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Look At Me!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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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ok At Me!

 

첫 인상은 꽤 차가워 보이는 사람. 반쯤 감은 눈꺼풀 밑의 눈은 냉랭한 기운까지 흘려보내고 있었고 눈가의 눈물점은 매력이라기보단 잘못 찍힌 얼룩 같은 느낌이었다. 병찬과 비슷할 정도의 큰 키, 일반 스카우트라기엔 다부진 체격. 처음 마주했을 때는 스카우트가 아니라 웬 운동선수가 여기 있나, 라고 생각했다.

부드럽게 웃으며 제게 손을 내밀 때 병찬은 무슨 생각을 했는가? 제 심중을 꿰뚫어 보겠다는 듯이 조금도 눈을 피하지 않는 옅은 색의 눈동자를 마주하며 병찬은 처음으로 눈을 피했다. 농구선수인 저보다도 손이 큰 것 같은 그는 병찬의 손을 아프지 않을 만큼 꾹, 이어 다정하게 손가락을 까닥여 두드려주었다. 격려와 호의의 표시임을 알면서도 병찬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지 못했다.

 

"안녕, 네가 병찬이지?"

"네."

"준향대에선 너를 원해. 최소한의 조건만 채워서 응시만 해주면 무조건 너를 뽑을 거야."

 

말투는 서울 사람 같았는데 어조는 미묘하게 어긋나는 것이 제 앞의 사람의 출신을 조금 궁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병찬은 눈앞의 문제에 직면한다. 대학에서 나를 원한다. 최소한의 조건만 채워주면, 대학에 갈 수 있다. 대학에 가면 다시 농구를 할 수 있다. 아무도 저를 원하지 않을 거라 믿었건만 너를 원한다고 말해주었다. 병찬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참기 위해 아직도 제 손을 잡은 그 커다란 손을 꾹 잡았다. 정말이냐고 묻고 싶었고 한 편으론 내가 왜 그만뒀는지 모르냐고도 묻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가치 있냐고. 정말 나를, 내 무릎을 품을 생각이 있냐고.

병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제 앞의 남자를 간절하게 쳐다본다. 아직도 병찬을 마주 보고 있던 그는 여전히 부드럽게 웃으며 병찬의 손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그것이 마치 모든 것의 답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하고 싶지?"

 

속을 끄집어내는 듯한 발언에 병찬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병찬에게 공백이라는 것은 의미 없는 무언가다. 병찬의 재능은 재빠른 스피드로 끝나지 않는다.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 그로 인한 성실함, 열정, 간절함. 다른 누군가가 병찬의 재능이라고 일컫는 실력은 오직 그 마음들을 뒷받침해주는 토대가 되어줄 뿐이다.

병찬은 오랜만에 코트를 밟는다. 두 번이나 놓았음에도 다시 밟는 기분은 어떨까. 병찬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기회가 아주 많이 남은 건 아니었지만 병찬은 충분한 키 카드가 될 자신이 있었다. 8강만 가면 되니까. 해낼 수 있겠지. 그러나 몇 번이고 맛보았던 절망은 진득하게 발밑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해낼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은 억지로 눌러 넣는다. 해내야 했다. 농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증명해내야 했다. 나를 선택하겠다고 말한 대학을 실망하게 해서는 안 됐다. 고작 예선 경기에, 조형고와 함께 붙는 팀조차 유명하지 않았음에도 관중석에 앉아있는 그를 흘끔 쳐다본다.

감독님이 별거 아니라고 했던 팀답지 않게 상대 팀은 나름의 선전을 했다. 조형고도 병찬을 빼면 별반 다를 것 없는 처지라서 그랬을까. 감독님이 한숨을 쉬더니 병찬을 내려본다. 기세를 바꿔야 했다. 병찬은 그럴 실력이 있었다. 맡겨만 두라며 웃어 보이고 코트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병찬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만 보여주면 된다. 병찬은 빛날 수 있는 선수니까.

 

병찬의 활약으로 점수 차는 빠르게 줄어들어 약속한 12분을 채웠을 때 조형고는 역전하다 못해 상대방의 사기를 완전히 꺾을 수 있었다. 병찬은 벤치로 돌아가면서 그 스카우트가 있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병찬을 바라보고 있기에 병찬은 씩 웃으며 브이를 해 보였다. 여전히 부드럽게 웃는다. 증명해냈다는 뿌듯함과 함께 오랜만에 승부의 시간 동안 코트를 밟았다는 고양감이 차올랐다. 무릎이 아파지면서도 그게 행복했다.

그렇게 끝나면 좋을 텐데, 사기가 꺾여도 상대 팀은 포기하지 않았고 4쿼터가 시작된 뒤로는 아슬아슬한 점수 차가 계속되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동료들의 비명이 들린다. 벤치에 앉아있는 애들도, 코트를 달리는 아이들도. 악의는 없이 혹시 모른다는 기대와 아쉬움으로 병찬을 흘깃거렸다. 병찬은 시선에 민감했다. 아니, 어쩌면 병찬이 다시 달리고 싶어서 그럴지도 모르지. 여기서 병찬을 쳐다보지 않는 것은 오직 조형고의 감독님뿐이었다. 병찬에겐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코트만 바라보았다. 경기에 집중한다고도 볼 수 있었으나 병찬은 알았다. 저건 절대로 허락해주지 않겠다는 의사 표현이다.

병찬이 목이 타서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레 시선을 옮기면 끝에 그 스카우트가 있었다. 더 이상 병찬이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지 그의 시선이 병찬을 향해있지 않았다. 병찬은 그것에 어쩐지 조급함을 느꼈다. 스카우트니까 벤치에 있는 선수를 보지 않는 것이 당연함에도 병찬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저 시선을 잡아두지 못하는 자신이. 나 농구 계속하고 싶은데. 난자되어있는 마음이 욱신거린다. 채 다 낫지 못한 상처는 치기 어린 생각을 부채질했다. 병찬은 일어나 감독에게 다가갔다.

 

기어코 매달려 얻어낸 출전 기회에 다시 제게 시선이 꽂힌다. 안도, 경계, 희망, 두려움, 기대, 절망. 모두가 병찬에겐 아주 익숙했으나 아득하게 멀었던 것이다. 관중석에서 여전한 시선이 느껴졌다. 저를 증명해 보일 시간이다. 병찬은 익숙하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그때의 경기는 이겼다. 그 후 원중고의 경기는, 아쉽지만 애초에 질 것을 예약해둔 경기인지라 병찬은 그 전 경기에서 오버된 만큼 느긋하게 앉아 구경했다. 양훈사대부고 와의 경기는 어떨까. 아주 못하는 놈들은 아니라지만 조형고로선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감독님이 워낙 거친 놈들이니 몸 좀 사리라고 말하는 것을 챙겨 들으며 고개를 든다. 여전히 그 스카우트가 있었다. 또다시 증명의 때가 온다. 이번 기회만 넘기면 병찬은 저 자신의 증명을 끝낸다. 그 후엔, 그가 약속을 지키면 되는 문제다. 기어오르는 불안감을 내리누르며 병찬은 자리에 앉았다. 제가 나설 시간이 아직 아니었으니까.

처음 붙었던 팀과 다르게 그들은 적당히 하는 법을 모르는 것 같았다. 상철이가 코피가 나서 나가고 고의성이 인정되어 저쪽도 선수가 하나 나갔다. 그나마 초원이가 남아있어서 망정이지, 초원이도 없었더라면 이번 경기도 망했다 하며 두 손 들었을 것이다. 코치님과 함께 경기장을 떠나는 상철이의 뒷모습을 보며 감독님이 긴 한숨을 내뱉는다. 그 옆에서 후드를 벗으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병찬이, 절대 나서지 말고 무리하지도 말고. 저 녀석들이 위험하게 굴면 일단 사려야 한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몸 귀한 거야 제가 제일 잘 알죠~"

"오늘만 날인 거 아니야. 알지?"

"그럼요."

 

병찬이 코트로 나선다. 언제나처럼 시선이 쏟아진다. 그것이 당연했던 시간을 지나 병찬은 이 순간에 목이 말랐다. 꽂히는 시선 속에서 무슨 감정이 담겼는지 가늠할 수 없는 하나의 시선을 병찬은 마주 보지 않았다.

상대 팀이 어떻든 그들이 병찬을 잡지 못하는 건 똑같았다. 악의 넘치는 파울 따위야 병찬에겐 익숙한 일이다. 병찬은 몇 번 코트를 굴렀다. 어떻게든 오른쪽 무릎을 감싸면서. 한숨을 쉬며 초원이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앤드원이었다. 자유투는 익숙하게 성공한다. 병찬의 활약으로 점수 차를 많이 벌려놓았다. 조금만 더 벌어놓으면 병찬이 교체당해도 충분히 이길 것이다.

백코트를 하기 위해 달렸다. 볼을 잡은 선수를 따라가다 그의 시선을 따라 던져지는 패스를 순간적으로 잘라냈다. 하얀 유니폼이 공을 잡는 것을 확인한다. 병찬이 달려 나감과 동시에 공이 병찬에게 패스되었다. 체력이 모자라 보이던 빅맨 하나가 뒤에 처져 있던 탓에 오히려 운 좋게 병찬에게 붙을 수 있었다. 병찬은 그를 따돌림과 동시에 높이 뛰어오른다. 한끗 부족한 높이는 손끝으로 공을 밀어 올려 대신했다. 떨어지면서 병찬은 순간 저를 따라왔을 이에게 시선을 주었는데 그는 이미 병찬을 보지 않고 밑을 보고 있었다. 그는 병찬을 따라 뛰지도 않았다. 근데, 너무 가깝지 않나? 병찬은 떨어지면서 그제야 그 빅맨이 무엇을 유도했는지 깨닫는다.

 

"아악!!"

 

병찬이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자 백코트를 하려고 몸을 틀던 조형고의 부원들이 뛰어온다. 병찬은 제 오른 다리를 껴안은 채로 신음했다. 떨어지면서 발이 겹쳤다. 병찬은 하필이면 오른쪽 발로 그 발을 밟았다. 발목에 가해진 충격은 그대로 무릎을 강타했다. 아, 안 되는데. 아픔에 눈물이 찔끔 난다. 일어나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데. 여기서 넘어지면 안 되는데. 나, 나 더 해야 하는데….

병찬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들어 스카우트가 앉았을 자리를 찾는다. 그러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병찬은 그 순간 그 빈자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 번의 부상을 당한 선수도 미래를 장담하지 못하는데 세 번의 부상을 당한 선수는 어떻게 되는가. 병찬은 욕을 짓씹으며 저도 모르게 제 무릎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아이들이 달려들어 제 손을 떼어낸다. 이제 병찬까지 나가면 벤치에는 한 명밖에 남지 않는다. 그 한 명이 될 동료가 다가와 저를 부축해주었다. 병찬은 그에게 기대며 코트 밖을 나간다.

다시 들어올 수 있을까. 병찬은 증명에 실패한 것이 서러워 고개를 떨구었다. 나는, 그냥 더 달리고 싶었을 뿐인데. 고작 12분일 뿐이잖아. 왜 그것도 마음대로 뛰지 못하게 해. 병찬이 순간 팔에 힘을 주자 부축해오던 애가 병찬을 꾹 잡아준다. 괜찮아요. 형?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병찬은 답하지 못했다.

 

 


 

 

병찬은 깁스를 했다. 치료를 마친 저를 기다리고 있던 코치님과 상철이도 걱정하는 눈으로 봤지만, 병찬은 웃어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익숙한 목발을 짚고 밖으로 나온다. 그렇게 절뚝이며 병원을 나서는 순간 보이는 익숙한 인영에 병찬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매, 냉랭해 보이는 인상. 그러나 병찬과 눈이 마주치면 부드러운 미소를 띠는 얼굴. 그의 등장에 당황한 코치와 상철이가 경계의 눈으로 쳐다본다. 그런 시선은 예상한 건지 여상한 얼굴로 병찬이와 잠깐 대화하고 싶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병찬은 무슨 생각을 했는가. 코치는 병찬을 흘끔 쳐다보았고 병찬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렇게 자리를 비워주면 사람은 둘이다. 병찬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그는 할 말을 고르는 듯 눈을 내리깔며 병찬의 무릎을 쳐다보고 있었다. 비어있던 관중석. 그것이 생각나자 영문 모를 서운함이 울컥 튀어나와 결국 병찬은 화를 내듯 말했다.

 

"이 꼴 보려고 오셨어요? 병신 된 거 맞는지 확인하려고?"

"병찬아."

"친근하게 부르지 마세요. 무슨 말씀 하시려고요?"

"...박병찬 선수?"

 

순간 말문이 막혀 또다시 벌컥 성을 내려던 것이 내려간다. 선수? 지금 무릎 하나 간수 못 해서 목발이나 짚고 있는 사람에게 그게 가당키나 한 호칭인가. 그런데도 그 호칭을 듣자마자 불쑥 튀어나오던 서운함이 내려간다. 제 마음에 제가 당황해서 입을 헤 벌리자 그가 제 기색을 살핀다.

명백히 갑의 위치일 텐데도 자신을 살피는 시선이 꼭 눈치를 살피는 것 같았다. 이런 사람한테 괜히 분풀이하는 것도 웃긴 일이다. 낼 화가 사라진 병찬은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벌컥 성을 냈던 것이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나 진짜 애 같아 보이겠네. 병찬보다 어른이니 당연한 시선이겠지만 그래도 어쩐지 부끄러웠다.

 

"경과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까는 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음, 그럼 병찬아. 몸은 어때?"

"너무 심각한 건 아니래요. 충분히 쉬면 아마 운동도 다시 할 수 있을 거라고 했고…."

"그래, 다행이네. 다시 뛸 거지?"

 

스카우트 맞나. 다리 하나 병신 되어서 목발이나 짚고 있는데 뭘 그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묻는지. 선수 보는 눈이 없는 거 아냐? 병찬은 자조적인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놀리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그런 것이 아님을 짐작하면서도. 그러나 마주한 눈에 악의도 조롱도, 심지어 걱정조차도 없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여전히 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시선이다. 병찬은 입을 어물거렸다. 우리 감독님도, 나조차도 내 꼴을 걱정할 수밖에 없는데 당신은 뭘 믿고 저를 걱정조차 안 해요? 병찬은 헛웃음을 짓는다.

 

"다 나으면, 아마도요."

"네가 우리 대학에 원서 넣는 거, 기다리고 있어. 또 보러 갈게."

 

환히 웃으며 손을 내미는 것을 본다. 병찬은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목이 간질거려 병찬은 기어코 내뱉고 만다.

 

"또 보러 오세요."

 

 


 

 

결국 협회장기에서 8강은 못 갔다. 다행히 그다음 쌍용기의 조 편성이 잘 맞아떨어져 조형고는 병찬이 최소한으로 뛰었음에도 나름 수월하게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병찬은 고작 시간을 보내기 위한 참여였을 뿐인데도 그 스카우트는 계속해서 경기를 보러왔다. 병찬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충분히 이길 수 있는 경기들이었다. 그러나 병찬은 그 시간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자신이 달릴 때 가장 강해지는 시선을 느꼈다. 병찬은 자신의 쓸모를 이미 증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더 증명하고 싶었다.

장도고와 맞설 때는 당연하게도 관중석에 그가 앉아있었다. 별수 없이 제게서 떨어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그도 스카우트니까. 병찬은 무릎을 주무르며 경기를 바라본다. 어차피 질 싸움이어도 감독님은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 언제쯤 내보내 주려나. 감독님만 빤히 쳐다보고 있으려니 결국 타임아웃 사인을 보내는 것에 벌떡 일어났다. 그런 제 모습을 탐탁지 않게 보면서도 그 시선에 호의가 가득 담겨있으니 작게 웃었다.

허락하에 다시 코트를 밟는다. 여전히 시선이 제게 집중되었다. 붙어오는 이들을 모두 제치고 달려 나간다. 기어코 볼은 못 넣었지만, 병찬은 웃으며 일어났다. 뭐, 그 후에 어린 애새끼한테 좀 시비가 걸리긴 했지만 그런 것에 연연할 이유는 없었다. 시선이 너무 많이 따라붙어서 그런가, 항상 기민하게 알아차리던 시선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병찬은 그 시선을 잡아채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몇 번이고 볼을 넣는다. 막는 건 좀 어려웠지만, 마찬가지다. 상대편도 저를 놓쳤다. 혹은, 제게 속았다. 이길 수 없음에도 치열한 접전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이 들린다. 심장이 뛴다. 상대방은 저를 호적수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려나? 그래도 상관없다. 박병찬은 막히는 것조차 즐거웠으니까.

병찬이 달린다.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 앞에서 뛰고 있던 이를 쉽게 추월한다. 똑똑히 봐라. 나는 아직 날아오를 수 있으니까! 병찬은 언제나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그러니 예쁨 받을 수밖에. 기어코 덩크를 쑤셔 넣고 림의 반동으로 조심히 떨어졌다.

 

"...으으으아아아~~~ 예쓰!!!"

 

자신이 포효하자 달려오는 애들이 보인다. 옆에서 좀 삐죽이는 놈이 있었지만 알 바냐. 나는 오늘 신나게 뛰고 덩크도 넣었다. 마지막 순간에 저를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이 파이브를 하면서 병찬은 익숙하게 시선을 올린다. 놀랍지도 않은 것처럼, 마치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는 것처럼. 일견 행복해 보이기까지 한 얼굴로 그는 환하게 웃으며 저를 쳐다보고 있었다.

스카우트 맞아? 꼭….

병찬은 그 시선을 마주하고서 저도 모르게 마찬가지로 환히 웃으며 브이를 해 보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자기한테 그랬다는 것을 아는지 그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처음으로 자신보다 어른인 사람에게, 농구만큼 반해버리는 순간이었다.

 

 


 

 

대통령기가 끝나고 4강에서 탈락한 조형고가 남은 경기를 보러 자리에 앉았을 때 병찬은 봐두었던 관중석 쪽으로 나갔다. 언제나처럼 상체를 앞으로 내민 채 경기를 관람하는 뒷모습을 본다. 그러고 보면 뒷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병찬은 천천히 내려가 그의 옆에 앉는다. 다가오는 인기척을 눈치챈 그가 박병찬을 보고선 깜짝 놀라는 모습이 웃겼다. 바로 옆에 앉다 보니 다리가 닿는다. 그는 제게 닿은 병찬의 오른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병찬은 그의 시선을 모른 체 하며 앞을 본다. 종원공고와 장도고의 경기였다. 주전이 많이 빠진 상태라 종원공고가 유리해 보이는 판세에서 그의 시선은 여전히 병찬의 무릎에 닿아있었다. 경기를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병찬은 그게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이름이 뭐예요?"

"...이름?"

"네. 준향대 스카우트라고만 말씀하시고 이름은 안 말해주셨잖아요."

"너네 감독님에게 명함 드렸을 텐데…."

"못 들었어요. 알려주세요."

 

음. 그냥 편하게 툭 말해줘도 좋을 것을, 고개를 살짝 숙이고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병찬도 괜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뭐야. 진짜?

 

"기상호야. 음…. 편하게 부르라고 할까?"

"스카우트분을 어떻게 편하게 불러요?"

"그런가…. 네가 준향대 오면 그래도 내가 선밴데."

"선배요?"

"너 내년에 입학할 거지?"

"약속 지키시면요."

"그럼 나 준향대 나왔으니까 네 선배지."

"벌써 나왔어요?"

"어. 나 26살이야. 그렇게 안 보여?"

 

병찬이 시선을 돌려 다시 쳐다본다. 어느새 다시 저를 쳐다보고 있는 눈이 부드럽다. 그러고 보면 항상 저런 눈으로 병찬을 쳐다봤었지. 그리고 솔직히 그렇게 안 보였는데. 좀…. 어리게 보이지 않나? 처음 봤을 때는 20대 초반으로 봐도 손색이 없었다.

 

"너 21살이잖아. 아마 볼 일은 많이 없겠지만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

 

조금 부끄러운 듯 약간 상기된 얼굴로 약간 찡그린 웃음이 뭐가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 병찬은 그 웃음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답지 않게 후드를 뒤집어써서 다행이었다. 어쩐지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기가 부끄러웠었는데….

눈동자만 데굴 굴려 제 옆의 정장 바지를 쳐다본다. 운동을 하는 건지 병찬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다리 두께를 본다…. 이 사람 몸은 좋으려나? 흘러가는 생각을 굳이 접지 않는다.

 

"형."

"응?"

"저 좋아하시죠?"

 

다 알고 있다고. 병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여전히 그의 다리를 쳐다본다. 어떤 스카우트가 그냥 자기 대학에 넣고 싶다는 이유로 그런 눈빛을 해? 다친 선수를 쫓아와서 계속할 거냐고 물어? 어떤 스카우트가 고작 선수가 손 흔들어줬다고 웃으면서 같이 손 흔들어주냐고. 모든 게 이상하잖아. 병찬은 확신이 있었다. 전혀 놀라지 않는 것은 좀 의외였지만….

 

"좋아하지."

 

그 말에 병찬이 고개를 돌려 그를, 상호를 마주 본다.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에는…. 그래. 정말 다정하게만 느껴지는 감정을 가득 채워놓고서. 대체 어느 누가 고작 대학도 못 간, 다리 아픈 선수를 그런 눈으로 쳐다보냐고요. 우리 감독님조차도 나를 그렇게 안 보는데.

 

"난 네 팬이거든. 네가 마지막까지 뛰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어."

 

병찬은 그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농구선수로는 너무나도 열렬한 고백이었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는 당황스러울 만치 가벼운 고백이었던 탓이다. 그런 게 아니잖아요.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그 말이 와닿는 것은 별수가 없었다. 병찬은 결국 웃어버렸다.

 

"두고 보세요. 몇 번이고 뛰어드릴게요."

 

그러니까 당신도 약속대로 계속 지켜봐 줘야 한다고. 그런 말은 구태여 내뱉지 않았다.


Look At Me!

(기상호 side)

 

 

상호는 20살의 그때를 기억한다. 교양으로 듣는 뭐…. 이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기나긴 강의의 교수님의 추천으로 중학교 아이들의 경기를 보러 갔을 때였다. 고등학교 경기도 있는데 왜 중학교 경기에 갔냐면, 글쎄. 별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그 이유도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으니까. 상호가 기억하는 것은 한 명이다. 노란 유니폼을 입고 즐거운 듯이 코트를 달리면서 코트 위의 그 어떤 아이도 감히 잡지 못하는 반짝이는 별. 부연중 박병찬. 상호가 5살이나 어린 남자애에게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 순간이다.

물론 사랑은 종류가 많고, 상호는 상식인이었기 때문에 그 사랑은 팬심에 가까웠다. 누가 그 별을 보고 감히 반하지 않을까. 상호만큼은 아니더라도 자연히 호감이 가게 될 것이다. 상호는 고등학교 경기 일정을 찾아내어 부연중이 참여하는 경기 날짜를 모두 확인하고 자체 휴강까지 하면서 어린 병찬의 경기를 관람했다.

그러니 아주 당연하게도, 병찬이 어른의 욕심으로 땅에 처박히는 것까지 봤다. 무릎을 부여잡고 움직이지 못하는 병찬을 관중석에서 내려다보며 생각한다. 바람같이 뛰어가는 모습이 아니라 땅에 처박힌 모습은 정말 끔찍할 만큼 어울리지 않는다고. 내가 네 옆에 있었더라면 절대로 저런 모습을 보이게 하지 않았을 텐데.

 

운동 특기로 대학에 합격했으나 주변 사람들은 상호의 실력보다는 상호의 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상호만큼 수비를 잘하는 사람은 꽤 있었지만, 상호만큼 눈이 좋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재능이 없었더라면 애초에 수비를 잘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너무 큰 재능은 다른 재능을 잡아먹어 버린다. 상호는 제게 선수로서는 프로가 어려울지도 모르고, 차라리 코치나 감독을 하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하는 감독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저는 선수로 뛰고 싶어서 온긴데요. 그런 말은 내뱉지 않았다. 제게 제안하는 감독님의 눈에서 안쓰러움이 보였기 때문이다. 감독님 또한 선수의 자질보다 지도자의 자질이 더 좋아 전향한 케이스라고 들었다. 동질감, 안쓰러움, 그러나 가르치는 제자의 미래를 생각하는 책임감. 상호는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뜬다. 알겠습니다. 낮게 말하는 목소리에 깃들은 체념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상호는 생각한다. 선수가 되지 못한다면, 적어도 떨어지는 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 싶다고.

 

부상으로 사라진 별의 이름은 여전히 상호의 마음에 남아있었다. 그렇기에 보는 실력을 더 쌓기 위해 찾아갔던 고등학교 예선 경기에서 다시 날아오르는 반짝임을 본 상호는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여전히 행복해 보였다. 여전히 그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았다. 스카우트가 아닌, 온전히 그의 팬으로서 상호는 눈을 빛냈다. 아직도 농구를 사랑하는구나. 그 모습이 너무 기꺼워 상호는 소리 높여 병찬이를 응원했다. 듣지 못한 듯 한 번도 상호를 쳐다보지 않았으나 그걸로도 너무나 좋았다.

하지만 또다시 부상. 치료하기 위해 유급했다는 소식 또한 들었다. 상호는 그 소식에 이마를 짚었다가 무릎 부상 선수에 대한 국내와 해외의 모든 자료를 수집했다. 은퇴한 선수들의 이유, 은퇴하지 않은 선수들이 선택한 방식, 결국 오래 뛰지 못하고 은퇴한 선수들의 사례, 또한 은퇴하지 않고 오랫동안 뛸 수 있었던 선수들의 사례까지. 모든 것을 정리한 상호는 생각한다. 네가 마음만 먹으면 다시금 하늘에서 빛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네가 가장 행복한 하늘을 만들어주겠다고.

 

그러나 병찬은 나타나지 않는다. 상호는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감독님에게 자신이 모아둔 모든 자료를 들고 찾아갔다. 병찬이라는 선수가 얼마나 우리의 팀에 중요한 조커 카드가 되어줄 것인지를 설명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사심이 섞였겠지. 그러나 그뿐이다. 상호의 눈은 언제나 좋았다. 상호에겐 확신이 있었다. 병찬이 아직도 농구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래서 제 손을 잡아준다면.

기어코 감독의 허락을 받은 상호는 바로 조형고로 달려갔다. 전화를 해야 했는데, 기다리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자신이 생각한 비전을 말하면서 실적만 채워준다면 반드시 뽑겠다는 열렬한 이야기에 조형고 감독의 낯빛이 변하는 게 보인다. 당연하지. 당신도 병찬이를, 병찬이의 농구를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병찬이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제안을 거절할 리가 없다. 기어코 찾아온 병찬이 제가 내민 손을 잡자 상호는 희열에 가득 찬다.

 

 


 

 

상호는 그 이후 관람할 수 있는 조형고의 모든 경기에 참여했다. 그때의 상호는 이미 감독님과 깊은 의견을 주고받을 만큼 코치로서의 실력이 뛰어나 시간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병찬을 보러왔다. 유튜브 영상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직접 병찬을 보고 싶었다. 그가 행복하게 달리는 모습을 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그러다 누군가 병찬의 착지 지점에 발을 들이밀고, 이어 병찬이 그대로 쓰러지는 것을 본 뒤 상호는 벌떡 일어났다. 달려 내려가면서도 머리는 차갑게 식는다. 제가 당장 병찬에게 달려가도 할 수 있는 게 있을 리가 없다. 가까운 병원이 어디더라. 상호는 초조하게 입술을 뜯으며 차에 올라타 이어 나오는 병찬이 타는 택시의 뒤를 쫓아갔다. 이렇게 와도 되나. 응급실 쪽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한 상호는 주차장에서 나와 입구 쪽에서 서성거렸다.

크게 다쳤을까? 네가 농구를 다시금 포기하게 할 정도로? 아니면 네가 농구를 그만두게 될 정도로? 발목이나 삔 정도이길 바라며 상호는 한참을 기다리다 이어 목발을 짚고 나오는 병찬을 마주한다. 경계하는 이들은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이어 곧 둘이 남게 되자 상호는 말을 고른다.

 

"이 꼴 보려고 오셨어요? 병신 된 거 맞는지 확인하려고?"

 

날카롭게 나오는 말에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 다만 그럼에도, 그 속을 숨기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삐죽거리는 마음에 상호는 심장이 덜컹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심각해서 그래? 그래서 그렇게 화가 난 거야?

 

"병찬아."

"친근하게 부르지 마세요. 무슨 말씀 하시려고요?"

"...박병찬 선수?"

 

순간 병찬이 머뭇거린다. 당황한 것 같았고, 입을 어물거리더니 점점 기운이 빠지는 것이 느껴져 상호는 저도 모르게 눈치를 봤다. 고개를 푹 숙인 터라 표정을 살필 수가 없었다. 차라리 아까처럼 화를 내면서 저를 노려보는 것이 더 나았을까. 상호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경과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까는 좀,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랬어요. 죄송해요. 편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음, 그럼 병찬아. 몸은 어때?"

"너무 심각한 건 아니래요. 충분히 쉬면 아마 운동도 다시 할 수 있을 거라고 했고…."

 

그럼 됐다. 상호는 마음 편하게 웃었다. 그런 부상이라면 네가 포기할 리가 없다. 더 한 부상도 이겨낸 네가 고작 그런 부상에 멈출 리가 없다. 아직 농구 엄청나게 좋아하잖아. 기회는 아직 많이 남았다.

 

"그래, 다행이네. 다시 뛸 거지?"

 

병찬과 다시 눈이 마주친다. 조금 울 것 같은 얼굴인 건 알고 있을까. 그럼에도 상호는 눈치채지 못한 척 여상한 얼굴을 했다.

 

"다 나으면, 아마도요."

"네가 우리 대학에 원서 넣는 거, 기다리고 있어. 또 보러 갈게."

"또 보러 오세요."

 

병찬이 말하지 않았더라도 상호는 갔을 것이다. 상호는 속이 간질거렸다.

 

 

병찬은 여전히 달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누구보다 반짝인다. 상호는 그 모든 빛의 궤적을 따라갔다. 기어코, 그 누구도 잡지 못하게 빠르게 달리는 빛이 림에 공을 쑤셔 넣고 환호할 때. 그 모습을 모두가 지켜볼 때. 상호는 충만해진 감정을 느낀다. 봐라, 가장 높은 곳에서 반짝일 이를. 상호는 그를 하늘의 가장 높은 곳, 누구라도 쳐다볼 수 있는 곳에 데려다줄 준비가 되었다.

이어 병찬과 눈이 마주친다. 환히 웃으며 브이를 해 보이는 얼굴이 아름답다. 눈이 정확히 마주쳤음을 느낀다. 제게 보이는 사인에 상호는 제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나는 정말 너한테 완벽히 반해버렸구나…. 상호는 벤치로 돌아와 앉는 병찬의 뒷모습을 보며 마른세수했다.

나 진짜 최악이네…. 상호는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를 사랑했을 테니까…. 그런 변명을 하며 눈을 꾹 감았다. 그래봤자 눈꺼풀 아래의 어둠 속에선 아까의 병찬의 잔상이 남았다. 아마 영원히 그럴 것이다.

 


 

 

대통령기에서 조형고는 4강에서 탈락했다. 다른 4강 경기가 남아있어 관중석에 앉아있는 상호의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상호는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옆에 앉을 줄은 몰라서, 병찬의 얼굴을 쳐다보다가도 급하게 고개를 내렸다. 무시하는 느낌일까 봐 그의 무릎만을 간신히 쳐다보았다.

간단한 대화를 하며 병찬이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고 보면, 병찬과의 평범한 대화는 이것이 처음이었다. 첫 만남도 두 번째 만남도 결국 스카우트로서의 면담이었던 데다가 병찬이 꽤 날카로운 때여서. 부드럽게 말하는 목소리는 듣던 목소리보다 조금 높았고 다정하게 들렸다. 얼굴에 열이 오른다. 기상호 미쳤냐. 5살 어린애…. 심지어 중2 때부터 봐와 놓고 진심이야? 자기도 모르게 입 안의 여린 살을 조금 씹었다.

 

"형."

"응?"

"저 좋아하시죠?"

 

상호는 순간 입술을 꾹 물었다. 너를 좋아하냐고? 어느 누가 널 안 좋아할 수 있겠어…. 우습게도 그 순간 부끄러움이 날아간다. 말하지 못하는 감정들은 내버려 두었다.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꺼낸다. 너무 부담될까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들. 상호는 후드를 뒤집어쓴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는 병찬의 얼굴을 상상했다.

 

"좋아하지. 난 네 팬이거든. 네가 마지막까지 뛰는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싶어."

 

어느새 저를 쳐다보았던 병찬이 눈을 꾹 감는다. 상호는 작게 웃었다. 그 얼굴이 너무 행복해 보였던 탓이다. 아직 어린애구나. 팬이라는 말에 이렇게까지 좋아하고. 하지만 진심이었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상호는 꾸준히 병찬을 팬으로서 사랑해왔으니까. 지금은 좀 불순한 마음이 섞이긴 했으나 그럼에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두고 보세요. 몇 번이고 뛰어드릴게요."

 

그리 말하는 것에 상호는 병찬의 손을 꾹 잡으며 말했다.

 

"약속이야. 믿고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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