었다.

+++++

금이 가 있는 창문과 난자 되어있는 커튼, 나뒹구는 의자와 탁자의 다리였던 것, 이리저리 패인 자국이 남은 벽지까지.

방안은 칼날 바람이라도 한바탕 휘몰아친 것처럼 엉망이었다. 그 가운데서 이레시아가 멍하니 침대에 앉아있었다. 막 잠에서 깬 듯 아닌 듯, 허공에 시선을 던지고 있던 이레시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히아센이 흠칫 어깨를 떨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하던걸 간신히 참아냈다.

딱 봐도 상태가 눈에 띄게 좋지 않았다.

겉모습은 분명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어 보이는데, 속에서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무언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게 보였다. 그것은 당장이라도 터져 나와 주위의 모든 걸 녹아내리게 만들 것 같이 숨 막히고 끈적한 것이었다. 이레시아 본인이 무의식적으로 억누르고 있는 그것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스멀스멀 삐져나오고 있었다.

"... 마님?"

"?"

뿌옇게 안개가 낀 붉은 눈이 두어번 깜빡이더니 입가에 뒤늦게 옅은 미소가 걸렸다. 방금 전까지 사납게 일렁이는 기운들이 순식간에 그녀의 몸 안으로 사라졌다.

"안녕, 히아센."

"마님..."

"머리는 왜 그래?"

이레시아가 한숨과 같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사라졌다. 그 토악질 나올 정도로 끈적한 기운들이. 그렇다는 건 그 기운들을 전부 집어삼킨 이레시아의 몸은 정말 괜찮은 걸까?

히아센의 눈이 사정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히아센의 옆에서 미간을 잔뜩 구기고 있던 늑대는 이내 아무렇지 않은 듯 이레시아에게 다가가 아까의 서류 뭉치를 건넸다.

"언제 깼지?"

"방금. 히아 목소리가 들렸거든."

이레시아는 태연한 얼굴로 거짓말을 입에 올리며 그가 내민 서류를 받았다.

... 피곤해.

그녀는 어딘가 제 몸이 아닌 것 같은 팔을 들어 서류를 살폈다. 그러나 글이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허기가 졌다.

"... 배고파."

어제 저녁에 먹은 것을 모두 게워내서 그런가...

이레시아는 보던 서류를 내려놓고 늑대를 올려다봤다.

"지금 몇 시야?"

"새벽 5시 조금 넘었어."

"그래?"

이레시아가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 있는 히아센을 보며 입을 열었다.

"바빠, 히아센?"

혹시 바로 돌아가 봐야 해? 그녀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침대를 벗어나며 물었다.

"아... 아니! 나 시간 많은데?!"

거짓말. 아까는 분명 물 한 잔 마시고 바로 돌아가야 한다고 해놓고선.

"그래? 잘됐네."

씻고 올 테니까 아침 식사라도 들고 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이레시아가 비틀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히아센이 흔들리는 눈으로 이레시아를 응시했다.

몸이... 못 견디는 건가? 도와줘야...

"히아센."

히아센이 저도 모르게 뻗은 손이 늑대에게 저지당했다. 왜 막냐는 듯 히아센의 얼굴이 험상궂게 찌푸렸다.

빌어먹을 자식. 아무리 이레시아가 밉다고 해도 저렇게 몸이 안 좋아 보이는데!

"지금은 건들지 않는 게 좋아."

잡아먹히고 싶은 게 아니면.

늑대는 굶주려서 잡히는 대로 먹어 치울 것 같은 이레시아의 마력을 보며 경고했다.

흠칫. 히아센이 어느새 욕실로 사라진 이레시아의 뒷모습을 쫓으며 또 다시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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