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Largo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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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만 되면 시끌벅적해지는 골목, 화려한 네온사인들과 조금은 촌스러운 폰트들의 빛나는 간판들 사이. 막힌 골목의 끝. 가게라는 구색을 갖추기 위함인지 불만 켜둔 깔끔한 흰색 간판 아래에는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칙칙한 골목과 어울리지 않게 깔끔히 청소되어있는 흰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갈색의 나무 문이 나온다. 문 앞에는 가게 오픈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걸려 있다. 그 문을 여는 순간 작게 딸랑, 방울 소리가 들린다. 완전히 열린 문, 그 안은 깔끔한 칵테일 바의 모습을 하고 있다.

너무 어둡지는 않은, 옆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엔 무리 없는 조명. 바텐더와 이야기하기 편한 바는 가게의 오른편 벽에 있고 대부분은 서로 마주 보게 되어있는 공간 속에서 이질적인 것은 가장 안쪽에 있는 작은 무대이다. 깔끔한 타일이 깔린 것과 다르게 무대는 나무로 되어있다. 그 위에는, 어찌나 관리를 잘해두었는지 언제나 반짝거리며 빛나는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있다. 먼지 한 번 내려앉지 않는 피아노는 항상 열려있다. 손님이 바텐더에게 피아노를 사용해도 되는지를 물으면 바텐더는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많은 손님이 호기심에 눌러보고, 간단한 곡을 쳐보고, 가끔은 멋들어진 연주를 하는 이가 와서 대단한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그럴 때에 바텐더는 흘러나오는 음악을 끄고 손님의 무대를 관람한다.

기상호는 오늘도 바의 피아노를 조율하러 들린다. 그가 조율하는 피아노는 언제나 최고의 컨디션이 된다는 극찬 탓에 몸이 바쁘지만 멀리 출장을 나가지 않는다면 기상호는 언제나 바가 열리기 전에, 혹은 바가 열린 후라도 들러 피아노를 조율해주었다. 바의 문을 열어주면 언제나처럼 잔을 닦는 바텐더가 기상호를 반긴다. 싸늘한 인상 임에도 문을 여는 순간 맞이해줄 이를 아는지라 기상호의 얼굴은 바보같이 풀어져 있었다. 무거운 가방을 바에 올려두며 신난 얼굴로 몸을 기울인다. 그 모습을 부드럽게 웃는 얼굴로 맞이해주는 바텐더는 여상한 소리로 묻는다.

 

"오늘은 많이 바빠?"

"아뇨. 괜찮아요... 일 다 끝나고 왔으니까... 오래 있다 가도 돼요?"

"그럼. 조율 끝나고 손님 올 때까지 말 상대나 해줘."

"네, 햄.“

 

피아노라는 것은 정말이지 섬세한 악기라, 어제 조율을 하고서도 오늘도 조율할 거리가 생긴다. 물론 연주회만큼 소리에 민감한 이가 있는 게 아니라면 필수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는 가능한 만큼 매일 들러 조금씩 피아노를 조율했다. 그런 핑계라도 대야 편히 있을 수 있으니까. 짧은 조율을 끝마치면 바텐더가 발을 옮겨 문을 열어 클로즈가 적힌 팻말을 돌려 오픈으로 둔다. 다시 문을 닫으면 이 넓은 공간에 있는 것은 바텐더와 조율사, 둘 뿐이다. 바텐더가 먼저 다시 바 안으로 들어가면 기상호는 손님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가장 끝의 자리에 앉는다.

쉐이커에 몇몇 액체들이 들어간다. 저 사이에 알코올은 없다. 만들어지는 것은 달콤한 맛의 칵테일이다. 그것을 예쁜 잔에 담아 정갈한 구둣발 소리를 내며 가지고 오는 바텐더를, 기상호는 홀린 듯이 쳐다본다. 내려놓으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바닥에 먼저 닿는 것은 약지. 왼손 약지에는 금색의 반지가 탁하게 빛난다. 내민 잔의 기둥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바텐더는 친히 그 앞에서 몸을 기울여 기상호와 시선을 맞춰준다.

 

"오늘 많이 힘들었어?"

"쪼매 먼데 다녀왔는데, 그래도 다녀오고 나서 잤어요."

"안색이 별로 안 좋은데?"

"쪼끔 자가지고... ...안 돼요?"

"아냐~ 나는 상호가 와주는 거 좋아해. 항상 피아노 봐주는 걸. 나야 고맙지.“

 

쭉 째진 검은 눈이 가늘어진다. 입만 웃고 있는 얼굴에는 미미한 벽이 느껴졌다. 기상호는 이미 그것을 앎에도 아는 척 하지 않고 바보같이 웃어 보인다. 흘끔, 주머니 속에 꽂힌 바텐더의 오른손에 시선이 가다가도 멈추지 않고 시선을 마저 옮겨 피아노를 쳐다본다.

 

"어제 멋들어지게 치던 아가 있던데."

"피아노 배운다더라. 대학생이래."

"좀 거칠게 친 것 같던데요."

"뭐 어때. 연주회 용도 아닌데."

"오늘은 언제 손님이 올지 내기할까요?"

"흠... 난 1시간 안으로 할래. 나보다 많이 해."

"그럼 1시간 30분 안으로."

"좋아.“

 

다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면 작은 방울 소리가 들린다. 둘의 시선이 옮겨지고, 세 명의 손님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면 바텐더는 예의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바 앞에 앉고, 바텐더는 기상호를 내버려 두고 자리를 떠난다. 기상호는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칵테일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시간을 살핀다. 가게 문을 연지 1시간 17분. 기상호의 승리다. 칵테일을 느릿하게 삼킨다. 잔의 겉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소금 알갱이들은 맛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텐더의 심술이었다. 그럼에도 상호는 그것을 완전히 삼킨다.

잘생긴 바텐더, 맛있는 술, 친절한 응대, 나쁘지 않은 선곡들, 퇴폐적이지 않은 분위기. 그리고 아주 가끔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는 이 칵테일 바는 알음알음 소문이 나 있는 곳이다. 그 사이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채 바의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옆에는 무거워 보이는 공구함 같은 것을 내려둔 기상호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의 시선이 바텐더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애초의 그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으니까.

오늘도 누군가가 피아노에 관심을 보인다. 만져봐도 되겠냐는 질문에 바텐더는 아무렇지 않게 응한다. 상호는 시선으로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는 그의 오른손을 따라간다. 그 시선을 바텐더도 눈치챘다. 웃지 않는 눈이 서로 마주한다. 상호는 여전히 피하지 않았고, 결국 피하는 것은 바텐더다. 그의 시선이 무대로 향한다. 몇 번 건반을 눌러본 손님은 수줍게 무언가를 연주했다. 화음도 없이, 아마 특별히 좋아하는 노래라 음계를 외운 듯 더듬더듬 음을 따라 누른다. 일반인의 서투른 연주를 바텐더는 멍하니 쳐다본다. 어느새 가게 안의 모두가 그 손님의 연주에 집중했다. 흘러나오던 노래는 꺼졌다. 서투르지만 그럼에도 끝까지 완주해낸 연주자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다른 손님들을 살핀다. 모두가 기꺼이 그에게 박수를 쳐줬다. 그 사이에서도 상호는 바텐더만을 바라본다. 이제 저를 쳐다보는 상호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빛나는 무대 위에서 박수를 받으며 기뻐하는 이를 동경하듯 쳐다보는 그를.

연주자가 내려오고 다시금 녹음된 음악이 흐른다. 바텐더의 시선은 자신과 일행들 사이에서 부끄러워하는 그에게 머무르다 제게 말을 건네는 손님에게로 향했다. 물을 달라는 요청이었던 건지 오른손으로 컵을 내밀고 왼손으로 물을 따른다. 테이블 위에 가만히 얹어진 오른손은 바텐더의 시선이 다시 무대로 향하면, 조금씩 움직인다. 상호는 알았다. 전의 그 서투른 연주를 느릿하게 따라가는 것을. 왼손이 그 곡에 어울릴만한 화음을 누른다. 소리는 나지 않는다. 그 두 손이 있는 곳은 건반이 아니라 바텐더에게 주어진 깔끔한 테이블 위니까.

내일 일정이 없던 상호는 모든 손님이 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조용해진 적막 속에서 바텐더는 씻은 잔을 닦는다. 이제 둘의 시선은 자주 얽히고, 이어 바텐더가 천천히 다가온다. 피곤한 기색의 얼굴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 기다란 머리카락이 사락 내려오면서 연한 그늘을 만든다. 무쌍의 눈이 느리게 깜박이는 것을 상호는 가만히 쳐다보았다.

 

"오늘도 조율 값으로 똑같은 얘기할 거야?"

"...네. 아시잖아요. 제가 원하는 건 그거 뿐인 거."

"안 되는 거 알잖아."

"안 주셔도 돼요. 주신다면 그것만 원하는 거지.“

 

저 피아노는 항상 저 위에서 연주를 기다린다. 누가 봐도 값비싼 저 피아노가 여전히 저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상호의 섬세한 손길 덕이다. 바텐더는 상호가 들이미는 제안을 거절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피아노 앞 의자에 앉지 않는다. 오른손을 천천히 쥐었다 피던 그가 결국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마른 천을 들고 카운터에서 나온다. 이번에도 소원한 일이다. 뚜껑을 덮고 천천히 겉면을 닦아내는 등을 바라보던 상호는 제 공구함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바텐더를 그리운 눈으로 보는 이를 바텐더는 모른다. 기분 나쁘게 자꾸만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보는 이만 알겠지. 알게 할 이유도 없다.

조율사는 바텐더가 뒤를 돌기 전에 먼저 가게 밖으로 빠져나간다. 바텐더의 빚은 자꾸만 쌓여간다. 딸랑, 소리와 함께 결국 혼자 남은 바텐더는 고개를 들어 무대 위로 쏟아지는 조명을 쳐다본다. 눈이 부셔 찌푸리면서도. 이미 건반 위에는 천이 덮이고 뚜껑도 덮였다. 매끄러운 나무 밑에 있을 건반을 상상하며 바텐더는 손을 올린다. 오늘의 서툰 연주가 다시 머리 속을 채운다. 기쁘게 웃던 이를 생각한다. 잊혀지지 않는 선율을 따라 잊혀지지 않은 건반의 자리를 짐작하며 손을 움직였다. 소리가 나지 않으니 틀린 것도 알 방도가 없다. 개의치 않고 나무 위를 짚는다. 그 꼴이 테이블 위를 짚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 모습을, 다 닫히지 않은 문틈 사이로 조율사는 지켜본다.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음에도 무대 위에서 피아노를 짚는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니까. 조율사는 한참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바텐더가 손을 힘없이 내리면 조용히 문을 마저 닫았다. 방울 소리는 나지 않는다. 조율사는 친절히 팻말을 돌려 주고 계단을 올랐다.

 


 

근래에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피아니스트들의 내한공연도 많았고 개인적으로 의뢰도 많았던지라 바에 일주일 동안 가지 못했다. 그래도 피곤한 상태로 가봤자 제대로 조율 할 수도 없을 테니까, 상호는 잠을 선택한다. 자고 일어나면 이미 바의 오픈 시간은 지나있다. 공구함을 챙기고 깔끔한 옷을 입은 뒤 바로 향한다. 칙칙한 골목을 지나 흰 간판 아래의 흰 계단을 내려가 오픈 팻말이 걸린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여전한 풍경이다. 다만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고, 상호가 주로 앉았던 자리는 이미 누군가가 앉아있었다. 바에는 빈 자리가 없다.

딸랑 소리에 맞춰 손님들의 시선이 상호에게 닿았다가 떨어진다. 떨어지지 않는 시선은 오직 바텐더. 속 모를 시선으로 상호와 한참 마주하던 바텐더는 결국 먼저 고개를 돌린다. 그 시선을 확인하고 저도 모르게 입술을 축인 상호는 가게의 왼쪽에 있는 테이블 자리에 앉았다. 내일은 일정이 없으니까 그냥 얼굴만 보고 내일 다시 올까. 잠깐 고민하며 메뉴판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으니 인기척이 들린다. 그것을 모르는 체하고 있으면 자연스레 테이블 위에 칵테일이 하나 놓였다. 어서 오라느니, 반갑다느니, 오랜만이라는 인사치레는 없었다. 그저 가늘어진 눈으로 상호를 흘끔 내려다보고는 말 없이 떠난다.

손님이 있을 적엔 항상 그랬으니 서운하진 않았다. 그저 받은 칵테일을 내려봤을 뿐이지. 메뉴를 묻지 않았으니 손님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임을 안다. 상호는 가만히 옆 벽에 머리를 기댄다. 시선의 끝에는 바텐더가 있다. 가만히 웃거나, 상대방에게 집중하는 듯 살짝 기울인 몸. 그러다가 가끔은 쉐이커를 흔들고 잔을 닦는... 그 모든 모습이 익숙한 것이 되려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눈을 느리게 끔벅인다. 잠을 잤지만 그동안의 피로 탓에 졸음이 조금 밀려왔다. 주변을 훑어보았으나 아직 빈자리는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상호는 눈을 감고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눈을 붙였다 일어나면 시간은 새벽 4시를 넘어간다. 아직 가게가 닫힐 시간은 남았으나 조용한 가게 안을 느낀다. 주변을 돌아보면 이미 손님들은 모두 나갔고 바텐더만이 조용하게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일어난다. 손에는 공구함이 들려있었다. 마시지 않아 미지근해진 칵테일을 뒤늦게 다 마시고 바 쪽으로 다가오면 그가 미소를 지어주며 건네는 잔을 받아서 든다.

 

"피곤했어?"

"조금... 요즘 일이 많아가꼬."

"그냥 돌아가지."

"일주일이나 못 봤으니까요."

"그래. 잘 부탁해~?“

 

상호는 익숙하게 피아노 쪽으로 다가간다. 흠집이 난 곳은 없는지, 다들 멀쩡히 소리가 나는지. 그것을 꼼꼼히 살핀 뒤 현을 조율한다. 미세하게 늘어진 음들이 있었다. 그 사이에 다른 연주자가 있긴 했던 모양이다. 조금 난폭하게 쳤나?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한다. 백건을 누른다. 이어 조심스럽게 제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는다. 못 들은 척 다른 백건을 누른다. 발소리가 무대 아래에서 멈췄다. 제대로 듣지 못해 같은 백건을 눌렀다. 그제서야 소리가 가늠이 되었다. 발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숨을 멈추며 피아노 소리에 집중했다. 마지막 음까지 모두 맞추고 일어나면 목이 뻐근해진다. 제 목을 느릿하게 돌리며 풀자 낯선 손이 제 목덜미를 주물러준다. 놀라거나 뒤돌아보지도 않고 가만히 있으면 손이 떨어지고, 뒤를 돌면 조명의 역광 속에서 잔잔하게 웃는 얼굴이 보인다.

왼손. 제게 닿았던 손에 시선을 준다. 오른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상호는 다시 시선을 맞춘다. 바텐더는 상호를 지나쳐 왼손으로 천천히 건반을 눌러본다. 느릿하게 눈을 껌벅이며 그 모습을 본다. 제 앞에서 피아노의 건반을 누른 적은 없었는데. 항상 조심히 열어둔 문틈으로만 보았던 모습을 눈앞에서 보고 있으려니 기분이 묘했다. 하지만, 글쎄. 이런 모습을 본다면 같은 무대 위 보다는...

 

"그렇게 쳐다보지 말아줄래."

"...죄송해요."

"뭘, 화내는 거 아니야.“

 

건반 뚜껑을 덮는다. 그가 무대 밑으로 내려간다. 상호는 그 뒤를 따라 내려갔다. 곧 무대 위를 비추는 조명이 꺼지고, 카운터 뒤의 공간으로 사라진 그가 갈색 코트를 입고 나왔다. 가자, 말하는 것에 상호는 다시 뒤를 따라간다. 계단을 올라 골목 밖까지 둘은 별것 아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골목을 나서면 둘은 헤어진다. 바텐더가 먼저 몸을 돌렸고 상호는 그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봤다. 멀어져서, 멀어져서, 두 블록을 넘어간 뒤 다른 골목 안으로. 미련이 남아 그 자리에 계속 있다가도 여명이 밝아오는 것에 뻑뻑한 눈을 끔벅이며 자리를 떠난다.


 

 

바텐더, 병찬은 오픈 준비를 마치고 느긋하게 잔을 닦았다. 애초에 손질을 다 끝마쳐두었으나 뭐라도 하는 것이 나으니까. 닦은 유리잔을 의미 없이 닦으며 문을 본다. 조금 기다리면 문이 열린다. 별 다른 일정이 없으면 오픈하기 두 시간 전에 가게로 들어왔다. 손에는 익숙한 공구함이 들려있다. 저랑 눈이 마주치면 밝게 웃는다. 저 얼굴 본지도 반년이 넘었다. 언제나처럼 바보같이 풀어진 낯짝으로 바의 맨 끝자리에 앉는다. 제가 가까이 다가가면 옅은 눈동자에 기대가 서린다. 몸을 숙여 시선을 제대로 마주하면 홍조가 띄워지는 얼굴이 익숙하다. 병찬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보며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요즘엔 일 없어?"

"네에... 그럭저럭 괜찮아요. 어지간하면 낮에만 일하고 있고..."

"밤에는 자야지. 너 그러고 바 닫을 때까지 있잖아."

"...안 돼요?“

 

바보같이 웃는 얼굴이면서 조금만 부정적인 어조가 나오면 금세 고개를 숙이고 시선만 데굴, 굴러 저를 올려다본다. 글쎄. 처음엔 싫어서 은근히 쫓아보냈는데 오래 본 기간 동안 저도 정이 든 모양인지 좋게 돌려 하는 말도 나오지 않아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그의 눈에 이채가 뜬다. 또 속을 들켰나 싶어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시선마저 내렸다. 그런 주제에 잠깐 내버려 두면 다시 시선이 올라온다. 찬찬히 제 기색을 살피는 눈동자를 마주한다. 병찬은 이제 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공구함을 들고 일어난다. 피아노로 다가가는 뒤를 따라간다. 언젠가부터 병찬은 그가 조율하는 동안 그 옆자리를 지켰다. 혹시나 어디에 수리 할 곳이 있는지 확인하고 이어 음을 하나하나 조율하는 모습을 찬찬히 구경한다. 집중을 하는 그는, 제게 대하는 것과 다르게 언제나 냉한 인상이었다.

그의 조율은 정확한 것에 비해 속도가 빠르다.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조율이 끝나고 공구를 정리하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무대 위에서 그가 저를 내려다본다. 그도, 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지간히 서로가, 지금 있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가 무대에서 내려온다. 저는 바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언제나 앉던 자리에 앉는다. 연습 겸 느긋하게 재료 몇 병을 꺼내어 섞는다.

값을 셈하지 않는 칵테일을 한잔 내민다. 잔을 만지작거리는 손은 굳은 살이 가득하다. 그 손을 보다가, 그저 오늘은 그럴 기분이 들어서.

 

"너는 피아노 쳐 본 적 있어?"

"예전에 조금이요."

"지금은?"

"손이 다 굳어서... 기억나는 악보도 없어요."

"피아노는 왜 그만뒀어?"

"...하고 싶은 게 생겨서..."

"뭐, 하고 싶은 게 생기는 일은 좋은 일이지.“

 

깊은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그 이야기 속에 제가 나올 것임을 짐작한 지는 오래전이니까. 거기까진 기분이 나지 않아서, 병찬은 주제를 바꿨다. 그러면 그는 별다른 머뭇거림 없이 그것을 따른다. 다시 별것 아닌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그러다 보면 손님이 들어온다. 다시 그를 놔두고 다른 손님들에게 다가간다. 여전히 제게 시선이 따라오는 것을 느낀다. 제가 자리를 떠나면 그제서야 잔을 들어 그 안의 것을 마신다. 병찬은, 오늘 그럴 마음이 들었기에...


 

정신을 차리면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던 것을 깨닫는다. 술에 취하면 자는 버릇이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었다. 상호는 굳은 몸을 천천히 풀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코올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강한 줄은 몰랐다. 멍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손님들은 이미 없었고, 바 카운터 안에 항상 있어야 할 바텐더 또한 보이지 않았다. 어디 잠깐 갔나? 시선의 끝이 피아노에 닿는다. 일어나자마자 바텐더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는 걸 알았음에도 피아노를 마지막으로 본 이유는, 적어도 그가 거기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텐더는 거기에 있었다. 여전히 바텐더의 복장이었으나 그가 거기에 앉아있는 걸로도 모든 게 옳게 느껴진다. 멍한 정신으로 그를 보다 급하게 일어난다. 상호는 무대 앞,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상호가 그러는 내내 건반을 내려보고 있었을 뿐이다. 상호가 제대로 자리를 잡으니 두 손이 건반 위로 올라온다. 상호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크고 기다란 손가락이 건반을 짚는다. 상호가 조율한 피아노는 정해진 음을 울린다. 오른손이 건반을 짚다 틀린 음을 누른다. 잠깐의 머뭇거림, 그럼에도 마저 건반을 짚는다. 잘못 누른 것이 아니라 손이 따라주지 않는 탓이다. 연주가 조금 더 늘어진다. 한 음 한 음, 조심스럽게 누르며 올바른 음을 연주한다. 이전에 가졌던 화려한 기교를 선택할 여유도,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해냈던 정확한 박자의 연주조차도 지금의 연주자에겐 어려운 일이다.

일견 서툴러 보이는 연주에 담긴 마음을 상호는 다 헤아릴 수 없다. 헤아려주길 원하지 않았을 테니 상호는 그저 집중하고 있는 연주자의 얼굴을 볼 뿐이다. 어려운 기교도 정직하게 음을 짚는 것에 집중하여 화려하지 않다. 길지 않은 곡은 연주자가 가장 자신있어하던 곡이었다. 그때 비하면 비교조차 우스운 연주이건만 연주자는 괴로운 얼굴로 땀을 흘리고 있었고, 무대 아래의 조율사는 그저 올려다본다. 연주자의 손이 건반 아래로 내려간다. 억지로 웃음을 만들어낸 그가 상호를 쳐다보았다.

 

"이제 만족해?"

"네. 너무나요."

"웃어도 되는데.“

 

비웃으라고 하는 말이었겠지. 하지만 상호는 비웃을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에겐 그저 쌓인 빚을 청산하려던 것이거나 어쩌면 큰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당장 이곳에 잇는 관객은 저 하나 뿐이니 이 연주는 오롯이 저를 위한 연주이다. 이제까지의 조율들이 오직 지금 무대 위에서 빛을 받고 있는 단 한 명의 바텐더를 위한 것이었던 것 처럼. 그래서 상호는 행복하게 웃었다. 손을 올려 박수를 친다. 그 모습에 바텐더는, 연주자는, 병찬은, 울렁이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서툰 연주자에게도 박수 받을 자격이 있었다. 그의 연주는 여전히 아름다우니 그는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병찬은 입술을 꾹 문다. 벗어나고 싶은 것처럼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무대 위에서 상호를 내려다본다. 다시금 알 수 밖에 없다. 지금의 서로는 서로가 가장 알맞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 병찬은 기어코 망가진 제 오른손을 꽉 쥐며 헛웃음을 흘렸다.

처음 피아노를 배울 때보다도 엉망진창인 연주였고, 말을 듣지 않는 오른손에 이를 악물고 치면서도 이 모든 일이 작은 순간순간이 즐거웠다는 사실에 기껏 잠재워둔 상처가 두근거린다. 발소리가 들린다. 상호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조명의 역광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온 상호는 병찬을 부드럽게 끌어안는다. 마치, 방금 연주를 끝마치고 내려오는 연주자를 반겨주는 것처럼.

 

"행복했죠?“

 

병찬은 그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단순한 변덕으로 겪기엔 너무 버거운 일이다. 별수 없었다. 연주자는 듣고자 하는 관객이 있을 때야 가치가 있다. 연주자는 그런 관객을 무시할 수 없다. 진심 어린 축하가 고팠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서툴기 짝이 없는 연주에 행복하다는 듯 웃는 관객. 날카로운 말은 입 속에서 흩어진다. 연주자는 작게 앓는 소리로 대답했다.

 

"끔찍할 만큼...“

 

안아오는 팔에 힘이 실린다. 상호는 한 손을 내려 아직까지도 제 오른손을 부술 것 처럼 꽉 쥐고 있는 병찬의 손을 풀었다. 그리고 오른손을 천천히 깍지 껴 잡는다. 손등에 남아버린 흉터를 느긋하게 문질렀다. 병찬은 그 손길을 밀치지 않았다. 그가 버리지 못한 미련을 꾸준히 고쳐놓은 탓에 기어코 포기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거절했어야 했는데. 쌓인 마음이 무겁다. 그럼에도 축하를 받아버려서... 병찬은 하나뿐인 관객이 조금 더 행복하길 바라버려서.

 

"내일도 들려주실 수 있어요?“

 

연주자는 느릿하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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