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녹여주세요

[GL] 손을 녹여주세요 - 제 1장, 청혼과 결혼(3)

제 1장, 청혼과 결혼(3)


3월 19일, 오전.

아멜은 날이 서 있었다.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는 것을 저 스스로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예민한 상태였다. 요새 집에 수시로 찾아오는 ‘빚쟁이’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정중한 태도로 대금을 언제 치를 수 있겠느냐고 물었던 고리대금업자들이 요즈음에는 아예 태도를 바꿨다. 덩치 좋은 시정잡배를 대동하고 찾아와서는 집안을 진흙 발로 돌아다니며 몇 안 되는 살림살이에 멋대로 값을 매기거나 심지어 몇 개는 떼어다가 팔겠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당장 돈을 갚을 것이 아니면 이자라도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보통의 귀족 같으면 그 방자한 태도에 호통부터 쳤겠지만, 심약한 루체스티어 백작 부부는 꼼짝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나 했다.

그들을 좋은 말로 달래고 물건이든 현금이든 협상하여 당장의 이자를 내고 치워내는 것은 장녀의 몫이었다. 차라리 사기를 당한 것이라면 국가에 구원 요청이라도 하겠는데, 터무니없는 고금리라도 법적으로 정해진 한도 내의 이자였고 계약서 자체도 법적 문제가 없었기에 도와달라고 손을 벌렸다가는 망신이나 당할 것이 뻔했다. 게다가 ‘빚쟁이’는 하나가 아니었다. 백작 부부가 사업을 한답시고 여기저기에 본인의 신용을 팔아다가 빌려 온 돈이 순차적으로 루체스티어 백작가를 압박해 왔다. 친척, 친구, 그냥 무도회에서 한 번 마주친 사람, 학교 동문, 심지어는 사용인의 친척까지…… 참 다양한 곳에다가 손을 벌렸다. 왜 그렇게 여기저기서 돈을 당겼냐고 물으니, 백작부부는 사업이 잘될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 대답을 듣고 아멜은 생전 없던 화병이 생겼다. 부모님을 볼 때마다 속에서 울화가 치미니 그게 화병이 아니고 무엇이랴.

당장에야 고리대금업자만 상대하면 된다지만 여기저기서 조금씩 떼어 온 돈도 갚아야 하는 것은 맞았다. 일부 귀족은 신분을 내세워 빌린 돈을 입 싹 씻고 모른 척하기도 한다던데, 저 심약한 루체스티어 백작 부부는 그러지도 못하고 돈을 달라고 하면 달라는 대로 어영부영 내어주는 사람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 좋은 제 부모의 성품을 좋아했던 아멜은 서서히 그 유약한 성정에 학을 떼게 되었다.

그러게, 담도 없고 뻔뻔하게 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왜 사업을 한단 말인가. 아니, 담이 없는 것도 아니지. 담이 진짜 없는 사람이라면 무턱대고 고리대금업자한테 백작저를 담보로 걸어 돈을 빌렸을 리가 없지. 실패했을 때의 결과가 무서웠을 테니까. 그냥 멍청한 거다. 끔찍하게 멍청한 거다. 아니, 아니야. 애초에 저런 부모를 끌어들여서 사업을 하겠답시고 나댔던 그 사기꾼, 후첼 남작이 나쁜 거겠지. 같잖은 바람이나 불어 넣어서는 여기저기서 돈 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사채까지 쓰게 만들지 않았나. 그가 꼬시지만 않았어도 루체스티어 백작 부부는 가난하게 아끼며 살았을 테니, 결국은…….

‘남 탓해서 뭐에다 쓰겠어. 책임은 어차피 져야 하는데.’

아멜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내일 오전에 전당포에 넘길 물건을 선별했다. 오늘 오후의 네 번째 손님, 그러니까 오후에 찾아왔던 네 번째 빚쟁이가 내일 오전까지 돈을 돌려주지 않으면 사기죄로 고소하겠다고 선언했다. 법조계에 인맥이 있는 사람이고 액수가 꽤 커서 어떻게든 마련 해주겠다며 달래서 보냈지만, 솔직히 막막했다. 남은 가구는 죄다 선조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쓸데없이 낡기만 하고 쓸모없는 골동품뿐이었으니 아무리 옛것을 좋아하는 독특한 사람을 찾아다가 역사적인 무언가로 포장해 넘긴다고 해도 제값을 받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갖고 있는 것 중에서 급하게 당장 맡겨놓고 돈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을 골라내는 중이었다.

일단 사업이 ‘잠깐’ 잘 됐던 때에 어머니가 새로 샀던 드레스, 막내의 고급 장난감, 또 마법사 협회의 기념주화, 마력 감응도 측정기…….

“하, 이거 사려고 몇 달을 모았는데.”

아멜은 쓸쓸한 표정으로 마력 감응도 측정기를 끌어안고 쓰다듬었다. 그건 몇 달 동안 식비며 교통비를 아끼고 연구실에 비치된 공용 간식이나 먹으며 모은 돈으로 마련한 개인 장비였다. 이게 없으면 앞으로 몇 달간 개인 연구를 멈춰야겠지만 당장 급한데 돈이 될 만한 것이 얼마 없었다.

애초에 루체스티어 백작가는 유서 깊고 명망 있는 전통의…… 뭐 그런 수식어를 달고 있는 것치고는 상당히 많이 궁핍했다. 당연히 극빈층이나 일반적인 자유민에 비하면야 훨씬 나은 생활을 하고 있을 테니 이걸 ‘진정한 궁핍’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는 그랬다. 일반적으로 이 사회에서 백작가에 기대하는 바에는 못 미친다는 뜻이었다. 아니, ‘백작가’는 커녕 기사나 상인 계급만큼도 아니었다.

커다랗기만 하고 낡은 저택은 온통 삐걱거렸고 물이 샜으며 청소해 줄 이를 고용하지 못해 곳곳에 먼지가 내려앉았다. 일반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이나 좀 청소가 되어 있을까. 그것도 아멜과 형제자매가 돌아가며 청소를 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백작 영애나 영식은 전속 시녀나 하녀를 거느리겠지만, 루체스티어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그런 건 없는 게 당연한 줄로 알고 자랐다. 웬만한 건 직접 할 것. 그게 루체스티어의 가풍 아닌 가풍이었다.

백작가에 가신이라고 할 만한 사람은 있지도 않았으며, 집사와 요리장, 빨래만 담당해 주는 하녀장이 끝이었다. 그 셋이라도 고용할 수 있었던 건 백작저와 함께 대를 이어 내려온 자그마한 영지로부터 들어오는 세금, 그리고 노는 땅을 소작농에게 빌려주고 받는 대금 덕분이었는데, 당연하지만 얼마 안 되는지라 왕실 쪽에 세금을 내고 저택의 유지비와 식비까지 제하고 나면 증발했다. 그마저도 가끔은 모자랄 때가 있어서 장녀인 아멜과 둘째 아디나가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돈 들어올 구석이 생길 때까지 종종 끼니를 굶는 일도 있었다.

만약에 이 정도로 곤궁하지 않았다면 물건을 싣고 돌아오던 상선이 가라앉았어도 어떻게든 쪼들려가며 버틸 수 있었으리라. 애초에 사업을 할 생각도 안 했었겠지만……. 먹고살 만했을 테니까. 작금의 문제는 먹고살 만하지 않아서 어떻게든 ‘궁핍한 백작가’를 벗어나 보려고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심약한 루체스티어 백작 부부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꼬임에 홀라당 넘어가지는 않았으리라. 결국 욕심이 문제였네, 하고 가볍게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현실이 지긋지긋하고 서러웠다.

아멜은 조금 아득한 기분에 잠시 눈을 감고 마력 감응도 측정기에 뺨을 기댔다.

“……사실은 나도 알지. 그땐 잘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나도.”

아무도 듣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중얼거려 보는 것은 결국 자신을 설득하기 위함이었다. 어떻게든 부모를 덜 미워하고 싶어서. 그러면 마음속의 이 화가 가라앉을 것만 같아서. 어쨌든 간에 배만 가라앉지 않았어도 물건이 왔을 테고, 잘 안 팔려서 재고가 쌓였더라도 어떻게든 팔아치워 대금을 마련했을 테고, 그걸로 어떻게 하든지 간에 살 구멍을 찾아서 일을 마무리 지었으리라. 그러나 배는 가라앉았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그 썩어빠진 배는 바다를 한 번 오가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두 번째를 버티지 못하고 침몰했다. 처음부터 가라앉았으면 오히려 좋았으리라. 잠깐의 성공에 취해서 다시금 만용을 부리는 일이 없었을 테니까. 빚도 지금보다 적었을 테고. 그러나 애매한 희망은 판단력을 흐려 놓았다.

아, 돈이 문제였다. 돈이 없어서 튼튼한 상선을 수배하지 못했고, 돈이 없어서 충분히 노련한 선원을 구하지도 못했고, 돈이 없어서……. 그래, 돈이 없어서 일을 벌였지, 돈이 없어서. 돈이 없다. 정말 한 푼도 남지 않았다. 가진 걸 다 팔아도 메꾸지 못할 빚이 생겼다.

지금은 아직 잠잠하지만, 조만간 형편없는 혼담이 들어올 것이다. 이를테면 돈 많은 늙은 자산가와 재혼하는 조건으로 빚을 탕감해 준다거나 하는 것. 아니면 신분도 가진 것도 없지만 어쨌거나 결혼하는 것으로 이 집안의 빚에서 탈출하게 해주겠다는 뭐 그런 거라든가. 아니면 아예 백작가 자체를 넘겨달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할 수도 있겠다. “……음, 이건 최악은 아닌데?” 아멜은 작게 중얼거렸다. 백작 신분하고 빚을 맞바꾼다? 제법 괜찮은 거래 아닌가. 차라리 이렇게 하자고 부모님을 설득해 볼까. 아마 들은 척도 안 하겠지. 그런 생각이 이어졌다.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은 심약한 주제에 그런 부분에서만 고집을 부렸다. 그게 문제였다. 그러니까 백작저를 담보로 돈을 빌리는 만행을 저질러 놓고서도 막상 백작저가 빚쟁이에게 넘어가려는 상황만큼은 막아보려고 하고 있지 않는가.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허둥지둥 주변에서 돈을 더 빌려오고 있느라 빚이 더 늘어나고만 있었다. 너덜너덜한 재정으로는 당장의 이자도 막을 수 없었기에 티끌만 한 돈이라도 빌려다가 파산을 막아야 했다.

백작 부부는 오늘도 돈을 꾸러 허둥지둥 아침부터 나갔다. 지금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으리라.

“후, 빨리해야지. 그래도 잘만 값을 받으면 당장은 해결되나……. 급여부터 줘야겠지.”

아멜은 소중한 마력 감응도 측정기를 놓아주고 다음 물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금번의 ‘빚’ 탓에 고작 셋뿐인 백작가 사용인의 급여가 지금 석 달째 밀린 상태였다. 심지어 집사는 이틀 전에 더는 못 하겠다며 관뒀다. 밀린 급여는 알아서 지급하라는 으름장과 함께. 나머지 둘은 아멜이 가진 돈을 쪼개고 쪼개어 조금씩이라도 쥐여줘 가며 조금만 참아달라고 사정하고 있는 탓에 당장 떠나지는 않았지만, 이것도 앞으로 길어봐야 반년, 짧으면 당장 내일에라도 연이 끊길 수 있는 처지였다. 당장에 그들이 떠난다면 빨래와 주방일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관리까지 모두 루체스티어 일가가 맡게 되리라. 정확히는 아멜리아나와 아디나가 반씩 나눠서 맡게 될 텐데 안 그래도 둘은 지금도 과로하는 중이었다.

첫째 아멜리아나는 마법사 협회에서 연구직으로 일하며 이 집안을 먹여 살리고 있는 실질적인 가장인데 요새는 빚쟁이까지 상대하면서 비번인 날마다 세간 살림을 다시 살펴 어떻게든 돈 나올 구석을 쥐어짜는 중이었고, 둘째인 아디나는 수도 방위 기사단에서 근무하며 이 집안의 저축을 책임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저축을 깨서 어떻게든 빚을 돌려막고 있는 제2의 가장이었다. 아멜은 그렇다 쳐도 아디나는 어떻게든 더 돈을 벌어야 하니 야간 근무며 주말 근무까지 신청해서 수당을 챙기고 있던데 그러다가 몸이 축나서 쓰러질까 봐 걱정이 되는 상황이었다. 셋째랑 넷째는 학생이라 기숙사에 가 있으니 애초에 집안일을 시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역시 어떻게든 사정해 가며 버티는 수밖에 없으려나. 하지만 사용인도 돈 받아서 생활을 꾸려나가는 처지인데 급여가 없는 상태에서 얼마나 버텨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해서 백작 일가는 아직 야반도주하지 않은 것이 용한 상황이었으니, 그들도 매우 불안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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