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녹여주세요

[GL] 손을 녹여주세요 - 제 1장, 청혼과 결혼(2)

제 1장, 청혼과 결혼(2)

덕분에 몇 해 전에 왕실에서 더는 신년 무도회에 의무적으로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통보를 했다던가. 덧붙여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는 동안도 내내 그 가면을 쓰고 다녔다고 들었다. 그 정도면 그냥 가면 그 자체가 본인의 얼굴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하기야 본인의 데뷔탕트에서도 그 가면을 쓰고 온 사람이니 더 말해서 무엇할까. 고집도 고집이지만 퍽 고약한 취미가 아닐 수가 없었다. 자신을 무서워하며 피하는 것이 마음에 드는 걸까?

그리고 목소리. 그 가면 너머로 들려오는 목을 긁어내는 듯한 끔찍한 저음은 마치 악마의 속삭임과 같다고들 했다. 실제로 마주친 적이 없었던 아멜으로서는 ‘그 정도일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목소리를 들었던 이는 하나 같이 소름 끼친다고 평했던 걸 보면 소문이 괜한 것은 아니었다.

화재로 상처를 입은 탓이라고 하던데, 혹자는 사실 대공이 저주받은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화재로 알려진 것이 사실은 마물의 침입이었고 대공은 그 마물에게 저주를 받아서 끔찍한 외형과 목소리를 가지게 되었다는 뜬소문이 마치 사실처럼 사교계를 떠돌아다녔다.

더한 소문도 있었다. 아예 대공이 악마에게 홀렸다거나 지금 있는 대공이 진짜 틸라마르 대공이 아니라 악마가 대공의 형상을 흉내 낸 것이라든가 하는 소문이었다. 늘 가면을 쓰고 다니니 실제로 바꿔치기 당했어도 모르지 않겠냐는 소릴 하고는 했는데, 아멜은 솔직히 ‘귀찮은 곳에 가기 싫을 때 남을 보낼 수도 있겠네. 좋겠다.’ 정도의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틸라마르의 핏줄만 낄 수 있는 틸라마르 대공가의 상징, ‘청염’이 박힌 반지를 끼고 다니는데 설마하니 가짜일까. 틸라마르 대공가의 일원이 아닌 사람이 끼면 몸이 푸른 불꽃에 휩싸여 불타게 된다는 악명 높은 반지를 알아보지 못할 귀족이 어디 있겠나. 그렇게 크고 화려하며 독특한 무늬를 품고 있는 사파이어가 대놓고 반지에 박혀 있는데. 악마가 몸 자체를 빼앗았다는 소문이 사실이면 모를까, 바꿔치기 돼서 그 육신조차 악마일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악마는 초대 대공이 세운 결계를 넘어오지 못했다. 그건 신성한 용의 피를 이은 릴리안 왕실의 왕녀에게서 얻은 피로 강화한 결계였으니까.

그러므로 저주받았느니, 대공이 악마라느니, 하는 건 죄다 헛소문이었다.

다만 대공의 성격이 ‘악마 같다’는 평을 받을 만한가 하면……. 그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 틸라마르 대공은 대공 작위를 이을 당시에 가신의 절반 이상을 처형했다. 그것도 보통은 쓰지 않는 ‘즉결 처분권’을 이용해서. 그날 틸라마르 대공가에 피가 강처럼 흘렀다는 소문은 아마도 사실이었으리라. 그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까. 또한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에 오를 때까지는 수도 없이 사람이 죽어 나갔다고 들었다. 틸라마르 대공이 ‘처형’을 멈춘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었다. 열여섯에 작위를 이은 대공이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족히 삼백여 명을 죽였다. 직접 벤 사람의 숫자만 해도 오십에 달한다고 들었다. 물론 이것도 ‘헛소문’일 가능성은 있다지만 대공이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다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 외에는 아카데미 시절의 일화가 몇 가지 있는데, 어느 날 자신에게 무언가 시비를 걸었던 백작 가문의 자제를 혼내주기위해 대련을 빙자하여 그가 불구가 될 때까지 두들겼다고 들었다. 또는 함께 아카데미의 실습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나갔던 시찰에서 본인만 멀쩡하고 남들은 곤죽이 되다시피 한 채로 돌아오는 일도 잦았고. 더불어 졸업 무도회에서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동기의 힘줄을 끊었던 사건도 있다던가. 그 시절 대공의 패악이라고 할만한 것을 하나하나 언급하자면 끝이 없어 책으로 엮어도 다 서술할 수 없을 만큼의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덕분에 대공은 가신을 제외하면 거의 혼자 다녔다고 들었다. 대공이 여러모로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했다. 전해 들었던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만약 아카데미를 함께 다녔다면 그 일화가 사실인지 검증할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대공은 아멜이 졸업한 해에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왔다. 그 해에 아멜은 자신의 연구를 마무리 짓는 데에만 온 정신이 쏠려 있었으므로 대공이 어떤 사고를 치고 다니는지 하나도 듣지 못했다. 주변에 그에 관심 있는 사람이 있지도 않았고. 다만 졸업 무도회쯤에는 여력이 나서, 몇 번 먼발치에서 가면을 쓴 대공이 누군가와 대련하는 모습을 얼핏 스치듯 본 적은 있었다. 아마 아멜과 대공의 접점을 굳이 꼽아본다면 그해의 짧은 스침이 전부였으리라. 지금으로서는 다소 아쉬운 일이었다. 결혼하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신경 썼을 텐데. 누가 이럴 줄 알았나? ‘저주받은 대공’하고 결혼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참고로 얘기가 나온 김에 ‘저주받은 대공’의 일화를 하나 얘기해 보자면……, 대공과 약혼하려 했던 가문은 하나 같이 무언가 일이 터져서 무산되는 일이 예전에 몇 번 발생했었다. 예를 들어서 청혼서를 싣고 가던 마차 바퀴가 수렁에 빠진다든가, 청혼서를 들고 가던 전령이 낙마 사고로 다리가 부러진다든가, 청혼서를 들고 가던 전령이 다리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서 청혼서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든가, 청혼서가 갑자기 벼락을 맞아서 불탔다든가 하는 일은 흔한 것이었고, 가문의 비리가 밝혀져서 쫄딱 망한다든가, 반역으로 몰린다든가, 갑자기 가문의 장녀가 사고를 당한다든가, 부모가 독살당한다든가, 갑자기 나타난 야생 동물이 가문의 일원을 물고 간다든가, 그 가문의 영지에 돌림병이 돈다든가 하는 일이 있었다. 솔직히 몇 개는 가짜 같지만, 안 그래도 꺼림직한 소문으로 점철된 대공인데 그런 일이 몇 번 터지고 나니 그 이후에는 대공가에 청혼서를 넣어보려는 가문이 거의 씨가 말랐다. 그래도 출세에 눈이 먼 몇몇이 비벼보려 애쓴다는 소문을 건너 건너 듣긴 했는데 그마저도 이런저런 사건이 있고 나서는 수그러들었다던가.

하여, 대공은 지금껏 약혼자 하나 없이 미혼으로 지내온 것이다. 이제는 그것도 옛말이 되겠지만. 아멜은 대공과 약혼도 할 거고 결혼도 할 생각이었으니까.

아무리 저주받은 대공이니, 괴물 대공이니, 악마 대공이니, 뭐 그렇게 떠들어 봐야 아멜은 ‘소문’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아, 물론 사람을 무 썰듯이 썰어버렸다는 소문은 좀 많이 신경 쓰이긴 했는데 설마하니 자기 부인까지 썰겠는가?

‘……썰어도 어쩔 수 없지. 단 칼에 베어주면 좋긴 하겠다. 덜 아프게.’

아디나가 들으면 기함할 생각이나 하며, 아멜은 아디나를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소문이 다 사실은 아니겠지.”

“하지만 일부는 사실이야. 뤼스가 직접 봤던 일도 있…….”

“아디나, 언니도 생각해 보고 한 결정일 테니까 그만하거라. 그리고 아직 완전히 결정된 것도 아니고…….”

애써 아멜을 설득하려는 아디나에게 어머니가 한숨 섞인 말을 해왔다. 그러자 아디나는 다시금 울컥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그래도요! 어머니는 그런 사람한테 언니를 그냥 보내버려도 괜찮아요? 이게 수치스러운 결혼이 될 거라는 건 알고 하는 말이에요? 요즘이야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라고는 해도 귀족 사회에서는 신경 많이 쓰는 거 알잖아요? 여자를 남자 가문으로 보낸다고요!”

“몰라서 그러겠니? 알아! 알지만…….”

“방법이 없죠. 아디나, 그만해. 나는 괜찮아.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내가 나이는 더 많아서 대공 전하가 손해일걸?”

“언니는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

아디나. 상냥하고 듬직한 내 동생. 지독한 환멸 사이로 희끄무레한 애정이 피어오른다. 북부에 도착한 이후로는 눈에 뒤덮인 시체처럼 얼어붙을 애정이었다. 아멜은 자신을 잘 알았다. 다정하고 정이 많고 마음 약한 면이 있는 반면에, 놀라울 정도로 냉정한 구석도 있었다. 애틋한 설득과 만류가 아멜에게는 그저 지루한 과정 중 하나처럼 느껴졌다. 동생이 진심이라는 걸 알아도,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도, 결국 대공이 훨씬 더 나은 선택지였다. 이 가족은 평생 아멜도, 아디나도, 어쩌면 다른 동생들도 착취할 테니까. 어떻게 보면 서로 착취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누군가는 그게 ‘서로 돕고 사는 가족의 정’이라든가 ‘공동체’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테지만……. 아멜은 이제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멜은 가족을 충분히 도왔다. 앞으로도 돕게 될 터였다. 그걸로 충분하게 여겨주면 안 되는 것일까? 괜히 불쌍하다느니 안타깝다느니 그런 말은 말고…….

“잘 됐잖아, 아디나. 이런 기회는 다시 안 와. 그 사람도 나도, 서로가 필요해서 하는 결혼이야. ……잊지 마, 아디나. 우린 귀족이잖아. 이런 결혼은 흔해. 사실 귀족이 아니라도 이런 결혼은 흔해. 이래도 괜찮은 거야. 이럴 수도 있는 거라고.”

“언니…….”

누가 뭐래도 아멜은 이 결혼을 통해서 행복해질 것이다. 아멜은 알았다. 어떤 계급, 어떤 계층에서든, 결혼은 늘 가난에서 탈출할 수단으로 쓰여왔다. 마음의 가난이든, 물질적인 가난이든. 그러니 아멜은 이 수단에 대해서 어떠한 수치심도 느끼지 않았다. 대공이 약속한 것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정도 대가라면 이건 남는 장사라고.

혹시나 이게 함정이 되더라도, 어쩌겠는가. 사기꾼에게 속는 것은 사기꾼이 사기를 쳤기 때문이고, 대공에게 속는다면 그건 대공이 속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멜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난 정말로 겁나지 않아, 아디나. 괴물 대공이니 뭐니 해도, 결국은 사람이잖니.”

“하지만…….”

“자, 마저 저녁을 먹어야지, 아디나? 난 다 먹었으니까 이만 가볼게.”

“……그래도 다시 생각해 봐. 난 언니가 희생하는 거 싫어.”

“알았어.”

아멜은 순순히 대꾸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이미 결심을 굳혔다. 이건 흔들릴 일 없는 결심이었다. 아멜은 틸라마르 대공과 결혼해 그의 부인이 될 것이다. 그러기로 선택했다.

삐걱대는 계단을 올라 제 방으로 돌아간 아멜은 그대로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씻고 눕는 게 맞는 것일 테지만 가족과 의미 없는 소모전을 벌인 탓에 그럴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멜은 눈을 감았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는 멋대로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또한, 나흘 뒤에 다시 방문하기로 했던 그 사람을 떠올렸다. 그 사람이 가지고 왔던 틸라마르 대공의 청혼서도.


다음 화부터는 유료입니다.

5월 26일 일요일에 업로드될 예정입니다.

0520 수정

투비 쪽 이벤트 참여를 위해서 5화까지 무료 공개로 변경합니다.

업로드 일자는 5월 26일 일요일로 동일하며, 4화와 5화가 함께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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