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그곳에

주간창작 챌린지 6월4주차: 잊혀진 ㅇㅇㅇ

One.

교외라기보다 숲속에 숨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저택이었다. 꽤 오래 방치되었던 장소 같았다. 널찍한 정원의 정원수는 모두 말라 죽었고, 굳어진 흙 위를 잔디 대신 잡초가 뒤덮고 있었다. 그런 마당의 풍경과 걸맞게 저택 역시 오랜 기간 사람 손길이 닿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커튼도 달리지 않은 창문 몇 개가 활짝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한 최종수는 저택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벨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누군가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누구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문 안의 젊은 남자는 보통 사람보다 키도 체격도 커다란 종수를 보고 겁을 먹은 듯 움츠러들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사람인 모양이다. 사람이 직접 나와 응대한다는 것이 시대에 뒤처져 있는 저택 분위기에 꽤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요즘 대부분의 저택들이 그렇듯 로봇 하인이 나왔다면, 대부분의 신체가 기계와 실리콘으로 이루어진 종수의 몸을 스캔한 뒤 경고음을 울리며 문을 닫아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문을 열어준 것이 사람이어서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다행일까.

종수는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텅 빈 현관홀을 빠르게 훑은 후 입을 열었다.

“이 저택 주인이 박병찬 씨 맞죠? 그분을 만나러 왔습니다.”

“어… 저희 선생님은 아무도 만나지 않으십니다.”

“저는 최종수라고 합니다. 박병찬 씨의 피후견인입니다. 제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젊은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종수는 한숨을 내쉬고 기다렸다.

멀리서 새 지저귀는 소리가 두어 번 울렸다. 그 소리가 끊어진 후로는 고요가 이어진다. 어쩐지 주위의 모든 사물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다. 말라죽은 나무도, 억세게 자라난 잡초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태양마저도. 그에 생각이 미친 순간 등줄기로 끈적하고 기분 나쁜 감각이 흘러갔다. 저도 모르게 저택이며 정원 곳곳으로 초조한 시선을 보내게 된다.

최근 최종수의 상태는 대체로 그랬다.

현장에서의 그는 한 치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 유능한 대테러부대 요원이다. 날카롭게 긴장한 채 발소리를 죽여 천천히 걸음을 내디딜 때는 괜찮다. 굳게 잠긴 문에 플라스틱 폭탄을 붙이고 물러날 때도, 폭음과 함께 잠금쇠가 날아간 문을 걷어차며 외칠 때도, 테러리스트들을 향해 MP5 기관단총을 난사할 때도 괜찮다. 심지어 테러리스트의 손에 동료가 목숨을 잃는 드문 경우가 발생해도 안타깝긴 하지만 괜찮다. 어떤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된다 해도 그는 괜찮았다.

하지만 총을 쥐고 있지 않을 때, 동료들과 떨어져 혼자 있을 때면 달라진다. 타르처럼 검고 끈적한 것이 종수의 몸을 조금씩 뒤덮는다. 불쾌감이 실체가 되어 전신을 휘감는다. 밤에는 수면장애와 악몽이 번갈아 찾아오고, 낮에는 물 위로 끌어내진 물고기가 된 것처럼 헐떡이게 된다.

이 불안증의 원인은 이미 알고 있었다. 종수는 신체 일부를 기계로 개조한 강화 인간인 사이보그 대원들로 이루어진 특수전술대에서 13년을 보냈다. 통일 전후의 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끝없이 발생하는 테러의 위협에 직접 몸을 부딪쳐가며 싸우는 중이다. 그러는 동안 차곡차곡 쌓여온 스트레스로 PTSD의 전조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를 호전시키기 위해 박병찬이라는 인물을 반드시 만나야만 했다.

다시 현관문이 열리더니 아까의 젊은 남자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들어오십시오. 박병찬 선생님께서 만나겠다고 하십니다.”

만나지 않겠다는 답이 돌아오면 그리 튼튼해 보이지 않는 남자를 밀쳐내고 강행 돌파를 할 결심이었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던 모양이다. 남자는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던 선생의 결정이 의아한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수를 안내했다.

“응접실이 아직 정리가 전혀 안 되어서… 서재로 모시겠습니다.”

그런 말을 들었지만, 안내된 방은 그다지 서재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벽을 따라 커다란 책장이 몇 개 늘어서 있지만 대부분 비어 있었다. 빈 벽에는 액자며 그림이 걸려있던 자리가 벽지에 빛바랜 흔적을 남겨 놓았다. 방 중앙에 작은 테이블과 안락의자 두 개가 있고 창가 쪽에는 큰 책상이 놓여 있다. 한 구석에 천으로 덮여 있는 커다란 더미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가구며 물건들인 모양이었다.

환기를 위해서인지 커튼도 달려있지 않은 창문이 활짝 열려 있어 엉망이 된 정원이 내다보였다. 창문 앞에 서 있는 정원수도 시커먼 것이 말라 죽은 것처럼 보인다. 여러모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느낌을 주는 을씨년스러운 저택이었다.

종수가 안락의자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문 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안에 모셨습니다. 바로 차를 준비….”

“접대는 필요 없어. 금방 돌아갈 사람이야.”

대화가 끝나자마자 응접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 종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박병찬이다.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 얼굴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종수만큼은 아니지만 꽤 키가 크다. 분명 나이는 마흔 정도 되었을 텐데, 자세가 곧고 피부가 깨끗해 그보다 젊게 보였다.

박병찬 역시 종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놀라움으로 시작된 그 얼굴에 일어난 변화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는 것으로 끝났다. 그건 마치 혐오감에 가까운 감정처럼 보였다.

중년의 남자는 천천히 걸어와 종수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입술을 깨물고 종수를 계속 노려보다 묻는다.

“날 알아보는 눈친데.”

“얼굴 정도는.”

박병찬의 얼굴에 흥미로운 기색이 번졌다. 종수는 주머니에서 가느다란 체인 끝에 매달린 낡은 로켓을 꺼내었다. 로켓을 열어 그 안에 든 조그마한 초상화를 내보인다. 전문가의 솜씨는 아닌 것 같지만 매우 정성을 다해 그린 연필 초상화가 드러났다. 박병찬의 젊은 모습이 살짝 노랗게 바랜 채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초상화에 새겨진 이니셜을 보고 내 후견인인 박병찬이 혹시 이 사람일까 생각했지.”

박병찬의 태도나 말투가 못마땅한 종수는 말을 놓아버렸다. 늙지 않는 의체로 살아가는 종수이지만 이 몸으로 15년이나 보낸 것을 생각하면 어차피 박병찬과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을 것이다. 어쨌건 종수의 반말에 박병찬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로켓을 받아 들고 작은 초상화를 들여다보던 박병찬이 짧게 혀를 찼다.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는 곧 몸을 젖혀 등받이에 기대고 물었다.

“왜 날 찾아왔지?”

“일단 내 후견인 자격을 포기해 줬으면 해.”

“왜?”

“그쪽이 그 빌어먹을 후견인 자격을 쥐고서 아무것도 못 하게 만들고 있으니까!”

최종수는 국내 최초로 전투용 의체를 장착한 사람이었으며, 최초로 전신 의체 전환 수술을 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몸에서 인간의 신체 부분은 안구 두 개와 심장, 신경 일부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원래의 신체를 카피해 만든 의체이며, 심지어 뇌까지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인공두뇌다.

그는 15년 전 사이보그 연구 센터에서 처음 깨어났다. 신체를 의체로 교체하기 전까지 분명 인간으로서 살았을 텐데 그에게는 이전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다. 센터의 연구원은 인공두뇌로 데이터를 옮기는 과정에서 에러가 있었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의체 전환 수술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손실에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수술 동의서를 내보였다. 물론 최종수의 서명이 남아있는 동의서다.

과거가 사라진 종수에게 남은 것은 직접 서명하고 영상 증언 기록까지 남긴 특수전술대 자원 서류와 어떤 남자의 초상화가 담긴 로켓 하나가 전부였다. 종수는 다른 자원자들이 사이보그 전환 수술을 마치고 합류해 팀이 구성될 때까지 군 특수 사령부에서 홀로 훈련을 이어가는 한편 공백이 되어버린 자신의 과거를 조사했다.

성명 최종수. 나이 스물셋. 통일한국 육군 특수전사령관 고 최세종 중장의 외아들. 양친과 함께 폭발 테러에 휘말려 혼자 살아남았으나 큰 장애를 얻게 됨. 이후 신설이 준비되고 있는 사이보그 대테러특공대에 자원 요청을 넣고 국내 최초로 전신 의체 전환 수술을 받았음.

알아낼 수 있는 건 그것이 전부였다. 종수의 사정을 물밑으로 전해 들은 한 군 간부가 한때 상사로 모셨던 최세종 중장과 그 부인의 사진을 보내준 적이 있었다. 자신과 닮은 체격을 한 남성, 자신과 닮은 얼굴을 한 여성의 사진을 보아도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전투용 의체 개발이 성공함에 따라 급히 통과된 법률에 따르면, 전투용 사이보그의 경우 안전 보증과 주요 결정 대행을 위해 최소 7년간 인간 후견인이 지정되어야 했다. 최종수의 서류에 남아있는 그의 법정 후견인은 박병찬이라는 인물이었다. 인간이었을 때의 종수를 알고 함께 협의하여 후견인이 되어준 사람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종수를 찾아온 적이 없었다. 심지어 종수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연락처인 다이렉트 메일을 통해 연락을 해도 답하는 일이 없었다.

특수전술대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구성원들은 대부분 테러나 사고로 큰 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이었고, 의체를 통해 새롭게 얻은 자유로운 삶을 만족스러워했다. 그들은 첫 시험자인 종수 때의 에러를 수정하여 과거의 기억을 온전히 가진 사람들이었다. 종수에게는 인간 신체였을 때의 기억이 없지만 그들과 같은 처지라는 사연을 기반으로 어울리고 동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생활이 길어지면서 슬슬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반복되는 끔찍하고 혹독한 전투의 기억에서 생겨나는 스트레스가 뇌를 압박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동료들은 PTSD를 피하고자 2년에 한 번꼴로 브레인 리셋을 했다. 기억 일부를 삭제해 고통스러운 경험이 뇌에 남지 않도록 하는 시술이다. 브레인 리셋 시술은 아직 완전하지 않아 이전 기억까지 일부 손실되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건 특수전술대 대원들의 정신 건강 유지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최종수의 경우는 한 번도 브레인 리셋을 받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 받았다. 브레인 리셋 시술 허가를 부탁하는 요청을 수없이 보냈지만, 후견인인 박병찬이 도통 응답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종수는 대원들 중 누구보다 많은 전투 경험을 가진 뛰어난 대원이 되었지만 그만큼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가 되고 말았다.

인간 후견인이 필요한 의무 기간인 7년이 지나자, 종수는 이 쓸모없는 후견인을 떼어버리기 위해 후견인 취소를 신청했다. 하지만 그 요청에도 박병찬은 응답하지 않았다. 박병찬이 수락하지 않는 이상 취소는 불가능했다. 마지막 방편으로 종수가 선택한 것은 제 후견인 박병찬의 실종신고였다. 실종자로 분류되는 생활이 불편하면 모습을 나타내리라는 생각이었다. 살아있는 게 아니거나 나타날 수 없는 거라면, 5년이 지나면 사망자 선고가 나올 테니 어쨌건 종수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거였다.

그렇게 이를 갈며 기다린 5년이 거의 다 채워졌을 무렵 박병찬이 실종신고 취소를 했다는 연락이 들어왔다. 종수는 그 단서를 토대로 사립 탐정을 고용해 박병찬의 소재를 추적했다. 그리고 그가 그동안 내내 요양과 연구를 위해 해외에서 지냈으며 최근에야 귀국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이 저택을 찾아내어 찾아왔던 거였다.

불성실한 후견인의 태도를 비난하는 종수의 외침에 박병찬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생각에 잠긴 듯 로켓 안에 든 제 젊은 시절의 초상화를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침묵하던 박병찬이 대답했다.

“후견인 자격 포기는 곤란해. 나는 널 책임지기로 약속했어.”

“씨발, 그럼 후견인으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던가! 뭐 대단한 걸 시키는 것도 아니잖아.”

금방이라도 달려들 맹수처럼 으르렁거린 말에도 박병찬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눈동자만 들어 잠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 얼굴에 잠시 드러났던 표정은 왠지 겸연쩍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오랜 세월 동안 무책임한 후견인으로 지내온 것에 대해 조금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는 한 건가 싶었다. 손에 든 로켓으로 시선을 돌린 박병찬이 다시 물었다.

“일단은… 이라고 했지. 날 만나러 온 다른 이유도 있어?”

지극히 침착한 목소리였다. 그에 맞서 소리를 지르는 것이 오히려 바보스러워질 것 같은 정도다. 종수는 몇 번 어깨로 크게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어쨌건 현재 유리한 카드는 저쪽이 쥐고 있다. 종수는 부탁을 하러 온 처지인 것이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의체 전환 수술을 받기 전까지의 기억이 없어. 그쪽은 내가 인간의 몸으로 살았을 때의 일을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아는 만큼 들려주었으면 해.”

박병찬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응접실에 들어서며 종수를 처음 보았을 때 얼굴에 드러났던 불쾌감이 이젠 노골적으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해? 하나도?”

“그래.”

“쓸모없는 결함품 같으니.”

작은 목소리였지만 박병찬이 중얼거린 말은 분명하게 종수의 귀에 와닿았다. 특수전술대에서 최고의 대원으로 칭해지는 최종수에게 터무니없이 모욕적인 말이었다.

종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상대는 일반인이다. 전투용으로 만들어진 종수의 강화 의체로 후려친다면 큰 부상을 입을 것이다. 박병찬은 작은 체구가 아니고 연약해 보이는 사람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즉사할 수도 있다. 진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끈적하고 시커먼 불쾌감이 스멀스멀 발치로부터 기어오르는 감각을 털어버릴 수가 없다.

안락의자 팔걸이 위에서 단단히 쥐어진 주먹을 보았는지 박병찬이 피식 웃었다.

“성질머리 고약한 건 여전하군.”

“뭐?”

박병찬은 고개를 숙이며 앉은 자세를 고쳤다. 그가 조그맣게 중얼거린 소리가 테러리스트 아지트 기습으로 단련된 종수의 예민한 귀에 희미하게 잡혔다. 분명하진 않지만 그건 ‘내가 당하니 짜증 나네’ 라는 말처럼 들렸다.

“최종수.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너희 아버지는 통일 직후 급격히 늘어난 테러 사건에 대응하기 위한 특수부대를 조직하고 운영하셨어.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긴 원한으로 보복 테러를 당하셨지. 네가 마침 귀국해서 휴가를 보내고 있을 때였는데….”

“내가 외국에 있었던 적이 있나?”

“그래. 넌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며 농구를 했어. 꽤 괜찮은 선수로 평가받았지. 그리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 너희 아버지를 노린 테러에 휩쓸렸다. 너희 가족이 당한 보복 테러로 인해 정부는 윤리적 문제 때문에 미루고 있던 사이보그 특수 대테러 조직을 만들기로 결정한 거고.”

이따금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머릿속을 울리던 소리, 일정한 리듬으로 퉁 퉁 울리던 그 소리는 농구공이 튕기는 소리였을까. 그건 농구를 했던 기억의 파편이었을까.

“넌 살아남았지만 척추를 다쳤어. 농구는 고사하고 혼자서는 걸을 수도 없게 되었지. 그런 너에게 너희 아버지가 기획하고 계셨던 사이보그 특수 대테러 조직의 일원이 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어. 전신을 전투용 특수 의체로 교체해 주겠다는 거지. 거기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은 정부가 대는 걸로 하고.”

“흠. 일반 의체를 쓰거나 인공 척추로 교체할 생각은 안 했었나?”

“너는 너희 가족에게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들을 막고 싶어 했으니까. 그리고….”

무겁게 가라앉은 박병찬의 말은 끊어져 이어지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종수가 재촉했다.

“그래서? 뭔데?”

“아니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게 전부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기억 안 나? 아주 작은 것도?”

아무래도 이 박병찬이라는 자는 종수의 과거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민간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특수전술대의 창설 과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아는 눈치다. 기억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꽤 가깝게 지냈던 사람이 아닐까. 하지만 더 말해줄 의사는 없는 것 같다. 그렇다고 억지로 캐물을 정도로 잊혀진 과거에 대해 궁금한 것도 아니다. 이렇게 살아온 세월이 15년이나 된 지금은 딱히 아쉽지도 않다. 자신의 조사가 맞았다는 걸 확인한 것으로 족하다.

과거에 대해 기억나는 것이 있는가. 박병찬의 그 질문에 대해 종수는 잠시 생각했다. 의체로 깨어나기 전의 기억이라면 아주 사소하고 흐릿한 조각들뿐이다. 나무바닥에 볼이 튕기는 소리, 순간 강렬하게 번져왔다가 이내 흐려지던 달콤한 꽃향기, 천천히 볼을 쓸어내리는 손가락의 감촉 따위. 그런 시시한 파편들에 무슨 쓸모가 있을까. 종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기억 안 나.”

박병찬의 미간에 주름이 모였다. 똑바로 응시하는 눈 속에서 감정이 어지럽게 휘돌았다. 원망. 증오. 그렇게 불러도 좋을 듯한 어두운 소용돌이다.

“그런가…. 그럼 이제 돌아가.”

“내 요구를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후견인 자격을 포기해달라고.”

“다시 말하지만 그건 안 돼. 난 너를 책임지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누구와? 혹시 나와 약속한 거라면 내 쪽에서 그 약속 취소하고 싶어. 난 당장 브레인 리셋이 필요해. 내 요청은 물론이고 팀 닥터도 그쪽에게 허가를 부탁하는 메일을 몇 번이나 보냈는데 다 무시했잖아.”

박병찬은 한숨을 쉬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 고여 있는 감정을 퍼내는 듯 깊은 한숨이었다.

“브레인 리셋을 하면 삭제되는 부분 이외에 그 이전의 기억에도 손상이 간다는 건 알고 있어?”

“알아. 하지만 손상될 기억조차 없으니까 상관없어.”

“그래….”

종수의 단호한 말에 박병찬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자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동요하는지 종수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동안 응답하지 않는 후원자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라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박병찬은 종수를 내쫓듯 손을 내저었다.

“앞으로 후견인으로서의 일은 제대로 하겠어. 브레인 리셋 요청도 바로 수락해서 보내지. 그러니 꺼져. 다시는 내 앞에 모습 보이지 마.”

“이봐….”

“꺼지라고, 결함품.”

“박병찬.”

“넌 결함품이고 실패작이야. 네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나는… 우리는….”

박병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슬픔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감정으로 보였다. 이내 박병찬은 손안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더 이상의 진전은 없을 모양이다. 종수는 일단 박병찬이 후견인의 역할을 제대로 하겠다 말한 것에 한 번 더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면 다음 방문 때에는 정말 스트레스로 돌아버려 이 저택을 향해 MP5 기관단총을 난사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종수는 박병찬의 손에 걸려있는 사슬을 낚아채었다. 그리고 로켓을 닫아 주머니에 넣었다. 당황한 표정의 박병찬을 향해 종수는 싸늘하게 대답했다.

“기억은 없지만 이건 내 물건이잖아. 후견인 일 제대로 해. 안 그러면 이걸 사격 연습지에 매달고 갈겨버릴 테니까.”

멍하니 굳어 있는 박병찬을 내버려둔 채 그렇게 종수는 저택을 떠났다.

One Again.

최종수가 나간 이후에도 박병찬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어깨를 움츠린 채 한참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문득 불어 들어오는 바람에 고개를 든 그의 눈이 창가로 향했다.

창 앞에 서 있는 라일락 나무는 시커멓게 말라 죽어 있다. 봄이면 가지가 무거워 보일 정도로 보랏빛 꽃을 가득 피워내었고, 여름에는 무성한 잎으로 창가에 그늘을 만들어주던 나무였는데.

창을 마주한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저택에 머무는 동안 박병찬이 가장 오래 시간을 보내던 자리였다. 그가 책상 앞에 앉아 있으면 최종수는 휠체어를 몰고 창밖으로 다가와 들여다보곤 했었다. 둘이 함께 마지막을 보냈던 봄에도 자주 그랬다. 최종수가 보랏빛 라일락 그늘에서 창문을 두드리면 박병찬이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휠체어에 앉은 만큼 키가 작아진 최종수를 향해 허리를 굽혀 창틀에 매달릴 듯한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짙고 달콤하지만, 다시 맡으려 하면 이내 덧없이 흐려지는 라일락 향기 속에서.

“종수. 너 진짜 그 새로 조직되는 특수 테러팀에 들어갈 생각이야?”

“이미 얘기 끝났잖아.”

“그런 위험한 일 할 필요 없이 일반 의체로 평범하게 살 수도 있어. 아니면 인공 척추로 교체해서….”

“기성품 의체는 인간 신체와 결합성이 나빠서 몇 년에 한 번씩 교체해야 하잖아. 언제 트러블이 일어날지도 모르고. 그리고 인공 척추를 쓰면 일어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예전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없고. 그런 몸은 싫어.”

최종수는 창틀에 얹힌 박병찬의 손에 제 손가락을 밀어 넣어 깍지를 끼었다.

“알잖아, 박병찬. 난 우리 가족이나… 너희 부모님께 일어난 것과 같은 일들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어.”

최종수는 바람이 불 때마다 짙어지고 옅어지기를 반복하는 라일락 향기 속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박병찬은 테러로 부모를 잃은 희생자였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총격 테러였다. 하루 종일 이어진 농구부 훈련 때문에 학교에 있었던 열다섯의 박병찬은 그렇게 혼자가 되었다. 테러 피해 수습을 지휘하던 최세종 장군은 농구공을 끌어안고 절망한 눈으로 서 있던 이 소년을 집으로 데려왔고, 두 살 어린 아들 최종수와 함께 길렀다.

박병찬은 그날이 떠올라 괴롭다며 농구를 그만두었지만, 이따금씩 최종수의 농구 상대를 해주었다. 교외라기보다 숲속에 숨어있는 것에 가까운 최세종 장군의 저택 정원은 두 소년의 농구 대결 때문에 몇 번이고 잔디가 엉망으로 파헤쳐지곤 했었다.

부모를 잃은 외로운 소년과 내향적이고 예민한 성품의 소년이 한집에서 지내는 동안 조금씩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것이 친구나 형제 사이의 감정과 다른 종류의 것이 되리라고는 당사자 둘조차 예상할 수 없었지만.

농구를 그만둔 박병찬은 돌아가신 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기계공학에 관심을 보였고 이내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 무렵 가장 주목받는 분야인 의체 개발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뛰어난 머리와 성실성을 바탕으로 몇 번의 월반을 거친 박병찬은 빠르게 대학 과정을 마치고 의체 개발에 뛰어들었고, 오로지 농구에 매진하던 최종수의 미래에는 미국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와 돌이켜본다면 그 무렵은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던 것 같다. 박병찬은 종종 최종수가 다니는 고등학교를 찾아가 불러내 밥을 사 먹였고, 최종수는 주말이면 외박증을 끊고 박병찬의 집을 찾아가 묵곤 했다.

바닥에 깐 요와 침대로 나뉘어 누운 채 둘은 자주 미래를 이야기했다. 더 많이, 더 즐겁게 이야기하는 것은 늘 최종수였다. 그는 미국에서 농구하는 자신과 미국으로 만나러 오는 박병찬을 이야기했고, 언젠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된 후에 함께 지낼 집에서 기를 동물에 대해 이야기했고, 곧 국회에 발의될 거라는 소문이 있는 동성혼 허가 법안에 관해 이야기했다. 박병찬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늘 행복하게 웃었고, 덕분에 최종수는 두 사람이 함께할 미래에 확고한 믿음을 품고 미국으로 떠날 수 있었다.

최종수가 대학 방학을 맞이해 귀국했던 스물두 살의 여름이었다. 최세종 중장 내외는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함께 외식을 나갔다. 그들에게 가족과 마찬가지인 박병찬은 마침 학회에 가 있어 참석하지 못했었다.

그 식사 자리에서 최종수는 부모님께 박병찬과 자신의 사이에 대해 털어놓았다.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최세종 중장 내외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최세종 중장이 난감한 얼굴로 한마디 했을 뿐이다.

“흐음. 집에 데려와 기른 아이와 그리되었다고 하니, 모양새가 별로 좋지는 않구나.”

즉각 남편의 허벅지를 찰싹 내리친 부인의 매운 손길에 세간의 시선을 걱정하는 최세종 중장의 우려는 그것으로 끊어졌다. 세 가족은 박병찬이 학회에서 돌아온 후에 함께 만나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었다. 그 직후 식당 전체를 날려버린 폭발이 있었다.

박병찬이 손을 뻗어 창문 너머에 있는 최종수의 볼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다정히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매끄럽게 흐르지 못하는 것은 볼에 남은 화상 흉터 때문이다.

“난 종수 네가 안전했으면 좋겠어. 일반 의체나 인공 척추가 싫다면 다른 방법이 생길 때까지 지금처럼 지내면 되잖아. 내가 널 평생 돌봐 줄 테니까 이대로 지내도 좋고. 그러니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최종수가 얼굴을 찌푸리고 박병찬과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 너에게 돌봄 받고 걱정 끼치면서 의지해서 살긴 싫어. 난 내 다리로 네 곁에 서고, 함께 걷고 싶어.”

박병찬은 씁쓸한 미소를 짓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수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그건 잘못된 결정이었다. 박병찬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최종수의 마음이, 최종수가 바라는 것을 이뤄주고 싶은 박병찬의 마음이 협력해 만들어낸 불행이었다. 때로 불행은 선의로부터 태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최종수는 박병찬의 말대로 조금 더 생각해 보았어야 했다. 박병찬은 최종수를 좀 더 설득했어야 했다. 결정이 늦어져 순번이 뒤로 밀렸다면 그 불행은 최소한 두 사람을 빗겨 나가 다른 희생자를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전신을 전투 의체로 교체하는 작업에는 긴 시간이 걸렸다. 정교하게 스캔한 신체 데이터를 카피해 제작된 의체 부품이 하나 둘씩 인간 신체와 교체되고, 신경망이 연결된다. 마지막으로 생체 뇌의 데이터를 전투에도 안전한 인공두뇌로 전송하는 작업까지 꼬박 두 달이 소요되었다.

양아버지나 다름없는 고 최세종 중장이 준비하던 사이보그 대테러부대 구성 기획에도 도움을 주고 있었던 의체 개발자 박병찬은 최종수의 의체 전환 작업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참가했다. 최종수를 안심시키고 작업 진척 상황을 설명하고 의체 부품을 확인하고 수술에 참여하는 것까지 박병찬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그렇게 이루어진 국내 최초의 전신 의체 교환 수술이자 첫 전투용 사이보그 제작 실험은 99% 성공이었다. 오류로 인해 기억 데이터가 전송되지 않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의료팀과 의체팀은 이미 완성한 의체와 최종수의 생체 뇌 사이에 생겨난 오류를 현장에서 수정할 수 없었다. 그저 기억 데이터가 전송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강제 전기 자극을 주어 생체 뇌를 깨워내며 재시도를 했지만 끝내 최종수의 기억은 실리콘으로 만들어진 인공 뇌로 전송되지 않았다. 결국 이대로라면 과부하가 간 생체 뇌의 상태가 인공 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린 의료반이 둘 사이에 연결된 케이블을 끊어버렸다.

그날 박병찬은 사라졌다. 최종수와 함께였다. 정확히는, 거듭된 전기 자극으로 만신창이가 된 최종수의 생체 뇌와 함께였다.

이 무렵 최종수의 기억은 흐릿하기만 하다. 깊고 어두운 물속에 잠긴 듯, 깨어나지 못하는 얕은 잠에 빠진 듯 몽롱한 상태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가끔 번쩍 정신이 맑아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조차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깨어날 때면 박병찬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듣는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건 박병찬이 보내오는 메시지였지만, 들린다기보다 머릿속으로 내용이 직접 전달되는 감각에 가까웠다.

-종수야. 미안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연결 부품에 불량이 섞여 있었대. 단순한 연결 장치라서 면밀히 점검하지 않은 게 잘못이야. 내가 더 꼼꼼히 살폈어야 했는데.

기억하는 박병찬의 음성과 다른 그 소리는 그렇게 말하며 흐느꼈다.

-형이 방법을 찾고 있어. 내가 널 이렇게 잃을 리 없잖냐. 힘들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다시 만났을 때는 기분 풀릴 만큼 형 때려도 괜찮으니까 조금만 참자. 종수야. 조금만. 형 믿지?

소리는 그렇게 짐짓 기운차게 떠들기도 했다.

시간의 흐름도 좀처럼 느낄 수 없는 상태였지만, 정신이 맑아지고 박병찬의 메시지를 듣는 순간이 찾아오는 간격이 점점 길어진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느꼈던 것도 같다.

그러다 어느 순간 최종수는 눈을 떴다. 흐릿했던 시야가 차츰 맑아졌다. 낯선 천장과 낯선 벽을 지나 낯선 환자복을 입은 다리와 힘없이 늘어진 발이 보였다. 좀처럼 기운이 들어가지 않고 무겁기만 한 손을 제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허벅지를 지나 배까지 손을 끌어 올린다. 손에는 따뜻한 피부가 느껴지고, 몸에는 손가락이 스치는 간지러운 촉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거기까지 해냈을 때, 의사며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 몇이 달려 들어왔고 최종수는 다시 잠들어야 했다.

두 번째로 깨어났을 때에는 낯선 남자가 곁에 있었다. 그는 침대를 세워 최종수를 앉게 한 후, 태블릿을 건네었다. 묻고 싶은 표정으로 돌아본 최종수에게 남자는 턱짓으로 태블릿을 가리키기만 했다.

태블릿 화면에 띄워져 있는 것은 박병찬의 얼굴이었다. 최종수는 그 중앙을 가리고 있는 삼각형 재생 아이콘을 눌렀다.

영상 속 박병찬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괜히 옷에서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집어 내기도 하고 머리를 긁적이기도 하며 시간을 끌다 겨우 입을 열었다.

“종수야. 형은… 이 방법을 택하기로 했어. 시간이 너무나 모자라서 이거 말고는 방법을 찾지 못했어. 상용 의체는 너무 위험성이 크고… 아니, 이런 설명은 그만두자. 화내지 말고 들어줘. 형에게… 병이 생겼어.”

박병찬은 제 머리를 검지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말하자면 머릿속에… 배드 섹터가 생기는 병이래. 그게 계속 늘어나는 거지. 네가 맨날 나한테 멍청하다고 그랬는데 이제 정말 멍청해지게 생겼어. 웃기지.”

태블릿을 잡은 최종수의 손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고 생각했지만, 태블릿이 조금 휘청거렸을 뿐이다.

“나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종수 네가 이걸 싫어할 거라는 걸 아는데. 혹시 실패하기라도 하면 내 손으로 널 지워버리게 되는 거라 나도 진짜 무서운데…. 근데 이거 말고는 도저히 방법을 못 찾겠어.”

영상 속 박병찬이 고개를 떨구었다.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다.

“미안해, 종수야. 널 평생 돌봐 주겠다고 그랬는데 그럴 수 없게 되었어. 이렇게 되어버려서 정말 미안해. 이제 네가 또 하나의 너를 돌봐 줘야 해. 그쪽도 내 소중한 종수니까 부탁해. 미안해, 종수야. 정말… 미안해. 미안….”

흐느낌 섞인 미안하다는 말이 끝없이 이어졌다.

최종수는 태블릿을 떨어뜨리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 머리에 닿은 손가락 끝에 느껴지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뻣뻣한 천의 감촉이었다. 방 안을 훑던 시선이 벽에 걸린 거울에 닿았다. 그 안에서 공포에 질린 눈을 하고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은 박병찬이 똑바로 마주보고 있었다.

최종수는 비명을 질렀다. 박병찬의 폐와 박병찬의 성대와 박병찬의 입으로.

숲속에 위치한 아버지의 저택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두 사람은 종종 싸웠고, 특별한 화해도 없이 다시 어울렸다.

두 사람은 지기 싫어 이를 악물고 오렌지색 공을 빼앗고 빼앗기며 겨루었다.

보랏빛 라일락꽃 가지 아래서 두 사람은 손을 잡고 서툴게 미래를 꿈꾸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박병찬의 연구실로 내준 서재에서 박병찬은 책과 서류, 태블릿과 노트북에 파묻혀 있곤 했다. 마당에서 혼자 슛 연습을 하던 종수가 창문을 톡톡 두드려 신호를 보내면 박병찬은 창문을 열고 종수를 맞이했었다. 박병찬이 독립해 나가기 전까지 둘은 창 안과 밖에 각각 서서 손을 잡고 마주보며 함께 웃었었다.

끔찍한 테러가 있은 후 혼자 남은 종수를 돌보기 위해 저택으로 돌아온 박병찬은 여전히 자주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고 최세종 중장이 남긴 전투형 의체 개발을 위한 연구를 하고, 최종수에게 자유로운 몸을 되찾아주기 위한 방법을 찾았다. 종수는 휠체어를 타고 정원을 산책하다 질리면 서재 창문 밖으로 와 창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박병찬은 들여다보던 자료를 바로 내던지고 일어나 창문을 열고 종수의 손을 잡았었다. 그때까지도 아직 둘은 함께 웃을 수 있었다.

최종수는 안락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박병찬의 다리로 서재를 가로질러 걷고, 박병찬의 손으로 창턱을 짚고 박병찬의 몸을 기댄다. 언젠가 이곳에 이렇게 서 있었던 박병찬은 이제 없다. 박병찬의 눈으로 내려다보는 시선은 말라죽은 라일락 가지가 만드는 초라한 그늘을 향한다. 언젠가 그곳에 서서 서재를 들여다보던 최종수는 이제 둘이 되고 말았다. 박병찬을 기억하지 못하는 최종수와, 박병찬으로 살아가야 하는 최종수 두 사람으로.

목 안쪽에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숨이 막혔다. 최종수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지금 이 순간 박병찬이 흐느끼는 소리를 듣고, 박병찬의 눈물을 두 볼에 느끼게 된다면 정말이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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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단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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