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무지한 개의 알록달록한 하루

6월 1주차 주제: 무지개

무지한 개는 탁월하게 무지할수록 두터운 신임을 얻는다.

“서류 몇 장이었어?”

“4장.”

“오호.”

그로 말할 것 같으면 한 조폭 조직의 심부름꾼으로, 긴급도는 떨어지지만 보안상 너무나 중요하여 텔레그램으로로 전송할 수 없는 서류나 사진, 대화내역 따위를 배달하는 일을 맡고 있다. 그가 이 일을 맡게 된 것은 글을 읽을 수 없기 때문인데도 보안이 너무나 중요한 나머지 그는 시시때때로 고초를 겪는다.

툭, 그의 앞에 공책이 떨어진다.

“기억나는대로 다 써.”

이렇게.

“같잖게 굴러가지도 않는 대가리 굴리지 말고.”

그가 계속 무지한지 시험하고 확인한다.

공책을 열어보면 한 면이 큼직큼직한 네모로 가득하다. 기억하려 애쓰는 척 끙끙대며 매번 순서를 조금씩 다르게 그리는 건 귀찮고 지겨운 일이다. 그래도 그는 연필을 들어 네모 안을 신중하게 채운다.

ㅁ ㅐ ㅅ ㅆ ㅂ ㅗ

ㄱ ㄴ ㅇ

ㅣㅍ

그는 글을 배울 마음이 없고 서류를 봐도 기억하고 싶은 글자가 없고 그냥 빨리 집에 가고 싶다. 뭔 축제를 한다고 밖은 계속 시끄럽고 사람들은 옷 색깔이 복잡하고 마이크 소리가 웅웅 울리고 피곤하다. 하지만 티를 내서는 안 된다.

“이거를 돌잡이 꼬맹이가 썼으면 천재소리 들을텐데… 안타깝다 야.”

“이게 쓴 거냐? 이거는 그림을 그린 거지.”

“이 세모 이거 설마 시옷이냐?”

“이거 씨발 하고 뻐큐 아니냐? 이 새끼 글 아는 거 아냐?”

낄낄대고 큭큭대며 원하는만큼 그의 그림을 평가하고 나서야 돌아갈 수 있으니까.

밖은 계속 시끄럽고 후덥지근하고 걸음이 빨라진다. 지하철에 사람 많겠지. 싫다.

“나다 씨, 나다 씨!”

여기에 진치고 있는 사람들은 옷 색깔이 복잡하거나 팔찌가 복잡하거나 화장이 복잡하거나. 보기만 해도 피곤해서 걸음은 더 빨라진다.

“나다 씨.”

솔직히 말해 그는 그게 그의 이름인 걸 까먹고 있어서 듣고도 몰랐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또 배달 있어요?”

“…예.”

낄낄대지 않고 큭큭대지 않고 공책을 뒤적거리지 않던 남자였다. 계속 서류만 보고 있던 남자. 잘 모르는 남자.

남자는 샛노란 지갑을 열고 지폐 칸을 뒤적이더니 돈을 준다. 많은 돈을.

“더운데 박카스라도 하나 사먹고 가요. 날이 좋잖아.”

“……”

떠죽게 생겼는데 날이 좋기는.

그 눈빛을 읽었을까, 남자가 손가락을 허공에 찌르면 그의 눈도 자동적으로 하늘에 철썩 달라붙는다.

“서울에 무지개 잘 안 뜨거든요.”

색깔이 복잡한 구름이 허공에 걸려있다. 빨강도 있고 파랑도 있고 남자의 지갑같은 노랑도 있는, 그것이 한데 뭉친 덩어리가.

무지개.

“그럼 또 봐요.”

삽시간에 옷이 복잡한 사람들은 무지개를 입은 사람들이 된다. 남자는 무지개를 입은 사람들이 왁자하게 떠드는 세상에 그를 남겨두고 뒤돌아선다. 그는 축제 한가운데를 가르고 들어가 여기저기를 서성댄다. 그러기를 한참, 그의 손목에도 무지개 팔찌가 달린다.

지하철은 역시나 복잡했다. 그는 사람들에 밀리고 치이면서 벽을 응시한다. 지하철노선도엔 무지개보다 많은 색깔로 복잡한 선이 그어져 있었다. 굳이 하늘을 보지 않아도 눈만 들면 무지개가 있었다. 심지어 지하철 안에도.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빠져나오면 그는 힘쓰지 않고도 지상으로 밀어올려진다. 지상으로 토해진 그가 겨우겨우 편해진다. 드디어 오늘이 끝났어.

집에 왔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박카스가 먹고 싶었다.

글자는 몰라도 숫자를 아는 것은 생존본능이다.

아닌가, 글자는 몰라야만 했고 숫자는 알아야만 했다.

물론 그는 숫자를 모를 적에도 여자가 그려진 돈을 내밀면 편의점에서 못 살 게 거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는 남자가 준 돈을 가지고 편의점에 들러 매대를 하염없이 빙빙 돌다가, 남자가 하라는대로 박카스를 샀다.

“…혹시 돈이 모자란가요.”

“아뇨, 레인보우 마블 케익 이벤트 중이거든요. 저 중에서 하나 골라 가져오시면 되세요.”

그는 조각난 케이크도 하나 샀다. 겉면은 희고 안쪽은 빨간색 노란색 초록색 파란색이 보이길래 하나 샀다.

집이 멀고 배가 고파서, 그는 증정품으로 받은 둥글고 노란 껌을 한입에 털어넣는다. 시고 달았다. 그리고,

복잡한 하루였다.

글을 알고 나서 그는 이 날을 알록달록한 하루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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