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Hard Day to Die

A Hard Day to Die 4

PITA BREAD by 22
25
0
0

* 약 뱅상

"둘이 사겨?"

물론 두 사람에게 전영중의 기분은 안중에도 없었다. 빠르게 둘을 훑은 박병찬이 턱을 괴었다.

"네. 티 납니까?"

"알아차려달라고 커플링까지 꼈는데 아무렴. 근데 커플끼리 붙어 앉지 않고 왜 방해일까?"

"기상호 표정 썩은 거 못 봤어요? 더 놔뒀으면 치한으로 경찰에 신고당하겠던데."

"하하, 경찰?"

그게 뭐. 경찰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다. 입국도 위조 신분일 테고, 신원조회 해 봤자 박병찬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 뜨겠지. 경찰과 협조해 구속하려 들면? 그땐 진짜 일이 커진다. 어디 쉽게 잡혀줄 사람인가?

전영중은 제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간 건 일단 숨기고 갑자기 방해받은 데이트에 기분 상한 연인의 표정을 지었다. 성준수가 작정하고 데려왔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믿으며.

"준수, 오랜만에 유명한 선배님 만나서 반갑긴 한데 무슨 일인지 나한테도 설명해 주지 않을래?"

"아니지, 전영중. 여기선 살갑게 대하는 게 더 이상하지. 너희가 내 이야기를 모를 리 없잖아."

지적은 일면식이 거의 없던 박병찬이 했다. 빙글빙글 웃는 입술에 전혀 웃지 않는 눈이 전영중을 향한다. 저런 사람이었나. 10년도 더 전, 육사에서 가끔 인사하던 박병찬에게서는 본 적 없는 짐승의 눈이다.

육군사관학교의 박병찬? 두 기수 위였지만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사람 좋고 똥군기도 안 잡는데 체력, 사격, 전술, 전공 어디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특히 격투에서 한 번도 패배한 적 없다는 백병전의 달인.

탐내는 부대는 많았고, 소대장 임관 1년 후 바로 특전사로 차출되어 해외파병 나갔다고 들었다. 미군과 합동 팀으로 활동했다고 들었는데 이 부분은 확실하진 않다. 당시 분쟁이 잦던 중동에 배치돼서 테러리스트 진압 작전에도 몇 번 들어가고, 훈장 몇 개 따고, 스물아홉에 소령 임관하는 거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다. 워낙 발 넓은 박병찬이었으니 그가 중동에서 뭘 했다는 업적을 모르는 사람이 간첩 취급당했다.

그리고 사건이 터졌다. 무리한 작전으로 부대원 몇이 죽고 박병찬은 목숨만 겨우 붙어 실려 왔다고 들었다. 다른 곳은 괜찮았는데 무릎에 평생 남을 부상이 생겨 결국 1계급 특진으로 의병제대. 그렇게 군과 인연이 끝난 줄 알았는데 박병찬의 이름은 반년 후 다시 화제가 된다. 당시 지휘관이었던 대령이 자택에서 말 그대로 멱이 따였고, 살해 시각 전후로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박병찬의 모습이 찍혔다. 그는 웃으면서 엘리베이터 폐쇄회로에 브이를 했다. 뒤늦게 박병찬이 입원했던 병동의 간호사들이 들었던 말이라며 살이 붙었다.

'찾아서 죽일 거다.'

혈압 재러 들어간 병실. 늦은 시간 휴게실. 재활하러 가는 길. 그는 평소와 같은 표정이라 잘못 들은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말을 몇 번이고 잘못 들었을 리가. 그렇게 박병찬의 1계급 특진은 없던 일이 되었고, 앙심을 품고 상사를 죽인 미친 박병찬 대위만 남았다.

여기까지는 전영중이 군에 있던 시절 들은 이야기다. 성준수가 국정원에 오자마자 그 미친 박병찬과 얽혔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적의를 드러낼 정도인지는 몰랐다. 다른 팀의 임무는 공유되지 않으니까. 박병찬이라는 사람 자체가 자신이 알던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전영중은 당혹감을 티 내지 않으려 애쓰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준수 말대로 경찰 부르고 정리하면 됩니까? 저야 이 자리 빨리 접고 준수랑 데이트할 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은데요."

"후배 새끼들이 하나같이 선배 공경할 줄을 모르네."

"커피 가져왔습니다......."

싸늘한 분위기 속에 기상호가 나타났다. 제가 앉았던 자리에 성준수가 앉은 걸 보고 눈에 띄게 안심하며 유리잔 두 개를 내려놓고 박병찬의 반대편에 앉는다. 새끼, 표정 좀 숨기라니까. 성준수가 노란빛의 크림이 올라간 커피를 단번에 반을 비웠다. 라테 쪽으로 손을 뻗던 전영중이 자연스럽게 아메리카노로 방향을 바꿨다.

"제 팀원한테 무슨 일로 연락했습니까?"

"상호랑 내가 보통 사이도 아니고, 한국 온 김에 얼굴이나 보려고 했지."

"퍽이나."

성준수의 빈정거림에 박병찬이 웃으며 소파에 몸을 묻는다. 길게 자란 앞머리를 매만지던 그의 입매가 조금 비틀렸다. 건방진 애새끼. 짜증 나게 구네. 어쩐지 사람 많은 데서 보자더니 눈에 띄는 행동을 묶으려는 개수작이다. 알고도 응해줬다지만 서서히 치밀어오르는 화를 누르기 어려웠다.

"그래, 피차 얼굴 길게 보기 싫은데 본론만 말할게. 상호 나 줘. 그럼 너 안 죽이고 여기서 끝낼 테니."

히익. 안 그래도 졸아붙어 있던 기상호의 어깨가 더 움츠러들었다. 테이블만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이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죽인다는 말에 미간을 구기고 박병찬을 보던 눈이 빠르게 마주친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죽인단 말이 나와? 넌 박병찬이랑 무슨 사이고? 그런 게 있는데요, 이게 눈빛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서요....... 기상호가 이번에는 제 팀장 쪽을 본다. 저 버리는 거 아니죠? 그런 간절함을 담아.

"뒷골목에 오래 있어서 잊었나 본데, 대한민국에서 인신매매는 불법입니다."

"이거 거래 아니고 기회를 주는 거야. 살려준다니까? 어차피 상호는 내가 데려갈 건데, 절차가 번거로워지니까 깔끔하게 주인들끼리 정리하는 대신 얹어주는 서비스, 그런 거."

"얘 공무원입니다. 국민이 주인인데 내가 어떻게 줍니까?"

"아하하! 준수 못 본 사이 개그가 늘었네. 그런 입에 발린 소리도 할 줄 알고."

입꼬리만 당겨 웃으며 그가 말한다. 새카만 눈을 마주하던 성준수가 짧게 웃고는 소파에 몸을 기댔다. 아쉬울 것 없다는 제스쳐다.

"이 년 만에 나타나 들쑤시는 거 보면 상호가 일을 잘하긴 해요? 러시아에서는 마땅한 사업파트너가 없나 봅니다?"

아니면 다 뒈졌거나. 작게 덧붙인 말에 그가 비뚜름하게 웃었다.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커피를 입에 가져간다. 아직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잔 너머로 그의 눈빛을 확인한 기상호가 불안해하며 깍지를 끼고 있던 제 손을 양 무릎 위에 올린다. 전영중도 제 몫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박병찬의 동태를 살폈다. 금방이라도 죽일 것처럼 날이 잔뜩 서 있었다.

"누가 들쑤시고 간 덕분에 같이 일하던 애들이 총 맞고 하늘나라로 갔거든. 아시안 파트너라는 이유로 쏴 갈겼더라."

"그럼 상호를 원할 게 아니라 그 자식들한테 복수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복수! 좋지! 근데 나도 앞뒤 안 재고 달려드는 머저리는 아니거든?"

"이번 입국, 브라츠크 놈들 쫓아서 온 거잖아요. 잡아서 갈아버리려고 "

"준수, 공부 많이 했다?"

 박병찬이 머그잔을 낮게 잡으며 말했다. 아직 뜨거운 커피가 성준수의 얼굴에 쏟아지는 상상을 한다....... 기껏해야 1도 화상 정도겠지만, 후속 공격이 있을 테니 무조건 막아야 한다. 전영중이 언제라도 튀어 나갈 수 있게 발을 당겼다.

"기상호 대신 그 세 놈 넘기는 걸로 하죠. 잔챙이 둘이 껴있긴 하지만 한 놈은 간부급이니 쓸모 있을 겁니다."

이어지는 말에 동시에 성준수를 본다. 박병찬은 웃고, 전영중은 얼이 빠진 표정이었다.

자리를 옮기자는 말에 네 사람은 골목을 걸었다. 박병찬의 임시거처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하잔다. 카페에서 정보나 사람 거래하기는 좀 그렇지. 맞지. 근데 나도 가? 전영중은 철저하게 망해버린 데이트를 곱씹으며 누굴 원망해야 할지 고르기로 했다. 지잉. 몇 번째 울리는 전화를 끊으며. 벌써 세 번째 걸려 오는 낯선 번호의 전화였다.

"받아봐야 하는거  아냐?"

"아냐. 모르는 번호야."

"받아봐. 자꾸 전화 오잖아."

등 뒤에 박병찬을 달고 전화나 받으라고? 평소면 성준수가 죽였을 테지만 전화를 받으라는 사람이 그 성준수다. 남의 전화기가 울리든 말든 신경 조금도 안 쓸 성준수. 사인이구나, 이거. 전영중은 전화를 받으며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음량을 최소로 줄였다.

"여보세요?"

-해외 공태성입니다. 친구한테서 걸려 온 전화인 척해주십시오. 팀장님 메시지 전달합니다.

"뭐야, 번호 바뀌었음 문자를 먼저 보냈어야지."

-전영중, 오늘 데이트 망가트려서 미안한데 어쩔 수 없었다. 도저히 우리팀 애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 네 도움을 받아야, 아니 시발 우리를 못 믿는다고?

"모르는 전화 안 받는 게 아니라, 받기 조금 그런 상황이었어."

전영중이 적당히 대답하며 이마를 짚었다. '태성아! 잡소리 말고 빨리 읽기나 해라!' 멀리서 타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잠깐 소란이 일었다. 준수야, 너희 팀 진짜 개판이다.

-진 부팀장이다. 일단 미안하다. 이 판, 내가 짰고 준수는 너 끼워넣기 싫다는 거 내가 몰아붙였다. 너 피해 안 가게 하려고 대가리 굴리다 나온 게 '데이트 중 우연히 만난 상황'이니까 준수 너무 미워하지 마라.

"지금 길게 전화할 상황 아니니까 용건만 말해."

타 부서 팀원이 작전 도운 거 알려지면 징계 먹을까 봐 우연을 가장했다는 말이다. 준수는 그런 작전마저 나한테 피해 갈까 봐 반대했고. 미안한 감정 하나 없이 이용해 먹으려던 건 아니구나. 하지만 내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면 당연히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준수 애인인 내가 안 도우면 누가 도와? 근데 타팀에 헬프쳐야 할 정도로 위험한 작전을 짠다고? 양가적인 감정이 안에서 휘몰아친다.

-6팀 만들어지자마자 제일 먼저 맡은 게 중국에서 밀입국 알선하던 박병찬 사업 터는 거였다. 그 새끼 간첩 밀입국시키고 대본까지 만들어줘서 진짜 탈북한 놈인 것처럼 방송에도 나오고 그랬거든. 그때 박병찬 한국 연락책이 상호였다. 희찬이는 상호 파트너였고. 애들이 일을 요상하게 잘해서 우리 쪽에 잡아다 취업시킨 건데, 일단 박병찬이 자기 밑에 애 빼돌렸다고 가진 원한이 첫 번째고.

진재유의 입으로 전해 듣는 요약본이 제법 정신 나갈 것 같았다. 전직 군인이던 놈이 간첩 밀입국 알선? 게다가 사업이 작살난 것보다 기상호 뺏긴 게 더 중요해?

-작전 중에 박병찬 무릎 또 박살 냈다.

"미치겠네."

무릎 때문에 영관급 모가지 따고 잠적한 놈인데 그걸 또 박살 냈다고. 진짜 겁도 없다. 그럴 거면 차라리 후환 없게 박병찬을 죽이기라도 했어야지.

-무릎 때문에라도 박병찬이 준수는 그냥 살려둘 리 없다. 네가 못 막으면 준수 죽는다고 생각해라. 상호가 돕지는 못할 긴데.......

이어지는 말을 듣던 전영중이 속으로 한숨 쉰다. 준수야, 너희 팀 진짜 어떡하냐. 목숨 걸고 작전 짜는 게 다가 아니라 팀장을 개무시하는데 이게 맞냐고, 성 팀장님아.

-—앉아라!

복잡하게 이어지던 생각이 외침에 끊긴다.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기 무섭게 머리 위로 바람 소리가 들린다. 타점을 벗어난 팔꿈치가 어딘가 적중했다. "피해?"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든 그대로 왼쪽을 막기 무섭게 으직, 액정이 박살 나고 전영중이 날아갔다.

"너네 팀 전화였구나? 이 새끼들 어디서 보고 있지?"

순식간에 두 사람을 날려버린 박병찬이 주변을 둘러본다. 허름한 단독주택 골목을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 너무 많아 특정이 어렵다. 요즘에는 CCTV로 추적하던가. 쯧. 혀를 차고 주머니칼을 꺼내자마자 왼쪽 눈을 감싼 성준수의 목을 노리는 칼날을 전영중이 팔뚝을 붙잡아 막았다.

"브라츠크 놈들 인계받는 걸로 얘기 끝난 거 아닙니까?"

"그랬는데, 너희가 바라는 대로만 되는 거 같아서 기분이 굉장히 별로다. 딱 준수만 죽자, 응?"

목 바로 앞까지 들이밀어진 칼날이 파르르 떨린다. 조금이라도 힘에서 밀리면 바로 찔린다. 왼손으로 버티던 전영중이 박병찬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이면서 기상호에게 시선을 던졌다. 햄, 괜찮으세요? 눈알 터졌어요? 가슴이 뜨끔해지는 걸 느끼며 오른팔을 들어 턱을 가드 한다. 팔에 박병찬의 주먹이 꽂히고 동시에 복부를 걷어차였다. 속도도 속도인데 맞는 곳마다 뼈마디가 울린다. 복부에 연달아 꽂히는 숨이 막힐듯한 타격에 전영중이 못 버티고 박병찬을 밀어냈다. 등 뒤의 성준수가 무사한지 보고 싶은데, 눈을 떼는 순간 달려들어 주머니칼 하나로 전부 헤집어 놓을 거란 직감이 든다.

"더럽게 단단하네. 그걸 버텨?"

"그쪽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격투에서 나름 유명했거든요."

박병찬 스타일이 뭐더라. 기본은 아웃파이터고, 킥을 보니 태권도는 아니다. 뭐가 됐든 사거리로 들어오면 내가 이기지. 전영중이 왼팔을 앞으로 뺀다.

아, 어쩌지. 쟤까지 죽이면 많이 귀찮을 것 같은데. 꼭 성준수까지는 허락받은 것처럼 박병찬이 중얼거린다. 장난감이나 다름없는 한 뼘 크기의 주머니칼이 지나치게 위협적으로 보였다. 전영중 쪽을 가늠해 보던 박병찬이 씩 웃는다.

칼을 던진 박병찬이 탄력을 더해 쏘아진다. 피하는 지점에 무릎이 날아들고 막느라 손이 묶인 전영중의 머리를 잡는다. 생각났다. 주짓수를 기반으로 한 그래플링. 바로 올라타는 반대편 허벅지를 힘으로 벌린 전영중이 파고들어 멱살을 틀어쥔다. 기습당했어도 중심을 안 뺏겼으면 이긴다. 그대로 몸을 뒤집어 박병찬 머리를 깨버릴 생각으로 꽂아버린다. 쿵! 생각보다 둔탁한 소리와, 오른손을 쥔 아귀힘이 여전한 것에 뭔가 잘못된 걸 느꼈다. 긴 다리가 뱀처럼 팔을 타고 올라와 몸을 뒤집었다.

"끅......!"

"영중아, 선배 머리 깨질 뻔했잖아. 나 죽으면 슬퍼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박병찬의 팔이 전영중의 목을 꽉 조인다. 어떻게든 손을 집어넣어 막고 있으나 그것마저 부러트릴 기세였다. 너까지 죽이는 건 그러니까, 잠깐만 기절하자? 다정한 목소리 사이로 탕! 약한 총성이 울렸다. 성준수가 눈을 잔뜩 찡그린 채 총구가 주황색으로 칠해진 에어소프트 건을 겨누고 있었다.

"준수, 그거 뭐야? 나 만난다고 장난감까지 들고 왔네?"

"고무탄에 가스압 개조한 거라 맞으면 꽤 아플 걸요? 빨리 떨어져요."

"하하. 준수가 애인 죽을까 봐 화가 많이 났나 보다. 나도 화났는데 어쩌지?"

박병찬이 전영중의 목을 조인 채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를 짓눌려 몸을 가눌 수 없는 전영중이 자신의 무게로 목이 더 졸렸다. 어디 맞춰보라는 듯 전영중 뒤에 숨어 숨통을 살살 열었다 닫으며 장난친다.

"또 다리병신 되고 싶으면 계속하든가."

머리 쪽을 겨누던 총구를 드러난 오른쪽 다리에 겨눈다. 산소가 부족해 멍해지는 머리로도 전영중이 탄식했다. 준수야, 여기서 도발을 개같이 하면 어떡해.

아니나 다를까 꾸욱, 기도를 틀어막는 힘이 강해진다. 박병찬 빡쳤다. 안 되는데. 여기서 기절하면 진짜 성준수가 죽을 수도.......

"햄. 살려주시면 중국 쪽 라인 살려드릴게요."

가물거리던 눈에 힘을 준다. 기상호가 성준수가 든 총을 눌러 내리고 앞으로 나섰다. 목을 조이던 힘이 약해진다.

"상호, 취직하더니 그쪽으로도 라인 만들어 둔 게 있나 봐?"

"그건 아니고, 이번에 햄네 공격받으신 거 이상하다고 생각하셨잖아요. 그 많은 아시안 중에 딱 한국인 라인만 공격받은 거. 그거 브라츠크랑 중국공산당 고위직 쪽에 라인 있어서 그래요. 그놈 넘길게요."

"기상호!"

"물론 걔까지 넘기면 저희가 손해니까 조건 몇 개만 더 붙이고요. 그래도 밑지시는 건 아닐 거예요."

잔뜩 화가 난 성준수와, 그 앞에 선 기상호를 보던 박병찬이 천천히 팔에 힘을 풀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전영중이 숨을 몰아쉬며 잔기침을 뱉었다. 박병찬이 손을 내밀자 기상호가 에어소프트건을 넘겼다. 탄창을 빼고 약실에 장전되어 있던 고무탄은 성준수의 왼쪽으로 쏜다. 명백한 경고였다.

집에 도착하니 8시였다. 분명 데이트하러 나간 건데, 꼭 퇴근한 것처럼 피곤했다.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내 반을 비웠다. 이 고생시키려고 점심을 잘 먹여놨구나. 바로 옆 식탁 의자에 앉자 무릎 아래로 아스팔트 바닥에 쓸려 엉망이 된 면바지가 보였다. 새로 산지 얼마 안 됐는데 그냥 버려야겠네.

성준수는 집에 오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통화 중이었다. 간간히 큰 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에서 나온다. 잔뜩 화가 났는데 겨우 참는 표정이다. 오렌지주스 병을 넘기자 남은 반을 단번에 비운다. 왼쪽 눈가에 파랗게 멍이 들어있었다.

"눈은 괜찮아? 잘 보여?"

"멀쩡해."

손을 들어 올리자 오른쪽 눈을 가린다. 다섯. 셋. 손가락 개수를 읊던 성준수에게 중지를 들고 흔들자 머리를 얻어맞았다. 시답잖은 장난에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준수야. 부탁이니까 이렇게 위험한 일은 안 하면 안 돼?"

"위험한 직장에 근무하면서 뭔 소리야?"

"리스크는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잖아."

"지금 우리 팀이 그럴 거 가릴 처지로 보이냐. 너 또 니네 부장님한테 가서 빌자는 그딴소리 할 거면 입 다물어라."

"아니, 최소한......."

진재유가 짰다던 판. 처음부터 협상가는 성준수가 아니라 기상호였다. 박병찬과 맞지 않는 성준수가 최대한 도발을 해놓으면 기상호가 협상안을 제안한다. 기상호를 탐내는 와중에 제 팀장보다 자기 손을 들어주는 그림이면 더 잘 먹히리라 예측해서다. 눈치 빠른 박병찬을 속이기 위해 성준수에게는 비밀로 한 채로. 자신이 미끼인 것도, 협상 내용으로 브라츠크 쪽 중국인을 넘기는 것도. 성준수의 배신당한 듯한 반응을 보면 박병찬이 더 좋아할 테니까.

성준수를 미끼로 박병찬이랑 협상한다? 통화를 할수록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팀장이 목숨을 걸고, 작전 공유 안 하는 게 말이 되냐고."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면 따라야지. 재유 말이 맞아. 작전 알고 들어갔으면 박병찬이 눈치챘을 거야."

"성준수, 제발......."

전영중이 마른세수를 했다. 요즘 다시 악몽 꿔. 무너진 건물에서 시체 같던 널 끄집어내는 꿈. 네가 눈뜨지 않을까 무서웠던 그날. PTSD니까 병원이나 가라고 말할 네가 뻔해서 말하지도 못하겠어. 수면제 먹고 자기도 싫고, 멍한 기분으로 살기도 싫어. 네가 위험한 일만 하지 않아도 해결될 일인데. 잘 때 손 잡아주는 것만으로도 괜찮을 수 있는데 뭐가 그렇게 어려워. 왜 매번 모든 길을 어렵게 만들어.

말 많은 전영중이 침묵하는 경우는 대개 성준수 때문이었고, 이미 같은 내용으로 수십 번을 싸운 후에야 암묵적으로 꺼내지 않기로 합의된 이야기라면 하나뿐이다.

"전영중."

그 일로 다친 건 자신인데도 PTSD는 전영중이 시달렸다. 남이 다친 일에 끙끙대는 멍청한 새끼라고 일부러 도발도 해봤는데 소용없었다. 그냥, 전영중은 그만큼 섬세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성준수는 전영중이 불안해할 때마다 눈높이를 맞추고 손을 잡아주기로 했다.

"내가 네 불안이라 미안하다."

2년 전, 같은 이리부대 소속으로 작전 수행 중 성준수가 죽을뻔한 사고에 전영중은 머물러있었다.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추가태그
#빵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