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

녹엽과 화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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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놀 by 김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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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엽과 화립은 많은 얘기를 했다. 대화의 주제를 종잡을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둘은 즐거운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도 즐거웠다. 그게 오랜만에 할 일을 전부 무시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서든 잃어버리고 있던 것을 찾아서든. 둘은 좋아하는 음식도 극과 극이면서 함께 그날의 남은 끼니를 전부 챙겼다. 녹엽이 싱겁게먹기실천연구회라면 화립은 지옥에서 돌아온 당 중독이었고 누구와 식사하던 타협이라곤 않아서 식당을 고르는 데 몇 시간씩 걸리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서로에게 좋아하는 음식을 물었다. 눈치 빠른 둘로서는 이미 서로의 음료로 파악한 것이었고 그런 상태에서 괜히 선호를 묻는 것은 에너지 낭비뿐이었을 텐데도. 둘은 점심 때 녹엽이 좋아하는 샌드위치와 화립이 사랑해 마지않는 도넛을 먹었고 저녁은 화립이 자주 간다는 식당에서 해결했다. 그 사이에는 정처 없이 걸으며 끝없이 대화를 나눴다. 둘은 당연하게도 무척이나 가까워져 연락처까지 교환하고 나서야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녹엽은 누구에게든 먼저 말을 거는 일이 잘 없었다. 상대가 아주 친한 친구건 누구든 간에. 잡담을 하면 피곤해지고 괜한 곳에 에너지를 쏟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날은 내내 괜한 짓을 해서 그런가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것도 나름의 재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질문이 어떤 답변으로 돌아올지 예상해 볼 수는 있어도 예보할 수는 없다는 것이 매력적이었고 그런 예측 불가능성이 좋았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새로운 질문 또한 예측할 수 없었기에 녹엽은 화립과의 대화가 즐거웠고 다음에 만날 날이 기다려졌다.

화립은 친한 사람이 얼마 없었다. 그마저도 꽤 어린 시절의 인연이었고 지금은 연락도 않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녹엽과 함께 앉아 있던 날에는 마치 자신이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런 걱정도 없는 것처럼 웃으며 실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즐거운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언제나 발목까지만 얕게 잠기던 인간관계가 약간은 깊어지는 것도 같은 기분. 녹엽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할지라도 화립은 그게 어쩐지 의지가 되었다.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질투 나지도 않았다.

그 후로 둘은 자주 만났다. 주말이나 휴일에, 아니면, 화립의 시간은 대부분 자유로웠기에 녹엽이 내킬 때라면 언제든. 둘은 한 주에 몇 번 정도씩 만났고 그러면 또다시 처음 만난 날처럼 굴었다. 이유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고 발길 가는 대로 걷다가 무언가 보거나 먹거나 했다. 하지만 그 이상 특별한 것은 하지 않았다. 그런 사이로 남아야 서로에게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쯤은 잘 알았으니까. 녹엽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화립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화립은 녹엽을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잔잔해지는 기분이 좋았다. 녹엽은 화립으로 새로움을 찾았고 화립은 녹엽으로 안정을 얻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고 서로에겐 서로의 삶이 있으니 그걸 존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기에는 둘이 너무 오래 살았다. 분명 서로가 좋은 친구인 것은 맞지만 가끔은 귀찮기도 했고, 언젠가 연락할 수 없거나 만나지 못하게 된다 하더라도 함께 웃으며 보내줄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녹엽과 화립은 좋아하는 색도 음식도 생김새도 너무나 달랐다. 녹엽이 목을 살짝 스치는 짧은 머리로 물을 마시며 붉은색 둥근 안경을 올리고 있을 때 화립은 바닥에나 닿지 않으면 다행일 것 같은 머리를 묶지도 않은 채 액상과당을 지치지도 않는 듯 들이키며 녹색의 네모난 안경을 코 어디쯤에 내려놓았다. 무언가를 완전히 반대로 만들어내는 장치가 있다면 한 사람을 집어넣어서 나온 결과물이 상대방이 아닐까 싶어지는 모습을 하고서도 잘만 지내는 둘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을 수도 있겠다. 원래 사람은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끌린다고는 하지만 그런 걸 감안하고서라도 둘은 너무나 다르니까. 그런 둘이, 공통점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둘이 유일하게 공유하는 것이 음악 취향이었다. 그걸 서로 알지도 못한 채 지내고 있었다는 게 이 모든 일을 만들어내긴 했지만.

둘은 클래식과 재즈를 좋아했다. 두 가지를 적절히 섞어 놓은 것이라면 더더욱. 어느 날 녹엽이 운 나쁘게도 좋아하던 재즈 밴드의 공연 예매 시간을 착각해 절망하고 있었을 때 화립은 운 좋게도 그 티켓을 예매하는 데 성공했다. 녹엽은 이 일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라 다짐했다. 이게 얼마만의 단독 공연이었는데! 화립과 함께 가면 분명 재미있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기회를 시간 착각으로 날려버렸으니 어지간한 걸로 해결할 수 있는 분노가 아니었다. 물론 화립이 좋아할지 어떨지는 몰랐지만 당신은 같이 갔으면 분명 좋아했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고서 녹엽은 안고 있던 쿠션에 주먹질을 몇 번 했다. 화립은 예매 시작 몇 초 전 녹엽이 떠올라 두 장을 결제했고 녹엽에게는 비밀로 했다. 지금까지 봐 온 바에 근거했을 때 녹엽은 자신과 정반대의 취향이었고 만약 음악도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녹엽에게는 그 몇 시간이 무척이나 지루할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음악을 좋아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두 장을 덜컥 예매하다니, 배려라곤 하나도 없구나. 화립은 순간 얼굴이 약간 뜨거워진 것도 같았다. 공연까지는 두 달 정도가 남아 있었다.

녹엽은 한 달이 넘도록 공연에 관해서는 화립에게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고 그건 화립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이름을 말하면 나 그 밴드 알아, 라고 한 사람이 없었을 만큼 인기가 많은 밴드도 아니었는데 상대에 대해 제멋대로 생각했다는 점이 어쩐지 부끄러워서였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왜 당신과 내가 같은 걸 좋아하길 바랐을까. 우리는 언제나 양극단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걸 즐겼으면서 왜 그 평행선이 어디선가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녹엽은 어차피 가지도 못할 공연 더 찾아보지도 않겠다는 마음으로 일정이나 장소는 그대로 잊어버렸고 화립은 녹엽과 같이 갈 수 있을지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에 대해 계속해서 고민했다. 하지만 둘이 만약 서로에게 이름도 모르는 밴드의 공연 티켓을 받았다면 군말 없이 보러 갔을 거였다. 맞삽질의 시작이었다.

녹엽과 화립은 주기적으로 만나 식사를 하거나 영화를 보기도 했지만 공연까지 일주일이 남았을 때까지도 음악에 대해서는 일절 얘기하지 않고 있었다. 삽질의 연속. 녹엽은 그때까지도 놓친 예매를 후회하고 있었고 화립은 처치 곤란이 된 티켓 한 장을 어떻게 할지 아직도 정하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녹엽과 화립은 머리가 약간 길어졌는데 녹엽은 그 잠깐을 못 참고 다시 짧게 잘라버렸고 화립은 길어진 줄도 모르고 살았다. 녹엽은 화립의 머리가 처음 봤을 때보다도 훨씬 더 길어진 것을 발견했고 화립은 녹엽의 머리가 조금이라도 길어질라치면 다시 짧아지는 것이 귀엽다 생각했다가 무례해 보일 것 같아 금방 접어버렸다. 녹엽은 화립만큼이나 단 음식을 많이 먹어보았고 그게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화립은 이따금씩 녹엽과 함께 먹었던 담백한 음식이 먹고 싶어지는 때가 생겼다. 그러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도 흘렀고 다행히 공연 날에도 둘은 만날 수 있었다.

“오늘은 날씨가 좋네요, 좀 있으면 공휴일이기도 하고.”

“…네, 좋은 날이네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을 것 같아요. 음, 그… 녹엽 씨.”

“왜요, 설마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게 만들 거라던가?”

“어… 그게, 별, 별 건 아닌데… 이 근처에서 제가 좋아하는 밴드가 공연을 한다고 해서요.”

“그럼 시간도 많은데 보러 갈래요? 저도 밴드 좋아해요.”

“그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역시 좀 지루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화립 씨가 좋아하는 밴드라면서요? 그럼 재밌겠죠.”

아마도 둘은 마주 본 채로 땅을 파고 있었는지 해가 들지 않는 곳에서 만났고 내심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상대방의 감정을 그렇게 신경 쓰는 스타일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까지 걱정했는지는 모를 일이다만 아무튼 녹엽은 내가 좋아하는 거 대신 화립이 좋아하는 거라도 보자는 마음으로 걸었고 화립은 녹엽이 졸거나 잠들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공연장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둘 사이에 있던 미묘한 거리감, 그러니까, 이 이상 다가갔다가는 서로에게 영원히 짐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나오는 본능적인 회피는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공연장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 그 마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녹엽은 공연장 근처에 붙은 포스터에서 밴드 이름 다섯 자를 보고서는 다시금 후회에 빠졌다. 고전공생설. 그날 내가 시간만 좀 똑바로 확인했어도, 아니, 적어도 그때 한 번만 더 안내를 읽었더라도 화립과 함께 저 공연에 갈 수 있었을 텐데! 화립은 녹엽이 공연 중에 집중력을 잃지는 않을까, 자신을 지루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점점 더 불안해지기만 했다. 녹엽 씨가 안 좋아하면 어떻게 하지, 나가고 싶어 하시면, 끝나고 나면 뭐라고 해야 하지? 둘은 어쩐지 마음이 답답해졌으나 내색은 않고 조용히 사람들로 채워진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고 시작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또다시 나직하고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근데 무슨 장르예요? 그것도 안 물어봤네.”

“아… 크로스오버예요. 재즈.”

“벌써부터 막 마음에 들려고 하네요, 빨리 듣고 싶다.”

“녹엽 씨가 듣기에 좋다면 저도 기쁠 것 같아요.”

밴드가 어두운 무대 위를 채우고, 불이 켜지면, 녹엽은 그 위에 선 익숙한 얼굴들에 화들짝 놀라고, 화립은 그 반응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밴드까지 조금은 들뜬 기색을 하더니 웃음 지으며 연주를 시작한다. 녹엽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언젠가 자신이 녹엽에게 예매를 실패했던 일을 말했는지 고민했고 화립은 그 순간 녹엽이 떠올랐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선율이 무대 계단을 폴짝이며 내려오면 가만히 있던 발이 몰래 혼자서 박자를 맞추고 고개를 따라가는 머리카락에서는 경쾌한 리듬이 흐른다. 녹엽은 설마 화립이 좋아한다던 밴드가 바로 그 밴드일 줄은 상상도 못 했고 화립 또한 녹엽이 이렇게나 즐거워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곡은 스스로의 속도로 더 클라이막스를 향해 가고 있는데 둘의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하게 가라앉아 그저 자신을 포옹하는 이 음악을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무대 곳곳을 비추는 조명이 번쩍이며 사람들의 눈과 두 뺨을 데우는 모습이 작은 불꽃놀이처럼 보일 때 녹엽과 화립은 서로를 보았다. 조명은 푸른색에서 노란색, 그리고 붉은색에서, 다시 녹색을 둘의 얼굴에 물들이고서는 혼자 멀어져갔고 영영 겹치지 않을 것만 같던 둘 사이에는 작은 교집합이 생겼다. 그걸 어렴풋하게 자각한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의자에 기대 다시 무대에 집중했다.

녹엽은 공연 동안 많은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가벼운 당황과 놀람이었다가 서서히 기쁨으로 바뀌었고, 기분은 점점 더 고조되어 알 수 없는 흥분감이 되었다. 녹엽은 자신의 몸 한쪽에서 울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게 꼭 공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지금까지 공연을 몇 번은 봤고 오늘도 곡의 구성은 거의 비슷했으며 이번에 예매하고 싶었던 건 단지 1년 만의 단독 공연이라는 이유 하나가 다였다. 그런데 대체 뭐가 이렇게 좋을까. 오늘은 뭐가 달라서 항상 듣던 곡이 처음 듣는 것처럼 느껴지고 이 공연장에 우리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공연장 안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꽤 많았으니 녹엽은 아마 그 때문이었을 거라 생각하며 내내 화립을 보았다.

화립은 공연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고 그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은 둘째치고서 녹엽이 그렇게나 기뻐하며 공연을 본 것이 예상보다 더 가슴 벅찼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알지 못했는데 아마 녹엽과 처음으로 비슷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 때문인 것 같았다. 화립은 예매할 때 녹엽이 떠올랐던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고 공연 내내 되뇌었다. 그건 일종의 필연이었고 어떻게 보면 운명이었다. 화립은 그런 것을 추호도 믿지 않았을 텐데도. 화립은 그들의 공연을 셀 수 없이 많이 봤었고 밴드마저 이제는 그의 얼굴을 기억할 정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눈앞의 녹엽을 지금까지의 공연에서 한 번도 마주친 적 없었다는 사실이 놀라워졌다.

공연은 끝을 향해 가고 있었고 마지막 곡은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이었다. 녹엽은 브람스 곡을 자주 듣지는 않았고 그건 화립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날 함께 의자에 앉아 들은 곡은 지금까지 무엇을 들었는지조차 잊게 할 만큼 강렬했다. 아마 지금까지의 공연에서 연주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랬을 거고 또 원래 그런 곡이니 그렇게 느꼈을 테지만 피아노와 베이스 사이를 뚫고 나오는 바이올린 소리는 무언가 힘이 있었다. 둘은 그 선율에 압도되어 맞잡은 손을 놓을 새도 없이 무대에 불이 꺼지고 의자 위로 불이 켜질 때까지 가만히 서로를 보고만 있었다. 공연장 안은 덥지도 않았는데 머리카락 안이 땀으로 젖어왔고 그러는 중에도 맞잡은 손에서는 별다른 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두 손에서 멀어질수록 더 뜨거운 것 같았다. 녹엽과 화립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여 사람들이 나가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고 서로를 한참 바라보고 있다가 무대를 정리하는 게 눈에 들어오고 나서야 다급히 공연장 밖으로 나왔다.

녹엽은 그렇게나 바라던 공연을 배경음악 삼아 화립을 보는 것을 택했고 화립은 공연을 곁눈으로만 흘끔대며 녹엽을 보았다. 아마 누군가 공연 중 그들을 봤다면 아주 꼴값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녹엽과 화립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은 지도 꽤 되었고 그런 눈길을 보내도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밴드마저 둘의 얼굴을 알고 있을 정도로 공연 때마다 오로지 연주에만 심취해 있던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은 독특한 일이기는 했다. 독특하다는 것을 넘어 이상할 정도였지, 둘이 아는 사이였으면 지금까지 그렇게 멀리 앉아 있을 필요도 없었을 텐데. 하지만 둘에게는 그것을 자각할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공연장을 나오자마자 불어온 바람에도 식지 않은 몸과 묘한 기분을 안고서도 여전히 손을 놓지 못한 채 있었다. 한쪽 손이 눅눅해져 오는 게 느껴졌고 둘의 머리카락은 같은 방향으로 나부꼈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며 작게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공연… 괜찮았나요?”

“…그게 문제가 아니라, 화립 씨.”

“네…?”

“우리 지금 무슨 사이예요?”

“아, 음… 그게, 확실히 이렇게 말하려니까 약간 애매한 것 같기도 한데요…”

“나 사실 이 공연 티켓팅 놓쳤었어요.”

“네? 그…럼, 아니, 녹엽 씨도 고전공생설 알고 계셨어요?”

“당연하죠! 지금까지 했던 공연은 다 갔을걸요?”

“어… 저, 저도 몇 년 전부터 공연 할 때마다 갔었는데…”

“문제는 우리 둘 다 공연엔 전혀 집중 못 했단 거예요, 화립 씨.”

“그거라면… 녹엽 씨가 좋아하시는 게 무척 기뻐서, 그랬던 것 같은데…”

“나도 공연 시작했을 때 너무 기뻤고 놀랐어요. 저 예매 못 한 거 화립 씨가 어디서 듣고 온 줄 알고.”

“제… 제가 너무 오래 봤죠. 미안해요, 눈이 안 떠나서…”

“갈수록 화립 씨 생각이 나서 나도 안 볼 수가 없었는걸요.”

“그때 무슨 정신이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공연장에 녹엽 씨만 있는 것 같았어요.”

“화립 씨. 지금 뭘 고민하고 있는 거예요?”

“좋아해요.” “좋아해요.”

“그냥, 녹엽 씨가 뭘 하든… 저는 좋은 것 같아요. 녹엽 씨가 좋아요.”

“나도 당신 좋아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쭉 그랬지만 아까부터는 확신이에요.”

둘은 긴긴 삽질 끝에 만나놓고도 땅 위로 나가는 것을 택하지 않았다. 그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으며 상호독점자가 된 기념이나 할 겸 즉흥적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또 다른 삽질의 시작이었다. 가장 가까운 영화관으로 향한 둘은 우선 음료와 팝콘부터 사고 영화를 골랐다. 늦은 시간이었던 터라 상영 일정이 많지는 않았는데 그중 둘의 눈을 사로잡는 제목이 있었다. 늦여름의 과잉증. 소꿉친구인 둘이 대학에 진학하며 함께 살다가, 서로에게 변화가 찾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이야기. 그게 영화 소개 글이었다. 처음 보는 감독과 배우에 러닝타임도 무척이나 길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끌린 둘은 그대로 표를 두 장 결제해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넓은 상영관 안에는 오로지 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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