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주실에서
연주실에 홀로 남아 기타를 치던 어느 날, 바깥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그날.
내 손의 움직임을 따라 선율을 자아내는 기타의 넥을 쥐고 그대로 바닥에 휘둘렀다.
지금까지 내 손으로 자아내던 선율 중에서 가장 기괴하고 파격적인 소리가 났다.
기타의 넥이 휘고 울림통이 박살 났다.
더 이상 바닥에 내려치지 못할 정도로 기타가 훼손될 때까지 바닥에 내려찍었다.
평생 기타만 쳐왔던 몸이 이 정도 화풀이도 버티지 못하고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숨이 몰아쉬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 기타가 생각보다 비쌌다는 거였다.
내가 기타를 연주한다고 하자 네가 선물해 줬던 기타였었다.
내가 한 달 내내 아르바이트를 두 탕을 뛰고도 먹는 돈과 교통비를 아껴야 살 수 있는 가격이었다.
기타를 부숴버린 이후에 앰프를 발로 차고 스피커를 뒤엎어 버렸다.
합주실에는 네가 내게 사준 선물이 참 많기도 했다.
앰프도 비싸고 스피커도 비싸지만, 그렇다고 네가 비싼 것만 사준 건 아니었다.
벽에 걸린 소규모 극장에서 했던 포스터도 네가 디자인하고 돈을 내고 뽑아준 것이었고,
조금 전까지 연주하던 곡이 실린 악보도 네가 사서 인쇄해 준 것이었다.
연주실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네가 담겨 있었다.
사 온 물건을 주며 네가 했던 말, 짓던 표정까지 전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래서 죄다 부숴버리고 부러뜨리고 본래의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망가뜨렸다.
물건을 보고 너를 유추할 만하다 싶은 모든 물건을 부수고,
한때의 순간을 떠올릴만한 모든 걸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러고 나니 연주실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연주실에 홀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더 뺄 것이 남았는데, 연주실에서 나를 뺄 순 없어서 내 생각에서 너를 끄집어냈다.
너를 떼어내자, 곳곳에 상처가 남았다.
얼마나 생각의 깊숙한 자락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지 덕지덕지도 붙어 있었다.
피가 흐른 자리에 시커먼 딱지가 앉았다.
네가 있었던 흔적은 이제 시커먼 딱지로 남았다.
나는 이제 이 흉터를 보며 너를 기억하고 있다.
잊기 위해선 감정적으로 소모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다.
증오와 미움의 불길로 불살라 버리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근데 쉬운 일이라서 하기 싫다
그렇다면 객관적으로 매 순간을 재단하고 기억하여 액자로 보관하는 방법이 있다.
근데 이건 또 너무 어렵고 멍청한 일이다.
기껏 흔적을 지우려고 그 난리를 피워놓고 또 흔적을 새겨 놓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고민 끝에 방향을 정했다.
내가 너를 생각하며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도록 매 순간 감정을 조절하면 된다.
지난 기억을 반추하며 죽도록 미워하다가도,
어느 순간은 설렘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는 걸 떠올리면 된다.
외줄을 타는 것처럼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쳤다면 다음은 반대쪽으로 치우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서서히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너를 대하면 된다.
이제는 네가 나에게 영향을 줘선 안 된다.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니까.
똑같이 나도 너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너는 너의 길을 가야 하니까.
그리하여 우리는 적당히 건조한 관계로 나아가면 된다.
잘 지냈냐는 물음에 지난하고 힘들고 우울한 하루를 보내고 나 너무 힘들었다며 하소연하는 대신.
‘응. 잘 지냈어.’ 그리 대답하고
밥은 먹었느냐 물음에 너무나 행복하고 기쁜 일이 있어서 방방 뛰며 자랑하고 싶어도.
‘응. 먹었어.’ 그리 답하면 된다.
그리고 서로의 길을 가면 된다.
그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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