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어떤 부탁

무제 by Lu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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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 말 없어.

 

 한 시간 남짓 이어져 있던 통화를 일방적으로 끊어 버리고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 편하게 누워 버린다. 이제는 제법 뜨거워진 햇빛을 피하기 위해 쳐 둔 아이보리 색의 커튼이 살랑거리며 에어컨 바람을 타며 춤을 추는 것에 시선을 두다가, 착신 중이라는 표시를 킨 채 주위를 빙글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라이너를 향해 연락 금지 모드를 작동 시켜 버린다.

 넓은 소파를 전부 다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도 모자라 팔다리를 쭉 뻗어 기지개도 한 번 켜 보고, 쿠션과 담요를 끌어 와 낮잠이라도 잘 것처럼 머리 위까지 뒤집어 써 버린다. 사람의 기억력이란 참 간사해서, 기억에 남기기 싫다는 이유를 대며 저 멀리 미뤄 두고자 하는 기억은 오히려 떠내려 버리지 못한 채 강제로 눈 앞에 들이밀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지금처럼. 얼굴을 가리고 눈을 감았는데도 묘한 악센트가 있던 리포터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귀를 막아도 그의 질문이 귓가에 박혀 떠나지 않아 물리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기로 했다. 얇은 담요 사이로 조그마한 라이너가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 나기는 하지만, 그래 봤자 전화 받아 달라는 뜻 이거니 싶어 이 쪽에 대해서도 굳이 반응하지 않기로 한다.

 

 ‘과거 활동 당시에는 노래를 안 부르시고 다니신 걸로 아는데 말입니다.’

 ‘…….’

 ‘다른 분의 목소리를 빌려서 활동하고 계신 것이 아니냐는 소문을 아십니까?’

 ‘…….’

 

 소문이 돌 것이라는 생각을 못 한 적은 없다. 오히려 이 정도의 소문이라면 해명하기도 쉬운 편이지만, 대답할 가치를 못 느낀 바람에 해명하지 않은 질문이 근거 없는 신뢰를 안고 하늘을 향해 날아올라 버린 것 까지는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이건 내 실수가 맞는 거지……. 그렇다고 해서 대답을 했더라면 소문이 잠잠해졌을까? 예측하건데, 딱히 그렇지도 않을 것이다.

 톡톡, 얇은 담요를 건드리는 움직임이 아까보다 강해 진 느낌이 든다.

 보통의 경우라면 한 두 번 건드리다 마는 편인데, 무슨 일이지 싶어 눈 밑까지만 담요를 걷었다가……. 예상 외의 인물과 마주하고는 놀라 튀어 오르다 거하게 이마를 박아 버린다. 아무리 방 주인이라고 하지만, 인기척 정도는 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자신이 귀를 막고 있던 사이에 문을 열고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지만 지금 그걸 따질 때는 아닌 것으로 치기로 한다.

 

 “아 씁…….”

 “미안…….”

 

 강하게 맞닿은 이마가 화끈거리는 것 같아 한 손으로는 자신의 이마를 매만지고, 한 손으로는 막 들어온 동거인의 이마를 매만지다 됐다는 말에 떨어진다. 보통이라면 이 시간에 들어오면 안 될텐데, 그가 씻으러 간 사이에 라이너가 부재중 통화 목록을 띄워 주는 것을 대충 확인하다 보니 익숙한 그의 이름을 발견한다. ‘삐.’ ‘그래 이것도 내 탓이다…….’ 이제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며 차단 예외 목록에 번호를 옮겨 두고는 덮고 있던 담요를 걷어 제 자리에 개어 둔다.

 단순히 연락이 안 되어서 일찍 일정을 마치고 온 것이라면 좋겠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아마 이후의 일정이 또 있던가. 앗, 따가워. 멍하니 상념에 잠겨있다 저도 모르게 조금 긁어버린 팔을 내려다 보고는 한숨을 내쉰다. 이래서는 기껏 반팔을 입은 의미가 없잖아. 다시 같은 짓을 반복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미리 냉침해 둔 차라도 꺼내 놓기로 한다. 과육이 그대로 들어가 있는 라즈베리 티를 꺼내 컵 위에 부어 두고, 가벼운 간식으로는 뭐가 좋을까 싶어 고민하다 카페에서 추천 받아 사 온 말차 쿠키를 뜯기로 한다. 사용한 부엌을 깔끔하게 정돈해 놓는 김에 차가운 물을 틀어 약간의 붓기가 올랐던 팔을 진정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예상대로, 그의 동거인은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그 또한 많은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라즈베리 티나 쿠키가 떨어지면 다시 가져올 것 인지를 묻는다거나, 각자 개인 활동을 하던 시간대에는 어떤 일을 했다거나, 휴가를 떠났던 동료가 가져 온 단체 기념품에 대한 시답잖은 코멘트를 한다거나, 날씨가 더 더워지기 전에 어딘가 가고 싶은 곳은 없는지에 관한 선호 조사를 한다거나…….

 

 “…그리고, 네 라이너 지금 엄청 진동하는데.”

 “하…….”

 “……. 받기 싫으면 안 받아도 돼.”

 

 실시간으로 쌓이고 있을 부재중 연락에 미간을 꾹 누르다 우선적으로 잠깐의 시간을 허락받는다. 상대방 또한 예상대로- 옆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자 순식간에 사무적인 목소리로 돌변하는 바람에 약간의 비웃음을 지었을까.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내버려 둬.’ ‘너 지금 이게 장난같아?’ ‘장난 아니야.’ 수 많은 연락 끝에 닿은 결말을 납득하기 힘든 발신자는 내버려 두고 또다시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는다. 진실이 아닌 이야기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것 만큼 멍청한 것도 없지 않겠는가.

 이제는 다시 진동하지 않는 라이너의 머리를 조금 쓰다듬다가 숨겨지지 않는 한숨을 조금 쉬고, 완전히 어그러진 계획의 파편 이나마 주워 담기 위해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동거인을 향해 입을 연다. 과거와 지금 사이에는 긴 공백기가 있어 한 때 잊혀 진 노랫소리라 불렸지만, 눈 앞에 있는 사람은 그의 목소리가 온전히 그의 것임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있잖아, 곧 무대 위에 서야 하는데…….

 이번에는 도중에 마이크를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라, 특별할 거야.

 너에게도 들려 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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