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뢰딩거

녹엽과 화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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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놀 by 김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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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엽. 과학자. 목까지 올라오는 검은 티셔츠에 얇은 테 안경을 쓴, 특징 없이 흔하디흔해 길 가다 한 번쯤 봤을 것처럼 생긴 그런 사람.

화립. 공학자. 공대생 티를 못 벗은 진녹색 체크 셔츠에, 특징이랄 것은 그저 길게 늘어져 등을 덮은 회보라색 머리카락뿐인 그런 사람.

녹엽은 실은 그 이름과는 전혀 맞지 않는 외관을 가지고 있다. 푸를 록에 잎 엽, 그 중 어느것 도 녹엽과 맞지 않았다. 오히려 녹엽은 타오르는 불꽃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다. 머리칼은 색소가 옅은 주홍빛으로 이리저리 뻗쳐 있고 눈은 짙다 못해 속을 알 수 없는 붉은색.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들 하는데 녹엽은 그 창에 무엇을 덧대 거울로 만들기라도 했는지 너무도 밝게 빛나 그 안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붉은색은 그저 녹엽이 좋아하는 색일지도 모른다. 녹엽의 안경테에서는 묘하게 붉은빛이 도니까.

화립은, 뭐라 해야 할까.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것을 티 내기라도 하듯 항상 체크 셔츠에 매번 비슷해 보이는 청바지를 입고서 돌아다닌다. 탁하고 연한 보라색의 머리칼은 대체 언제쯤 자를는지 이미 허벅지에 닿았지만 앞머리는 나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눈은 검은데 허술하고 뻔하게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얼굴에 다 드러난다. 화립은 꼭 사각형의 안경을 고집했지만 그 이유에 관해 물으면 별다른 답을 내놓지 않고 그저 은은하게 웃으며 안정감이 들어서요, 하는 말로 넘겼다. 화립은 녹색을 좋아하는 듯했고 그래선지 안경 또한 녹색이 돌았다. 옷은 말할 것도 없이 언제나 녹색이라 주변인은 그의 옷장에는 녹색 말고 다른 색은 없을 것이라 농담처럼 말하기도 했다.

결국 사람은 이름대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도 있듯 녹엽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녹색을 갈망했다. 하지만 녹색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색이 아니었다. 녹엽은 녹색을 그렇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오히려 사람들이 그렇게 묻는 것에 지쳐 있었다. 와, 이름에 푸를 록이 들어가네. 예쁘다. 초록색이나 파란색은 안 좋아해요? 이상하네, 이름만 들으면 엄청 좋아할 것 같은데. 거기다 대고 이름은 제가 지은 게 아니니까요, 하고 말하는 것은 너무 예의 없었다. 녹엽의 속마음은 물론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지만 사회생활 중 만난 사람들에게까지 그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고 오히려 생각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본심을 숨기느라 바빴다. 자연이고 온화함이고, 그런 이미지와 녹엽은 전혀 맞지도 않았고 맞출 생각도 없는데 사람들이 멋대로 녹색에 그런 인식을 씌우는 것뿐이라 믿기만 했고 가끔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는 너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에 스스로에 대한 의문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화립은 자신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살았다. 그게 실수였다는 것도. 실수로 자신의 이름이 약간이지만 달라졌다는 말을 듣고도 유쾌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걸 생각해서라도 화립의 양육자는 그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화립은 자신이 그렇게나 역행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화립은 원래 정해져 있었던 이름만치 밝게 자라지도 못했고 활기찬 성격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작다거나 귀여운 이미지는 특히 아니었다. 항상 축축 처져서는 언제나 피곤한 몰골에 좀 나쁘게 말하면 음침해 보이기까지 하는 데다 차분하다 못해 고요한. 그렇게 자란 화립을 가끔 만날 때면 화립의 양육자들은 지난 일을 후회하고는 했으나 되돌릴 수 없는 일이고 이미 화립은 화립으로 평생 살아왔으니 이제 와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않았다. 애초에 그게 정말로 바로잡는 것일지도 알 수 없었고. 화립은 분명 건강한 게 맞는데도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너무도 가라앉아 있는 자신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녹엽은 더위를 심하게 탄다. 주말에는 반소매 옷에 반바지만 걸치고 돌아다니며 출근할 때 입는 검은 목티도 가운을 걷어보면 민소매다. 그런 점에서 긴 청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은 사회적인 무언가를 고려한 그 나름의 노력인 셈이었다. 초여름이 오기도 전에 선풍기를 꺼내놓았고 다시 들어가는 것은 겨울이 시작되고서도 한참 후. 난방비는 조금 덜 나온다는 게 장점이라면 장점이지만 단점은, 당연하게도, 냉방비가 그 배로 나간다는 것. 녹엽은 다른 사람들은 자신보다 더 높은 기온에서부터 덥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책상 위에 항상 미니 선풍기가 있고 머리카락은 목에 절대 닿는 일이 없도록 자르고 사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것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동료들이 읽어내기에도 한참씩 걸리는 논문이나 실험 결과 분석은 잘만 했으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스펙트럼으로 늘어놓는다면 녹엽은 그중 몇 개만 심하게 밝은 빛을 내고 나머지는 아예 색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일직선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검은 부분에 해당하는 것은 대부분 타인이 가지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이해하는 것. 타인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가? 그렇다. 그런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을 수 있나? 그렇다. 내 주변에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예 없을 수 있는가? 그렇나? 정말?

화립은 추위를 타는 편이다. 푹푹 찌는 여름방학 직후의 교실에서 에어컨을 틀면 꼭 에어컨 바로 아래도 아닌 한 구석에서 담요를 꽁꽁 두르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애. 그게 화립의 학창 시절이었고 실은 지금도 그랬다. 화립이 에어컨을 켜는 것은 1년 중 정말 몇 안 되는 날뿐이었고 그것도 희망 온도가 25℃ 아래로 내려가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언제나 침대에 올라가 있는 것은 전기장판에 두꺼운 겨울 이불이라 이 정도면 혼자만 겨울에 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옷은 항상 긴팔 셔츠에 가끔 셔츠 아래에 얇은 옷을 하나 더 겹쳐 입을 때도 있고 그 위에는 니트 가디건이 대부분이었다. 화립에게 코트란 여름이 막 올 것 같은 날씨에 기분이 좋으면 입을 수 있는 옷이었고 패딩은 겨울에 없으면 동사하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냥 따듯한 것을 좋아하고 상대적으로 더위를 덜 타는 것 같기도 한데, 그게 여름 며칠 빼고는 내내 이어진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좀 답답하게 보이긴 했다. 여름에도 반소매는커녕 보풀이 다닥다닥 붙은 니트나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다니니 화립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까지 안 덥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고 그게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이 날씨가 춥지 않다는 건가, 정말. 이렇게 바람도 부는데 말이지. 대신 겨울에 좀 덜 추우려나, 그건 부러운데.

녹엽은 과학자보다는 연구원에 좀 더 가까운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학위는 진작에 땄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하고 싶은 연구를 마음껏 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방향성이 마음에 드는 연구실에 들어가고 나니 시키는 일만 하는 것 같고, 정부에서 하라고 내려주는 과제에서는 재미라곤 찾아볼 수가 없고. 요즘 삼시세끼 잘 먹고 등 따숩게 지냈더니 배가 불렀다,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생각을 의지로 멈추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녹엽은 그저 지루한 일상을 견디고 있었다. 퇴사하고 싶은데 그렇다고 정말 해버리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고민하며.

화립은 말이 좋아 공학자였지 사실상 백수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아니, 그냥 백수였다. 나쁘지는 않은 공대를 졸업했고 남은 것은 취업인데 자격증도 없고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없으니 직장이 구해질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재능 있는 쪽은 기업이나 연구 시설에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어도 너무 멀었다. 끝없는 비효율과 무의미해 보이는 동작으로 가득 채워져서는 해내는 거라곤 결국 무척이나 단순한 장치. 골드버그, 그게 화립이 가장 좋아하고 또 잘하는 것이었다. 그런 걸 하겠다고 공대를 나온 걸 보면 역시 너무 이상주의적인 사람이라 해야 할까.

녹엽은 연구 주제를 자주 바꾸는 편이었다. 연구실장은 그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녹엽의 능력과 학력을 고려하면 그는 붙잡아두는 편이 더 나은 인재였고 녹엽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늘상 하던 연구를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거나 몇 년쯤 전에 하다 만 연구를 어디서 끄집어내 다시 시작했다. 사실상 연구실 전체가 그의 기분을 맞추느라 애썼고 녹엽은 그걸 은근히 즐기고도 있었다. 즉흥적, 기분파, 무계획. 그런 단어들이 녹엽을 설명했다. 그렇다고 해서 삶이 즐겁지는 않았지만.

화립은 자격증에 관한 공부를 하는 중이었다. 물론 외우는 게 잘 맞지 않아 대학도 어영부영 졸업한 그에게 잘 맞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했어도 정작 시험에선 번번이 떨어졌단 소리다. 화립에게는 그럼 난 이제 뭘 하면서 살지, 어떻게 살지. 그런 고민이 많았다.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마음으로 이런 세상에서 한 사람의 몫을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니 화립은 원래도 긍정적이라 할 수는 없던 성격이 더 어두워져서 조금 음침해 보이기까지 했다.

녹엽은 혼자 살았다. 연구실에 들어간 후로 보수를 나름 괜찮게 받기도 했고, 오랫동안 혼자 지내서 그런지 이미 그 상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그러는 게 마음이 편하기도 했으니까. 최근 들어 집이 좀 덥다던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만 빼면 집은 여전히 녹엽이 가장 사랑하는 공간이었고 하루 동안의 스트레스를 싹 씻어버릴 수 있는 곳이었다.

화립은 혼자 살았다. 대학에 합격한 후로 쭉 그래왔지만 화립은 그럼에도 집이 춥다 느꼈는데, 학교에서도 매번 기척 없이 다니며 행사란 행사엔 전부 불참한지라 고등학생 때 이후로 인간관계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서였다. 조별 과제도 딱 자기 몫만큼만 했었고 학교보다는 집에 틀어박혀 쓸데없는 장치를 설계하는 데 시간을 쏟았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녹엽은 자신의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출근, 실험, 보고서 작성, 퇴근, 씻고 침대에 누우면 다시금 아침이 돌아와 출근할지 말지 고민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삶이. 녹엽에게는 무언가 새로운 것이 필요했다. 강력하고 폭발적인 어떠한 감정, 혹은 호르몬 분비.

화립은 자신의 삶이 너무 답답하다 생각했다. 분명 무슨 일을 하고는 싶었던 것 같은데 저는 아무것도 못 하고 있으니 그 사이에서 오는 괴리에 시달렸다. 거리감. 영영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어떤 이상. 화립에게는 위안이 필요했다. 감정을 나눌 수 있을 만한 사람.

그러니 둘이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주쳐 한눈에 반하고 만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닐 것이다. 서로 너무도 닮아서 그런 건지 심각할 정도로 양극단에 있어서 그런 것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녹엽은 그날 답지않게 늦잠을 자고서 서둘러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고 있었다. 화립은 하필 전날 샤프심을 전부 써 버렸다는 걸 아침에 알아차린 바람에 가장 가까운 문구점을 찾는 중이었다. 녹엽은 빠르게 지름길을 찾았고 화립은 지도를 잘못 보고서 틀린 길로 들어섰는데 그러다가 둘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절대로 가지 않았을 길목에서. 처음엔 놀랐다. 앞만 바라보던 중이었는데 불쑥 서로가 눈에 들어왔으니까. 녹엽은 잠깐 중심을 잃었고 사미는 아예 넘어질 뻔했다. 그 와중에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면 거짓말일까. 둘은 그저 서로를 지나쳐 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너머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왜 그렇게 멈춰 섰는지도 말하지 않았는데. 일어나면서도 서로에게 눈을 고정한 채로 있던 둘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손을 맞잡았다.

“녹엽.” “화립.”

“화립 씨.” “녹엽 씨.”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뱉은 둘은 그걸 또 어떻게 알아듣고 서로를 불렀다. 그 모습은 아주 오래전 헤어졌다가 우연히 만난 반가운 사이처럼 보였다. 떨어져 있었던 시간 동안 내내 서로 생각만 했던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어서. 그날 녹엽은 출근하지 않았다. 화립은 매일 가던 독서실에 가지 않았다. 물론 합의된 사안이었고 녹엽의 결근은 소장에게 보고되었다. 둘은 생전 처음 봤으면서 곧장 서로의 손을 잡고 근처의 카페로 들어갔다. 매번 그랬던 것처럼. 녹엽은 화립의 눈을 바라본 때부터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화립은 녹엽의 이름을 들은 순간부터 그를 아주 오래도록 보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세상에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은 없고 감 같은 것은 무의미하다 생각하던 둘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샷 하나만 하고 물이랑 얼음 많이요. 화립 씨는?”

“저… 초콜릿 모카 프라페 벤티 사이즈에 오트 밀크로 변경하고… 초콜릿 드리즐이랑 카라멜 드리즐 많이, 음… 자바칩은 통으로 올려주세요. 그리고 카라멜 시럽이랑 바닐라 시럽 추가해 주시고… 휘핑, 은… 많이요.”

“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1 샷에 베이스랑 얼음 추가, 그리고 초콜릿 모카 프라페 벤티 사이즈에 오트 밀크… 초콜릿, 카라멜 드리즐, 자바칩이랑 카라멜, 바닐라 시럽 추가 맞으시죠?”

“휘, 휘핑… 많이요.”

“네,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녹엽은 맹물에 가까운 커피를 얼음이 녹기를 기다리는 듯 천천히 마셨고 화립은 주문을 하면 할수록 직원의 얼굴이 어두워진 걸로도 모자라서 휘핑 위로 설탕 시럽 펌프를 몇 번이나 눌렀다. 둘은 서로의 선택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좋았다. 평생 이해하지 못할 대상을 만났다는 기쁨. 그거라면 얼마든지 다시 태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음료를 받은 후 둘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출근 시간은 좀 지났고 점심시간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카페 안은 한산했다. 둘의 목소리는 조용한 카페 구석에서부터 번져 나와 직원들도 귀만 기울이면 그걸 들을 수 있었다.

“화립 씨, 필요한 거 없어요? 난 내가 그걸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 저… 샤프심, 이요. 이왕이면 직장도…”

“와, 어떻게 이렇게 딱 맞지? 나 아직도 샤프만 쓰잖아요.”

“좋네요… 역시, 그럴 것 같았어요. 녹엽 씨는 어디 가고 계셨어요?”

“출근… 하고 있었죠. 근데 오늘은 안 갈 거예요. 화립 씨랑 같이 있는 게 더 좋겠어요.”

“그렇게 말해주시니까 기쁘네요, 어쩐지… 녹엽 씨라면 집이 무척이나 따뜻해질 것 같아요.”

“정말요? 전 화립 씨가 제게 뭔가 새로운 걸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화립 씨도 그렇게 생각하셨다니!”

“아… 아름답네요, 저, 마치… 녹엽 씨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둘의 관계라던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지만. 연인이라기엔 그 대화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었고 친구나 동료라기엔 서로에게 건네는 말의 당도가 너무 급격히 변화했다. 녹엽과 화립이 주고받는 말은 아무런 의미도 담겨있지 않은 물 같다가도 서로가 없으면 절대로 안 될 것처럼 머리가 아파질 정도로 달아지기도 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고 어떤 것을 선호하는지 같은 것은 서로의 앞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논외였다. 둘은 오래전부터, 마치 서로를 위해 살아가고 있었던 것만 같았다. 둘은 잃어버린 자신의 일부가 돌아온 것 같다는 착각을 느꼈다. 비어있던 스펙트럼의 한 사각. 원래 내가 가지고 있었어야 할 것. 그러니까, 그게 녹엽의 경우엔 녹색이었고 화립의 경우엔 붉은색,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주홍빛이었다. 운명 같은 것은 믿지 않는 둘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자신들도 알 수 없었으므로 녹엽과 화립은 그저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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