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시작선은 공평하지 않다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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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호는 제 감정 숨기는 것은 잘하지 못하는 인간이다. 정확히는 제 긍정적인 감정을 숨기는 것을 못했다. 웃고 싶으면 크게 웃었고 신이 나면 방방 뛰었으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풀어진 얼굴을 보인다. 기상호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상호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 수 있다. 너무 명확한 감정표현 덕에 착각하기도 쉽지 않다.

그 사람들 중엔 박병찬도 있었다. 길지 않은 대화 이후 기상호는 쉽게 마음을 열었고 저 좋다는 사람에게 매정하게 굴 성격이 되지 않은 박병찬은 저도 마음을 조금 열어주었다. 번호 교환도 했고 자주 카톡도 주고받았다. 주고받는 게 많아질수록 기상호는 점점 더 친밀하게 굴었다. 속 얘기를 몇 번 꺼내기도 했다. 어른으로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신경 쓴 조언도 해주었다.

조형고와 지상고의 합숙 훈련이 한 번 더 있었을 때, 기회만 되면 병찬의 옆에서 재잘거리는 기상호를 보며 박병찬은 물론 주변 사람들은 다 알았다. 어지간히 병찬을 좋아하는구나... 지상고의 선수들이 점마는 우리보다 뱅차이를 더 좋아하노. 라는 말까지 들었으니 확인 사살이다. 조형고의 후배 녀석들도 그 꼴을 보다가 진지하게 제게 말했다. 쟤 형을... 너무 좋아하는데요? 당하는 입장에선 더 명확했다. 호의로 가득 찬 얼굴, 시간만 나면 옆으로 와서 자기 이야기를 떠들고 제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눈을 반짝이면 모를 수가 없다. 병찬이 이런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모를 수 없는 이유다.

기상호는 명백하게 박병찬을 좋아한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명제였다. 박병찬은 그 호의를 보며 고민한다. 받아도 될까? 확신이 서지 않는다. 어쩌면 그 호의가 단순한 동경 일수도 있잖아. 박병찬은 이제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발자국 물러서기로 했다. 여전히 다정하게 대해주면서도 이상하리만치 다가오는 그 거리감을 지적하지 않았다. 주변의 사람들이 되려 저를 걱정하는 듯이 쳐다봐도 모른다는 듯 웃으며 잘 대해줬다.

 

그리하여, 기상호가 드디어 졸업을 했을 때. 병찬은 상호의 졸업식에 갔다. 훈련이 있었지만 자율이라 양심을 뒤로 하고 슬그머니 뺐다.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병찬은 마음을 정리했다. 그동안 한껏 다가와 밤늦게까지 카톡을 울리는 소리가 피곤하지 않을 때부터 병찬은 결심했다. 상호가 고백하면 받아줘야지.

그렇게 도착한 지상고에서 상호에게 꽃다발을 내밀었을 때. 친구들 모두와 인사하고선 저와 단 둘이 이야기하고 싶다며 저를 끌고 사람이 없는 쪽으로 데려갔을 때. 병찬은 때가 왔다고 느꼈다. 고백의 타이밍이구나! 병찬은 땀이 나는 손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햄, 제가요... 그동안 햄한테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요."

"뭔데?“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너무 컸다. 길쭉한 병찬의 다리로도 네 발자국은 넘게 남는 거리인데 혹시나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병찬은 지레 찔려서 들키지 않게 심호흡을 했다.

 

"재활하시고 날아다닌다믄서요. 더 노력해서 3점 슛도 좀 더 잘 넣고, 햄을 막아설 수 있는 선수가 될게요. 그때는 전력으로 부딪혀주시기에요. 아셨죠?"

"... ... ...어?"

"네?"

"...그, 렇구나. 당연하지. 나도 기대하고 있어. 상호가 얼마나 멋지게 자랐는지...“

 

이게 끝? 병찬은 적당한 말 몇 마디를 주워섬기며 분위기를 풀었다. 적당히 나도 너 예뻐해, 기대하고 있어, 너 보고 싶어... 그런 말과 함께 웃어 보였는데도. 상호는 좀 쑥스러운 기색을 보이더니 후련하다는 얼굴로 마주 웃고선 부모님과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같이 먹겠냐며 권유했다. 어? 진짜 끝? 병찬은 멍을 때리다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상호가 병찬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긴다. 아니 상호야... 너는 이런 말을 이렇게 으슥한 곳에 데려와서 비밀스럽게 하니...

허망해진 채로 그 뒤를 터덜터덜 따라가니 웬 여학생이 상호를 잡는다. 서로 이름을 부르는 것이 퍽 다정하다. 그러고 보니 이름만 부르는 건 좀 낯간지럽다고 안 했던가?

 

"니는 니 여친 냅두고 웬 모르는 오빠야랑 있노?"

"아니, 내 농구 롤모델이다. 내 축하해줄라고 인천에서 왔다는데 이해 좀 해도."

"인천? 진짜? 참나... 함만 봐주는 줄 알아라. 낼 시간 비워두고."

"응. 내일 데이트하재이.“

 

여자애가 떠난다. 병찬은 그 모든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 삐걱거림을 최대한 숨기며, 자연스럽게 물어봤다.

 

"여친이야?"

"네! 이뿌죠. 성격도 착해요."

"아... 사귀는 거지?"

"네, 글쵸? 아 헉. 쟤한테 병찬햄 보여주면 안 되는데. 병찬햄 뺏으시면 안 돼요!“

 

뺏겠냐. 병찬은 웃는 얼굴로 혀를 꾹 깨물었다...

 


 

준향대에 올라온 기상호와 붙어 다니면서 병찬은 하나의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게 병찬햄 병찬햄 부르면서 붙어 다니면서 기상호의 감정은 좋게 봐줘도 경애에 가깝다. 누가 옆에서 네가 병찬햄 애인이라도 되냐고 농담을 하면 제가 무슨... 하고 부끄러워 하면서 애인은 착실히 사귀고 살더라. 병찬은 예상치 못한 뒤통수에 머리가 얼얼했다.

아니, 너는 위쪽 사람은 이름을 그렇게 간지럽게 부른다며. 밑 지방 사람들은 애인도 아닌데 그렇게 좋아하는 티 내면서 졸졸 쫓아다녀? 병찬은 진짜 억울했다. 주변 사람들도 하나같이 기상호가 병찬을 너무 좋아해서 사귀자고 고백해도 안 이상할 것 같다고 할 만큼 기상호는 저한테 잘해줬는데, 그게 사귀자는 게 아니야?

더 눈물이 나는 건, 애인을 사귀는 기상호의 태도를 보면서 그게 확실히 착각이었구나 하고 자각하는 순간이다. 기상호는 애인한테 진짜 잘했다. 너무 잘했다. 저를 졸졸 쫓아다니는 것 못지않게 애인에게 잘했다. 비는 시간 생길 때마다 넙죽 애인에게 바쳤고 애인이 과제 때문에 너무 바쁘면 훈련을 끝마친 뒤 잠을 줄여서 도와주거나, 점심시간이 되면 혹시나 밥 못 먹었을까 봐 꼬박꼬박 챙겨주는 꼴을 보면 그랬다. 어느 날은 운전면허를 땄다길래 어디에 쓸 거냐고 웃었더니 나중에 차를 사면 여친을 데려다주는 로망이 있었단다. 그 말을 들은 박병찬은 그날 샤워실에서 물을 30분간 멍하게 맞고 있었다.

 

이게... 이게 말이 되나? 병찬은 믿을 수가 없었다. 호의가 있음은 착각하지 않았는데 그 호의가 단순한 호의인지 사랑인지를 착각했다. 이미 병찬은 상호에게 마음을 줘버렸는데... 별수 없었다. 포기하는 것은 병찬이 제일 못하는 일이다. 병찬은 마음을 먹는다. 네가 날 꼬셨으니 이제 내 차례야... 이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솔직히 진짜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포기를 못하면 남은 선택지는 그것 뿐이었다. 그러니까... 선택지가 없었다. 해야 했다.

 


 

기상호는 애인이 꽤 자주 바뀌는 편이었다. 그 왜, 너무 쉬운 남자는 인기 없다지 않나. 기상호가 매일 잘해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니 그 것이 디폴트값이 되어버려 조금만 못 해주면 금세 서운해했다. 기상호는 상대방을 정말 사랑하지만 자신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는 또 칼 같았다. 너 사랑해서 하는 거야. 너 아껴서 그래 주는 거야. 나 다른 사람한테 안 그래. 좋다고 받아먹다 보면 그런 태도에도 서운해진다. 그래서 기상호는 헤어짐이 빠른 편이었다.

그리고 중간의 그 빈 기간. 그 기간은 이제 박병찬의 개수작 시간이었다. 훈련으로 바쁜 날엔 같은 숙소이면서도 밤새도록 카톡을 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했고 여유가 생기는 날이면 상호보고 놀러 나가자고 채근했다. 기상호는 여전히 박병찬을 잘 따랐기에 박병찬이 다가오는 것에 좋다고 웃으며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박병찬은 정말 열심히 꼬셨다. 데이트 나가면 옆에 최대한 붙어 다니고 나갈 때마다 룸메이트나 친한 지인들에게 코디를 점검 받고 팔자에도 없는 남자용 화장품까지 사뒀다. 오롯이 기상호 앞에서 잘 보이고 싶어서. 엄청난 정성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다 애인을 사귀는구나 했다. 애인이 아니라 짝남에게 잘 보이고 싶은 자의 몸부림이었지만. 박병찬은 가끔 제 피부에 파운데이션을 펴 바르며 잔잔한 현타를 맞이했지만 이렇게 꾸미고 나가면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홀린 눈으로 저를 쳐다보며 오늘도 때깔이 끝내줘서 눈이 머는 줄 알았다는 주접을 받으면 아무래도 좋아졌다.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도 속이 좀 아팠다. 나 진짜 너 좋아하나보다 상호야... 그런 생각은 이제 너무 당연해서 굳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박병찬의 노력이 정말 무색하게도... 기상호는 다시 애인을 사귀었다. 줄기차게 고백을 받고 그중에 자기한테 특히나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의 고백을 받았다. 받기만 하면 모를까 가끔 병찬에게 얘가 너무 좋은데 어떻게 고백할까요? 라고 물을 땐, 솔직히 혀 깨물고 죽고 싶었다. 여자만 사귀는 걸 보니 그냥 남자는 연애 대상이 아닌가? 싶었더니 체육관 뒤에 불러내어 긴장한 목소리로 좋아하는 남자 선배가 생겼다고 했을 땐... 체육관 벽에 머리 박고 죽고 싶었다.

더 끔찍한 점은 기상호가 사귀는 사람들을 보면... 저도 승산이 있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직모에 쌍꺼풀은 없거나 진하지 않고, 다들 키가 크면서 성격 좋은 사람들이었다. 기상호의 많은 애인들을 보면서 박병찬은 생각한다. 왜 난 안 돼? 저 사람들보다 내가 더 너한테 잘 해주잖아. 내가 더 성격도 좋고 친구도 많고 너한테 다정하고... 그리고 난 농구도 잘하잖아. 왜 난 안 돼? 나 엄청 멋있다고, 예쁘다고, 잘생겼다고... 나만 보면 얼굴 붉어져서 눈을 반짝이면서 왜 그 눈 안에 사랑은 없어?

병찬은 차마 묻지 못하는 마음을 삼킨다.

 


 

짝사랑을 자각한 지 2년 째. 이제 주변 사람들은 박병찬이 기상호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는지 알았다. 대한민국 특유의 열린 사고라던가, 병찬 자체가 남의 시선을 적당히 끊어내는 법을 잘 알고 있는 덕에. 또한... 기상호에게 대부분 애인이 있다는 점 탓에 그 공이 어떤 식인지는 다들 몰랐지만 박병찬은 남에게 안 하는 짓을 기상호에게 했다.

기상호가 참여하는 술자리는 무조건 참여했고 술에 취하면 같은 숙소라는 핑계로 룸메이트도 내버려 두고 기상호에게 전화를 한다거나. 기상호가 조금만 불편해 보이면 눈치 보다가 꺼내주거나... 단 둘이 밤늦게까지 같이 훈련을 하기도 하고 점심시간에 기상호한테 매일 밥 같이 먹자고 매달리고. 약속이 있어도 기상호가 시간 있냐고 물어보면 양해 구하면서 빼고...

심지어는 언제나처럼 놀러 나가서는, 2만원짜리 각인 반지를 보면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우리도 저런 거 해볼까? 라고 묻기도 했다. 친구랑 우정 링을 하는 것도 좋다는 홍보문구를 빌미로 말하면 기상호는 찰떡같이 그 빌미로 알아듣고 좋아했다.

 

"와! 뱅찬햄과 우정 링이요? 제 룸메가 뱅찬햄 완전 팬인데 진짜 부러워하겠다. 진짜 저랑 하셔도 돼요? 저 이거 맨날천날 끼고 다니면서 자랑할긴데.“

 

병찬은 하하... 영혼 없이 웃으며 속도 모르고 낄낄거리는 놈 내버려 두고 반지 디자인이나 골랐다. 각인이 메인이고 가격도 가격이라 대부분 투박한 디자인이었지만 그래도 둘이 나누어 가지는 거니까... 최대한 예쁜 걸로 하고 싶었다. 운동하는 선수들이니까 두꺼운 것 보다는 얇은 거, 금색은 좀 촌스러우니까 은색... 요즘은 로즈골드가 유행이던가.

그렇게 집중하고 있으면 순간 다가오는 온기에 고개를 든다. 가까이 보기 위해 자연스럽게 제 어깨에 손을 올린 상태로 고개를 숙인 상호를. 제가 고개를 든 탓에 조금만 고개를 내밀면 이제는 살이 많이 빠진 그 뺨에 입을 맞출 수 있을 텐데. 병찬은 몸을 굳혔다가도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고개를 내렸다.

 

"오, 색 많다. 저는 은색이 좋대요."

"그래? 그럼 은색 할까. 링은 뭐가 좋아?"

"뱅찬햄 이름 크게 박고 싶은데... 이걸루?"

 

중간정도의 두께를 선택하는 것에 병찬은 순순히 끄덕인다. 요구사항을 말하고 먼저 결제를 한 뒤 각인을 기다리는 시간. 기상호는 꺅꺅거리며 이런 거 처음이라고 호들갑을 떨어댔다. 내 남사시르브가 희차이랑도 안 해봤는데 뱅찬햄이랑 다 해본다고 까르륵거렸다. 병찬도 하하 웃어주며 형도 이런 거 처음이라고 했다. 그래 상호야... 나도 시발 남자건 여자건 남이랑 이러는 거 처음이야... 뒷 말은 말 할 수가 없어서 병찬은 반지가 나올 때까지 그냥 계속 웃었다.

이어 각인된 반지를 받고, 자연스레 병찬이 제 이름 새긴 반지를 내밀자 상호가 신기하다는 듯 반지를 돌려본다. 와 뱅찬햄 반지. 하하, 웃으면서 병찬은 상호를 붙잡고 사람이 좀 적은 쪽으로 당겼다. 그리고선 그 반지를 잡고 상호의 왼쪽 손을 잡았다.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이미 반지가 있었는데, 병찬이 그 반지를 가만히 내려보다 아무렇지 않게 검지나 중지에 반지를 끼워줬다.

하지만 병찬의 수작으로 반지는 네 번째 손가락에나 맞았다. 저 커플링을 모를 리가 없지. 병찬이 골라준 것이다. 쓰린 마음으로도 상호의 손가락 치수를 물어둔 결과다. 상호는 헤어진 인연에 미련을 가지지 않는다. 금방 그 반지를 빼서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더니 병찬의 이름이 새겨진 반지를 순순히 받았다. 별 이유도 없겠지. 맞는 손가락이 거기였고, 상호는 지금 애인이 없고...

상호가 웃더니 병찬이 계속 들고 있던 제 이름 박힌 반지를 가져간다. 부드럽게 병찬의 왼손을 받아서 들고 왼쪽 약지에 끼워준다. 크기가 딱 맞았다. 상호보다 한 치수 작은 반지였다. 반지라곤 한 번도 껴보지 않아서 묘한 불편함이 있었는데 그것이 신경 쓰였다. 그 위에 박힌 이름 때문이겠지. 병찬은 입 안 살을 꾹 물면서 웃어 보였다. 괜히 했구나 하는 후회가 몰려온다.

 


 

기상호는 한동안 그 반지를 끼고 다니면서 병찬과 맞춘 우정 링을 동네방네 자랑했고 병찬은 자랑은 안 했지만 끼고 다녔다. 남자들끼리 뭐 그런 걸 맞추냐고 하는 것에 요즘엔 우정리의 유행이고 많이들 한다는 것을 피력한 상호 덕에 한동안 운동부 내에서 우정리의 유행했다. 이름까진 그랬고, 대충 준향대 농구부 따위를 박은 반지가 잇템이 되었다. 병찬은 그 흐름에도 기상호의 이름이 박힌 반지를 끼고 다녔다.

그리고 기상호가 애인이 생겼을 때, 자연스레 빈 기상호의 왼쪽 약지를 보고 저 또한 반지를 뺐다. 대신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예상한 일이라서 서운하진 않았는데 딱 반지만한 구멍이 심장에 생긴 것 같았다. 아 역시 괜히 했네... 안 했으면 이런 생각 안 해도 되는데. 애인이 생겼다고 제가 권하는 약속을 거절하는 상호의 카톡도 쌓이기 시작했다. 아... 병찬은 정말이지. 좀 피곤했다.

마음을 놓을 수 있으면 놓을 텐데. 모든 인간관계를 적당히 놓을 수 있을 만큼 유지하는 병찬에게 생긴 유일한 예외는 끔찍한 에러와 같았다. 병찬이라고 자신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이 싫겠나. 차라리 사랑이라고 착각하지 않았더라면, 동경임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병찬도 딱 그만큼만 잘해줬을 텐데. 딱 그 정도의 선을 지켰을 텐데. 병찬은 사랑을 갈무리하는 방법을 몰랐다. 한 번도 이렇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병찬은 상호와 맞춘 우정 링조차도 포기하지 못하고 숙소의 짐 사이에 넣어두었다. 고작 개당 1만원 짜리의 쇳덩어리인데도 상호랑 같이 맞춘거라서, 거기에 상호의 이름이 있어서 버리지 못했다.

병찬은 그 후로도 상호를 좋아했다. 그것은 아주 피곤하고, 또 힘든 일이라. 병찬은 도피하기 위해 자기에게 고백한 이를 받아주기도 했고 관심을 꺼보려고 약속을 많이 잡아보기도 했다. 일부러 연락을 씹어보기도 했고 상호가 줘서 소중히 간직했던 선물들을 모아, 차마 버리지는 못하고 어딘가에 처박아두기도 했다.

병찬이 그렇게 발악을 하면서도 상호는 계속해서 애인을 만났다. 차라리 만나는 애인이 아예 기대도 못 가지게 저와 정 반대면 좋을 텐데.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상호가 병찬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했다. 사귀는 애인들이 하나같이 병찬과 닮아있었으니까. 하지만 병찬은 알았다. 상호는 병찬에게 한 번도 애인이 되어주길 원한 적이 없었다. 오랜 기간 있으면서 상호가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대하는지 병찬은 아주 잘 알고 있어서, 착각도 못했다. 차라리 착각이라도 하고 있을 걸. 그랬으면 기다림이 조금은 행복했을까.

병찬은 언젠가부터 포기하는 마음으로 처박아두지도 못한 각인반지를 다시 끼고 다녔다. 겉으로 보이는 이름은 손가락 아래로 밀어 넣고 다녔다. 왼손 약지에 항상 끼고 다니는 투박한 반지를 보고 다들 농담으로 애인이 있냐고 물었으나 병찬은 그냥 작게 웃으면서 친구랑 맞췄다고만 답했다. 마음을 멈출 길이 없으니 그저 흘려보내는 수 밖에 없었다. 병찬은 발악을 멈췄다.

 

그 후로는 그저 버티는 나날이었다. 상호가 애인이 있을 때도 모른 척 떼를 쓰며 자신과의 시간을 주기를 종용했고 애인이 없을 때엔 상호의 시간을 모두 가지려 들었다. 그래도 너무 노골적이면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그 선은 적당히 지켰다. 이제 병찬은 상호의 마음을 얻는 것을 포기했다. 그저 연인이 되지 않더라도 분명 특별하다고 정의하기에 충분한, 제게 주는 호의를 좀 더 얻고 싶었다. 자신이 원한 특별이 아니더라도 상호가 제게 주는 것은 분명한 특별이라서.

어쩌면 나는 원하는 것을 완벽히 얻어내지는 못하는 모양이지. 병찬은 익숙하게 순응한다. 잡생각도 했다. 농구 하면서 이기는 건 세 번째인데 연애에서 그 자리에 들어가는 건 뭘까. 사귀는 거려나? 첫 번째는? 그것은 답해줄 사람이 없으니 영원히 모를 것이다. 병찬은 나름대로 결론을 내긴 했다. 첫 번째는, 대충 계속 얼굴 맞대고 보는 걸로 하자. 두 번째는 계속 좋은 사이로 있는 거지. 음. 사람이 미칠 것 같으면 이런 생각들도 하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병찬이 얌전히 있었다는 건 아니다. 나름의 개수작을 부리긴 부렸다.

 

"상호야."

"네?"

"너 취향 엄청 확고한 거 알아?"

"그렇죠? 저 딱 병찬햄 같은 사람 좋아한다 아닙니까.“

 

그걸 아는 새끼가 이러나. 병찬은 그때 고혈압으로 뒤질 뻔 했다.

 

"상호상호~ 형이 잘 놀아줘서 좋지?"

"네! 저 시간 빌 때마다 햄이랑 놀잖아요. 애인보다 형을 더 오래 만나는 것 같은데.“

 

이 때는 좀 죽고 싶었고.

 

"상호야. 형 너랑 맞춘 각인 반지 아직도 끼고 다닌다?"

"헉, 저두요. 애인 없으면 낄 반지도 없어서 그냥 햄과의 커플링 끼고 다녀요.“

 

이쯤 되면 박병찬도 이 새끼 뭐지 싶은 거다. 너 지금 그렇게 말하면서 뭔가 안 이상해? 딱 나 같은 사람 좋아하고 애인보다 더 많이 만나고 우리 같이 맞춘 반지를 애인 없으면 항상 끼고 다닌다는 거 안 이상하냐고. 박병찬은 지금 얘가 날 놀리나? 싶다가도 메가베스트프렌드를 보는 것 같은 눈을 마주하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이마나 짚었다.

하다하다 박병찬이 조심스럽게 용기를 낸 적도 있었다.

 

"상호야."

"네?"

"그냥 하는 말인데 주변 사람들이 그러더라~ 내가 하도 너 챙기고 너도 나 너무 좋아해 주니까 주변에서 사귀는 거 아니냐고 그러는 거 있지."

"헉, 진짜요. 병찬햄 앞길 막으면 안 되는데... 내 애인 있다고 좀 티 내고 다녀야겠네;“

 

욕을 안 하려 해도 안 할 수가 없다... 혹시나 싶어도 이렇게 나오니 병찬은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얘는... 날 죽어도 연애 대상으론 안 보려는 거구나. 그래서 병찬은, 그냥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억지로라도.

 


 

병찬은 정말 잘 버텼다. 기상호의 애인 상담도 맨날 들어줬고 고백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상담도 다 들어줬다. 술 처마시면 훈련 없는 날에도 나가서 끌고 와 제집에서 재웠고 아프다고 카톡 하면 간호해주겠다고 기어들어 갔다. 하지만 씨발 상대방과 잘 되어가서 어쩌면 결혼을 할지도 모른다는 소리는 참을 수 없었다. 그래, 병찬은 이제 30대를 넘은 지 오래고 상호도 30대가 머지않았다. 당연한 흐름인 거 아는데, 당연하다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다.

병찬은 그날 참지 못하고 몸 컨디션 망칠까 봐 자제하던 술을 진탕 처마셨다. 하필 주량도 세어 기절은 안 하고 머리만 존나 아팠는데 덕분에 기분만 더러워지고 그 상황을 잊지는 못했다. 결혼할지도 모른다던 사람이 누군지도 알았다. 그 사람도 직모에, 애매한 머리 길이에, 무쌍에, 잘 웃고, 활발하고,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고, 키가 크고...

솔직히 이쯤 되면 이게 거대한 몰래카메라가 아닌가 싶었다. 그 유명한 트루먼 쇼 같은 걸까? 어째서 나만? 상호가 사귀는 사람들만 보면 하나같이 병찬과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닮아있었다. 그럼 나를 사랑해도 되는 거 아니야? 남녀를 가리는 것도 아니었잖아. 그럼... 그럼 그냥 날 사랑해줘도 되는 거잖아. 왜 바로 옆에 있는 나는 안 되는 건데?

 

그래. 짝사랑도 10년 넘게 하면 사람이 진짜 미치게 되는 거다. 가망 없으면 모르겠는데 일부러 이러는 건지 묘하게 가망이 있어 보이는 상태면 더욱 더. 박병찬은 생각했다. 이건 고도의 심리전일 수도 있지. 얘도 이제 나이 먹을 대로 먹었는데 내가 얌전히 기회를 기다린 것 처럼 어쩌면 얘도 내가 고백하길 기다린 게 아닐까?

박병찬도 알았다. 행복회로를 넘어선 그냥 망상에 가까운 생각인 거. 그리고 이렇게 생각했다손 쳐도 결국 고백은 못 할 것이다. 병찬은 이제 상호가 주는 호의에 너무 길들여진 나머지 그것을 잃는 것도 무서웠으니까. 그렇다고 이제 얘 결혼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병찬은 이제 좀 더 진화된 방법을 쓰기로 했다.

별 거 아니었다. 그냥 본인도 선을 보는 거지. 미안하니까 자기한테 진심으로 관심 있는 사람과의 만남은 고사하고 집안의 성화로 아무나 한 명 걸려라. 같은 자세의 상대방을 구했다. 적당히 만남 좀 가지는 척 하다가 상견례하고, 집안 어르신들 다 허락하시면 결혼하죠. 상대방은 피곤한 낯으로 말했고 병찬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피성인 거 병찬도 알았다. 근데 어차피 상호 말곤 좋아하는 사람도 없었다. 근데 상호는 병찬이랑 절대 그렇고 그럴 사이가 되고 싶진 않아 보였고, 그럼 병찬도 언제쯤 손주를 보여줄 거냐는 부모님의 압박을 마냥 모른 체 하기는 어려웠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마지막 양심은 지켰으니까 그냥 그러려니 하기만 하면... 그러면, 되는 거였다.

병찬이 선을 본 이야기는 잘도 퍼져나갔다. 병찬이 숨기지 않고 말하기도 했고 30대 중반이나 되니 병찬의 결혼 혹은 열애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도 했다. 아주 소수의 몇몇은 선을 봤다는 이야기에 약간 당황하는 것으로 보였으나 병찬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병찬은 어쩐지 상호에게는 직접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퍼져나가는 소문을 보니 직접 말 안 해도 전해질 것 같았고. 그래, 그렇게 끝내는 거야. 상호라면 환히 웃으면서 축하한다고 말해주려나. 이제 와서 사실 고백을 못하고 있었다던가... 원래도 이런저런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갈수록 상상력이 늘어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병찬은 그냥 웃어넘겼다.

 

소식을 들은 상호는 간단하게 연락했다. 잘 되셨냐던가, 잘 맞으신다니 다행이라던가... 그런 말을 해주기에 병찬은 ㅋㅋ나 ㅎㅎ를 남발하며 꽤나... 좋은 상태라는 걸 어필했다. 상호는 거기에 같이 초성을 남발하며 축하해주었다. 그 답변을 보며 병찬은... 아 드디어 끝이구나. 라며 그제야 편히 미련을 놓았다.


 

관계는 착착 진행되어 상견례까지 무사히 마쳤다. 결혼식은 언제쯤이 좋을까 같은 것 따위를 조율해야 할 시기였다. 일단 병찬의 비시즌이어야 했고 그 기간 안에 상대방이 여유가 나야 했다. 그때가 언제인지를 따지니 내년으로 넘어갔다. 그럼 내년 2월에... 적당히 협의하고선 1년이나 남았으니 나머지는 여유롭게 처리하기로 했다. 박병찬은 늘어지게 누운 상태에서 생각한다. 결혼하면, 정말 되돌릴 수 없는 거겠지...

병찬은 휴대폰을 든다. 어제까지 주고받은 상호의 연락을 확인한다. 그것을 한참 내려보다가 병찬은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이 채 지나지 않고 딸깍,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병찬햄!"

"응~ 상호야. 오늘 시간 있어?"

"음... 네! 저녁에 약속이 있긴 한데. 늦은 시간이라 낮에는 괜찮아요."

"그럼 형 좀 도와줄 수 있어?"

"네! 햄이 부탁하시면 뭐든 되죠!“

 

활발하게 말하는 목소리에 병찬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꺼진 TV에 비친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으나 웃음소리 하나는 가볍고 즐거운 것 같았다.

 

"형 이제 결혼식 날짜도 잡았거든. 식장 좀 같이 보러 다녀주라."

그러니까, 박병찬은 정말 모든 미련과 기대를 버렸다. 정말로. 식장을 같이 봐달라고 한 것도 예비 신부께서 피곤하니 알아서 해달라고 한 것을 승낙했을 뿐이고 박병찬의 인맥 중에서 이 시간에 시간이 나는 건 같은 운동선수들 정도였으며 그중에서도 식장에 같이 가달라는 조금 애매한 부탁을 받고서 순순히 응해주고 떠들지 않을 사람은 많이 없었다. 그 몇 없는 선택지에서 가장 만남이 많았던 기상호를 고른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사심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나가면서 멋진 옷을 몇 번이고 고르고 상호가 좋다고 했던 향수를 뿌린다고 해서 절대 별 맘이 있었던 게 아니다. 그냥, 이왕 만나는 거 좀 멋있게 보이는 게 좋으니까. 가는 곳이 식장이기도 하고. 그냥. 정말 그냥. 그렇게 보러 간 상호는 이제 어른이라고 멋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고 습관처럼 제게 가까이 서서 걸었으나 그 모든 게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다. 진짜로. 걔를 데리고 가서 한 게 서로 사랑하지 않는 형식적 예비 신부와 결혼할 식장을 고르는 것인 것도 아무렇지 않았고 뷔페를 먹어보면서 여기 진짜 맛있네요. 라며 속 편히 웃는 상호의 얼굴을 보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고 남이나 마찬가지인 친한 형의 식장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골라주는 상호를 지켜보는 것도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끝나고 약속이 있다며 미련 없이 떠나는 상호의 뒷모습을 보면서 흔들어 보이는 왼손에 투박한 반지가 아니라 멋들어진 반지가 끼워져있는 걸 확인하면서도 병찬은 아무렇지 않았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너무 아무렇지 않아서 병찬은 집에 돌아와서 멍하게 있었다. 나 이제 진짜 마음을 놓은 건가보네. 새삼스레 자각하는 것이 조금 웃긴가 싶었다. 병찬은 손을 들어 제 왼손에 끼워진 예비 신부와의 커플링을 본다. 하도 끼고 다녔던 투박한 반지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제야 끝이구나. 상상했던 것보다 홀가분하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그냥 뭔가 엄청 허전해서... 병찬은 눈을 감았다.

 

드레스도 입어 보고 병찬이 고른 식장 중에서 어디로 할지 확인도 하고. 병찬은 시즌 중에서도 시간을 내어 일정을 맞추었다. 차근차근 진행이 되고, 결혼식 날짜를 확정 받았다. 몇 달 후면 결혼이었다. 슬슬 청첩장을 돌려야겠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며 만든 청첩장을 들여다본다. 벌써 돌리면 귀찮으니까 나중에 돌려요. 그리 말하는 것에 병찬은 알겠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하는 결혼식이라 그런가 별로 내키지 않은 모양이었고 병찬도 같은 사정인지라 별로 문제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완성된 청첩장은 병찬의 집에 일단 쌓아두었다. 나눠줘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청첩장 하나를 펼쳐본다. 신랑 박병찬, 신부... 병찬은 청첩장을 들고 있다 휴대폰을 꺼낸다.

 

[상호야. 오늘 시간 돼?]

[네! 저 마침 오늘 쉬어요.]

[다행이다. 만날까? 줄 거 있거든.]

 

약속은 빨랐고, 병찬은 느긋한 걸음으로 나갔다. 더 이상 과하게 꾸미지는 않았다. 약속 장소에는 언제나처럼 상호가 있었다. 바로 카페에 들렀고 병찬은 청첩장을 꺼내어 내민다. 상호가 순간 환하게 웃는 것을 보며 병찬도 환하게 웃었다. 청첩장을 집어 드는 모습을 보다 버릇처럼 상호의 왼손을 본다. 전에 봤던 커플링은 어디 가고 투박한 반지가 끼워져있었다. 그새 헤어졌나 보구나.

시선을 올리면 상호의 얼굴이 보인다. 아까까진 환하게 웃어놓고서... 왜 저런 표정을 하지. 병찬은 기묘한 감각을 느낀다. 상호는 한참 동안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청첩장을 내려보다가 두 손을 마주 잡더니 반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저 버릇을 병찬은 안다. 초조할 때에 가끔 튀어나오는 버릇이었다. 가령, 애니나 영화를 보다 좋아하는 주인공이 열세에 몰렸을 때라던가...

상호가 시선을 올린다. 당황스러움이 가득한 와중에도 입꼬리를 올려 환히 웃어 보이려는 모습이 정말 안 어울려서. 그런 와중에도 상호는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해요 병찬햄! 그, 이제. 결혼 하시네요. 그 분이랑은 잘 맞으세요?“

 

병찬은 웃지 않고 상호를 쳐다본다. 아까부터 뇌를 쿡쿡 찔러대는 느낌이 났다.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따지면 괜찮긴 했는데 지금 제 앞의 저 개새끼를 마주하고 있으려니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것이 있었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따지지 않고 병찬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호야, 너 지금 표정이 왜 그래?"

"네?"

"네 표정 좀 봐봐.“

 

당황하여 휙휙 돌아가던 눈동자가 마침 병찬의 뒤에 있던 거울에 닿는다. 어딘가에 몰린 사냥감처럼 초조함이 가득한 얼굴을 마주하자 상호의 얼굴이 깨지기 시작했다. 어쩔 줄 모르며 그제야 자기 잘못을 직시한 사람처럼 경악에 빠지는 꼴을 보며 병찬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상호는 한참 어버버 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더니,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뱉는다.

 

"죄송해요... 형을 좋아하나 봐요...“

 

그 말을 들은 병찬은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냥 한참을 침묵했고, 상호가 흘끔 눈치를 보다가 슬쩍 일어나려고 하는 것을 보며 꿈에서 막 깨어난 사람처럼 붕 뜬 목소리로 말했을 뿐이다.

 

"이제 와서?"

"...형, 제가 실언을 했으니까 없던..."

"씨발."

"에?"

"이제 와서?!?!?!!!!!!!!“

 

그래. 아까까진 화를 안 냈는데 이젠 존나 냈다. 기상호의 멱살이 잡혀서 흔들린다. 카페 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 꼴을 경악하며 봤고 몇몇은 휴대폰을 꺼내어 전화를 하기 시작했다. 병찬은 열이 뻗쳐서 주먹을 들었다가 형! 저 패시면 징계 먹어요! 라며 그 손목을 절박하게 잡아 오는 탓에 휘두르진 못했다. 아수라장이 지나가고 결국 경찰이 친한 사이끼리의 사소한 다툼 정도로 처리하고 돌아간 뒤, 둘만 남은 상황에서야 병찬은 마저 말했다.

 

"상호야."

"넵."

"생애 처음으로 널 죽여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연락할 때까지 쥐 죽은 듯이 있어."

"...넵.“


기상호, 30세. 주변 사람들이 똑똑하다, 눈치 좋다, 머리 좋다. 이런저런 말 해줄 때에 지상고 감독이었던 이현성이 해준 말이 있다.

 

"호야, 니는 가끔 니 자신을 너-무 몰라서 남 깝깝하게 만들 때가 있다. 응? 알았제. 사람이 가끔은 자기자신도 돌아봐야한다. 생각날 때마다.“

 

좋은 말이다. 실제로 기상호는 가끔 그 말을 생각하며 자기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나름 가져봤다. 하지만 중요한 점 하나. 사람은 무언가 배우고 알아차리고 싶어도 자기가 뭘 모르는지를 모르면 그것 또한 요원한 일이라는 것. 그렇기에 선생이 있는 것이고 학원이 있는 게 아닌가. 근데 자기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알려주는 참어른은 만나기 힘들고 그게 심지어 연애면으로 가면 정말로 만나기 힘들다.

맹세컨데 기상호는 박병찬을 엿먹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정말 안타깝게도. 동경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했을 뿐이다. 기상호에게 박병찬이라는 사람은 너무나도 멋있고, 강렬하고, 빛나면서 그 누구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 자기 감정이 그런 것들과 궤가 다르다는 것을 눈치를 못챘다. 다른 이에게서 병찬을 비추어 생각해내면서 닮았다는 건 인지했는데 그 모든 것을 취합하여 아, 나는 병찬햄을 사랑하는구나! 하는 게 아니라 와 나는 무쌍에 직모에 머리길이는 애매하고 자기 일에 열심히면서 키 크고 비율 좋으며 몸도 좋은 사람을 좋아하는구나! 로 귀결되었으니 그 대가리 굴러가는 꼴이 알만하다.

동경이라 마음을 단정지어놓으니 애인과 헤어져도 헤어짐이 하나도 안 아쉽고 병찬과 놀 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기뻐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도 못했다. 그냥 평생 병찬의 옆에서 친한 동생으로 있고 싶다고. 대충 그런 생각이나 하고 살았는데.

 

우습게도 결혼식장을 둘러보면서도 기상호는 아무 생각이 안 들었다. 그냥... 결혼식장에 서 있는 병찬햄이라니. 정말 엄청 멋지고 잘생기고 성스럽다... 따위의 생각만 했다. 그 옆에 얼굴도 모르는 신부의 존재는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저를 향해 웃어주는 흰 정장의 박병찬만 떠올리고 있으면서 그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은 온전히 기상호의 잘못이겠다.

청접장을 받고서야 머리 속에 경종이 울렸다. 정말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는데, 신랑 박병찬 적혀있고 그 밑에 신부라고 적혀있는 거 보자마자 머리가 굳었다. 뭔가 잘못 된 것 같은데 그게 뭔지도 모르겠어서, 순간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상호는 굳었다. 떨리는 손을 어떻게든 감춰보고자 청첩장은 내려놓고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병찬과 맞췄던 반지를 묵주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만지작거리다 병찬과 눈이 마주치면, 어떻게든 넘어가고자...

 

"축하해요 병찬햄! 그, 이제. 결혼 하시네요. 그 분이랑은 잘 맞으세요?“

 

기상호는 자기 마음은 눈뜬 장님 수준으로 몰랐으나 남의 반응은 기가 막히게도 잘 알았다. 기상호는 생각했다. 병찬햄. 지금 진짜 존나게 화난 것 같은데. 어째서...? 내가 너무 당황해서 그런가. 친한 후배한테 와서 직접 줬는데 제대로 말도 못해서 그러나. 어떻게든 수습하고자 입을 어물거리는데 병찬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호야, 너 지금 표정이 왜 그래?"

"네?"

"네 표정 좀 봐봐.“

 

보통 때라면 아무렇지 않게 휴대폰으로 제 얼굴을 봤겠으나 너무 당황한 머리는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병찬의 뒤에 거울이 있어서, 제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그렇게 제 얼굴을 똑바로 직시하고서야 상호는 깨달을 수 있었다. 나, 병찬햄 엄청 좋아하는구나. 결혼한다는데 축하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해줄 수도 없구나. 시작도 못 했는데 끝났구나... 말을 하면 안 됐는데, 와중에 병찬의 얼굴이 답을 요구하는 것만 같아 상호는 결국 기어가는 목소리로 진실을 고한다.

 

"죄송해요... 형을 좋아하나 봐요...“

 

그 다음은 경찰 엔딩.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는 병찬의 표정에는 한 점 거짓이 없어서 상호는... 슬퍼하거나 절망도 못하고 덜덜 떨면서 돌아왔다. 아마 거기서 말 더 하면 병찬이 저를 진짜 죽여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들어와서 곰곰히 생각해보았으나 자기자신의 마음을 그런쪽으로 들여다본 적 없는 상호는 제가 대체 언제부터 병찬을 좋아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어느정도 짐작을 해보자면 어느 시점부터 마치 그린듯이 병찬을 닮은 이들만 골라 사귀었더라. 물론 그 때 사귀던 애인과 깨어지고 나서 새 사랑을 찾을 때였고 그 애인과 헤어진 이유도 자기한테 마음이 식어서였으니 정말 딱 짐작만 가능한 시기였다. 와, 나 좀 쓰레기 같은데.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아서 기상호는 제 뺨을 한 번 내리쳤다.

그러고보면 언제부턴가 애인들에게 줄기차게 차였었는데 차인 이유가 잘 대해주긴 엄청 잘 대해주는데 어쩐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였지. 당시에는 헤어지고 싶어서 별 이유를 다 대는구나 싶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들이 정말 날카롭게 제 마음을 눈치챈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당시의 기상호는 정말 상대방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자기자신은 정말 남이 더 잘 아는 걸까.

기상호는 밀려오는 업보에 죽을 것 같았다. 자기 맘 모르겠다고 엿먹인 게 몇 명이야? 다들 나 같은 걸 왜 받아줬지?(존나게 잘해줬으니까...) 아니 근데 병찬햄 어쩌냐고... 병찬은 여전히 연락도 안 주고 있었다. 청첩장에 적힌 날짜는 아직 한참 남았지만...

...죽어야하나? 몰린 머리는 되도 않는 답을 내놓는다. 이제와서 병찬을 좋아한다고 고백해서 무엇이 달라지나? 몇 달 후면 결혼을 한다는데. 결혼식장도 이미 예약했을거고 저 말고도 다 나눠주고 다녔을텐데. 결혼식까지 잡은거면 상견례 같은 것도 모두 했을 것이 뻔하다. 그럼 뭐... 기상호가 이제와서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게 뭐가 달라지지?

여기까지 생각한 기상호는 머리를 쥐뜯었다. 병찬의 말과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제까지 그런 쪽으로 생각을 안 해봐서 몰랐지만 아마 병찬햄도 나를 좀 좋아하고 있었겠지? 그래서 좋아한다고 말했을 때 그렇게 화를 내고 이제와서 그런 말을 하냐고 소리를 질렀겠지. 근데 그런다고 뭐가 바뀐다는 말인가... 기상호는 차라리 지금 콱 심장마비로 죽고 싶었다...


 

기상호가 지랄을 하든 말든 박병찬의 상황도 그리 좋지는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하고 같잖아서, 기상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알자마자 뭐든지 괜찮았던 병찬은 한순간에 모든 게 좆같았다... 개새끼. 뒤늦게 알았으면 입이라도 닥치지. 그랬으면 병찬도 모른 척 하고 영원히 괜찮은 상태로 적당히 효도하고 남들 앞에서 건실한 남편으로 그럭저럭 살았을 거 아냐. 하지만 이게 다 기상호 탓은 아니다. 박병찬도 기상호 하는 꼬라지보고 외면할 수 있었는데 굳이 왜 그러냐고 그 얼굴 직시하게 만들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과실은 기상호가 95%정도 된다고 생각했다. 하다못해 결혼식장 예약할 때라도 말했으면 몰라. 이왕이면 내가 선 보기 전에나, 아니면 프로 입단 전에... 대학교 때... 병찬은 허공의 기상호를 개처럼 패는 상상을 하며 눈을 꾹 감았다. 아직 괜찮은 매물을 못 찾았고 서로 딱히 동거를 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라 따로 사는 게 다행이었다. 이런 상태로 마주하면 너무 미안해서 무릎이라도 꿇을 것 같으니까.

 

그래서 이제 어쩐다. 마음은 알았는데 와! 사실 상호랑 내가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다니 짱이다~! 하면서 덜컥 모든 걸 파토내는 건 당연히 미친 짓이었다. 당연하지 시발... 이미 상견례도 마치고 결혼식 관련해서 조율도 마쳤다. 다행히 흥미없으신 예비신부께서 아직 청첩장은 안 나눠줬다지만 결혼 확정 난 건 집안 어르신은 물론이고 병찬의 주변인들과 아마 예비신부 주변인도 몇 명은 알고 있을거다. 이제와서 사실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고 바람맞히기? 개같이 까이고 이제까지 병찬이 쌓아놓은 좋은 이미지는 다 날아갈 것이 자명하다.

본인의 이미지를 뒷전으로 둬도 죄없는 예비신부가 당할 수모와 모욕을 생각하면 차마 그만두자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남편이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서 결혼식 전에 파토냈다. 아마 남의 이야기로 들으면 그 남편 새끼 미친 거 아니냐고 같이 입을 털어줬을 것이다. 씨발새끼 진짜... 하다 못해 식장 잡기 전에라도 알아차렸어야지 십새끼야... 병찬은 정말 울고 싶었다. 기상호를 짝사랑하는 내내 사랑이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진창에 처박히는 상황까지 겪어야했을까? 병찬이 뭘 잘못해서? 고작 사람 하나 사랑한 죗값이 너무 거대하고 좆같았다... 대체 내가 뭘 잘못 했는데?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나? 화려하게 양다리라도 걸쳤냐고...

 

병찬은 고민을 정말 많이했고, 그날 바로 결심을 했다. 왜냐면 마음을 접기에는 눌러놨던 미련이 철철 흘러나와서 도저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 예비신부에게 연락을 한 것이다. 원래도 살갑게 안부인사 주고 받는 사이가 아니었던지라 바쁘냐고 연락을 보내니 무슨 일 있냐는 답변부터 왔다. 한참 할 말을 고르다가 병찬은 눈 꾹 감고 문자를 보냈다.

 

[혹시 결혼을 무를 수 있을까요.]

 

개미친사랑때문에 별 일을 다 하는구나... 이런 수모는 기상호가 겪어줘야하는 거 아닌가? 병찬은 이 모든 상황이 그냥 다 불합리하게만 느껴졌다. 그 와중에 예비신부는 문자를 본건지 만건지 답변이 없어서 병찬은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만약 못 무른다고 하면? 별 수 있나. 애초에 사랑을 기반으로 한 결혼도 아니었고 저쪽이 약속한 거 지키라고 하면 할 말이 궁하다. 개미친기상호... 안 된다고 하면 일단 진짜 몇 대 쳐야지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만나서 이야기해요.]

 

땅파는 동안 온 답변을 보고 병찬은 제 머리를 꽉 쥐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일은 기상호가 대신 겪어줘야하는 거 아닌가? 뒤늦게서야 차라리 모르는 체 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몰려왔다. 열심히 살아온 인생이 대차게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무리 기상호 탓을 해도 결국 시작은 자신이 했다는 점이 가장 죽고 싶은 점이다. 내가 이렇게 답도 없이 충동에 몸을 맡기는 사람이었나? 하지만 병찬은 이미 질렀다. 이제와서 농담이니 실수이니 미룰 수도 없는 일이다. 병찬은 마른 세수를 하고 일어났다. 뭐가 되든 안 되든 개미친기상호는 오늘 죽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결혼식은 파토났다. 그 과정이 그다지 길지도 않았다. 찾아온 예비 신랑을 소파에 앉혀두고 맞은 편에 다리를 꼰 채 소파에 푹 몸을 묻은 예비 신부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기어가는 목소리로 구구절절 설명하는 사정을 모두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예비 신부는 말했다.

 

"그러니까 지금 당신이 10년의 짝사랑 상대에게 드디어 고백 받아서 저랑 하는 결혼을 깨고 싶으시다고요?"

"... ... ... ... ... ... 네."

"그것 참 대단하신 사랑이네요.“

 

병찬은 할 말이 없어서 계속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병찬도 같은 감상이었기 때문이다. 다 말하고나서도 병찬은 후회했다. 그냥 입 다물고 잊은 다음에 적당히 살아갈 걸 싶을 정도로. 근데 일단 저질렀으니 처분은 받아야지. 예비 신부는 그 후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병찬은 은근슬쩍 고개를 들면서 안색을 살폈는데 화가 나거나 실망했다기보다는... 무언가를 계산하는 것 같은 모습에 얌전히 있었다. 그의 성격상 득실을 따지고 있는 것이 뻔했음으로.

한참의 침묵 후에 예비 신부는 말했다. 어차피 둘 다 그다지 원하지 않던 결혼, 깨도 별로 아쉽지는 않다고. 하지만 이 경우 병찬의 과실 100%였으니까 생길 손해는 다 책임져달라고 했다. 병찬은 당연히 그러려고 했기 때문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요구한 조건은 세 가지였다. 결혼식에 든 비용은 다 병찬이 부담할 것, 또한 이 후에 또 선을 보라하면 굉장히 귀찮으니까 당신을 좀 나쁜 남자로 만들어서 마음에 상처 받은 티 좀 내는 걸 묵인해줄 것(선수 생활에 과한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또한 그 사랑하는 사람하고 바로 사귀면 자신이 우스워지니까 사귀는 티는 적어도 1년은 지난 뒤에 해줄 것.

솔직히 말하자면 자비로운 처사였다. 돈을 내놓으라고 대거리를 해도 병찬은 할 말이 없었을텐데 손해만 무마해달라고 했으니. 오히려 기분이 좋아보이기도 했다. 그대로 결혼하면 나름의 의무를 다해야할텐데 병찬을 팔아서 안 해도 된다는 사실이 꽤 득이 된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어지간히 쓸데없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병찬은 그냥 그 앞에서 계속 네. 라는 말 밖에 못했다. 합의가 끝난 뒤에 가져온 것은 종이다. 위의 조건들을 적어두고 서로 이름 적고. 꼼꼼하게 두 장 써서 내미는 것에 병찬은 얌전히 사인하고 받아들었다.

그러고나서 받은 것은 축객령이라. 피곤하니 빨리 돌아가달라는 말에 병찬은 그대로 쫒겨나왔다. 원하는 건 얻었는데 일단 좀 비참했고, 한 편으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긴장했던 것보다야 좋은 결과였지. 효도는 좀 실패했지만, 뭐. 속 많이 썩였어도 이제 억대연봉 가드니까 노후 걱정은 안 시켜드릴 수 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달성한 게 아닐까? 병찬은 개잡소리를 생각하며 하하 웃었다. 그냥, 웃음이 좀 났다. 사람이 죽고 싶으면 그렇게 된다.


 

 

어쨌든 황당할 정도로 간단히 정리가 되었다. 병찬은 일단 집에 돌아왔고 그 다음엔 가만히 누워있었다. 인생은 역시 드라마가 아니다. 상호랑 사귀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없어졌다고 해도 대책없이 기쁘진 않았다는 뜻이다. 이 후 받게 될 질책은 신경도 안 썼다. 이참에 하자있다고 소문나서 선 못 보는 건 나쁘지 않았거든. 상호가 아니었어도 결혼에 뜻이 없었던 건 마찬가지라서.

근데 그냥... 현타가 진하게 왔다. 아마 눈 앞에 기상호가 있었다면 몇 대 팼을 정도로. 사람이 일정이상 감정이 몰리면 폭력성이 나타난다던데 그게 아마 진짜였던 것 같다. 맘 같아선 불러서 패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둘 다 어떤 의미로든지 출전 정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병찬은 그냥 천장이나 쳐다보다가 잤다. 딱히 오늘 말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자고 일어난 뒤 스트레스가 어느 정도 씻긴 깨끗한 뇌로 박병찬은 전화를 걸었다. 새벽 시간이었으나 잠깐 기다리면 잠에서 덜 깬 듯 가라앉은 얼빠진 목소리가 들렸다.

 

"ㅂ...병찬햄?"

"상호야."

"네, 네..."

"나 결혼 깼다?"

"...네?"

"결혼 깼다고."

"...상견례까지 다 하셨다고..."

"그래, 이 새끼야."

"..."

"상호야, 아직 나 좋아하지?"

"네? 그, 어..."

"너 나 좋아해야해."

"에? 네...?"

"안 그럼 내가 너 죽여버려야하니까...“

 

스트레스가 깔끔히 씻긴 깨끗한 뇌라고 멀쩡하다는 뜻은 아니다. 잠에서 막 깨어난 뇌는 필터링 기능이 좀 덜 켜진 면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박병찬은 뇌를 거치지 않고 말했다. 평소에 상호 앞에서 잡던 가오고 나발이고 다 내려놓고 진심을 담아 이 악물고 짓씹듯이 말했다는 뜻이다.

 

"내가 시발... 너 사랑한다고 결혼까지 깼는데 네가 날 안 사랑한다고 하면 죽여버려야지. 그치?"

"...햄, ㅎㅐㅁ... 저 진짜 햄 사랑해요...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제발...“

 

얼마나 진심이 담겨 있는지 상호는 덜 깬 정신이 또렷해지다 못해 당장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감각을 느꼈다. 여기서 장난이라도 안 사랑한다고 하면 아마 1시간 후에 (둘의 집 거리가 택시타고 그 쯤 됐다) 병찬이 칼을 들고 문 앞에 서있을 것 같다고 생각함과 동시에 문을 열어주자마자 죽은 눈으로 웃고 있는 병찬이 머리 속에 선명히 떠올랐을 정도니 그 공포도 알만하다.

그리고 또 한 편으론... 정신 못 차리고 웃음을 꾹 참기도 했다. 기상호가 그랬다. 현실주의자인데 애매한데서 뇌가 좀 가벼웠다. 박병찬이 기상호보다야 낭만을 좀 찾았기만 어쨌든 어른이라 현실을 재는 것에 익숙했다. 근데 그런 사람이 자기 때문에 결혼식까지 파토냈다고 하니까 좀... 엄청 와닿았다고 해야하나. 기상호라면 박병찬의 상황에서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했을 때 바로 확답은 안 나온단 점에서...

물론 기상호는 뇌는 가벼워도 눈치는 가볍지 않기 때문에 입으로 내뱉은 것은 이제까지 자신이 얼마나 멍청했었는지, 그리고 자신이 얼마나 병찬을 좋아했는지를 절절히 깨달았는지 따위를 말했다. 여기서 좋아하는 티 내면 이제 다른 의미로 저를 죽이러 올 것 같았다. 정말 다행이게도 점점 잠에서 깨는 건지 아니면 기상호의 살아남기 위한 생존성 애교가 통한건지 박병찬은 조금씩 진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저지르기 전이면 모를까 이미 저지른 일에 오랫동안 열내는 사람이 아니기도 했고.

결국 한참 기상호의 세레나데를 가만히 들어주던 병찬은 그만 말하라고, 그대로 좀 더 자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기상호는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살았다... 이제 좀 더 자도 되겠지? 그러고 가만히 누워있다보니 점점 현실감이 돌아온다. 잠도 깼고 멍한 정신도 가만히 있으니 살살 돌아왔다. 공포에 질렸던 정신도 가라앉으니 문득 병찬이 결혼을 깼다고 했던 말이 확 와닿는다.

병찬햄... 미쳤나? 확답이 안 나오는 게 아니다. 기상호면 후폭풍이 무서워서 못 깼다. 그거 듣고 기분 좋아했던 본인도 어지간히 미친 새끼였다. 돌았나? 뭘 좋다고 웃어... 병찬햄이 만약 결혼을 깼다가 아니라 깰까? 라고 물었으면 냅다 그러지말라고 매달려야할 사안인데 이쪽도 어지간히 뇌가 풀린 상태였었다. 기상호는 뒤늦게 몰려오는 현실감에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을 깨문다. 어떤 현실감이었냐면, 감히 자신이 박병찬의 인생에 조금이나마 구김을 줬다는 사실에 대한 현실감이었다. 기상호 미친새끼... 차라리 그 때 입을 다물었어야했는데... 미친, 미친 새끼!!


 

하지만 기상호도 박병찬도 미친 새끼가 맞았다. 둘 다 이미 벌어진 일에 과하게 매달리지 않는 점도 비슷했다. 병찬은 이미 질렀으니 뇌를 비웠고 상호 역시 이미 일이 일어났으니 오래 생각 안 했다. 청접장을 받은지 3일 만에 둘은 다시 만났다.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할 얘기는 아니라 병찬이 상호의 집으로 갔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피할 길이 없으니 병찬은 그냥 환히 웃었다. 기상호는... 자기 이야기였으면 웃었을텐데 일단 남의 이야기라서 웃지는 않고 담담하게 문 열어줬다. 흘끔 보니 두 손이 깨끗해서 혹시나 그 사이에 미쳐가지고 죽이려들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지 혼자 빡치고 현실 좀 부정하고 죽을까 고민하다가 속으로 기상호 좀 죽이기를 몇 번 반복한 박병찬은 평화로웠다. 진짜로.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하나 뿐이다.

 

"상호야."

"네."

"형 아직 좋아하지?"

"넵. 완전 사랑하죠. 이제까지 어떻게 햄 좋아하는 걸 몰랐는지 저도 놀랍습니다."

"나도 놀라워 이 개새끼야."

"넵..."

"이제 너는 내가 헤어지자고 할 때까지 못 헤어지는거야 알았어?“

 

박병찬은 협박조로 말했지만 그걸 듣는 기상호는 그야 전 땡큐죠. 같은 생각이나 했다. 여전히 눈치는 좋아서 말로는 안 했다. 기상호가 보기에 박병찬은 아직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지간히 자기 인생 스스로 살살 말아먹은 것이 충격이었나보다. 햄 평소 하는대로 였으면 지금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와인 한 잔 때리고 집 앞에서 달큰하게 말해줬을긴데 이러는 꼴 보면 뭐...

근데 나쁘진 않았다. 이게 원래 박병찬 성격이니까. 제정신이 아니지만 엄청 진실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지. 지금까지의 행동으로도 충분히 증명해줬지만 병찬햄은 진짜 내를 죽도록 좋아하나부다 싶었다. 역시 뇌 굴러가는 꼴이 가관인 기상호다운 필터해석이었다. 우습게도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박병찬이 머리 빙글 돌아서 결혼식 파토내고 사랑한다고 찾아올 정도로는 사랑했으니 보통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

솔직히 기상호는 이정도의 사랑은 쪼매 부담스러웠는데 그 사랑의 주체가 병찬햄이라니까 뭐... 괜찮은 것 같?기도하고? 일단 나쁘지 않았다. 자각만 못했다뿐이지 병찬을 사랑한 게 적어도 10년은 넘은 것 같았거든. 영원한 사랑 같은 건 안 믿었는데 이제까지 사랑하고 있는 꼴 보면, 그리고 박병찬이 자기 좋다고 하는 거에 좋아죽을 것 같은 거 보면 쉽게 식진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기상호는 제 앞에서 정신 나간 얼굴로 웃고 있는 박병찬 보면서 웃었다.

 

"웃어?"

"햄이 내 좋다니까 너무 좋아가지고...“

 

병찬도 이 말에 순간 아무래도 좋은가? 같은 생각이나 했다.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병찬도 이렇게까지 사랑해본 건 진짜 처음이었다. 혹여나 자신이 가지면 식는 타입일까 마음이 선득했는데 때려 죽이고 싶다가도 저 말 한 마디에 기분 좋아지는 꼴 보니 아마 그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 이미 일은 일어났는데 평생 얠 죽여말아 하고 살 수는 없잖아. 병찬은 상호 빤히 보다가 이리오라고 팔 벌려보였다. 그러니까 눈치 좋은 녀석이 일어나서 병찬의 옆에 앉아 앵긴다. 가만히 그거 안아주면서 병찬은 다시 한 번 확인하듯이 말했다.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면 넌 죽었어."

"햄이야말로 저 먼저 버리시면 저주인형처럼 들러붙을테니까 후회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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