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

녹엽과 화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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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놀 by 김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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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은 사람이 등장하지 않고 일본어를 쓰는 걸 보면 아마도 일본의 독립영화나 예술 영화인 것 같았고 대부분의 이야기도 주인공 둘의 심리를 따라갔다. 독특하게도 영화는 태양이 지구에 충돌하는 장면부터 시작했고 녹엽은 그 장면에서 머릿속으로 온갖 태클을 걸었으나 눈으로는 묵묵히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한적한 고등학교와 붉은 하늘과 뜨거운 태양 아래 땀에 젖은 여주인공, 그리고 그 와중에도 두꺼운 담요에 화립만큼이나 긴 머리로 얼굴을 다 덮은 남주인공. 드디어 죽을 수 있다는 말로 기뻐하며 웃는 남주인공과 넌 끝까지 그런 소리냐며 맥없이 웃는 여주인공. 순간 눈앞이 하얗게 빛나더니 앞에는 짧은 머리를 한 여주인공이 앉아 있다. 다시 파랗게 변한 하늘과 두 사람 옆에 날리는 꽃비. 남주인공은 당황했으나 별 기색 없이 함께 살자는 여주인공의 말에 답했고 돌연 다음 장면에서 둘은 한 집에서 서로의 어깨에 기대 있었다. 남주인공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했고 여주인공은 장학금을 꾸준히 받으며 대학교에 다니는 모양이었다. 소개 글에서는 그 둘을 단지 소꿉친구라고 했지만, 뭐랄까, 영화가 비추는 둘의 생활을 보니 그런 단어 몇 개로 쉽게 정의될 수 있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다. 서로에게 하는 그 모든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오랫동안 서로에게 길들고 물들어 온 것처럼 지냈다. 여주인공은 씻고 난 다음이면 꼭 남주인공의 머리를 빗기고 그가 좋아하는 나비 표본을 사와 집에 걸어두었으며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이 학교에 있는 동안 요리만 빼고 모든 집안일을 했고 비가 오는 날이면 꼭 여주인공을 데리러 학교에 갔다. 영화는 그런 사소한 둘의 일상을 한참 보여주었다. 잔잔하고, 평화로우며, 고요한.

그렇게 지루하게 흘러가나 싶었는데, 여주인공의 꿈이 나오며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졌다. 강렬한 여름빛을 띤 나무, 붉게 빛나는 태양, 쓰러진 사람들, 텅 빈 거리, 하얀 교정과 대비되는 붉은 하늘, 다가오는 태양, 모두를 집어삼키는 해. 그 모든 장면들이 순식간에 지나갔고 숨이 턱 막히는 한여름 거리의 소리까지 들려와 이게 4D 영화였나, 하는 착각까지 들었다. 여주인공의 비명과 함께 꿈이 끝나고 나서야 둘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봄의 끝자락, 남주인공은 우울증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여주인공 때문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 말을 하며 불안해했다. 그걸 보는 여주인공은 기뻐 보였다. 여주인공은 태양이 다가오는 악몽을 점점 더 많이 꾸었고 밖에 나가는 것을 꺼리기 시작했으며 학교에 가서도 태양 충돌에 관한 자료만을 찾기 시작했다. 여주인공이 태양이나 밖을 바라볼 때면 꿈이 겹쳐 보였고 아득한 여름 소리가 들려와 화립은 영화를 본 그 잠깐 새에 자신이 주인공과 같은 공포증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인지 고민했다. 그만큼 몰입감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해야 하나. 남주인공은 그 무렵부터 여주인공을 향한 애착이 더 커졌는지 수업이 끝나고 돌아온 여주인공의 숨이 막힐 만큼 그를 세게 끌어안으며 즐거워했고 나비에 대해 한없이 얘기하곤 했으며 눈을 가리던 머리카락을 조금 잘라냈다. 그럼 역시 소개 글에서 말하던 변화라는 건 긍정적인 변화였던 거구나, 하고 안심하던 녹엽의 뒤통수는 3분도 안 지나 얼얼해졌다. 여주인공의 공포증이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져서 급기야는 흡연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죽음을 찾던 남주인공에게 정신이나 차리라고 말하던 걸로 봐서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는데.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이 그러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여주인공이 담배를 피우는 근처에는 꼭 붙어있다가 재떨이를 비우고 탈취제를 뿌렸다. 저건 무슨 형태의 사랑이라 해야 할까. 둘은 떨어질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스스로의 의지든 다른 이유에서든.

장마가 이어지며 창밖에 비가 하염없이 쏟아지는 모습을 보던 남주인공은 환상의 계절이 돌아왔다고 속삭이며 여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눈을 가린 앞머리 때문에 바라보는 게 맞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여주인공이 얼굴을 찡그린 걸로 봐서는 맞는 것 같았다. 그러다 돌연 남주인공은 무언가에 취하기라도 한 양 침울한 얼굴로 여주인공에게 지난여름을 고백했다. 그리고 화면에는 여주인공의 눈이 감겼다가 뜨이는 장면, 그리고 꿈과 같은 장면들이 번갈아 가며 스쳤다. 나무의 녹색 잎에서 태양, 햇빛이 드는 교실에 쓰러져 있는 아이들, 텅 빈 거리, 붉게 물든 하늘과 다가온 태양 아래서 지구를 열렬히 끌어안아 녹여버린 열기. 여주인공의 눈 깜박임과 장면이 교차되는 동안 화면은 녹색에서 점점 더 노란색으로 변하더니 결국은 눈이 따가울 만큼 새빨갛게 되고 나서 천천히 암전되었다. 흐릿해진 여주인공의 시야와 빗소리를 뚫고 남주인공이 나직이 말했다. 기억나지 않느냐고. 화립은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애초에 그 모든 상황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여름 풍경은 대체 무엇이며 왜 여주인공은 저런 표정을 짓고 왜 남주인공에게 그렇게나 화를 내는 것인지. 큰 충격을 받은 듯 보인 여주인공은 잠시 쓰러졌다 깨어나 남주인공과 서먹하게 지내기를 며칠, 어색하지만 거리감은 좁혀진 채로 지냈다.

녹엽은 여름이 된 영화 속에서 반바지에 민소매만 입고도 더워하는 여주인공에서 기시감을 느꼈고 화립은 언제나 춥다 말하며 여주인공의 손이며 어깨와 목을 더듬는 남주인공이 어쩐지 자신과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은 여행을 가기로 했지만 한여름에 관광지도 아닌 그냥 바다로 가는 여행이라니 재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 분명해 보였다. 녹엽은 그쯤 되어서는 정말이지 공허하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눈으로 스크린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둘이 대체 어디까지 하나 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고 포스터랑 소개 글만 대충 보고 영화를 고르면 안 됐었다는 생각 말고는 별다른 생각도 들지 않았다. 주인공들의 감정선은 종잡을 수 없었고 특히 여주인공은 처음엔 분명 남주인공보다 훨씬 제정신인 사람처럼 보였는데 갈수록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난 고등학교 2학년의 여름, 정말로 주인공들이 태양 충돌로 죽었다 쳐도 다시 살아나서 둘이 만났으면 된 거지 왜 상대방에게 저렇게까지 화를 내고 그전까진 잘만 같이 지내다가 부부싸움이라도 한 것처럼 집에 안 들어오려 하고 기 싸움까지 할까. 역시 많이 어려서 그런가. 그럼 계속 그렇게 지내던가, 왜 화해나 사과도 않은 채로 본인 눈치를 보느라 소파에 웅크려 자고 있는 남주인공을 다시 침대로 옮겨놓고 집에 돌아오면 당연하다는 듯이 그를 안아주는 걸까. 뭐 하냐, 둘이. 애초에 돈을 한 명만 벌어오는 데다 아르바이트 수익인데 저런 집에서 두 명이 멀쩡하게 살 수 있다고? 화립은 은근슬쩍 싸우기 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둘을 보고 내심 마음을 놓았다. 한 번 더 싸웠다간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을 집에서 내쫓기라도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함께 파인트 아이스크림을 사 와서 퍼먹고 있는 둘을 보니 기분이 좋았고 이런 게 커플이 나오는 프로그램을 보는 이유인가, 싶기도 했다. 다시 한 침대에서 졸고 여름에도 꼭 붙어 있는 둘의 사이는 정말 장마 이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대체 무슨 설정인 건지 이따금씩 튀어나오는 남주인공의 우울한 얼굴은 아무리 봐도 적응되지 않았지만. 이제 저 탁상 위에 놓인 재떨이만 치우면 둘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행. 기간도 짧고 관광지도 아닌 데다 특별한 계획도 없이 떠나는. 여주인공이 렌터카를 몰고 가는 동안 둘은 기대된다는 듯 대화를 나누었고 휴게소에 들러 짧은 낮잠도 자다 점심 시간대에 숙소 근처 식당에 도착했다. 식사를 하고 간식도 잔뜩 산 후 숙소로 들어가 짐도 풀고. 그러다가 갑자기 둘이 한 욕조에 들어갈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주인공들도 서로의 맨몸을 볼 생각은 없었는지 옷을 입고 들어가긴 했지만 남주인공이 어두운 얼굴로 같이 들어갈 거냐고 묻는 말에 여주인공이 그러자고 대답한 순간 녹엽과 화립은 동시에 영화를 잘못 골랐다 생각했다. 누가 연애 첫날부터 이런 장면을 같이 보는데… 아무리 옷 다 입고 있어도 이런 장면은 원하지 않았고 보여달라고 한 적도 없었는데 도대체 감독이라는 사람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영화를 만든 건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장면이 짧아서 다행이었지, 주인공들이 조금만 더 오래 서로에게 기대 있었다면 둘은 그대로 영화관을 나왔을 것이었다. 서로 머리를 말려주고 빗겨주는 모습이 다시금 지나갔고 간단히 컵라면과 아이스크림으로 요기도 한 둘은 남주인공이 고른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독특하게도 그때부터 몇 분간은 주인공들이 팝콘을 집어 먹으며 스크린 너머의 녹엽과 화립을 바라보는 구도로 앉아 있었다. 나는 분명 관객인데, 꼭 영화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 영화의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지만 내용을 알아차리기에는 너무 단편적인 대사뿐이라 무슨 장르일지조차 파악되지 않았다. 사후 세계? 영원? 사랑? 그리고 난무하는 울음과 비명과 벽을 두드리는 소리. 그런 단어와 소리가 공존한다면 대체 어떤 종류의 영화로 분류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이번엔 녹엽과 여주인공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대체 무슨 내용인 건지 남주인공에게 물었기 때문이었다. 화립 또한 영화의 내용이 궁금해 남주인공의 말에 집중했으나 마땅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어차피 영화 속에 등장하는 영화고 제목도 말하지 않았으니 실존하지 않는 영화일 것이라 생각하며 넘길 수밖에.

해를 꺼리던 여주인공은 영화가 다 끝나고 나서 어둑해진 창밖을 보고서 슬그머니 웃음 지었고 둘은 함께 바닷가로 향했다. 빛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밤바다. 수평선도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시커먼 바다와 하늘을 주인공들은 하염없이 바라보며 맨발로 파도를 밟고 하얀 물거품이 손등을 적셔와도 그저 즐겁게 웃으며 모래톱 위에 둘의 이름을 썼다. 그러고 보니 둘은 서로를 거의 애칭인 듯한 짧은 호칭으로 불렀는데 모래 위에는 한자로 이름을 썼고 그 이름에는 자막도 달리지 않아 녹엽은 짧게나마 고교 시절 히라가나를 외우기 싫다는 이유로 중국어를 들었던 것을 후회했다. 아는 한자가 몇 자 있기는 했는데, 꽃 화, 그다음은… 모르겠고, 여름 하, 소리 음. 옆에 쓰인 이름에서 읽을 수 있는 건 이름 명 한 자였다. 이거 가지고 어떻게 알아. 화립은 일본어를 배운 적은 있었으나 한자 읽는 법은 여전히 헷갈렸기 때문에 두 주인공의 이름이 바닷물에 쓸려가는 것을 붙잡고 싶었다. 파도 소리 뒤로 사박거리는 둘의 발걸음이 계속 들려왔기에 이대로 영화가 끝날 것 같았고 그래선지 더더욱 주인공들의 이름이 궁금했다. 계속해서 걷던 둘은 길게 뻗어 나온 방파제 끄트머리에 서서 너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저 너머에 아주 약간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녹엽은, 우여곡절이 많기는 했으나, 오직 상대가 원했다는 이유로 외진 곳의 바다까지 찾아와 이런 모습을 함께 바라볼 수 있는 사이라면 정말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말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화립은 둘이 그대로 방파제에서 내려가는 뒷모습과 함께 영화가 마무리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주인공은 여주인공을 향해 말했다. 바다에 들어가자고. 그리고 누군가를 만나자고. 영원할 유영을 하며 행복에 다가가자고. 녹엽은 생각했다. 이래서 사람을 고쳐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건가? 남주인공은 영화 내내 그 비슷한 얘기를 했으니 말이다. 그러고는 프러포즈라도 하듯 주머니에서 새하얀 종이를 꺼내더니 조심스레 펼쳐 여주인공에게 내밀었다. 이번에는 글씨에 대한 자막이 달렸다. 유서. 종이 위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한자 두 개가 아마도 그 뜻인 것 같았고 아래의 조그만 글씨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었지만 화립은 굳이 자막이 없어도 남주인공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대충 감이 왔다. 그러니까… 같이 죽자고? 여행 와서? 너네 이제 스무 살인데? 왜? 다행히 여주인공은 둘과 같은 생각인지 남주인공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약간 분위기가 과격해져서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의 멱살을 잡자, 그는 또다시 여주인공에게 지겹도록 보여주었던 우울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의 손으로 나를 구원해달라고. 네가 나 없이도 멀쩡히 살 수 있을 것 같냐니, 그런 말을 하는 여주인공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아, 이제 보니 사이비네. 녹엽은 남주인공이 구원이니 축복이니, 자꾸 그런 걸 찾았던 걸 보면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사귀는 사이고 그렇게 서로 없이는 죽고 못 사니 저 손을 놓고 난 후에는 어색해서 어떻게 할지만 고민하면서. 남주인공의 몸이 여주인공에게로 기울어져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고 나서야 손을 놓을 거라고는 예상 못 했지만. …잠깐. 그러니까 지금 애인을 죽인 거야? 고작 맨날 하던 소리를 바다에서도 했다는 이유로? 화립은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이게 무슨 영환데. 여름이라며, 소꿉친구들이 동거하며 겪는 변화라며…

그 후부터는 여주인공의 목소리가 나레이션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여주인공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직접적으로 알려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가 이제야 말하기 시작하면 어떡하라는 건지. 여주인공은 남주인공과 함께한 시간 때문인지 그의 빈자리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고 그걸 보는 녹엽과 화립은 정말이지 답답해서 죽을 것 같았다. 아니, 사람을 죽여놓고 저렇게 태평하다고.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오히려 내 손으로 너를 구원했느니 어쩌느니 하는데, 적어도 무슨 내용인지는 검색해 본 다음에 결제했어야 했나? 그런 후회를 동시에 하던 둘은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쓸데없는 생각만 하는 여주인공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덥다는 말로 뒤척이던 그는 문득 부모님을 떠올리고서 예전에 살던 집으로 향했다. 아직 반납하지 않은 렌터카에 여름 분위기가 물씬 나는 노래를 틀고서 달렸다. 그러면서 남주인공을 또 떠올려 놓고는 너처럼 시리고 우울한 여름이 어디 있냐며 다시 운전에 집중하고. 반전이라면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던 녹엽은 여주인공의 본가가 존재하지 않는 주소이고 오랜만에 찾은 모교에서도 졸업한 기록이 없다는 사실을 자신이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고민했다. 뭐 평행 세계? 그런 건가? 졸업앨범을 넘기는 여주인공의 얼굴이 화면 대부분을 채우는 동안 화면 한쪽이 점점 밀려나며 졸업앨범이 나오는가 싶더니 알 수 없는 목소리의 나레이션이 들려왔다. 가까워지는 태양, 영원히 오지 않을 방학. 또다시, 감겼던 여주인공의 눈이 뜨이며 장면이 겹쳐 보였다. 이번에는 전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물에 잠긴 듯 먹먹하게 교사의 말이 들리며 화면은 졸업 앨범의 뒤표지를 비추고 여주인공은 여름의 환상에서 깨어났다. 그제야 녹엽과 화립은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주인공은 지난여름, 지난여름이라고 해도 괜찮은지는 모르겠으나, 태양이 지구에 가까워 왔던 그 여름을 남주인공과 함께 겪고서는 죽었던 게 맞았고 알 수 없는 세계에 둘이 남겨진 것이었다. 그러나 죽음에 집착하던 남주인공만이 지난 여름을 기억했고 여주인공에게는 어째선지 무의식 속에만 남아 그날의 꿈을 수도 없이 꾸며 죽음에 대한 비이성적인 공포증과 두려움을 키워갔었다. 스스로가 죽음을 그렇게나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듯 남주인공에게는 그것에 대해 일절 말하지도 않았고 그저 숨기고 있었다. 그렇게 둘은 이성이라곤 통하지 않는 이상의 세계에서 어쩌면 평생을 원하는 것만 하면서 살 수 있었는지도 몰랐는데 여주인공이 그걸 제 손으로 완전히 망쳐버린 꼴이었다. 스스로의 기준에서는 갑자기 생겨나 저를 매일 괴롭히는 죽음을, 사랑하는 남주인공이 마치 청혼이라도 하는 양 건넸다는 이유 하나로. 그제야 화립은 한 사람의 아르바이트만으로 굴러가던 둘의 집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감독의 경제관념이 좀 부족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고 나니 이상하지 않은 것도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녹엽은 방파제 위에 있던 남주인공의 몸이 여태까지 발견되지도 않았는가에 대해 계속 고민했는데, 아마도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그 세계에서는 둘이 없는 곳에서는 사람이 존재할 수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결국 여주인공은 스스로 고립되었고 남주인공은 이미 호흡을 멈췄는데.

결말은 찜찜했다. 둘이 함께 지내던 집에 여주인공이 홀로 앉아서는 초점 없는 눈으로 현관문을 바라보다가,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에 내려놓으면, 카메라는 등 뒤에 수없이 걸린 나비 표본을 비추고, 화면이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더니, 너와 함께였던 여름으로 나를 데려가 달라는 여주인공의 나직한 말과 함께 커다랗게, 한자와 일본어가 섞여 출력되는 타이틀. 아무리 독립 영화라고는 해도 엔딩 크레딧이 거의 없다시피 했는데, 일본어로 된 배우 이름 두 개가 다였다. 모래 위에 적혔던 것과 같이 꽃 화, 여름 하, 소리 음, 그 다음줄에는 이름 명. 배우의 실명을 그대로 작품에 쓴 건지, 그것마저 몰입을 위한 장치인 건지. 감독이나 다른 제작자들의 이름은 하나도 나오지 않고 그렇게 끝났다. 한참 이어지는 검은 화면. 녹엽과 화립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상영관의 불이 아직 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반사적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설마 이게 끝이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 그리고 그 불안은 몇 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 여태 얼굴을 비치지 않던 남주인공이 문득 침대에서 눈을 떴기 때문이다. 분명 여주인공과 함께 살던 집. 남주인공은 반쯤 감은 눈으로 앞을 끌어안았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아침에 여주인공이 먼저 학교에 가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으니 남주인공은 몸을 일으켜 침실 밖으로 나갔고 거실 벽과 냉장고 속 반찬통은 비어 있었다. 엷은 햇살이 드는 창가에 담요를 두르고 앉은 남주인공, 점점 멀어지는 카메라, 그리고 현관을 벗어나면, 아무것도 없는 흰 공간에 그 집만을 사각형으로 잘라 내려놓은 듯한 모습과 다시 암전되는 화면. 녹엽과 화립은 알고 있었다. 남주인공이 영영 현관문을 열지 않으리라는 것을. 상영관의 불은 빠르게도 켜졌고 둘은 멍하니 앉아 있다가 밖으로 나왔다.

“난해… 하네요.”

“난해한 수준이 아니었는걸요? 집 가서 해석 영상 같은 거라도 찾아볼까 봐요.”

“스토리 자체는 무슨 소린지 알겠는데, 주인공들 감정선이 조금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보는 내내 왜 저러지, 하는 생각만 한 것 같네요.”

“근데 녹엽 씨… 마지막 장면에서 그거 보셨어요?”

“마지막 장면이요? 그, 남주인공 집 말고도 다른 게 있었나요?”

“화면 구석에요, 그 집이랑 똑같이 생긴 집이 하나 더 있었어요.”

“그럼 그건…”

“아무래도 여주인공 집인가 봐요.”

“와, 그럼 둘이 사실은 가까이 있는 거였네요. 근데 만나진 못하겠다.”

“아마 그 상태로 나가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둘 다.”

“그건 좀 잔인한데. 뭐, 서로 죽으라고 한 사이한텐 잘 맞는 결말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근데 남주인공은… 진심 같지 않았어요? 표정이 엄청 나빠 보인 것만 빼면…”

“들뜬 목소리로 막, 세상에서 제일 우울한 표정 짓고 그러니까 완전 인지부조화 오던데요. 근데 남주인공은 마지막에 어떻게 된 거였을까요?”

“다시 살아난… 게 아닐까요. 좀 절망적이었을 것 같아요, 구원받을 거라고 굳게 믿고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 있으면.”

“그럼 그건 체념한 모습이었겠네요. 다시 살아났다는 거에 여주인공이 없다는 것까지 더해서. 소름 끼친다.”

“감독이 무척 잔인하네요… 여러모로 신기한 영화예요.”

“아, 맞다. 화립 씨, 우리 말 편하게 하죠? 어차피 앞으로 오래 볼 거고… 그리고 우리 동갑이잖아요.”

“그, 그럴까… 요. 역시, 아직 적응이…”

“곧 편하게 부를 수 있을 거야, 화립.”

“나, 나만 존댓말 쓰는 건 좀 이상한데… 요.”

“화립, 금방 적응할걸? 아니면 내가 다시 존대하면 되지.”

그날 이후로도 둘은 이전과 비슷하게, 조금 더 가까이 지냈다. 녹엽은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동료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이상하게 들떠 있는 얼굴과 어느새 커플링까지 맞춰서 매일 끼고 다니는 모습에 알음알음 그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괴짜랑 사귀다니, 분명 상대방도 제정신은 아닐 것이라는 말이 나돌아다녔으나 어느 날 애인 있냐는 동료의 질문에 녹엽이 보여준 화립의 사진은 당연할 만큼 멀쩡해서 동료들은 쓸데없는 추측은 접어두기로 했다. 녹엽이야 사담도 일절 않고 연구소에서는 커피를 마시거나 컴퓨터 앞에 달라붙어 있기만 했으니 쓸데없는 일이 맞긴 했다. 화립은 독서실에 가서도 의욕이 쉽게 생겼고 이상하게 공부가 잘됐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아 초조했었는데, 그런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이상하게 이번엔 붙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가득했다. 실제로도 화립은 녹엽을 만나는 날을 위해 다른 날의 공부량을 늘리다 보니 자연스레 점점 틀리는 문제가 줄어들었고 심지어는 잘 외우지 못해서 매번 틀렸던 문제까지 맞혔다.

녹엽과 화립은 만나는 날이면 비슷한 코스를 유지했다. 함께 맛있는 걸 먹다가, 하릴없이 공원 같은 곳을 걷고, 마지막에는 고전공생설 공연이나 영화.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지갑 얇아지기 딱 좋은 루틴이지만 녹엽은 소비가 잦은 성격이 아니라 저축은 착실했고 화립 또한 양육자에게 받은 생활비의 일부는 꼭 저축하고 있었다. 이제 둘이 고민하는 것이라면 언제 살림을 합치고 서로를 양육자에게 소개할 것인지, 같은 것이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는지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둘은 서로가 운명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에. 결국 얼마 가지 않아 계약 기간이 먼저 끝난 화립이 집을 팔고 녹엽의 집으로 들어갔다. 화립은 의외로 물건을 쌓아두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녹엽의 집 또한 사람 하나만 살기에는 좀 넓은 편이었기에 이사는 수월했다.

같이 살게 된 둘은 서로에게 완전히 물들었다. 녹엽은 퇴근하고 돌아오면 화립이 집에서 반겨주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설레었고 기척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화립의 등 뒤로 다가가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으면 헉, 하는 소리와 함께 놀랐다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웃으며 자신의 팔을 쓰담아주는 것이 좋았다. 집중하고 있는 화립의 얼굴을 보는 것이나 잠을 잘 때면 함께 놓이는 안경 두 개도. 화립은 혼자 살 때는 그렇게 집중이 어려워서 갔던 독서실에서 오히려 집중이 깨지는 경험을 했다. 몇 분에 한 번씩 집과 녹엽에 대해 생각하느라. 속는 셈 치고 한 번 집에서 책을 펼치고 앉았는데 그게 독서실에 가는 것보다 더 나은 것 같았고 화립은 그날 이후로 독서실을 끊었다. 집에서 오전 시간 내내 기출 문제집을 풀고 가볍게 점심을 먹은 뒤에 잠시 쉬면서 녹엽을 위해 재미있는 장치를 설계하고 있다 보면 녹엽이 돌아왔고 종이에다가 그의 이름을 쓰는 장치라던가 하는 것을 본 녹엽은 언제나 기쁘게 웃으며 화립을 안아주었다. 녹엽은 그러면서도 여전히 말을 놓지 못하는 화립이 귀엽게 느껴졌고 화립은 모두가 필요 없다고 했던 그의 장치를 즐겁게 바라봐주는 녹엽이 좋았다. 둘이 함께 있을 때 집은 비로소 생기를 얻었고 원래도 그랬던 것만 같았다.

둘은 체온을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서로의 맨살이 닿았다 서서히 멀어지는 순간을 즐겼다. 떨어지고 나서 다시 닿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녹엽은 항상 피부며 손이 따뜻했는데 화립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았다. 녹엽은 역시 넌 키가 커서 수족냉증인 걸까, 하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소리를 하는 게 재미있어졌다. 화립은 그 말을 들으면 마치 원래도 그런 듯 뻔뻔한 미소를 지으며 그러니 녹엽이 제 손을 잡아줘야 한다는 말로 그와 손가락을 교차시켰다. 녹엽은 화립과 함께 있을 때면 그렇게 덥지 않은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들었고 화립 또한 그럴 때는 춥지 않았다. 여름에도 이불을 꼭 덮고 자는 화립은 여전히 녹엽에게 이해되지 않는 탐구의 대상이었고 겨울에도 얇은 이불 하나만 덮을까 말까 하는 녹엽은 화립의 동경 어린 시선이 향하는 사람이었다.

녹엽은 영원을 믿지 않았다. 특히 사람에 관한 것이라면 더더욱. 화립 또한 사람에게 있어서 영원할 수 있는 것이란 전혀 없다고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녹엽은 행복했다. 그리고 평범함이 행복하게 느껴진 순간 모든 게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과도하게 행복해지면 누구든 알 수 없는 우울감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그런 식의 감정 변화가 좋다고만은 할 수 없으니까. 녹엽은 이 폭발적인 감정이 기껏해야 몇 년으로 끝날 것이고 그 후로는 그저 잔잔하게, 화립에게 익숙해진 채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건 당연한 사실이기에 모른 척하기가 더 힘들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고 그건 녹엽과 화립도 마찬가지였으므로. 그렇다면 남은 것은 언젠가 다 타버릴 이 계절이 영원할 수 있도록 액자에 집어넣는 일이었다.

화립은 행복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행복이 기본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았다. 끝이다. 이제 절대로 녹엽을 만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화립은 매일 독서실에 가는 법을 잊었고 녹엽 없는 공간에서 체온을 유지하는 방법 또한 기억해 내지 못했다. 녹엽을 만난 그 잠깐 새 그에게 너무도 의존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녹엽이 떠나간 후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녹엽도 화립도 사람이니 언젠가는 감정이 달라질 것이고 어쩌면 긴 시간이 지난 후에 둘은 헤어지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 그때는 어떡하지. 지금보다도 더 많이, 녹엽이 나의 일부가 되어있을 텐데.

영원을 믿지 않는 둘은 함께 영원해질 방법을 강구했다.

“그런데 너무 어렵지 않나? 난해하고, 애초에 방법이 있을지도 잘 모르겠어.”

“영원, 이라면…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도 방법 중 하나 아닐까요.”

“너 사람들한테 내 얘기 하는 거 싫어하잖아, 화립.”

“그건… 그래요.”

“그렇게 되려면 우리에 대한 얘기가 전승되어야 할 텐데… 솔직히 너무 단조로워서 딱히 그렇게 전해질 것 같지가 않네.”

“그럼… 그럼 이건 어때? 같이 죽는 거야.”

“왜, 왜요…?”

“생각해 봐. 우리는 언제 죽을지 모르잖아. 당장 내일 내가 출근하다 교통사고로 죽을 수도 있고 화립은 저녁을 만들다가 불이 날 수도 있지. 그럼 남겨진 사람은?”

“아… 괜찮네요. 죽은 사람은 영원히 상대를 생각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남겨진 사람의 마음이 바뀌면 끝이니까…”

“사고로 죽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야. 우리 마음이 죽을 때까지 안 바뀐다는 보장이 있을까?”

“…없죠. 지금은 그럴 일 없다고 생각해 봐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렇게 될지 몰라요. 무섭지만…”

“그래! 그렇게 생각하면 방법은 하나뿐이지.”

“그런데… 어떻게 죽어야 하죠? 아프고 싶지는 않은데…”

“난 솔직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한테 발견되고 싶지도 않아. 우리를 이해 못 할 사람들이 말 얹을 걸 생각하면.”

“단순히 약물로 빠르게 죽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히 그런 건 재미도 없을 것 같고…”

“마지막까지 서로를 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지 않아? 그럼 정말로 영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럼… 규칙을 정해 볼까요. 하나씩 맞추면서 설계해 보면 분명 즐거울 거예요.”

그날로 녹엽은 연구실에 사표를 냈고 화립은 자격증 시험 원서를 접수하지 않았다. 집을 처분하고 근교의 빈 건물을 매입했다. 둘은 과학도들이 가지 않은, 가서는 안될 길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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