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잊혀진 나 (ㅣ), 이름

6월 4주차 주제: 잊혀진 ___

전편

축복받으라,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여!

계약서의 글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던 순간의 감격은 오래전에 바랬다.

“야 독소조항? 그런 거 있나 좀 찾아봐.”

“예.”

검정고시를 치르고 방통대에서 재무회계를 배우고 이제 다른 곳에도 취업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게 욕심이라면 적어도 원서는 내어볼 수 있게 되었는데도 그는 여기 묶여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의 온 생애가 이곳에 몽땅 저당잡힌 것처럼. 이름부터 졸업장까지, 그가 쓰는 대포 통장과 열여덟에 찍은 사진이 담긴 주민등록증까지. 몽땅. 어쩌면 그가 죽은 후에도 그는 그의 이름으로 만든 대포통장을 제공하며 이곳을 배불리고 이롭게 하겠지.

조폭 새끼들.

“서류 몇 장이었어?”

“4장.”

그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 안전하게 무지한 잔심부름꾼 시절. 그야말로 낫 놓고 기역자도 몰라 총애를 받던 시절이.

“기억나는대로 다 써. 같잖게 굴러가지도 않는 대가리 굴리지 말고.”

그의 한 시절을 현재로 살고 있는 소년을 곁눈질한다. 소년은 괴발개발 글자라기보다는 낙서에 가까운 그림을 공책에 한 바닥 그린다. 이 애는 모르고 싶어 모르는 걸까 모르기 싫어도 모르는 걸까. 올이 굵고 곱슬대는 머리칼 아래 무척 색이 연한 눈동자가 곤하게 반짝인다. 그는 시간이 나면, 운좋게 단 둘이 남겨지는 때가 오면 물어볼 생각이다. 글을 배워볼 생각이 있니? 네가 생각만 있다면 내가- 네가 검정고시를 치면, 방통대는 학비가 싸거든 네가 생각만 있다면-

쟤 이름이 뭐였더라?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 그는 입속으로 빠르게 훈민정음을 굴린다. 이제 역순은 끝났으니 순서대로 가겠지. 조직의 악의는 늘 말단에겐 다소 짓궂고 헤퍼진다. 이름 예쁘시네요. 그런 말을 듣지만, 친해졌다고 여기는 이들은 고백하기도 했다. 네 이름 말했을 때 처음엔 네가 장난치는 줄 알았어.

“나다 씨.”

어벙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이 애의 이름은 ‘가나다’다. 조직의 일곱 번째 심부름꾼. 계속 글을 읽지 못하면 오래 쓰일 것이다. 글을 더듬더듬 읽기 시작하면 버려질 것이다. 빠르게 글을 읽고 쓰고 해석하며 새로운 기능을 제시해 그의 쓸모를 증명하지 않는 한.

“더운데 박카스라도 하나 사 먹고 가요. 날이 좋잖아.”

“……”

가나다는 소처럼 큼지막하고 순한 눈만 꿈뻑인다. 단 둘이 되자 새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오늘 처음보는데 대학까지 보내준다 어쩌고 하면 말만 번지르르한 조건만남 제의나 스폰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는 사실, 어느 쪽이 가나다에게 더 유리한지 잘 모르겠다. 조직에 오래 남기를 원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그것보다야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엄청난 장점이 있다고 그는 생각하지만… 누가 판단하는지에 따라 다를 수도 있으니까.

…아니지, 그는 실소한다. 기껏 글을 읽고도 별반 다를 거 없다는 걸 그의 인생이 증명하지 않는가. 글을 읽고 학력을 갖추면 그는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 생각했었다. 적어도 이 곳은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확신이 사라지니 자신감도 사라지고 그는 날씨 얘기나 하며 어설프게 웃는다.

“그럼 또 봐요.”

가나다가 꾸벅 목례하곤 멀어진다. 곱슬대는 굽이마다 빛을 받아 반짝이는 머리칼을 지켜보다 체념한다. 자조같기도 하다. 하긴 내 주제에. 내 인생이나 잘 살지 뭘 남을 어떻게 한다고…

두 번째로 가나다를 만났을 때 그는 똘마니 두엇에게 둘러싸여 무언가 닦달당하고 있었다.

“야, 그 새끼 어떻게 생겼었어? 기억나는 거 다 말해봐.“

“눈썹이 짝짝이였고… 미간에 세로로 주름이 한 줄 나 있는…”

“백 사장한테 연락해 봤어?”

가나다는 꽤 세세한 것들도 기억했지만 그걸 그려낼 능력은 없었다. 조폭 새끼들이 몽타주를 그리는 화가를 모셔올 수 없음은 당연했고, 잠적했다는 일수꾼의 사진을 수배하고 행방을 수소문하느라 저마다 폰을 붙들고 바빴다. 가나다는 공책 한 장에 어떻게든 얼굴을 그리느라 끙끙대고 있었다. 그는 남 일인 양 호젓하게 초상화나 구경한다. 관자놀이에 흉터가 있나보네…

“그 때…”

“응?”

“용돈 주신 거… 감사했어요…”

“그랬어? 그걸로 뭐 했어요?”

“…케이크 사 먹었어요…”

“아유, 귀엽다. 잘 했어요.”

“박카스도 사 먹고…”

“말도 잘 듣네.”

파란색 볼펜으로 그려진 남자의 얼굴 오른쪽이 좀 더 진하게 몇 번이나 덧칠된다. 양쪽 얼굴이 다른가?

“……형님은…이름이 뭐예요…?”

“나?”

“……알고 싶어가지고…”

그 말과 함께 입술이 세로로 박박 덧칠된다. 종이가 울 정도로 맹렬한 선이다.

너 보니까 그림 되게 못 그리는데 역시 글을 배우는 게 좋겠어.

한글 배울 때 제일 먼저 배우는 게 네 이름일텐데, 너는 네 이름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다라요.”

볼펜이 뚝 멈춘다. 가나다는 긴 앞머리 속에 숨어 빠끔히 그를 훔쳐본다.

“나다라.”

그에게 진실을 말해준다. 나는 너의 전임자. 조폭의 심부름꾼. 너처럼 기억나는 걸 써보라고 하면 동그라미 세모 네모를 그리던 기특한 까막눈. 그래서 내 이름은 나다라.

“……”

그의 후임이 그를 빠안히 응시하면, 그는 왠지 그의 존재를 변명하고픈 충동에 사로잡힌다.

원래 이름은 이게 아니었을지도 모르지. 워낙 오래 전이라 잊었지만 다른 이름으로 불릴 때가 내게도 있었을지 모르지. 이런 나는 내가 아닐지도 모르지. 지금은 잊혀졌지만 누군가의 귀한 아이였을 수도 있겠지.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 잊혀질 것조차 없이 그냥 이게 나인지도 모르지. 나다라로 태어났기에 나다라로 사는 중인지도.

지금의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고, 본래의 나를 상정해두는 건 유치하고 비루한 일이다. 왜, 어린 애들은 부모님한테 꾸중 들을 때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이별했던 돈 많은 친부모가 나를 찾아냈으면 좋겠다는 공상을 한다던데.

그는 그가 누군가에게 잊혀진 존재라고 믿는 것이 덜 비참한지, 잊혀질 과거조차 없는 현재를 받아들이는 게 더 비참한지 알지 못한다. 원래 나다라가 아니었는데 나다라로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이 덜 비참한지, 나다라로 태어나 나다라로 살고 있다고 믿는 것이 더 비참한지도 알지 못한다.

“다라 형님.”

“…어.”

그래서 그는 이름을 불리면서도 웃었다. 어쨌건 조폭 뒤나 빨아주는 처지에 더 비참하고 덜 비참하고가 대체 뭐가 중요한가 생각하면 우스워져서.

“이름 예뻐요.”

“ㅎ…”

“진짜 예쁜데…”

나다라는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하하하. 비소와 냉소 사이의 웃음이 커다랗게 파안했다. 아이는 머쓱한 얼굴로 다시 그림에 집중한다. 그것 참, 그림엔 소질이 없대도 그러네.

“이름이야 나다 씨도 예쁘지.”

“……”

가나다 씨는 본명이 있었으면 좋겠다.

귀하게 사랑받던 시절 큰 돈을 주고 지은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어.

“어어 왜 대답이 없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렇지 않고서야, 가나다로 태어나서 가나다로 사는데도 이렇게 착하고 순진하면 너무 가엾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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