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것들
레트로봇 - 제로
※뉴또 1기 이전 시점, 서영과 제이의 제사를 지내는 차가네+권가네
※버저비터 챌린지 중(... 퀄 따위 개나 줬습니다
주간창작_6월_4주차
잊혀진 것들
속죄하지 못한 나의 시간
w. 목화
제로는 가끔, 자신이 있을 곳을 확신하지 못했다. 인간들 사이에 낀 로봇으로도, 저보다 한참 후에 태어난 동생 또봇들 곁에 선 형님 또봇으로도,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투를 하는 또봇들 사이 부상자가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야 하는 레스큐 또봇으로도. 자신의 존재감에 대한 회의는 종종 드는 것이었다.
“제로, 이거 상 오른쪽에 놓아줄래?”
그리고 코어로이드 모습을 한 제가, 향 냄새 자욱한 제사상을 코앞에 두고 그 위에 올려진 사진을 향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지금. 자신의 존재와 이 상황에 대한 회의감은 극에 달했다. 도운에게 건네받은 유과 그릇을 두 손에 얌전히 쥐고 제로는 물끄러미 제사상을 내려다보았다. 꽤나 흐릿했지만, 상 위에 있는 액사 사진 속 얼굴은 제가 기억하고 있는 얼굴이 맞았다.
“아빠, 두리가 자꾸 일 안 돕고 산적만 집어먹어요!”
“야, 차하나! 넌 그걸 또 일러바치냐!”
“두리두리, 도망가!”
“어른이 먹기도 전에 음식을 먹은 건 혼나야 맞음.”
우당탕탕 난리법석을 떨며 웃어제끼는 아이들은 그저 가득한 명절 음식에 온 신경을 빼앗긴 듯 했다. 얼굴 여기저기에 부침가루와 반질거리는 기름을 묻혀놓고 상이 차려진 거실과 음식 냄새 가득한 부엌을 오가는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제로는 자신이 이곳에서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드는 위치에 있어도 되는지 고민했다.
“으, 으아악! 리모 박사님! 피 난다 그러더라구요!”
멍하니 영정 사진 속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제로가 부엌에서 들려오는 제트의 비명 소리에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오도카니 들고 있던 제기 그릇을 황급히 상 위에 내려놓고, 제로는 바이저를 번쩍이며 곧장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제 1목표, 주인의 안전! 제 1목표, 주인의 안전!”
커다란 덩치의 제로가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를 내며 부엌 한가운데에 나타났다. 식탁에서 손질된 새우에 튀김 옷을 입히던 세모가 황급히 튀김 가루가 담긴 볼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제로가 쿵쿵거리며 바닥을 요란스레 울려, 식탁 위에 이리저리 늘어져 있던 온갖 식재료와 식기도구들이 어지러이 흩어졌다.
“욘석아, 제로가 어떻게 나올지 알면서 내 손에 피 나는 걸 그렇게 동네방네 광고해?”
“그, 그렇지만, 피가 나니까 깜짝 놀랐다, 그러더라구요…….”
“제트, 과일 깎다 손 조금 베인 걸로 큰일 안 나. 아빠, 그러게 도운 박사님이 일찌감치 말리셨잖아요.”
“하지만 저 친구가 나한테 불 사용하는 음식은 도저히 못 맡긴다 그러는데 어쩌니.”
모두가 제트와 제로가 유난이라 생각하는 상황에도 제로는 눈 하나 꿈쩍 않고 성큼성큼 부엌을 가로질렀다. 이미 말려도 소용없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은 도운이 조용히 몸을 물려 제로가 지나갈 길을 만들어주고, 하나는 두리의 뒷덜미를 붙잡고 있던 손을놓은 후 밴드를 찾아 거실로 나섰다.
“경고. 출혈이 있습니다.”
“알아. 별거 아냐.”
“걱정. 2차 감염의 위험이 있습니다.”
“과일 깎다 손 베인 걸로 무슨 2차 감염까지 가니.”
넌 참, 걱정도 많아. 제로의 손에 붙잡힌 제 손을 슬그머니 빼며 리모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옆에서 프라이팬에 전을 부치던 도운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로가 널 많이 생각하니까 그렇지. 걱정 많은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어투였다. 리모가 싱크대에 물을 틀고, 흐르는 물에 손을 가져다댔다. 손가락 끝에 작게 맺혀 있던 작은 핏방울이 눈 감쪽할 사이에 닦여나갔다. 제로가 물끄러미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리모 아저씨, 밴드요.”
“아, 고맙다.”
하나가 거실에서 가져온 밴드를 리모에게 내밀었다. 얼떨결에 하나에게 리모의 곁을 내어준 제로가 멀거니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무렇지 않은 듯 상처를 치료하는 리모의 모습에 제로의 마인드코어가 울렁였다. 저 대신 리모를 챙겨준 하나에겐 고맙다는 인사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상 위에 있던 사진 속 얼굴과 똑닮은 얼굴을 앞에 두고, 선뜻 말을 걸기도 힘들었다.
“하나야, 온 김에 이거 가져가서 두리랑, 세모랑 먹으렴.”
“어, 상에 올릴 거 아녜요?”
“너네 먹으라고 만든 자투리야. 두리 배 많이 고프다니?”
“아니, 쟤 그냥 일하기 싫어서 먹기만 하는 거예요.”
하나가 도운으로부터 받은 그릇을 들고 식탁으로 가며 얼굴을 찌푸렸다. 하나의 말이 무색하게 묵묵히 새우튀김을 만들던 세모는 식탁 위에 전 그릇이 올라오자마자 슬그머니 전을 들어 제 입 안으로 틀어넣었다. 거실에서 와이와 쑥덕거리며 수다를 떨던 두리도 귀신같이 도운의 목소리를 듣고 빼꼼, 부엌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리모, 과일 그만 깎고 가서 상에 올릴 밥이나 퍼줘.”
“혼자 괜찮겠어?”
“이제 다 됐어. 그리고 나도……, 오랜만인데 맛있는 거 해 주고 싶어.”
조금 미안한 듯 웃어보이는 와중에도 한 치의 양보를 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느껴졌다. 도운에게 뭐라 대꾸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리모는 어딘가 상처받은 얼굴을 한 채로 순순히 부엌 구석으로 물러나 밥솥을 열었다. 갓 지은 따끈한 쌀밥이 밥솥 가득 담겨 있었다.
“제로, 이거 받아. 국까지 퍼서 거실 상에 올리러 가자.”
“응답. 네.”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불러 곁에 두는 리모에게선 위화감까지 느꼈다. 일단 그렇게 하라고 명령을 하니 착실히 리모가 건네준 밥그릇을 받아들긴 했는데, 국이 담긴 그릇까지 들고 거실로 향하는 리모의 뒤를 따라 걸으며 제로는 내딛는 걸음 하나하나가 버거울 정도로 무겁다고 느꼈다.
“밥그릇 여기 놓고. 응, 그치.”
리모가 시키는대로, 제로는 조심스레 쥐고 있던 밥그릇을 상 위에 내려놓았다. 다른 또봇들과 아이들이 부엌과 거실을 바쁘게 오간다 싶었는데, 어느덧 상 위는 정갈하게 놓인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성이 듬뿍 담겼을 따뜻한 음식들과 액자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그리운 얼굴. 안녕, 제로? 안젤라에 의해 사라졌던 데이터가 복구된 이후로는 잊을래야 잊을 수도 없는 얼굴들이 먼 기억 속에 있었다.
부엌에서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상 위에는 변함없는 애정이 흘러넘쳤다. 이곳은 제가 구하지 않기로 정한 이들을 기리는 집이었다. 평화로고 고요하던 집 안이 순식간에 커다랗고 끔찍한 화마로 뒤덮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찢어지는 비명과 울음이 귀청을 뒤흔들었다.
“……사죄. 저는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어?”
제로는 리모가 말릴 새도 없이 몸을 돌려 그곳을 뛰쳐나왔다. 모두가 자신의 죄를 까맣게 잊은 것만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을 저 집 안에서 어울리게 가만히 둘 리가 없다. 지켜줬어야 했을, 하지만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한! 악에 찬 리모의 원망이 제로의 마인드코어를 날카롭게 찔렀다. 속이 메스꺼웠다.
이 모든 것은..권리모 때문입니다 제로의 잘못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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