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2차 창작

[재승] 파트너를 찾아서 01

가비지타임 재유승대 / 농없세

임승대는 첫사랑에게 차이던 날, 저주처럼 퍼부어졌던 말을 기억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 하나 변변찮은 게 없는 놈이었다. 물론 그땐 뭐에 씌기라도 했는지 눈만 마주쳐도 시선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렸고, 몸이 살짝만 닿아도 설레서 어쩔 줄을 몰랐다. 서울말들이 대개 그렇지만 그 녀석이 하는 말은 유독 다정하게 들렸다. 그게 날 좋아해서 그런 게 아니라, 타지에서 전학 온 같은 반 친구를 향한 호의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고백하던 날에서야 깨달았다. 정말 쉽지 않은 고백이었다. 수백번도 더 고민하고 괴로워하다가 어렵게 꺼낸 고백에 그 녀석은 얼굴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 했고, 머지않아 그건 혐오로 바뀌어 있었다. 그 뒤에 끔찍하다는 듯이 쏟아져 나왔던 말들은 이제는 대부분 흐릿해졌지만 한 가지만은 아직도 선명히 남았다.

세상에 어떤 남자가 널 좋아하겠냐?

단언컨대, 최악의 생일 선물이었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하였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인류는 더 이상 장소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며, 상호 간에 신뢰를 쌓기 위한 소모적인 만남을 가질 필요가 줄어 들었다. 한 마디로, 게이 클럽 드나들며 남자 꼬시던 시대는 지났다는 소리다. 지금은 이렇게 한다. 첫 번째, 게이 전용 데이팅 앱에 접속한다. 두 번째, 프로필에 나이, 지역, 신체 스펙과 선호 포지션을 올린다. 아! 중요한 걸 빼먹었다. 찰칵. 사진을 정성스럽게 찍어서 올린다. 그런 다음 관심을 보이는 채팅이 오면 몇 번 대화를 주고받다가 약속을 잡는다. 이러면 게임 끝!

...아니다. 게임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러니까 베드인하기 전까진 사실 시작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란 소리.

말하자면 지금 임승대는 스타트 라인에 서서 출발 신호만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게임은 가만히 앉아서 출발 신호만 기다린다고 시작되는 게 아니다. 가장 중요한 파트너가 있어야 한다. 농구로 치면 투맨게임 같은 거다. 공 주는 놈이랑 받아서 던지는 놈이 있어야 한다. 임승대는 그런 파트너를 찾는 중이었다. 

카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우수수 쏟아져 들어오자 임승대는 티 안 나게 그들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돌린다. 지금 카페에 들어온 사람 중에 그가 찾는 사람은 없는 듯 보였다. 그는 다시 휴대전화 화면을 켠다. 분주하게 오가던 손가락이 멈춘 지점에 문자들이 나열되어 있다. 20대, 180cm, 서울 거주, 탑 선호. 그리고 닉네임 옆에 얼굴은 안 보이고 복근만 살짝 노출한 사진까지. 사실 사진 속 몸은 그다지 임승대에게 먹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그는 좀 더 통짜로 굵은 허리를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못 된다. 가뜩이나 대한민국은 텀 공화국이고, 그 안에서도 승대처럼 평균 키를 훌쩍 넘는 바텀은 인기가 없었다. 사실 인기가 없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말 걸자마자 단칼에 거절 당하지만 않아도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오늘 만나기로 한 남자는 최소한 '프로필 속 임승대의 신체 스펙을 보고도 도망가지 않은 탑'이었다. 그런데도 임승대는 초조했다. 이런 즉석만남, 소위 번개는 얼굴 보기도 전에 바람 맞는 경우가 부지기수니까. 애초에 온라인에서 성사 된 만남이란 건 서로 익명을 걸고 이뤄지기 때문에 상대방의 얄팍한 책임감에 기댈 수 밖에 없다. 드럽고 치사해도 별 수 있나. 아쉬운 쪽이 참는 수 밖에. 근데 이 새끼는 왜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를 않....

"혹시.... 신촌 윤대협님?"

"아, 네...."

"역시 맞았네요. 헤어 스타일 때문에 한 번에 알아봤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좀 늦었죠? 차가 막혀서 그만."

남자가 건너편 의자를 당겨 앉았다. 그러면서도 쉴 새 없이 말을 거는데 구렁이 담 넘어가듯 매끄러웠다. 임승대는 괜히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반대쪽에 앉은 남자를 슬쩍슬쩍 훔쳐봤다. 음, 일단 외관은 합격. 

"아직 음료 많이 남으셨네요? 제 것도 시키고 올 까요? 아니면...."

이어질 말을 기다리는 그 짧은 사이에 남자의 시선이 앉아 있는 임승대의 전신을 훑는 게 느껴졌다. 임승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테이크아웃해서 바로 나가실래요? 저는 이쪽이 더 좋은데."

아! 이거 그린라이트다! 

머릿속에서 환희의 종소리가 들렸다. 임승대는 벌겋게 달아오른 귀를 하고선 바보같이 고개만 끄덕였다. 상대방은 그런 임승대를 귀엽다는 듯 쳐다보더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임승대의 시선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는 지금 과도하게 불안해 보였다. 홀로 선 남자는 자리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임승대를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잠시 후 살짝 한숨을 쉰 임승대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밀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일어났, 일어나는데? ...대체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허리를 채 다 펴지 못 하고 어정쩡하게 선 임승대의 눈에 남자의 경악하는 얼굴이 보였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천장에 닿을 듯이 높이 위치한 그의 뾰족한 머리 끝을 향해 있었다. 임승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시발. 또 조졌네. 


임승대. 22살. 대학생. 서울 거주. 그리고... 키 204cm.

안타깝게도 그는 바텀 지망인 주제에 과도하게 큰 키를 가진 죄로 지금까지 도합 nn번이나 뺀찌를 맞았다. 처음 첫사랑에게 고백했다가 차인 게 트라우마가 되어 학창 시절 내내 남자에게 고백하는 건 꿈도 못 꾸던 그는, 성인이 되어 서울로 상경한 후 야심 차게 게이 전용 데이팅 앱에 가입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남자 꽤나 후릴 수 있을 거라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관은 바로 찾아왔다. 아무리 익명으로 데이트 상대를 물색하는 어플이더라도 프로필에 기본적인 정보는 들어가야 했고, 이 기본 정보엔 신체 사이즈가 필수적이었다. 그는 고심 끝에 자신의 키를 무려 두 자릿수나 낮춰서 190cm로 적는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돌아오는 건 차가운 거절 뿐. 임승대는 결국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이왕 구라치는 거 따악 1cm만 더 치자고! 그래서 최종적으로 그의 프로필상 키는 189cm가 되었다.

이런 뼈를 깎는 노력이 통한 것인지 전보다는 채팅이 오가는 횟수도 늘고 만남 성사도 조금씩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원히 채팅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직은 배가 불렀던 임승대는, 처음엔 키가 커도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만 골라서 실제 만남을 주선했다. 그리고 이 번개들은 전부 망했다. 그냥 존나 망했다. 채팅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던 사람도 막상 크다 못 해 거대한 임승대를 실제로 마주한 순간 모두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났다. 잔인한 현실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커도 괜찮다'에 2m 4cm는 요만큼도 해당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좌절하지 않고 계속 번개를 나갔으나 그에게 돌아오는 건 싸늘한 퇴짜 뿐이었고, 이 퇴짜가 두 자릿수가 넘어가자 비로소 임승대는 제 처지를 깨달았다. 자신이 게이 시장에서 먹히지 않는 바텀이란 사실을.

임승대는 세면대를 양손으로 짚고 비스듬히 서서 거울 속 반라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요리조리 돌려서 각도를 바꿔가면서 보는데, 솔직히 어느 각도로 봐도 이만하면 잘생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 뿐이었다. 이번엔 한 손을 들어서 구레나룻부터 뒤통수까지 투블럭으로 이쁘게 깎아낸 부분을 쓸어 보았다. 이 헤어스타일은 아무나 하는 줄 아나? 이건 진짜 얼굴이랑 두상에 자신이 있어야만 소화할 수 있는 거라고! 위로 세운 머리는 또 어떻고? 이것도 이마랑 헤어라인에 이뻐야 하는 건데. 몸은 또 어떤데? 위에는 역삼각형이고 아래는 일자로 길게 뻗은 것 좀 보라고. 오죽하면 홍대 근처만 가도 모델할 생각 없냐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까. 그는 우쭐대며 허리를 곧게 펴고 일어섰다. 그러자 아까까지만 해도 거울 속에 예쁘게 비치던 얼굴이 순식간에 위로 쑥 올라가서는 코끝이 거울 끄트머리에 간신히 걸쳐져 보였다. 방금 전까지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기운 없이 밑으로 축 처졌다. 이 커도 너무 커다란 키가 지금 그에겐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차라리 다른 게 문제였다면 상황이 훨씬 나았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살이 쪘으면 살을 빼면 된다. 못생기면 성형을 하면 되고, 목소리가 문제면 차라리 말을 안 하면 되는데. 키는 줄이지도 못 하고 숨기지도 못 한다. 더 억울한 건, 차라리 키가 작았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거란 거다. 키 작은 바텀? 노 프라블럼이지! 근데 자기보다 커다란 남자가 바텀을 한다고 하면, 다들 이건 임파서블 이라며 도망가기 바빴다. 시발, 이 나약한 한국 게이놈들!

그는 좁은 화장실 문을 나서기 위해 목을 거의 90도로 숙이는 것도 모자라 무릎까지 굽혀서 겨우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침대에 풀썩 쓰러지듯 누웠다. 살짝 누웠다고 생각했는데도 매트리스가 크게 출렁거렸다. 더블 사이즈의 침대는 좁은 방에서 지나치게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런데도 쓸모가 있었다. 임승대는 매트리스 밖으로 튀어나온 두 발을 반대쪽 모서리로 옮겨서 다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대각선으로 누우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침대 안으로 쏙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나마도 싱글 사이즈 침대였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이렇듯 그는 평균보다 지나치게 큰 키 때문에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모든 불편함을 합친 것보다 임승대에게 더 치욕적인 사실은 그가 아직 앞이든 뒤든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실은 임승대도 현실과 타협하여 탑으로 전향하고자 시도한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프로필 속 포지션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휴대전화에 불이 나도록 연락이 빗발치는 걸 보자 빈정이 제대로 상해버렸다. 별로 내키지도 않는 역할엔 수요가 넘친다고 생각하니 역으로 오기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전보다 더 파트너 찾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그런데도 여전히 빈 손가락만 빨고 있으니. 신세가 이보다 더 처량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일은....

상념에 빠져든 그를 다시 현실로 불러온 건 베개 옆에 놓아둔 휴대전화의 불빛이었다. 홀린 듯 바라본 그곳엔 기다리던 알림이 떠 있었다.


꼭 어제의 데자뷔 같단 말이지. 

공교롭게도, 그는 어제 번개 상대에게 차였던 그 카페에 또다시 앉아 있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임승대에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장소는 물론이고, 오늘 만나게 될 사람까지도. 

니가 지금 가릴 처지냐고 물어 본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찌 됐든 누구에게나 취향이란 건 있는 거다. 임승대는 굳이 둘 중의 하나를 고르자면 얼굴보단 몸을 더 보는 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프로필 사진에 신체 부위가 나온 쪽을 더 선호했다. 대놓고 벗은 몸이면 금상첨화고, 그게 아니라면 팔이든 다리든 근육이 어느 정도 붙었는지만 봐도 대략 판단이 가능했다. 근데 어제저녁 늦게 연락이 온 이 사람은 자기 뒤통수 사진을 찍어서 올렸다. 그것도 화면의 절반은 뒤통수고 절반은 목덜미 쪽이라 이걸로 뭐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알 수 있는 건 몸에 주근깨가 있다는 것 정도? 

가장 걱정되는 건, 그 남자의 키가 177cm 밖에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러면 실제로 임승대와는 30cm 가까이 차이가 난다는 건데. 심지어 임승대는 프로필상 키를 가라로 적었기 때문에 지금 매우 양심에 찔리는 상태였다. 아씨, 이거 백퍼 나가리다. 그냥 지금이라도 튈까?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초조한 마음에 애꿎은 종이 빨대만 잘근잘근 씹었다. 머릿속엔 최악의 시나리오만 그려지는데도, 그가 자리를 뜨지 못 하는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오늘은, 임승대에겐 혼자 있기 죽기보다 싫은 날이었다.

약속 시간에 가까워질수록 임승대의 눈이 더 분주해졌다. 이래 봬도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서, 그는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쉽게 알아보는 편이었다. 몇 안 되는 프로필 속 정보를 다시 보면서, 대상의 얼굴을 제외한 전체적인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대강 동그란 얼굴에 머리는 짧진 않지만 목덜미를 가리진 않는 정도겠지. 적당한 키에 너무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은 체형, 그리고 아마도 주근깨. 좀 더 끌어낼 정보가 있을까? 임승대는 다시 한번 프로필을 훑는다. 그러다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Check NO. 4'

처음엔 의미 없는 문자들의 배열이라고 생각했다. 그치만 닉네임을 의미 없이 짓는 사람이 있나? 그것도 이런 데이팅 앱에서?? 이런 짝짓기에 미친 야생의 온라인 공간에서 닉네임이란 건 프로필 사진 만큼이나 중요한 자기 PR 수단이다. 임승대는 그 문자들 속에 혹시나 숨은 의도가 있을까 싶어 찬찬히 살폈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숫자 '4'였다. 사실 임승대는 이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신이긴 하지만 안 좋은 의미로 많이들 피하는 숫자잖아? 그리고 '넘버 4'인 것도 불만이었다. 아니, 넘버원이나 넘버투도 아니고.... 넘버포가 뭐야? 올림픽도 3등까지만 메달 준다고. 그 앞에 '체크'는 또 왜 붙은 건데? 날 체크해라, 뭐 그런 건가? 그것도 아니면....

"저기.... 혹시 윤대협님?"

휴대전화에 들어갈 기세로 바짝 다가가 있던 임승대의 고개가 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갔다. 처음 마주친 건 동그란 눈이었다. 그리고 그 밑에 보이는 건, 주근깨! 반사적으로 입에서 '아!' 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리고 점점 시야가 확장되면서 눈앞에 선 남자의 전신을 눈에 담자 비로소, 임승대는 고민하던 문제의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닉네임의 체크는 무늬를 말하는 거였다. 

그러니까.... 하필이면 첫 만남에 체크 남방 입고 오는 찐따 같은 놈을 만났단 뜻이다.


삶은 놀라움의 연속이라 했던가. 누가 했던 말인진 모르겠으나 적어도 오늘만큼은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모든 예상이 다 빗나가고 모든 일이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처음 만난 그 이상한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온 남자애가 지금 욕실에서 샤워 중이고, 자신은 침대에 앉아서 손톱이나 물어 뜯고 있을 줄 알았겠냐고! 모든 걸 다 걸고 맹세코, 임승대는 그 닉네임 'Check No. 4'-앞으로 그를 체크남이라 칭하겠다-와 첫 경험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하고 싶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싫었다! 까놓고 말해서, 속칭 그 '체크남'은 지금까지 임승대가 만나 본 남자 중에 가장 작은 남자였다. 키만 작은 게 아니라 얼굴도 그랬다. 못 생기고 어떻고를 떠나서 너무 어려 보였다. 분명 프로필엔 20대 초반이라 적혀있었는데, 이거 민증 까봐야 되는 거 아냐?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잼민이만 한 체크남이 임승대의 실체(?)를 알고 나서도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 그 체크남을 보고선 빠르게 계산을 마친 임승대는 더 잴 것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보란 듯이 남자의 앞에서 꼿꼿이 섰다. 남자의 키는 임승대의 가슴 정도밖에 오지 않아서 그가 승대를 보려면 고개를 완전히 꺾어서 올려다봐야 했다. 이 정도면 알아서 꺼지겠지 싶었던 그의 예상은 물론 완벽하게 빗나갔다.

'커피 남았는데, 안 가져가세요?'

'....네?'

'나가려고 일어나신 거 아니에요? 커피 이거 많이 남았는데, 테이크아웃해서 가져갈까요?'

그러더니 말문이 막힌 임승대 대신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과 트레이를 들고선 척척 카운터로 향하는 게 아닌가. 뒤늦게 어버버하며 쫓아가니 그 남자는 남은 커피를 일회용 잔에 받은 뒤 야무지게 홀더에 빨대까지 끼워서 승대의 커다란 손에 건넸다. 얼떨결에 받아들고 보니 그 동그란 얼굴이 저를 올려다보면서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식사 하셨어요?'

...그 뒤로 어영부영 끌려다니다가 지금 여기까지 와 버렸단 소리다. 임승대는 한숨을 쉬면서 손바닥으로 관자놀이 부근을 문질렀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임승대의 두 가지 자아가 자꾸만 부딪혔다. 한 놈은 이게 맞냐, 너 이런 놈한테 아다를 떼는 게 진짜 맞는 거냐고 외치고 있었고, 다른 놈은 뭐 어때 그거 좀 한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이 기회에 시원하게 떼라고 하고 있었다. 마음이 어느 쪽으로 더 기우는 지는 임승대 자신도 몰랐다. 다만, 지금 욕실 안에서 들리는 물줄기 소리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싶었다. 

문득 고개를 돌리다가 협탁에 놓인 빈 일회용 컵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나 목이 탔었는지 진작에 다 마셔버린 지 오래인데 여태 버릴 데가 없어서 그대로 들고 와버렸다. 그걸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종이 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임승대는 그제야 자신이 체크남을 기다리면서 빨대 끝을 다 물어뜯어 아작냈었단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러니까 지금 저 빨대는 그 남자가 새로 꽂아둔 거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그냥 받았는데, 사실 그 전에 종이 껍데기를 뜯은 다음에 새 빨대를 꽂고 컵홀더까지 손수 끼운 거라고 생각하니 갑자기 얼굴이 화끈 거렸다. 무슨 여자애한테 하듯이.... 나처럼 커다란 남자한테.... 

그때, 귀신같이 물소리가 뚝 끊겼다. 임승대는 도둑질하다 걸린 것처럼 심장이 덜컥 내려 앉았다. 사방이 조용한 와중에 수건으로 물기를 털어내는 소리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렸다. 우습게도 그 순간 임승대는 도망가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 좁은 모텔방에 숨을 데가 있을 리 없으니 남는 선택지는 튀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엉덩이를 떼는 것보다 욕실 문이 열리는 게 더 빨랐다. 덕분에 임승대는 앉지도, 일어서지도 않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와 마주치고야 말았다.

...이거 반칙 아닌가?

수건으로 하반신만 가린 체크남과 마주했을 때 처음 들었던 감상이었다. 아니, 얼굴이 이렇게 동그란데 몸이 저렇게 각져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냐 했겠냐고! 저런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체 왜 프로필 사진은 그렇게 찐따 같이 찍어서 올린 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근육이 선명하게 잡힌 건 아니었는데 전반적으로 단단해 보여서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부터 허리까지 직선으로 떨어지는 게 마음에 들었다. 

"진짜 안 씻어도 되겠어요?"

"...네?"

너무 열중한 나머지 대답이 한 박자 늦었다. 죄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버린 자신이 창피해서 임승대는 급히 고개를 돌리고 침대에 도로 앉았다. 그러나 체크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오더니 옆에 앉아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대었다.

"미리 다 씻고 와서 괜찮다고 하긴 하셨는데, 그래도...."

돌겠다, 정말.... 심장이 와이리 뛰는데....

"이대로 하면 머리 망가질 것 같아서요."

고개를 바로 하고 다시 마주한 남자의 얼굴엔 확실히 염려하는 기색이 있었다. 임승대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살면서 누구든 머리 망가질 걸 걱정해준 사람이 있었나? 키도 큰 게 머리까지 세운다고 비꼬기나 했지. 그 남자는 이내 다정한 얼굴로 승대의 요동치는 심장에 쐐기를 박아넣는 말을 한다.

"신경 쓰신 거잖아요."

사실 신경 쓴 게 맞았다. 어쩌면 이걸 알아주길 바랐던 것도 같았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 자신보다 한참 작은 사람인데, 그 순간 만큼은 너무 크고 단단해 보였다. 임승대는 옆에 앉은 남자를 향해 몸을 숙였다. 그리고 주근깨가 잘게 박힌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맞닿은 피부가 차게 느껴졌다. 그게 자신의 얼굴이 달아올라서 그렇다는 건 조금 나중에 알았다. 남자는 승대가 자신에게 기대는 걸 가만히 받아주다가 두 팔을 올려서 커다란 어깨를 끌어안았다. 커다란 몸으로 기대오는데도 일말의 버거움도 없이, 그 작은 몸으로 굳건하게 받쳐 안고 있었다. 


* 작중 진재유의 닉네임은 밀오트님이 지어주셨어요. 매번 도와주셔서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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