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뱅

연애의 갈등과 해소

상호병찬

페일 펜슬 by 페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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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익- 끼익- 소리를 내며 그네가 비명을 지른다. 그야 190cm를 넘고 그에 맞춰 90대 중반의 무게를 버티길 상정하지 않은 놀이기구이니 당연할 수도. 하지만 그네를 비명 지르게 만든 장본인인 기상호는 아무래도 상관 없는 얼굴로 플라스틱 고무가 씌워진 쇠사슬을 잡고 다리를 느릿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밤 12시 21분. 왜 이 시간에 원래라면 진작에 자야 했을 운동선수가 기어 나와서 처량하게 이러고 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애인하고 싸웠다. 그것도 사귄 지 2년하고도 2개월 8일 만에. 2년이나 안 싸우다니 어지간히 잘 맞았나보다 싶었겠지만 기상호는 이제 왜 둘이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안 싸웠는지를 알고 있다.

 

시작은 좋았다. 시작은. 4년 간의 기나긴 미자 생활을 청산한 기상호는 앞뒤 재지 않고 박병찬에게 고백했다. 혹시나 이 사람이 자길 안 좋아하면 어쩌지. 라는 걱정은 안 했다. 4년 동안 기상호는 박병찬을 계속해서 들여다보고 해석하고 이해하고자 노력했고 처음은 떨떠름해 하며 거리를 두던 박병찬도 기저에 깔린 애정을 받아들인 뒤에는 나름 자기 자신을 내보이곤 했으니까.

박병찬 같은 이가 자신의 속을 내보인다는 건 무슨 뜻인가? 과장된 비유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에둘러 보여준 허락에 가까웠다고, 기상호는 생각한다. 특히나 박병찬과 기상호의 나이 차, 그리고 기상호가 미자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한낱 어린애로 치부할 수도 있었을 기상호에게 제 여린 속을 꺼내어 보였다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을 테니까. 그 덕에 기상호는 이제 박병찬이 어느 날에 기분이 나쁜지, 어느 날에 컨디션이 안 좋은지, 다니는 재활병원은 어딘지, 의외로 먹을 거에 관심이 없으면서 그 와중에 쓴 것은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도 모두 알았다.

그 와중에도 그가 여전히 대단해 보였던 점은 기상호에게 제 속을 보여주면서도 박병찬이 여전히 어른스러웠다는 것에 있다. 박병찬은 우울할 법한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부드럽게 웃을 수 있었고 가끔 힘이 들 때면 기상호에게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로만 기댈 줄 알았다. 그 뿐인가. 어쨌든 쌓인 경험치가 달라서 그런지 기상호가 그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올 때도, 그가 기상호를 만나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올 때도 언제나 어른스러운 면모를 보였다. 박병찬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며 부드럽게 이끌었고 그러면서도 선을 지키고, 자연스럽게 이끌어주는...

 

너무나도 안정된 호감. 솔직히 나이 차이만 아니었더라면 바로 사귀었을 단계. 그 시간을 대략 2년 정도 지낸 뒤 기상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박병찬에게 고백했고 박병찬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재지 않고 그 고백을 받아주었다.

그렇게 사귄 뒤, 기상호는 안 그래 보이면서 현실주의자라 아무리 형이 어른스러워도 자신에게 불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한 자신이 애가 아니라고 주장하든 말든 애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로 인한 차이로 싸울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당연하지! 사람이란 원래 그런 족속이다. 그 누구도 완벽히 들어맞을 수는 없다. 다들 그냥 안 맞는 부분을 깎아내거나 비틀어서 어떻게든 불편하지 않게 맞춰나가는 거지.

그래서? 기상호는 언젠가 싸우게 될 날에 대해 각오를 했다. 하지만 둘은 싸우지 않았다. 둘이 정말 천생연분이라서 A부터 Z까지, 1부터 100까지 다 맞는 사이여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박병찬이 너무 어른스럽고 자기는 그 햄이 너무 좋으니까 어찌어찌 잘 맞는가보다 했다.

 


 

시작은 기상호의 갑작스러운 깨달음으로 시작한다. 싸우지는 않았으나 미묘한 갈등은 있었다. 근데 그 갈등이 죄다 기상호의 불만이었다. 가장 처음의 갈등은 박병찬의 술자리였다. 다른 사람 쳐내는 건 잘하는 성격이면서도 한 편으론 친한 사람에게 은근히 무른 구석이 있는 박병찬은 가끔 너무 친한 사람들 사이에선 폭주할 때가 있었다. 조형고 농구부끼리 오랜만에 만난다길래 조심하라고 했더니 전화로 '여기 병찬형 뻗었는데...'로 시작하는 연락을 받았을 때는 좀 생각이 많았다. 신나실 수 있죠. 근데 좀? 조심을 해야 하지 않을까? 요즘 세상이 얼마나 흉흉한데. 어? 미래의 농구 스타가 몸을 이렇게 써도 될까? 기상호는 아니라고 봤다.

그래서 기상호는 박병찬을 자기 자취방에 데려왔고 일어난 병찬에게 씻으라고 하고 콩나물국도 든든히 먹여둔 다음 누가 봐도 상황 파악이 끝난 것 같은 박병찬의 맞은 편에 앉아 진지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아니, 꺼내려고 했다.

 

"병찬햄. 저랑 이야기 좀 해요.“

 

기상호는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원래 사람이 진지한 이야기를 하면 좀 목소리가 깔리지 않나. 근데 병찬은 눈치를 보더니 벌떡 일어나서 상호의 옆에 앉더니 그대로 상호를 끌어안으면서 필살 애교를 부렸다.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적거리고 볼에 뽀뽀를 해댔다는 거다.

병찬이 어른스럽게 굴긴 했지만 애교에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다. 정확히는 기상호가 그럴 때마다 너무 좋아하니까 가끔 놀리기 위해서나 기분이 좋을 때면 애교를 부려줬다. 애교를 부리는 것에도 네가 좋으면 해주지 뭐. 라는 태도가 배어 나왔으니 가히 상남자의 기개라고 할 수 있겠다. 근데 그 애교를 이야기 좀 하자는 것에 부리니 기상호는?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그에 멈추지 않고 병찬은 계속 부비적거리면서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상호야아~ 형이 미안해. 너도 알잖아, 애들이랑 오랜만에 만나서... 다신 안 그럴게. 응? 형아 한 번만 봐주라. 형아가 약속한 건 지키는 거 알잖아~"

"예, 예...“

 

다시 말하지만 화난 게 아니라 걱정이었고? 듣고 싶은 말도 안 그러겠다는 말인데다가 결과적으로 딱히 바라지 않았던 박병찬의 애교도 잔뜩 받은 기상호는 아무래도 좋아져서 그날은 적당히 분위기 좋게 넘어갔다.

 

두 번째는 뭐였나. 어디 가서 자랑할 만큼은 아니지만 기상호는 종종 번호 따임을 당했다. 뭐 그중에 반절은 도쟁이, 사이비, 각종 설문조사였긴 했지만? 가끔은 정말 호감을 가진 번호 따기가 있었다. 그날은 좀 끈질긴 사람이었다. 애인이 있다고 해도 연락만 하면 안 될까요, 나중에라도 기회를 주시면 안 될까요...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이 그렇겠지만 기상호 역시도 자기보다 피지컬이 한참 모자란 사람에게는 막대하기 힘들었고 붙잡힌 팔을 쳐내는 것도 조심스러워서 뻘뻘 대다가 결국 성격 좋은 병찬이 와서 애인임을 밝힌 뒤에야 떨어트릴 수 있었다.

그걸로 끝내면 좋았을 텐데, 그러고 난 뒤 기민한 상호는 알아챘다. 병찬의 기분이 굉장히 저조하다는 것을. 기분이 나쁘셨냐 물으니 아니라고 하는데 같이 다니면서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기상호는 뭐, 본인들이 자주 못 만나는 사이도 아니고 이렇게 기분 나쁜 상태로 만남을 이어가는 것보다야 좋은 기분으로 마주하고 싶었으며 자신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걸 또 억지로 파내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정말 아무렇지 않게

"오늘 그냥 헤어지고 다음에 만나요."

라고 말했다. 근데 박병찬은 그 소리를 듣더니 화들짝 놀란 얼굴로 아니라며 몇 번이고 거절하더니 남은 시간 내내 텐션을 올리며 떠들었다. 그런 성격 아니면서도. 너무 즐겁다는 듯이. 기상호는 이때 처음으로 박병찬에게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박병찬이... 어째 제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그 이후 숱한 미묘한 갈등, 주로 기상호가 무언가 의견이나 의문, 불만, 혹은... 아주 가끔 화를 내면 박병찬이 사과하거나 애교를 부리거나 혹은 적당히 무마시키며 일단락되는 그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기상호는 생각했다.

병찬햄... 이유는 모르겠는데 내가 기분이 안 좋아 보이거나 하여튼 그렇다고 생각하면 냅다 애교로 무마시킨다. 물론 애교를 부리는 박병찬은 귀엽다. 솔직히 진짜 화가 나도 박병찬이 저자세로 나오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하면 화가 풀리는 것도 사실이다. 근데 기상호도 머리 식고 생각해보면 박병찬이 그렇게 저자세로 나올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다.

개중에는 그냥 가치관 차이였던 것도 있었고 나중에 사정 들어보면 오해인 것도 있었으며 어찌 보면 기상호가 그냥 넘어갈 만한 일인 것도 있었다. 박병찬이 그걸 몰랐을까? 그럴 리가. 박병찬은 눈치가 기상호만큼 빨랐으며 기상호만큼의 관찰력은 없었어도 상황 파악과 대처 능력은 기상호보다도 좋았다. 이건 콩깍지가 아니라 진실이었고 종종 친구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근데 왜 병찬햄은 갈등이 일어날라치면 피하지? 진지한 이야기를 못 하는 건 아니다. 여전히 둘은 속 얘기를 꺼내는 걸 꺼리지 않았다. 박병찬은 종종 찾아오는 우울함에 기상호가 보고 싶다며 어리광을 부렸고 기상호 역시 가끔 너무 힘들 때는 훌쩍거리며 박병찬에게 제 속을 털어내기도 했다. 그럴 때 둘은 상대방의 자취방에 찾아가서 옆을 데워주며 서로를 위로할 줄 알았다.

박병찬의 회피는 오롯이 서로와의 갈등에서만 일어났다. 기상호는 이 부분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

 


 

기상호는 다시금 다리를 뻗어 그네를 움직인다. 그네는 거의 0.1톤을 버텨내며 삐그덕거렸다.

솔직히 다짜고짜 병찬에게 왜 저랑 싸우기 싫어하세요? 라고 물어봤자 이제까지의 행동을 보면 바로 순순히 인정할 것 같지 않아서 기상호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그런 적 없다고 말할 때 구구절절 사례를 꺼내봤자 따지기 밖에 더 하나. 기상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외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기어코 사건이 터졌다.

 

기상호는 박병찬이 처음으로 사귄 연인이었으나 박병찬은 아니었다. 기상호가 박병찬을 열렬히 들여다보고자 했을 때도 그 마음을 받아주기 전까진 사귀던 연인들이 있었다. 기상호도 그들이 누군지는 몰라도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기상호는 딱히 전 애인들을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닌지라 그에 대해 화제를 올린 적도 없었다.

근데 언제나처럼 박병찬의 집을 적당히 청소해주는데 구석 상자를 발견하고 이게 뭐지 하고 열어보니 전 애인과 주고받은 편지가 있더라고. 알콩달콩한 편지를 보며 기상호는?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 안에 담긴 사랑의 말이 정말 부러울 정도로 달콤했거든. 아니 뭐, 기상호라고 전 애인과의 연애를 굳이 들쑤시고 싶진 않았다. 당연하지. 기상호도 사람이라 그런 거 보면 좀 싱숭생숭해진다. 그 사랑의 산물을 이렇게 마주하고 나니 기분이 좀 아리까리하더라. 화는 안 났다. 병찬햄 성격상 그냥 남의 마음이라 버리기 그래서 모아뒀다가 까맣게 잊은 게 뻔해서. 실제로도 상자 위에는 먼지가 한가득 쌓여있었다. 그래도 뭐, 제 애인이 누군가에게 주었을 마음조차 질투 나는 건 어쩔 수 없지 않나. 기상호는 입술을 질근질근 물다가 어쨌든 현재 애인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복기하며 편지를 다시 집어넣으려고 했다.

 

문제는 그런 기상호를 씻고 나온 박병찬이 마주하면서 일어났다. 기상호가 박병찬의 집을 정리해주는 게 한두 번이 아닌데다 딱히 숨기는 것도 없었던 박병찬은 기상호가 들고 있고 들여다본 게 제 전 애인과의 추억이라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기상호의 손에서 그 편지를 빼앗아 들었다.

당황한 얼굴을 마주한 기상호는 괜찮다고 말하려고 했다. 박병찬이 평소처럼 웃으면서 별거 아니라는 듯 있는 줄도 몰랐다고 넘어가려고 하면 응할 의사도 있었다. 햄 이런 거 은근히 신경 안 쓰시니까요. 라면서 맞장구치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너는 왜 내 물건을 마음대로 봐?“

 

여전히 당황한 목소리. 자기도 모르게 말한 걸 아는데... 아는데. 미처 처리하지 못한 질투와 서운함이 그 순간 삐죽 머리를 친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 이성이 말한다. 네가 형 물건을 멋대로 뒤져본 건 맞지. 아무리 형이 허락해줬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

기상호는 이성적인 자아의 목소리를 따른다. 여기서 감정을 따라봤자 하등 도움이 안 되니까.

 

"죄송해요. 햄 물건인데 제가 멋대로 봤네요.“

 

어쨌든 병찬의 방은 거의 청소가 끝났기에 상호는 일어난다. 이 상황에 상자를 정리하겠다고 하는 것도 좀 웃긴 일이다 싶어서 상호는 그대로 뒤돌아 나가려고 했다.

근데 거기서 병찬이 손이 잡아 왔다. 상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병찬은 그런 상호를 어떻게든 돌려세우면서 마주 보게 한다. 마주 본 병찬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눈을 휘면서,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고 억지로 끌어올린 텐션으로 밝은 목소리를 내고...

 

"상호 화났어? 내가 버리려고 했는데 깜박했다. 이제 별거 아닌데 내가 너무 과민 반응했어. 함만 봐주라~“

 

아까라면 받아줬을 텐데 서운함이 가득 찬 마음에 그 애교가 직격하자 순간적으로 상호는 짜증이 나고 말았다. 쌓아온 것도 있었다. 솔직히 상호는 이때 병찬이 담담하게 자신이 당황했으며 어쩌다 보니 그랬고... 이러면서 상황 설명을 해줬으면 받아들였을 것 같았다. 근데 병찬은 이 와중에도 애교를 부리고, 적당히 무마하려고 하고...

결과적으로 병찬의 말은 해결책이 맞았다. 실제로 몇 번 무마하면서 내뱉은 다신 그러지 않겠다는 말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근데 기상호는 그게 싫었다. 왜 항상 이렇게 넘어가려고 하지? 그냥 대화하면 안 되나? 왜 이 상황에 애교를 부려요 진짜. 귀엽지, 귀여운데. 그거랑 별개로 그럴 상황이 아니잖아. 아닌가? 내가 예민한 건가? 내가 이상한 걸까? 아닌 것 같은데. 기상호는 이제 생각이 멋대로 뻗어나가는 사이에서 일단 감정을 가라앉힐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햄. 미안한데 저 지금 대화하고 싶지 않아요. 이따 말해요.“

 

라며 병찬의 손을 떼어냈다. 그것에 병찬은 더 당황하면서 상호에게 한 발자국 다가왔고 다시금 손을 잡으려고 하면서 눈썹을 모아 불쌍한 얼굴을 하며

 

"상호야아~ 형이 미안해. 다신 안 그럴 테니까-“

 

그럴 일은 아니었다. 이성적인 자아가 판단한 것에 따르면 솔직히 기상호 잘못이긴 했다. 뭐 전 애인이고 나발이고 일단 원래 남의 물건은 함부로 보면 안 된다. 이제 기상호가 박병찬의 개인정보 서류를 봐도 박병찬이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과 별개로 원래 그렇다. 박병찬이 그것을 지적했다고 기상호에게 화낼 권리가 있나? 기상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병찬이 애교로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다. 게다가 뭐 애인 사이의 일이니까. 어떻게 보면 애교로 넘어가는 게 안 이상할 수도 있지. 지금까지 그래왔으니 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기상호는 아직 소화하지 못한 서운함과 지금까지 박병찬이 계속해서 모든 갈등 상황을 적당히 무마시켜온 것에 대한 꺼림칙함, 당장 불쑥 솟아오른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박병찬 앞에서 정색을 하고 말았다.

 

"형. 형은 항상 제가 좀만 뭐라고 하면 애교로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데 지금은 안 그러셨으면 좋겠어요.“

 

박병찬은 그 말에 굳었고 기상호는 그런 박병찬을 놓고 집 밖으로 나왔다.

 


 

사귄 지 2년하고도 2개월 8일 만에 싸운 것치고는 사소하고 별거 아니었으며 어디 가서 말해봤자 애인들의 사랑싸움 취급 받을 일이었으나 기상호의 입장에선 좀 큰일이었다. 일단 몇 번이고 말했던 미묘한 갈등이 아니라 이렇게 누가 봐도 확실하게 싸운 건 처음이다. 돌아가서 대화를 하면 될까? 근데 그거에 확신이 안 섰다. 마지막에 봤던 병찬의 얼굴이 선했다. 어색하게 웃는 그대로 굳어버린 얼굴. 당황했을까? 당황했겠지.

상황을 사감 없이 나열하면 이랬다. A와 B는 사귄다. A가 B의 방을 청소하다가 B의 전 애인 C와 주고받은 연애편지를 발견했다. A는 그 편지를 들여다보는 모습을 B에게 보였고 B는 자신의 물건을 함부로 본다며 편지를 가져갔다. A는 미안하다고 말했고 B는 화가 났냐며 화해 시도를 했고 A는 그것에 더 화가 나서 짜증을 내고 나왔다. 이때 누구에게 더 잘못이 있는가?

기상호는 A라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애인 관계이니 B가 처신을 잘못했다고 할 수 있음을 알지만 뭐 어쨌든 남의 물건을 함부로 본 건 맞으니까? 애인 관계라고 해도 결국 사람 간의 관계이니 예의를 잊으면 안 된다는 점에서... 병찬햄이 빈정 상해서 뭐라고 하면 진짜 할 말 없는데 우짜노... 그냥 평소처럼 넘어가도 될 문제였는데 왜 그때 삐꾸를 냈을까... 내가 미쳤나?

그 와중에 어디갔냐던가 미안하다던가, 혹은 화를 내는 연락도 없는 휴대폰을 미련스럽게 내려다본다. 헤어지자고 하면 어쩌지? 헤어지고 싶진 않은데. 전 애인 때문에 헤어지는 사람들 다 바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바보다... 그 편지들이 뭐 어쨌다고. 어쨌든 지금 안 사귀면 되는 긴데. 내가 햄 남친인데... 헤어지자 카면 뭐라고 하는데. 내도 미안하다고 애교 떨면 봐줄까? 햄은 그래도 날 좀 귀엽게 여겨주니까 먹힐라나... 근데 내가 그런 걸로 뭐라고 했는데 내가 하면 미치개이 아니가...

 

상호는 청승만 1시간을 떨었다. 그러고 나니 밤 1시를 넘어서. 사실 오늘 병찬햄 집에서 자고 가려고 했는데. 상호의 자취방은 좀 멀었다. 게다가 울컥해서 뛰어온 탓에 식탁에 놓여있던 휴대폰만 집어 들고 나왔으며 지갑 같은 건 외투에 든 채 죄다 병찬의 집에 있었다. 싸웠는데 그거 가지러 들어가면 좀 웃긴가... 자고 있으려나? 그냥 몰래 외투만 가지고 나올까?

이런저런 생각을 끝마친 상호는 결국 몰래 들어가 외투만 가지고 나오기로 결심했다. 1시간 동안 혹사 당한 그네에서 일어나 병찬의 집으로 걷는다. 외투는 가져간다 치자. 내일 뭐라고 연락하지. 어제 좀 민감하게 굴었어요? 그냥 미안해요? 아님 이참에 대화를 하자고 해? 근데 솔직히 머리가 식은 지금 병찬이 또 화해 시도를 하면 그러려니 넘어가 버릴 것 같았다. 당장 아까의 일이 미안해서라도 더더욱. 그럼 뭐, 어떡하나. 넘어가 드려야지. 사실 이것도 행복회로가 불탄 생각이었다. 넘어가주시면 감사하다고 넙죽 엎드려야지 염병... 이러다가 헤어지면 내는 무조건 구질구질 전남친이 될기다...

새벽 복도에 도어락 소리가 울리는 와중에도 상호는 내일, 정확히는 오늘 낮에 있을 일을 계속 고민했고 그렇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밝혀지는 현관문 불빛에서 병찬이 소파에 귀신 같이 앉아있는 모습이 언뜻 보이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게 된다.

 

"흐아아악!"

"...상호? 상호야?“

 

상호는 일단 당황했으나 현관문 불빛을 빼면 집은 매우 어두웠기 때문에 일단 불을 켰다. 그러자 병찬이 눈을 찌푸리며 손으로 눈을 가린다. 왜 불이 꺼져있는지는 감이 온다. 병찬은 우울해지면 빛을 보기 싫어했다. 그래서 병찬의 방에는 암막 커튼까지 달려있다. 내랑 싸웠다고 우울해졌나보다. 상호는 병찬에게 다가갔고... 이어 병찬의 상의에 선명한 물 자국, 그리고 아직 눈을 가린 손을 보며 조금 굳었다. 그러고 보면 아까 목소리가...

 

"...울었어요?"

"..."

"...왜 그런 걸로 울어요...“

 

우리가 싸우기는 했지만, 고작해봐야 제가 혼자 빈정 상해서 대화하기 싫다고 하고 나가버린 게 다인데. 고작 그런 일로 왜 당신 같은 사람이 울기까지 하냐고. 상호는 명치께가 싸하게 아팠다. 너무 미안한 탓에. 상호가 다가가 병찬의 옆에 앉는다. 평소라면 병찬이 기대오던가 혹은 자기를 끌어안아줄텐데 그런게 없어서, 상호가 먼저 팔을 뻗어 병찬을 끌어안고 제 품 쪽으로 당겼다. 머뭇거리면서도 상호가 당기는 것에 못 이기는 척 몸을 기대오는 것이 느껴진다. 상호는 그런 병찬의 머리에 제 볼을 기댄다. 손을 올려 눈을 가린 병찬의 손 아래에 제 손을 끼워 넣는다. 두툼한 손끝으로 병찬의 눈가를 조심히 더듬으면 축축한 것이 느껴졌다.

 

"손 좀 치워봐요. 네?“

 

그리 말하며 상호가 약한 힘으로 병찬의 손을 밀어내면 순순히 손이 밀려난다. 얼마나 울었는지 붉게 달아오른 눈가에 상호는 마음이 약해지다 못해 죄책감이 올라왔다. 얼굴을 내려 병찬의 눈가에 입술을 슬쩍 부빈다. 그 감각에 병찬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화 풀렸어?"

"처음부터 별로 안 났어요."

"거짓말..."

"...나긴 했는데. 진짜 별로 안 났어요. 그냥... 쪼매 서운해가."

"...서운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다음부턴..."

"아뇨, 아니에요 햄. 내가 더 잘못했으니까 사과 하지 마세요.“

 

그러고나면 병찬이 몸을 돌려 상호를 꾹 끌어안으며 제 몸을 그 품에 구겨넣는다. 상호의 몸이 기우뚱 기우는데도 병찬은 되려 좀 더 제 몸을 밀어붙였다. 결국 상호가 소파에 털썩 누웠다. 병찬은 그런 상호에게서 살짝 떨어졌다가 상호의 몸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곤 상호의 몸 위에 풀썩 엎드린다. 종종 병찬이 너무 우울할 때면 상호가 슬쩍 해줬던 자세였다. 상호는 제 몸 위에 완벽히 겹친 병찬을 올려다본다. 사실 원래 해줬던 건 상호가 품을 파고드는 것이었지만... 아마 지금은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기분이겠지 싶어 말을 얹지는 않았다.

병찬이 그 상태로 손깍지를 끼더니 제 얼굴을 기댄 채로 상호를 내려다본다. 상호는 이제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기댄 채로 그 눈을 마주했다. 여전히 물기가 느껴지는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상호는 입을 열었다.

 

"햄."

"응."

"전부터 생각했지만... 햄은... 별로 어른스럽진 못해요."

"...이 녀석이."

"평소엔 어른스럽죠. 근데 내가 뭐 말할라치면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 넘어가자. 해버리니까는... 이건 솔직히 어른스럽지 않잖아요."

"...싫었어?"

"네. 싫었어요. 내는... 그냥 이야기 하고. 뭐 고칠 건 고쳐야겠지만 그게 다 햄 잘못이겠어요. 뭐는 제 잘못이었을 것이고 뭐는 대화 나누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거고. 그렇잖아요."

"..."

"...햄이 나한테 맞춰주는 게 처음에는 좋았죠. 근데... 그냥 문득이요. 무슨 문제만 생기면 햄이 사과하고 고치겠다고 하고... 그렇게 넘어가기만 하니까. 햄한테 참게만 하는 것 같고. 내가 나쁜 거 같고."

"네가 나쁜 게 아니야. 그냥... 내가 그러고 싶었고, 내가 너랑 싸우기 싫어서... ...그냥 그렇게 하면 해결된 거 같아서 그랬던 거야."

"...애인이란 게 특별한 관계는 맞죠. 근데 특별한 만큼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햄만 참게 하고 싶지도 않고... 솔직히 저는 싸우는 거 별로 안 무서워요. 사람이란 게 어떻게 딱 맞아요. 그냥 부딪히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아끼고 사랑하는 거지... 내는 햄이랑 동등해지고 싶어요. 그냥 안 맞는 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맞출 건 맞추다가 안 맞는 건 그냥 안 맞는 대로 그러려니 하고... 그러고 싶어요. 햄은 그러기 싫어요?“

 

이제 병찬은 아예 제 손에 얼굴을 완전히 묻고 있었다. 탓에 상호는 병찬의 정수리만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 동글동글한 머리통을 내려다보다가 손을 올린다. 결 좋은 머리카락 위에 손을 얹는다. 평소의 병찬이라면 좋아하지 않을 스킨쉽이겠지만 당장 어리광을 부리는 병찬은 이 스킨쉽을 그리 꺼리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쓰다듬고 있으니 다시 병찬이 고개를 들고 시선을 맞춘다.

 

"상호야."

"네."

"나는 네가 정말 좋아."

"저도요."

"...그래서... 너랑 안 맞는 게 싫어."

"그래요?"

"응. 그렇게 싸우다가... 네가 나랑 정말 안 맞는구나 생각할 것도 무섭고, 네가 지치는 것도 무섭고. 그러다가 어느 날 헤어지자고 할까 봐 무서워. 너는... 쓸데없이 현실적이면서 의외로 낭만적이니까. 어느 날 날 위해서라면서..."

"네."

"...마음이 뜰까 봐.“

 

시계소리 하나 없는 조용한 거실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소리라곤 가전제품이 돌아가는 소리, 그리고 서로 맞닿은 숨소리와 심장 소리가 전부였다. 상호는 가만히 눈을 마주하며 병찬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조금씩 빨라지는 심장 박동 소리가 그의 담담한 목소리에선 마저 읽어낼 수 없었던 긴장을 알려주었다. 이게 당신이 어른스러운 척 하며 숨겼던 속 얘기구나. 상호는 작게 헛웃음 짓는다.

상호는 그대로 병찬을 끌어안은 상태로 빙글 옆으로 돌았다. 소파가 좁은 탓에 병찬의 자리를 만들어주니 상호가 거의 떨어지려고 해서, 병찬은 마주 끌어안으면서 상호를 제 쪽으로 꾹 당겼다. 그런 상태로 시선을 마주한다. 여전히 심장 소리가 들렸다. 두근두근두근. 상호보다도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들려오는 심장 소리. 상호는...

 

"병찬햄."

"응."

"저 안 그래 보일 수도 있는데 엄청 욕심쟁이예요."

"...그래?"

"주변 사람들이 그러더라고요. 애가 좀 맥아리가 없고 맹해가지고 좋아하는 걸 모르겠다고."

"...하하."

"근데, 저 한 번 진심으로 좋아한 건 포기 잘 못해요. 욕심이 많아서... 실망하고 힘들어해도 놓진 못해요. 농구가 그랬어요. 잘하고 싶었는데 안 되니까 너무 재미가 없었거든요. 그런데도 그만두진 못했어요. 선생님들이 다 농구는 가망 없고 공부를 잘했던데 그냥 공부하자고, 대학 가야지 해도 어쩐지 그러겠다는 대답이 안 나오더라고요."

"응. 그 맘 알 것 같아."

"...햄을 좋아하는 것도 그랬어요."

"어땠는데?"

"솔직히 햄, 처음에는 저를 애로만 보셨잖아요. 제가... 너무 좋아하는 티 내니까 곤란해하시고."

"그랬지."

"그러면 포기해야 할 텐데 그게 안 됐어요. 희차이나... 태성햄이나, 다은햄이 막. 가망 없다고. 에둘러 거절하는 거라고. 햄도 미안하다고 말하는 거 보면 포기했어야 했는데 그게 안 됐어요. 햄을 생각할 거면 그만두고 마음을 접어야 했는데 안 됐어요..."

"..."

"제가 햄을 좋아한다는 건 그런 뜻이에요. 햄을 생각하는 것보다 햄을 사랑하는 게 더 중요해서, 햄을 위해서라면서 헤어지자는 말 같은 거 못해요. 싸우고 서로 상처입히고... 차라리 헤어지는 게 나아지더라도 사랑할 거 같아요. 헤어지자고 하면 붙잡을 거 같고, 싫다고 할 것 같아요. 정말이에요...“

 

상호는 언젠가 그런 날이 오는 것을 잠깐 상상했다. 병찬이 맞춰주지 않게 되면 어떨까. 어쩌면 우리는 생각보다 맞지 않는 부분이 훨씬 많을지도 모르고 그 부분을 맞춰보려다가 자주 싸울지도 모르지. 겨우 맞춘 부분보다 맞추길 포기한 부분이 더 많아질지도 모른다. 그런 부분이 계속 부딪혀서 언성이 높아지다가 결국 피로감을 느낄지도 모르지. 하지만 상호는.

 

"...저는 맞지 않는 부분을 알아가는 것도 결국 햄에 대해 알아가는 거니까 그것도 너무 좋을 것 같아요.“

 

두근두근두근. 맞닿은 소리가 빨라진다. 병찬도 그렇고 상호도 그랬다. 기어코 상호가 병찬의 심장 소리를 따라잡았다. 둘은 이제 서로의 얼굴도 보지 않는 채로 서로를 꾹 끌어안는다. 병찬이 코 먹는 소리를 냈고 상호 역시 괜스레 훌쩍거렸다. 솔직히 그런 날이 오면 엄청 힘들겠지. 아주 가끔은 헤어짐을 떠올리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쓸데없이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그런 날은 아직 오지 않았고 그렇더라도 자신은 아마 병찬을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못할 것이라는 강한 확신이 왔다. 저는 이미 그런 사랑을 해보았으니까.

병찬은 몇 번 더 훌쩍이더니 몸을 뒤로 물리다가 여의치 않자 상호의 몸을 조금 떼어내 눈을 맞춘다. 둘 다 눈이 은은하게 벌겠다. 그 모습에 병찬은 웃는지 우는지 애매한 꼴로 흐흐, 소리를 냈다.

 

"나 솔직히 술자리에서 자주 뻗는 것도 아니고 때가 때였는데 네가 분위기 잡으니까 좀 서운했어."

"그랬어요? 사실 뻗는 건 좋은데, 미리 연락해서 마중 나가게 해주면 좋겠어요. 남한테서 연락이 오면 걱정돼요."

"그건... 알았어. 근데 남한테 번호 따이는 거 짜증 나. 누가 채가면 어떡해?"

"이건 제가 해결했네요. 아까 제가 절절하게 고백했으니까요."

"너 걱정해주는 거 고마운데 가끔 과해. 조심하는 게 좋은 건 알지만 나도 아주 가끔은 무리하고 싶어."

"이건 좀 더 긴 이야기가 필요하겠는걸요. 하지만 생각해볼게요."

"전 애인 건... 그냥 네가 그거 보고 화낼까 봐 놀래서 그랬어."

"솔직히 질투가 좀 나긴 했는데, 현재 애인은 저니까 괜찮아요. 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버렸으면 해요."

"그래.“

 

다시 상호가 꾹 끌어안는다. 병찬도 순순히... 아니, 상호보다 더 꾹,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빈틈 하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꽉. 서로 얽힌 다리마저도 빈틈이 없게.

 

"디게 별거 아니죠."

"그렇네, 되게... 별거 아냐."

"싸우더라도 무서워하지 마세요. 절대 헤어지자고 안 할 거예요."

"...생각보다 내가 더 애같고 고집이 세도?"

"그걸 제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신 건 아니죠? 전 이미 다 각오했어요."

"져줄 생각은 없어?"

"져줄 건 지겠죠. 근데 싸워보시면 알 걸요. 제가 못 져주는 게 뭔지.“

 

좁은 소파에 꾸깃꾸깃 구겨져 숨 막힐 정도로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상황. 둘의 눈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특히나 병찬은 눈가가 짓무른 채로 여전히 얼굴이 엉망이었다. 그런데도 상호는 병찬을 사랑스러운 연인을 대하는 눈으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 눈을 마주하며 병찬은.

 

"어떡하지? 나 진짜 못 헤어져 주겠는데..."

"저도 그런데요. 이 부분에선 딱 맞으니까 다행이다. 그쵸?"

"그러게...“

 

글쎄. 벌써 2년이나 사귀었고 그 사이에 둘의 마음은 여전하다지만 이제 병찬이 참아주지 않게 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어쩌면 둘은 둘의 상상보다 훨씬 자주 싸울지도 모르고 지금의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서 차라리 헤어짐을 갈망하게 될지도 모르지. 병찬은 영원을 믿지 않는다. 그것은 허황된 말이며 언젠가는 반드시 깨질 약속이다.

근데, 어쩐지 네가 말하면... 그냥 속아 넘어가고 싶어져.

그래서 병찬은 그 말에 속아 넘어가기로 했다. 믿는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병찬에게 그것은... 더 이상 의미없는 말이니까. 나는 그냥 네 말에, 네 사랑에 속아 넘어가는 거야. 그래서 그냥 괜찮을 거라고 생각해버리고...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숨기려고 들었던 것을 꺼내 보는 거야. 이건 죄다 네 탓이니까.

 

"절대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하면 안 돼."

"네, 절대 안 그럴 거예요. 언젠가 서로를 사랑하지 않게 되더라도 제가 조금 더 길게 햄을 사랑할게요.“

 

그러면 내가 너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거겠지. 병찬은 그 말이 마음에 무척 들어서, 눈을 감고 상호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댔다. 영원토록 속아버릴 수 있기를 갈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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