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뱅]그것은 본디

글리프 주간창작 주제 : 잊혀진 ■■■

※ 농구하는 종수 X 인어병찬

※ A님께서 주신 인어소재 빌려서 썼습니다 감사합니다!!!!(인어뱅/아가미 키스/둘만의 욕조)

※ 인외? 처음 씀.. 잘 몰라서 ㅈㅅ합니다

※ 주제 : 잊혀진 ■■■

※ 공백포함 39,000자


종수가 스물 살이 된 새해 첫 날. 할아버지의 젊은 비서 이태영이 종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마침 침대에서 자고 있던 종수는 눈을 부비며 시계를 확인 후 전화를 받았다. 오전 11시가 넘었다. 전화 너머 이태영은 연말행사 때 종수와 눈인사를 했었던 일을 완전히 잊은 사람처럼 반가운 목소리였다.

“오랜만이에요, 종수 군. 생일이 어제였죠. 생일 축하하고 또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눈도 제대로 못 뜬 종수는 이태영의 말이 끝나기 전에 수면모드로 가라앉은 모든 뇌세포가 떠오르길 기다렸다. 이태영은 종수가 열 살 쯤에 이미 성인이었다. 그 때엔 이태영의 아버지가 종수의 할아버지인 J그룹 최회장을 모시고 있었다. 종수가 중학교 재학 중에는 이태영이 제대를 했고 그 다음부터는 변호사 자격증을 공부한다고 하더니 2년 전부터 자연스럽게 할아버지를 모시는 이 비서가 되어 있었다. 이태영의 가족들은 세대를 거쳐서 J그룹 회장의 비서를 도맡아하는 사람들이었다. 매년 연말이 되면 종수네 모든 식구와 이 비서의 식구들, 그리고 할아버지의 오랜 담당 주치의인 이 선생의 식구들까지 모여 식사를 했다. 그러므로 이태영은 학생 때부터 줄곧 어린 J그룹 회장의 손주인 종수와 만났다. 매해 연말에 종수가 자라는 모습을 봐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는 ‘종수 군’이라고 불리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이태영의 입에서 흘러나올 ‘종수 씨’ 보다는 나았다. 아직 종수는 어른스럽게 불리는 일에 익숙치 않았다. 머리털이 바짝 곤두섰지만 잠에서 막 깨어난 목소리를 감추지는 못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전화를 받은 종수는 허리를 곧게 세워서 한꺼번에 말했지만 뻣뻣하고 나사 빠진 대답이었다. 이태영은 전화 너머 웃음기 남은 목소리로 바로 본론부터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 3월 첫째주 일요일에 시간 괜찮아요? 일요일에 보통 교회 다니던가?”

“3월이요?”

1월 첫날에 전화해서 3월 스케줄을 묻는 사람이 어디 있나. 종수는 비서들은 원래 이렇게 계획 구간이 넓은가 싶어서 또 바보 같이 물어봤다. 이태영은 차분하게 또박또박 대답한다.

“네. 3월, 첫째주, 일요일.”

“아…… 아뇨. 괜찮, 괜찮을 거예요.”

“대학교는 미국으로 유학 가기로 했던 것 같은데. 맞죠?”

“네.”

잠이 덜 깬 종수를 내버려두고 이태영은 자신이 할 말을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그럼 일정이 제법 넉넉할 것 같네요. 종수 군의 고조할아버지의 별장 상속 건으로 그 때 만나야 할 것 같아서요. 혹시나 그 날 다른 일정이 생기면 연락줘요. 3월 1일에 다시 연락할게요.”

“네에…….”

1월 1일에 3월의 스케줄을 잡는 이태영에게 맥이 빠져 종수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이태영은 한겨울이니 따뜻하게 하고 다니고 즐거운 한 해 보내라는 말을 남겼다. 종수가 뭐라고 답하기도 전에 산뜻하게 전화가 끊어졌다. 종수는 황당하여 홈 화면으로 되돌아오는 핸드폰 액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스케줄 어플을 열었다. 작년까지 장도고 농구부 주장을 맡았던 터라 부원들에게 경기 일정이나 훈련일정을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과거 일정이 빠듯하게 적혔던 스케줄 어플이었다. 3월 첫째주 일요일에 ‘이 비서님이랑 약속’이라고 꼬물꼬물 적어두고는 다시 누웠다. 베개 옆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았다.

종수는 그날 저녁에 부모님이 돌아오시길 기다렸다. 연말연시에는 갓 성인이 된 스무살 종수 보다 부모님이 더 바빴다. 종수는 저녁 늦은 시간에 부부동반 모임을 마치고 온 아빠에게 다가가 ‘고조할아버지의 별장’을 아는지 물었다. 아빠는 눈을 둥그렇게 뜨며 고개를 끄덕이다 또 묘한 얼굴로 종수를 보았다.

“그걸 종수 너를 준대?”

“응.”

“오, 진짜?”

“그렇다는데요.”

“흐음.”

아빠는 더 말이 없었다. 세수를 끝마친 엄마가 다가와 “둘이 무슨 이야기해?” 하고 묻자 아빠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으응, 종수 미국 가기 전에 아빠랑 아들이랑 오붓이 술이나 한 잔 마시자고.” 하며 태연하게 거짓을 말했다.

*

이태영은 1월에 전화를 걸었던 때의 약속처럼 3월 1일에 메시지를 통해 일방적인 통보를 보내왔다. 자신이 차로 데리러 가 종수를 태울 약속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도착할 목적지를 알려주고, 이틀 정도 별장에 머무를 수도 있으니 갈아입을 옷, 세면도구, 필요한 것을 간단하게 챙겨오라고 적혀 있었다. 제멋대로 친절한, 그러나 일관적인 태도였다.

종수는 1월 2월 동안 영어학원을 다니고 혼자 영어로 된 원서를 읽으며 가끔 이규를 만났다. 이규는 중학생 때부터 그나마 편한 사람이었다. 농구 실력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이규는 일부러 종수에게 져주었다. 그런 부분이 편했다. 형제가 있다면 이런 게 아니겠나 싶을 정도로.

혼자 남아 한가로이 시간을 보낸 종수는 두달 간 이태영과의 약속을 잊고 지냈다. 영어학원에서 얼굴을 알게 된 사람들이 종수에게 말을 걸고 싶어했다. 금방 귀찮아졌다. 왜 공부하러 온 학원에서 공부는 안 하고 딴짓을 하는 걸까. 종수는 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학원을 그만두고 과외를 알아볼까 하던 차에 3월이 되었다. 이규는 주익대에 입학했다. 그리고 일요일 당일에 스케줄 어플에 메모해둔 알림창이 떴다. 침대에 누웠던 종수는 뒤척거리다가 짐을 싼 가방 안에 농구공을 넣었다.

정말로 3월 첫주 일요일에 종수가 사는 아파트 단지로 이태영이 데리러 왔다. 이태영에게 꾸벅, 목례를 하고 이태영의 차에 타며 종수는 아직도 우리가 무슨 조합으로 만나 함께 이동하는지 모르겠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고조할아버지의 별장 관리를 왜 이태영이 하고 있는지도. 종수는 머릿속의 질문들을 고스란히 삼키고 안전벨트를 맸다. 고속도로를 탈 때까지 이태영은 어제까지의 일상을 제 안부를 대신해서 늘어놓았다. 종수는 그런 이태영이 어색해서 대답만 꼬박꼬박 했다. 그러다 종수가 뜬금없다고 느낄만큼 대화의 주제를 바로 별장의 소유주였던 고조할아버지로 넘어갔다.

“들어본 적도 없죠. 성함도 모르고?”

“네.”

“뭐랄까, 그 분은. 하긴, 일단 너무 옛날 분이라 종수 군이 뵌 적 없기도 하고.”

“네.”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가는 회색빛 풍경을 응시하며 종수는 이태영이 당연한 소리를 좀 의미있는 척하는 편이라고 느껴졌다. 고조할아버지라면 종수 아빠의 아빠의 아빠의 아빠. 지금 아빠가 40대 후반. 할아버지는 80대. 증조 할아버지는 일찌감치 돌아가셨고. 그 위의 고조 할아버지. 종수는 머릿속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이태영이 잘 알고 있는 것도 좀 이상했다. 이태영은 전방을 주시하며 표지판과 네비게이션이 표기한 속도로 운전했다.

“기록 같은 것도 거의 남아 있지가 않아서요. 그 분의 유언장 사본을 보면 원래는 최세종 선생님이 상속을 받는 게 맞는데요.”

“네.”

“그 당시에 할머님이 받지 말라고 하셨다던가, 뭐 그랬다는 걸로 들어서 기억해요. 그래서 이 저택 상속권이 종수 군한테까지 내려왔거든요. 나중에 이야기 해보시면 최세종 선생님도 아실 거예요.”

아빠는 그걸 나한테 준다는 말에 갸웃거리면서 어깨만 으쓱하던데. 종수는 이태영이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 못하는 눈치였지만 아무 말도 않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이태영은 조용한 종수를 눈으로 한 번 흘깃 살폈다.

“더 궁금한 거 있어요?”

굳이 뭘 더 알아야 하나. 그 사람에 대해서 하나도 모르는데 뭘 궁금해 해야 하나. 원래 뭔가 조상한테 상속받게 되면 그걸 주는 사람을 알아야 하나? 우리집은 제사도 안 지내는데. 종수는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쥐어짜내어 겨우 질문 하나를 만들어냈다.

“친할머니가 아빠한테 받지 말라고 하신 거예요?”

“아마 그러셨을 거예요.”

“왜요?”

이태영은 핸들에 올린 손을 까딱거리며 대답했다.

“저도 들어서 알고 있는 것 뿐이지만…… 그 별장이 종수 군의 고조할아버님께서 당시에 몰래 만나는 애인을 숨겨놓았던 곳이라고 오해하신 게 아닐까 해요.”

종수는 이태영의 차에 탄 이후 처음으로 피식 웃었다. 대한민국 모든 땅을 돌아다니며 부동산 투기를 본인의 숭고한 직업처럼 여기시는 친할머니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랬다. 종수가 웃자 이태영도 따라서 미소지었지만 의미는 없어 보였다. 이번에는 종수가 먼저 물었다.

“그 별장 그냥 다른 사람한테 팔면 안 돼요?”

“아아, 가보면 알겠지만 팔아서 이득 남을 만큼 괜찮은 저택은 또 아니에요.”

이미 과거에 죽은 남자가 애인을 데려와서 숨겨놓고 살든 말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멀리서 시집 온 할머니랑 별 관계도 없는 최씨 사람인데. 진짜 별 게 다 지랄이었다. 종수는 가족 모두에게 잊혀진 별장을 곰곰히 생각하며 차창 밖, 무대 장치처럼 옆으로 밀려가는 건물을 시큰둥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차를 몰고 한 시간 가까이 달려오더니 길게 뻗은 황량한 숲 안쪽으로 더 밀고 들어갔다. 승용차 한 대 정도 오갈 만한 길이 나 있어서 그 길을 따라 10여 분을 더 갔다. 인적 드문 산 속의 사유지에서 이태영은 차를 멈췄다. 3월인데도 숲의 나무들은 새순이 뜨문뜨문 자랐다. 검은 가지 사이로 하늘이 휑하니 보였다. 봄의 정취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가 북쪽으로 온 건가. 방향 감각이 애매했다. 이태영은 종수를 바라보며 빙긋 웃고는 먼저 안전벨트를 풀었다. 종수는 낮게 한숨을 쉬고는 이태영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종수의 고조할아버지가 남겼다는 별장은 이층의 목조주택으로, 창이 많았다. 겉은 20세기 서양식으로 보였고 내부는 일본식 호텔처럼 지어져 있다고 이태영이 설명했지만 종수는 그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이 별장이 종수 군에게 상속이 된 거예요. 건물이 오래 돼서 손 볼 곳이 많기는 하지만 지금껏 관리가 잘 됐고, 무엇보다 제법 잘 지어졌고……”

종수가 차에서 내려 건물을 보는데 중앙의 크고 육중한 문이 거세게 열렸다. 그 안에서 종수도 얼굴을 알고 지낸 이초원이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이초원은 할아버지를 오래 돌봐준 주치의의 아들이었다. 그는 외투 대신 도톰한 스웨터와 트레이닝 팬츠를 입은 편안한 옷차림이었다. 언짢은 건지 울적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의 이초원이 종수에게 들고 나온 A4서류철을 내밀었다. 왔냐.

“최종수, 여기 들어오기 전에 이거 상속 받을 거라고 싸인 먼저 해.”

묵직한 서류철을 받아든 종수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이태영을 돌아보았지만 이태영은 이초원을 말리지 않았다. 거기에 싸인해요, 하고 말하듯 종수에게 턱짓을 할 뿐이었다. 종수는 도톰한 종이들을 팔락팔락 넘겨보며 짜증을 숨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건 어디 앉아서 제대로 읽어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앉을 데는 없고 기다려줄 테니까 여기에 서서 읽어봐. 싸인 못하겠으면 이대로 돌려보낼 거니까.”

으름장을 놓듯 말하는 말투에 종수는 확 불쾌해졌다. 종수는 노래 한 곡 틀지 않고 지루하게 오던 차안에서 ‘계약서에 싸인을 해야만 내부에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 조차 안 한 이태영을 한 번, 내민 서류철 속에 <계약서> 하고 적힌 종이를 들추며 이초원을 한 번씩 쏘아보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계약서를 읽어도 무슨 말인지 종수는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한참을 앞장 뒷장을 번갈아보다가, 이초원에게 이게 무슨 말인지 물어봤다. 이초원 대신 이태영이 친절히 대답해 주었는데도 종수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사라지지 않았다. 한 자리에 20분을 넘게 서서 계약서와 실랑이를 했다. 대충 싸인하고 들어가자, 라는 허술한 말을 두 사람 모두 하지 않아 종수는 초조해졌다. 종수는 자신의 지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다섯 번쯤 읽었을 때에도 계약서의 내용이 불공정하거나 종수에게 해 되는 이야기가 없는 듯싶어서 표기된 모든 곳에 싸인했다. 그리고 경기도 북쪽에 덜렁 놓여 배달 어플 하나 연결 안 되는 집을 상속 받는 데에 이 두사람이 까다롭게 구는 이유도 알기 어려웠다. 계약서에 휘갈긴 싸인을 다시 한 번 꼼꼼하게 확인한 후 이초원과 이태영이 익숙한 곳을 향하듯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종수도 그 두 사람을 따라갔다.

별장의 내부는…… 넓고 높았다. 당시에 가장 유명한 일본호텔의 내부를 빗대어 만들어졌다고 이태영이 설명해주는데 종수는 그런 데에 관심없어서 흘려듣게 되었다. 걸치고 있던 봄외투를 벗어두려고 팔을 빼내자 이태영이 대신 옷을 받아주었다. 몸에 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젊은 나이에 J그룹 회장의 비서가 된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싶어졌다.

“종수 군. 여기 오면 지하 공간부터 봐야 해요.”

종수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이태영을 봤다. 별장의 아래? 지하에 뭐가 있나. 고조할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의 한국은 가난하고 남루하고 전쟁이 끊이질 않았을 테니 엄청나게 잘 갖춰진 벙커라도 있을까. 이태영은 차분하게 벽에 걸린 정물화 액자를 옆으로 밀었다. 그 옆에 있던 앤티크 풍의 짙은 체리색 가구 뒤로 툭, 잠금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구가 열고 닫는 문을 만들어 주었다.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은밀한 조작을 눈으로 직접 본 종수는 가슴이 콩닥거렸다. 이번에도 이태영와 이초원 두 사람이 먼저 고개를 숙여 문을 통과했고 종수도 따라서 지하에 내려갔다.

그곳은 벙커가 아니었다.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이라도 열린 듯 지하의 공간은 열대지방의 장마철처럼 습했다. 방금 전까지 이 공간에서 비라도 내린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이게 뭐지. 여기가 어디지. 별장의 지하는 3월의 봄이 사라지고 7월의 찌는 듯한 여름으로 종수를 맞이했다. 계단 아래에 첨벙이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고개를 쭉 내밀고 아래를 보았다. 키우는 열대지방 나무도 많고 앉아서 커피를 마실 만한 작은 테이블도 있고 의자도 있었다. 이태영이 별장에 들어선 종수에게 가장 먼저 보여준 지하는 종수가 중학생 때나 가던 아쿠아리움 내부의 휴게 같은 공간이었다. 계단이 끝난 바닥에 멍하니 서서 수조를 바라보았다. 넓은 지하 공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수조는 어마어마하게 커다랗다. 정확한 치수를 재려면 사람이 몇 달려 들어 200cm 공업용 줄자를 들고 몇 번이나 오가야 할 만큼. 종수가 어릴 적에 놀러간 실제 아쿠아리움의 수조보다는 작을 테지만 세로 길이가 이미 레일 서너 개 쯤 연결된 실내 수영장 너비 정도는 되었다. 수조 안으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도록 옆으로는 대리석으로 좁은 층계참이 놓였다. 넓은 수조 안은 각양각색의 산호, 자잘한 크기의 다양한 물고기, 바닥에 깔린 흰 조약돌 등으로 조악하지만 그럴싸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게 다 뭐예요?”

“아, 많이 덥죠. 병찬이 형이 온 바다의 나라가 고온다습한 기후거든요. 우리는 좀 익숙해졌는데 종수 군은 놀랐겠네요.”

종수는 어안이 벙벙해서 가만히 서 있느라 이태영의 입밖으로 나온 ‘병찬이 형’이 누구인지도 의문을 품지 못했다. 이초원은 수조 가까이에 서서 안을 들여다 보았고 이태영은 종수가 묻지도 않은 말을 종알거렸다.

“종수 군의 고조할아버님께서 여기를 병찬이 형이 살기에 알맞는 환경을 맞춰두셨는데 그 시절에 어떻게 하셨는지는 모르겠어요. 대단하지 않아요? 물론 전문가를 부르셨거나 뭐 그러셨겠죠. 이 정도면 거의 98프로 수준? 아닐까 싶어요. 이 환경 세팅 유지를 저랑 이초원 씨가 함께 하고 있고요.”

이렇게 따뜻한 공기 속에서도 종수는 자신의 팔아래로 오소소 소름이 끼치는 걸 느끼며 이태영을 보며 물었다.

“병찬이 형이 누군데요?”

“아, 저기 오네요.”

이태영이 손가락으로 수조를 가리켰다. 종수는 이태영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넓고 커다란 수조를 보았다. 거기에는 다른 물고기 사이로 헤엄치는 성인 남성 인어가 있었다.

*

인어.

그걸 보자 긴장한 어깨에 힘이 쭉 빠지는 걸 느꼈다. 종수는 오늘이 4월 1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실 이건 다 쇼라고. 성인이 된 아들을 위해 아빠가 꾸민 빅 이벤트 거짓말. 그러니까 별장 앞에 서서 싸인한 계약서도 사실은 효력이 하나도 없는 쌩구라.

상황을 파악한 종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물끄러미 수조 속 인어를 본다. 요즘은 저렇게 사람을 고용해서 찐으로 인어처럼 보이게 해주는 용품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짧게 감탄했다. 이초원과 이태영이 종수를 돌아보았다. 그 눈이 또 이런 연기를 잘하는 것 같다. 종수는 어처구니가 없어 씩 웃었다. 어릴적부터 얼굴 보고 자란 형들끼리 진짜 개 좆같은 장난을 세심하고 스케일 크게 치는 줄은 몰랐다.

“장난치지 마요.”

“장난 같아요?”

종수의 말에 곧바로 대답한 이태영이 웃었다. 이게 장난이 아니면 다 뭔데. 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었는데 이태영이 한발 빨리 종수에게 말했다.

“가까이서 봐요. 장난인지 아닌지.”

벽이 지저분한 수조 너머 인어는 매끄럽게 헤엄쳐서 유리벽 너머 종수를 보았다. 종수는 수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수조 앞에 선 이초원 옆에 나란히 서서 헤엄치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물속 헤엄치는 남자는 정말로 인어처럼 보였다. 등에 맨 산소통도 없고 호흡기도 끼지 않았다. 오래 잠수해도 여유로운 인간의 얼굴이다. 그러니까 저게 다 구라라고…… 종수의 기가 센 의심 속에서 또 다른 의심이, 그 안에 또 다른 작은 의심이 피어올랐다. 인어의 푸르른 꼬리 오른쪽엔 피부를 기운 듯한 흉도 남아 있었다. 인어는 배꼽이 없었다. 배 중앙에 점처럼 보이는 무언가도 없다. 고관절 위에서 시작되는 꼬리의 비늘은 각도에 따라 찐한 파랑색, 연한 하늘색으로, 청록색으로 빛났다. 지하의 전등에서 쏟아지는 빛에 잔물결의 그림자가 생겨 그 세 가지 색이 마술처럼 일렁였다.

인어다.

두 사람은 종수에게 거짓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인어는 이곳에 처음 온 새로운 인간을 알아보는 듯 종수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두꺼운 유리벽 너머 종수는 인어와 눈을 맞췄다. 긴 물고기 꼬리와 인간의 상반신이 절묘하게 붙어 있다. 꼬리는 정말로 물고기의 것과 닮아 있었다. 무엇보다 인어는 목덜미에서 열렸다 닫히는 아가미로 호흡하는 듯했다. 종수는 이 모든 게 꿈 같았다. 인어를 보자마자 그 모든 해괴한 문장으로 쓰인 계약서의 내용이 이해가 된다. 인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종수가 멍청한 질문을 했다. 뻥이 아니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왜 형이라고 불러요?”

이태영은 종수의 질문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의아함을 품은 눈으로, 그렇지만 종수가 무안해 하거나 겁 먹지 않게 하기 위해 입술은 웃었다.

“나이를 대충 가늠해봐도 종수 군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랑 비슷할 텐데 예의 상 형이라고 부르는 거죠.”

병찬이 형이라는 호칭에 별로 대단한 의미는 없어요. 덧붙이는 말에서 더더욱 호칭에 의미가 담긴 것만 같아 그 말은 믿기가 힘들었다.

*

푹푹 찌는 지하에서 뒤늦게 호흡이 가빠온 종수는 위로 올라가자고 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땀에 입고 온 옷이 축축하게 젖었다. 두 사람은 병찬에게 손으로 인사하고 종수는 병찬을 유심히 보며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밟고 올라간다. 세 사람은 별장 일층으로 돌아왔다. 숨이 트이는 맑고 차가운 공기에 종수가 헥헥거리는 동안 이초원은 가방 속에 든 또다른 서류철을 꺼내들었다.

“이제 네가 여기 상속 받았으니까 이거 읽어 봐. 모르는 거 있음 또 물어보고.”

종수는 떨떠름한 얼굴로 이초원이 새로이 건넨 <인어에 관하여:상속자용>이라고 적힌 서류철을 내려다 보았다. 종이를 들춰보니 작은 글씨로 프린팅 되어 있는데 이 서류철도 꽤 도톰했다. 어딘가에 앉아 차분히 읽어야 할 정도의 양이었다.

“고조할아버지는 왜 이렇게까지 했대요? 그런 것도 적혀 있어요?”

발 빠르게 부엌에서 물 담긴 유리컵을 쟁반에 얹어 가져오던 이태영이 대신 대답했다. 이번에도 역시나 당연한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했다.

“어…… 아무래도 죽지 말라고 이렇게 싹 맞춰두셨겠죠? 살리려고.”

물컵을 받은 종수는 어설프게 한손으로 서류철의 종이를 한 장 넘겼다. 인어 명, 이라는 첫 문장에 ‘朴秉燦’이라고 박, 까지만 알아보았으나 뒤의 두 한자는 짐작하건대 병찬이 아닐까 싶었다.

“읽어 보고 인어에 대해 더 궁금한 게 있으면 여기 있는 이초원 씨와 저에게 물어보시면 돼요.”

“인어 이름이 박병찬인데 이런 이름을 대체 누가…….”

종수는 제 입으로 질문을 끝맺지 않았는데도 이마를 문질렀다. 땀이 맺히다가 말라가는 이마는 착잡했다. 질문을 철회하고 싶었다. 인어를 데려 온 고조할아버지인지 하는 사람이 지어줬을 이름일 게 뻔한데.

“아 그런 정보는 이초원 씨가 준 문서에 적혀 있을 거예요.”

“네에…….”

“박병찬은 고 최선생님 살아계실 적에 가장 가깝게 지내던 친우의 성함이야.”

이초원이 컵안에 든 물을 한 번에 쭉 들이킨 후 한숨처럼 대답했다. 누가 뒤통수를 개 쎄게 때린 듯 종수는 잠시 멍해졌다. 종수가 움직일 때마다 땀으로 젖은 가랑이 사이로 속옷이 말려 들어간다. 들어서는 안 될 말이라도 들은 기분이었다. 차가운 공기가 종수의 이마에 달라붙어 몸의 열을 내리고 열린 모공을 닫았다. 종수는 아연한 얼굴로 박병찬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하의 인어를 떠올렸다. 긴 시간 청소를 하지 못한 듯 수조는 녹색의 이끼가 껴 누르스름하고 지저분했었다.

친구의 이름을 먼 바다에서 데려온 인어에게 붙인다고?

*

세상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인어와 종수의 취향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종수 자신의 방이 존재했다. “거기가 네 방이야.” 집안을 다 둘러보기도 전에 이초원이 정해준 종수의 방. 살면서 처음 들어온 별장에도 종수만의 방이 있다. 그건 새로운 종류의 경험이었다. 종수가 문을 연 방에서는 공기가 오래 갇힌 채 공간에 머물러 삭아버린 듯한 쾨쾨한 냄새가 났다. 종수는 한 형태로 고여 있었을 공기 사이를 헤집고 걸어가 벽면의 커튼을 걷고 넓은 창을 열었다. 바람이 불어오지 않아 방 안의 냄새가 천천히 빠졌다. 방 안에 작게 딸린 욕실에는 범죄현장을 보존하는 것처럼 넓은 김장 비닐 따위로 덮여 있고, 그 위에는 눈처럼 뽀얗게 먼지가 쌓여 있었다. 그것을 걷어내니 화장실은 조금 낡았고 아주 깨끗했다. 세면대와 양변기와 욕조와 샤워시설이 있다. 이게 그 시절 일본의 호텔이었다니.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매트리스도 이불도 새 것처럼은 아니어도 청결했다. 고교 시절, 농구부 훈련이나 원정 경기를 위해 타 지역으로 갔을 때 거기 숙소에서 뒤집어 써야 하는 이불들에 비하면 감사한 정도였다. 고조할아버지가 이 별장을 호텔처럼 만들었다던 말을 그제야 알아먹었다. 종수는 방을 둘러보고 매트리스 끝에 걸터앉았다. 몸은 괜찮은데 순식간에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 정신이 피로했다. 땀으로 젖었던 몸을 씻지도 못하고 옆으로 기울였다. 씻어야 하는데. 아주 완전히 눕지는 않고 아주 살짝만 침대에 누웠다. 30분이라도 낮잠을 자고 싶어졌다.

*

그날 오후 동안 문서를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종수는 1월부터 대충 예상했던 별장과 갑작스레 별장에 딸린 인어를 상속 받아 씻고 나와서도 혼자 멍한 얼굴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로 짐작하니, 종수가 불려온 것도 지하실 수조 청소를 돕게 하기 위해서였다. 말하자면 일손 하나 거들 셈으로.

수도배관청소는 이초원이 일주일 전에 끝내두었다며 종수 너도 이번 청소를 잘 보고 배우라고 말했다. 수조 청소는 일단 수조를 비우고, 인어를 바깥으로 끄집어내고, 그 안에 먹이 겸 친구 겸 겸사겸사 넣은 다른 물고기들을 건져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먹이 겸 친구, 라는 말에 종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또 가만히 참았다. 깨끗한 대량의 물을 1톤 정도 준비해야 해서 이틀 뒤에 실행하기로 했다.

종수는 집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사흘 정도 집에 들어갈 수 없을 거라고 말하려 했다. 분명히 그랬는데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이태영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게 했다. 이태영이 할아버지의 직속비서라는 걸 잘 알던 엄마는 이태영이 무슨 말을 하든 이해하는 모양이었다. “종수 군이랑 그때 상속 받기로 했던 별장에 저랑 같이 놀러 왔거든요. 상속 받은 후 챙겨야 할 이것저것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곳이 너무 허름하고 엉망이라 실망한 눈치예요. 리모델링하면 좋지 않겠냐고요? 그건 종수 군의 마음이지요. 네네 부동산 쪽이랑도 이야기가 끝났구요. 계약서 사본도 다 저희 한 부, 종수 군도 한 부 주었구요. 어어, 근처가 산이라 아무 것도 없어서, 경치도 별로 볼 게 없어요. 그 시절 별장이잖아요. 좋아하실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집에 못 들어간다고 말만 해달랬는데 말이 길어지는 눈치였다. 이곳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던 엄마는 궁금한 게 많았고, 이태영은 몇십 분이 넘는 통화를 너끈히 이어갔다.

수조를 채운 것들 중에 반은 병찬이 온 바다에서 건져온 듯 했으나 알고 보니 이초원이 이전 해외 여행을 가서 스쿠버다이빙을 할 때 바다에서 가져온 것들이라고 한다. 나머지 반은 산호와 미역줄기 비슷하게 만든 가짜인데 병찬은 그 둘을 구분한다고 했다. 종수는 이제 이태영의 친절하고 중요도가 낮은 밍숭맹숭한 설명에 익숙해졌다. 그야 그렇겠지.

*

요리는 이초원과 이태영이 번갈아 가면서 했다. 늦은 점심은 이초원이, 간단한 저녁은 이태영이 했다. 이 집에서 두 사람은 아예 생활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딱히 그렇지는 않은지, 계속 “그거 어디에 있더라?” 또는 “여기는 매번 와도 헷갈려.” 같은 말을 가볍게 나누었다. 그래서 이미 집 구조와 물건들이 어디에 있는지 제 집처럼 기억하던 종수가 식기가 있는 위치나 기름기 닦는 키친타올이 어디 있는지 말해주었다. 이초원은 “젊어서 그런가. 기억력이 남다르네.”라고 퉁명하게 말했고 이태영은 “몇 번 와도 여기는 늘 뭐가 안 외워지고 건물 구조도 어렵던데. 종수 군이 오자 사람 사는 집 같아요. 집 주인이라 다른가 봐.” 라며 웃었다.

종수는 다시 한 번 지하에 내려가보고 싶었는데 이태영도 이초원도 바쁜 듯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종수는 계속 제 방에 남아 있었다. 보던 서류를 다시 살피고, 인어에 대해 검색했다. 핸드폰으로 찾아보니까 국내에 인어 동상은 많았다. 심지어 한강이나 인천에도 있었다. 종수는 그것만으로는 박병찬이 어디에서 온 인어인지 알 수 없어 조금 더 찾아보았다. 여수에는 인어 관련 전설도 있었다. 인터넷으로 찾은 인어 전설을 읽으며 기록으로 남은 박병찬과 비슷한가 했더니 ‘가슴이 여실한 여인’ 까지 읽고 실망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의 바다가 사시사철 고온다습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외국에서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서를 뒤져도 인어가 어느 바다에서 왔는지 적혀 있지 않았다. 하루 종일 종수의 머릿속에선 인어가 헤엄쳐 떠나지 않았다. 한참 읽어내린 문서를 또 펼쳤다. 인어 명. 박병찬…….

*

종수는 종이 뭉치 가장 아래에 정갈한 필체로 적힌 오래된 종이 복사본을 읽었다.

일지 하나.

인어人魚. 고것은 본디 저 남쪽 바다에서 태어났을 게다.

허리께 우로는 인간의 몸뚱어리이고, 고 아래께는 고래인지 물괴기인지 모르겄다.

여꺼정 데려올 적에 인어의 대가리에 피 묻은 포대를 씌웠으메도 어부덜은 꼬리만 보고는 내가 포경이라도 한 줄 알더라.

고놈덜이 인어를 알아볼까 겁이나 가스메 찬바람이 불어왔다.

양식우로 맞춘 욕조에 맹물을 가뜩 부어 처박아두었으나 인어는 이틀 간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다친 곳을 바늘로 얽어맬 적에 진정하지 아니하여 거세게 윽박을 지르었다.

인어가 눈을 홉뜨고 나를 할퀴고 깨물었다.

하는 수 없이 마당에 자란 나뭇거지를 꺾어와 매질을 하였다.

인어가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었다. 다친 놈을 봐주려 하였을 뿌닌데,

매질로 인어의 팔과 몸에 벌겋게 흉이 지었다.

일지 셋.

일본에서 사람덜을 불러왔다.

땅 아래의 흙을 파내고 시멘트를 부어 벽을 세운다. 고 안에 유리벽을 세울 테다.

이 안에 물을 가뜩 채워넣을 것이라고 하니 다덜 묘한 얼굴로 고개를 빼꿈 내밀며

최-상, 이 안에 물을 채워 무엇 하시게요, 한다.

꼿꼿이 인어라고 말하지 못해, 아주 큰 물괴기를 키울 게다, 라고 말해주었다.

일 하러 온 일본인덜에겐 살믄 달구알과 장에서 사온 돼야지를 구워 먹이었다.

공사는 두어 달이 더 걸린다 하여 고 사이 인어는 소금물을 푼 욕조에 눕혀두었다.

다친 곳이 쉬이 아물지 않어 고 놈이 목숨을 놓을까 퍽 걱정이다.

일지 일곱.

지하의 수조 공사가 끝이 났다.

인어는 살아있으메 한 시름 내려놓았다.

고 인어는 사람 말소리를 듣는 듯하여 바깥 소리에 귀를 쫑곳 세운다.

마당 앞서 가댁질 하던 아해에게 멀리 가서 놀어라 일렀다.

욕조의 인어를 박 형의 이름으로 불러보았다.

혀를 잘라내고 싶을 만큼 목구멍이 뜨겁고 아퍼서 침도 겨우 삼키려니,

박 형의 이름으로 불리운 인어가 눈을 댕그러니 떠 나를 보았다.

일지 열둘.

인어는 숫놈이긴 해도 짐승 대하듯 하면 아니 될 것 같다.

고저 나에 감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업서 면구스럽다.

인어의 눈이 그리 말하는 기분, 고것이 전부다.

인어는 수조 구석에 드러누워 가만 있다. 잠을 자는 듯이 보인다.

다친 꼬리는 다 나은 듯하나 헤어믈 치지 아니한다.

먹지도 싸지도 아니하고 몸씨는 고대로다.

뒷산의 풀떨기를 한아름 꺾어와 물 안에 넣어주니

그제야 물 위로 고개를 바끔거리며 초록색 기다란 풀을 조금 가지고 놀다 다시 시름시름 눕기만 하였다.

박 형의 이름을 불러도 이제 내 쪽으로 돌아보지 않는다.

고얀 놈이다.

나 스스로가 머저리처럼 느끼어 저 놈의 우렁잇속을 알지 못하매,

두 번 다시는 박 형의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리라, 다짐하였다.

일지 열다섯.

인어는 작은 물괴기를 먹는다.

죽은 것, 산 것 가리지 않으나 몸치에 비해 적은 량을 삼킨다.

사람을 물 안으로 끌어드리거나 빠진 이를 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잡는다.

거듭 눈앞 아찔한 장난을 쳐서 혼을 낸다.

알아먹지 못하는 듯하여 물괴기를 주지 않어 고 놈을 살피었다.

벌 받는 줄도 모르고 사흘을 넘게 굶기어도 주린 태가 아니 난다.

내 먹는 쌀밥을 주었더니 조금 맛을 보고는 뱉어낸다.

달구알을 삶아 주니 고것도 한 입 먹고는 도로 가져다 놓는다.

일지 스물.

인어는 이제 제법 수조를 편안히 여기었다.

물괴기나 짐승처럼 대하기를 고만 두었으메도, 인어를 오랜 기간 수조 안에 가두다니.

이리 살게 하면 아니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바다에 다시 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후회가 찬물때처럼 밀리어와 나는 갈피를 못 잡겄다.

어찌 나는 이토록 우매한가.

일지 서른둘.

아내가 둘째를 가져 출산 때까지 옆에 있어야만 한다.

나와 박 형을 알고 지내던 두 명에게 인어를 맡기었다.

잘 돌보아주리라 믿는다.

일지 마흔넷.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았다.

인어는 색을 볼 수 없으나 빛의 량을 구분하였다.

우리와 언어로 소통하려 하지 아니한다.

훈련에 능할 것 같으메 제 의지로 고집을 부려 버틴다.

여덟 세 된 어린 아해보다 총명하다.

생명과 무생물을 알아차린다.

일지 마흔 일곱.

먹어치우던 물괴기 안에 벌레라도 있었는지 인어가 괴롭어 한다.

겨우 붙들어 매었다.

혀 아래와 몸뚱어리에 곳곳에 박힌 기다랗고 하이얀 기생충을 뽑아주었다.

인어는 인간인 나를 두려우한다.

작살에 부러졌던 꼬리에 상흔이 남았다.

일지 마흔아홉.

수조를 확인하러 가까이 온 내게 인어가 다가와 막무가내로 내 목을 졸랐다.

차갑고 미끌거리는 손아구였다. 사람을 빼어달믄 눈이라 여겼건만, 기세등등한 짐승의 눈이 따로 업섯다.

그 손등에는 이전에 내가 회초리질을 한 자욱이 흉으로 남았다.

인어의 눈은 울화가 성성하였다.

나는 움직이지 못했으나 인어는 고새 내 목에서 손을 놓아버리고는

수조 끝까정 헤엄쳐 저 멀리 구석진 자리서 몸뚱어리를 둥그렇게 마라 누웠다.

나는 몇 시간이나 수조를 떠나지 아니 하였으메도 인어는 곁에 오지 않았다.

일지 쉰다섯.

더는 인어에 관해 기록을 남기지 않기로 하였다.

세상에 내어놓지도 못할 이름에, 흉흉한 존재로다.

나 죽으면 잊히어 살아갈 물괴기에 정 주지 말기로 하자 나에 몸이 아퍼 힘에 겹다.

지치고 피로하다.

볕에 누워 무릎을 베고……

잠에 들고 싶다.

*

다음 날. 하릴없이 종일 저택에 있으면서 종수는 별장의 모든 문을 다 열어보고 조금씩 살펴봤다. 이전 고조할아버지가 썼던 서재에서는 옛 문서가 조금 나왔는데 종수는 그걸 제대로 읽기도 힘들어 어디 구석에 밀어두었다. 오래 되었지만 관리가 잘 된 책상 옆 서랍을 뒤지니 또 무언가를 적어둔 편지와 반지가 나왔다. 편지 내용을 눈으로 훑어도 인어에 대한 기록은 없어 보여서 종수는 반지만 들고 서재 밖으로 나왔다.

종수는 조금 더 용기내기로 했다. 마실 물을 챙기고 수조가 있는 지하로 홀로 내려갔다. 역시나 기온이 홧홧하고 공기가 눅눅했다. 수조 앞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불멍물멍, 그런 신조어처럼 인어를 보았다. 수조는 직사각형의 형태로 벽 두쪽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으며, 수조 가까이에 갈 수 있는 계단과 수조를 내려다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인어와 자꾸 눈이 마주치는 기분이 들었다. 종수는 인어가 색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하는데 수조 속에 꾸며진 가짜 물품들은 다 분홍빛 다홍빛 푸른빛으로 알록달록해서 그게 아쉬웠다. 인어는 종수가 보이는 쪽에서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 헤엄치더니 금방 지루해진 얼굴로 수조 안쪽 끝으로 가버렸다. 가짜 바위를 깎아 만든 듯한 둥근 틈 사이로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종수는 ‘뭔가 해야한다’는 거대한 압박감에 휩쓸려 일층으로 올라갔다. 어차피 내일 되면 수조를 청소할 테니 뭐라도 해볼 심산이었다. 인어가 지은 표정이 지루함인지 귀찮음인지도 종수도 모르지만 불쾌에 가까운 얼굴이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일층에서 이것저것 챙겨본다. 둥근 유리컵을 집어들었다가 혹시라도 인어가 컵을 깨트리는 상상을 해봤다. 컵을 다뤄보지 못해 분명 인어에게 상처가 날 것 같다. 유리컵은 도로 제자리에 놓아두었다. 종수는 바쁘게 이 방 저 방 문을 열며 부드럽고 큰 문제 될만하지 않을 만한, 무해한 인간의 물건을 찾아다녔다.

종수는 물건을 한아름 안고 지하 향하는 문을 열었다. 수조는 분명 종수의 키보다 깊었지만 눈으로 보면 굴곡이 져서 무서운 줄 몰랐다. 종수는 수조와 연결 된 좁은 층계참을 한 달음에 내려갔다. 오래 갈지 않은 물에는 미세한 이물질과 누런 이끼가 둥실둥실 떠다녔고 무엇보다 비린내가 심했다. 종수는 덜컥 당황했지만 침착한 얼굴로 수조 가까이에 다가간다. 수조 위, 대리석 타일으로 이루어진 여유 공간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인어가 움직일 때마다 물이 튀는지 타일은 젖어 있었다. 종수는 인어가 심심하지 말라고 이것저것 넣어줘 본다.

종수가 퐁당 빠뜨린 물건을 향해 구석에 있던 병찬이 날쌔게 헤엄쳐 왔다. 병찬이 아주 긴 시간 이 수조에 갇혀 살았던 탓일까. 몸짓이 아주 빨라 수조 위로 물이 거칠게 넘실거렸다. 물 안에서 바람이 일어난다면 바로 지금이었다. 종수는 병찬이 제 발 아래까지 왔다는 건 알았지만 물의 표면이 흔들려서 병찬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볼 수 가 없었다.

병찬은 종수가 넣어주는 육지 물건을 이리저리 본다. 얼굴을 비춰보는 작은 손거울이었다. 종수는 두번째 물건도 물에 슬쩍 얹었다. 얇은 담요였다. 담요는 푹 젖어들 때까지 물 위에 동동 떠 있었는데 물 아래에서 올라온 병찬이 바깥으로 눈을 빠끔히 내밀었다. 담요가 거대한 가오리인지, 독 쏘는 해파리인지 가늠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경계하다가 다시 물 아래로 내려갔다. 종수는 담요는 실패했다고 생각하며 이번에는 서재 책상의 서랍에서 발견한 보석 박힌 금반지를 수조 안으로 넣어주었다. 병찬이 보석 달린 금반지를 물 안에서 낚아챘다. 그리고 네번째, 다섯번째…… 병찬이 나중에는 담요를 물 아래로 끌어내렸다. 아무런 기능하지 않는 가벼운 무생물이라는 걸 알게 된 것 같았다. 종수는 큰맘 먹고 자신이 서울에서 갖고 온 농구공도 물에 떠밀어 주었다. 오늘까지만 병찬이 갖고 놀게 하고 내일 수조 청소가 끝나면 다시 종수의 가방 속에 들어갈 농구공이었다. 

공은 공기 때문에 젖어도 물위로 동동 떠올랐다. 병찬은 물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동그란 물체를 또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보다가 꼬리와 손을 이용하여 공을 만졌다. 공은 미는 대로 밀리고 당겨오는 대로 딸려 왔다. 공의 속성이 무엇인지 이해하려는 듯 병찬은 공을 만졌다. 종수는 그런 병찬을 빤히 보았다. 머리카락이 홀딱 젖어 피부에 가닥가닥 달라붙은 모양새가 우스웠지만 얼굴에 티내지는 못했다. 병찬은 곧 훈련 받은 돌고래처럼 농구공을 꼬리 지느러미로 팡팡 쳤다. 공중에 높이 띄웠다가 받아낸다. 억지로 공을 끌고 수조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몸에 힘을 빼면서 다시 공에 이끌려 물 위로 올라왔다. 인어는 종수가 준 인간의 물건으로 놀고 있었다.

*

다시 일층에 올라간 종수는 별장 안에서 재미있고 새로운 장난감을 찾아다녔다. 부엌의 숟가락을 챙겼고, 응접실 장식장 안에 있던 도자기로 만들어진 작은 고양이 모형을 꺼내어 손에 쥐었다. 이것 외에는 더 넣어줄만한 물품이 없는 듯해서 종수는 지하수조로 돌아갔다. 수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좁은 틈에서 들고 온 양식용 숟가락을 살피던 종수는 몸을 구겨 쭈그려 앉았다. 병찬이 이 숟가락과 아까 넣어준 손거울을 다르게 느낄지 아닐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직도 종수의 농구공을 갖고 놀던 병찬은 공을 껴안고 헤엄쳐서 다가왔다.

두꺼운 유리벽면 너머로 병찬을 보았을 때 종수는 그가 정말로 허리 위로 저와 같은 인간인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다. 가까이서 본 병찬은 인간과 피부결도 다르고 눈도 쪼금 다르다. 고개를 쭉 내밀 때 펄떡 열렸다 닫히는 아가미를 보고 종수는 한 손에는 숟가락, 한 손에는 도자기 고양이를 쥐고 완전히 얼어 붙었다. 지하실 공기가 습하고 따뜻해서 그런 건지, 눈앞의 인어가 무섭게 느껴져서 그런건지 등줄기가 긴장되고 몸 중간에서부터 뜨겁게 더워졌다.

동그란 농구공을 안고 온 인어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던 종수에게 손바닥을 쭉 뻗었다. 작은 입을 여는데 혀가 잘 보이지 않았고 역시나 생명을 물어 뜯어먹기 좋게 생긴 뾰족한 이빨이 수조 위에 달린 인공 태양광 조명을 받아 번쩍거렸다.

인어는 종수의 옷깃을 잡았다. 몸을 웅크려 앉아 있던 종수의 무게 중심이 흔들렸다. 그대로 병찬과 함께 따뜻하고 부드러운 물속으로, 거의 곤두박질 치듯 풍덩 끌려들어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종수는 도망칠 생각도 못했다.

*

이게 뭔지 모르겠다. 병찬은 수조 속 따뜻한 물 속에서 종수를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종수의 얼굴 옆으로 물보라가 일었다. 물 속에서 병찬은 사람보다는 고래에 가까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우웅…… 끼루룩…… 까르륵…… 종수의 먹먹해진 귀에도, 벌어진 입안으로도 수조의 짠물이 들어왔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바닷물이 아닌 것을 바닷물인 척하기 위해 사용된 소금과 화합물의 조잡한 맛도 느껴졌다. 종수의 코와 입 주변으로, 병찬의 입가에서도 공기가 맺혀 방울방울 물 위로 올라간다. 수조 가장 밑바닥에서 멈춘 병찬이 종수를 놓아주었다. 병찬의 얇은 지느러미가 그물처럼 자라난 손이 종수의 손과 닿았다. 인간이 손이라고 부르는 형태와 비슷하게 생긴 미끌미끌한 신체 부위로 종수의 가닥가닥 나눠진 굵은 마디의 손을 만졌다. 병찬은 종수의 머리카락도 만져보고 또 희한한 소리를 뿜어냈다. 병찬에게는 지금 어떠한 감정이 흐르고 있고, 그 감정을 종수에게 전하려는 듯 친히 종수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종수는 어렵게 눈을 떠서 제 눈앞의 병찬을 보았다. 다시 눈을 감았다. 종수의 발바닥에 수조 밑에 깔린 동그란 조약돌이 느껴졌다. 물 안에 얼마나 있었던가. 서서히 아득한 느낌이 부풀어 올랐다. 호흡을 향한 갈망이 아랫배에서부터 목구멍까지 느릿하게 올라왔다. 종수는 드디어 숨이 막혔다.

병찬이 다시 종수를 끌어안으려고 팔을 넓게 펼칠 때, 종수는 눈앞의 인어를 밀치고 물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종수가 제 곁을 떠나 수조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을 알아채고 병찬은 종수의 몸을 애달프게 붙잡았으나 거칠게 허우적대는 종수의 팔꿈치에 얼굴 처맞았다. 종수는 제가 병찬의 얼굴을 찍어내린 줄도 모르고 물 위로 올라가려고 몸을 계속 움직였다. 그럴 수록 몸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종수의 발 밑이 아주 잠깐 사뿐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금세 물 바깥으로 나갔다. 겨우 호흡하는데도 자꾸 짠 물을 먹어서 기침을 했다.

가라앉는 종수의 발 밑에서 몸을 띄워주었던 인어는 아주 조심히 움직였다. 턱 아래까지 들썩이며 물 먹는 인간의 옆으로 다가왔다. 중력의 힘을 거스르는 거대한 몸뚱이를 이리저리 끌고 수조 끄트머리에 데려다 놓았다. 대리석 층계참에 기대어 겨우 정신 차린 종수는 뜨악한 표정으로 병찬을 바라보았다.

병찬의 코 아래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종수는 흠뻑 젖은 채 병찬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운동하다 보면 코피 정도는 흔히 봤지만 병찬의 코피는 달랐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병찬의 코피를 터트려서 미안한 마음이 듦과 동시에 당혹스러워 오히려 목소리가 주눅들었다.

“문서에서 봤어. 박병찬 너 고조할아버지를 죽이려고 했었지.”

인어에게도 자유의지가 있을까. 행위의 주체자로서 강렬하고 명확한 의도가 있을까. 이 또한 지나치게 인간적인 사고는 아닐까. 종수의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혈육이라는 이유로.

“나도 죽이려고?”

난 고조할아버지를 본 적도 없는데.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에 죽은 사람인데. 병찬은 종수의 말을 이해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코피만 뚝뚝 흘렸다. 종수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으이씨, 하면서 병찬의 코피 닦아주려 손을 뻗었지만 인어는 물속으로 도망갔다. 병찬이 흘린 코피는 붉은 실처럼 한줄기로 흘러나왔다가 점점 흐려졌다.

*

푹 젖은 채 물을 뚝뚝 흘리며 일층으로 올라온 종수는 커피를 마시는 이태영과 마주쳤다. 이태영은 별로 놀라지 않은 목소리로 종수에게 물었다.

“물에 빠졌어요?”

“네.”

“어쩌다가?”

종수는 병찬이 자길 끌고 물 안에 들어갔다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거짓말을 했다.

“인어를 자세히 보려고 층계참에 섰다가 미끄러졌어요.”

이태영은 의심하지 않는 눈빛이었다.

“조심하지 그랬어요.”

이태영은 종수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뒷마당으로 나가 깨끗하게 마른 수건을 탈탈 털어서 주었다. “그 방 화장실에는 수건이 없을 거예요.” 이태영 말이 맞았다. 종수 방의 화장실에는 수건이 없었다. 다음에 올 때 마트에서 새 수건을 사와야 할 것 같았다.

종수가 젖은 옷을 세탁기에 집어넣고 새 옷을 갈아입는 동안 초조하게 움직였다. 이태영이 커피를 권했지만 거절했다.

병찬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사람 말을 못 알아먹는 병찬이 어떻게 반응하든 그렇게 하는 게 종수의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다시 지하의 수조 앞에 섰을 때 병찬은 수조 끝에서 손거울과 도자기 고양이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코피는 멎어 있었다. 종수는 수조와 연결된 층계참에 서 있었고, 병찬이 물 위로 얼굴을 비치기를 기다렸다. 병찬은 오지 않았다. 물 위에는 종수의 농구공만 외톨이처럼 둥둥 떠다녔다. 이렇게 되면 종수는 병찬에게 사과할 수가 없었다.

*

종수는 그날 밤 잠들 수가 없었다.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가 종수를 밀어 넘어뜨렸다. 박병찬의 코피가 눈앞에 선명히 그려졌고 심장이 거세게 뛰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인어는 수중 생물이라 손이 뜨거울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 아는데 병찬의 손이 닿았던 종수의 몸은 화상이라도 입은 듯 후끈거렸다.

심장이 콩닥거려 잠을 이루지 못하던 종수는 눈을 감고 해가 뜨길 기다렸는데 그 사이 아주 짧게 잠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처음 꾸는 야한 꿈이었다. 상대는 인어 박병찬이었다. 꿈에서 종수는 말 못하는 인어와 뒤엉켰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거세게 분통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들은 물 안에서, 그 다음에는 물 밖에서 행위했고 바닥에 쓸리던 인어의 몸에서는 빨간 피가 흘렀다. 얼굴을 때린 적도 없는데 인어는 코피를 흘렸다. 부릅 뜬 눈으로 종수를 노려보았다. 종수는 자신이 인어를 삼키는 것인지 인어가 자신을 삼키는 것인지 그 감각이 모호할 즈음에 눈을 떴다. 섬뜩할 만큼 정수리부터 뒷목까지 차가워졌으나 심장은 발작하듯 벌떡벌떡 움직였다. 종수의 몸에 피가 찌르르르 전기처럼 돌았다. 속옷 아래의 성기가 빳빳하게 서 있다. 종수는 스스로에게 환멸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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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가라앉지 않는 몸안의 열기를 해결하지 못해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었다. 아침이 되어서도 종수는 지하로 내려가지 못했다. 방 안에 처박혀 소름 돋을 만큼 생생한 꿈을 머릿속에서 자꾸 되감아 보다가 몇 번씩 화장실 양변기 앞에 서서 얼굴을 감싸쥐었다. 결국 이태영이 종수의 방문을 노크하러 올 때까지 종수는 제 몸을 달래는 데에 골몰했다.

오늘이 수조 청소 날이었다. 낯 뜨거운 꿈을 꿨던 탓에 종수는 제정신으로 인어를 보기 힘들었다. 이태영와 이초원은 많이 해 본 작업이라는 듯 먼저 수조 아래의 틈을 열었다. 지하 아래의 지하로 물이 빠져나간다. 그리고 층계참 대리석을 뒤틀어 열어서 수조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긴 수납용 사다리를 설치했다. 물이 성인 남성의 종아리 높이 정도로 줄어들 즈음에야 두 사람은 옆구리에 청소도구와 스덴 대야를 끼고, 미끄러지지 않게 사다리를 꼭 붙들고 내려갔다. 이초원이 조그마한 물고기를 먼저 건져 담았다. 종수는 수조 바깥에서 두 사람 중 하나가 수조에 들어오라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며 딴 생각을 했다. 이 물은 흘러서 그럼 바다로 가는 걸까. 완전 진한 소금물에 더 바다같은 느낌을 내려고 혼합물을 섞은 것 같았는데 그럼 그 물이 밖으로 흘러나가면서…… 그래서 이 주변에 나무가 아직 새순이 안 자랐나. 강릉이나 부산 같은 바닷가 근처도 아니고. 하긴 커다란 아쿠아리움 같은 것도 그냥 서울 한복판에 있으니까 물을 끌어다 오는 건 애초에 문제가 아닌 걸까. 이런 지하에서 엉망진창으로 인어를 기르는 데에는 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

종수가 낮은 물에서 헤엄치는 병찬을 노려보고 있자 이태영이 수조 안쪽에서 통통통, 유리를 두드렸다. 종수는 유리 너머의 이태영을 빤히 보았다. 이제 수조의 물은 태영의 발목까지 내려왔다.

“종수 군. 인어를 일층에 있는 욕실에 데려다 줘요. 피부에 물도 좀 뿌려주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모든 게 다 주먹구구 식으로 굴러갔다. 층계참에 선 종수는 깨달았다. 종수의 고조할아버지는 인어라는 존재에게 더 나은 환경을 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인어가 이곳 환경이 안 맞아서 죽는 건 제 탓인 것 같아 속상하고 싫은데, 저 혼자 스트레스 받아서 뒈지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원시적인 무심함이 몸에 밴 사람. 그래서 인어가 ‘말을 듣지 않으면 나뭇가지를 꺾어와 매질을 할 수 있는’ 사람. 존나 옛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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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에서 건져낸 인어를 들춰업고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동안 종수는 병찬의 냄새나고 미끄러운 몸을 잘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숨쉬는 방법이 어색할 만큼 긴장했다. 깊은 수조 바닥으로 몸을 뒤틀어 빠져나가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과는 다르게 병찬은 얌전히 종수의 등에 매달려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온 종수는 층계참에서 잠시 병찬을 내려놓았다. 짧게 꾼 꿈이 뒤숭숭하기도 했지만 워낙에 드러난 수조가 깊어 내장이 졸아 붙은 느낌이었다. 종수는 심호흡 한 번 크게 하고 한쪽 팔에는 병찬의 어깨를, 다른 한쪽은 굽혀지는 꼬리를 안았다. 물비린내가, 바다생선의 짠내가 종수의 가슴에서부터 훅 끼쳐왔다. 안은 폼이 어설펐지만 이번에도 병찬은 이번에도 반항하지 않고 종수에게 안겼다.

인어를 안고 일층으로 올라오는 데에 필요 이상으로 손바닥과 겨드랑이에 땀이 났다. 병찬의 몸에서 흘러나온 물과 뒤섞여 더 끈끈했다. 종수는 인어를 제 방에 있는 욕실로 데려갔다. 인어가 생각보다 묵직해도 아주 무겁지 않다는 걸 알았다. 종수의 예상인데 병찬의 뼈가 인간과 달라 생선과 비슷한 질이 아닐까 싶었다. 종수는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숙여 인어를 욕조 안에 내려놓았다. 수전을 열어 물 온도를 맞췄다. 따뜻한 느낌이 드는 정도로 맞춰두고 배수구를 마개로 막았다. 소금물이 아닌 수돗물로 욕조에 채워넣었다. 인어를 안은 것만으로 걸친 반팔이 푹 젖었다. 관자놀이가 두근두근 울렸다. 내려다 본 욕조 속 병찬은 조금 추워보였다. 한국의 3월은 병찬이 살아온 물 속보다 훨씬 추웠다.

인어는 종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한 번 씩 눈을 끔뻑일 때 보이는 눈꺼풀 아래의 얇은 막이 닫혔다가 열리는 게 보였다. 얇고 투명한 막이 병찬의 각막을 한 겹 더 감싸고 있었다. 무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채지 못하겠다. 종수는 병찬이 물이 없는 곳에서는 아가미로 호흡하지 않는 게 신기했다. 인어는 이중호흡이 가능하구나. 그래서 욕조 속에 잠긴 병찬이 더 사람 같았다. 종수는 낮게 호흡을 이어갔다. 밤부터 요란하게 뛰기 시작한 심장의 원인을 알고 싶었다. 심호흡 끝에 입을 열었다.

“어제 팔꿈치로 얼굴 쳐서 미안해. 맞은 줄도 몰랐지만…… 그래도 미안.”

어제 저녁에 병찬에게 말하지 못한 사과를 끄집어냈다. 입밖으로 내뱉으니 초라했다. 병찬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역시 인간의 언어를 인어가 이해하지는 못하는 듯했고 언어로 소통하는 일이 훨씬 몸에 익은 성인 최종수만 어쩔 줄 모른다. “야, 미안하다고.” 이번에도 병찬은 종수를 보며 비릿한 냄새만 풍기는 게 전부다.

종수는 인어의 아가미에 제 입술을 댔다. 그건 사과의 의미가 아니었다. 부글부글 들끓는 욕망과도 거리가 멀었다. 은근한 호기심? 그것도 아니었지만 종수는 참을 수 없는 충동에 못 이겨 병찬의 턱 아래에 빨간줄처럼 그어진 아가미에 입을 맞췄다. 지금 당장 입을 맞추지 않으면 종수 자신이 하루 종일, 지독할 만큼, 강박적인 도착증 환자처럼, 병찬의 아가미만 생각할 게 뻔했다.

그러나 코 아래에서부터 확 끼쳐오는 비린내에 종수는 몸을 뒤로 젖혀서 뺐다. 입술 끝만 닿았을 뿐인데도 바다에서 건져올린 생 미역을 입 안 가득 집어먹은 것처럼 혀를 마비 시키는 것 같은 짠내에 종수는 정신을 못차렸다. 미지근한 수돗물이 콸콸 나오는 데에 입을 씻어도 해결되지 않았다. 종수는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비틀거렸다. 무릎 꿇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욕조 옆 세면대에 섰다. 종수는 헛구역질을 했다. 산에서 끌어오는 찬물로 입을 다급하게 헹궈냈다. 그 뒷모습을 욕조 속 인어가 웃으면서 지켜봤다. 끼륵끼륵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웃었다. 인간처럼 낄낄 웃는 모양새였다.

종수는 계면활성제로 병찬의 미끄덩거리는 몸을 박박 씻어서 비늘을 벗겨내고 지느러미를 끊어내고, 그리고 나서 그 몸을 닦고 말려서 포근한 침대 위에 올려둔 뒤 병찬에게 입 맞추고 싶은 인간적인 욕구를 간신히 참았다.

대신 종수는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병찬의 아가미에 입술을 댔다. 3초 쯤. 감정의 보드라운 표현보다는 악에 받쳐 저지르는 범법행위 같았다. 병찬은 거부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종수의 뜨거운 입술이 제 몸에 닿게 내버려두었다. 민감한 냄새에 메스꺼워하며 종수가 또 입술을 마구 씻어내자 병찬은 그런 인간이 재미있다는 듯 욕조에서 꼬리를 퍼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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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두 살. 종수는 학기 중 방학이 되어 한국에 들어왔다. 엄마와 아빠와 이틀 밤을 보내고 바로 경기도 끝자락에 있는 고조할아버지의 별장으로 왔다. 혼자서 시차적응을 하겠다는 핑계가 먹힐 줄은 종수도 몰랐다. 그렇게 아빠가 안 타는 국산차도 한 대 얻었다. 종수는 핸들을 잡고 카시트에 몸을 기댔다. 네비게이션에 찍힌 별장의 위치를 눈으로 흘깃거렸다. 미국의 건조하게 타오르는 여름과 한국의 끈적하고 습한 여름은 달랐다.

한국에 들어와 솜털 위로 촘촘하게 내려 앉는 습기에 질색할 틈도 없이 종수는 별장의 제 방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빠른 속도로 사시사철 고온다습한 환경의 지하 수조로 내려갔다. 영원히 낯설 것만 같은 습기의 불쾌 속으로. 그러나 이제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땀이 흐르면 닦으면 되었고, 옷이 젖으면 빨아서 말리면 되고, 식욕이 떨어지면 잠시 식사를 쉬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매년 종수가 별장에 오는 날이 수조 청소 날이 되었다. 병찬이 형을 위한다면 수조 청소를 일 년에 두 번은 해야 하는데, 너무 추운 겨울을 피하는 것도, 물탱크를 가득 채울 만큼의 톤 단위의 물을 끌어오는 것도, 게다가 요즘 들어 할일이 너무 많이 바쁘다고, 청소 한 번 하기 참 어렵다며 이태영이 웃었다. 그리고 그건 병찬이 인간들이 자신에게 소홀해도 살아갈 수 있는 인어라 가능한 일이었다. 병찬은 자신이 호흡할 수 있다면 수조의 상태가 어떤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종수는 청결하고 깔끔한 위생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병찬의 그런 너저분함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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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 청소에는 각자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다. 종수는 이번에도 제 방의 욕조에 병찬을 옮겨두고는 청소하러 떠나지 못했다. 병찬이 종수에게 가지 말라고 눈으로 말했다. 종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병찬의 곁에 남았다. 몸에 수분이 날아가지 않도록 피부 곳곳에 물을 뿌려주었다. 종수는 병찬과 욕조에서 보내는 이 시간이 좋았다. 병찬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의도가 분명한 몸짓으로 고개를 왼쪽 오른쪽을 젖혀 제 아가미를 보여주었다. 종수는 병찬이 인간을 닮은 행동을 할 때 좋았고, 인간과 아주 다른 존재 같을 땐 떨렸다. 종수는 옷을 입은 채 욕조 안으로 침범했다. 병찬은 종수를 환영하는 듯 꼬리를 움직이고 몸을 숙여 눈을 마주쳤다. 인어의 비린내 가득한 욕조가 아늑하여 종수는 이곳을 떠나 미국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다 까먹었다. 둘은 욕조에서 서로의 몸을 적시며 노닥거렸다. 문서 속 인어의 공격성은 종수에게 드러내지 않았다. 하긴 너무 오래 전의 기록이었다. 종수는 스물두 살인 자신이 할아버지 보다 오래 산 인어와 나뒹굴기엔 너무 어리다는 생각이 들어, 이번에도 그저 귀를 붉히며 병찬이 드러낸 아가미에 입을 맞출 뿐이다. 찝찝한 냄새와 맛이다. 그럼에도 이 순간의 평화는 방해 받지 않아야 했다. 이태영도 이초원도 인어와 함께 욕실에 들어간 종수를 찾으러 오지도 않아 도움이 된다.

인어를 업고 욕실에 올라간 종수가 한 시간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 호스를 끌어와 수조 안쪽에 묻은 비눗물을 향해 물을 뿌리던 이초원이 “어휴, 저 염병할 것들.”이라고 중얼거렸다. 인공조약돌에 낀 바다이끼를 솔로 씻어내던 이태영이 간만에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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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조 청소를 끝낸 다음날 아침. 종수는 제 방에서 차근차근 옷을 벗었다. 미국에서 산 수영복 세트를 꺼내놓았다. 허벅지와 아랫배 아래까지 짠짠하게 잡아주는 검정색 남성 실내 수영복이다. 종수는 수영복을 챙겨입고 또 가방을 짊어진다. 터덜터덜 지하 수조에 내려왔다.

층계참에 선 종수는 몸을 쭉쭉 펴며 스트레칭을 했다. 발꿈치를 들고 제자리 뛰기를 50회 씩 두 번, 총 100회를 했다. 가슴 아래가 통통통 뛰기 시작하고 뒷목에 땀이 슬쩍 베어나올 때 머리를 쓸어올려 수영모를 쓴다. 흐트러지는 머리카락 하나 없도록 수모를 꼼꼼하게 쓰고 위에 수경을 올렸다. 두 제품 모두 무난한 검정색이다. 그리고 오리발도 단단하게 꼈다. 종수는 중요한 수술에 들어가는 외과의사처럼 차분하게 심호흡을 했다.

수영복을 입고 있던 종수가 오리발 까지 끼는 걸 아래에서 멍하니 보고 있던 이초원이 얇은 반팔 소매를 걷으며 물었다. 그의 손에는 정원용 물뿌리개가 들려 있었다.

“그게 다 뭐야?”

종수는 수경을 눈두덩 위로 올렸다. 수경을 썼을 때의 눈가 주위를 누르는 적당한 압박감은 이제 익숙해졌다. 팔을 귀 뒤로 넘겨 쭉 스트레칭을 하며 이초원을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미국에서 취미로 수영을 배웠어요. 이제 웬만한 건 다 해서 스쿠버다이빙 자격증이라도 딸까 싶기도 하고요.”

말을 끝낸 종수는 수조 안으로 잠수했다. 공기방울이 제 얼굴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어느 새 병찬이 종수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종수는 오리발을 굴러 물장구를 쳤다. 수영장에 놀러온 연인처럼 병찬과 함께 수조에서 헤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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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 동물을 기른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싶었다. 종수의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인어는 종수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듯이 보였다.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종수는 인어와 같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도 이태영도 이초원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어는 종수가 오면 기뻐하는 듯 수조에서 이리저리 헤엄치다가 다시 유리에 붙어서 투명한 벽 너머 종수를 바라보고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깊게 잠수하듯 아래로 내려왔다. 인어가 어수선하게 움직일 때마다 자잘한 기포방울이 보글보글 올라와 인어를 감쌌고 그것은 금가루처럼 반짝이며 빛났다.

그 다음 날에도 종수는 오리발을 끼고 수조에 풍덩 내려왔다. 이번에는 농구공을 들고 왔다. 병찬이 재빠르게 다가와 종수의 손에서 농구를 채간다. 뒤늦게 종수의 얼굴을 살폈다. 종수는 수경 덕분에 물속에서 정확히 병찬을 볼 수 있었다.

따뜻한 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괴이한 존재를 보고 있으면 종수는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좋았다. 어떤 인간 관계든 사람을 온전히 처음부터 끝까지 알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상대가 종수에게 보여주는 딱 거기까지만 이해하면 될 때. 그 때 병찬은 종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전달하려는 듯 눈을 마주쳐 온다. 그러면 종수는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짧은 전능감이 머리까지 둥둥 울리고 사라졌다. 인어는 종수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종수는 받아들인다. 아직 사람이라고 말하기 미묘한 어린아이들끼리의 의사소통처럼 몇 단계를 퇴행한 듯 단어와 문장들은 모두 속으로 삼켜야만 했다. 인간은 언어에 얼마나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나. 머릿속에 스치는 생각 조차 한국말로 하고 있는데. 알 것만 같을 때에 더 모르는 법이었다. 종수는 물 바깥에서 숨을 쉬었다. 헥헥 거리는 동안에도 인어는 종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농구공을 품에 끌어안으며 종수에게 물을 튀기고 오리발 한쪽을 벗겨내고 수경과 수모를 빼앗는다. 그러면 또 종수는 끝까지 병찬을 잡으러 갔다. 병찬이 빨리 물보라를 일으키며 사라져도 그 뒤를 쫓았다.

종수는 입술이 새파래질 때까지 인어와 함께 수조에서 첨벙첨벙 헤엄쳤다. 농구 규칙은 다 무시 되고 공던지기 놀이를 했다. 사방에 물이 튀었다. 종수의 수모는 병찬이 깨물어서 뾰족한 잇자국 모양 그대로 빵꾸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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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는 샤워기를 들어 비린내가 온 몸 곳곳에 묻은 몸 위로 물을 뿌렸다. 자신이 가져온 여행용 샴푸로 머리를 감고 바디샴푸로 거품을 내어 몸을 씻어내도 병찬의 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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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들여 다 씻었다. 젖은 머리를 말리고 이제 침대에서 잠을 자야 하는데 지하실로 또 내려가고 싶어진다. 수조 옆에 이불을 깔고 누워 병찬의 옆에 있고 싶었다. 물 비린내고 뭐고 다 상관없었다.

종수는 결국 지하 수조로 내려왔다. 인공 태양광 LED조명은 꺼지고 수조의 끝을 밝히는 연한 하늘색 불빛이 은은하게 빛나 수조는 달이 비치는 밤바다를 연상케 했다. 이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이 공간을 아는 타인은 이태영과 이초원, 그들의 나이 많은 가족 몇 명이 전부다. 그리고 그들은 어차피 종수가 허락해주지 않으면 더는 이곳에 발을 들일 수 없었다. 이 별장과 수조, 그리고 수조 속 박병찬은 계약 처리가 완료 되어 종수 자신의 소유였으므로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물론 그렇게 표독스럽게는 굴지 않았다. 종수가 한국에 없는 동안 박병찬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고, 이태영과 이초원은 인어 병찬에게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들이었다.

종수가 수조로 다가오자 잠들지 않은 병찬은 종수를 알아채고 유리벽 가까이 헤엄쳐서 다가왔다. 병찬의 아가미가 자잘하게 열리고 닫힌다. 병찬의 호흡에 종수도 따라 숨을 쉬었다. 종수가 보기에는 병찬이 종수를 향해 웃는 것 같았다. 종수가 이곳에 오기 전 이초원이 적어둔 인어관찰 문서에는 인어의 미소는 신생아의 것처럼 불특정 미소라고 적혀 있었지만 종수의 생각은 달랐다. 분명히 병찬은 종수를 보며, 눈을 마주치며 웃고 있었다. 지하실은 공기가 습해서 금방 등부터 따뜻해졌다. 종수는 수조 벽에 이마를 꿍 기댔다. 그에 맞춰 병찬도 장난스레 유리벽에 제 정수리를 툭 댄다. 종수를 따라한다. 병찬은 종수가 하는 것을 따라하고 싶어하고 종수에게도 제가 하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했다. 마음을 깊이 나누는 데에는 언어적 소통 같은 것은 거추장스러웠다. 말로 하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었다. 종수는 미국에서 농구를 하는 동안 사람의 신체의 움직임과 비언어적 태도를 읽어내는 데에 이제 제법 능숙해졌다. 말을 못하는 사람도 이 세상에 버젓이 살아가고, 키우는 반려동물과 평생을 약속하는 사람도 있는데. 종수라고 병찬과 살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종수는 이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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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세 살 종수는 방학 때에나 한 번씩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족끼리 시간을 보낸 후 나중에는 별장에 와서 혼자 시간을 보냈다. 이렇게나마 병찬에게 얼굴을 보인다면 잊지 않고 기억해줄까. 기억하는 것 같아서 아직은 다행스러웠다. 종수는 자신이 병찬에게 잊힌다고 생각하면 온몸에 두드러기가 오를 것만 같아서, 아주 잠깐 농구하지 않는 자신의 삶도 상상해 본다. 2초 정도 고민하고 종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종수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농구도 병찬도 제 손아귀에 넣어두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면 종수는 차라리 지하 수조 속 병찬이 장난감으로 갖고 노는 조약돌 따위가 부러워졌다.

종수는 병찬과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럴 자신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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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이규를 만났다. 이규는 대학교 2학년 때 구단에 입단하여 프로로 뛰고 있었다. 같은 팀에는 강인석이 있다. 이규는 종수에게 한국에 들어올 예정인지, 국내리그를 생각하고 있는지 물었다. 종수는 자신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도 희미해져서 “졸업하고도 농구만 할 수 있음 어디든 좋아.”라고 얼빠진 소리를 했다. 이규는 사람 좋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종수 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그게 무슨 말일까. 이규는 종수의 대답에서 무엇을 이해한 것일까. 종수는 체념에 가까웠는데 이규는 열정과 희망을 느낀 것일까. 종수는 기운이 빠졌다.

대형 쇼핑몰에서 만나 식사와 커피를 해치운 종수와 이규는 서점을 구경했다. 이규는 언제나처럼 이제는 구역이 좁아진 무협소설 코너를 향했고 종수는 발 닿는 대로 걸어다녔다. 아이들이 모여 있는 동화책 코너가 눈에 띄었다. 인간의 좁은 상반신에는 조가비 브래지어를 가슴에 차고 물고기의 하반신을 가진 빨간 머리카락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눈에 들어왔다. 디즈니 사에서 만든 인어공주다. 종수 허벅지에도 머리가 닿지 않는 여자아이들이 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종수의 커다란 손이 인어공주 책을 집어들자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종수가 우두커니 서서 글씨보다 그림이 많은 <인어공주 디즈니 프린세스 무비 스토리북>을 한장한장 펼쳐 보자 허리 밑에 있는 아이 중 하나가 안경을 고쳐 쓰며 똑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디즈니에서 만든 인어공주는 해피엔딩이고 안데르센 동화랑은 다르니까 차라리 이걸로 보세요.”

종수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저를 향한 것을 알고 적잖이 놀랐다. 종수는 아이의 열의에 멈칫대며 빨간머리 인어공주는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 아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동화책을 들어서 표지부터 보았다. 이제는 노란머리 인어공주다. <인어공주>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저자. 이번에는 그림보다는 글씨가 좀 더 많은 초등학교 저학용 동화책이었다.

“그 책 사려고?”

어느 새 종수 뒤로 다가온 이규가 물었고 종수는 어어, 작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변명할 말을 못 찾고 애인 유무 여부도 모르는 이태영을 결혼부터 시켰다. “할아버지랑 일하는 비서가 결혼했는데 곧 아이 낳거든. 성별이 여자애래서…… 이런 거 사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하고…….” 이규가 웃었다. 신생아가 읽기에 너무 수준 높은 거 아니냐며. 종수는 이마가 창백해지고 목덜미부터 귀끝까지 붉어졌다. 사람들과 섞여 있어도 말을 하지 않는 게 편안했다. 유학을 가는 동안 한국어와 영어가 종수의 내부에서 복잡하게 뒤섞인 탓은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늘 그래왔다. 차갑게 머리를 식혀 몸과 시선으로 이야기 하는 스포츠가, 그 비언어적 소통을 잘하면 잘할 수록 종수 혼자서 코트와 공을 독차지해도 그럭저럭 경기가 굴러가는 농구의 세계가 종수가 선택한 안전함이었다. 어렸던 종수가 고르고 골라 정착한 농구와 아주 비슷한 수중 세계, 그 세계는 별장 지하에 있었다.

종수는 차를 몰고 별장으로 돌아왔다. 별장에는 이태영도 이초원도 없었다. 수조 청소를 위해 사흘 정도만 머무르고 간다더니 정말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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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수조 속 인어와 놀고 돌아온 종수는 침대에 뻗었다. 지하에서 잠을 자보려고 두 번 정도 시도를 해봤는데 공기 때문에 숨 쉬기가 어려워, 잠은 계속 제 방에서 자기로 했다. 종수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문지르며 봉투에 담긴 책을 꺼냈다. 페이지를 한장 한장 넘겼다. 조숙하고 똑똑한 아이 덕분에 헷갈리지 않고 동화책을 잘 산 것 같아 가슴에서부터 흡족해 했다. 병찬이 종수의 옆에 누워서 천연덕스럽게 ‘야 최종수. 뭐 봐?’ 하고 물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땐 종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상상 속 박병찬을 거부했다.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는 ‘저 멀리 드넓은 바다로 나가면……’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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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책을 캐리어에 싣고 미국의 학교로 돌아갔다. 읽고 읽고 읽어서 종수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외우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인어공주는 솔직하고 뜨겁고 사랑을 위해서는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제 삶을 끝내는 데에 스스럼 없다는 점에서 조금은 돌아 있었다. 종수는 그녀의 사랑이 좋았다. 맹목적이어야만, 목숨을 내바쳐 죽을 만큼 좋아해야만 진짜 사랑 같았다. 이 책은 말도 안 될 만큼 절절한 사랑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어공주를 읽고 사랑을 간접 경험해도 비극적이거나 슬프다고 느끼지 않은 것은 종수가 초등학교 저학년 소녀가 아니라서, 운동하는 뇌를 갖고 태어나서, 제 곁에 박병찬이라는 인어가 물거품이 되지 않고 살아 숨쉬고 있어서 그렇다. 병찬은 자신을 치료하고 구해준 인간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만한 인어도 아니었다. 종수는 안도했다. 동시에 서글펐다. 이 동화 속 주인공이 병찬이 아니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어 이야기가 종수와 병찬의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종수는 인어공주 책 커버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

스물네 살. 종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국내 리그 드래프트를 기다리는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별장에서 지낼 계획이었고 이태영도 이초원도 부르지 않았다. 종수는 젖살이 빠졌고 더는 키가 크지 않으며 몸무게는 불어났고 여전히 푹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전세계 적으로 사랑받는 동화책을 중얼중얼 읽는 어른이 되었다. 여전히 유튜브 댓글을 찾아보고 백마디 칭찬보다 한마디 비난에 몸이 굳었다. 좋은 말을 하는 사람들은 종수의 비위를 맞추고 싶어하는 사람들처럼 느껴졌고,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아군이라는 것은 고등학생 때부터 알았으나, 사실 그들이 적보다 더한 존재라는 것도 깨닫고 돌아왔다.

미국에서는 많은 일이 있었다. 다 놓아버리고 한국에 들어가기 위해 거의 일년 전부터 비행기 편도 티켓을 끊었다. 일정보다 두달 먼저 이르게 캐리어에 짐을 챙겨넣는 종수를 보고 있던 플랏메이트가 “너 정말 재수 없는 꼴통이구나.” 라는 말과 함께 종수를 일으켜 세웠다. 종수는 그 말에 화를 내려고 했는데 그는 종수의 어깨를 두 번 토닥이고는 차키를 집어들었다. 플랏메이트가 종수를 덥썩 끌어안았다. 짧은 포옹이 이어지는 동안 종수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플랏메이트가 종수의 등을 두들기고 포옹을 풀어냈을 때 종수는 어금니에 힘이 빠지지 않을 만큼 씩씩댔다. 플랏메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며 웃었다. 두 사람은 차를 타고 바다로 갔다.

종수는 해변에 도착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고 플랏메이트는 창문을 내려놓은 채 노래를 크게 틀어 따라 불렀다. 가까이에 바다가 있어도 종수는 와 본 적이 없었다. 런닝 코스로 잡기엔 플랏과 거리가 너무 멀었고 학교와는 더 멀었다. 차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느긋하게 바다를 보러 올 마음의 여유는 또 없었다. 그런 건 종수에게 사치스럽고 버거운 일이었다. 플랏메이트는 갓길에 차를 멈춰 세우고 불어오는 바다내음을 들이켰다. 종수가 익히 알고 있는 지하 수조의 냄새와는 또다른 바다냄새였다. 짠내 섞인 바람이 불어와 종수의 검은 곱슬머리를 헝클였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종수는 울음이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걸 느꼈지만 꾹 참았다.

“오, 저기 봐.”

오렌지 빛으로 물드는 넓은 바다를 보고 있던 플랏메이트가 흥분한 목소리로 종수의 어깨를 흔들었다. 종수는 숨을 참고 플랏메이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먼 곳에서 날쌔고 작은 고래 두 마리가 몸을 바다 위로 띄워서 점프하듯 이동하고 있었다. 그 몸짓이 인어 같았다. 이태영이 저기 온다고 가리키던 수조 속 인어 병찬을 올려다 보던 일이 종수 마음 아래에 넘실거렸다. 귀한 경험을 했다고 플랏메이트가 웃고 있을 때 종수는 경악했다. 눈물이 쏙 들어가게 싫었다. 고래는 금방 저 멀리 헤엄쳐 사라지고 플랏메이트는 휘파람을 불며 속 편한 소리를 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지 않아?”

종수는 플랏메이트에게 꽥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을 정말 힘겹게 참아냈다.

*

그렇게 번개 맞는 듯이 알게 되는 것들이 불편하다. 종수는 진짜로 알고 싶지 않았다.

종수가 바라는 건 그런 게 아니다. 계속 수조 속에 병찬을 넣어두고 지켜보고 싶었다. 내 것이라고 안심하고 싶었다. 우리가 ‘우리’여도 줄곧 괜찮을 거라고, 병찬이 자신을 바다처럼 그리워하는 대신 진짜 바다는 새까맣게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인어공주도 모든 걸 버리고 왕자에게 왔듯이, 그리고 되돌아가지 않고 아침 햇살 속에서 물거품이 되길 선택했듯이. 종수가 병찬과 바라는 건 그렇게 치명적인 관계였다. 동화에도 나오는데 뭐가 문제냐고. 그저 서로에게 서로가 있어주면 되는 거 아닌가. 수명이 허락하는 한 그렇게 살아도 되지 않은가.

지하수조로 내려 온 종수는 곧바로 층계참에 내려 섰다. 다가온 병찬에게 자신이 읽은 책을 읽히게 하고 너도 나 외의 다른 인간과 이런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은 것을 어떻게든 전하고 싶어서 손짓발짓을 한다. 종수와 병찬은 눈을 지그시 마주쳤다. 병찬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종수가 오래 읽은 인어공주 동화책을 잡아챘다. 종수가 책을 붙잡기 전에 물 속으로 가버렸다. 오리발도 수영복도 없는 종수는 하는 수 없이 수조 옆으로 내려왔다. 의자에 앉으며 수조 속에서 헤엄치는 병찬을 보았다. 동화책의 인어 삽화에 반응이 있을까 싶어서 병찬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병찬은 물에 젖어 흐물흐물 연약해진 책을 한장한장 넘기다가 북 찢는 데에 재미를 느끼는 듯 그 행위를 반복했다. 종수의 온기로 닳고 손때가 묻은 동화책인 줄 모른다. 한국에 남은 병찬이 그리울 때마다 종수가 꺼내 읽은 인어공주 동화책은 병찬의 손에 의해 물 속에서 갈갈이 찢겼다.

*

결정적인 건 그 이후에 더 많은 정보들이 종수에게 쏟아져 들어온 데 있었다. 동물을 방생하는 불교 행사부터, 수의사들이 다친 거북이를 치료하고 바다로 돌려보내주는 다큐멘터리, 엄마가 틀어놓은 텔레비전에서 범고래와 인간의 우정-그 마지막에는 범고래를 바다로 돌려보내기 위한 소년의 노력이 담긴 영화, 한국의 동물원에서 애지중지 키워놓고 본국으로 되돌려 보내는 판다, L사의 아쿠아리움 앞에서 아직도 바다로 돌려보내지 않는 벨루가 고래를 위해 벌이는 시민단체의 시위까지. 그들 모두가 말했다. 박병찬을 자연으로 돌려보내줘. 더는 그 아이를 유리벽에 가둬놓지 말아줘. 너는 그럴 수 있잖아.

“하지만 지금은 일본에서 오염수도 방류하고 사람들이 바다에 쓰레기도 많이 버리는데……. 너무 위험하잖아. 박병찬 네가 막 이곳에 왔을 시절이랑 완전히 달라졌을걸.”

미국은 분리수거도 안 한다고. 그런 바다로 돌아가고 싶어? 종수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혼잣말을 했다. 욕조에 담긴 병찬은 또 눈꺼풀만 감았다가 뜨며 종수에게 꼭 안겼다. 열리고 닫히는 병찬의 아가미에 종수에 입을 맞췄다. 혀감각이 사라질 만큼 짙은 비린내가 종수의 입술 너머로 끼쳐온다. 욕조 가득 찬 물이 넘칠 듯 들썩였다. 인어는 땀이 나지 않는다.

*

그럼에도 종수는 병찬을 바다에 보내주고 싶어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온다습한 지역의 바다를 가보기로 했다. 그래서 2리터 생수통에 그 바다의 물을 담아와 병찬을 집어넣은 좁은 욕조에 부어주는 것이다. 그 바닷물 중에 병찬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물이 있을 거다. 병찬을 데리고 거듭 비행기를 탈 수 없으니 종수가 고안한 방법이 그나마 최선이었다. 아니, 종수는 잘 모르겠다. 야생의 감각을 다 잃었을지도 모르는 인어를 다시 깊은 바닷속으로 보낸다는 건 과연 옳은 일일까. 인어의 몸에 수분이 사라지지 않도록 촉촉히 물을 뿌려주고 숨을 쉴 수 있게 보살피며 비행기를 몇 시간씩,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그게 가능한가.

종수의 머릿속에는 수 없이 많은 실패와 성공이 뒤섞여 어느 계획이 가장 적절했는지는 지워지고, 다시 쓰고 또 사라졌다. 생각이 길어질 수록 확신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 할 시간에 슛 연습을 더 하고 자유투 성공률을 보다 더 높이는 게 낫다 싶으면서도, 이건 종수가 생각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이건 또 다른 동물 유기가 아닐까. 인어 박병찬은 이제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면 어떡하지. 돌려보냈다가 다른 상어한테 잡아먹히기라도 한다면. 병찬이 다른 인간의 손에 죽는다면. 그 모든 것도 아니고 병찬이 종수에게 버림 받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면. 거기까지 생각하면 종수는 헤아릴 수 없는 모든 파도에 온 몸이 얼얼하도록 처맞는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종수는 마음을 정했다. 어디에도 벽이 없는 따뜻한 바닷속을 거침없이 바람처럼 헤엄치는 병찬을 상상할 수 있었다. 아끼던 인간이 자신을 두고 떠났다는 느낌을 받게 되더라도, 종수가 떠난 곳에서 멀리 가지 못하고 몇날 며칠 방황하더라도, 종수가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게 된 병찬은 깊은 바닷속으로 헤엄쳐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병찬이 오래 떠나왔던 아름답고도 위험한, 그들만의 법칙이 존재하는 세계로 성실하게 헤엄쳐 되돌아갈 것이다. 병찬은 그런 인어였다. 그건 종수가 말로 설명하지는 못해도 그냥 알 수 있었다. 병찬의 까만 눈을 보고 있으면 모를 수 없었다.

*

수조 끝 층계참에 걸터앉아 종아리를 물에 담근 종수에게 병찬이 헤엄쳐 다가왔다. 좁은 입술에 물을 머금고 장난을 치듯 종수의 무릎 위로 물을 푸, 뱉어냈다. 장난 치지 말라는 듯이 종수는 헛기침을 했다. 엄숙한 목소리로 누구보다 병찬에게 먼저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잘 들어 봐, 박병찬.”

병찬은 앞으로 쏟아져 달라붙은 머리카락-그것도 지느러미의 일부일 것이다-을 쓸어올렸다. 정말로 병찬은 종수의 말을 알아듣는 것처럼 보였다. 그 감각은 종수를 끓어오르게 하는 종류의 힘이었다.

“너를 바다로…… 돌려보내 줄 거야.”

힘있게 말하는 듯 하더니 끝으로 갈수록 목소리가 작아졌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말을 내뱉자 마음이 심란해졌다. 병찬은 종수의 무릎에 제 미끄러운 손을 대고 목덜미의 아가미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귀를 기울이는 사람처럼 종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종수는 억지스럽게 말을 계속 이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듯 혼란스러운 얼굴이었지만 계획은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것이라 입밖으로 술술 흘러나왔다.

“내가 바닷물을 가져올 거야. 여행을 자주 가야겠지만 여기 공기처럼 고온다습한 지역의 바다만 골라서 다녀올 거라서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병찬의 꼬리 지느러미가 수면 위로 솟구쳐 팡, 내리쳤다. 종수의 얼굴에 물이 튀었다. 야, 나 진지하다고. 종수가 얼굴에 튄 물을 손바닥으로 닦아냈다. 계속 말하자면.

“바다에서 물을 퍼오면 박병찬 너를 욕조에 넣고 그 물을 부을 건데.”

종수는 병찬을 향해 손가락을 접어 검지 중지 둘만 남겼다. 2리터 페트병 세 병씩 받아올 거야. 2리터 세 병이면 6리터야. 그 정도면 괜찮겠지. 병찬은 종수의 손가락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또 깊게 잠수하고 떠올랐다. 수조 끝으로 향하더니 돛단배처럼 물위를 둥실둥실 떠 다니는 농구공을 향해 빠르게 헤엄쳤다. 그 공은 몇 년 전 종수가 병찬에게 선물로 준 농구공이었다. 병찬은 농구공과 함께 다시 종수에게 왔다.

“야 박병찬. 집중해. 이건 네 도움도 중요한 거야. 알겠어?”

대답할 리 없다는 걸 아는데도 종수는 병찬에게 대답을 강요하듯 말했다. 병찬은 꼬리를 흐느적대며 종수를 본다.

“네가 물 냄새를 잘 맡아서 네가 온 바닷물을 발견하면 나한테 알려줘야 해.”

다 좋다고 하면 안 된다고. 알아 들었어? 이 계획은 그게 전부였다. 해외의 여행지에서 바닷물을 받아와 욕조에 담근 인어에게 부어준다. 우물처럼 깊은 병찬의 검은 눈동자에 종수가 담겼다. 머릿속에서는 꽤 거창했던 것 같은데 또 막상 꺼내니 별 거 없었다. 병찬은 또 고래가 낼 법한 소리를 내며 종수의 발아래를 헤엄쳤다. 수조에 넣은 종수의 발가락에 스치는 인어의 지느러미가 실바람처럼 흘러갔다.

“이거 아직 이태영이랑 이초원한테는 말 못했어.”

하지만 그 두 사람도 종수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고 당연한 듯이 웃으며. 병찬이 농구공을 안고 종수에게 온다. 종수에게 공을 준다. ‘종수야 내가 알아듣지 못할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같이 놀자.’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종수는 탄탄한 농구공을 붙잡았고 그것을 신호로 여긴 병찬이 또 재빨리 수조 끝에서 종수가 공을 던져주길 기다렸다. 풍덩풍덩 위아래로 잠수하다가 몸을 위로 띄웠다. 그 모습이 미국의 바다에서 잠깐 본 한 쌍의 고래 같았다. 종수는 허공에 속삭였다.

“너한테 가장 먼저 알려주는 거야.”

당장은 아니더라도, 내가 물론 국내 리그에 진출하게 되면 바빠질 테니까 일 진행은 더디겠지만.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너의 바다를 발견하면…… 갈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어떻게든 다 알아볼 거야. 그때까진 같이 있는 거야. 이태영이랑 이초원도 불러서 계속 같이 수조 청소도 해야 하고. 지금 당장의 이별이 아니야. 이건 종수가 비겁하게 여기는 포기와 달랐다. 이건 합의가 아니라, 그보다 더 너머의 무언가였다. 종수는 농구도 병찬도 여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

종수가 농구공을 던져주지 않자 병찬은 의문을 품은 얼굴로 다시 헤엄쳐 왔다. 무언가를 잡고 흔들고 갖고 놀기엔 지나치게 부드러운 뼈로 이루어진 손이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섬유처럼 반들반들한 병찬의 손이 종수의 무릎을 잡았다. 종수는 병찬을 10초 넘게 바라본다. 자신의 말과 전하고 싶은 감정이 공기를 타고 병찬에게 넘어갈 수 있도록. 코트 위에서 공을 눈으로 좇는 것처럼 집요하고 끈질기게 병찬을 보았다. 농구선수 최종수에게 남은 야릇한 습관이었다. 종수는 병찬이 자신에게 전하고자 하는 말을 어째서인지 알 수 있었다. 알 수 있다는 느낌과 차오르는 감각만이 형형하게 몸 안에서 빛을 발했다. 병찬이 종수를 위해 인간이 되는 기적 따위는 바라지도 않았다.

단 한 번도 와본 적 없었지만 이 별장에 자신을 위해 준비된 방과 인어 박병찬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 세상에 병찬이 있는 바다라면 그 곳이 종수의 바다가 될 것이었다.

*

종수는 인어와 함께 수조에 풍덩 빠졌다. 속눈썹과 이마 위로 가느다란 거품이 스쳤다. 종수는 안겨든 인어와 가라앉고 있었지만 무섭지 않았다. 젖은 비누처럼 미끌거리는 병찬의 몸을 놓칠까 안은 팔에 힘을 세게 주었다. 병찬은 얄밉게도 그 틈을 쏙 빠져나갔다. 종수 주변을 뱅글뱅글 탐색하며 돌았다. 그리고는 자유로운 몸짓으로 종수에게 다가온다. 병찬은 종수의 묵직한 몸을 등에서부터 붙잡아 제 품에 기대게 했다. 종수는 구부정하게 인어에게 안겼다. 둘은 춤을 추듯 헤엄치며 수조 속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역시나, 병찬은 지금 이 순간 웃고 있다. 기쁜 것처럼, 장난치는 것처럼, 이 땅에 사는 사람처럼. 종수는 소금물이 들어와 따가운 눈을 억지로 떴다. 홀린 듯 인어를 바라보았다. 병찬은 종수의 말을 알아들은 걸까. 마음이 전해졌을까.

폐 안쪽부터 죄이듯 숨이 막히던 종수는 병찬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병찬의 목, 공기가 빠져나가는 아가미에 입을 맞췄다. 여린 피부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를 생명처럼 머금었다. 병찬이 웃으면 탄산수 거품처럼 공기방울이 종수의 뺨을 스쳐 와르르 흩어졌다. 병찬의 아가미에서 입술을 뗀 종수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폐가 끊어질 듯한 통증 때문이 아니다. 종수의 입안을 가득 채우는 것은 몇 번을 입에 대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주 비릿하고 고약한 날생선의 맛, 잊혀진 바다의 맛이었다.

*

먼 곳으로 편지를 보내웁니다.

그리운 사람, 계신 곳은 좀 어떠합니까.

계실 적에 한 번도 그리웁다고 입으로 뱉어 본 적도 없으니 이 편지도 참우로 가식적입니다.

데려온 인어에 그대의 이름을 붙여놓고 벌써 몇 해가 흘렀읍니다.

인어를 먹으면 불로장생이 된다며 농처럼 하시던 말씀을 혹여 기억하십니까.

나는 처음에 애써 데려온 인어를 먹으려 하였는데

물 깊은 곳으로 떠난 그대의 야속한 이름을 붙여버린 탓에 어찌할 수가 없었읍니다.

도저히 고 아이를 먹거나 해치거나 하지는 못하겠읍디다.

이런 말하면 우스웁지만, 고 아이 눈이 반질반질 하니 그대를 닮았읍니다.

꼭 보여드리고 싶을 만큼 그대의 눈이었읍니다.

내 모든 삶을 그대에게 준다 약속했었지요. 그대는 아이고 필요 없다, 하였구요.

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읍니다.

펜을 쥐는 것도 고작입니다.

내가 강보로 싸매어 그대에게 저 발간 얼굴을 보여주었던 첫 아이를 혹여 기억합니까.

첫 아이도 후에 태어난 둘째 아이도 장성하였고

나는 노인이 되었읍니다.

내가 너무 늙어 어린 그대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면 어떡하지요.

고런 마음이 들면 숨도 콱 막히웁고 가섬 아래가 서늘합니다.

그렇다 해두, 내 겁 먹은 말에 그대는 또 산바람처럼 우스면서

여느 때와 같이 나의 이름을 다정히 불러주고는

고런 거 하나도 중하지 않다, 괘념치 말어라 하시겠지요.

그대, 어리고 겁장이였던 나를 용서하십니까.

그대를 잃고 오래오래 울었던 나를 가엾피 여기어주십니까.

이 삶에 끝 겨우 만나면 다시 나의 이름을 불러주시겠읍니까.

보고 싶읍니다.

한뉘 살아오며 그대를 한 시도 잊은 적 없읍니다.

주제 : 잊혀진 별장 / 잊혀진 바다 / 잊혀진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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