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벨트Umwelt
주간창작 챌린지 6월3주차: 가지 않은 길
누군가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귓가에 부르는 소리도 들린다.
“주장! 병찬형! 일어나요. 기상 기상!”
“으응… 알았어….”
잠결에 대답하고 겨우 눈을 뜬 병찬이 처음 떠올린 생각은 자신을 깨우는 목소리가 생경하다는 것이었다. 벽 쪽으로 돌아누운 몸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하니 낯선 얼굴이었다. 병찬이 잠에서 깬 것을 확인하고 멀어지는 행동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다시 생각해 봐도 역시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 어디선가 얼핏 본 기억이 있는 듯도 한데. 하지만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병찬에게 등을 돌리고 선 남자는 태연하게 티셔츠를 벗으며 말했다.
“형, 늦잠 잘 안 자면서 오늘은 영 못 깨네요. 이러다 늦어요. 얼른 일어나요.”
아니, 그보다 너 누구냐고. 병찬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상하게 천장이 낮고 시야가 좁다 했더니 병찬이 누워 있던 곳은 이층 침대의 아래 칸이었다. 머리가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하며 주위를 둘러보니 낯선 공간이었다. 철제 프레임의 이층 침대가 하나, 옷장이 둘, 그리고 작은 책상 두 개로 꽉 채워진 좁은 방이다.
새 티셔츠로 갈아입은 낯선 남자가 옷장을 열고 저지를 꺼내 걸쳤다. 검은 저지의 등에는 오렌지색 자수로 장도 고등학교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옷을 본 순간 떠올랐다. 아. 이 녀석 장도고랑 시합했을 때 본 적 있는 애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장도고와 붙었던 예선전에서 교체 멤버로 들어온 애였지. 중학생 때 부상으로 유급을 한 병찬보다 한살이 어리지만 같은 고1인 장도고 학생 선수였다. 반응속도나 눈은 제법 좋은데 아직 몸을 제대로 쓸 줄 몰라 애를 먹는 것 같아 보였었다. 이름은 여전히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들어본 적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건 벌써 5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그 대회가 끝난 후 오른쪽 무릎에 이상이 발견되어 병찬은 한 번 더 유급을 해야 했고, 그 후로 꽤 파란만장한 일을 거쳤었다. 다행히 지금은 다시 받은 재활 치료로 무릎도 안정되었고 준향대에서 확고한 주전 가드로 뛰고 있긴 하다. 그런데 얘는 왜 아직도 장도고 저지를 입고 있지? 그리고 왜 나와 같은 방에 있지? 여기는 대체 어디지? 병찬의 몽롱한 머리 안에서는 의문만 샘물처럼 퐁퐁 솟아나고 있었다.
“아, 병찬형. 왜 그러고 있어요? 진짜 러닝 시간 늦는다니까요.”
옷을 다 입은 남자가 병찬을 돌아보며 볼멘소리를 내었다. 이젠 침대에 앉은 병찬의 팔을 잡아 끌어낸다. 그리고 옷장을 열어 장도고 저지를 꺼내 걸쳐주기까지 했다.
등을 떠밀리는 대로 좁은 방을 나서고 보니 새로운 낯선 공간이 나타났다. 복도 한 면을 채운 창문 밖으로는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이 남은 새벽 풍경이 보이고, 반대쪽으로는 똑같이 생긴 문이 일정 간격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턱이 빠질 정도로 하품하며 문을 나오는 녀석이며 이른 시간부터 기운 좋게 떠드는 녀석 몇이 있어 복도가 소란했다. 모두가 병찬과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고개를 숙이거나 눈인사를 해왔다.
처음 보는 곳이지만 어떤 용도의 장소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이 구조는 기숙사다. 몇 년 전 리모델링을 한 준향대 농구부 기숙사에 비해 많이 낡아 보였지만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하나둘씩 나와 복도를 채운 녀석들 모두가 검은 장도고 저지를 입거나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럼 여기는 장도고 기숙사인가?
그쯤에서야 병찬은 상황을 대충 납득할 수 있었다. 이건 꿈이구나. 아주 생생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은 꿈일 수밖에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 복도 저 편의 나무문이 부서질 듯 요란하게 열렸다. 그와 동시에 누군가가 복도로 뛰쳐나왔다. 그건 아는 얼굴이었다. 최종수다. 하긴 저 녀석 장도고 출신이었지. 저 녀석은 지금 미국에서 대학 다니며 NCAA 디비전1 선수로 뛰고 있을 텐데, 꿈이니까 이렇게 나오는구나. 그러고 보니 이따금 스포츠 뉴스에서 보던 최종수의 모습보다 훨씬 앳된 얼굴을 하고 있다. 정확히는 병찬이 처음 최종수를 만났던 고3 시절보다 더 어리게만 보였다. 키도 체격도 아직 작고, 젖살이 남은 두 뺨은 보드라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복도의 사람들을 급히 훑은 최종수가 병찬을 찾아내더니 똑바로 응시했다. 겁먹은 건지 놀란 건지 바짝 긴장해 있던 얼굴이 천천히 풀어져 갔다. 최종수가 안심한 듯 어깨로 큰 숨을 내쉬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했다.
등 뒤에서 누군가 병찬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박 주장. 왜 멍하니 서 있어? 머리 다친 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 괜찮냐?”
2미터도 넘어 보이는 커다란 녀석이 잠이 덜 깬 얼굴로 병찬에게 친근하게 매달려왔다. 이 사람도 아는 얼굴이었다. 대학 리그에서 몇 번 상대 팀으로 만난 적 있는 두 학번 위의 빅맨이다. 그리고 5년 전, 병찬이 고교 1학년으로 뛰었던 조형고 농구부 첫 출전 대회에서 만난 장도고 선수였기도 했다.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빅맨이 병찬의 어깨에 매달린 채 졸듯이 눈을 감고 웅얼거리며 말을 이었다.
“종수도 의욕이 넘쳐서 그런 거니까 구박하진 마라. 뭐 네가 그럴 놈은 아니긴 하지만.”
“…머리라니? 나 무슨 일… 있었어?”
병찬이 호기심에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지자, 어깨에 기대어 있던 빅맨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응? 너 기억 안 나? 검사에서 아무 이상 없다고 그랬다며. 박병찬. 너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지?”
복도를 이동하는 무리에 휩쓸려 걸어 나가며 병찬은 걱정 가득한 빅맨의 설명을 들었다.
어제 연습경기 중에 병찬은 1학년 최종수의 공격을 막다 충돌해 함께 쓰러졌다고 했다. 넘어지며 바닥에 머리를 부딪친 병찬은 그대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보내졌었다. 야간 훈련 시간이 되어서야 돌아온 병찬은 병원 검사에서 아무 이상 없더라며 웃었다고 했다. 그래서 농구부 모두가 안심하고 있었다는데….
빅맨이 병찬을 붙잡아 세우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여드름이 몇 개 돋아난 얼굴이 근심으로 굳어 있었다.
“야, 주장. 너 진짜 아무것도 기억 안 나? 너 괜찮은 거 맞냐? 어제 코치님이 뭐랬더라? 구토하거나 두통이 있거나 말 어눌해지면 병원 다시 가야 한다고 했던가? 머리 아프거나 토할 거 같은 건 아니지? 야, 박병찬. 말 좀 해 봐.”
그 호들갑에 검은 저지 무리가 발을 멈추고 병찬을 돌아보았다. 주위를 둘러싼 아이들은 모두 걱정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병찬은 짧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여태 보고 들은 것들을 통해 추측해 보자면 아무래도 이 꿈속 설정에서 박병찬은 장도고 농구부의 주장인 모양이었다. 그것도 유급 경험 없는 19살의 고3이다. 게다가 농구부원 모두에게 상당히 사랑받는 사람인 듯하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이건 좀 민망했다.
병찬은 중학교 2학년 때 장도고에서 연락을 받은 적이 있었다. 중학교 졸업 후에 장도고 진학을 생각해달라는 이른 오퍼였다. 하지만 그해에 무릎 부상이 터져버렸고, 고교 최강 장도고에의 특기자 입학은 없던 일이 되었다.
부상을 당하지 않았고, 농구를 그만두겠다는 각서에 서명하지도 않았으며, 전학도 유급도 가지 않고 장도고에 입학한 자신을 생각해 본 적이 솔직히 있긴 했다. 조형고에 입학하고 농구를 다시 시작하게 되기 전까지는 가끔 그랬었다. 하지만 이게 이제서야 꿈으로 나타나니 새삼 낯부끄러운 욕망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농구로 대학에 들어가 학생 선수로 뛰고 있는 지금에 와서는 아쉬울 것조차 없어 잊어버린 소망인데.
여전히 어깨에 매달린 빅맨의 팔에 한층 더 힘이 들어갔다. 주장이고 동갑내기 팀 동료인 박병찬을 몹시 걱정하고 있는 거다. 병찬은 웃으면서 그의 팔을 두드렸다.
“진짜 괜찮아. 머리 부딪친 탓에 기억은 좀 오락가락하는지 몰라도 아프지도 않고 토할 것 같지도 않다. 나 말 하는 거 어눌하진 않지?”
“어…. 응.”
우려 섞인 얼굴로 바라보고 있던 장도고 농구부원들이 안심한 듯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막 걸음을 떼어놓던 병찬은 저 앞에서 아직 돌아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챘다. 앳된 얼굴의 최종수와 눈이 마주치자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구나. 저건 유튜브에 올라왔던 인터뷰에서 보았던 얼굴이다. 중등부 최강자로 한번, 고교에 입학한 후에 다시 한번, 최종수는 농구 웹진의 영상 인터뷰를 촬영했었다. 그 영상에서 보았던 어린 얼굴이 기억에 남아 꿈으로 되살아난 모양이다.
병찬을 가만히 바라보던 최종수가 빙긋 웃었다. 웃고 있는데도 묘하게 울먹이는 것만 같은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랑 충돌해서 다쳤다는 설정이던가. 그럼 누구보다 내 상태를 많이 걱정하고 있겠네. 꿈속의 인물에게 이렇게 신경 써줄 필요 있나 생각하면서도, 병찬은 최종수를 향해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꿈이어야 하는데 깨어나지지 않는다.
한동안 조심하는 것이 좋다는 코치의 말에 하루의 훈련을 내내 참관으로만 보낸 뒤 기숙사로 돌아와 자고 일어났는데도 여전히 박병찬은 장도고 주장이었다. 같은 농구부 선수들의 얼굴과 이름도 모르고, 필요한 물품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교실과 매점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라 헤매는 한심한 주장이다.
농구부원들이나 코치, 감독은 병찬이 머리를 부딪쳤던 일 때문에 기억력에 일시적으로 문제가 생긴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본 코치는 한동안 기억이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며칠 안에 괜찮아질 거라는 의사의 말을 전해주며 위로해 주기까지 했다. 그렇게 모두가 염려하는 가운데 이건 꿈이라거나, 나는 장도고 주장 박병찬이 아니라 준향대 2학년 박병찬이라며 소동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래봤자 다들 병찬의 머리가 멀쩡한지 한층 더 걱정할 뿐일 것이다.
병찬은 보는 눈이 없는 곳에서 힘껏 볼을 꼬집어 보기도 했다. 팔뚝도 깨물어봤다. 하지만 그냥 아프기만 할 뿐이었다. 이 이상한 꿈에서 깨어날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 보내는 두 번째 저녁, 병찬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요 녀석, 이제야 전화를 했어? 몸은 어때? 다시 병원 안 가봐도 괜찮겠어?
“어, 엄마…. 괜찮은 거 같아.”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네가 병원에 올 필요 없다고 펄펄 뛰어서 다시 전화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연락을 하니. 너희 코치님이 검사 결과 사진 찍어 보내주시고 감독님이 전화도 주시긴 했지만 그래도 네가 직접 괜찮다고 해야 안심하지.
엄마의 말은 걱정을 지나 차츰 잔소리로 흘러갔다. 병찬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엄마는 기숙사에 뭐 필요한 건 없느냐 거나, 반찬 만들어둘 테니 주말에 와서 가져가라는 태평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천 본가에 있는 엄마에게도 박병찬은 장도고 농구부 주장인 아들인 게 분명해 보였다.
엄마와 통화를 마친 병찬은 준향대 농구부에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선수의 전화번호를 생각했다. 단축번호나 통화목록을 이용해 전화를 걸거나 카톡으로 얘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지라 번호를 기억해 내는 데에는 한참이 걸렸다. 겨우 떠올린 번호로 건 전화를 받은 건 어느 여성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 번호를 쓰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틀 전까지 준향대 학생이었던 자신이 쓰던 폰에 전화를 걸어보았다. 사용되지 않는 번호라는 기계적인 메시지만 들을 수 있었다. 마치 대학에서의 생활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준향대에 입학할 수 있게 해준 조형 고등학교에서의 생활도, 외롭고 힘들었던 두 번의 유급 기간도 모두 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주말이 되자 병찬은 외박증을 끊고 인천 집에 다녀오겠다며 기숙사를 나섰다. 병찬이 지하철을 타고 향한 곳은 준향대였다. 불과 며칠 전까지 매일 드나들던 준향대 체육관을 찾아가 들여다보았다. 대학 U리그가 진행 중인 5월이라 주말에도 선수들이 나와 훈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 안에 병찬이 기억하는 동기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참을 기웃거린 끝에 병찬은 겨우 아는 얼굴 하나를 찾을 수 있었다. 병찬이 준향대에 입학하기 한 해 전에 대학을 마치고 프로에 진출한 사람이 있었다. 감독님이나 후배들과 사이가 좋아, 몇 번 준향대에 찾아와 간식을 사준 적 있어 얼굴을 기억하는 OB 선수였다. 그 선배는 지금 준향대 신입생으로 선배 선수들의 심부름을 하며 잔소리를 듣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젠 더 이상 이 상황이 긴 꿈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박병찬은 4년을 거슬러 와버린 거다. 재활을 하며 조형고에서 두 번째 1학년을 보내고 있던 19살이 아니라, 부상과 유급 경력이 없는 19살의 장도고 주장으로.
장도고에서의 생활은 편했다.
사라져 버린 4년 사이에 다녔던 조형고는 출결과 학칙에 까다로워서 교복을 갖춰 입고 오전 수업을 모두 들어야 했었다. 하지만 장도고의 교사들은 농구로 전국 제일의 실력을 자랑하는 농구부원들에게 너그러웠다. 농구부 저지나 면티에 트레이닝 팬츠 차림으로 수업에 들어가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수업을 듣다 졸리기라도 하면 슬쩍 선생님께 체육관 가봐도 될까요 하고 묻는다. 그러면 언제든 교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장도고 농구부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이자 주장이기까지 한 병찬은 열심히 하라는 격려까지 받으며 교실을 나오기 일쑤였다.
이곳에서의 박병찬은 부상 경력이 없고 공백기도 없는 선수였다. 스스로 느끼기에도 동 세대에서 단연 독보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다. 부상이 없고 공백이 없었다면 이 정도까지 하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이제 내디딜 때마다 조심할 필요 없는 19살의 무릎은 놀랄 만큼 가벼웠고 유연했다. 병찬은 누구보다 빠르게 코트를 달릴 수 있었고 바람처럼 날아오를 수 있었다.
장도고의 박병찬은 동기와 후배들 모두와 두루 원만하게 지내는 주장이었다. 개중에 은근히 질투하는 놈이나 몰래 뒷담을 하는 놈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드러내 놓고 시비를 걸어오는 게 아니라면 굳이 신경 쓸 필요조차 없는 문제였다. 물론 누군가가 직접 덤벼온다 해도 병찬은 그 어떤 녀석에게도 밀리지 않고 상대해 줄 자신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병찬은 감독과 코치에게 두터운 신뢰도 받는 몸이었다. 모두에게 기대와 존중을 받는 이상적인 삶. 그것이 지금 박병찬의 인생이었다.
그런 호의적인 시선들에 힘입어 병찬은 어떻게든 제게 주어진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다른 길은 보이지 않았다. 다 팽개치고 도망칠 수는 없으니 경험해 본 적 없는 장도고 주장 박병찬의 삶을 살아가야만 했다.
병찬은 눈치껏 농구부원들의 이름과 얼굴, 포지션을 외웠고, 짬이 날 때마다 학교 안을 돌아다니며 구조를 외웠다. 대회에 출전할 때를 제외하면 농구부원의 생활이 학교 안, 그것도 체육관과 기숙사로 한정된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잘 모르는 것이 생기거나 실수를 하면 다들 머리를 부딪친 사고 후유증이라고 여겨주는 것 역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삶에 떨어진 병찬에게 유독 많은 도움을 주는 것은 최종수였다. 병찬이 알고 있는 최종수와 달리, 장도고의 선후배로 만난 어린 종수는 의외로 싹싹했고 눈치가 빨랐다. 병찬이 장도고 주장으로서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을 몰라 헤매고 있으면 어느새 나타나 전에 이렇게 얘기하셨는데요 하며 일러주기도 하고,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 감독이나 코치가 부른다며 끌고 나가주기도 했다. 밀어 넘어뜨려 머리를 부딪치게 한 책임을 느끼고 있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병찬은 이 두 살 어린 꼬맹이의 도움이 무척 달가웠다. 언제나 조심스럽게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이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잽싸게 나타나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쓸어 헝클어뜨리면 하지 말라며 비명을 지르는 것도 꽤나 귀여웠다.
이전 삶에서 알았던 최종수는 얼음처럼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는 녀석이었다. 고교 3학년 시절 쌍용기 대회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도, 이후 대회에서 두어 번 정도 만났을 때도 그랬다. 트래시 토크와 함께 비친 딱 한 번의 비웃음 외에는 웃는 꼴을 보인 적조차 없었다. 최종수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송별회를 하자며 동기 학생 선수들이 모였을 때도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앉아 있다 먼저 일어나버렸었다.
그 최종수와 지금 장도고에서 만나는 최종수는 무척이나 다른 느낌이었다. 이쪽의 어린 최종수는 오래전 병찬이 상상해 보았던 최종수에 훨씬 가까웠다. 그러니까 두 번째 부상으로 유급하고 재활하던 기간 동안 유튜브를 통해 두 살 어린 천재 농구 선수 최종수를 보며 상상하던 모습이다.
장도고 후배 종수는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예민한 녀석이었지만 제 선 안으로 들인 사람들에게는 제법 무르게 굴곤 했다. 같은 중학교 동기인 규나 한 학년 위의 장도중 출신 선배가 그 대상이었다. 그런 종수가 보이는 차별적 호의를 가장 많이 받는 것은 병찬이었다. 종수는 병찬과 눈이 마주치면 어린 얼굴을 화사하게 물들이며 웃곤 했고 나이에 걸맞게 풍부한 표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젖살이 남은 볼을 부풀리며 시무룩해지기도 하고, 짙고 곧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화를 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 크게 뜨며 놀라기도 하고. 유튜브 인터뷰 영상에서 보았던 긴장으로 살짝 굳은 얼굴이 그가 가진 표정 전부는 아니었던 거다.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이 새로운 삶은 병찬에게 있어 여러모로 신기하고 즐거웠지만, 개중 제일 흐뭇한 건 열심히 뒤를 따라다니는 어린 최종수일지도 몰랐다.
6월의 대회를 앞두고 감독이 병찬을 호출했다. 이전에 얘기 나눴던 대로,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얼리 드래프트로 곧장 프로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분명한지 확인하고 싶다는 거였다. 병찬에게 이전의 대화에 대한 기억 따위는 없다. 그래서 좀 놀라고 말았다. 이 세상에서의 나에게는 고교생에서 곧장 프로 선수가 되는 길도 있는 거구나. 부상도 공백도 없는 박병찬에게는 고졸 얼리 드래프트를 신청해도 좋을 만큼의 실력과 실적이 있구나. 생각도 못 한 가능성에 심장이 몹시 두근거렸다.
병찬은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 대답했다.
“저…, 감독님. 그거 조금 더 생각하고 대답해도 괜찮을까요?”
“그래? 그럼 좀 더 생각해 봐라. 네가 대학에 가주는 쪽이 학교에는 더 실적이 되긴 하겠지만, 결정은 병찬이 네가 하는 거니까. 올가을의 드래프트를 택한다면 준비 기간이 빠듯하니까 여름 방학 전까지는 결정해야 한다.”
그 대화를 끝으로 병찬은 감독 사무실을 나와 체육관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갈 수 있는 새로운 미래를 확인하게 된 것은 기뻤다. 그리고 그 기쁨의 크기만큼 심란했다.
이 생활을 만끽하면서도 병찬의 마음에는 늘 꺼림칙함이 조금 남아 있었다. 지나치게 평탄한 것이 문제다. 박병찬이 살아왔고 기억하는 생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행운과 불운이 번갈아 밀어닥쳐 요동치던 삶에 익숙해진 탓인지, 이렇게 순조로운 인생이 진짜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역시 이건 꿈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만약 무슨 사고라도 당해 머리를 다쳐 의식불명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긴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어쩌지. 이 생활은 박병찬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꿈인가 생각하면, 이 순풍만범의 삶이 너무 편안하고 행복해서 그만큼 부끄러워지고 마는 것이다.
야간 훈련이 끝나고도 병찬은 체육관에 남았다. 코트 건너편에서는 최종수와 이규가 중학생 때부터 매일 해 왔다는 일대일 개인 연습을 시작하고 있었다. 병찬은 볼 캐리어를 끌고 와 슛 연습을 시작했다. 곧 있을 6월 대회까지 자유투 정확도를 조금 더 올려둘 생각이었다.
볼에 집중해 머리를 비우려 했지만, 어지러운 생각들은 좀처럼 떠나주지 않았다. 부연중 때 입은 부상이 없었다면 병찬은 장도고에 진학했을 것이다. 이후로도 부상이 없었으면, 수술과 유급으로 인한 공백이 없었다면, 병찬은 고교 최고의 선수가 될 자신이 있었다. 두 번의 부상 경력을 가지고, 대회 중에 코트에 쓰러지기까지 했으면서도 병찬은 내내 자신보다 잘하는 고교 선수는 국내에 없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러니까 이건 박병찬이 가보지 못한 길이다. 부상만 없었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다. 그런데 이게 그 가능성에 기대어 뇌가 멋대로 만들어낸, 스스로도 창피할 정도로 자기애에 충실한 꿈이라면 어쩌냔 말이지. 인생에 어떤 그림자도 없고 난관도 없다. 부상도 없고 최고의 실력을 갖춘 선수, 모두에게 사랑받고 기대받는 사람이라니 너무 뻔뻔하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손끝에서 볼이 미끄러졌다. 날아간 볼은 림에도 닿지 못한 에어볼이 되고 말았다. 이게 병찬의 무의식이 바라온 꿈이라 해도 누가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럽다. 아아. 나름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준향대 농구부 첫 회식 때 주장 가슴에 거하게 토한 거 빼고. 중학교 때 병원에서 몰래 울다가 간호사 누나에게 들킨 거 빼고. 어… 초등학교 1학년 때 태권도장 간다고 엄마에게 거짓말하고 저금통 깨서 피시방 갔던 일도 빼고.
“주장.”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병찬은 연습복 자락을 들어 땀을 닦는 척 아직 열기가 남은 얼굴을 문질렀다. 종수가 등 뒤로 다가와 있었다.
“주장. 슛 연습 더 하실 거예요?”
“어어, 서른 개쯤 남았어.”
무심코 솔직하게 대답하고 보니 너무 많이 남았다. 잡생각에 빠져 있으니 슛 성공률이 좋을 리가 없다. 병찬은 한숨을 쉬었다.
종수와 규의 일대일 연습은 끝난 모양이었다. 종수가 저만치 서서 땀을 닦고 있는 규를 향해 먼저 들어가라며 손짓을 했다. 그리고는 체육관 벽가에 줄지어 세워진 볼 캐리어 하나를 끌어내었다. 지켜보고 있던 병찬이 물었다.
“시간 많이 늦었는데 더 연습하게?”
“저도 서른 개만 하려고요.”
“제때 잠 안 자면 키 안 큰다. 계속 꼬맹이로 남고 싶어?”
고교 1학년에 180을 훌쩍 넘겨버린 녀석을 꼬맹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농구 선수들의 사소한 즐거움이다. 볼 캐리어를 끌어당기던 종수가 돌아보며 픽 웃었다.
“저는 클 거예요. 아빠만큼 자라진 못하겠지만, 주장 키 정도는 가볍게 넘길 걸요.”
“뭐래냐, 이 건방진 녀석.”
웃는 병찬과 종수의 시선이 마주쳤다. 푸른 빛이 감도는 색 옅은 눈동자가 병찬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 눈이 즐겁게 웃고 있었다. 병찬이 이전에 만났던 열아홉과 스무 살의 최종수에게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다정함이 깃든 눈빛이었다. 새삼 이곳은 병찬이 한 번 살아보았던, 그리고 이제는 사라져 버린 세상과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묘한 기분이 되었다.
코트 양쪽에서 두 사람은 각자 골대 하나씩을 차지하고 자유투 연습을 시작했다. 병찬의 등 뒤에서는 괜찮은 비율로 볼이 림을 통과하는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병찬의 슛 성공률은 평소보다 유독 낮은 상태였다. 바늘처럼 날카로워진 신경에 종수가 한 말이 걸려있었다. 병찬이 이전에 알았던 미국에 간 최종수는 확실히 2미터가 넘는 그의 아버지만큼 자라지 못했다. 하지만 병찬의 신장은 가볍게 뛰어넘었었다. 아직 한참 더 자랄 나이인 고1의 종수가 제 아버지의 신장을 따라잡을 꿈을 꾸지 않고 있다. 그리고 병찬이 알고 있는 그 결과를 예언하는 듯한 말을 했다. 그게 어쩐지 찜찜했다.
5연속으로 림을 맞고 볼이 튕겨 나가자 병찬은 한숨을 쉬었다.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여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습관처럼 오른쪽 무릎을 더듬는 손가락 끝에는 수술 흉터가 만져지지 않았다. 손가락이 매끈해진 무릎 아래를 스칠 때마다 익숙한 것이 사라진 감각이 낯설어서 놀라고 만다.
코트 저편에서 종수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주장, 오늘 컨디션 안 좋은가 봐요.”
“컨디션 따위에 자유투 성공률이 오락가락하면 어떡하냐.”
문제는 컨디션이 아니라 연기처럼 머리를 꽉 채운 잡생각이다. 답답한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는 심정으로 병찬이 목소리를 높였다.
“종수야. 만약에 말이야.”
등 뒤에서 볼이 백보드에 맞고 튕겨 나오는 소리가 울렸다. 슛 정확도가 높아 골이 되지 않아도 대부분 림까지는 맞추는 편인 종수에게 드문 일이다.
“예, 주장.”
“만약에 지금 내 인생이 전부 꿈이라면 어떨 거 같아? 사실 나는 장도고 주장이 아니고, 이만큼 주목받는 선수도 아닌 거야. 심지어 장도고에 입학한 적도 없는 거고. 이 생활은 전부 꿈인 거지. 그런 생각 같은 거 해본 적 없어? 실은 내가 가지 못한 길을, 이상적인 인생으로 만들어 내어 꿈꾸고 있는 것뿐이라면.”
대답 대신 들려온 건 코트의 하드우드 바닥 위로 끽 끽 내딛는 농구화 발소리였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종수가 걸어오고 있었다. 병찬은 슛을 던지기 위해 볼을 들어 올린 팔을 내리고 돌아보았다. 코트 저편 골대 앞에 있던 종수가 등 뒤에 와 있었다.
“주장….”
후배의 얼굴은 조금 창백했다. 병찬은 놀라서 볼을 떨구고 말았다.
“야, 종수.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손가락이라도 다쳤어?”
종수의 손이 병찬의 팔을 붙잡았다.
“주장은 지금 생활이 싫은 거예요?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요? 뭐 불편한 게 있어요? 이게 박병찬… 주장의 인생인데. 가지 못한 길이니… 왜 그런 말을 해요? 이쪽이 주장의 진짜 인생이에요!”
팔을 잡은 종수의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전력으로 팔을 움켜잡고 있다. 똑바로 응시하는 색 옅은 눈동자 안에서 어두운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병찬은 격한 후배의 반응에 놀라 굳어 있다가 이윽고 빈손으로 천천히 종수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니, 그냥… 그런 생각이 떠오른 것뿐이야. 너 닐 게이먼 책 좀 읽어봤어? 그 작가 책 중에….”
“그런 이야기 다시 하지 마세요.”
딱 자르듯이 종수가 내뱉었다. 하얗게 바랬던 얼굴에 조금 혈색이 돌아왔다. 안심을 한 건지 화가 난 건지 모르겠다. 애초에 이 후배가 왜 이리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건지 이유조차 모르겠지만.
병찬은 어깨를 으쓱하고 아직도 팔을 움켜잡고 있는 종수의 손을 가리켰다.
“알겠어. 그럼 이제 이 손 좀 놔 줄래?”
종수는 그제야 제 행동을 깨달은 듯 깜짝 놀라 잡고 있던 손을 떼었다. 병찬의 팔에는 커다란 손 모양대로 붉은 자국이 남았다. 병찬은 질린 얼굴로 팔에 남은 자국을 바라보다 그대로 손을 들어 종수의 머리카락을 쓸어 헝클어 놓았다.
“아 씨, 하지 마요. 주장!”
“너 이 자식. 아까 은근슬쩍 선배 이름을 막 불렀지? 벌이다, 인마.”
손바닥에 느껴지는 곱슬머리는 몹시 부드러웠고, 종수는 질색하면서도 소리 내어 웃었다. 잠시 굳어졌던 공기는 금세 느슨하게 풀어졌다.
그래. 이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이 박병찬의 진짜 인생. 그럴지도 모른다. 4년간 쌓아온 인연이나 추억을 생각하면 안타깝다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어쩌면, 그쪽의 4년간이 머리를 부딪친 충격으로 만들어진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
병찬은 장도고 농구부원이자 주장의 역할에 빠르게 적응해 나갔다. 연습 시합에서의 사고 후 두어 주가 지나자, 아무도 박병찬의 머리에 대해 걱정하지 않게 되었다. 큰 문제 없이 회복했다고 다들 믿고 있었다.
그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건 최종수뿐이다. 종수는 할 수 있는 한 계속 병찬의 곁을 지켰고, 이따금 병찬이 헤맬 때마다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 병찬이 이전의 유능한 주장 박병찬과 달리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걸 짐작하게 된 듯했다.
종수는 6월 대회에 출전해서도 주장 역할을 한 번도 맡아본 기억이 없는 병찬을 따라다니며 필요한 일들을 일러주었다.
병찬도 선수로서 보아온 것이 있으니 주장이 해야 할 일에 관해 대충은 알고 있다. 지난 대회 우승팀 주장으로서 선수 대표 선서를 하는 것이나 경기 중 팀원을 대신해 심판에게 항의나 요청을 하는 법은 안다. 하지만 대회 기간 동안 묵게 되는 숙소에서 챙겨야 할 사소한 일들이나, 대회장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를 어디로 가져가야 하는지, 농구부원들을 대기시킬 장소나 어디에서 몸을 풀게 해야 하는지 따위는 잘 모른다. 그렇다고 이미 몇 번이나 대회에서 주장 역할을 잘 해냈을 터인 박병찬이 새삼 다시 물어보고 다니는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종수는 그럴 때마다 능숙하게 귀띔해 주고, 병찬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주장의 소소한 업무도 알려주곤 했다.
“종수 넌 어떻게 그리 잘 아냐?”
“해봤으니까요.”
“언제? 아, 중학교 때인가. 그때도 넌 주장이었지?”
잠시 멈칫하던 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장도… 중학교 때도 주장 했었잖아요.”
그럴지도 모른다. 부상으로 부연중을 떠나게 되지 않았다면 3학년 때는 분명 주장을 맡았을 것이다. 아마 이쪽 인생에서의 박병찬은 그랬겠지. 하지만 이 세상에서 지금 살아가는 박병찬에게는 그 경험에 관한 기억이 없다. 병찬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최종수. 넌 내가 아직 기억 좀 오락가락하는 거 알지?”
“…예.”
“사람들 걱정하게 하는 게 싫어. 그러니 그건 계속 비밀로 해 줘.”
“알겠어요.”
“그리고… 여러 가지로 고맙다.”
조금 쑥스러워하며 병찬이 손을 뻗었다. 자주 그렇듯 종수의 머리카락을 쓸어 헝클어트린다. 종수도 늘 그렇듯 하지 말라며 투덜거렸다. 질색하면서도 종수는 병찬의 손을 피하거나 뿌리치는 법이 없었다.
종수의 도움을 받으며 참가한 6월 대회는 순조롭게 우승으로 마무리되었다. 결승에서 만난 원중고와의 시합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손쉬운 상대들이었다. 몬스터 가드 박병찬에 중등부 최강자 최종수가 더해진 장도고를 쓰러뜨릴 고등학교 농구부는 없을 거라는 칭찬도 들었다. 심지어 어지간한 대학팀이 와도 지금 장도고 농구부에는 크게 고전할 거라는 호평까지 나왔다.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탄 병찬은 기분이 좋았다. 매일 이어가는 힘든 훈련도 식단이며 웨이트도 결국 모두 대회에 참가하고 경기를 뛰기 위한 준비다. 그리고 그 대회에서 승리를 쌓아 올려 우승한다는 건 몹시 기분 좋은 일이었다. 기억에 문제가 있는 박병찬이 중학교 2학년 이후로 겪어 본 적 없는 우승의 경험은 몹시 달콤한 것이었다.
창가 쪽 자리에 앉은 병찬은 돌아가는 길 내내 잘 생각으로 공기주입식 목베개를 꺼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때 종수가 빈 옆자리에 와서 앉았다. 평소 같으면 다른 1학년과 함께 앉아서 갈 텐데 이번 대회 내내 코트 안에서나 밖에서나 함께 손발을 맞춘 병찬과 함께 앉고 싶었나 보다.
버스가 출발하자 병찬은 바람을 채운 목베개를 목에 끼우고 좌석에 몸을 기대었다. 막 눈을 감으려는데 종수가 작은 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주장. 얼리 드래프트로 프로 갈 거예요?”
“그건 어디서 들었어? 아직 잘 모르겠다. 생각 중이야.”
병찬도 다른 팀원들의 수면과 휴식에 방해가 되지 않게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문득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었다.
“종수 넌 미국 갈 거라며?”
그런 이야기를 장도고 후배에게서 들었었다. 아닌가? 유튜브에 올라온 무슨 인터뷰 영상에서 보았던가? 병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억이 뒤섞인 모양이었다. 장도중 출신의 2학년 포워드에게 들은 것이 분명하다. 종수가 미국에 가고 싶어 한다는 건 장도중 출신이라면 다 안다고 그랬었지.
종수는 고개를 수그린 채 한층 작은 소리로 답했다.
“안 갈지도 몰라요.”
“왜 약한 소리를 해? 너라면 할 수 있어. 아직은 나보다 못하지만 넌 미국에서도 잘할 거야.”
고개 숙이고 있던 종수가 머리를 들고 돌아보았다. 작은 입술을 바짝 깨물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울음을 참는 것 같기도 하다.
“왜… 같은 소리를 해요….”
“어? 나 예전에도 그런 말 한 적 있어? 야야, 미안. 나 기억 불안정한 거 넌 알잖아.”
종수의 눈은 병찬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색이 옅어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이 절실하게 응시해 왔다. 무거운 감정이 끝 모를 심연을 가득 채우고 있다. 병찬은 좀 민망해져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시선 대신 질문이 뒤따라왔다.
“주장. 주장도 미국 가지 않을래요?”
“엥?”
“주장 실력이면 도전해 볼 수 있잖아요. NCAA건, NBA 드래프트에 참가해 보건. 주장이 굳이 한국에 있을 필요 없잖아요.”
“글쎄다. 초등학교 때부터 프로 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어서 그 이상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난 영어도 잘 못 하고 아무 준비도 안 되어 있잖아. 프로로 뛰다 NBA 스카우터 눈에 들어 드래프트 명단에 올라가게 되면 그때는 생각해 볼 것 같지만.”
엉뚱하고 갑작스러운 제안에 왠지 웃음이 나왔다. 종수의 필사적인 말투도 좀 재미있었고. 병찬은 팔을 뻗어 종수의 어깨를 감쌌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그러니까 미국에 한국인의 기상을 알리는 건 최종수 너에게 맡길게.”
“또….”
종수가 중얼거린 소리는 너무 작아 버스 엔진음에 묻혀 지워져 버렸다.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주장은… 주장은 참 한결같네요.”
“그거 무슨 의미인데?”
종수는 고개만 살랑살랑 저었다. 굳어졌던 얼굴이 이제는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옅은 미소로 휘어진 눈 아래에 애굣살이 볼록하게 올라왔다. 병찬은 종수의 어깨에 올려진 손을 들어 풍성한 곱슬머리를 힘껏 휘저었다.
“아, 그거 좀 하지 말라고요!”
종수가 작게 비명을 터뜨렸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동그란 머리통도, 손가락에 감겨드는 강아지 털처럼 부드러운 머리칼도, 질색하는 비명마저도 만족스럽다. 즐거웠다. 완벽하고 순조로운 이쪽이 박병찬의 진짜 인생. 그럴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며칠에 걸친 외부 숙소 생활도, 원중고와의 치열했던 결승전도 피로가 되어 몰려왔다. 버스 진동에 흔들리며 병찬은 그대로 잠들고 말았다. 한참 만에 어렴풋이 깨어나 보니 어깨가 무거웠다. 종수가 병찬의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었다. 높이가 맞지 않아 목이 불편하게 꺾여 있다. 이 녀석이 조금만 더 자라면 그때는 내 쪽에서 기대는 게 더 편하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며 병찬은 살짝 웃었다.
잠든 종수의 눈 아래로 옅은 그늘이 보였다. 늘 밤이 깊어질 때까지 개인 연습을 하고 들어가는 녀석이지만 최근에는 대회 전 컨디션 조절 때문에 너무 늦게까지 연습하진 않았는데. 잠을 잘 못 자나? 무슨 걱정이라도 있나. 병찬은 무심코 손가락을 들어 종수의 눈 밑을 쓸었다. 감긴 눈 아래로 드리워진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손가락 끝을 간지럽혔다. 손가락이 눈 끝까지 쓸었을 때 종수가 천천히 눈을 떴다.
문득 자책감이 들었다. 강도 높은 개인 연습에 잠도 잘 못 자는 것 같은데 나한테까지 신경 쓰게 만들었구나. 이 녀석에게 너무 기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척 도움이 되긴 했지만, 두 살이나 어린 후배가 조금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해줘야지. 그래서 병찬은 여전히 어깨에 기댄 종수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저번에 나랑 충돌한 일은 이제 신경 쓰지 마. 그동안 고마웠고, 앞으로는 더 안 도와줘도 돼.”
종수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쳤다. 푸른 빛이 감도는 색 옅은 눈이 불안하게 병찬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눈을 내리깐다. 긴 속눈썹이 눈 아래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어쩐지 그 속눈썹의 감촉을 알아버린 검지손가락 끝이 간지러워졌다.
“저는… 주장 계속 돕고 싶은데요. 저 귀찮아요?”
“귀찮기는. 그냥 이제 혼자 해보려고 그래. 나한테 그렇게 신경 안 써도 된다고.”
“하지만 저는….”
짧은 말에 긴 공백이 붙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으로 밀도 높게 꽉 채워진 공백이었다. 아니, 이건 말도 안 된다. 이건 지나치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인생이다. 부끄러울 정도로 이상적이다. 손가락 끝에 남은 감촉이 점점 빨라지는 심장박동에 맞춰 쿵쿵 울렸다.
최종수가 나를… 좋아할 수도 있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 인생에서는 그게 가능할 수도 있나? 결국 말조차 꺼내 보지 못하고 멀어진 사이였는데.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병찬은 눈을 깜빡였다. 멀어진 사이? 그건 누구였지? 천천히 생각을 돌이켜 보아도 도무지 떠올릴 수 없었다.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자 점점 뚜렷하게 보였다. 종수는 병찬에게 명백히 같은 학교 같은 농구부 선배를 대하는 것 이상의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주위를 맴돌며 병찬을 지켜보고, 기억이 불완전한 병찬에게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동안 별 의식하지 못했던 작은 행동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함께 나란히 서 있을 때 슬며시 병찬의 티셔츠 자락을 움켜쥐었다 놓는 행동. 등 뒤에서 톡톡 두드려 부른 뒤 그대로 팔이나 등을 따라 쓸어내리는 손가락. 둘이 대화할 때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는 얼굴. 함께 걸을 때 고양이처럼 바짝 다가붙는 어깨.
병찬도 종수를 귀여운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을 받아 고맙게도 생각한다. 종수에게는 꽤 좋은 감정을 품고 있다. 받은 것이 있으니 그만큼 돌려준다는 식의 감정은 아니었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된 건지 알 수 없지만 병찬은 종수에게 막연하고 희미한 애정 같은 걸 느끼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무언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이것이 박병찬의 인생일 텐데. 모든 것이 순조롭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삶이 박병찬의 것이다. 고교 최고 선수 타이틀을 가지고 있으며, 얼리 엔트리로 나서면 경험 많은 대학 4학년 가드들을 제치고 프로 드래프트에서 1픽으로 뽑힐 가능성이 높은 흠결 없는 천재 선수. 원한다면 두 살 어린 또 하나의 천재 선수 최종수의 마음마저 손에 넣을 수 있는 사람. 그런데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그림자가 있어 문득문득 시야 끝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그 알 수 없는 불안감 때문에 병찬은 종수의 마음을 알면서도, 종수에게 점점 기울어가는 자신의 마음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청소년 대표팀으로 먼저 병찬이, 일주일 후에는 종수가 소집되어 해외 경기를 뛰고 오는 동안 계절은 순식간에 본격적인 여름으로 들어섰다.
7월 하순이 되고 여름방학이 시작된 날이었다. 그날, 병찬은 고백을 받았다. 같은 반의 여자아이였다. 하루 두어 시간 정도 수업을 듣고 사라질 뿐인 농구부 엘리트 학생에게 어쩌다 관심을 두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대화 한 번 나눈 적도 없는데.
어쨌거나 처음 가까이서 본 그 여자아이는 꽤 예쁘긴 했다. 고백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그 아이는 포장조차 하지 않은 선홍색 하트 형태의 초콜릿 상자를 건네며 가볍게 좋아한다는 말을 건넸을 뿐이었다. 대답은 방학이 끝나고 개학할 때 해주면 좋겠지만, 그전에라도 얘기하고 싶다면 편하게 해달라면서 폰번호를 교환해 갔다.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꼼짝없이 휘둘려 제대로 말 한마디 못 하고 온 자신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생각 못 한 고백으로 실감한 인기에 우쭐해진 병찬은 기분 좋게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 입구 앞에서 마주친 종수는 병찬의 손에 들린 선홍색 하트 상자에 시선을 멈추었다.
“그거 뭐예요?”
“초콜릿 받았다. 형이 오늘 고백 받았거든.”
들뜬 기분으로 병찬은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실 그 여자아이에게 특별한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대답한 거였다. 하지만 종수의 눈은 험악해졌다. 드물게도 병찬을 노려보며 대뜸 묻는다.
“누군데요? 예뻐요?”
“같은 반 여자애. 꽤 예쁘더라.”
“…사귈 거예요?”
“모르겠어. 생각 안 해봤는데.”
예쁘냐고 하면 종수도 만만치 않게 예쁘지. 사귈 거냐고 하면… 역시 모르겠는데. 그 여자아이와도, 종수와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병찬은 초콜릿 상자를 열고 종수를 향해 내밀었다.
“초콜릿 하나 먹을래?”
순간 초콜릿 상자는 내민 종수의 손에 부딪혀 뒤집혀 버렸다. 짙고 옅은 갈색의 수제 초콜릿 알들이 흙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죄송해요!”
종수가 급히 사과했다. 뭔가, 미안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는 사과라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조금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전 종수가 뻗은 손도 우연히 부딪친 게 아니라 상자를 노린 것처럼…. 아니다. 이건 과하게 생각하는 거지. 정신 차려, 박병찬. 고백 좀 받았다고 괜히 마음에 헛바람만 차서.
병찬은 떨어진 초콜릿을 주워 모으고 있는 종수 곁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함께 흙먼지를 뒤집어쓴 초콜릿을 치우기 위해 줍기 시작했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드니 종수가 바라보고 있었다. 색이 옅은 눈동자가 똑바로 병찬을 응시한다. 밀크초콜릿 같은 갈색 눈을 가진 그 여자아이와 다르게, 서늘한 푸른 빛이 감도는 눈동자다. 깊이 모를 심연을 채운 무거운 감정이 불안하게 출렁이고 있었다.
“주장….”
푸른 심연 같은 눈동자가 말한다.
“그 사람… 좋아하지 마세요.”
병찬은 급히 바닥으로 눈을 돌렸다. 푸른 심연에서 헤어 나오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힘이 필요했다. 바다에서 전력으로 헤엄쳐 나온 것처럼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병찬은 발을 옮겨 저 멀리 굴러간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주워 든 초콜릿이 뜨거워진 손바닥 안에서 끈적하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까불지 마라, 꼬맹아.”
병찬의 타박은 힘이 없었다. 최종수는 박병찬을 좋아한다. 박병찬은 최종수를… 좋아할 것이다. 그 마음에 확신이 없는 이유는 내내 마음을 떠나지 않는 꺼림칙함 때문이다. 지나치게 순조롭고 이상적인 인생이라는 것을 제 것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다.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처럼 이 삶이 묘하게 겉도는 느낌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짜 박병찬의 인생인데도 그 작은 위화감 때문에 눈앞에 내밀어져 있는 최종수의 마음을 잡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니, 그런데 나 왜 이런 걸 고민하고 있냐. 좋아하고 어쩌고가 무슨 상관이라고. 어차피 우리 농구부는 연애 금지잖아. 걸리면 가만 안 두겠다고…. 병찬은 수그러든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가 그랬지? 우리 감독님은 훈련 열심히 받고 실적만 내면 무엇에도 터치하지 않는 사람인데. 코치님이라면 좀 더 부드럽게 말했을 거고. 농구부 녀석들 연애질 하다 걸리면 가만 안 둔다며 으름장을 놓았던 건 누구였지? 저도 모르게 움켜쥔 손안에서 녹은 초콜릿이 뭉크러지고 있었다.
병찬은 오후 연습 시간이 되기 전에 감독 사무실을 찾았다. 감독은 얼리 드래프트로 프로에 갈 건지, 대학 진학을 택할 것인지에 대해 여름 방학 전까지 대답을 달라고 했었다. 그 결정을 빨리 내리지 못하고 미루고 있다가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만 것이다.
왜 고민을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고민 자체가 바보 같은 일이었다. 병찬은 농구를 처음 시작한 초등학생 때부터 프로 농구 선수가 되고 싶어 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프로 리그에 나가는 것이 맞는 것이다. 얼리 드래프트로 일찍 프로 선수가 되면 본격적인 신체 전성기가 시작될 무렵에 첫 FA를 맞이할 수 있다. 최고의 몸값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이 길어지는 것이다.
전반기 대회들의 경기 분석을 하고 있던 감독은 아이패드며 온갖 서류철, 전술판으로 어지러운 책상에 기대어 병찬의 결정을 들었다. 아쉬워하는 표정이 그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고교 감독의 성과는 대학에 들여보낸 학생 선수의 숫자에 달렸다. 현 고교 최고의 선수인 병찬이 대학을 선택했다면 거기에 업둥이 선수까지 끼워 최소 2명을 대학에 보내는 실적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반대하지 않고 결정에 고개를 끄덕여준 것은 고마울 뿐이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발치에 하얀 것이 눈에 띄었다. 감독의 서류철에서 빠진 프린트물 몇 장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병찬은 허리를 굽혀 떨어진 종이들을 주워들었다. 원중고 선수 분석표, 모 대학의 체육 특기자 모집 요강, 그리고 지난 대회의 대진표가 손안에 모였다.
감독에게 주워 모은 서류를 건네려던 병찬이 손이 잠시 멈추었다. 별생각 없이 훑은 대진표의 이름 하나가 눈에 걸렸다. 조형고등학교. 예선전에서 탈락해 장도고와는 마주친 적도 없는 학교였다.
“박병찬. 왜 그래?”
“어, 아닙니다. 감독님. 여기 서류….”
서류를 감독에게 넘기고 병찬은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조형고등학교. 이름은 알고 있다. 작년에 농구부를 신설하고 대회에 출전하기 시작한 학교다. 신생 농구부가 대부분 그렇듯 굳이 신경을 쓸 필요조차 없는 약체 중의 약체팀이었다. 그런데 왜 그 학교가 신경 쓰일까. 어째서.
오후 훈련이 이어지는 동안 병찬의 머릿속에는 조형고등학교라는 여섯 자가 떠나질 않았다. 가만히 그 이름을 생각하고 있으면 어쩐지 가슴 속이 답답해졌다. 안타깝고 그리운 기분이 든다. 그런데 대체 왜?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한숨만 흘러나왔다.
내내 정신을 팔고 있던 병찬은 속공 패턴 연습 중 달리다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병찬에게 종수가 급히 달려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생각났다.
“이… 규후 선생님.”
“뭐라고 했어요, 주장?”
“어? 아냐 아냐. 잠깐 다른 생각 하다가.”
바라보는 종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병찬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제 딴 생각 안 하고 훈련에 집중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병찬은 다른 선수들의 훈련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벤치로 물러나 앉았다. 그리고 발목이며 손목 관절들을 천천히 주무르고 돌렸다. 겉으로는 넘어지면서 혹 생겼을지 모를 작은 부상을 확인하는 느긋한 모습으로 비쳤겠지만, 머릿속은 몹시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조형고등학교. 이규후 선생님. 농구를 포기하고 있던 18세의 고교 1학년에 조형고에서 처음 만났던 농구팀 창설 멤버들. 병찬이 강호고들을 상대로 혼자 130점을 쑤셔 넣으며 귀환을 알렸던 예선 세 경기. 어떻게 그걸 모두 잊고 있었을까. 박병찬의 인생에 존재한 적 없었던 것처럼.
지금 조형고의 주전 멤버들은 작년에 신설된 조형고 농구부에서 병찬과 함께 뛰었던 선수들일 것이다. 그 애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초…원이. 고교 3학년에 다시 돌아간 농구부에서 만난 아이들도 있다. 초원이는 종수와 동갑이니 올해 조형고에 입학했겠지.
다른 녀석들 이름이 뭐더라. 얼굴이… 어땠더라. 기억은 명확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하고 지낸 이초원의 얼굴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정도다. 박병찬에게는 지금의 인생과 다른 삶이 있었다. 그 기억들은 빠르게 부서지고 마모되어 가고 있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지워져 간다. 무서웠다.
“주장. 괜찮아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종수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병찬을 보고 있었다. 병찬은 왼쪽 무릎 위에 올린 오른쪽 발목을 빙글빙글 돌려 보였다.
“괜찮아. 부상은 없는 거 같아.”
한껏 쾌활하게 대답해 주었는데도 종수의 눈에서는 불안한 기색이 사라지지 않았다. 병찬은 잽싸게 손을 뻗어 종수의 곱슬머리를 헝클었다.
“아이 씨. 주장!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투덜거리면서도 종수는 병찬의 손을 떨쳐버리지 않는다. 병찬은 웃었다. 무심히 오른쪽 무릎을 더듬은 손가락이 피부결을 따라 매끈하게 미끄러졌다. 습관이 되어버릴 정도로 만지작거리던 수술 흉터가 사라져 버린 무릎이다. 박병찬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은, 박병찬이 잊어버린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
야간 훈련이 끝나고 감독과 코치가 퇴근한 후에도 언제나처럼 병찬, 종수, 규 세 사람은 남아서 개인 연습을 진행했다. 종수와 규가 일대일 개인 연습을 마치고 샤워실로 향하자, 병찬은 흩어진 볼을 대충 정리하고 체육관 정문과 창문을 잠근 뒤 불을 껐다.
샤워실로 향하던 걸음이 멈추었다. 병찬은 비어 있는 감독 사무실 앞에 섰다. 지난 6월 대회, 그리고 그 이전 대회들의 경기 기록이며 선수 명단이 감독 사무실에 있다. 병찬과 같은 선수들이 대진 상대가 아니라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경기의 기록까지 모두 다 있을 것이다.
조형고의 올해 성적은 어떨까. 작년에는 어땠을까. 장도고 2학년이던 18세의 박병찬과, 유급 때문에 한 해 늦어져 조형고 1학년이던 18세의 박병찬이 동시에 존재할 수는 없다. 그러니 작년에 창설된 조형고 농구부는 박병찬이 없는 팀이었을 것이다.
이규후 선생님은 고교생이 된 박병찬을 모른다. 병찬이 너한테는 국가대표 가드가 되는 미래가 보여. 넌 내가 가르쳤던 녀석들 중에 단연 최고다. 이 세상에서의 이규후 선생님은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이규후 선생님 목소리가 몹시 그리웠다.
병찬은 감독 사무실의 도어락을 바라보다 천천히 버튼에 손가락을 올렸다. 얼마 전 농구부 선수들 모두가 축하를 해드렸던 감독님 생신 날짜를 눌러 본다. 도어락에서 번호가 틀렸다는 알림음이 울렸다. 병찬은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복도 천장 조명이 반사되어 도어락에 남은 손자국이 보이는 각도를 찾아보았다. 그렇게 발견한 네 개의 숫자를 대충 조합해서 눌러보았다. 다시 또 오답이다. 그럼 다른 조합으로 한 번 더.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이규후 선생님의 폰번호 같은 건 생각나지 않았다. 선생님의 얼굴마저도 흐릿하게 떠오르는 정도다. 그러니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번호를 알아내야 했다. 감독 사무실에 있는 서류 중에는 각 팀 감독 명부가 있을 것이다. 잘못 건 전화인 척해서라도 선생님 목소리를 한 번만 듣고 싶었다. 그러면 계속해서 옅어지기만 하는 기억도 조금은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거침없고 순조로운 삶이 아무리 만족스럽다 해도 직접 경험하고 쌓아 올린 생의 기억들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싫다. 기쁘고 괴롭고 슬프고 즐거웠던 기억들 모두를 놓아버리고 싶지 않았다.
세 번째의 조합도, 네 번째의 조합으로도 열리지 않는다. 병찬은 도어락 앞에 쪼그려 앉은 채 묵묵히 계속 조합한 숫자를 눌러 나갔다.
“비번 알려줘요?”
등 뒤에서 불쑥 날아든 목소리에 병찬은 기겁을 했다. 발목이 균형을 잃어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인마, 최종수. 놀랐잖아.”
종수는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등 뒤에 와 서 있었다. 어쩌면 병찬이 너무 집중하고 있는 통에 작은 운동화 소리를 듣지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굳이 안 열어도 되는데. 뭐가 궁금해서 그래요? 알려줄게요.”
“뭐… 뭐를?”
종수가 발을 옮겨 병찬에게 바짝 다가섰다. 검은 장도고 저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은 병찬을 내려다보고 있다.
“조형고? 아까 주장이 조형고 감독 이름 얘기했었죠. 조형고가 어떤지 궁금해?”
“…어?”
“조형고는 작년에 농구부를 창설하고 처음 대회에 출전했지. 주장은… 박병찬 너는 작년에 조형고랑 만난 예선전에서 딱 한 쿼터 뛰었잖아. 그 한 쿼터 동안 29점을 냈지. 30점을 못 채워서 아깝다고 했었어. 조형고는 우리 학교 주전들이 한 쿼터 이상 뛸 필요조차 없는 쓰레기 팀이었어. 올해의 수준도 다를 건 없고.”
거침없는 말투로 혹독한 평가가 내려진다. 어느새 종수는 반말을 하고 있었다. 주장이나 선배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고 있다. 목소리도 말투도 더 이상 부드럽지 않았다. 웃음이 지워진 얼굴에서 묵직한 저음이 싸늘하게 흘러나왔다. 이건 어쩐지…. 흐릿하게 바래 버린,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더 흐려져 가기만 하는 기억 속에서 병찬은 겨우 그 목소리, 그 얼굴을 찾아낼 수 있었다. 눈앞의 종수는 이제 고1의 앳된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부드러운 곡선의 두 볼이며 병찬보다 몇 센티 작은 신장은 여전한데 그럼에도 훨씬 커다랗고 날카롭게만 보였다. 이건 다른 최종수다. 훨씬 더 나이를 먹은 최종수다. 경계하듯 싸늘한 눈을 하고 바라보던 고교 3학년의 최종수, 미국으로 떠나기 전 아무 감정 하나 내비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입을 다물고 있던 최종수에 더 가까워 보인다.
“최종수…. 너 대체 뭐야?”
떨리는 소리로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병찬이 물었다. 종수가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왜 자꾸 떠올리려고 해? 그런 구질구질하고 쓸데없는 기억 같은 건 버리면 되는데. 박병찬. 너는 지금 이 생활이 마음에 안 들어? 그럴 리 없잖아. 여기서의 너에게는 한심한 부상도 없는데.”
하얀 운동화가 주저앉은 병찬의 오른쪽 다리를 툭 찼다.
“이 세상의 너는 걸핏하면 무너지는 무릎도 없고 두 번이나 유급을 하지도 않았어. 너는 고교 최강 장도고의 주장이고, 고졸 얼리 드래프트로 프로에 갈 거야. 넌 모두가 동경하고 칭찬하는 최고의 선수라고. 그게 내 박병찬이야. 미국을 노려볼 수도 있었는데 너는….”
종수는 급히 입을 다물었다. 바짝 다가서서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종수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 위해 병찬은 슬쩍 물러나 감독실 문에 등을 기대었다. 병찬은 힘껏 미소를 만들어 내보이며 종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데? 넌 뭘 더 알고 있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종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흘러내린 앞머리 때문에 표정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입술을 꼭 깨물고 있는 것만 보일 뿐이었다.
핏기 없이 하얗게 질려버린 작은 입술이 어쩐지 딱해서, 자주 그랬듯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헝클며 쓰다듬어 달래 주고 싶다는 충동이 잠시 스쳤다. 병찬이 바닥에 앉아 있어 손이 닿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손이 닿는 위치였다면 무심코 머리를 쓸고 질색하는 종수를 보며 웃었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이상한 일을 그냥 별것 아니라며 덮어버리게 될 지도 모른다. 병찬은 저도 모르게 내밀 뻔한 손을 단단히 움켜쥐고 바닥에 꾹 눌러 붙였다.
돌이켜보면 최종수는 이상했다. 종수가 병찬에게 준 도움들은 연습 경기 중에 충돌해 선배를 다치게 만든 선수가 죄책감에 하는 행동들이 아니었다. 병찬을 연약한 아이처럼 돌보고 지키는 행동에 가까웠다. 병찬의 기억이 일시적으로 혼란스러워진 것이 아니라 아예 없다는 걸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 같았다.
병찬은 고개를 떨군 종수의 발목을 복수하듯 가볍게 찼다.
“야. 나 솔직히 이게 무슨 일인지 어떻게 된 상황인지 잘 모르겠거든. 근데 이 일에 네가 연관되어 있다는 거 하나는 알겠다.”
“….”
“씨발. 말하라고, 최종수. 내가 널 미워하게 되기 전에. 그래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데?”
종수가 조그맣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너는… 미국에 도전해 보자는 내 제안을 거절하고 한국에 남았어. 프로로 빨리 뛰고 싶다고.”
“그리고?”
“나는….”
최종수는 박병찬을 좋아했다. 박병찬도 최종수를 좋아했다. 장도고에서 선후배로 함께 보낸 일 년 동안 둘은 서로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누구도 내색하지 않았다고 했다. 두 사람이 마음을 확인한 건 종수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날이었다.
종수는 병찬과 가까이 있고 싶어 미국행도 대학도 포기하고 일 년 늦은 프로 드래프트를 고려했다고 했다. 하지만 병찬의 만류에 결국 미국으로 떠났다. 일 년에 채 몇 달도 함께 하지 못하는 원거리 연애는 이후로 2년간 이어졌다고 했다.
거기서 종수의 말은 또 한참이나 끊어졌다. 병찬은 다시 한번 종수의 발목을 차며 재촉했다. 종수가 바닥에 앉은 병찬을 노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를 겨우 끌어내었다.
“그런데 네가… 죽어버렸어.”
가을 학기가 시작되어 종수가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의 일이라고 했다. 종수는 미국의 대학 기숙사 침대에 누워 아침 훈련을 나가는 병찬과 영상 통화 중이었다. 종수는 그날의 대수롭지 않은 대화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둘은 그해 여름에 함께 했던 일들이며 다음 휴가 때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을 이야기했고 병찬은 정말 즐겁게 웃었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화면이 거세게 흔들렸다. 이후 영상통화 화면에는 하늘만 비춰지고 있었다. 찢어지는 비명이며 다급한 말소리가 불분명하게 들려오는 가운데 구름 하나 없이 무섭도록 새파란 하늘만.
종수가 급히 한국에 도착했을 때에는 장례도 끝났고, 병찬은 농구공보다 작은 유골함에 담겨 있었다. 납골당에 찾아가 한 손으로도 움켜잡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마해진 병찬을 바라보다 돌아온 것이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그날 밤에… 아주 굉장히 중요한 능력을 깨닫게 되었어.”
“그게 뭔데?”
종수는 더 이상 싹싹하고 세심한 후배로 보이지 않았다. 귀여웠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날카로워져 있었다. 종수가 창백한 얼굴로 씩 웃었다.
“박병찬. 평행우주라는 걸 알아?”
“이름 정도는 들어봤어.”
“평행우주에는 모든 가능성에 따른 시간선들이 모두 실재하고 있어. 일어날 수 있었던 모든 일들이 일어난 수만큼 무한히 많은 우주가 있다는 거지.”
“넌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데?”
“박병찬 네가 존재하는 수많은 우주가 있다는 얘기야.”
놀랍도록 많은 우주가 있었다. 어느 우주에서의 박병찬은 농구 대신 육상을 하고 있었다. 어느 우주에서는 록스타였고, 어느 우주에서는 여자였다. 또 어느 우주에서는 괴물과 싸우는 초능력자였으며 어느 우주에서는 황무지가 되어버린 서울을 걷고 있었다. 농구로 미국에 간 박병찬이 있었고, 농구를 포기해 버린 박병찬도 있었다. 그 모든 우주에서 박병찬은 최종수를 사랑하고 있으며, 최종수는 박병찬을 사랑하고 있었다. 지금 이 세계의 최종수와 박병찬이 그러했듯이.
수많은 우주를 넘나들며 종수는 수많은 최종수와 박병찬을 보았다. 수없이 질투도 했고, 수없이 절망도 했다. 그러다가 병찬을 찾아내고는 이 세계로 낚아채 온 거였다.
“정말 가능할지는 몰랐어. 정신 차려보니 장도고 학생 때로 돌아와 있길래 실패했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급히 뛰쳐나가 보니… 네가 있었어. 내 박병찬이.”
종수가 웃었다. 본 적이 있는 표정이었다. 이 세계에서 처음 병찬이 눈을 떴던 날, 종수는 복도에서 돌아보며 웃었었다. 지금처럼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눈을 하고서.
“우주는 오류가 생기는 것을 바로잡고 감추려 하는 성향이 있다고 해. 이미 죽은 사람이 다시 나타나는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 네가 끼어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으로 되돌려진 모양이야. 그건 괜찮았어. 천천히 시간을 들여 나와 박병찬 사이에 있었던 모든 것을 다시 쌓아 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울 거고.”
“야, 최종수…. 왜 나였어? 수많은 박병찬이 있었다면서 왜 하필 나였어?”
색 옅은 푸른 눈동자가 흐려졌다. 그 안에 비친 것은 슬픔인지 기대감인지 모르겠다.
“너는 내가 찾아낸 모든 우주에서 유일하게 최종수와 사랑하고 있지 않은 박병찬이었어.”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은 종수가 병찬의 목을 끌어안았다. 종수의 이마가 병찬의 머리와 어깨 사이를 파고들었다.
“박병찬. 더 이상 뭘 떠올리려고 하지 마. 너에게도 이 우주가 더 좋잖아. 여기서의 너에게는 어떤 불행도 없잖아. 그런 비참하고 초라한 인생 같은 건 버리면 돼. 여기에 있어. 같이 있어 줘. 날 좋아해 줘.”
애처로운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목을 끌어안은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병찬은 손을 들어 천천히 종수의 머리카락을 쓸었다. 강아지털처럼 보드라운 곱슬머리가 손가락에 감겼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저 병찬을 붙잡으려 하는 것만 같다. 같이 있어 줘. 날 좋아해 줘. 제발. 귓가에는 흐느끼는 것 같은 소리가 계속 되풀이되고 있었다.
병찬은 종수의 귀에 속삭였다.
“그럼 여기서의 나는 4년 후에 사고로 죽는 거야?”
종수가 급히 몸을 일으켰다. 푸른 기운이 도는 눈동자가 병찬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서 깊은 불안이 또렷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사고가 있는 날도 시간도 장소도 다 알고 있어. 그러니 피할 수….”
이상할 정도로 푸른 빛이 비치는 눈동자다. 이 세계의 박병찬이 죽은 날 최종수가 보았다던 무섭도록 새파란 가을 하늘이 고스란히 배어든 듯한.
병찬은 종수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뒤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몸이 젖혀지며 드러난 종수의 가슴팍을 힘껏 걷어찼다. 뒤로 나동그라진 종수를 버려두고 병찬은 달리기 시작했다. 부상 없는 무릎을 가진 박병찬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속도로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샤워실을 지나 모퉁이를 돌면 체육관 뒷문이 보인다. 돌진하듯 문에 매달렸지만 열리지 않았다. 문손잡이를 흔드니 둔한 쇳소리가 철컥거리며 울렸다.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는 걸쇠가 걸리고 묵직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최종수의 짓인가? 체육관의 정문은 병찬이 아까 직접 잠갔었다. 뒷문마저 잠긴 지금, 체육관은 빠져나갈 길 없는 닫힌 공간이었다.
일어난 종수가 복도를 달려오는 소리가 울렸다. 병찬은 뒷문 옆에 있는 방화문을 당겨 열었다. 그리고 문 안의 계단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계단참의 창문은 병찬의 몸이 통과하기에 너무 작았고, 다른 빠져나갈 길은 찾을 수 없었다. 장도고의 구조를 외우기 위해 열심히 학교 안을 돌아다닐 때 체육관 옥상 가는 계단도 한 번쯤 살펴볼 걸 그랬다며 병찬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알았다면 이런 곳으로 도망치지는 않았을 텐데.
병찬은 결국 뒤따라온 종수와 체육관 옥상에서 대치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다가오지 마! 거기 서, 최종수!”
“씨발. 왜 도망치는데? 박병찬. 네가 왜 나한테서 도망치는 건데!”
하지만 종수는 거침없이 성큼성큼 다가올 뿐이다. 병찬은 그가 다가오는 만큼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흐릿한 달빛 아래서도 최종수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새끼는 미쳤다. 제정신이 아니다. 그 거부감이 계속해서 종수와의 거리를 벌리도록 만들었다.
계속 밀리기만 할 수는 없었다. 기선을 제압할 셈으로, 병찬은 난간 위로 뛰어올랐다. 그제서야 종수가 발을 멈추었다. 겁먹은 듯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날카롭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차분히 가라앉았다.
“…박병찬. 위험하니까 내려와. 내려와서 얘기해.”
“무슨 얘기? 사람을 허락도 없이 엉뚱한 곳에 끌고 와 놓고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건데?”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병찬의 몸이 순간 휘청거릴 정도의 강풍이었다. 그러고 보니 태풍이 북상하고 있다고 했던가. 체육관 옥상은 일반 건물로 치면 2.5층 정도 높이지만 이렇게 내려다보니 꽤 무서웠다. 시커멓게 어둠에 물든 대지가 까마득히 멀게 느껴졌다.
불현듯 화가 치밀었다. 아무 기억도 정보도 없이 다른 박병찬의 삶에 끼워 넣어져 마음 졸이고 걱정했던 것들도, 당황해야 했던 모든 순간들도, 그리고 한밤중에 체육관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지금 상황도 모두 분노를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병찬은 목소리를 높였다.
“최종수. 넌 미친 새끼야. 넌 그냥 너만 혼자 남게 된 게 싫었던 거지. 그래서 날 이리로 끌고 온 거야. 넌 그냥 죽은 네 애인의 대용품이 필요했던 거 아니야? 이 우주에 있으면 미래에 내가 어떻게 될지 알면서. 막을 방법 따위 알지도 못하면서.”
“찾아낼 거야. 어떻게 해서든 방법을 찾을 거야. 내가 널 두 번이나 잃을 것 같아? 일단 내려와서 얘기해. 위험하니까 제발 거기서 내려와.”
“닥치라고. 넌 결국 아무것도 아는 게 없잖아. 원래 세상으로 날 되돌려 놓을 방법은 알아?”
“왜 돌아가려고 하는데? 여긴 너에게도 좋은 세상이잖아. 넌 여기서 훨씬 나은 삶을 살 수 있어. 부상당하고 두 번이나 유급하고 몇 번씩 농구를 포기해야 했던 세상 따위가 뭐가 좋아서 그러는데? 그런 비참한 삶으로 왜 돌아가려고 하는 건데? 그냥 여기에서 살면 되잖아. 당장 날 좋아해달라고는 안 할 테니까. 그냥 이 우주에 함께 있어 줘.”
“야. 최종수. 아니 씨발….”
세찬 바람이 불어 병찬은 말을 멈추었다. 바람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정신없이 휘날린다.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정신을 쏟는 동안 치솟았던 분노가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병찬은 긴 숨을 뱉고 말을 이었다.
“야 최종수. 남의 인생을 두고 비참하니 뭐니 개소리 하지 마. 네가 어떻게 생각하건 그쪽에서의 나는 충분히 행복했어. 그리고… 내 우주에서의 최종수는 날 좋아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날 동정하지도 않았고 날 우습게 보지도 않았어. 그게….”
그게 좋았다. 힘겹게 코트로 돌아온 부상 경력 선수 박병찬에게 처음부터 전력으로 덤벼든 최종수가 좋았었다. 그는 동정하지도 않았고 박병찬의 수준을 낮게 보지도 않았었다. 그는 박병찬을 강자로 대함으로써 박병찬을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려 준 사람이었다. 이전부터 좋아했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핸드폰 화면을 통해 지켜보면서 좋아했고, 실제로 만나면서 더욱 좋아하게 되었었다. 그 최종수는 끝내 박병찬에게 경쟁 상대 이상의 감정은 느끼지 못했던 것 같지만, 그런 건 상관없을 정도로 좋아했었다.
“넌 내가 최종수와 사랑하고 있지 않은 유일한 박병찬이라고 했지. 근데 그 녀석은 아니었어도 난 내가 있던 세상의 최종수를 좋아했거든. 근데 그게 너는 아니잖아.”
헛웃음과 함께 말을 토한 순간 이전까지보다 더 강한 바람이 불었다. 순간 몸이 흔들려 아래를 내려다보고 말았다.
거센 바람으로 정신없이 흔들리는 시야 속에서 문득 병찬은 깨달았다. 우주와 우주, 세계와 세계 사이를 한 발로 건너는 방법을 지금이라면 알 수 있었다. 바람에 휘날려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병찬이 잘 아는 세상이 얼핏 보였다. 병찬은 그 세상을 향해, 허공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종수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병찬은 돌아보지 않았다. 목덜미에 손가락이 스치는 감각이 느껴졌지만 역시 돌아보지 않았다.
추락하는 감각에 병찬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났다. 급히 몸을 일으키다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천장에 머리를 박은 거였다. 아픈 이마를 쓸며 천천히 둘러보자 낯설던 방 안이 천천히 익숙해져 왔다. 아래에 책상이 달린 네 개의 벙커 침대와 붙박이장이 채워져 있는 살풍경한 방이다. 준향대 농구부 기숙사였다. 병찬은 깊은 안도의 숨을 뱉었다. 몇 달 만에 겨우 원래의 방, 원래의 우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천천히 잠기운이 물러나고 머리가 맑아졌다. 살짝 열린 커튼 너머가 밝았다. 오늘은 6월의 토요일이다. 힘든 오전 훈련을 마치고 평소 휴식 시간에 종종 그렇듯 기숙사로 돌아와 잠시 낮잠을 자고 있던 중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정도 잔 것 같은데, 아주 이상하고 긴 꿈을 꾸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 꿈에서 한평생을 살고 깨어나 보니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던가 뭐 그런. 왠지 찜찜한 기분에 병찬은 침대 사다리를 내려와 욕실로 향했다. 거울 안에는 조금 피곤해 보이지만 머리가 세지도 않고 폭삭 늙어버리지도 않은 남자가 비치고 있었다. 스물세 살, 준향대 농구부의 에이스 가드 박병찬의 모습이다.
열어 놓은 욕실 문밖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잠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오, 어떤 새끼야? 시끄럽다. 핸드폰 좀 꺼.”
병찬의 맞은편 침대를 쓰는 4학년 선배의 목소리였다. 달게 낮잠을 자다 병찬의 핸드폰 벨소리에 깨어버린 모양이다. 병찬은 욕실에서 달려 나가 침대 위로 손을 뻗어 핸드폰을 잡았다. 다급한 마음에 발신자를 확인조차 하지 않고 급히 전화를 받으며 기숙사 방을 나와 복도에 섰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
“저어, 안 들리는데요. 다시 걸어 주시겠습니까?”
대답 없는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박병찬.
흠칫 어깨가 떨렸다. 꿈인지 뭔지 모를 곳에서 들었던 목소리처럼 들렸다. 순간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그게… 누구의 목소리였지? 잠기운이 떠나가는 만큼 꿈은 빠르게 흩어져갔다. 기억은 순식간에 바스러져 사라진다.
“누구시죠?”
-…나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최종수야.
“어? 장도 23번? 미국 간 최종수?”
-맞아.
병찬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 기쁜 건지, 수화기 너머에서 살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최종수가 웃는 소리는 처음 듣는 것 같다.
“최종수가 나한테 전화를 다 하고. 무슨 일이야?”
-나 지금 막 한국 들어왔는데… 오늘 만날 수 있을까 해서.”
“나랑 만나자고? 오늘?”
한참 침묵이 이어졌다.
-그… 오늘 곤란하면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아니. 곤란한 건 아니야. 오늘 토요일이라 오전 훈련은 끝났고 오후는 자유시간이긴 해.”
최종수가 준향대 앞으로 오겠다고 해서 둘은 조금 이른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최종수의 리퀘스트는 한식이 먹고 싶으니 적당히 맛있는 가게를 골라달라는 거였다. 병찬은 김치만두전골이 훌륭해 농구부원들이 자주 찾는 학교 근처 식당 주소를 최종수에게 보내주었다.
시간이 일러 아직 손님이 많지 않은 식당에 앉아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최종수가 좁은 가게 문을 비집고 들어섰다. 기억보다 훨씬 덩치가 거대해졌다. 미국에 가면 뭐든 커진다더니. 식물도 아닌데 쑥쑥 잘도 자랐다. 뉴스를 통해 이따금 접한 소식에 따르면 최종수는 NCAA 디비전1에서 확고한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고 했었다. NCAA 디비전1을 거쳐 NBA로 진출한 한국 출신 선수는 아직 없지만 최종수가 그 첫 번째가 될 거라는 이야기도 있고.
2년 만에 만난 두 사람 사이에는 서먹함이 감돌았다. 잘 지냈지? 응. 그 말 이후로는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다. 사실 2년 전이라고 해도 다를 건 없었을 것이다. 최종수와의 기억이라고는 대회에서 대진 상대로 만난 몇 번과, 청대 출신 선수들이 주축이 되어 열었던 환송회 한 번이 전부다. 애초에 둘은 친한 사이가 아니었고 따로 대화를 나눠본 적조차 없었다.
침묵 속에서 테이블이 세팅되고, 김치만두전골 냄비가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졌다. 병찬은 어색해하다 김치만두전골이 끓기 시작한 후에야 겨우 할 말을 찾을 수 있었다.
“내 번호 어떻게 알았냐?”
“조재석에게 물어봤어. 원중 15번.”
“아, 지금 주익대 다니는 그 녀석. 제 형처럼 미국 대학 가고 싶어서 편입 알아본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너랑 연락하고 지내나 보네.”
“미국 생활 어떤지 몇 번 전화해서 물어보더라.”
이야기가 이어지니 그래도 조금 분위기가 편해졌다. 국자로 전골을 휘저은 병찬이 앞접시를 들었다. 그리고 가장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
“근데 나한테는 왜 만나자고 했어?”
“…그게….”
최종수는 고개를 숙였다. 젖살이 사라져 고등학생 때보다 날카로워진 얼굴에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번졌다. 그러고 있으니 고등학생 때처럼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예민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가 아니라 좀 더 어렸던…. 문득 떠오른 위화감에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병찬은 최종수의 19살 이전 모습을 모른다. 유튜브에 올라온 농구 웹진의 짧은 인터뷰 영상에서 본 것이 전부다.
최종수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사실…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동안 기회가 없었어.”
“그럼 너 미국 간다고 동기 선수들이 송별회 열어줬을 때 말 하지 그랬냐?”
“사람 많고 시끄러우면 좀 힘들어서…”
“그날 좀 시끄럽긴 했지. 특히 원중 녀석들. 근데 최종수 너 인마.”
병찬은 최종수 앞에 덜어낸 만두전골 접시를 놓아주며 정색을 해 보였다.
“두 살이나 많은 형한테 말 까면서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소리가 나오냐?”
최종수는 입술만 비죽 할 뿐이었다. 이제라도 사과하고 존대를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어쨌건 듣기에 나쁘지 않은 이야기였다. 병찬도 최종수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수술 후 재활 기간 동안 유튜브를 통해 어린 최종수가 뛰는 경기 영상을 보면서 느낀, 아주 오래전부터의 소망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쌍용기 대회에서 처음 대면한 후로 그 감정은 조금 혼란스러워졌었다. 실제 사람은 상상과는 다르다는 실망감이 반, 달라서 더 재미있다는 감정이 반이었다. 지금은 어느 쪽 감정이 더 커졌는지 잘 모르겠다.
병찬은 두 번째 앞 접시를 들어 올리며 웃었다.
“마지막으로 본 지 2년이나 지났고 우리 대화도 해본 적 없는데 이제 와서 불쑥 찾아오다니. 너도 참 특이한 녀석이다.”
최종수는 눈 앞에 놓인 만두전골을 먹을 생각은 않고 테이블 위에서 턱을 괸 채 병찬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불쑥 묻는다.
“박병찬. 만약에 말이야.”
“엉?”
“모든 길이 막혀 버리고 가지 않은 길 하나만 남았는데, 그 길에 들어서면 절반의 확률로 소멸하게 돼. 그러면 넌 어떻게 할 것 같아?”
“뭐야 그거. 심리 테스트?”
최종수는 대답 없이 가만히 병찬을 바라보기만 했다. 최종수가 심리 테스트 같은 화제를 꺼내는 녀석인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병찬은 천천히 그 질문을 되새겨 보았다.
모든 길이 막히고 하나 밖에 남지 않았는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라. 이제껏 병찬의 인생에 있어 다양한 선택지가 주어진 적은 별로 없었다. 원치 않는 길로 내몰린 적은 많다. 가끔 행운이 빛을 발해 농구를 향한 길이 희미하게 드러날 때가 있었다. 그러면 병찬은 늘 가던 길을 버리고 거침없이 농구를 향한 길로 뛰어들었었다. 그 길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따위를 생각하며 망설여본 적은 없다.
여전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최종수를 향해, 병찬은 피식 웃었다.
“최종수. 그 길 끝에 있는 건 분명 끝내주게 좋은 거겠지?”
“그래.”
“그럼 가야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잖아.”
단호한 답을 들은 최종수는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처음으로 보는, 비웃음이 아닌 최종수의 웃는 얼굴이었다.
병찬은 국자로 만두전골을 덜어내며 물었다.
“그래서 그 심리테스트, 결과? 해석? 아무튼 그게 뭐야?”
대답을 들을 틈은 없었다. 적당한 소음이 이어지고 있던 가게 안이 갑작스레 고요해졌다. 병찬은 유일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모든 손님들이 가게 구석의 티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에 위치한 한 대학교 기숙사 건물입니다. 원인 불명의 화재가 발생해 소방관 200여 명이 투입되었지만 건물 전체가 전소하고 말았습니다. 미 당국은 현지 시각….]
화면에는 거센 불길에 완전히 휩싸인 건물이 비춰지고 있었다. 뒤이어 드론으로 공중에서 촬영한 시커멓게 그을리고 무너진 건물의 잔해 영상이 흘러나왔다.
[미 소방 당국은 불이 난 원인을 파악 중이며, 여름 방학을 맞이해 대부분의 학생들이 기숙사를 비운 상태였다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아울러 우리 외교부는 해당 기숙사에 살고 있던 한국인 유학생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안전 여부를 확인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티비 화면을 채운 화재 영상에 이끌렸던 손님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거두면서, 식당 안은 다시 식기 소음과 대화 소리로 가득 찼다. 병찬 역시 최종수를 향해 다시 몸을 돌렸다.
“우와…. 큰 건물인데 저렇게나 홀랑 타버렸네. 너 다니는 대학이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있지 않던가? 저 학교는 아니지?”
“우리 학교 맞아. 저기는 내가 사는 기숙사고.”
무덤덤한 최종수의 목소리에 병찬은 어깨를 움츠렸다.
“어…. 그래도 넌 여기 무사히 와 있으니 다행이다.”
여전히 뉴스 화면을 향해 있던 최종수의 눈이 병찬에게로 향했다. 희미하게 웃은 것 같기도 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해?”
“아, 이런. 방학이라 학생들 없었다고 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큰 화재가 난 건데 내가 경솔한 소리를 했다. 사람이 다치거나 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제 몫의 만두전골을 덜어낸 병찬이 앞접시를 내려놓았다.
“그냥 너 오랜만에 보니 반갑고… 무사해서 잘됐다 싶어 그만 말이 그 따위로 나왔다. 생각해 보니 너도 살던 집이 없어진 셈인데 내가 생각 없이 말했어.”
병찬은 제 말실수에 혀를 차며 눈을 들었다. 최종수의 눈과 마주쳤다. 묘하게 푸른 빛이 감도는 색 옅은 눈이 병찬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 눈이 몹시 그립고 안타까운 듯 바라보고 있어서, 병찬은 어쩐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병찬은 등 뒤의 티비에서 자막 뉴스가 흘러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속보: …대학 기숙사 화재 잔해에서 다수 창상으로 살해된 시신 발견. 신원 확인 불가능할 정도로 불에 타…>
물론 그것을 보았다 해도 이 세계에 갑자기 뛰어들어온 인물로 인해 같은 사람이 몇 시간 정도 동시에 존재하고 말았다는 오류, 그리고 누군가가 자기 자신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오류를 감추기 위해 우주가 어떤 식으로 움직였는지 따위는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end)
———
움벨트(umwelt):
환경. 세계.
개체가 주관적인 자기 입장에서 자신만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자기 중심의 세계.
썸네일은 ‘익명의2321러’님께서 만들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아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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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딩하는 거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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