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온도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9
1
1

"사랑해, 상호야. 나랑 사귈까?“

 

답지 않게 조금 떨리는 목소리, 그럼에도 상대방의 반응을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 마주하는 검은 눈. 그 사이에 담긴 따뜻함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때. 당연히 바라는 것은 같은 온도의 답변. 옅은 갈색 눈동자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조금 크게 뜨여지고, 당황한 듯 작게 떨린다. 눈가가 작게 붉어진 것도 같은데, 바로 받아주지도 않고 내리깔아진 눈이 거절인 걸까. 알 수가 없어서 병찬은 얌전히 상호를 기다렸다.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상호가 다시 시선을 맞춰온다. 여전한 눈에 방금의 고백으로 사이가 멀어지진 않겠구나. 짐작하면 조심스럽게 고르고 고른 흔적이 엿보이는 말을 내뱉는다.

 

"...병찬햄을 좋아해요. 정말 많이요. 아마 웬만한 사람하고는 비교도 못 할 거예요. 근데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럴 수 있어 상호야. 꼭, 나랑 같은 마음일 필요도 없고... 편하게 거절해주면."

"아뇨, 그러니까... ...형이 너무 좋은데. 한 번도 이걸 사랑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확신이 잘 안 들어요."

"음... 그러니까 네 맘을 아직 모르겠다는 거지?"

"네, 혹시 형만 괜찮으시다면... 제게 잠깐 기회를 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서 한다는 게 계약 커플이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정이 없어 보이는데 자초한 건 병찬이었다. 상호는 그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사랑에 빠진 사람은 마음이 급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병찬도 말했다. 내게도 기회를 달라고. 만약 네가 가진 좋아함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알아갈 기회를,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으로 만들 기회를 달라고. 상호는 그 말을 듣고 잠깐 아득한 눈이 되었다가, 병찬의 눈을 깊게 들여다보며 말했다.

 

"괜찮아요?“

 

병찬은 그 말에 어색하게 웃었다.

 

"괜찮아. 너한테 미안한 거지."

 


 

기상호는 당연하다는 듯 준향대에 왔고 박병찬의 시간표를 참고해서 자신의 시간표를 짰으며 운이 좋게도 둘 다 원하던 것을 거의 달성했기에 웬만한 상황에는 다 붙어 다녔다. 한 달. 둘에게 주어진 시간은 딱 그 정도였다. 기상호가 그 시간이면 자기 마음 들여다보기에 충분할 것 같다고 말해져서 그렇게 정해졌다. 그렇게 얼굴 맞대고 사니까, 한 달도 꽤 긴 기간이다. 그럼에도 병찬은 조금 아쉬웠다.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대신 병찬이 조금 더 눈에 띄게 굴었을 뿐이다. 전보다 더 상호의 손을 잡아 오고, 좋아한다고 말하고, 자주 웃어 보이는 것들. 상호는 그 모든 것을 가만히 받아주었다. 아주 가끔은, 고민하는 얼굴로 한참 병찬의 손을 쳐다보더니 먼저 잡아 오기도 했다. 그 모습이 꼭 부끄럽다기보다는 정답을 찾는 모양새라 병찬은 어쩐지 그것을 방해하고만 싶었다.

그 외에는 모든 게 같았다. 얼굴이야 항상 마주했고 밥도 항상 같이 먹었고 공부나 과제도 같이 했고 훈련도 연습도. 변한 것은 숨기지 않고 사랑을 표현하는 병찬뿐이었고 그 표현조차도 원래 하던 것이 좀 더 눈에 띄는 것이니 큰 변화라곤 할 수 없었다. 상호는 새삼스레 깨닫는다. 병찬햄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날 좋아했었구나... 그런 깨달음을 얻어도 여전히 제 마음은 알 수 없다.

 

어느순간부터 제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병찬이 먼저 다가와 주는 것이 기꺼웠던 것은 기억이 난다. 그에 따라 병찬을 좀 더 좋아하게 되고 이제 상호는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선 병찬을 가장 좋아했다. 같은 선에 두고 누구랑 놀지를 선택한다면 병찬을 선택할 정도로. 그러나 이것이 사랑이냐, 물어보면 그것은 알 수가 없었다.

사랑이라는 건 좀 더 맹목적인 게 아닌가. 병찬을 못 보면 아쉽겠지만 오래 못 보아도 보지 못해서 앓는 일은 없었다. 보면 가슴이 기분 좋게 뛰었지만 그 두근거림은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났다. 병찬이 없으면 죽고 못 살 것 같지도 않았고 병찬이 다른 누구와 웃어도 질투가 나지 않았다. 제게 사랑한다 말하는 병찬을 보면서도 기쁨 따위는 없이 그저 어쩌면 나의 좋아함 역시 사랑이었던 걸까. 의심했을 뿐이다.

이렇게 병찬을 마주하면 알 수 있다. 사랑의 온도라는 것은 저런 거구나. 제 마음보다도 훨씬 뜨겁고 다정한 것을 마주하고 있으면 상호는 점점 실감하게 된다. 어쩌면 나는 병찬햄을 좋아하지만 사랑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장 좋아한다는 것이 반드시 사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니까.

병찬이 자신에게 고백을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기상호는 쉽게 짐작한다. 이런 고민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좋은 형이라고 생각하며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고 싶다고 생각했겠지. 어쩌면 언젠가 프로가 되고 국가대표가 되는 그를 계속 축하하고 싶었을 것이고.

병찬을 옆에 두고 가만히 생각에 잠기던 상호가 고개를 든다. 말 없이 저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병찬과 눈을 마주한다. 우습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조급해지고 체념하는 병찬을 보며 상호는 생각했다. 약속했던 한 달이 지나버린 뒤의 둘의 모습을. 병찬이라면 분명 자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저를 피하거나 거리를 두겠지. 그런데 그렇게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면 그냥 사랑해도 좋지 않을까. 이런 마음은 기만일까. 상호는 과연 이 답이 병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해하며 말한다.

 

"햄."

"응."

"한 번도... 뭔가를 엄청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 햄이 정말 좋은데 아직도 이게 사랑인지는 모르겠어요."

"...응."

"근데 햄이 제게 해주시는 걸 보면... 저도 햄에게 그렇게 해줄 수 있을 것 같고, 이렇게 절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사랑한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이건 햄한테 너무한 말일까요?"

"...그건 날 위해서 한 말이야?"

"아뇨. ...햄을 위해서라면 하지 않았을 말이라고 생각해요.“

 

병찬은 한참을 침묵했고, 이미 해가 기울던 시간에 시작했던 고민은 해가 다 지고서야 끝났다. 병찬은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고 이어 느린 숨을 내쉬며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럼 상호야. 나를 사랑해볼래?“

 

목소리에 좀 더 짙게 어린 체념을 느낀다. 역시 이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을까 생각하면서도 남은 시간 동안 그 마음이 변하는 일은 없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의 조급함이라도 지워주는 게 자신의 최선인 것 같아서 상호는 말해버렸다.

병찬이 고개를 든다. 상호와 눈을 마주했다. 손을 잡았고, 이어 고개를 내민다.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상호는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까지 가까워졌을 때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둘 다 그것 이상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맞붙이고 느릿한 숨을 내쉬었을 뿐이다. 상호가 천천히 눈을 뜬다. 병찬은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마주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가까이 붙어서 보이는 거라곤 그 감은 눈과 곧은 눈썹 밖에 없는데도 상호는 어쩐지 병찬이 어떤 상태인지 알 것 같았다.

엄청 무서워하고 있구나. 병찬이 어째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짐작이 간다. 쉽게 사랑을 시작해버렸다가 결국 저가 나중에 역시 사랑이 아니었다고 해버리면 정말 상처받을 테니까, 그걸 피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그래서 정말 이런 식의 사랑을 할 준비가 되었는지 서투르게나마 확인받고 싶었으리라고 상호는 짐작한다.

상호는 그 모든 것을 짐작하면서도 어떻게 해야할지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지금 앞에 있는 병찬이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해서... 상호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병찬을 끌어안았다. 병찬의 몸이 굳고, 눈을 뜬다. 마주친 눈이 크게 뜨인다. 병찬은 놀란 눈으로 한참이나 시선을 마주하다가 갑자기 제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우는 걸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작게 소리가 새어나온다. ...웃고 있었다.

 

"상호야. 너 지금 얼굴 어떤지 알아?“

 

울음기가 섞였으나 들뜬 것이 분명한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든 병찬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전히 제 두 손은 병찬을 끌어안고 있으니 얼굴을 확인할 수단이 없다. 그때 병찬이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댄다. 여전히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얼굴인데, 우습게도 이마가 맞닿아도 뜨거운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상호는 눈을 끔뻑이며 머리를 굴린다. 제 눈앞에 가득 찬 병찬은 여전히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사람과 이마를 맞댄다면 분명 따뜻해야 할 텐데 미지근한 게 꼭...

같은 온도라는 것 같아서.

 

상호는 뒤늦게 고개를 뒤로 빼고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지려다 제 손바닥은 물론이고 손목까지 붉게 달아오른 것을 확인한다. 그러자마자 열이 몰린 눈두덩이를 깨달았다. 열을 식히려는 몸이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게 만든다. 그런 시선 속에서 웃는 병찬이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행복하게 웃고 있어서 상호는 넋을 놓고 바라본다. 눈에 열이 너무 몰린 탓인지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병찬은 놀란 눈으로 고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여전히 닿는 온도가 뜨겁지 않다.

 

"햄, 저 있잖아요..."

"응."

"아직도 이게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지는 잘 모르겠거든요."

"뭐?"

"몰라요, 사랑이란 걸 해봤어야 알죠... 근데 하나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에휴, 뭔데?"

"햄이 행복하면 너무 좋은데, 그게 나 때문이면 더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제가 햄을 사랑하는 게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거면... 저는 사랑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아요."

"너 지금 무슨 말 하는지는 알고 계속 말하는 거야?"

"잘 모르겠어요... 근데 정말이에요. 아까 햄이 정말 행복하게 웃고 있었거든요. 그걸 볼 수 있으면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이것도 사랑일까요?"

"상호야."

"네."

"아까 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을 거야. 나처럼.“

 

병찬이 다가온다. 상호를 꾹 끌어안았다. 병찬이 상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상호는 얌전히 안겨있다가 병찬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고 둘이 가만히 침묵하면 평소엔 신경 쓰지 않을 때 들리지 않는 소리가 잘 들려온다. 서로의 숨소리, 그리고 심장박동이 뛰는 소리.

병찬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상호의 몸 역시 작게 뛰고 있었다. 열이 오른 몸은 민감하게 몸의 심장박동을 느낀다. 그 소리가 병찬의 소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상호는 그제서야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저를 사랑하는 박병찬. 너무 좋아서 새빨갛게 달아오른 박병찬. 그리고 제게 안긴 상태로 세차게 심장이 뛰는 박병찬.

그리고 그 사람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저 자신.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사랑이겠구나. 본 것은 온전히 병찬의 모습 뿐이었는데 병찬이 보았을 자신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분명 아주 멍청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에 빠진 줄도 모르고 입술 하나 맞댔다고 새빨개져서 멍하게 쳐다보았을 테니까. 그래 놓고 열이 올라 눈물까지 흘렸으니 그 꼴이 과히 웃겼겠지만...

병찬의 상태로 저 자신을 확신했듯이 제 모습을 보고 병찬 역시 확신했을 테니 꽤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상호는 확실한 목소리로 말한다.

 

"형을 사랑할래요."

"그래, 나도 그럴 거야."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1


  • 자신있는 너구리

    하 달다....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