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비지타임 2차 창작

[승재] 카페

승재_전력60분 참여글 / 주제 : 카페

시합 전에 농구화 끈을 새로 묶는 건 늘 하던 일이다. 그게 연습 시합이든 공식경기든 상관없이, 수십번도 넘게 해왔던 루틴이었다. 그러나 쌍용기 결승전을 앞두고 농구화 끈을 묶는 지금, 임승대는 몇 번이나 손에서 끈이 미끄러졌다. 제아무리 낙점 된 우승 후보라지만 결승전이 긴장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비단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니었다.

"...형, 승대형!"

"응?"

"음료 뭐 드실 거예요. 저기 경기장 앞에 카페에서 사 온 대요."

한 학년 후배이자 장도 농구부의 주전 멤버 중 한 명인 주찬양이 물었다.

"아아, 거기? 그러면... 거기 아직도 레모네이드 파나? 거기 레모네이드 특이하고 맛있었는데."

"잘 모르겠어요. 저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요."

"음, 나도 최근엔 안 가봐서. 마지막으로 갔던 게...."

하려던 말을 멈추더니 임승대의 입에서 탄식 같은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그러더니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지켜보던 주찬양이 '승대형?' 하고 부르자 그제야 다시 올려다보며 말한다.

"...난 그냥 아이스 아메리카노 마실 게."


사실 맛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처음 한 입 먹었을 때 머리가 쭈뼛 서는 것처럼 시큼하게 톡 쏘는 맛이 인상 깊었다. 그리고 그 집 레모네이드는 독특한 점이 있었다. 흔히 아는 노란 레몬색이 아닌 푸른색이었다.

'아이스티 하나랑.... 승대 니는 뭐 물래?'

'내는 음, 안 먹어 본 걸로 먹고 싶은데.'

그 날은 시합이 끝나고 부산으로 내려가기 전에 진재유와 잠깐 마실 걸 사러 갔었다. 카운터 앞에서 진재유의 동그란 머리통 위에 턱을 얹고 메뉴판을 훑어보는데 눈에 띄는 메뉴가 있었다.

'저거, 블루 레모네이드.'

'블루? 옆에 그냥 레모네이드도 있는데?'

'잼민이 니 깔맞춤 모르나! 그리고 가격도 똑같다 아이가.'

입고 있던 푸른색 저지의 가슴 부분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확실히 그날의 임승대는 좀 격양되어 있었다. 그 이유를 모르지 않는 진재유는 웃으며 마저 주문을 했다. 임승대는 그새를 못 참고 카페를 기웃거렸다. 그러다 카페 구석의 한쪽 벽면 앞에 멈추어 섰다. 그 곳은 이 카페에 방문한 사람들이 간단한 메모를 남길 수 있게 마련해놓은 방명록 같은 공간이었다. 임승대는 벽에 붙은 무수히 많은 종이 위에 적힌 글씨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대부분 '누구누구 왔다 감' 같은 별 의미 없는 내용이 많았으나 간혹 누군가의 꿈이나 소원 같은 것들이 적혀 있기도 했다. 한참을 보고 있는데 시야에 불쑥 파란 무언가가 들어왔다. 얼음이 가득 담긴 컵에 시원한 푸른색 음료와 레몬 한 조각이 꽂혀 있었다. 진재유가 한 팔엔 아이스티를 들고 반대쪽에 블루 레모네이드를 들고 승대에게 내밀고 있었다. 임승대는 씨익 웃으며 음료를 받아들고는 한 모금 쭉 빨았다.

'윽, 쌔그랍다.'

'맞나.'

'정신도 번쩍 들고 좋네. 재유, 여 봐봐라!'

'뭔데?'

'방명록 같은 건데, 우리도 하나 쓰자.'

진재유가 대답하기도 전에 임승대는 벌써 앞에 놓인 메모지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손에 쥔 음료와 비슷한 색깔의 메모지를 골라서 꺼내 들었다. 진재유는 그 옆에서 목을 길게 빼고 승대가 뭐라고 적을지 보고 있었다. 펜을 잡은 손이 꾹꾹 눌러 적은 글씨는 '지상! 최강!'이었다. 그걸 손바닥에 붙여서 자랑스럽게 보여주는데 진재유는 결국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날은 임승대와 진재유가 투맨게임으로 장도고를 상대로 50점 넘게 넣고 아깝게 패한 날이었다. 그러니 임승대가 저렇게 들떠있는 게 당연했다.

'재유, 니도 하나 써라.'

진재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임승대는 잠깐 아쉬워하더니 본인이 적은 메모지를 벽면 한 복판에 잘 보이게 붙였다. 그걸 보는 진재유의 표정이 어쩐지 뿌듯해 보여서 임승대는 한층 더 고양되었다. 그땐 정말로, 진재유와 함께라면 오르지 못 할 곳이 없어 보였다.

'우리 나중에 결승 올라갈 때 여기 다시 오면, 그때도 이 종이가 그대로 남아 있을까?'

'와, 니 꿈도 크다.'

'못 할 게 뭐 있는데? 니랑 내랑 오늘 장도도 이길 뻔했다!'

'그라믄 저 종이 떨어지기 전에 결승까지 가야겠네.'

'맞다. 우리 결승전 가면 여 다시 와야 한다. 이거 약속이다!'

그러나 그건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되었다. 임승대는 그로부터 몇 달 뒤,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장도고로 전학을 갔다. 진재유에겐 말하지 않았다. 한발 늦게 임승대의 전학 사실을 알게 된 진재유로부터 메시지를 받았지만 답장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진재유가 제게 보낸 말들을 보고 있으면 자꾸만 후회가 몰려왔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결국 임승대는 진재유의 연락처와 함께 그간 나눴던 모든 대화들을 전부 지웠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바꿨다. 아주 작은 여지조차 남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외면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잠시 후, 시합이 시작되면 임승대는 근 2년 만에 진재유와 코트 위에 마주 선다. 그것도 하필이면, 같이 결승전에 올라가자고 했던 그 경기장에서. 둘 다 코트 위에 있으니 어쩌면 같이 결승에 올라간 것도 맞았다. 그러나 과거에 그들이 약속했던 건, 나란히 같은 곳을 보고 서는 것이지 지금처럼 서로 마주 보고 서는 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임승대가 자초한 일이다.

임승대는 제 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집어 들었다. 일회용 컵에 담긴 검은색에 가까운 액체를 가만히 보다가 한 모금 마셨다. 어쩐지, 오늘따라 더 쓰게만 느껴졌다.


경기장을 벗어나 밖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임승대는 스스로가 너무 우스웠다. 지금 내가 거길 가보는 게 맞나,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렇지만 가야만 했다. 그는 진재유와 했던 무수히 많은 약속을 어겼지만 이번 만큼은 지키고 싶었다. 분명 처음에 약속했던 형태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그 짜치는 구호는 언제까지 쓸 긴데? 좀 바까라.'

'와? 낸 맘에 드는데.'

아직 남아 있을까? 그게 아직 남아 있다면....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이내 익숙한 벽면을 발견했다. 그곳엔 여전히 많은 메모지가 붙어 있었다. 홀린 듯 그 앞으로 걸어가면서, 임승대는 마치 2년 전 그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때와 달리 까만 옷을 입고 서서, 무수히 많은 쪽지 중에 과거 자신과 진재유의 꿈을 담았던 파란색 종이를 찾아 헤맸다. 바쁘게 돌아다니던 눈동자가 한 곳에서 멈췄다. 파란 종이 위에 적힌 커다란 네 글자가 아직도 선명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너 거기 갔다고 나쁘게 생각 안 한다. 가는 게 당연한 건데.'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지. 그것만 좀 섭섭하다.'

'가서 잘해라. 그래야 우리가 마음이 후련하니까.'

임승대는 손을 뻗어 벽에 붙은 파란 종이를 떼어낸다. 거기엔 2년 전에 적은 네 글자 말고도 다른 필체로 적힌 다른 글자들이 있었다. 그건 임승대가 몰라볼 수 없는 글씨체였다.

지상! 최강!

010-XXX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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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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