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

녹엽과 화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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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놀 by 김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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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들어간 집—영안실이 맞는 표현일 것이다—은 아늑했다. 원래 용도는 알 수 없었지만 녹엽의 집보다 약간 큰 규모에 방이 하나 정도 더 있었고 의외로 녹엽의 집과 거리가 멀지 않아 짐을 옮기기도 수월했다. 녹엽과 화립은 빈집에 가구를 놓고 식료품을 들였다. 방 하나는 실험실이었고 자연스레 나머지 방 중 하나는 침실, 하나는 연구실이 되었다. 자신들의 죽음을 설계하는 곳을 연구실이라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녹엽은 대학원을 졸업한 후로 줄곧 연구실에 있었고 화립 또한 그게 목표였으니 그 방 문앞에는 연구실이라 쓰인 문패를 놓았다. 거실이라 해야 할까, 중간의 공간이 꽤 넓었고 부엌도 있었으니 사실상 그곳은 집이나 다름없었다.

녹엽과 화립은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지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고, 그래서 거의 전 재산을 들여 공간을 꾸몄다. 화이트보드도 아니고 커다란 이동식 칠판을 연구실 한쪽 벽에 세워 두었고 그 밑에는 색색의 분필을 놓았다. 커다란 책상 두 개에 오래 앉아 있어도 편한 의자, 각종 필기구와 종이도 가득. 녹엽의 컴퓨터가 둘이 원하는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도 책상 한쪽에 놓고 함께 볼 수 있는 큰 모니터도 하나 설치했다. 실험실은 우선 명패는 달았지만 아직은 설계랄 것을 하나도 하지 않았으니 가끔 쌓인 먼지를 청소하고 벌레가 대저택을 짓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는 정도. 침실은 녹엽의 집에 있던 것과 거의 비슷하게 만들었다. 침대, 이불, 베개, 에어컨.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침대 맞은편 벽에 붙은 커다란 롤스크린이었다. 녹엽은 화립과 무언가 함께 보는 것을 좋아했고 화립은 함께 영화를 보다가 녹엽이 먼저 잠들어 버리는 순간을 좋아해서. 공간을 꾸미는 것에는 시간이 꽤 걸려서 그동안 둘의 죽음에 관해서는 몇 가지 규칙이 만들어졌다.

1. 어떠한 육체적 고통도 없을 것. 그래야 혹시나 생길 수 있는 망설임이나 두려움이 줄어들 테니까.

2. 끝까지 서로를 바라볼 수 있을 것. 우리의 목적은 결국 영원한 사랑이니까.

3. 어떠한 상해도 없을 것. 서로의 신체가 훼손된다면 마음이 흔들릴 수 있으니까.

4. 동시에 이루어질 것. 단 1초라도 혼자 남게 되는 것은 우리의 목적에 위배되니까.

5. 어떠한 약품도 사용하지 않을 것. 그러면 설계에 고민하는 시간이 늘어날 거고, 더 재미있을 테니까.

그래서 시작부터 막혔다. 당연히. 세상에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는 방법부터가 얼마 없는데 그중에서도 화학 약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더 없었고 둘은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라는 명령에나 익숙했지 직접 만든 명제에 대한 설계는 해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목표만 정해져 있고 추상적이기까지. 녹엽은 칠판 한쪽에 큼직하게 적어둔 흰 글씨가 무색하게 아무런 일도 없는 듯이 일상을 지내며 어떤 방법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완벽한 죽음을 설계할 수 있을지, 내일은 화립이 좋아하는 것으로 아침을 먹을지, 약물 없이 정말로 그런 죽음이 가능할지, 저녁에는 무슨 영화를 보자고 할지. 같이 살게 되면서 녹엽은 화립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고 화립은 녹엽의 풀어진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화립은 막 자다 깨 반만 뜬 눈으로 자신의 팔에 안겨 있는 녹엽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나 점심을 먹은 후 함께 회의할 때 즐거워하는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화립은 녹엽의 말에 순식간에 설득당했으므로 그와 함께 방법을 고민하기는 했으나 큰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정하다 보니 조건이 너무 난해해지기도 했고, 무엇보다 동시에 죽을 것이라는 그 발상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고통 없이 죽는다고 하면 역시 의식을 잃은 상태여야 할 텐데, 그럼 어느 시점부터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화립은 생물학이라곤 고등학생 때 이후로 쳐다보지도 않았으니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얼마나 있어야 죽을 수 있을지는 몰랐다.

화립이 유리창을 넘어온 햇살에 먼저 깨어나면 아침을 만들어 녹엽을 깨우고, 녹엽은 반은 감은 눈으로 식탁에 앉아 무슨 꿈을 꾸었는지 설명해 준다. 녹엽은 꿈을 잘 기억했고 화립은 그러지 못하는 일이 더 많았기에 화립은 언제나 흥미롭다는 눈치로 녹엽의 이야기를 들었고 허무맹랑한 얘기로 하루를 시작한 녹엽은 설거지나 집 안 청소를 하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화립은 녹엽의 집에서 지내며 점점 늘어난 화분에 물을 주고 잎을 닦거나 가끔 장을 봐 왔고 녹엽이 바닥 청소를 다 끝내면 어느새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은 주로 서로가 좋아하는 재료만 채워 넣은 샌드위치나 브리토로 가볍게 준비했고 연구실에 접시를 내려둔 채 함께 칠판이나 모니터를 보며 설계에 대해 논의했다. 오히려 그러고 있을 때 오전보다 시간이 빨리 갔다. 오전에는 한 공간에서도 각자 할 일을 했다면 오후에는 오롯이 서로에게 집중하며 가장 큰 열정과 사랑을 내보였으므로. 오늘 녹엽이 찾아온 방법은 호흡 차단이었고 그 말이 익숙지 않았던 화립은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을 되뇌었다.

“호흡 차단…”

“말 그대로 밀실에서 서로의 호흡을 차단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거야. 저산소증을 일으키도록. 산소 대신 다른 기체를 방 안에 채우면 자각도 어렵고 괜찮을 것 같은데, 어때? 만들 수 있겠어?”

“재료… 만 있으면요.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테스트를 많이 해 보긴 해야겠지만…”

“그럼 됐네! 이걸로 하자, 화립.”

방법이 정해졌으니 설계가 남았다. 화립이 공학도긴 했어도 전공 수업 내용은 졸업하고 나면 머릿속에 거의 남아있지 않으므로 결국은 가장 익숙한 방법을 택했다. 그들이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장치로 가장 효율적인 죽음을 맞을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베란다의 식물이 알았다면 당장 화분을 탈출해 그 공간에서 빠져나올 방법만 궁리했을 것이다.

“녹엽, 너무 설레요… 기념으로 오늘 저녁은 밖에서 먹을까요?”

“좋아, 내가 예약할게. 그럼 간단하게 개요만 짜 보자. 대충… 방 안의 기체를 빼내고 안에 질소 같은 다른 기체를 채우는 식이면 될 것 같은데. 어때?”

“그럼 창문을 막아야겠네요. 아예 없애던가… 의자도 놓아요.”

그날 회의는 평소보다 1시간 정도 길어져 식당 예약을 아슬아슬하게 맞출 수 있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에 앉은 둘은 꼭 그날 서로에게 프러포즈를 받은 기분이었다. 함께 죽는다는 것은 이미 둘에게는 삶의 목표가 되어 있었고 당연한 결말이 되었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누구보다 서로에게 충실할 것 또한. 둘은 매일이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사랑했고 밤이 오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을 맞추며 눈꺼풀이 내려가는 그 순간에도 서로를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처음의 결정이 무색하게 설계는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녹엽이 구상한 장치를 현실에 옮기는 것이 일단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걸 일반적인 모터나 회로가 아닌 골드버그를 굳이 끼워 넣어 만들려 하고 있으니 배로 어려울 수밖에. 화립은 일반적인 설계에 그닥 재능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익숙한 방식으로 자꾸만 손이 갔다. 지속적인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장치가 오래 걸리면 무한정 오래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둘은 간과했고 녹엽은 자신의 결정을 신뢰하기가 어려워졌다. 이게 잘한 거였을까. 그냥 감정이 식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걸 받아들여야 했나, 다른 사람들처럼. 그럴 때마다 화립은 너무도 불안했다. 녹엽이 무슨 생각으로 행동하고 있는지 정도는 이제 쉽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후 세계란 불확실한 대상이고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그러니 화립과 함께 이 세계의 끝을 만들어 직접 영원이 되는 수밖에. 녹엽은 그렇게 믿으려 했고 의심이 피어오를 때마다 화립을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화립은 처음엔 녹엽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갈수록 그에게 설득되었고 이제는 그의 결정을 거의 의심하지 않고 따랐다. 녹엽 없이 혼자 남겨지는 일은 이제 생각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장치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설계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녹엽은 전반적인 설계와 사망에 필요한 여러 물리량을 계산했고 화립은 장치의 구현과 설치를 맡았다. 녹엽이 설계도를 그려오거나 구현해야 할 것에 관해 설명하면 화립은 현실적인 구현 가능 여부 등을 판단해 실험실과 연구실을 왔다 갔다 하며 장치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막힌다 싶으면 잠시 다른 부분을 만들거나 다음에 필요한 물품을 주문했다. 하루치 목표를 무사히 완수하고 나면 함께 저녁을 먹은 후 산책을 나갔고 가끔은 고전공생설 공연도 보러 갈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함께 씻고, 침대 위에서 느릿느릿한 속삭임으로 서로에게 얘기하다가, 영화를 한 편 보고 잠들었다. 녹엽과 화립은 행복했다. 삶에 더 이상 미련이라고는 없었다.

장치 제작을 시작한 지 1년 정도가 되었을 때 둘은 행복한 만큼 자주 싸웠다. 서로의 불안 때문도 있었고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설계 탓도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술술 풀리는 듯했으나 가면 갈수록 테스트 한 번에 걸리는 시간이 늘어났고 아이디어는 고갈되었으며 돈이 부족해졌다. 더 이상 죽음을 만들어가는 일에는 즐거움이 남아있지 않았다. 둘은 오후가 싫어졌고 오전 시간이 짧아진 것 같다는 착각을 느꼈다. 6시가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구실에서 나와 거실로 향했고 한숨만 쉬며 서로의 눈을 피했다. 그건 정말로 일이 된 것 같았다. 녹엽과 화립은 어쩌면 죽지 않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규칙 하나 정도는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으므로, 둘은 영원할 수 없으므로. 당초 함께 죽음을 맞자는 발상은 둘 사이에 끝이 있다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녹엽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이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둘은 점점 더 삶에 남은 미련을 찾게 되었고 서로에게 집착했다.

“있죠, 녹엽… 우리, 그만하면 안 될까요. 이대로 제작이 늘어지면 생활비도 부족하고, 구현도 좀처럼…”

“무슨 소리야, 화립. 우리는 함께 죽음을 맞기로 했잖아.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어. 조금만 더 하면 완성될 거잖아, 그치?”

“그래도요… 저, 저는 녹엽을 사랑해요, 하지만, 꼭 우리가 같이 죽을 필요까지는…”

“그럴 리가! 사람이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는 아무도 몰라. 우리의 죽음 끝에 의식 소실 말고는 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고. 사후 세계는 증명된 적도 없잖아. 그러니까, 함께 죽어야지. 처음 결정했던 대로.”

“하지만… 하지만 이론상 그런 거잖아요, 녹엽. 그냥… 우리가 영원히 사랑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조금만 더 있다가 하면… 그러면 안 될까요?”

“화립… 우리가 살아있는 한 영원한 건 있을 수 없잖아. 난, 난 그냥 그게 두려운 거야… 내가 언젠가는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 그런, 그런… 그런 건 상상하기조차 싫어. 나는 네가 아니면 안 돼.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게 너와 내가 함께 맞을 수 있는 유일한 끝이야. 그날이 모든 세계가 끝나는 날일 거라고!”

“…알겠어요.”

녹엽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화립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고서 다시 연구실에 틀어박혀 작업에 매진했다.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 서로의 장치를 작동 정지시킬 수 있는 스위치를 달았고 의자는 연구실에서 쓰던 것을 놓기로 했다. 심하게 싸우거나 불안이 극심해진 날에는 아예 실험실 문을 잠가 버리고서 죽기를 포기한 적도 있었다. 그만하자고,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고. 물론 실험실 문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다시 열렸고 둘은 약간 어색한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저녁 먹을 때가 되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 짓을 수십번이고 되풀이하며 몇 년 만에야 완성된 장치는 복잡했다. 마지막쯤에는 돈이 거의 다 떨어져 대신 집에 있는 물건을 이것저것 끌어다 썼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한 번이라도 실수로 작동시켰던 적이 없었다는 게 신기할 정도. 도미노처럼 모든 장치가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천천히 방 안에는 질소 기체가 채워지고 점점 산소 농도가 감소하여 마지막에는 둘 다 눈감을 것이다. 이제 둘에게 남은 것은 마지막 데이트와 공연과 밤, 새로운 아침이었다.

그렇게나 죽음을 찾던 둘이 마지막에 와서는 데이트라니. 둘의 상황을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면 뭐 하는 거냐고 물었을 것이다. 내일 아침에 죽을 거라면서 왜 그렇게 미련이 남은 듯이 구냐고. 녹엽과 화립은 대답할 수 없을 것이었다. 이미 그 일을 시작하던 때의 마음가짐은 전부 잊었고 지금에 와서는 어떤 의무감 같은 것만 남았으므로. 둘은 서로를 위한 마지막 데이트를 즐기고서 마지막 고전공생설 공연을 보았다. 어쩜 타이밍도 좋게 완성된 날 저녁에 공연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어쩌다 보니 그날에 맞춰진 것 같기도 했고. 공교롭게도 그 공연에서 둘은 처음 공연을 보던 날 함께 들었던 곡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 그날 느꼈던 설렘을 다시 느낄 수는 없었으나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에 휩싸이는 경험은 할 수 있었다. 마음이 바다라면, 저 멀리에서부터 파도가 이어져 점점 육지로 다가오며 거세지는 듯한 기분. 숨이 막히는 듯한 착각과 함께 공연은 끝났고 둘은 두근거리는 심장에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맞는 마지막 밤. 마지막 밤이라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서로와 맞은 밤이 셀 수 없이 많았는데 이제 마지막이라니. 기다려온 죽음을 맞는다는 것도 충분히 설레었지만 다시는 함께 침대에 누울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가슴이 뛰었다. 그날 화립은 평소보다 더 세게 녹엽을 품에 안고서 잠들었다.

그리고 아침. 날씨는 좋았다. 침실과 거실에는 햇살이 비쳤고 조금씩 처분해 어느새 텅 빈 베란다 또한 오늘은 보기가 좋았다. 녹엽과 화립은 아침도 먹지 않고 실험실로 들어갔다. 실험실에는 온갖 알 수 없는 장치가 가득했고 창문 대신 투명한 격벽이 있었다. 둘은 마지막으로 손을 맞잡았다가, 눈과 입을 맞추고, 문을 닫은 뒤 서로의 의자로 향했다. 착석하고 나면 장치가 작동되기 시작했다. 하나하나, 도미노가 넘어지듯, 차례대로. 쇠구슬이 굴러가는 소리가 멈췄을 때 기체 공급기가 작동하는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아! 이제 우리는 알아챌 새도 없이 죽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가장 행복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눈을 감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침실과 연구실 벽까지 뚫어 장치를 설계한 보람이 있었다. 녹엽과 화립은 몇 년의 고생이 빛을 본다는 생각에 들떠 있었고 점점 더 눈앞이 어지럽게 흔들렸으나 두렵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너와 지금껏 기다려온 죽음을 맞는다는 생각에.

녹엽은 설레었다. 화립이 먼저 눈을 감고 뜨지 않기 전까지는. 녹엽은 당황했다. 자신과 화립의 계산은, 설계는 전부 정확했으니까. 우리는 가장 행복하게 서로를 바라보다가 동시에 눈을 감게 되어 있었으니까. 그런데 왜 너는 눈을 뜨지 않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다. 비상 정지 버튼을 누를까? 그럼 화립의 방에는 고농도의 산소가 공급되며 몇 분 안으로 눈을 뜰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쪽에 산소를 공급할 수 있는 버튼은 화립의 손 옆에 있는데. 애초에 화립이 눈을 뜨려면 얼마나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버튼을 누른다고 해도 화립이 정신을 차리려면 시간이 걸린다. 운 좋게 내가 의식만 잃은 상태라 해도 화립의 뇌에 손상이 가지 않았다는 보장이 있을까? 지금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만약, 혹시 모르지만, 최악의 경우, 화립이 눈을 떴을 때, 나는 이미 죽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혼자 남겨진 화립은 어떡해? 화립을 살려놓고 나는 죽는다니. 내가 같이 죽자고 해 놓고서. 이런, 이런 끝은 바라지 않았는데. 나는 너와 단 1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는데. 녹엽은 그제서야 자신이 잊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으나 이미 늦었다.

결국 녹엽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벽을 두드렸다. 그 행동에는 어떠한 이성적 판단도 없었다. 차라리 비상 정지 버튼을 누르는 편이 화립을 깨우는 데에는 더 효과적이라는 것쯤은 녹엽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녹엽은 화립을 혼자만 남겨두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더더욱 처절히 화립을 불렀으나 그는 미동도 없이 미소를 띤 얼굴로 의자에 기대 있었다. 힘이 빠져가는 몸은 서 있기도 힘들었고 점점 더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눈앞이 흐려지는 순간에 녹엽은 벽 앞에 힘없이 쓰러졌고 더 이상의 후회는 없었다.

둘은 몇 달이 지나 우편물이 쌓여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다른 층 사용자의 신고로 발견되었고 엽기적인 커플의 자살 사건으로 인터넷 기사 몇 줄이 나돌았으나 곧 잊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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