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기억들'

구멍이 뻥뻥 뚫린

최근까지도 미처 자각하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내 뇌에도 트라우마성 기억들에 대한 방어기제가 단단히 작용한 것 같다. 그리고 단지 어릴 때, 오래된 기억들만이 아니라 사실 성인이 되고 난 후의 최근까지의 기억들도 가물거리고 흐릿한 것이 많아서 이것을 깨달았을 땐 정말 좌절이 더 심했다.

기억이 흐린 인간은 필연적으로 정체성까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생생하게 꺼낼 수가 없고 뒤죽박죽인 기억. 내 뇌에서 제대로 기억해낼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소극적이 되고 작아진다. 그렇게 기억을 억압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는데, 그럴수록 정작 ‘나’는 희미해져서 사라져가는 느낌이랄까? 기억도 과거도 흐리고 고통스러운 감각만 남는다면 나는 대체 뭘 위해서 살아가는 건지 회의감이 커진다. 솔직히 즐거웠던 기억들이 오히려 더 가물가물하고, 기억은 나지만 그랬었나, 싶을 정도로 선명하게 꺼낼 수 있는 기억이 별로 없다. 하지만 너무 선명하게, 그리고 강하게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은 뇌가 멍하니 흐려져도 지워지지가 않는 것 같다. 고통 속에 오히려 드물게 행복했던 기억들까지 잿빛처럼 퇴색되고 사라지고 스러진다. 또 기억을 하고는 있지만 전혀 실감이 안 나고 제 3자의 일을 보는 것마냥 무덤덤하고 낯설었다던가, 그런 일이 대부분이다. 내가, 나 자신으로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감도 점점 없어져가는 느낌이다. 혹시 이런 걸 이인증이라고 하는 걸까? 연관이 있을까?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이런 것도 오랫동안 느껴온 감각이다. 그저 무감각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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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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