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녹여주세요

[GL] 손을 녹여주세요 - 제 1장, 청혼과 결혼(4)

제 1장, 청혼과 결혼(4)

‘이건 얼마쯤 하려나?’

아멜은 본래는 셋째에게 보내주어야 했을 화구를 집어 들었다. 고급품에 새것이니 이것 또한 전당포에 맡겼을 때 꽤 값을 쳐 줄 터였다.

이 화구는 셋째가 받은 선물이었다. 첫 번째로 띄웠던 상선이 돌아온 직후, 그러니까 행운에 가까운 성공을 거둔 덕에 재정이 얼마간 여유로웠을 때 아버지가 기분 내듯 사 준 물건이었다.

이런 거 살 시간에 비 올 때마다 3층 천장에서 물 새는 거나 고치지. 아니면 낡은 저택 따위 팔아치우고 더 작은 집으로 이사라도 가든가. 하다못해 셋째 학비라도 선납했으면 내가 말을 안 해, 진짜. 아니면 막내 교복이라도 바꿔주든가. 그런 생각이 짧게 흘러갔다. 정말 급한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그저 평생 만져보지 못한 돈을 드디어 손에 넣은 기쁨으로 단 한 번 사치를 부려 장만한 것일 뿐이었다. 그에 대고 화를 내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기껏해야 조금 비싼 드레스, 새로 나온 장난감, 교구, 고급 과자, 찻잎…… 평소라면 생일날에 사달라고 해도 눈치 보였을 물건을 잠시 손에 쥐었을 따름이었다.

이건 어쩌면 불합리한 일이 아닐까. 평생 돈 걱정 없이 살아가는 귀족이 수두룩한 것이 현실인데, 왜 루체스티어는 가난한 채로 몇 대를 이름뿐인 귀족으로 살아야 했을까? 물론 돈 좀 벌었다고 해서 없는 형편인데도 귀족이랍시고 사치를 부렸다는 점에서 딱히 용서가 안 되기는 하는데…….

가족들을 몰아붙이고 쏘아붙이고 매도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아멜은 애초에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묵묵히 인내하고 제 몫을 남에게 밀어주며 참는 사람이었다. 그런 첫째니까 스물하고도 일곱 해가 다 되도록 미혼으로 루체스티어 백작가에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었다면 진즉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연을 끊고 뛰쳐나갔을 테니.

“……아. 진짜로 도망갈까.”

아멜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묵묵히 물건을 챙겼다. 그러지 못할 것을 잘 알았다. 같잖은 책임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저 아직은 버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짜 사람을 팔아치워야 하는 시점이 오면 그땐 도망가야지. 그전까지만 27년을 함께 산 정으로 참아주어야겠다. 이미 환멸뿐인데도 아멜은 아직 정이 남은 것처럼 굴었다. 추억의 찌꺼기를 어거지로 끌어모아다가 얼기설기 이어 놓고 그걸 애정이라고 불렀다.

그때, 누군가 현관 벨을 울렸다. 또 빚쟁이인가 보네. 아멜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오늘 오후만 해도 벌써 다섯 번째 방문이었다. 대체 어디에다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빚을 진 건지. 아멜은 급하게 뛰어 내려가서는 표정을 가다듬고 문 앞에 섰다. 집사가 있었다면 집사가 열어줬을 테지만 집사는 급여가 밀리는 걸 참지 못하고 이틀 전에 관둬버렸으니까. 망할 사업 실패 때문에 백작가 장녀가 직접 저택 문을 열어줘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는 사실이 기가 찼다. 아멜은 자기 손으로 문을 여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이 신분제 사회에서 이런 행동을 직접 하는 일을 보통의 귀족 나리라면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아, 빌어먹을 평판. 빌어먹을 신분제. 사람을 벼랑으로 몰아넣고, 또 동시에 살리는, 귀족이라는 신분.

아멜은 빚쟁이가 서 있을 것을 예상하며 벌컥 문을 열었다. 곱게 문을 열기엔 짜증이 나 있었다.

“네에, 지금 나가요.”

말투도 당연히 곱지 않고 날이 서 있었다. 갈무리할 새도 없이 새어버린 짜증이었다.

그런데 문밖에는 말쑥한 숙녀가 어딘가의 기사단이 입을 법한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는 아멜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순간 정신이 살짝 아득해졌다. 망할 아버지가 설마 둘째의 친구한테까지 손을 벌렸나? 아, 제기랄. 아버지라면 당연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서 기가 찼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새파랗게 젊은 기사의 돈까지 땅겨서 사업을 벌여?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니, 아니지. 꼭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닐 수도 있지. 가령……. 망할, 긍정적인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아멜은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오셨죠?”

“안녕하십니까, 저는 라샤 에클라덴입니다. 틸라마르 대공 전하의 수석 보좌관을 맡고 있으며 직속 기사단인 ‘얼음 늑대 기사단’ 소속입니다. 틸라마르 대공 전하의 명으로 방문 허가를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습니다만……, 혹시 서신을 받아 보셨을지요?”

“……서신이요?”

“흠,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그러면 먼저, 답장을 받지 못했음에도 직접 방문하고 만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예의가 아닌 줄은 알지만 워낙에 중요한 일인 데다가 2주째 답이 없으셔서 혹여 서신이 누락됐을까 하여 직접 찾아뵈었습니다.”

아멜은 말을 이어가는 동안 그의 생김과 망토의 문장을 살펴보았다. 라샤 경은 북부인 특유의 고동색 머리카락에 어두운 녹색 눈동자를 가진 미인이었다. 살짝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웃으니 서늘한 기색이 녹아서 되려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얼굴이라고나 할까. 키도 크고 몸도 탄탄해서 뺨의 길쭉한 흉터만 없었다면 더 잘생겨 보였으리라.

그가 어깨에 걸친 망토에는 틸라마르 대공가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방패를 얽은 가시넝쿨과 그 틈으로 보이는 늑대의 옆모습. 가시넝쿨은 틸라마르가 아직 공작 가문이던 때에 다스렸던 하르시움 지역의 상징이고, 늑대는 몇 대전 틸라마르 공작이 헤르카를 개척한 이후 대공의 지위를 얻으며 문장을 변경할 때 추가한 것이었다. 릴리아드 왕국의 귀족이라면 누가 됐든 모를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거야 릴리아드에서 유일하게 세습되는 대공 작위를 가진 가문의 문장이니까.

사기꾼일까? 하지만 무엇 하러 틸라마르 대공의 문장을 흉내 낸단 말인가. 가시넝쿨과 늑대는 오로지 틸라마르 대공가에서만 사용하는 요소였다. 사칭 했다가는 단박에 들킨다는 뜻이었다. 만약 사기꾼이 흉내 낸다면 조금 더 알아보기 힘들고 모호한 것을 흉내 냈을 터였다.

게다가 현 틸라마르 대공의 성정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차갑고 냉철하고 자신을 조금만 거슬러도 바로 목을 치는 성격파탄자라고 소문이 나 있지 않는가.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남의 목을 그리 쉽게 치는지. 어디 법전에 글로 쓰여 있기나 할 뿐 잊힌 권리나 마찬가지인 그 즉결 처분 권한을 왕창 써댔으니, 그런 사람이 공포의 대상이 되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수장인 가문을 구태여 자극하려 들 멍청한 사기꾼은 없으리라. 그러한 점이 오히려 ‘저 문장을 쓰는 사람이 날 속일 리가 없지!’ 하는 식으로 신뢰도를 높여서 잠시 사기 행각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걸리면 바로 죽을 텐데, 뭐 하러? 이래저래 따져봐도 의미가 없다. 명을 다해가는 귀족 가문일수록 시체에 파리가 들끓듯 뭐라도 훔쳐 먹으려는 사기꾼이 자주 찾아온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공가 사칭은 선을 좀 넘었지…….

아니, 생각은 그만하자. 그가 사기꾼일 가능성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자. 어차피 작정하고 속이려 드는 사람에게 안 속을 방법 같은 건 없다시피 했다. 아멜은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내고 살짝 몸을 돌려 그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섰다.

“일단 들어오세요. 계속 여기 세워두면 죄송하기도 하고, 귀한 분의 전령이시니 만약 서신을 보셨다면 백작님께서 방문 허가를 내어주셨을 거예요. 다만, 지금 백작님께서 출타 중이신 점은 양해 부탁드릴게요. 서신 얘기는 조금 이따 다시 하죠.”

“이런, 제가 때를 못 맞췄군요. 음, 일단 그럼…… 염치 불고하고, 실례하겠습니다.”

그가 정말로 틸라마르 대공령의 전령이라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특히나 틸라마르 대공의 수석 보좌관이라면 더욱 그랬고. 내용을 들어보고 나서 마저 의심해도 늦지 않았다. 애초에 아멜은 남을 깊게 의심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빚쟁이한테 시달리는 이 망할 상황이 아멜을 의심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서 그렇지.

“이쪽으로 따라오세요. 응접실로 안내해 드릴게요.”

아멜은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갯짓해 보이고 응접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라샤가 아멜을 몇 걸음쯤 따라갔다. 그러다가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는데 뭔가 좀 의아한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복도를 열 걸음쯤 가로질렀을 때, 라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존함을 여쭈어도 될까요. 직접 문을 열어주시기에 조금 긴가민가했습니다만, 역시 백작 영애가 맞으시지요?”

아멜은 그제야 제 소개를 빠트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아.” 짧게 소리를 뱉어냈다.

“……참, 제 소개도 잊고 있었네요. 아멜리아나 린지아 루체스티어입니다.”

“아. ……당신이었군요. 아무튼 경황이 없어서 예를 갖춰 인사하지 못했음을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멜이 라샤를 돌아보며 제 소개를 마치자, 라샤가 약식인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걸어가다 말고 예를 갖춰 인사하는 것도 이상해 보일 터라, 그의 대응은 적절했다. 다만 ‘당신이었군요.’라는 말은 아멜에게 적잖은 의문을 남겼는데, 아멜은 이에 대해서 당장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어쩌면 여기 찾아온 용건과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직감 때문이었다. 그는 ‘아멜리아나 린지아 루체스티어’ 때문에 여기 온 것이다.

마법사 협회 소속의 연구직 마법사를 찾아왔다거나 하는 이유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아멜은 연구에 대공령에서만 자생하는 식물이나 광물 등을 사용하는 일이 잦았다. 주기적으로 그쪽에서 채취한 것을 들여왔으니, 관심을 가지게 됐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와 관련해서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이쪽이 제일 그럴싸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렇게 다 기울어져 가는 백작가를 찾아올 일이 어디 있겠는가. 역시 사기꾼은 아니겠네. 아멜은 내심 약간 안심하며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별말씀을요. 백작 영애가 직접 문을 열어주어서 당황하시진 않으셨나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제겐 영광스러운 일이지요, 하하. 제가 언제 또 백작 영애께서 직접 문을 열어주시는 환대를 또 받아보겠습니까? 고향으로 돌아가면 자랑해야겠습니다. 또, 주군께도 무척 소탈하신 분이라고 전해야겠네요.”

아멜이 다시금 걸음을 옮기며 농을 치자, 라샤가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뺨의 흉터 때문에 무뚝뚝하거나 험악한 인상이 더 강했는데, 이제 보니 말솜씨가 꽤 좋았다. 유들유들하니 강약 조절이 잘 된다고나 할까. 대공이 사절을 맡겨서 보낼 법했다.

“그러지는 않으셔도 돼요. 혹시 소문을 들었다면 아시겠지만, 귀족 영애처럼 굴 여유가 없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부끄러운 일이지만요.”

아멜은 돈도 못 줘서 집사도 도망갈 정도로 폭삭 망한 백작가라는 말을 애써 돌려 얘기했다. 라샤는 아멜의 자책에도 당황하는 기색 없이 여전히 반반한 낯으로 미소를 내걸고 있었다.

“안타까운 소식은 들었습니다. 오늘 찾아뵌 것도 그것과 연관이 있기는 합니다만…… 여기 서서 얘기하기엔 적절치 않을 테니 조금 이따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두 사람은 그쯤에서 말을 정리했다. 가벼운 담소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응접실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이쪽에서는 보시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아래 링크에서 연재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무료 공개인 5화까지는 남겨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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