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조 속 연인들에 대한 이상한 일지

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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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임 <월드 오브 호러> AU. '간 떨어지는 교내 가위 괴담' 미스터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귀가 잘리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의사가 말했다. 그는 찢어진 입을 봉합하고 실밥을 잘라내면서 운이 좋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적절한 위로는 아니었다. 오른쪽 뺨을 가로지른 상처가 아물면 흉측한 흉터가 남을 게 명백했으므로. 그러나 기상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고단했다. 타인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것도 기력이 있어야 가능했다. 욱신거리는 뺨 위를 덮은 드레싱 밴드를 조심스럽게 매만지던 상호는 의사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처방전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료실 문을 열자마자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서 있던 병찬이 튕겨 나오듯 다가왔다.

괜찮아?

네. 항생제랑 진통제 처방받았어요.

꿰맬 때 안 아팠어?

찢어질 때보다는 안 아프던데요.

병찬은 그 말에 속이 상한 듯했다. 손에 들린 처방전을 빼앗듯 낚아채 가더니 성큼성큼 앞서간다. 형은 저번 주에 목이 잘려서 죽을 뻔했잖아요. 성 낼 자격 없어요. 상호는 그리 대꾸하려다가 말았다. 경황이 없을 때 맞닥뜨리는 박병찬의 투박한 다정은 은근히 성가신 구석이 있다. 하지만 기껍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라. 한숨을 쉬며 병찬의 뒤를 따라간 상호가 그의 먼지 묻은 점퍼 소매를 잡고 가볍게 당겼다.

같이 가요.

…….

해앰.

박병찬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다만 걸음을 늦췄다. 기상호에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욕조 속 연인들에 대한 이상한 일지

박병찬 x 기상호

사람들이 실종되고 폭동이 일어났다. 기이한 오로라가 관측되고 일식이 잦아졌다. 불온한 소문과 괴담. 피를 마시고 살을 갉아먹는 저주와 외우주에서 온 위대한 자들. 녹슬고 부패해서 언제 무너져내려도 이상하지 않을 세계 속에서 병찬은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아침에 일어날 것, 끼니는 될 수 있으면 거르지 말 것,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할 것. 그는 특히 목욕에 집착했다. 깔끔을 떤다기 보다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여독을 푸는 시간을 좋아했다. 쉴 수 있을 때 푹 쉬어야 한다는 걸 일찍이 체득한 상호는 그 나름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다. 병찬이 벗은 옷을 바닥에 방치해놓은 채로 몇 시간이나 욕조를 차지해도 핀잔을 주지 않는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제물을 바치고 신성 모독적인 기도를 올리는 것만이 아닌, 피와 먼지와 오물을 씻어내는 행위 또한 일종의 의식이 될 수 있다고. 그리하여 박병찬의 몸에 닿는 것이 스틱스강도 축성 의식을 마친 성수도 아닌 수돗물일 뿐이더라도 어떤 효험을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때때로 기상호는 답지 않게 미신적 사고에 빠지곤 했다.

상호는 허물처럼 구겨진 채 욕실 앞에 널브러져 있는 옷더미를 집어 들었다. 낡은 마룻바닥 위를 진탕 구르고 온 탓에 병찬의 옷은 꾀죄죄했다. 가위를 든 여자가 방과 후의 학교에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걸 조사하던 동료가 행방불명된 탓에 병찬과 상호가 나섰다. 괴이한 사건의 원흉은 해치웠으나, 동료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상호는 가윗날에 상처를 입었다. 늘 이런 식이다.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는 부당함의 연속. 얼굴을 구긴 채 입에 든 진통제를 씹어 삼킨 상호는 손에 들린 빨랫감을 죄다 세탁기에 처넣었다. 식탁 위를 굴러다니는 컵라면 용기, 스크랩하고 남은 신문 조각도 종량제 봉투 속에 쓸어 담았다. 며칠 외박을 했다고 집안 꼴이 엉망이었다. 제가 치울 테니 누워서 쉬라고 병찬이 욕실에 들어가기 전 신신당부했으나, 눈물을 핑 돌게 만드는 통증에 집중된 정신을 분산시킬 필요가 있었다.

병찬이 욕실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건 기상호가 연식이 오래된 TV를 탕탕 두드려가며 채널을 돌리고 있을 즈음이었다.

상호야.

네?

지직거리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상호가 건성으로 답했다.

너도 들어와.

다 씻었어요?

아니, 같이 목욕하자고.

상호는 그제야 병찬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는 물을 뚝뚝 흘리며 상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젖은 앞머리를 뒤로 넘겨 이마를 드러낸 채다.

욕조에 같이 들어가자고요?

어.

그게 돼요? 좁을 텐데.

왜 안 돼? 일단 와 봐.

안 될 텐데. 머릿속으로 욕조의 크기를 가늠하는 사이에 병찬이 다시 안으로 사라졌다. 빨리 와. 머뭇거리는 걸 눈치챘는지 금방 재촉이 뒤따라온다. 샤워를 같이 한 적은 있어도 목욕은 처음이었다. 그와 살도 맞대 본 사이면서 상호는 괜히 쭈뼛거렸다. 비밀스러운 장소에 갑작스럽게 초대받은 기분이었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그는 욕실 앞에서 티셔츠를 벗고 바지 버클을 푸는 내내 엉거주춤했다.

그들이 사는 임대 아파트는 월세가 저렴한 대신 평수가 작고 시설이 낡았다. 장판은 발바닥에 쩍쩍 달라붙고, 싱크대 수납장은 덜렁거렸으며,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나무 문짝은 여닫을 때마다 음산한 소리가 났다. 끼이이이익. 귓속을 찌르는 뾰족한 소음에 느른하게 물에 잠겨있던 병찬이 고개를 들었다. 상호가 더운 수증기를 맞으며 서 있었다. 수건으로 어설프게 몸을 가리고 있는 모습이 우습고 귀여워서 병찬은 소리 내 짧게 웃었다.

뭐 해? 들어와.

아니, 좁다니깐…. 어떻게 들어가요?

툴툴거리자 병찬이 대꾸 없이 손을 내밀었다. 쳐다만 보고 있으니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다. 이러면 안 잡을 수가 없다. 입을 삐죽인 상호는 그의 손을 맞잡고 오른발부터 욕조에 담갔다. 하반신에 두르고 있던 수건이 타일 바닥에 툭 떨어졌다.

나한테 등을 기대고 앉아. 어어, 그렇게.

으와, 물 넘친다.

야, 거 봐. 된다니까?

이건 들어온 게 아니라 끼어있는 거죠.

그거나 그거나.

병찬이 낄낄거리며 두 팔로 상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꾸물거리며 편한 자세를 찾던 상호도 이내 긴장을 풀고 그에게 등을 기댔다. 밴드에 물 안 닿게 조심해. 복슬복슬한 갈색 머리 위에 턱을 올린 병찬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대화가 멎자 실내는 삽시간에 조용해진다. 똑, 똑. 덜 잠긴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규칙적인 물방울 소리. 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뉴스. 숲에서 실종된 사람의 잘린 손가락이 발견되고 치과 의사가 개의 이빨을 환자에게 이식해서 체포됐다는 끔찍한 이야기. 그러나 서로의 귓가에 닿는 숨소리는 평온하기만 하다. 기상호는 현실과 유리된 어떤 공간 속을 부유하는 듯한 감각을 느낀다. 희뿌연 허공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눈을 감는다. 지난한 여정이 만들어낸 병찬의 생채기 투성이 피부가 느껴진다. 거친 손끝도, 강인한 팔과 목덜미에 달라붙는 척척한 머리카락도, 단단한 근육과 곧고 근사한 뼈대와 힘차게 맥동하는 심장까지 전부 영혼 깊숙한 곳에 각인된다.

기상호는 무의식중에 참고 있던 숨을 내뱉었다.

이 세상에 오직 그와 나만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가슴께를 간지럽히는 손길에 상호가 눈을 떴다. 병찬이 언제 생겼는지 모를 흉터 위를 손 끝으로 덧그리고 있었다. 이건 언제 다친 거야. 저도 몰라요. 병찬의 손이 목덜미로 향한다. 그곳에는 짐승에게 물렸다가 아문 자국이 있다. 팔뚝에는 화상이, 배꼽 위에는 흉기에 베인 흔적이 남았다. 하나하나 전부 더듬어보며 병찬이 중얼거렸다. 운이 좋았어. 그치?

이번에는 정말 너를 잃는 줄 알았는데.

병찬은 상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네가 살아서 다행이야.

신들에게 잊혀진 것이, 강렬한 불꽃이, 별에서 온 공포가 찾아온다. 그들 앞에서는 이 아름다운 푸른 별도 한낱 미물이 되리라. 죽거나 미치거나 경배하는 선택지만이 남은 황폐한 세상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잡고 버티는 걸 택했다. 맞잡은 손은 녹슨 커터날보다 연약하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따스하다.

우리는 안전하다. 일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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