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창현

두 번째 멸망

신우*창현

2hs by js312hs

멸망한 세상을 등지고 새로운 터전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이상 기후의 시작으로 태양의 열기를 이기지 못한 오존층은 불에 타 사라졌고 남은 대기 중 공기에 불씨를 터트려 불 타는 지옥을 만들었다. 대지는 열기에 말라 건조해 가뭄이 시작됐고 농작물 또한 그 열기에 말라 사라졌다. 그나마 강원도 쪽에 남은 생태유지시설만이 존재했으나 정부의 헛된 노력으로 사람이 살아있는지 존재의 여부조차 확인이 불가했다. 태양의 열기에 오존층이 사라져 불로 태우는 재앙이 시작됐을 때 운이 나쁜 사람들은 그자리에서 화영에 처해졌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아니 불에 타는 고통을 참혹함이라 표현한다. 참혹함을 견디며 사람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자신들이 살아남을 구멍을 찾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마저 하늘은 허락하지 않았는지 남은 것들을 재로 만들어 흔적조차 지웠다. 느린 대책으로 늦장 대응을 한 정부는 무정부 시대라 말을 일컫으며 살아남기 위해 경기, 강원, 충청 등 생태보존 연구원을 지명하며 생존자를 불러드렸다. 헬기조차 띄울 수 없는 황무지, 흔한 sf 소재 영화로만 보던 내용이 현실이 되니 사람들은 무법의 속으로 사라졌다. 가령 군사헬기를 약탈 하거나, 식량, 몇명은 사람을 거래하기도 하였는데 0에 가까운 수에 수렴할 정도로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들은 생태유지시설에 합류하지 못한 대열로 각자의 살아가는 보존 법칙을 세워 지냈다. 그들도 나름의 법이 있는지 시설관련 사람이 나타나면 오히려 도움을 주며 자신들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대부분 실패하는 게 부지기수였지만 그들의 나름 생태유지시설을 갈망했다.

타는 태양도 자전하는 지구 덕분인지 다행이도 밤이 찾아오자 사람들은 그제야 식혀진 땅을 밟으며 각자 가야할 곳으로 전진했다. 영하를 웃도는 날씨에 동상이나 동사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며 밤 마저 자유치 못한 고통에 매 허덕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이어 갈 수만 있다면 이란 명목하에 살아남기 위해 전진했다. 끝없는 행렬이 늘어나고 한계에 부딪히는 생태유지시설이었다.

모래 바람이 휘날리며 머리카락에 들러붙어 떨어지지 못해 손으로 머리를 털어내자 그제야 땅을 떨어졌다. 신우는 연구소 원으로 발탁된 지 한 달, 밤이 되어 지상에 올라 신발을 벗고 모래 감촉을 피부로 느낀다. 사막처럼 차가워진 대지는 영하를 웃돌지만 신우는 그 영하의 온도도 견딜만한 듯 작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문 하나 가까스로 나온 형태의 연구소는 지하 15층까지 존재하는 거대한 개미굴과 같았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하층민이라는 말이 있지만 그건 사실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상에 가까울 수록 하층민에 가까웠다. 태양이 조금만 더 가까워진다면,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며 이곳은 다시 그 열기로 녹아내리며 사람들을 태울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무쓸모한 사람들이 죽는게 낫다는 정부의 입장이었다. 무쓸모한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없지만 정부의 입장에선 하층민이였다. 하층민에게 지급되는 식량, 물품은 까다롭게 진행되지만 마지막 지하층에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유한으로 제공되는 자원이니 썩어 뭉드러진 것은 이곳에서도 매한 마찬가지이다. 연구소는 다행이도 지하 7층에 있었고 그곳엔 각종 씨앗과 나무들, 동물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지키는 것이 자신이 할 일이지만 열기에 녹아내릴 일은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

모래의 차가운 기운이 발을 얼리기 시작하며 눈썹에는 얼음 결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지구는 시시각각 제 몸을 태우고 얼리며 사람의 흔적을 지우기 시작했다. 조신우는 이렇게 사라지는 것도 괜찮을 것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달의 기간 참 소위 거지같은 꼴을 다 봤다. 진절머리가 난다는게 이런 것 같은 딱 그런 상황들이 많았다.

담배는 금물이지만 몰래 입에 물고 켤 수 없는 라이터 불을 켠다. 몇 번이고 반복하자 그제야 칙- 치익- 소리를 내며 가스 빠지는 소리만 냈다. 조금 더 있으면 자신의 발이 동상에 걸려 얼어 기능을 상실 할 것이다. 맺힌 얼음 결정체는 눈을 얼리고 시각을 상실 시킬 것이다. 신우는 눈을 감을까,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투명해 빛을 내는 밤 하늘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있잖아. 죽으려고 하는거야?”

때마침 인기척에 놀란 신우가 화들짝 몸을 크게 움직이며 뒤를 돌았다. 남자는 조그마한 랜턴을 켜 감각이 마비되는 신우의 발을 내리쬐었다. 남자는 스쿠터용 글라스를 끼고 검정 조끼를 입고 있었다. 어울리는 2륜 오토바이에 써진 영어가 인상 깊었다. 남자는 오토바이에 적힌 영어를 읽는 신우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며 확인을 하고는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티라노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허창현과 첫 조우는 이러했다. 그는 2륜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유랑자라고 자신을 지칭했다. 그럼과 동시에 자신의 원대한 꿈에 대한 포부도 잊지 않았다.

“이 세계의 멸망이 지금이라면, 나는 첫 번째 멸망을 떠올렸어.”

“첫 번째 멸망?”

“응, 공룡의 멸망. 만약 지금이 그때와 동일하다면 나는 나의 마지막 티라노를 찾고 싶어.”

뒷통수를 한 대 얻어 맞은 듯한 얼빠짐이었다. 허창현의 처음은 조금 엉뚱하지만 다소 진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2륜 오토바이에 대한 설명도 잊지 않고 말했다. 뒤에 달린 조그만 박스는 태양열을 충전하는 패널이 달려있었다. 태양의 고열로 패널이 녹진 않느냐 묻자 그는 태양열을 변환하며 방대한 열을 분할시켜 흔히 냉각시키는 기능을 탑재했다고 말했고 그 박스 안에는 선선한 풍향이 박스 전체를 돌며 뜨거운 열을 끊없이 식히고 있었다. 패널이 들어온 열은 쉽게 전기로 바꾸며 절대적으로 끊이지 않는 이제는 슈퍼 컴퓨터라고 콧대를 높이며 자랑했다. 조신우는 그의 기술에 실로 놀라워한 한편 연구진에 소속되지 않는 그의 존재에 궁금증이 올라왔다. 단순하게 전기로 변환을 한다면 사실 이 막대한 태양열을 저장시키고 순환시켜 다시 도시를 건설할 수 있지 않을까? 깊이 파고들수록 조신우의 미간도 함께 좁혀지자 창현은 얼굴 표정을 읽은 듯, 말을 돌렸다.

“나는 유랑자니까. 이런 곳이랑은 안 어울려.”

세상과 단절된 존재인듯,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그저 떠돌이라는 듯 그어내듯 말을 뱉은 창현의 대답에 신우는 좁았던 미간을 풀며 그가 다 녹인 발을 꼼지락 움직였다. 속눈썹에 붙은 얼음 결정도 녹아 눈물이 맺힌 듯 촉촉했다.

“이제 들어가. 여기 뒤에 문이 있잖아. 연구원들 전용 출입구를 통해 나온거지?”

허창현은 말을 뱉고는 아차, 실수를 했다는 듯 얼굴로 빠르게 말을 돌리며 수습했다. 조신우는 그저 연구원만이 아는 통로라는 개념을 갖고 있진 않았다. 그가 이곳에 온 지 한 달, 아직은 신입인 그가 이곳 건물에 대한 정보나 지식이 빠삭할 순 없었다. 허창현은 신우의 얼굴을 몰래 살피며 서둘러 문 앞까지 빛을 내어 길을 만들며 인사했다. 다음에는 내 티라노를 데리고 올게. 인사를 뭐 그렇게 하냐며 핀잔을 던지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아 조용히 손을 흔들어 어두운 밤 길을 밝히며 떠났다.

신우가 몸을 담고 있는 곳은 7층 연구소로 동식물의 유전자가 담겨진 공간으로 세포 분열과 여러 연구가 이뤄지는 공간이어었다. 연구 실습용 글라스를 끼고 포이드로 세포를 하나 잡아 배양시키는 일은 재밌었지만 그만큼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날씨를 관측하고 태양열을 전기로 에너지를 돌리는 일이 더 편안해 보였으나 그것도 나름의 사정과 힘듬이 있으리라 짐작한다. 이 연구소로 오게된 것도 천운에 가까운 일이었으니 온 것에 만족하자 스스로 위안삼는다. 그렇게 다시 연구에 매진하지만 문득 전날 본 세상을 태우고 멸망시킨 태양은 자취를 감추고 아무 문제 없다는 듯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투명해 빛을 내는 밤 하늘 아래 조우한 창현을 떠올렸다. 남자는 개구장이같은 얼굴을 했지만 무표정을 지을 때면 날카로운 인상이 매섭게 느껴졌다. 검정 가죽 자켓은 즐겨입는 옷인지 여부를 알 수 없지만 그는 단벌신사처럼 여벌의 옷가지는 없어 보였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그가 거주하는 거처에 놀러가고 싶다는 생각도 자연스레 하지만 자각하진 못한다. 창현이 만든 기계는 단순하지만 원자들이 돌아다니며 그곳을 끝없이 가열하고 냉동시키고 있을 것이다. 창현은 자신만의 요새를 마련해 연구를 하는지에 대해선 잘 모른다. 그와 만나 대화한 그 짧은 시간 속 주제는 오직 티라노였으니까.

창현의 말에 두 번째 멸망을 떠올렸다. 첫 번째는 공룡이라면 필히 세상은 다시 멸망되기 위해 어느날 이라는 시간을 돌릴 것이다. 대비를 하는 것은 우리 연구진들이지만 창현은 마치 그 답과 날을 알고 있는 듯 어물쩡 말을 뭉퉁그렸다. 소행성이 날라온 날, 태양의 열이 녹아 오존층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화영시킨 날. 창현이 계산한 날과 맞는지 진위여부는 확인이 어렵지만 그의 말은 근거가 있는 사항이었다. 다소 황당하고 웃긴 두 번째 멸망의 대상이 인간이라지만 조신우는 상상력이 풍부한 것에 연구는 늘상 필요한 것이니 졸린 오후 3시의 재밌는 일화로 여겼다. 하루가 끝나고 다시 밖을 나가 창현을 기다렸지만 오지 않는 창현에 얼어붙은 발을 힘겹게 움직이며 돌아 다시 연구소 안으로 들어갔다.

#2

태양의 주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안 건 연구 담당자도 일반인도 아닌 허창현이었다. 이상하겠지만 사실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도 했다. 그는 늘 두 번째 멸망을 기다렸고 태양의 열기를 받아 전기로 순환시키며 알 수 없는 목적지로 향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다시 그가 찾아온 날 어김없이 스스로에게 냉정하던 조신우의 발을 녹여주며 말을 한 허창현의 주장을 떠올렸다.

“태양의 자전 속도와 주기가 조금씩 느려지고 있어 조만간 이 열기도 서서히 얼어 돌덩이가 되겠지. 그때가 되면 암흑기가 올거야. 세상은 멸망할거고. 단 우리가 살아있을 때에 올지는 미지수지만.”

허창현의 주장은 이러했고 가설 또한 동일했다. 과학을 좋아하는 존재라면 당연히 그 주장과 가설에 혹해 연구를 시작하겠지만 관심 분야에서 벗어난 곳이기도 해 조신우는 가볍게 넘겨 들었다. 그는 덧붙여 말하길 태양의 눈 조각이 떨어지는 날이 올거라 말했다. 그걸 주으러 떠난다는 여행계획도 빼놓지 않았다. 허창현의 그런 뜬구름 같은 허황된 이야기를 들은지 한 시간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언 발이 녹아 둔해진 움직임의 제한이 풀리자 조신우는 다시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그런 그에게 창현은 다시 말했다.

“이제 혹한기가 올거니까. 나오지 마.”

첫 번째 지구의 종말에는 무수히 많은 가설들 중 빙하기를 논하는 듯 했다. 그래서였을까, 허창현은 빙하기에 대한 주장도 잊지 않았다. 조신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척을 했다. 지금에서야, 다시 떠올린다면 그 말이 얼마나 가치있던 말인지 후회하겠지만 조신우는 그의 멸망설에 대해 듣고 싶지 않았다. 일종의 직업병이라 생각했다. 허창현은 늘 잠시 찾아와 떠나는 ‘유랑인’과 같았다. 어디서 오느냐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정말 원시적으로 동굴에 사는걸까? 물음을 띠었지만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금속과 유리는 일정 고열에 노출되면 삽시간에 녹아 내리니 말이다. 그래도 콘크리트 바닥이라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추상적이면서도 가능성이 높은 상상을 했다. 허창현은 잘있어. 라는 말을 대답 대신했다. 2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고 올라탄 모습에서 자유인을 떠올린다면 자신도 자유인이 될 수 있을까, 허창현은 조신우의 내면을 열어주고 있었다.

“돌아갈거면, 연락처를 알려줘. 그래도 연구소 실 안에는 메세지를 전할 수 있는 노트북이 있으니까.”

신우의 말은 제법 의외였는지 그는 놀란 눈을 하더니 금세 웃으며 메일 주소 하나를 적어 신우에게 전달했다. 태양을 닮은 남자의 미소는 어째서 그리 애달팠는가. 허창현 주소가 적힌 메일이 발송됐다는 화면이 보였다. 세상 밖 친구가 생긴 뜻밖의 일이지만 연구소에서만 사는 사람이 외지인, 특히 자유로운 영혼인 양 떠돌아 다니며 살아가는 허창현에게 세상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태양의 열기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빛이 주는 양분을 받지 못해 늘 창백했고 비타민이 부족했다. 이곳 지하 15층에 사는 흡사 고위간부들은 늘 영양제와 인공 태양으로 삶을 꾸려갔다. 모 영화의 트루먼이 떠올랐지만 어쩌면 아앨랜드와 비슷했다. 고열의 태양열을 받아 전기로 순환하며 일정양을 배분해 층의 에너지를 전달했다. 사람은 자연에 의해 의존하면서도 단독적으로 살아가려고 아등바등했다. 그런점에서 재밌었지만 결국 같은 족속이라 생각을 깊게하진 않았다. 아일랜드와 비슷한 이곳이 다른 점이라고는 세상의 멸망이 초래한 것? 잡다한 생각이 꼬리를 물자 신우는 제 머리를 좌우로 털어 잡생각을 떨쳐내며 노트북을 닫았다.

지겨운 연구가 끝이나질 않는다. 연구원들의 소속이 정부 관할 소속이 된 이후 늘상 연달은 회의와 보고의 연속이었다. 조신우는 가끔, 모든걸 태워버린 태양이 미웠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친구들과 함께 자유로운 바람을 맞고 흙먼지가 가득한 운동장을 달려 뒤집어 쓰기도 했고 비가 오는 날이면 물에 젖은 풀내음에 여름 향기에 취해 있었다. 여름 방학에는 친할머니 댁으로 내려가 대청마루에 누워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소나기 바람을 맞기도 했고 물에 넣어 시원한 수박을 깨 먹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인건 더위에 고생하던 친할머니가 이런 끔찍한 세상이 도래하기 전, 고인이 되었다는 점이였다. 여름에 취약했으니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조신우는 되려 안도감을 얻었다. 시설엔 자율 온도 조절계가 24시간을 돌아가며 건물을 맞춰 주고 있으니, 한국은 사계가 뚜렷한 만큼 동식물들의 사계를 맞춰 주어야 해서 연구실만은 사계의 온도를 자율적으로 돌리고 있었다. 세상은 뜨거운 여름과 혹독한 겨울만이 존재하는데 이곳만 홀로 이질적인 인공 봄이였다.

메일은 오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지만 그래도 내심 왔더라면싶은 좋은 감정이 유지됐겠지만 안 온다고 하여 기분 나빠하진 않았다. 자연인에게도 자연인의 삶의 규칙이 있는 법이니까. 허창현에 대한 존재와 궁금증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그는 메일에 답장은 커녕 이곳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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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안녕?

메일이 온 건 허창현이 이곳을 한 번 더 찾아왔을 때였다.

“그래서, 뭐 때문에 찾아온거야?”

어리숙한 아이같으면서도 어른스러운 얼굴을 가진 남자는 금세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매번 웃을 때면 개구장이 같았던 모습을 좋아했던가 보다. 그가 웃지 않은 무표정의 얼굴을 보니 심기가 불편해지니 말이다. 그간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 창현의 지내온 흔적과 살아왔던 방식을 읽으려 는 듯 신우는 창현의 얼굴을 조심히 살폈다. 볼에 난 상처 하나, 거칠어진 피부결이 눈에 들어왔다. 눈썹은 어딘가 불량해 보이려고 스크레치가 나있었는데 머리칼을 내린 것으로 볼 때 그다지 좋은 매달은 아닌 듯 했다. 두 사람은 더이상의 긴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떨어지는 유성을 보며 잠시 사색에 빠졌고 그의 잔 기침에 웃어 보였다.

#3

시설 내 14층은 도서관이 존재했다. 높은 고와 열로 편백나무로 특수 제작된 이곳은 천장에 달린 자율 온도 조절기기가 설치되어 늘 책을 보관하기에 유리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이곳엔 고서들과 희귀 서적들이 가득했고 또한 시설 내 작가들의 신규 서적들도 즐비했다. 고서들과 희귀 서적들은 섹션이 나눠져 열쇠로 잠겨 있었는데 오랜 시간 보존된 방법을 통해 보존되어 있었고 일반-고위간부에게도-인은 볼 수 없는 귀한 서적이었다. 15층을 위한 유일한 휴식공간이란 말도 도는 도서관이기에 신우는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간혹 신우는 연구의 목적으로 고서를 찾았지만 기본적으로 무균 수술실처럼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 보조용 안경을 끼고 들어가 확인할 수 있어 이곳을 찾아와 연구관련 서적 뿐 아니라 틈틈히 읽고 싶었던 서책들을 몰래 훔쳐볼 수 있어 종종 찾아 보았지만 연구 시설이 설립된 후 연구, 사건, 사고, 특이 사항을 따로 기록해 정리해 두었는데 위험인물이라든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인물들에 대해선 자세하게 나와 있는 서적은 따로 찾지 않았다. 그닥 즐겨 보는 편이 아니었을 뿐더러 굳이 읽어 꺼림찍한 소문에 대한 진상을 파헤칠 여력도 없었다. 그저 그러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곳에 자유가 허락되지만 범죄에게만큼 아량이 넓지 않는 보이지않는 감옥과도 같았기 때문이라 어렴풋이 짐작했다. 편백나무로 만들어진 공간에 홀로 앉아 평범하게 읽고 싶었던 우주에 관한 서적이라든가 미국에서 넘어 온 일반 텃밭용 재배 방법 서적을 놓고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2017년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았다. 눈에 들어온 달력은 2017년 05월을 알리며 열린 창으로 넘어 들어오는 바람에 큰 종이가 펄럭였고 위에 걸린 시계는 13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계 옆에 걸린 13반의 급훈은 ‘하나라도 제대로’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는데 담당 선생이 팔짱을 끼고 노려보고 있는 사진이 액자에 걸려있었다. 주변을 돌리며 교복을 입은 아이들을 확인하자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하기도, 매점에라도 다녀온 듯 양 손 가득 먹거리를 들고 있었다. 콧잔등을 간지럽히는 따듯한 햇살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복도를 뛰어다니는 뜀박질 소리. 창을 타고 넘실넘실 넘어오는 축구 공 차는 소리와 담소 소리들. 집증할수록 다채로운 소리가 반짝이며 공간을 타고 들어와 귓가에 머문다. 오래된 누군가의 기억 속, 빛바랜 필름처럼 느릿하고 천천히 추억하게만 만드는 장소였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며 뛰놀고 있을 때 옆 건물 체육관에서는 운동화 밑창 끌리는 소리가 울리며 고가 높은 공간을 가득 매웠다. 호각 소리가 울리자 분산됐던 인파가 한대 모여 열을 지켜 서 서로를 보며 인사했다. 바람에 펄럭이는 가벼운 소재로 제작된 유니폼에 적힌 이름은 ‘신유’였다.

“형님은 꼭 거기서 저에게 패스를 하지 않습니다.”

“—아, 거기선 패스를 하는 것보다 돌파로 정면승부해야하는거야.'”

“—형님에게 또 패스하려고 하는것 아닙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마주한 사람의 얼굴을 보려고 하기엔 무의식 속의 두려움인지 억제되고 통제된 감각인지 고개조차 들 수 었이 경직된 몸으로 유니폼을 갈아 입으려 경기장을 벗어날 때 내딛은 발걸음을 따라 쿵-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깜빡 잠이든 신우를 깨웠다.

“무슨 꿈을 꾸길래 인상을 팍팍쓰냐.”

엔지니어링 인석이 신우의 옆자리에 앉아 전공 서적을 한 권씩 펼쳐냈다. 오래전 부터 이곳에 있던 인석은 이곳에 설립될 때의 초창기 멤버였다. 엔지니어링 실력이 좋으니 당연하게도 제일 최우선으로 뽑혀 이곳의 설비를 맡았다 볼 수 있었다. 그러니 그는 조직 내 유명한 인사였고 이제 힘겹게 들어온 신우는 일명 아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열이 받거나 질투를 느끼진 않았다. 오랜 시간 함께 나고 자란 동지이자 소꿉친구이니 그를 응원하는건 당연했고 그에게 질투를 느끼기엔 자신이 모르는 분야의 연구자였다. 도서관에 할 짓 없어 오는 것까지는 빼다 박지 않아도 좋았겠지만 이마저 소꿉친구니 어쩔 수 없었다. 연애는 자시고 언제 태양이 지구와 가까워질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 더 위급한 중대 사항이었다. 신우는 인석의 말에 눈을 떠 깨자 잠시 주변을 둘렀다. 익숙한 도서관의 모습이 천천히 눈에 익혀지며 잠이 깨기 시작했다. 눈을 여러 번 부릅 뜨며 정신을 찾아내려 노력하자 말끔해졌다.

“꿈을 꿨어”

“무슨 꿈.”

인석은 서적을 넘기며 옆구리에 끼고 온 노트북을 열어 기록하며 신우의 말에 적당한 대답을 했다. 신우는 그런 인석에 대해 따로 핀잔하지 않고 스스로 가볍게 말을 이었다.

“그냥, 고등학교에서 노는 꿈.”

“별, 다시 학교 가고 싶냐?”

“… 아니 그냥 익숙한 목소리라서.”

적당히 가볍고 힘을 실어 말하진 않는다. 얼마나 이 대화가 가벼운지, 영양가 없는지에 대해 신우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더 힘없는 목소리로 그저 가볍게 넘겨 집을 수 있는, 시간 때우기라는 식의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인석은 신우의 힘빠진 목소리에 키보드를 누르는 손을 잠시 멈추고 신우를 보다 고개를 돌려 다시 자신이 할 일을 이어나갔다. 두 사람은 그곳에서 나와 헤어질 때까지 서로의 일에 집중하며 어떤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어떤게 더 중요한지 알게된 나이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막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신우는 침대에 풀썩 누워 노트북을 열었다. 푸른 화면이 깜박이며 경쾌한 소리를 알린다. 아래 하단에는 ‘new mail 1건’ 안내 문구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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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뭡니까? 촌스럽게 안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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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안녕?

신우는 순간 울컥 화가 올라왔다. 당돌한 건지 아니면 그세 싸가지가 없어진건지. 기억 속 허창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어떤 양아치같은 남자만 화면 너머에 있었다. 신우가 화를 내며 답장을 써내릴 때 창현은 오지 않는 메일함을 달칵이며 새로고침했다. 주변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아도 그가 거주할 수 있는 기본 가구만 배치되어 있었고 문고리는 쇠사슬로 타래를 묶은 듯 엮여 있었다. 종종 바람이 문을 잡고 흔드는 듯 덜컹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곧 잠잠해진다. 창현은 자신을 가리 듯 빛 한 점이라도 들이지도 그렇다고 흘려 보내지도 않으려는 듯 암막 커튼을 창에 쳐 주변을 암전시켰다. 유일한 빛은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빛 뿐이었다. 다행이 신우가 상상하듯 동굴은 아니었으나 제 형태를 알아보기는 힘든 건물을 개조해 거주지를 마련했다. 살아야 한다는 강박감에 생긴 생존 본능이였지만 어쩌면 자신에게 필요한 마지막 순간의 유품같았다. 무너진 건물은 필히 온전한 형태였다면 고층의 아파트였을 것이다. 반토막이 되어 사라진 윗층 건물과 구조물들을 본다면 아파트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단순하게 어린 남자의 추측이지만 아주 아니다라고 할 만하지는 않다. 주변은 창현이 홀로 음식을 구하거나 얻어낼 수 있도록 편의시설들이 지어져 있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떠올리면 끔찍하게 괴로운 기억만 가득했는데 이제는 구태여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몇 번을 해도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고 자신이 몇 번이고 이곳에 돌아온 것을 확인 할 때면 ‘그’가 있었으니.

신우는 옆에 선 남자에게 아주 익숙한 듯 말을 술술 뱉어냈다. 어디 대본이라도 있는건가 싶지만 딱히 그런 것은 없다. 신우는 당연하게도 말을 뱉고 웃으며 주변 인물과 대화를 즐겼다. 딱히 할 말은 없으니 오히려 편하긴 했지만 그래도 영 찜찜한 건 매한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공을 몇 번 튕기더니 역시나 공을 던져 림을 맞췄다. 덜컹 소리와 함께 공이 아크릴 판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남자는 공을 잡으로 뛰어간다. 익숙한 이름이 다시 눈에 띄었다. ‘신유’ . 꿈은 마치 기억하라는 듯 이 곳의 소속을 몇 번이고 말해주고 있었다. 신유란 곳에서 남자와의 대화. 이미 익숙한 듯 여러 번 대화를 주고 받으며 공을 던졌다. 큰 키의 남자는 여전히 싸가지 없이 말을 뱉어내지만 자신은 익숙하다는 듯 여유롭게 받아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포근하고 편안함이 동반된다. 꿈 속에 잠식되어 영원히 자유를 누리고 싶은 기분마져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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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허창현, 너 계속 그렇게 말 하면 메일 안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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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뭡니까? 촌스럽게 안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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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안녕?

여름 수박이 달아서 몇 번이고 먹어 배탈이 난 적이 있었다. 뭐든 적당히 먹고 끝내야한다는 말에 아파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바라본다. 똥강아지, 많이 아파? 묻는 다정한 물음에 고개만 몇 번 끄덕이며 배를 어루만져주는 손길에 노곤노곤해져 잠에 빠졌다. 뭐든 많이 먹으면 배탈이 나, 지식도 그래. 많이 먹으면 더 혼동이 오고 아파오지. 적당한 수순과 절차를 밟아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야해. 지도 교수의 안내가 어린시절 수박과 연관되어 떠오른건 퍽 재밌진 않지만 나름 몰래 연구실에서 킥킥 웃기엔 소소한 재미를 준다. 뭐든 과유불급이다,란 말처럼 신우는 배양된 미생물들을 확인하며 태양의 주기를 확인한다. 출근한 신우가 미쳐 확인하지 못한 메일이 왔다는 신규 알람이 노트북 화면을 밝히며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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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오늘은 절대 건물 밖으로 나가지 마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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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모래가 태풍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그맣던 태풍의 눈은 거대한 나선형으로 꼬여 한국을 덮기 시작했다. 겉잡을 수 없이 커지는 모래들이 파도가 되어 거대한 해일이 된다. 모든 공간을 집어 삼킬만큼 거대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삼킨다. 모래 속 안은 전쟁과도 같았다. 휘몰아치는 건물 자재들과 콘크리트 잔재들 그 속에 건조한 대기에 부딪혀 생성되는 번개와 천둥들이 그리고 불씨가 화염을 만들었다. 아비규환 혹은 분노한 신들의 전쟁같다. 모래 폭풍이 지나가는 시간 지하 연구실에는 작은 진동만이 간혈적으로 들렸지만 점점 그 층수가 내려갈 수록 고요했다. 이곳은 어떤 재난이 찾아와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딱히 걱정이나 두려움은 없었지만 사람이 가진 감정 속 불안감은 제 머리를 빼꼼 내밀며 잠식시킨다. 사람들은 모래폭풍이 사라지길 기다리며 조용히 그 시간을 보냈지만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허허벌판을 휩쓸기엔 뭐 하나 없는데 왜 이리 사그라들지 않는지, 기상 전담 연구소에선 모래 폭풍에 대한 경고만 연신 알릴 뿐이었다.

완전한 유토피아는 없다. 완강하고 온건한 건물들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을 그려 쫓다보면 허상인 경우가 많다. 늘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이곳에선 그래왔다. 모래 폭풍이 만든 균열에 지상과 가까운 층에 사는 국민들의 걱정이 늘어났다. 거센 진동이 내벽을 타고 들어와 전체를 울려댔고 사자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목숨을 앗아가려는 듯 쉼 없이 밟아대고 있었다. 땅 지면이 폭풍에 갈리며 지하 내벽의 일부가 드러나자 뱀이 토끼 굴을 찾아 먹이를 얻기 위해 파고드는 것처럼 내벽과 지면 틈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내부의 사람들은 쿵쿵 모래 폭풍이 쳐대는 둔탁하고 거센 손길에 두려움에 덜덜 떨며 서로를 끌어 안고 집 안으로 들어갔으나 그들을 구조하거나 도와주는 층 사람들은 없었다. 사흘이 지나자 모래 폭풍이 온전히 사라졌다. 원래대로라면 이변일진 몰라도 일주일에서 한 달은 내내 폭풍이 와 대지를 쓸어가곤 했다. 사흘이 되고서 사라진 이유를 파고들면 더 복잡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신우는 진절머리 난다는 듯 서둘러 다른 이야기로 돌렸다. 그 동안 허창현에 대한 생각은 말끔이 잃어 버려 생각은 커녕 메일을 읽을 정신도 없었다. 메일 답장이 다시 오지 않을 두려움도 이유라면 이유지만 그보다 더 연구가 바빠진 것도 있지만 내부 조정이 있을 거란 흉흉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고 아울러 이곳 연구는 철회되어 대부도 쪽 작게 설립된 ‘등대’' 라는 연구소와 합병될 거란 소문 때문이었다. 인석에게 들은 말이지만 이건 카더라 하는 뜬구름이 아니었다. 믿을만한 정보였기에 신우는 조심스레 자신의 먹고 살 길을 걱정했다.

“그 소문 들었냐.”

“뭔데.”

도서관에선 정숙해야 하지만 잘 찾지 않는 이곳에서 두 사람은 자유롭게 대화를 나눴다. 그래도 시선은 책에 꽂혀 있었으니 정확히는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진 않을 것이다. 인석의 말에 신우는 곁눈질로 그를 잠시 힐긋 바라보지만 이내 다시 눈동자를 원위치로 돌렸다. 배양에 있어 뭔가 착오가 있었던 듯, 하루아침에 썩어버린 씨앗 종자에 원인을 알고 연구일지를 작성해야했다.

“지하 3층에 폭동이 일어났데.”

“폭동? 왜?”

“… 최근에 온 모래 폭풍때 구조 요청팀이 안와서 피해자가 많이 속출된 것 같아.”

“모래 폭풍에 이곳이 무너질 순 없어.”

“나도 그럴 줄 알았어. 초창기 설립에 도왔으니까. 근데 땅과 내부에 지어진 철근 사이에 틈이 생긴 것 같아. 그걸로 모래 폭풍이 들어와서 건물을 무너트렸어.”

“철로 내벽을 다시 세운거 아니야?”

“… 생각보다 이번 모래 폭풍이 거대했던 것같아. 근데 만약 이걸 시점으로 더 무시무시한 것들이 온다면 어쩌지?”

“….이미 태양은 가까워지고 있어.”

며칠이 지난 뒤에도 폭도들의 폭동은 잠잠해지지 않았다. 어제는 4층과 5층이라던데 라는 소문은 조용하고 빠르게 퍼졌다. 연구진들은 자신들에게 허용되는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원하는건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존재들이였으니 말이다. 그럼과 동시에 평생 안전이 보장된 삶과 의식주였다. 신우는 노트북을 켜 푸른 검색창에 먼 과거 폭동의 시위에 대하여 검색했으나 별 다른 소득은 없었다. 그들의 삶이 신우에게는 비슷한 일부였지만 동지애를 느끼거나 동감하진 못했다. 안정적인 삶을 살고 안정적으로 세상을 구하고 있다고 여겼으니.

태양이 가까워지는 만큼 일교차는 극심하다. 태양의 열기와 밤의 냉기에 사람은 고통 속에 몸부림 친다. 조신우는 문을 열고 밖으로 빼꼼 고개만 내밀어 주변을 살폈지만 창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연구원들만이 다닐 수 있는 전용이자 비밀 통로 계단을 오르며 보게된 지하 1층과 2층에 전멸이 잔상에 남아 머리속을 헤집는다. 3층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끊없이 들리며 언젠가 이 계단의 비밀도 금세 탄로날 것이다. 언제나 늘 유토피아는 없지만 자신이 이곳에서 언제까지 안전함을 유지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래서 신우의 내면 깊은 곳에서 슬금 슬금, 불안과 안정적인 삶을 원하는 인간의 욕구가 올라왔다. 인석과 함께 이곳을 나가 다른 곳으로 나갈까 고민하지만 깊게 고민하지는 못했다. 언젠가 다시 자신을 찾아올 창현이 마음에 걸린다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한다.

#5

폭도들의 목소리가 점점 거셌다. 연구원들 중 몇은 짐을 싸 새 공간으로 가기도 했고 몇은 남아 작업에 집중했지만 그마저 인원은 감소되어 축소되고 있었다. 폭동이 일어난 것에 큰 의의를 제기하지는 않지만, 결국 자신 또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잊지 않는다. 비록 홀로 가게 될지도 모르지만. 인석과 헤어진건 며칠 전이었다. 짐을 싸고 인사를 하며 그는 남부로 떠난다고 말했다. 곧 자리를 잡으면 데리러 오겠다는 말도 잊지 않았지만 신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전히 허창현이란 남자 때문이었다. 이제는 세상에 나갈 수 없는, 혹독한 겨울이 올거란 기상 연구원들의 말이 생각났다. 어느순간 부터 창현의 안부가 걱정되었고 이제야 읽은 메일에 답장이라도 하려했지만 인터넷 전선의 오류로 네트워크 통신망이 셧다운됐다. 제일 먼저 지하층 제일 아래 사람들의 소식을 끊어내기 위해 일부 통신망을 제외하고는 죽였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 피해는 오롯이 자신들의 몫이였지만 따로 가타부타 말하지 않았다. 연구 보고 일지와 서버는 일반 네트워크와는 달라 특이 상황이 아닌 이상 비상사태에 셧다운을 할 수 없었다. 죽더라도 이 네트워크는 유지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조신우는 잠시 이 통신망을 우회한다면 허창현에게 메일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해 인석에게 묻지만 인석은 대답을 꺼려했다. 우회를 하는 순간 노출되어 해킹에 취약하다는 이유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조신우 스스로 알지만 자신의 안전과 허창현의 안전을 확인 받고 싶었다.

자리에 남아 연구에 몰두 하던 신우는 그제야 진동을 느꼈다. 땅 속에 박혀 있으니 지진이 나는거야 당연하다만은 이렇게 크게 지진이 나고 나면 균열이 생겨 위험에 노출되기 마련이었다. 이제 엔지니어들은 이곳을 떠났고 남은 연구원들 몇과 존재할지 모를 고위 간부층 사람들 그리고 폭도들만이 이곳을 지켰다. 신우는 자신이 떠날 때를 대비해 창현에게 줄 편지 한 통을 늘 가슴속에 품고 다녔다. 언제든지 이곳을 떠나게 될 때면 자신을 찾아와 달라는 메세지였다. 그 편지가 늘 안쪽 주머니에 잘 자리를 잡고 눌러 앉아서 이런 작은 위험이 나타날 때면 자신도 모르게 편지가 꽂힌 주머니 쪽 가슴팍 위로 손을 얹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새벽 공기가 찬 건 누군가의 비애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타인에게서 온 편지를 한참을 보며 고개를 떨구고 울었다.

아침부터 주변이 시끄러웠다. 사람들의 고함소리와 비명이 한대 섞여 어지럽혔고 우당탕탕 물건이 떨어지고 사람이 넘어지는 소리가 가득했다.

2017년에 멈춘 시간이 미래로 향하진 않았다. 거대한 운석의 충돌이나 뭐 그런건 없었지만 그 시간이 멈추자 다른 것이 움직였다. 아침에 일어나 새로운 연구를 확인하고 누구보다 발 빠르게 정보를 습득해야했다. 남들은 어린애처럼 그런 취미를 가진 게 볼썽사납다지만 그건 그들만의 이야기였다. 새로운 지식을 접하고 즐기는 건 하나의 취미라고 해도 결국 자신을 이루는 원대하고 거대한 업적이었다. 창현이 검색하고 즐길 때 알게된 지구 종말의 가설 중 한 가지는 동일한 멸망이였다. 누군가 2012년의 지구 종말을 논하고 말했지만 순 거짓부렁이었으니 이번에도 우스겟소리라며 심드렁한 얼굴로 가설을 읽으며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그의 방엔 조신우가 점프를 하는 포스터가 걸려있었고 신우고 체육복이 걸려 있었으며 어머님이 정성스레 다려놓은 교복도 함께 걸려 있었다. 조신우에 대해 깊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는 필히 좋은 선배였다. 조신우에 대한 생각은 딱 그정도였으나 자신의 무심함과 온갖 애정과 정성이 단지 티라노 한 개에 꽂혀 있어서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여전히 천천히 내려 읽던 창현은 별 다른 생각없이 창을 껐다. 종말이 온다면 결국 구원할 방법도 있다는 것 아닌가? 남자는 몽상가를 꿈꾸지만 현실주의자였다. 그러나 다른 한 남자는 현실주의를 꿈꾸지만 몽상가였다. 리셋이 되고 새로운 화면으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되는 게임들을 보면 종종 게임처럼 끝이 나고 다음의 여전함은 없길 바란적이 있었다. 늘상 즐겁기만 하던건 아니었으니 조신우는 여전히 굴러가는 자신의 삶에 맞춰 움직이는 병정과도 같다. 세상은 멸망했으나 여전히 시간을 흐르고 시험대에 오른 이 무생물들처럼 언젠가 죽을 자신의 삶을 저울질 하며 하루하루를 시험하는 신의 장난질이다. 끝이 있는 레이스를 달리지만 안대로 눈을 가려 스스로조차 모르는 삶을 연맹해 가는 이것이 바로 불썽사나운 꼴이었다. 그렇게 매일이 지나며 차라리 태양의 고열에 사라졌다면 이 세계의 종말이 온전하게 오는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찾아다녔다.

7년의 미래가 끊어진 어느 날에 허창현은 그자리에 머물었다. 늘 기억속 쳇바퀴 돌듯 꾸는 꿈들은 늘 따사로운 햇살과 흙먼지 가득한 냄새를 풍겼고 이제 막 니스칠을 해 미끌하고 묘한 거슬림을 내는 왁스냄새가 늘상 존재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조신우에게 형님의 포스터는 멋집니다. 인석형님은 오늘도 할배같습니다. 라 말하며 여전한 고등학생으로 평범한 하루를 살아갔지만 현실에 대한 거부와 회피는 꿈에서 보여주는 자신의 환상일 뿐이다. 눈을 뜨면 거지같은 현실이 계속되는 걸.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현실에 암담함에 눈에 힘을 주며 꿈일거란 확신이 가득 들어차 노려봤으나 며칠이 지나자 현실임을 자각했다. 다행인 건 이곳이 과거 17년도에 살던 자신의 집인 듯 어떠한 폐허가 된 집에서 눈을 떴다는 것과 커튼으로 암전을 해놓지 않아 이젠 황변되어 빛바레 형태조차 사라진 신유고 조신우의 포스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6

신우의 일상이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고층을 노리고 다가오던 폭도들은 연구실을 부셔 버렸고 날아간 보고서와 종이만 나뒹굴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조신우는 아직 폭도들을 만나질 못했다는 점이다. 몇몇의 연구원들은 이미 폭도들에게 들켜 무참히 살해당했다는 비보가 전달되기도 했고 이미 진즉 가장 아래층의 고위간부들은 새곳으로 이동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시위 중 죽은 폭도들을 제외한 남은 폭도들은 세상 밖 사람들처럼 이곳을 점령하고 섬렵해 무법지대의 시설로 하나의 무정부시대가 들어선 곳처럼 변질시켰다. 조신우는 이제 이곳에서도 완전한 유토피아를 꾸릴 수 없게되자 이제야 인석을 따라가지 않음을 후회했다. 그렇게 어그러지기 시작한지 며칠, 조신우는 연구원 기숙실에 숨을 죽이고 침대 아래 숨어 눈만 도르르 도르르 굴렸다. 투박한 발자국이 몇 번이고 복도를 이동하며 돌아다녔다. 폭도들은 자신의 생존권에 대한 권리임을 알지만 타인에 대한 생존권은 무차별했다. 그들은 차별과 차등한 관계에서의 사이에서의 벽은 허물수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도망친 세상의 끝에 서있었다. 신우는 마지막 발소리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도 아직까지는 저들이 방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았고, 이미 잠긴 방들로 즐비하기에 이곳을 뚫고 들어오기엔 쉽지 않았다. 단, 마스터 키가 있지 않는 다는 조건하였지만 말이다. 신우는 간단한 보고서 서류더미와 위급용 구급상자, 노트북, 옷가지 물과 음식을 챙겨 나설 채비를 했다. 이제 이곳에서 안락하던 삶도 끝이니 어쩔 수 없었다. 아침이 되면 타는 태양에 이동에 제한이 걸렸으나 냉각기가 탑재된 창현과 비슷한 오토바이가 있다면 가능했고 최하위 지하층에 위치한 고위 간부들층과 인석과 몇명의 엔지니어들이 이용했던 비상탈출구를 이용하기, 마지막으로 창현이 말한 소위 ‘빙하기’인 저녁부터 새벽을 이용해 이곳을 탈출해야했다. 그렇지 않고선 이들을 뚫기엔 한계였다.

Denger 경고가 뜨며 안내 문구 속 모래폭풍 주의가 경보를 울리며 깜박였다. 허창현은 멸망은 막으려 서둘러 손수건을 반으로 접어 입을 가리고 스쿠터용 파일럿 고글을 썼다.

모래 폭풍 속을 질주할 이유는 없다. 굳이 그렇게 까지 필사적이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창현에게 조신우는 그런 필사적인 모습을 주게하는 존재였다. 태풍의 눈이 원래 고요해. 그래서 나는 여름 하늘, 구름을 잔뜩 껴놓고 잠잠한 걸 태풍의 눈 안에 있다고 생각해. 누가바를 들고 있던 신우는 하늘을 보며 잠시 멈추다 이어 말했다. 그래야, 다시 거센 비바람이 올 때 대비 할 수 있거든.

짜증나게 형님은 꼭 사람을 흔들어 놓습니다. 허창혀은 17년의 조신우를 떠올리다 지금 현대의 조신우도 함께 떠올렸다. 창현은 그게 짜증나 제 2륜 오토바이를 발로 쿡쿡 차댔다. 성질머리는 여전했는데 자신이 처한 상황과 공간, 모든 것은 변해있었다. 이곳에 오기 전 날 그런 대화를 나눠서 그렇습니까? 창현은 금세 맺힌 눈물을 달고 코를 훌쩍이며 먹어댔다. 지금의 조신우 앞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감적이 울컥해 가리기 급급했다. 형님은 형님이 아닙니다. 저를 보눈 두 눈과 저에게 말을 거는 입술, 바람에 흔들리던 머리칼은 다 형님인데 그 속에 계신 건 형님이 아닙니다. 빈 껍데리란 말입니다. 허창현은 자신이 기억하는 조신우가 그리웠다. 작은 키로 매일 맛없는 누가바를 먹으며 언제 올지 모를 소나기를 기다리면서 구름이 가득 껴 햇빛조차 들 수 없이 숨막히는 하늘을 보면 되려 웃으며 이제 곧 비가 올거라며 우리는 이 비를 피할 수 있을 거라 말하던 조신우를 떠올렸다. 꼭 그러면 자신이 뭐라도 된 듯 허창현의 머리칼을 쓰다듬어댔던 신우였는데 형님같지 않습니다… 왜 형님은- 입술을 꽉 깨물며 뒷말을 삼킨다. 멸망을 막을 수 있다면-. 조신우의 마지막을 막을수 있다면, 과거로부터 온 자신이 막을 수 없는 두 번째 멸망이 결국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게만 한다면. 허창현은 조신우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창현아-.”

거센 비바람이 올 때도, 나는 내 길을 개척해 나갈거야.

고개를 좌우로 털어내 잡념이나 사념을 떨쳐냈다. 신우 형님을 떠올리다니.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말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생각해보면 이곳에서 만난 조신우에게 어떤 장난도 쳐대지 않았다. 조신우에게 느낀 불쾌한 감각 때문이었다. 불쾌한 감각은 쉽게 떨칠 수 없이 허창현을 짓눌렀다. 17년에 두고 인사조차 하지 못한 조신우를 보는 듯한 두려움이 허창현을 괴롭혔으니 말이다. 그 조신우과 같다면 창현은 눈물을 한바가지 쏟아내면서 엉엉 울어대며 어리광을 피우고 싶었다. 신우 형님, 인석형님은 우리를 버리고 도망간 배신자 입니다. 라며 말이다. 그러나 허창현은 이곳의 결말도 엔딩도 알고 있는 제 3의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17년에 미리 본 결말과 오늘에서 만난 이야기의 결말. 차라리 이 결말을 조신우에게 맡기고 회피하고 싶으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은 두 번째 멸망을 막지 못할 것이니까.

창현이 도착한 뒤 모래 폭풍은 바람을 일으키며 모이더니 점점 거대해지며 크기를 푸풀려 갔다. 창현이 1분이라도 늦었더라면 자신은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것이란 걸 알았다. 정확한 시간과 스토리. 모든 것이 짜여진 것처럼 완벽하게 일치했다. 창현은 이미 알고 있는 연구원 전용 계단을 이용해 지하로 내려갔다. 이미 뜯긴 입구는 무너져 아귀를 벌린 뱀처럼 보이면서도 무간도처럼 보였다. 차라리 끔찍한 비명이라도 들렸더라면 사람이 있으리라 짐작하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없는 무의 존재임을 말하듯 고요했다. 몇몇의 시체가 나뒹굴었고 사람들의 썩은 살을 파먹는 쥐들이 보였다. 시체 더미를 지나자 어디서 구한지 모를 군사용 철조망과 바리게이트가 쳐져있었다. 이곳 지하 2~3층 사람들이 막아 자신들의 거처를 만들때 사용했을 것이다. 철조망과 바리게이트를 친 구조물들을 치워 틈을 만들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조신우는 조심이 문을 열고 복도의 상황을 살폈다. 사람들은 없는지 이곳에 위험 장치는 없는지 조신우는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길이 많이 남아있는 사실이 끔찍하게 괴로웠지만 해야한다는 사실 하나로도 이미 동기부여는 끝이었다. 조심스레 한 발자국을 떼 복도에 몸을 밀어 넣고 나오며 조용한 인기척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비상계단이 있다. 그곳으로 들어가 지하로 내려가 길을 확인한다. 운이 좋다면 뚫렸을 것이고 안좋다면 이미 막혔을 것. 자신의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일생일대의 운명의 기로였다.

* 대충 신우의 지하 탐방기와 창현의 지하 탐방기 및 극적 상봉 완료… (어우)

————

자신의 거처에 침범해 침대에 앉아 있는 신우를 내려보던 창현이 이마를 쿵 맞댔다. 키큰 녀석이 그러고 있으니 꼭 귀신같기도 해보였다. 신우는 창현의 모습에 당황해 멀뚱히 바라만 봤다. 창현은 곧 시선을 맞추고 이마를 대어 보다 고양이가 키스하듯 코 끝을 맞대기도 했다. 꼭 그모습에서 고양이같네 신우는 조용히 생각했다. 창현의 자신위 기억을 찾는 듯 익숙함을 찾는 듯 몇 번이고 맞댄 코를 지분이다 무릎을 꿇고 앉아 다리 사이로 파고들어 허벅지를 얼굴을 댔다. 마른 볼살이 툭 튀어나왔다. 신우는 익숙하듯 머리카락을 북북 긁어줬다.

“이름도, 얼굴도 모든게 다 형님인데 형님이 아닙니다.”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 딱딱합니다.”

허벅지에 댄 볼이 눌려 어눌한 말투가 흘러 나오자 신우는 푸흑 웃음을 터트렸다. 창현은 말이 없었다. 그런 창현의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형님은 신우형님이 아닙니다. 그저 닮은, 아주아주 닮은 사람일 뿐입니다. 눈도 코도 입술도 모든게.

“제가 알던 형님과 닮았는데 당신은 그 형님이 아닙니다.”

창현은 조신우를 말을 마치고 올려보았다. 형님, 사실 저는 형님한테 죄를 지어 속죄로 이렇게 루프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포스터에 험한 말을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두 눈에 조신우를 담던 창현이 눈을 감고 얼굴을 움직여 허벅지에 비적이며 눈을 감았다.

조신우, 조신우. 창현의 입 안에 맴도는 그 이름이였다. 다시 형님을 잃기 전에 -. 지쳤던지 창현은 금세 잠에 들었다. 신우는 그 자리에 부동자세로 앉아 창현의 머리카락만 쓸어주었다. 무슨 생각인지, 무슨 이유인지 창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침대 뒤로 몸을 풀썩 눕히려다 실패한 신우는 저먼치에 있는 베개를 들고 창현을 눕히곤 빠져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액자나 포스터가 있었는지 크기에 맞게 빛바랜 벽지가 눈에 띄었다. 오랜시간 이곳에 있었던건 창현의 마음에 든 물건이였음을 짐작했다. 손 끝으로 어루만지며 벽지의 결을 느낀다. 빛바랜 세월만큼 벽지 무늬도 지워져있었다.

“신우 형님.”

허창현은 처음 신우를 보며 형님이란 말을 붙였다. 그의 말에 적잖게 놀란 신우가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돌려 잠든 창현을 잠시 지켜보다 다시 몸을 돌렸다. 잠꼬대도 요란하다 쟨. 신우는 다시 방 벽무늬를 손끝 감촉으로 느껴 만지며 천천히 방을 돌았다. 창현이 살아간 흔적이 세월에 묻어 벽에 함께 녹여져 있었다.

“.. 포스터는 정말 멋있었습니다. 질투를 해서 그렇습니다. 눈, 코, 입… 매일 형님의 얼굴을 보며 그 안에 저를 떠올렸습니다. 형님.”

잠꼬대 한 번 길다. 사연없는 이야기가 어디 있겠냐 신우는 가볍게 웃으며 창현이 매일 만졌을 티라노 헬멧을 만졌다.

“… 참 뭐같죠. 과거로 돌아간다면 형님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내일이면 다시. 아니 어쩌면 이 시간의 끈이 끊어졌을 때야, 만날까. 처음 형님이 죽었을 때 어쩌면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과 즐거움에 웃었습니다. 싸이고패스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저는 돌아가지 못했고 형님은 다시 살아있었죠.”

“뭐-”

신우.. 신우 형님. 몸을 돌린 신우 앞에 어느새 나타난 창현이 고개를 푹 숙이며 서있었다.

“형님… 형님을 만난 그곳에서 형님의 죽음을 봤었을 때 좌절이 그리고 지금 제 앞에 서 있음에도 여전히 이 공간에 갇인 절망이 저를 덮쳐 고통에 내던져지고 있는 지금. 저는 어떻게 해야 형님에게 돌아갈 수 있을까요?”

눈물을 흘리는 창현의 모습에 조신우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바라는 이는 자신임에도 자신 안에 있는 그 ‘조신우’라는 존재에게 애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미안, 미안하다. 신우는 그제야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회피를 했다. 창현은 더이상 말은 없었다. 긴 적막과 민망함이 공간에 가득했다. 차라리 나갈 수 있더라면 오히려 잠시 바람이나 쐘 수 있는데-

“형님, 저는 형님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마저 허락지 않는 세계가 원망스러웠다.

숨겨진 이야기)

2017년의 쌍용기가 끝으로 신우의 낙방은 끝이 났다. 조신우라는 남자의 집념과 집착, 그로 자신을 증명해낸 것은 실로 대단했다. 그래서였는지 몰랐다. 창현은 신우를 자신의 곁에 두고 싶어함도 지우는 것도 싫었다. 요새는 잠에 들면 이상한 곳에서 눈을 뜹니다. 창현의 말에 아이스크림을 먹던 신우와 음료수를 마시던 인석이 동시에 그를 봤다. 꿈? 이상하네. 신우의 말에 창현은 고개를 끄덕이지만 두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늘 꿈 속에서 형님이 죽고 또 죽어서 제 손엔 붉은 피가 한가득 묻어있습니다. 차마 불길해서 혹여나 신우에게 피해가 갈까 말조차 못하고 제 숨에 넣어 뱉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신우와 인석은 그가 쉰 한숨이 잠을 자지 못해 절여진 피곤이라 쉽게 생각한다. 그래서였을지 모른다. 조신우가 찍은 포스터를 달라고 떼를 쓰고, 인석에게 졸업식에는 머리를 내리고 오라고 닥달한다. 지워지는 신우와 인석을 지우게만 될 까봐 두려웠다. 간혹가다 꾸는 꿈은 꽤나 신중했고 두려울만큼 절망적이었다. 차라리 꿈이라서 다행일정도로 허창현에겐 무서운 악몽이었다.

“요즘 창현이가 맥아리가 없어.”

“… 티라노 티비 구독자 빠졌나?”

“… 가능성 있네.”

어두운 낮빛을 한 창현을 보며 걱정하던 신우와 인석은 피카츄 사줄게. 가자 창현아. 축처진 그를 일으켜 세웠다. 창현은 양팔을 신우와 인석에게 잡혀 분식집으로 향했다.

포스터를 받고 돌아와 방 벽에 붙여 메모지를 꺼내 한 자 한 자 정성을 드려 메모를 써내렸다.

‘졸업 축하드립니다.’

‘다음에도 같이 농구하고 싶습니다.’

‘…. 보고싶을 겁니다.’

신우에게 하지 못한 말을 적어 내리며 천천히 몇 번이고 펜으로 선을 죽죽 그어 제 진심을 돌려돌려 적었다. 몇 번이고 고쳐 쓰려해도 구겨 휴지통으로 던져버리던 창현은 메모지를 다 쓰고 나서야 펜을 내렸으나 포스터에 붙은 메모지는 고작 3장 뿐이었다. 창현은 뒷 머리를 거칠게 벅벅 긁어내며 성질을 부리곤 개꿈이라 치부하며 잊어버리기 위해 노트북에 티라노 연구를 검색하다 갈피를 잡지 못한 마음이 싱숭생숭해져 결국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잠에 드는게 두려워 몇 번을 뒤척이려다 실패하곤 곤히 긴 단잠에 빠졌다. 꿈이란 짧고 긴 여행 속, 창현은 다시 반복되는 절망만 마주할 뿐이었다.

‘구해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형님.’

나뒹구는 메모지만 가득한 방, 창현은 조신우를 구하기 위해 다시 그곳으로 떠났다.

수정하기.. 루프물 맞는데… 죽은거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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