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혔어야 할 감정

루루리 by rururarari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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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감정이라는 게 어떤 결과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라고 생각해.

 

개별로 존재하는 감정은 단편적으로 내가 어떤 행동을 할지 길을 만들어 주지.

 

만약 내가 너를 꼭 안고서 행복의 감정을 느꼈다면,

나는 너를 꼭 안는 걸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 거야. 그리고 매번 너를 꼭 안고 싶을 거야.

 

만약 내가 너와 싸우고서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면,

다음번엔 이런 순간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거야.

 

만약 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극도의 공포심을 느끼며 어떻게든 너를 찾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게 될 거야.

 

그렇게 해도 결국 너를 잃었다면,

나는 너와 있었던 모든 시간을 반추하며 다가오는 나날을 눈물로 지새울 거야.

 

어느 날 대해에 일렁이는 파도 같은 슬픔 속에 잠겨 나는 생각해봤어.

이 모든 일의 시작이 무엇이었을까.

이 감정들은 나를 어디로 이끄는 것일까.

 

내가 너를 보며 행복했던 게 문제였을까.

내가 너를 단호히 가르치지 못한 게 문제였을까.

내가 너의 여행을 허락한 게 문제였을까.

내가 너를 잃고 슬퍼하는 게 문제일까.

 

지난 시간 속에서, 그리고 내 속에서

원인을 찾아봤지만, 너무나 많은 것들이 뒤엉켜 있어서 하나를 콕 집어 말할 수 없었어.

 

그래서 동굴에서 나와

너와 함께 걷던 숲을 걸었어.

 

새가 지저귀고, 이름 모를 동물이 우는 울창한 숲길.

네가 여기를 걸으며 나를 보며 웃던 순간이 떠올라.

눈물이 나려고 했지.

 

즐거운 기억이 너무나 많았는데.

그 모든 기억이 슬픔이 되어 나를 후벼 파 왔어.

너와 즐거웠던 만큼.

나는 더 없이 슬퍼졌어.

 

이 정도 슬펐으면 된 것 같다.

그렇게 다시 정리하려 했지.

 

그런데. 숲의 끝에 생전 처음 보는 이상한 게 자리하고 있었어.

인간들은 이걸 목책이라고 부르는 것 같았고, 그 앞에 인간이 몇 명 서 있었지.

 

그리고 그 목책에 네 머리가 걸려 있었어.

 

어떤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얼이 나갔어.

 

동굴을 나오기 직전까지 꾸고 있던 꿈속에서도.

숲길을 걸으며 기억 속의 얼굴을 그리고 있었는데.

애처롭게 쓸고 닦았던 너의 얼굴을 내가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잖아.

 

목책으로 다가가.

그 앞에 선 인간들에게 물었어.

 

저게 무엇이냐고.

 

아. 우리 도시의 자랑거리입니다.

처음으로 사냥한 용이죠.

덕분에 이렇게 도시가 커졌습니다.

 

아.

 

대해의 슬픔이 끓어오르는 분노의 화산 속으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지.

 

하지만,

나는 이성적으로 생각했어.

내가 가진 의무를 떠올리고 이것저것 떠올렸지.

 

그 자리를 벗어나 다른 용을 불러 모아 이야기했어.

 

내 아이가 인간의 손에 죽었다.

깊은 애도를 표한다.

 

내 아이의 목이 인간의 마을에 걸려 있다.

깊은 애도를 표한다.

 

내가 인간을 죽여도 괜찮은가?

사건에 가담한 이들만.

 

가담한 이들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가.

답을 줄 수 없다.

 

 

 

아.

그렇군.

 

 

 

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도시에 들어갔어.

인간의 도시는 너무나 크고 이상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지.

 

다른 생물을 죽여 만든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고 집을 꾸미고 그 고기로 생을 연장했어.

 

밤이 될 때까지 도시를 정처 없이 떠돌았어.

그리고 밤이 되자, 인간들은 도시를 등불로 도시를 밝게 만들었어.

 

너로 만든 등불로 말이야.

 

너는 산산이 조각나 있었어.

머리는 인간의 도시 입구를 꾸미는 조형물이 되어 있었고,

살은 인간이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빛을 내는 등불이 되어 있었고

뼈는 인간이 다루는 검과 방패와 같은 도구가 되어 있었지.

그 외에도 많았어. 수염과 비늘과 뿔과 피와….

 

 

 

아.

그렇군.

이렇게 살아가는군.

 

 

 

내가 인간을 모조리 죽여도 되겠는가.

안된다.

 

왜 그러한가.

가담한 이들만 죽이는 것이 규칙이니까.

 

내 아이의 시체로 도시를 밝히고 있는 저들은 가담자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

 

내 아이로 문명을 이룩한 저들이 가담자가 아니라고?

그렇다.

 

그렇다면 내가 저들을 절멸시키는 걸 너희는 반대하겠다는 것인가.

그렇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도시로 들어갔어.

 

 

 

이미 용의 쓸모를 알아버린 인간들은 다음 용을 찾아 헤매고 있었지.

인간을 모조리 죽여버리기 위한 장애물이 나와 같은 용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지.

 

나는 그래서 인간들에게 용의 정보를 팔아 넘겼어.

그들이 어디에서 자고 어디에서 먹고 어디에서 쉬는지.

 

하나둘 용이 죽어 나가고.

도시는 더욱 번성하고.

 

시간이 흐르며, 나를 막아서던 용이 하나둘 의견을 바꾸거나, 죽어 나갔어.

드디어 나를 막아 세우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지.

 

 

 

나는 이제야 명확하게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어.

이것은 너의 잘못도 아니었고 나의 잘못도 아니었어.

 

잘못을 저지른 이가 지금까지 대가를 치르지 않았으니.

나는 유일한 청구자로서 그들에게 대가를 청구하려고 해.

 

여기까지 오며.

매 순간 포기하고 싶었어.

 

쉬지 않고 슬퍼하는 것도, 증오를 품고 살아가는 건 너무나

괴롭고, 힘들고, 외롭고, 어려운 일이었거든.

 

웃기는 일이지만

내가 쓰려지고 싶을 때마다 이 도시가 내게 힘을 줬어.

 

목책에 걸려 있는 너의 머리.

밤의 어둠을 걷어 내는 너의 빛이 내게 속삭여줬어.

 

전부.

모조리.

죽여버리라고.

 

덕분에 나는 오래전에 잊혔어야 할 감정을 온전히 간직하여.

지금에 이르렀지.

 

드디어 내일이구나.

 

아. 길고 길었구나.

역겨운 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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