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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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촐한 옥탑방. 누군가에게는 낭만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겠으나 음악 하겠다고 서울로 올라와 이렇다 할 음반은커녕 몸 제대로 담을 밴드 하나 없는 기상호에게 이곳은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기 위해 몸을 뉘는 공간, 그 정도였다. 이곳에 누워 언젠가는 이 의미 없는 것을 끝낼 수 있기를 빌던 굴레를 끊어준 것은, 당장 제 앞에 편한 자세로 늘어지게 앉은 단 한 명의 관객 덕이었다. 자유롭게 퍼질러진 다리, 이 좁은 방 안에서 그 큰 몸 구겨져 앉아줄 생각은 없이 상체를 뒤로 젖혀 앉은 탓에 안 그래도 좁은 방의 3분의 1은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기상호는 그에게 싫은 소리 하나 하지 못했다. 그저 담담하게 몇 번이고 바닥에 내리치거나 당x으로 후딱 팔아버리고 외면해버릴까 고민했던 베이스를 들고 가만히 손을 풀었을 뿐이다. 긴장으로 입술을 자근자근 물고 있으면 시선이 닿는다. 상호야. 퍽 부드럽게 부르는 목소리에 네에. 순하게 답하면 무심한 손길이 상호의 다리를 툭툭 친다.

 

"내가 그러지 말랬잖아. 꼴 보기 싫다고."

"네에... 죄송해요."

"됐고, 얼른 해봐.“

 

시키는대로 현을 손가락으로 누른다. 몇 번이고 사용하여 손에 딱 맞는 낡아빠진 기타 피크를 만지작거리다가 천천히 손을 움직인다. 드럼도 없고 일렉도 없고, 그럼에도 베이스는 묵직하게 좁은 옥탑방 안을 채운다. 어디에 들려줄 만큼 자신 있는 노래 실력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듣는 사람이 있으니 입을 연다. 몇 번이고 풀었던 것이 무색하게 종종 삑사리가 나고 늘어지긴 해도 제 앞의 관객은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아서. 서툴게나마 한 곡 끝나면 채근하는 기색도 없이 방바닥에 늘어지게 누워 뺏어간 베개에 머리를 기댄다. 불량한 자세임에도 눈은 여전히 저를 쳐다보고 있으니 그것으로 만족해버리고, 상호는 다음 곡을 연주하기 위해 머리 속으로 악보를 떠올렸다.

그의 만족은 언제나 때가 달라서 어떨 때는 한 곡만 듣고 만족하기도 했고 어떨 때는 밤 내내 불러야 만족하기도 했다. 오늘은 다행히 12시가 넘지 않고 끝낼 수 있었다. 거치대에 조심스럽게 베이스를 내려놓으면 이미 침대를 반쯤 차지한 몸이 보인다. 이 방에 넣으려면 넓은 매트리스는 무조건 아웃인지라 겨우 들인 것은 상호 혼자 누워도 거의 꽉 차는데 그가 누워버리면 정말이지, 상호가 밑에서 자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상호는 딱히 불만 없이 익숙하게 매트리스 밑에 자리를 잡는다. 그나마 조금 양심이 있다면 이불 정도는 상호에게 양보해주고 본인은 입고 온 커다란 허연 옷을 이불 삼아 잔다는 것 정도일까. 오늘은 웬 변덕인지 베개까지 바닥에 떨궈놨길래 상호는 얌전히 그것을 제 머리 밑에 넣고 그 쪽으로 몸을 돌린다. 예민한 사람이라 안 자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미동 없이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상호는 그의 묵인 아래 그를 가만히 지켜본다. 그러다 보면 잠이 왔다. 이제 밤마다 제 머리를 좀먹던 우울한 생각들은 이제 그를 관찰하는 동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내일도 와주겠지? 그리 바라면서 상호는 가물거리는 눈을 감았다.

 


 

그와의 만남은 솔직히 좀 기상천외했다. 언제나처럼 과제를 해치우고 아르바이트를 가고. 그래도 그날은 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베이스가 너무 안 구해져서 기상호한테까지 연락이 닿았거든. 그럴 만도 했다. 별거 아닌 밴드, 별거 아닌 공연장, 특히 거기 보컬이 소문이 안 좋았다. 듣기론 약팔이라던가. 원래라면 기상호도 거절했겠으나 그때의 기상호에겐 관객이 절실했다. 내가 계속 음악을 해도 되나. 이렇게 살아도 되나. 그런 생각을 하던 때라.

그래서 수락했다. 같이 연습하면서도 게으른 티가 났지만 기상호는 열심히 연습했다. 매일 하는 희망 회로를 돌렸다. 나 혼자 열심히 하면 그래도 나중에는 좀 더 괜찮은 밴드에서 땜빵으로라도 불러주지 않을까. 누군가는 나를 봐주지 않을까.

 

글쎄. 기상호는 그날이 행운이었는지 불운이었는지 한동안 가늠하지 못했다. 얼마 없는 관객들 앞에서 열심히 연주하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렸고 그 손님이 주저 없이 무대까지 걸어오자 보컬 놈이 비명을 지르며 무대 뒤로 도망갔다. 기상호는 놀란 와중에도 손을 안 멈췄지만 그건 기상호랑 신디 뿐이었다. 보컬이 도망가자 일렉은 멍때리기 시작했고 드럼은 같이 놀라서 튀어 나갔다. 신디는 음정 똑바로 치느라 바빠서 그 난장판을 몰랐다.

손님과 같이 들어온 손님들이 무대 위에 난입했고 제 옆을 아슬아슬하게 비껴지나가는 어깨들을 보면서 기상호는 생각했다. 아 씨발, 보컬 놈 약팔이 소문이 진짜였나 본데. 밴드 계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지만 가끔 소문은 들려왔다. 약팔이 새끼들이 팔다가 경쟁 업체들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고. 경쟁 업체란? 조폭 새끼들 말하는 거다. 듣기로는 약팔이 놈들 잡아 족치는 것도 뭔 큰 뜻은 없고 자기 구역에서 작작 깝치라는 경고 같은 거라고 들었다.

그래도 기상호는 계속 연주했다. 별 큰 뜻이 있는 건 아니었고 자기는 이 밴드랑 별로 큰 인연 없거든. 경찰도 약팔이 새끼들이나 좀 참작해주지 일반인 건들면 모른 척 하기 힘들다. 어차피 망한 공연, 연습했던 건 다 해야 안 억울할 것 같아서 마저 연주했다. 그래봤자 아직도 상황 눈치 못 챌 만큼 애쓰는 신디 뿐이라서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아, 곧 보컬이 치고 들어와야 하는데. 상호는 빈 보컬의 자리를 보다가 마이크 쪽으로 걸어갔다. 선이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연습하기 위해 몇 번이고 들었던 가사는 진작에 외운 지 오래다. 원래 있던 관객들은 난장판의 기운이 느껴지자마자 도망갔다. 있는 거라곤 가장 앞장서서 들어왔던 남자 한 명 뿐이다.

그래서 기상호는 불렀다. 한 명 밖에 없고 아마 그 한 명은 음악에는 관심도 없을 것 같은 깡패라서 불렀다. 거진 악에 받친 거였다. 원망도 좀 담겨있었다. 쳐들어올 거면 끝나고 시시덕거리는 새끼 잡아가지 그랬냐 하는. 그런 마음 담아서 하나 밖에 없는 관객 노려보며 불렀다. 그 남자는 시선을 안 피했고 기상호도 안 피했다.

결국 연주가 끝나고 그제서야 한숨 돌리려다 상황 파악한 신디 역시 튀어 나간다. 아니, 나가려고 했다. 곧 보컬과 드럼 업어매고 어깨들이 돌아왔다. 멍때리는 일렉은 내버려 두고, 밑에 있던 남자가 신디를 가리키니 그 새끼도 업어매졌다. 기상호는 그거 멍하게 보다가 제가 챙겨온 베이스 정리했다.

그러고 있는데 인기척이 다가와서 고개를 들었다. 무쌍의 무감한 눈매. 시꺼멓게 그을린 눈동자. 헐렁한 티셔츠 위로도 굴곡이 보이는 각진 몸매. 껄렁하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었는데 그게 불량하면서도 태가 나는 남자. 그런 와중에 머리카락은 가늘어 목덜미를 살짝 타고 흘러내리는데 조명을 등져서 그런가, 눈이 부셔서 손을 들어 가리자 그가 웃었다.

 

"야, 너 이름 뭐야?"

"...저는 약 안 팔았는데요..."

"이 새끼 웃긴 새끼네. 이름 뭐냐니까?"

"말 해야 해요...?“

 

그러니까 머리 한 대 친다. 그래. 법보다 빠른 게 주먹이라고 한 대 맞아보니 견적이 나와서 기상호는 얌전히 묻는 대로 제 신상정보 줄줄 외웠다. 끝내 제 번호까지 강탈하고-전화까지 거는 걸 보고 이거까지 구라쳤으면 한 대 더 맞았겠거니 했다-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사람 올려다보며 기상호는 인생이 참 다채롭게도 꼬이는구나. 순수하게 감탄했다.

근데 예상했던 거랑은 달랐다. 그날 얌전히 돌아간다 했더니 기상호한테 전화해서 너 어디까지 나와보라고 했다. 들어보니 아는 곳이었다. 그 때 그 공연장이었다. 근데 거긴 오늘 쉬는 날인데... 기상호는 알쏭달쏭하면서도 나갔다. 베이스 들고 오라는 말에 파랑이(베이스 애칭이었다)까지 챙겨서. 가보니까 무대에 걸터앉은 남자가 보였다. 왔냐? 묻는 게 퍽 친근한 꼴이어서 기상호는 그냥 네에 얌전히 답했다. 그러고선 냅다 무대에 올라가라는 게 아닌가. 기상호는 그 의중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지만 이제 와서 무섭다고 튈 깡도 없어서 얌전히 무대 위로 올라갔다. 앰프 연결하고 현 좀 조정하고. 그러는 거 가만히 지켜보더니 엉덩이 떼고 관객석에 털썩 앉더라.

그래, 행운인지 불운인지 모르겠는 것은 이 지점이다. 베이스 들고 오라고 할 때부터 짐작은 했다. 무대 위로 올라가라고 할 때는 확신마저 들었다. 그리고 관객석에 앉는 것을 보며 기상호는 생각했다. 왜 내 연주를 또 듣고 싶어하지? 솔직히 객관적으로 기상호는 베이스 실력 하나는 나쁘지 않았다. 근데 굳이 저를 불러서 듣고 싶을 만큼 잘하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냥 깡패 놀이하다가 심심해서 잡아 온 광대 역할인가?

기상호는 길게 생각하면서도 그냥 코드를 짚었다. 음악 하는 사람이 그렇다. 특히나 남에게 인정받는 것에 목마른 사람들은 더 그랬다. 누군가 자기 연주 듣고 싶어 하면 못 참았다. 들려주고 싶어 했다. 그게 깡패든 뭐든 아무래도 좋았다. 앉아서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사람이기만 하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서 기상호는 마이크가 되는지까지 확인하고 코드를 울렸다. 노래는 단 한 번도 자신 있었던 적이 없지만 그래도 불렀다. 이번엔 악에 받쳐 부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정성을 다해 불렀다.

 

한 곡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쳐주는 그는 꽤 좋은 관객이었다. 연주를 하는 내내 딴짓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기상호와 눈을 마주해주었다. 기상호는 고양감을 느끼며 당장 생각나는 곡은 다 쳤고 더 이상 쥐어짤 것도 없다 싶을 때 손을 내렸다. 내리 부른 시간이 길었다. 공연장 옆에 붙은 시간을 보니 거진 1시간 동안 혼자 불렀다. 다리가 풀려 무대 위에서 냅다 주저앉아버렸더니 그가 웃으면서 다가왔다.

 

"상호야."

"네..."

"너 노래 별로다.“

 

그리고선 대뜸, 그렇게 말하는 것에 상호는 당황했다. 뭐고... 얌전히 들어주길래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네가 치는 거 뭐라고 하지?"

"베이스요?"

"아아~ 그래. 그건 들어줄 만 하다."

그 말에 기상호 심장이 쿵쿵 뛴다.

"저 베이스 쫌 하는 거 같아요?"

"잘 치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마음에 드네. 그 남자가 단 번에 기상호의 마음속으로 폴인럽 하는 순간이었다. 기상호가 원래 이렇게까지 단순한 놈은 아니었는데 그런 인정에 목마른 상태였던지라 한 방에 녹다운 되었다. 기상호는 어느새 헤실헤실 풀린 얼굴로 그제서야 묻는다.

 

"형은 이름이 뭐예요?"

"형?"

"네... 형 아니에요? 동갑으론 안 보여가..."

"뭐... 너 몇 살인데."

"이제 스물하나요."

"형이긴 하네... 근데 너 내 이름 몰라?"

"안 가르쳐주셨잖아요?"

"허 참... 어제 그 꼴을 냈는데 내 이름을 못 들었어?"

"유명해요?"

"뭐... 글쎄. 잘 듣고 남한테 물어봐. 형아 이름은 박병찬이야."

 


 

그 뒤로 그는 줄기차게 상호를 불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상외로 그렇게 안하무인이진 않아서 기상호가 알바를 하거나 과제를 하고 있다고 잉잉 대면 알았다고 봐줬다. 과제도 알바도 없는 날엔 기상호를 불러내서 베이스 연주하는 걸 봤다. 항상 부른 건 아니고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그래서 기상호는 자기 시간표랑 알바 시간을 알려줬다. 어쩌다 보니 자기 집도 깠다. 박병찬이 경우 없는 깡패는 아니라 쉬는 날의 공연장만 빌렸는데 그러니까 종종 아주 멀리까지 나가야 했거든. 너무 피곤해서 집에서 들려주면 안 되겠냐 하니 얌전히 와줬다.

집 알려주니까 자주 놀러 왔다. 가끔은 그냥 상호가 연습하는 걸 봤고 자주 노래까지 곁들여서 자신만의 작은 공연을 해달라고 했다. 원래 알바하고 나면 피곤해서 연습은 커녕 손질도 못 해줬는데 박병찬 때문에 상호는 과제 하느라 아예 집에 못 간 거 아니면 항상 베이스를 연습했다. 여전히 상호는 노래를 그리 잘하진 못했다. 그래도 박병찬은 항상 들어줬다. 그래서 상호는 졸지에 노래 연습도 조금씩 하기 시작했다. 옥탑방이라 다행이었다.

사람이 재능이 없어도 노력을 하면 어느 정도 커버가 된다. 특히 상호는 바로는 티가 안 나도 착실히 쌓이는 타입이었다. 연습하면 연습할수록 좀 더 어려운 기교도 할 줄 알게 되었고 못 들어주겠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던 노래 실력은 이제 어디 가서 부르면 코러스 정도는 맡겨줄 정도가 되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상호의 실력 증진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그냥, 누군가 들어주는 사람이 생기니까 자신감이 붙은 게 원인이다. 사교성 없는 성격 최대한 누르고 밝은 척 하면서 밴드맨들 사이에 좀 끼어보고, 자기 PR도 좀 하고. 원래 가만히 있는데도 누구나 러브콜을 날리는 천재는 많지 않다. 알아서 자길 팔아야 했다. 자신감 없는 상호는 그걸 못했고, 자신감 생긴 상호는 했다.

그가 어떻게든 자기를 팔아넘기려고 노력했던 것엔 당연히 박병찬, 그가 한몫했다. 상호가 자기 자신을 팔기 시작한 것도 다 박병찬 때문이었다. 언제나처럼 가만히 노래 들어주던 병찬이 한 마디 했거든.

 

"넌 이제 공연 안 해?"

"불러주는 데가 있어야 하죠."

"없어?"

"뭐... 저는 딱히 실력도 없고..."

"야, 그럼 네 노래 듣겠다고 이 구더기 같은 방까지 온 내가 뭐가 되냐.“

 

그럼 그 구더기 같은 방에 사는 저는 뭐가 돼요. 그렇게 대거리를 하지 않은 것은 저도 모르게 씰룩거리는 입꼬리 탓이었다. 병찬은 돌려 말하는 법을 몰랐다. 거지 같은 건 거지 같다고 했고 좋은 건 좋다고 했다. 그런 사람이 제 연주가 맘에 든다고 한다. 상호는 그 말 한 마디에 모든 경계와 삐죽임이 살살 녹았다.

 

"그러믄 공연에 껴달라고 해보까요."

"어. 공연 하면 보러 갈 테니까 꼭 불러라?“

 

상호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봤자 씰룩이는 입꼬리가 다 보였지만 병찬은 그냥 으하하 호쾌하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여전히 병찬은 돌려 말하지 않고 사실만 말했다. 상호가 여기서 공연한다고 하면 찾아와서 구경했다. 맨날 괴상한 특공복? 같은 거나 입고 다니면서 상호의 공연을 보러 올 때는 좀 멀끔한 옷을 입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못 알아봤다. 연주하는데 뭔가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관객석 한참 힐끔대다가 뚫어져라 자기만 쳐다보는 덕에 겨우 알았다. 나중에 공연 끝나고 웬일로 멀쩡한 옷 입었냐고 물었더니 평소 입는 옷 입고 가면 그 순간 공연 내려야 한다고 해서 수긍했다.

박병찬. 그 바닥에서 유명했다. 정확히는 그 지역에서 유명했다. 어디 행동대장이라는데 일반인들도 이름을 알 정도면 안 유명하기 힘들다. 일반인한테 유명한 이유는 그 예쁘장한 얼굴 때문인 것 같지만... 어쨌든 정체를 아니까 사람들은 알아서 피해 다녔다. 기상호는 여기 오고 인연을 안 만들어서 몰랐고. 근데 몰라서 다행이다 싶었다. 상호 성격에 알았으면 박병찬인 거 알자마자 튀다가 얼떨결에 같이 업어매졌을거다. 아닌가. 그때는 좀 세상을 저주했기에 또 모를 일이긴 한데... 하여튼.

뭐가 됐던 박병찬은 꾸준히 기상호의 연주를 들으러 와줬다. 기상호는 이제 무대 위에 설 때마다 자신의 1호 팬을 찾았다. 단 한 번도 팬이라고 지칭하진 않았으나 그럼에도 제 연주를 듣고 싶다고 찾아와주면 팬이지. 기상호는 당당하게 생각하며 무대 뒤에서 가만히 저를 응시하는 박병찬의 눈을 마주했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차근차근 입소문 타면 들어오는 건 밴드 제의다. 원래 베이스가 수요 좋기도 하다. 기상호가 이제까지 제의를 못 받은 것은 실상 그의 무뚝뚝해 보일 만큼 소극적 태도 때문이었다. 체격도 크고 눈도 날카로운 주제에 입까지 꾹꾹 다물면 웬만한 사람들은 좀 무섭지. 근데 기상호가 먼저 다가가니까 실력 괜찮은 베이스를 찾아 헤매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객원 멤버로 초청했고 그러다가 아예 같이 밴드 하자는 사람들이 생겼다. 불러만 주면 감지덕지했는데 이제 기상호는 밴드를 고를 수 있었다. 고르고 골라서 좋은 곳에 들어갔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낯가리는 상호는 그중에서도 성격 괜찮은 밴드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연습을 그들의 연습실에서 했다. 오늘은 집에 있냐는 병찬의 연락에 연습 중이라는 답변을 하는 날이 늘어갔다. 상호는 솔직히 이러고 살면 병찬이 뭔가 일을 저지를 것 같았는데 병찬은 조용했다. 워낙 멋대로인 사람이니까 뭘 할지 예상도 안 갔는데. 상호는 안심하면서도 어쩐지 한 구석이 좀 적적했다. 그러다 자기 자신에게 놀랐다. 아니 뭐 얌전히 있어 주면 땡큐 아닌가.

그래서 그냥 상호는 열심히 연습했다. 그러고 그 밴드가 공연 잡혔을 때 좀 고민하다가 병찬에게 연락했다. 저 언제 몇 시에 공연하는데 보러 오실래요. 병찬은 답변 안 했다. 원래 그래서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아니 신경 썼다. 올까? 무대 올라가는 내내 그걸 의심했는데 올라가자마자 시선 느껴지고 마주하는 검은 눈 보이면 상호는 어쩐지 다리가 풀릴 것 같았다. 박병찬이 왔다. 언제나처럼 평범한 사람 같은 옷 입고 있었다.

기상호를 잡아먹던 불안감이 한 순간에 날아간다. 기상호는 히죽 웃으면서 코드를 짚을 준비를 한다. 드럼이 박자를 탄다. 동시에 기상호의 심장도 쿵쿵 뛴다. 박병찬의 시선은 언제나 기상호를 향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흔들리던 자신감이 충만해진다. 박병찬은 돌려 말할 줄을 모른다. 박병찬은 기상호의 베이스를 좋아했다. 기상호는 이제 그 사랑에 보답할 줄 아는 이였다. 그에게 알려줘야 했다. 당신에게 들려주지 못한 만큼 이 순간을 위해 노력했음을. 지난 무대들의 연습은 대부분 박병찬이 함께 했다. 들어주는 사람이 박병찬 밖에 없었거든. 물론 객원 멤버라도 합주 연습은 해봐야 하니까 종종 같이 연습했지만 그거야 다들 시간 맞아야 되는 거고. 제 1호 팬에게 자신이 이만큼이나 성장했음을 증명할 시간이었다. 기상호가 손을 움직였다.

 

공연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앞에 선 프론트맨은 준수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시선 끄는 매력이 출중했다. 여유로워서 가끔 혼자 템포가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이들에게 신호를 줄 줄도 알았다. 기상호는 그의 리드에 따라 연주했다. 적당한 환호를 받고 무대에서 내려온다. 다들 뒤풀이라도 같이 하겠냐며 웃는 것에 기상호는 제 베이스를 챙겨 일어난다. 연습 때는 같이 못하더라도 항상 하는 일이 있었다. 양해를 구하고 나오면 익숙하게 뒷문 근처에서 박병찬이 담배 피우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상호가 다가가자 박병찬이 씩 웃는다.

둘은 천천히 걸었다. 상호는 항상 공연을 하고 나면 연주를 보러 온 병찬과 함께 걸었다. 그렇게 상호가 지내는 옥탑방에 가면 상호는 그날 연주했던 곡을 들려줬다. 베이스와 상호의 목소리 밖에 없는 연주. 베이스라인이 도드라지지 않는 곡이어도 병찬은 그렇게 들려주는 걸 좋아했다. 상호는 익숙하게 앰프를 연결한다. 코러스나 짧은 가사만 부르다가 전곡을 다 부르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지만 그것도 이제 아무렇지 않게 해낼 수 있었다.

그렇게 모든 걸 듣고나면 병찬은 잘 들었다고 한 마디 해줬는데, 어쩐지 이번에는 그 말을 안 해줘서 상호는 슬쩍 눈치를 본다. 병찬은 한참 말 없이 있다가 답지 않게 입을 우물거렸다. 상호는 베이스를 정리하고 다시 병찬의 맞은 편에 앉았다. 병찬이 널브러지듯 앉으면 자리가 좁아서 상호는 항상 무릎을 모아 앉았다. 최대한 몸을 구겼다는 뜻이다. 병찬은 그런 상호를 보다가 말했다.

 

"상호야, 즐거워?"

"네? 네... 즐거워요."

"...너 걔들 앞에서도 이렇게 베이스 치면서 노래 불러줬어?"

"어... 실력 테스트 할 땐 그랬죠?“

 

병찬의 안색이 더 안 좋아진다. 아하. 박병찬이 말을 꺼낸 의도를 파악한 기상호가 손을 들어 제 입을 가린다. 병찬은 아직 생각에 잠겨서 상호가 뭐 하는지 몰랐다. 여전히 병찬은 말을 돌려할 줄 몰랐다.

 

"남한테 그러지 마."

"뭘요?"

"베이스 치면서 노래 부르는 거."

"밴드 하지 말라고요?"

"아니... 나한테 하는 것처럼 해주지 말라고."

"왜요?"

"...너 못 들어줄 실력일 땐 내가 들어줬는데 들어줄 만해 지니까 남한테 불러주는 거 좀 치사하지 않냐?“

 

박병찬은 꼭 저만 아는 인디밴드가 남에게 유명해진 꼴을 본 힙스터처럼 말했다. 그래봤자 상호는 인디밴드조차도 아니었고 유명해졌다기엔 아직도 이름값이 한참 부족한데 그랬다. 기상호는 실실 웃는다. 그제서야 웃는 꼴 확인한 병찬이 얼굴을 찌푸린다. 주먹을 꽉 쥐길래 아 때리나? 싶었는데 곧 풀었다. 한숨 쉬는 것이 한 번 봐준 모양이라 기상호는 혀를 이로 꾹 눌렀다.

뒤늦게 쪽팔림이 몰려왔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거 보다가 슬쩍 손을 잡아본다. 멀쩡한 옷 입고 있으면 종종 잊는다. 뼈마디가 툭툭 불거지고 굳은 살 배긴 손에는 흉터도 있다. 손바닥을 쓸어보면 칼에 베인 흉터도 있었다. 병찬이 뭐냐는 듯 내려다보는 것에 기상호는 가만히 올려다보며 말한다.

 

"오늘은 안 자고 가시는 거예요?“

 

기상호도 서울 살면서 말투가 좀 죽었다. 근데 박병찬은 기상호가 부산 말씨 팍팍 섞어 쓰면 좀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귀여워했다. 원래 그런 건 기분 나빠야 하는데 박병찬이 그러는 건 기분이 안 나빠서 부러 의식해서 말했다. 박병찬은 그러는 기상호 뻔히 알면서 귀엽다고 넘어가 줬다. 나름의 애교인 걸 알았거든.

픽 웃고선 좁아터진 매트리스에 누워버리는 거 보고 기상호는 슬쩍 그 옆에 누워본다. 하도 좁아서 몸이 다 나갔다. 박병찬은 그 꼴 보고 좁다고 하면서도 밀어버리지 않고 좀 더 벽에 붙여서 자리를 만들어줬다. 기상호는 그러게요. 여상한 말투로 대답하며 은근슬쩍 더 붙어서 품에 파고들었다.

기상호가 자신의 1호 팬에게 무르듯이 박병찬도 자신의 스타에겐 물렀다. 그 사실이 기상호를 더욱 무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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