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그러니까,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정말로 단순하게도. 세라엘은 마음속으로 똑같은 말을 계속 되뇌며 화려한 색감의 옷들 사이를 헤집었다. ─와인색 드레스. 이건 리엔시에를 더욱 고급스러운 경지로 끌어올려 주겠지만, 리엔시에의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감청색 치마에 하얀 블라우스. 평소에 입고 다니는 교복과 똑같은 분위기라 식상하다. 연분홍색 바탕
“코니엘, 부탁이 있어요.” “...네. 말씀하세요.” “성녀님의 입학을 황가의 권한으로 막을 수는 없는 건가요?” “...” 레니발렌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간절해 보였다. 코니엘은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알았기에 그저 조용히 침묵했다. 어렸을 때부터 지켜봐 온 그였기에 그녀는 잘 알았다. 소년이 소녀의 애정을 갈구한다는 것을. 그러나. “미안
“다들 모이셨군요. 그럼 정기 회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힐렌다 수녀의 말을 시작으로 착석한 모든 수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들은 모두 세라엘의 발데마인 입학을 앞두고 그에 대한 회의를 시작한 참이었다. 사실 힐렌다를 포함해 몇몇 수녀들은 성녀의 입학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회의를 한 끝에, 로나르힘의 이미지에 긍정적이고 친숙한 변
“...힐렌다 님.” “...” “……벌써 사흘째예요.” 소냐가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힐렌다라 불린 여성은 탁자 앞에 앉아 성경을 펴고는 뚫어져라 그것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냐는 애가 타는 마음으로 간절히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 시선이 느껴지지 않는 듯 힐렌다는 묵묵부답이었다. 보다 못한 소냐가 결국 본론을 꺼냈다. “세라엘님께
“......” “...” 붉은 머리칼이 눈앞에서 눈부시게 흩어졌다. 아름다운 색이었다. 세라엘은 학교 복도를 앞서 걸어가고 있는 베레니체를 따라가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 사람은 누구지? 리엔시에의 친구인가? 하지만 리엔시에는 나 말고는 친구가 없을 텐데. 이상했다. 세라엘은 리엔시에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친구일 터였다. 그녀에게 친구는 자신 이
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점심시간을 맞아 학생들이 삼삼오오 식당으로 이어진 길목에 모여들었다. 곧이어 각자 주문할 메뉴를 고르는 긴 줄이 만들어졌다. 오늘 메뉴는 뭘까, 기대에 부푼 모습으로 옆 사람과 서로 잡담을 하고 있는 인파 가운데. 작은 머리가 퐁 하고 솟아났다. “잠깐... 잠깐만. 지나갈게.” “아, 뭐야?” “왠 꼬맹이야. 중등부인가?”
리엔시에의 비정상적인 집착과 사랑은 어찌나 대단한지, 이미 발데마인 교내에까지 허다하게 퍼졌을 정도였다. “저것 좀 봐. 또 여기서 성녀님 소식이 실린 호외 더미를 들춰 보고 있어.” “유레이토 영애, 지난번에는 대신전에 몰래 침입했다가 신관들한테 쫓겨났대.” “어머나, 유력가의 자제가 무슨 그런 망측한 짓을.” “공작님께서는 저런 걸 아시려나 몰라.
꿈을 꿨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꿈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다. 그래, 이건 꿈이다. 자각몽. 의식한 채로 꾸는 꿈. 그러니까 꿈이긴 하지만 이건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오롯이 내 의지였다. 리엔시에. 나는 죽기 직전에서야 깨달았다. 삶의 마지막에 와서야 알았다. 내가 너를 통해 그리던 감정은 애정도, 증오도 아닌. 그저
세라엘은 성녀의 침실로 식사를 가져올 수녀를 기다렸다. 아까보다 시간이 조금 흘러 시계 분침이 막 6을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배고픈 성녀는 침대 옆쪽에 놓인 단출한 나무 식탁에서 저녁을 기다렸다. 자극적인 음식을 싫어하는 제 입맛에 신전의 음식은 잘 맞았다. 오늘의 메뉴는 뭘까. 왠지 양젖으로 만든 치즈를 올린 샐러드를 좀 먹고 싶은데. 그런 실없는
누군가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이름 모를 보랏빛 들꽃이 짓밟혀 있었다. ‘리엔시에 영애는 다르지 않아요.’ ‘당신은 특별하지 않다구요.’ 붉은 머리칼의 소녀가 남긴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처음이었다. 자신에게 너는 남들과 다르지 않다고, 특별하지 않다고 말해준 사람은. 부모님은 자신을 평범하게 사랑하는 딸자식으로서 대했지만 그건 ‘남들과
“오늘은 발데마인으로 가서 기도를 드릴래.” “...네. 알겠습니다, 성녀님.” 기분 좋은 주일이었다. 하늘에 구름이 희게 깔려 사방이 밝았다. 흐렸지만 사람들의 표정이 더 잘 보이는 것 같아 기분은 좋았다. 세라엘은 자기 말에 수녀의 귀찮아하는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표정을 숨기면 뭐 해, 태도에서 드러나는데. 속으로 그런 그녀를 비웃으며 제
한 소녀가 울고 있었다. 사방에서 비난이 날아 들어온다. 괴물! 괴물! 귀가 뾰족해! 눈 좀 봐, 이상해. 울고 있는 소녀, 리엔시에는 귀선유전으로 태어났다. 귀선유전이란 조상 중 이종족이 섞여 있어 후대에 뒤늦게 그 특성이 발현된 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리엔시에는 이종족의 외모를 타고났다. 엘프의 형질을 타고난 그녀는 뾰족한 귀에 날카롭게 찢어진
하늘이 인상을 흐리기 시작했다. 천장이 희게 짙었다. 우울한 날이었다. 구름이 낮게 깔리고 세상은 온통 칙칙한 흰 빛으로 물들었다. 세라엘은 널찍하다 못해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복도 가운데에 서 있었다. 창문 대신 아치형으로 길게 구멍을 내어 기둥들이 쭉 이어지는 복도. 세라엘은 그 기둥을 타고 올라가 등을 놓기 위해 겉으로 모양을 낸 자리에 앉아서
“세라엘, 어서 나오너라. 수녀님들께서 기다리신다.” “...지금 나가요.” 세라엘은 제 방 침대 위에 놓인 낡은 가죽 가방을 꽁꽁 동여맸다. 다 챙겼지? 빠진 건... 없으려나. 어차피 자기 소유의 물건이라 할 것도 거의 없었다. 이 집에서 물질적인 것을 받은 기억은 전무하다고 봐도 되니까. 가진 것 중 그나마 번듯한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는 헐
“리엔시에. 오늘이 코니엘님께서 놀러 오시는 날인 건 알고 있겠지.” “네, 어머니.” “네가 같은 여성으로서 잘 돌보아드리렴.” “...네.” 코니엘 루 뷔에르 쏠레오 라흐벤시아. 라흐벤시아 현 황제의 제7황손녀로, 리엔시에보다 한 살 어린 황녀님이었다. 리엔시에를 꺼려하는 외부인 중 한 명이기도 했고, 언젠가 가족 이 되어 유레이토 가문의 일원이
공작 저의 후원은 라일락 나무로 가득했다. 아래에서 올려다본 풍경은 신록 가운데 피어난 보랏빛 기적이었다. 알알이 맺힌 기적이 바람에 흔들려 파도같이 너울 쳤다. 세라엘은 그 죄악의 색으로 물든 파도에 홀린 듯 몸을 맡겼다. 한들한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퍼지는 향에 꼭 취할 것 같았다. 신은 라일락 나무 위에 사신다던데, 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신
“아악─!” 저택에 한 여성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침실로부터 터져 나온 그 소리는 듣는 이를 불안에 떨게 할 만큼 고통스럽고 악에 받친 목소리였다. 통증을 토해내는 여성의 목소리와 그녀를 둘러싼 한 무리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끊이질 않았다. “기요메트, 조금만 더 힘내. 우리 로니안의 머리가 보여!” “어머니...!” “자네, 이거 정말 괜찮은 거
여기 또 다른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세라엘 슈안 데 카에토 라헤니오. 이전 이름은 세라엘 로트너. 라헤니오 후작 가문의 사생아로 태어나자마자 버림받아 바깥으로 입양 보내졌다. 후작가에서 사람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자신이 귀족의 사생아인 줄도 모르고 평민으로 자랐다. 그러나 라헤니오 가문에 여아가 태어나고 신전에 대신 보낼 여식이 필요하던 찰나.
어느 성스러운 주일. 기적 같은 날의 동이 트지 않은 새벽, 유레이토 공작가의 후계자가 태어났다. 축복받은 계승자의 이름은 ‘리엔시에 솔린 유레이토’. 태어난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라흐벤시아에서는 성별에 상관없이 첫째가 가문의 계승권을 가진다. 그러므로 리엔시에는 태어나자마자 제국 유일 공작 가문의 후계자가 되었다. 하나 후계자로 내정된 리엔시에는 남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다. 그것이 네 삶에 있어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자, 비가 올 것처럼 꾸물거리는 잿빛 구름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 어둡게 가라앉은 하늘이 운다. 조금씩 눈물을 떨어트리더니 이내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온몸이 싸늘해지며 한기가 감돌았다. 비를 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