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성녀들

프롤로그

1차 GL 자캐 CP 리엔세라 : 연재

──우리는 서로를 사랑했다. 그것이 네 삶에 있어서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일이 될 줄은 몰랐다.

머리 위를 올려다보자, 비가 올 것처럼 꾸물거리는 잿빛 구름이 세상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 어둡게 가라앉은 하늘이 운다. 조금씩 눈물을 떨어트리더니 이내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순식간에 온몸이 싸늘해지며 한기가 감돌았다.

비를 맞으며 위로 젖혔던 고개를 다시 정면으로 향했다. 저 앞에 선 인영이 아까와 같은 모습 그대로 우뚝 멈춰 있었다. 마치 그녀 주위만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흐트러짐 하나 없는 자세로.

시선 끝에는 물이 빠진 듯 희멀건 색채의 소녀가 절벽 위 아슬아슬한 자태로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망토를 뒤집어쓴 누군가가 가위를 잡은 양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상황. 비를 맞으며 총 세 명의 소녀가 절벽 끝에 모여 있었다.

그래, 세 명의 ‘소녀’. 나는 망토를 뒤집어쓴 저 인영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샤하리엔네! 그만둬.”

그러자 망토로 감싸인 몸이 움찔 떨렸다. 이름을 들은 벼랑 끝 희멀건 소녀의 눈이 커진다. 가위를 든 손이 천천히 후드를 내린다. 그러자 드러나는 것은 탁한 금발의 풍성한 머리칼. 샤하리엔네라 불린 소녀의 떨리는 푸른 눈동자는 오로지 눈앞의 또 다른 소녀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성녀 세라엘. 희멀건 색채를 가진 이의 정체였다. 그녀는 나의 첫 번째 친구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대역 성녀.”

세라엘이 중얼거렸다.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이었겠지만, 그 단어를 들은 샤하리엔네의 푸른 눈동자에 불길이 일었다.

“─그런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마!”

날카로운 금색 가윗날이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나는 절로 급해지는 마음에 가슴께에 모은 손을 꼭 쥐었다.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무언가 불길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

숨을 죽인 채 둘의 대치 상황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샤하리엔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라엘. 나는 네가 싫어. 너 때문에 나는 내 삶을 송두리째 부정당했다고.”

문장이 끝나갈수록 말끝에 흥분이 어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울음을 참듯, 한 박자 쉬고는 이어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빼앗아 간 자리를 돌려받아야겠어. 그리고 나는 다시 신전의 인정을 받아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성녀가 되는 거야.”

세라엘은 그저 그 말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지만 크게 개의치 않는지, 샤하리엔네는 금색 미용가위를 고쳐 들고 세라엘을 노려보았다.

“그러기 위해선 네가 죽어야 해!”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샤하리엔네가 앞으로 돌진했다. 어찌나 빠르던지 전광석화와도 같은 기세였다. 내가 달려갈 새도 없었다. 번뜩이는 가위 날이 가슴 위에 위치한 네 성흔을 꿰뚫었고. 너는 그대로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그리고 나는 그와 동시에 간절히 염원했다.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면. 이게 최선일 리가 없다.

혈흔이 곡선을 그리며 공중에 흩뿌려지고, 네가 추락하는 장면이 느리게 눈앞에서 재생되었다. 이상하리만치 느린 순간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세상이 우리를 중심으로 느리게 돌았다.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정말로 장면이 고정되어 있었다. 네가 절벽 밑으로 떨어지는 장면, 그걸 위에서 내려다보는 뜻 모를 표정의 샤하리엔네. 그리고 공중에 그대로 멈춰버린 빗방울들. 절벽 아래 해안가의 멈춰버린 파도.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 정지해 있었다.

뺨이 불타는 듯이 뜨거웠다. 내가 흘리는 눈물로 인한 것인 줄 알았는데. ─성흔이 있던 자리가 불에 타는 듯이 뜨거웠다. 나는 홀리듯 무언가를 가리듯 뺨에 붙였던 붕대 조각을 떼어냈다. 거울이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지금 내 뺨에는 성흔이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최초의 성녀의 고유 능력─기원(祈願)을 사용해 시간을 되돌렸다. 자각과 동시에 멈춘 세상 속 하늘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다. 열린 하늘의 구름 사이로 빛이 쏟아지고, 일곱 나팔의 성가(聖歌)가 사방에 울려 퍼진다.

모든 것이 빛에 잠겼다. 나는 곧 어둠이 찾아오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다시 시작할 것이다.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 너를 죽음으로부터 구해낼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

마흔아홉 번째 성녀가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추락한 성녀의 이름은 세라엘. 그리고 시간은 다시 돌아가, 마흔아홉 번째로 반복되는 세계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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