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창작

가지 않은 길

(동)림솔

글창고 by 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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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 8~9기 “엄마의 자장가” 내용에서 이어집니다

※동림솔 자체는 NCP, 림솔은..CP일 수도 NCP일 수도

※열심히 갈겼습니다..글이 많이 투박함

주간창작_6월_3주차

가지 않은 길

우리가 널 붙잡지 못했던 갈림길

w. 목화

일기예보에서는 수능일을 기점으로 추위가 한 풀 꺾였다고 했다. 매년 그랬듯, 역대 수능일 중 가장 추운 날이 될 거라고 떠들던 날이 불과 두 달 전이었다. 그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눈송이가 아니라 꽃잎인가. 리모는 새하얗게 번진 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여전히 길가의 사람들은 두툼한 패딩을 입었고, 입가에선 희뿌연 입김이 새어나왔다. 날카롭게 얼어붙은 겨울 공기에 두 뺨과 두 손이 시린 것도 꼭 나만 느끼는 건 아닐 텐데. 리모가 제 곁의 소라를 흘끔 곁눈질했다. 새빨갛게 물든 코 끝과 두 귀가 퍽 시려 보였다.

“뭘 봐?”

“왜 또 시비야?”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날 선 대꾸는 이제 익숙하다 못해 지겨울 지경이었다. 어째 왕소라라는 인간은 고등학교 3년 내내 참 일관성 있게 싸가지가 없었다. 해가 바뀌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금도 그러는 걸 보아선, 얘는 머리가 하얗게 새고 말라 비틀어져 관짝에 기어들어가기 직전까지 제 얼굴을 보며 시비를 걸 게 분명하다고 리모는 확신할 수 있었다.

“도운은 대체 언제 온대?”

“30분쯤 걸린다는데.”

순간 소라의 얼굴이 있는대로 일그러졌지만, 리모는 못 본 체 하길 택했다. 오늘따라 도운이 버스를 타고 오는 길에 사고가 날 건 또 뭔지. 수능을 치고, 고등학교 졸업을 하고, 대학 결과가 나와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자고 불러낸 건 본인이면서. 하필 있어도 저랑 왕소라 단 둘이라니. 한참 학교를 다닐 때도 이런 식으로 둘만 남겨지는 상황에 진저리를 쳤지만, 오랜만에 만나니 어색한 분위기가 전보다 더했다.

“추운데 카페라도 들어가서 기다릴까.”

“나랑? 너랑? 둘이서 카페를 가자고?”

“누가 뭐래? 추우니까 몸이나 좀 녹이자 그 말이잖아.”

“우리 둘이 들어가봤자 궁상맞을 걸.”

“길가에 이러고 서 있는 것도 충분히 궁상맞거든.”

리모가 투덜거렸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 잿빛 건물들 사이 우두커니 서서 지나다니는 자동차와 사람들만 멀거니 쳐다보고 있는 게 썩 있어보이는 상황은 아니었다. 몰라, 들어가기 싫으면 말라지. 애꿎은 휴대전화만 코트 주머니에 푹 쑤셔넣으며 자리에 없는 도운을 원망했다. 정확히는 도운이 지나오고 있을 길의 사고 차량을.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는 걸 보면 알아서 미리미리 안전운전을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리모가 미간을 좁혔다.

이른 아침부터 진눈깨비가 흩날리나 싶더니, 점심 시간이 다 되어가는 지금은 길가에 쌓인 눈이 꽤 되었다. 어째 시간이 지날 수록 눈발도 점점 굵어지는 느낌이라 리모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제 입으로부터 퍼지는 입김을 눈으로 좇았다. 아무래도 날을 잘못 잡은 모양이었다. 도운은 늦고, 왕소라는 오늘따라 기분이 평소보다 더 더러워 보이고, 날씨는 궂었다. 돌아가는 길은 또 어쩌지. 지하철에도 사람이 많을 것 같은데. 리모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뭐, 이제 수능이고 뭐고 다 끝났으니까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 해야 하는 공부가 있는 건 아니니 그 점은 다행이었다.

“……너 대학은 어떻게 됐냐?”

문득 리모가 물었다. 도운이야 입시를 준비할 때부터 함께 대도공대를 지망하는 것도 알고 있었고, 준비하며 서로서로 이것저것 도움을 많이 주고 받았으니 자연스레 대학 합격이 뜨자마자 소식을 공유했다. 반면 소라로부터는 그 어떤 소식도 듣지 못해 내심 의문을 가지던 참이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대학에 떨어져서 조용한 거겠거니, 했겠지만 제가 아는 왕소라는 실력으로나 성격으로나 대학 입시 따위에 부러질 위인이 아니었기에. 평소 저보다 소라와 몇 마디를 더 나누는 도운에게 넌지시 물어도 딱히 아는 바는 없는 모양이었다. 만에 하나 좋지 못한 소식이 있을까 섣불리 물어보기도 어렵다 그랬나. 하지만 그건 도운의 입장이고. 애초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상 더는 학교 다닐 때처럼 하루가 멀다하고 얼굴을 볼 일도 없을 텐데. 결과가 좋든 나쁘든 이제 어디서 뭘 하고 살 건지 알아두긴 해야 아주 가끔 생사를 묻는 연락이라도 던질 거 아니냐고. 리모가 소라의 눈치를 살피며 잠자코 답을 기다렸다.

“넌?”

하지만 돌아온 답은 리모가 기대했던 내용이 아니었을 뿐더러, 미처 예상하지 못한 되물음이었다. 얘가 나의 무언갈 궁금해한 적이 있던가. 리모와 도운, 그리고 소라는 나름 친구라는 정의를 가진 관계였는데 항상 친구에 해당하는 건 저와 도운, 소라와 도운만 해당하는 이야기였으니 리모가 놀라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고등학교 내내 전교 1, 2, 3등을 다투던 셋이었어도 충분히 견제할 법한 리모의 성적마저 소라는 리모에게 직접 묻는 일이 없었으니까. 정말 관심이 없는 건지, 그런 식으로라도 말을 붙이고 싶지 않았던 건지. 적어도 리모가 아는 동안은 주변 사람들에게 내내 날을 세우던 소라였으니 그 애가 콕 집어 저만 미워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뒤로는 내심 마음을 놓긴 했는데.

“나도, 도운도 대도공대 최초합했어. 대도공대가 1지망이었으니까 우리 둘 다 거기 갈 거야.”

한 박자 늦은 리모의 답을 끝으로 숨 막히는 정적이 찾아왔다. 먼저 물은 건 리모인데, 소라는 제 궁금한 것만 묻고 정작 본인의 이야기는 할 생각이 없는 듯 굴었다.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는 소라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리모는 입을 비죽였다. 그래,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오겠다 그거지. 됐다, 됐어. 누군 지랑 이러고 있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 줄 알아?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줄 아냐고. 도운이 하도 널 신경쓰니까 옆에서 같이 좀 어울렸더니 사람을 아주 물로 보지. 소라에게 대놓고 불만을 토로할 용기는 없으면서 속으로는 불만이 끝도 없이 터져나왔다. 이대로라면 아마 도운이 도착할 때 즈음엔 분위기가 아주 시궁창에 처박혀 있을 거라는 예상도 했다.

“……나 이제 너네랑 연락 못 해.”

그리고 긴 침묵 끝에 소라가 툭, 던진 말은 두 사람 사이의 아슬아슬하던 분위기를 손수 진창에 갖다 박는 것이었다. 그렇게 길거나 어려운 말이 아니었음에도 리모는 소라의 말을 이해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여태 저나 도운과 어울리기 싫다는 투로 말한 적이야 몇 번 있어도. 고등학교 3년동안 나름 잘 지내지 않았나, 우리? 평범하게 수다도 떨고, 함께 팀을 꾸려 대회에 나가기도 했고, 하굣길에 함께 떡볶이를 먹거나 수학여행 가서 같이 놀기도 했고…….

“……왜?”

왜,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을 저 혼자서는 도저히 찾을 수가 없어서. 리모는 몸을 틀어 소라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랑 대판 싸웠을 때도 연락 끊겠다는 말은 안 했잖아. 그냥 내가 싫어졌다고 해도 이것보단 더 납득이 쉬울 거야. 도운이랑은 나름 잘 지내는 거 아니었어? 도운이 뭘 했다고 걔랑도 연락을 끊어, 걔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해외로 나가. 대학도 거기서 다닐 거고.”

“갑자기? 아니, 해외로 나가도 연락 정도는 할 수 있는 거잖아.”

“바쁠 거야.”

“누가 매일매일 연락하래? 야, 우리 고등학교 다닐 때도 그렇게까진 안 했어. 그냥 가끔씩 안부 인사나 주고 받 ,”

“말귀를 왜 이렇게 못 알아들어? 너 싫다고, 연락 안 할 거라고!”

소라가 버럭 소리쳤다. 여태 리모를 쳐다보지도 않다가, 제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있는 소리를 내지르는 모습에 리모는 그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그 고고하고 도도하기만 하던 왕소라가 두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힘껏 화를 내고 있다. 도로를 코앞에 둔 곳이라 자동차 배기음에 주변이 소란스러웠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길 가던 사람들이 죄다 이쪽만 쳐다봤을 정도로. 리모가 입을 뻐끔거렸다. 갑작스레 면전으로 쏟아지는 비난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 지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너네랑 나랑 같은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태도, 더 못 봐주겠어. 시도 때도 없이 나한테 말 거는 차도운도, 남들이 우리보고 친구라고 착각해서 떠드는 말에 부정 안 하는 너도 다 짜증나.”

“……뭐라고?”

“요약하자면 수준 떨어져서 더는 못 놀아주겠다는 얘기야. 이거 봐, 이런 간단한 말도 이해 못 하는데 내가 너랑 무슨 대화를 하니?”

“야, 왕소라!”

“그딴 표정 짓지 마, 너도 마찬가지야. 이 겨울날 길가에 사람 세워놓고 뭐 하는 짓인데?”

내내 리모의 얼굴을 죽일 듯 노려보며 쏘아붙이던 소라가 리모의 어깨 너머를 바라보았다. 설마. 리모가 황급히 소라의 시선 끝을 따라 뒤돌았지만, 이미 소라의 날카로운 말은 리모와 소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우두커니 서 있던 도운에게 날아가 꽂힌 후였다.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굵은 눈발 한가운데, 도운은 그 차가운 눈을 죄 맞으며 길 한복판에 멈춰 서 있었다.

“사과해.”

“내가 뭘?”

“나한테야 그렇다 쳐! 그런데 네가 도운한테 어떻게 그래?”

“대학 합격하고 나니까 그나마 있던 지능도 바닥을 찍은 거야? 지금 사과를 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라 약속 시간에 30분이나 늦은 도운이겠지.”

소라를 향한 도운의 황망한 얼굴을 보고 나니, 이젠 슬슬 낯선 소라의 태도에 당혹감을 넘어 분노가 솟았다. 저와 온갖 욕을 하고 신경전을 벌이며 싸웠을 때도 도운과는 말다툼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도운이 허허실실 웃으며 남들한테 무시 받고 있을 때, 저를 제치고 가장 먼저 가서 그 상황을 엎어놓던 것은 왕소라였는데. 이젠 그런 것도 전부, 너무 먼 과거의 일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등학교 3년을 내내 함께한 친구들과 성인이 된 후에도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에 내심 설레기까지 했는데.

“왕소라!”

“……너네 지긋지긋해.”

그렇게 말하는 소라의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흰 눈이 두텁게 쌓인 거리에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닥치며 우는 소릴 냈다. 이렇게까지 화가 머리 끝까지 나는 것도 오랜만이라, 그리고 끝까지 소라를 절친한 친구로 생각했을 도운을 앞에 두고 더는 소라를 붙잡고 다그칠 수도 없어 리모는 제 곁을 떠나가는 친구를, 아니, 친구였던 애를 붙잡지 못했다. 목 언저리에서 흔들리는 똑단발을 뒤에서 바라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일 줄은 몰랐다. 근 3년 간 내일 보자는 인사와 함께 하교하는 뒷모습에 대고 재수 없다 소리치긴 했어도, 그땐 24시간도 되지 않아 곧 다시 볼 거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해서.

“소라야, 내가 늦어서 미 ,”

“놔.”

도운이 황급히 소라의 팔을 두 손으로 꼭 붙든 건, 마지막까지 제가 알던 고등학생 왕소라를 붙잡기 위한 발악이었다. 그러나 소라는 제 팔에 도운의 손이 닿기가 무섭게 도운을 거칠게 뿌리쳤다. 도운의 머리와 어깨 위로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있었다. 소라의 시선이 자신을 애타게 바라보던 도운의 눈과 마주쳤다. 잠시 무언가 말을 고르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소라의 눈앞으로 희뿌연 입김이 피어올랐다. 소라와 도운 사이로 나풀나풀 내리던 눈송이는 그 어느때보다 무겁고, 느리게 땅을 향해 가라앉았다.

“날 너 같은 사람이랑 같은 레벨로 취급하지 마.”

그 말을 끝으로, 소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짙은 겨울 한가운데로 모습을 감추었다.

-

그때, 끝까지 붙잡아야 했던 걸까.

리모의 발치로 눈송이 하나가 톡,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올려보니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던 흐린 하늘에서 나풀나풀 작은 얼음 결정들이 땅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아이들이 곁에 있었다면 하늘에서 내리는 올해 첫 눈을 바라보고 기쁨과 설렘이 가득 담긴 탄성을 들었을지도 몰랐다.

“시신이 없습니다!”

“현장 통제해, CCTV랑 주변 차량 블랙박스 확보하고!”

“시신은 둘째치고, 혈흔 하나가 없는 게 말이 돼?”

그러나 아이들이 없는 지금, 리모의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은 공사장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경찰들의 목소리뿐이었다. 눈앞에서 소라를 놓쳤다던 도운이 죄책감에 허덕일 때, 리모는 소라가 떨어졌다는 공사장으로 경찰들을 따라 온 것이었다. 오는 길에 이미 상황을 대충 전해듣긴 했지만, 현장에서 왕소라라는 인간을 두고 나누는 대화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이성적이었다. 저 높이에서 떨어졌다면 살아있을 리 없다고. 아크니라는, 왕소라라는 인물은 이미 죽었을 거라고.

“좋아, 나도 도울게. 이번에는 정말로 셋이 같이 하는 거야.”

그렇게 말하던 게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 정도는 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답지 않게 들떠 있던 목소리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어른 왕소라와 달리, 제 속마음을 숨기는 것에 서툴던 어린 왕소라를 알고 있었으니까. 저와 도운이 둘이서 로봇을 만들고 있으면, 언제나 먼 발치에서 저들을 부럽다는 듯 쳐다보고 있던 애를 아니까.

언제부터 잘못되었던 건지, 넌 왜 외톨이가 되면서까지 우리와 다른 길을 걷기로 했던 건지. 워낙 제 이야기를 안 했으니 리모가 소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많지 못했다. 그저 그때, 벌건 대낮의 길가에서 꼴불견으로 싸우는 일이 있더라도 그 앨 붙잡았더라면, 그 앨 저와 도운의 곁으로 어떻게 해서든 끌어왔더라면 이야기의 결말이 조금은 달랐을까, 싶었다. 눈 내리는 겨울날 어린애 같은 싸움을 하느라 심한 감기에 걸려 앓는 일이 있었어도, 그랬다면 여전히 셋이 계속 함께일 수 있었을까, 하고.

‘……예나 지금이나, 눈만 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네.’

리모가 옅은 숨을 내뱉자 새하얀 입김이 머리 위로 빠르게 흩어졌다. 흩어지는 입김 뒤로 흩날리는 눈송이가 겨울 하늘에 가득했다. 눈이 오는 날 홀로 멀어지던 어린 여자애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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