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 트립
상호병찬
그 순간은 매우 찰나 같았으며 동시에 길었다. 기상호는 제 앞에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눈을 질끈 감았고, 그렇게 감으면서도 다 감기지 않은 눈꺼풀 사이로 제 몸이 넘어지듯이 앞으로 이동하는 것과 동시에 저와 아주 똑 닮은 누군가가 제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저게 뭐지? 제대로 된 판단을 하기도 전에 기상호는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감각을 느끼며 몰려오는 멀미에 구토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몸을 웅크렸다.
고통의 시간은 길지 않았고 넘어질 것 같았던 몸은 어딘가에 부딪힌다. 땅이라기엔 부드럽고 따뜻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저를 감싸오는 것을 느끼며 그제야 기상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안겼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크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아주 익숙했다.
"상호야! 기상호!!"
"…병찬햄?“
기상호는 그대로 고개를 든다. 제 앞에는 익숙하면서 낯선 박병찬이 있었다. 검은색의 병지머리, 깊이가 있으면서도 맑은 검은 눈동자, 쭉 찢어진 눈매, 살이 도톰히 있어 주름 하나 없는 눈두덩이, 전체적으로 매끈한 얼굴. 그것들은 익숙했으나 있는 대로 찡그려진 미간 탓에 험악해진 얼굴은 좀 낯설었다. 이마에서 흐르는 피도 그렇고… 이제 보니 매끈한 얼굴 곳곳에 생채기가 나 있다. 그 모든 것을 올려다보던 기상호는 박병찬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당혹감을 확인하고서야 정신을 차린다.
"병찬햄? 왜 다쳤어요? 여긴 어디고…."
"…상호야."
"네?"
"얌전히 입 다물고 여기 있어."
강압적인 말투로 떠난 박병찬은 마치 만화 속의 주인공처럼…, 기상호가 인지하지 못하는 수단으로 주변에 달려드는 사람들과 싸우기 시작했다. 그것을 넋이 나간 상태로 멍하니 지켜보다가 끌어당기는 누군가로 인해 뒤쪽으로 피신 당한 기상호는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고서야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능력을 쓸 수 있다는 것 같다. 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센티넬, 그리고 그들이 능력을 쓸 때 생기는 정신적 과부하를 가라앉힐 수 있는 가이드라고 부른다지. 조금 전의 전투는 테러리스트 단체들의 습격에 대응하는 것이었고 이곳의 저는 가이드로서 그 전투에 참여했다가 특이한 능력에 당했다고. 무슨 능력이냐 물으니, 지금까지 파악한 바로는 랜덤한 평행 우주의 자기 자신과 바뀐다나. 중간부터는 영 현실감이 없어 이거 다 몰래카메라가 아닌가? 싶었으나 제 옆에서 짜증이 올라온 얼굴로 팔짱을 끼고 바닥을 탁탁 치는 박병찬을 보고 있자니 저게 다 구라를 위한 수작이면 병찬햄은 농구도 농구지만 배우를 해야 한다… 라는 생각을 하며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오타쿠의 장점 중 하나였다. 괴상한 일이 생겨도 일단 그렇구나. 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언제 돌아갈 수 있냐 물으니 보통 시간이 지나면 돌아오는데 해당 능력자가 폭주 상태였기 때문에 가늠이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최장 1달이었으나 폭주 시 능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종종 있어 현재 상호의 경우는 알 수 없다고. 기상호는 그 모든 정보를 듣고 머리를 긁적이다가 제 옆의 박병찬을 올려다보았다.
병찬은 상호를 보자 순간 눈가를 찌푸렸으나 곧 한숨을 푹 쉬고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쪽의 정보를 들으면서 기상호 역시 자신이 있던 세계의 정보를 말했다. 이곳의 기상호는 21살이라는데 지금 기상호는 16살이었다. 이곳의 박병찬과는 10살 차이였으며 들어보니 능력이고 싸움이고 없는, 적어도 이 세계보다는 꽤 안정된 곳에서 온 기상호는 아무래도 마음대로 짜증을 내기 어려운 상대인 것 같았다. 뻔히 저를 불편해하는 것이 느껴진다. 싫어한다기보다는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혹시나 겁을 먹을까 최대한 친절히 미소 짓는 병찬의 태도를 보고 상호는 어른이구나. 생각하며 말했다.
"다친 곳은 괜찮으세요?"
"어?"
"아까 이마에 피도 났잖아요."
"아…, 그거 내 피 아니야."
"엇, 넵…. …병찬햄이 안 다치셨으면 다행이고요."
"그래.“
대화가 이어지질 않는다. 자신이 아는 병찬이라면야 간편하게 농구 이야기라도 하며 대화를 시도해 보겠으나? 지금 제 앞의 병찬은 상호가 모르는 병찬이었다. 아까 싸우던 병찬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손짓 한 번에 누군가가 바닥에 처박혔고 가까이 온 사람한테는 주먹을 휘둘렀는데 그러니까 피가 튀기더라. 다른 사람이 그러는 꼴을 보면 좀 무서워하고 말았을 텐데 그 병찬햄이 그런다는 사실에 상호는 아직도 심장이 거세게 뛰는 기분이었다. 뭔가 보면 안 되는 걸 본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무섭다기보단 경악에 가까운 마음이었다. 운동선수인지라 타인에게 쉬이 손 뻗는 게 조심스러운 것도 있고 특히나…, 병찬이 그런다는 것이.
그러는 와중에 자신을 어색해하는 것을 보니 이쪽도 조금 어색해진다. 그래도 전엔 친한척하면 적당히 받아주셨는데 이 병찬햄은 받아주시려나…. 하지만 기상호는 어쩐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묘하게 무뚝뚝한 얼굴로 은근히 저를 거칠게 다뤄서 더 그런 것 같았다. 제 팔을 배려 없이 확 잡아당기면서 이쪽으로 오라고 하는데 아픔에 악, 소리를 질렀더니 걱정은커녕 웬 엄살이냐는 듯이 쳐다봤었지…. 그래 놓고 제가 살았던 세상과 제 나이를 말하자 안색이 창백해졌던 것이 훤하다. 여기의 저는 그래도 매우 튼튼했었던 모양이다.
한참의 침묵. 병찬은 어쩐지 착잡한 얼굴로 상호만 가만히 쳐다보더니 한숨을 푹 쉰다. 그것에 상호는 움찔했고 병찬은 버릇대로 손을 뻗어서 팔뚝을 쥐어틀려다 멈칫한다. 사실 아직도 손 뻗는 건 똑같은데 힘주기 전에 멈칫하니 그나마 괜찮았다. 아까 잡아당긴 것도 저를 막 대하기보다는 버릇인 거 같고. 상호는 아직 거두어지지 않은 손을 슬쩍 잡아봤다. 그것을 병찬이 조심스레 맞잡는다. 태도만 보면 연약한 어린애를 대하는 꼴이다. 아무리 그래도 키는 거의 비슷하면서. 물론 제 팔을 틀어쥐던 악력을 생각하면 감사하긴 했다. 아깐 엄살이 아니라 진짜 팔이 뽑히는 줄 알았으니까.
이것저것 말해주던 사람은 인사 한마디 남기고 나간다. 이제 방에는 병찬과 상호, 둘만 남아있었다. 손을 마주 잡은 둘은 서로를 살피기만 했고, 이어 병찬이 먼저 입을 연다.
"음, 상호야?"
"네."
"센티넬과 가이드가 뭔지는 들었지."
"네."
"보통은 1:1로 전담 파트너를 맺거든."
"네."
"네가 내 파트너였어."
"와, 진짜요?“
무섭고 위화감이 들었던 건 둘째치고 싸우는 병찬은 진짜 만화에나 나올법할 정도로 엄청 멋졌기 때문에 상호는 그 옆에서 열심히 병찬햄을 보조하는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다 그런 행운을 잡은 건진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병찬의 옆에 있을 수 있다니 조금 부럽기도 했다. 세계관 최강자 옆에 조력자…. 멋있겠다….
"어, 그래서… 우리가 숙소를 같이 쓰거든."
"아, 네.“
"…일단 숙소로 데려다줄게.“
병찬은 숙소에 상호를 데려다주면서 나름 분위기를 풀어보려는지 이런저런 말을 했지만,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있어야지. 병찬은 날씨 이야기를 한번 했다가 상호가 애매하게 반응하자 막막한 얼굴로 웃음을 흘렸고 상호는 그 정성에 보답하고자 머뭇거리며 농구 이야기를 꺼내봤지만, 이곳의 병찬은 농구가 뭔지만 알았다. 결국 둘은 애매한 침묵 속에서 숙소에 도착했고 병찬은 안에 있으라는 말 한마디만 남긴 채 바로 나가버렸다. 그렇게 상호는 숙소 한 가운데서 덩그러니 남게 된다.
실상 남의 숙소나 마찬가지지만 아마 이곳에서 지내게 되겠지 싶어 상호는 제 지낼 곳을 파악하기로 했다. 천천히 둘러보니 방이 두 개가 있었다. 깔끔한 것이 이게 내 방인가, 했다가 혹시나 해 다른 방에 가보니 거긴 옷방이다. 그대로 상호는 욕실을 찾아보았고 그 안에서 2개씩 꽂힌 칫솔을 멀끔히 봤다. 그대로 밖으로 나와 깔끔하던 방을 한 번 더 둘러보았고 그대로 숙소 곳곳을 뒤적거린 상호는 기이한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아니겠지? 상호는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보고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센티넬과 가이드 설명서를 발견하고 읽었다. 아마도 저 보라고 둔 것 같다 싶어서.
'가이드와 센티넬의 유대감이 높을수록 효율이 같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보통 친구나 연인이 되는 것을 권장합니다.‘
여기까지 상황을 정리한 기상호는 결론을 내린다. 뭔진 모르겠지만 여기의 내랑 병찬햄은 사귀는 것 같다…. 이거 숙소 꼴이 거의 거시기한 배치 아니가…. 아니면 말고 뭐. 어쨌든 여기의 병찬은 제가 아는 병찬이 아니기 때문에 상호는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다른 사람이라 자신은 모르는 일이고 저쪽도 딱히 저 자신을 이쪽의 저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서 더 그랬다.
근데 난 대체 얼마나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내랑 바뀐 내는 거기서 잘 지낼라나. 하씨… 경기 전까지는 돌아가야 할 텐데. 들어보니 여기 내는 좀 몸 쓸 줄 아는 거 같던데… …내보다 더 잘하면 우짜지… 막 돌아갔는데 햄들이 걔로 돌려달라고 하면? 그러면 뭐 내 없이 잘해보라고 해야지…
실제로 그럴 거라고 믿진 않았기 때문에 상호는 실없이 낄낄거렸다. 그리고선 다시 옷방에 슬그머니 들어간다. 미안하지만 이쪽은 연습하다 온 탓에 은근히 땀범벅이었고 이 상태로 기약 없이 기다리기에는 힘들다. 어차피 같이 살았으니까 이 정도는 봐주지 않으려나? 안 봐주면 아양이라도 떨어봐야지 뭐. 결과적으로 평행 우주의 자신이니 내 옷이기도 하지 않나.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적당히 편해 보이는 옷을 집어 들고 욕실을 찾아낸 뒤 몸을 씻었다. 그 뒤 어떻게든 드라이기를 찾아내어 머리를 말린다. 그것을 잘 정리해 원래 자리에 넣어놓은 뒤 그런 다음 침대에 푹 누워버린다. 휴대폰은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탓에 압수당하진 않았으나 사용을 금해달라고 했고 기상호는 하지 말라는 것을 일부러 어겨보는 타입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누웠다. 평소에도 낮잠을 잘 기회가 있으면 매우 잘 잤던지라 기상호는 눈을 감았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데. 그런 생각에 바로 잠들 수는 없었지만, 피곤한 몸은 오래지 않아 잠에 빠져들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상호는 몸을 일으킨다. 시끄러워서 깬 건 아니고 그냥 눈이 떠진 거다. 어두운 것을 보니 밤인 것 같은데 잔다고 어둠에 익숙해진 눈과 함께 창문으로 들어오는 달빛 덕에 어느 정도 명암을 구분할 수 있었다. 씻은 듯 수건을 목에 걸고 편한 옷으로 입고 있는 병찬이 침대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인다. 상호는 하품을 하면서 말했다.
"이제 오셨어요?"
"어. 내가 깨웠어?"
"아녜요…. 어두운데 불 키지 그러셨어요.“
”뭘, 괜찮아.“
병찬이 침대에 앉는다. 저를 흘끔 쳐다보다 등을 보인 채로 드라이기를 잡아 머리를 말리는 꼴을 상호는 멀거니 지켜보았다. 말릴라면 안을 말려야 할 텐데 겉만 말리는 걸 보다가 상호는 흠, 소리를 내더니 무릎으로 병찬에게 살살 다가갔다.
"머리 말려드릴까요?"
"…부탁해도 돼?"
"네.“
상호는 드라이기를 받아서 병찬의 머리를 말려주기 시작했다. 한 번쯤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좋은 기회였다. 얇은 머리카락은 몇 번 바람을 쐬어주면 빠르게 마른다. 손끝으로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흐트러트리며 꼼꼼히 말렸다. 뭉쳐져 있던 머리카락은 서서히 풀어진다. 내 쪽 병찬햄도 이런 감촉이려나. 흠…. 존경하는 햄의 머리를 이렇게 대놓고 만질 기회는 흔치 않다. 마지막으로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두피를 꾹꾹 눌러본 상호는 괜스레 속으로 큭큭… 거리며 완전히 마른 것을 확인하고 드라이기를 끈다.
병찬이 몸을 돌린다. 침대가 하나니까 같이 자는 거겠지? 싶어 몸을 뒤로 물려서 공간을 마련해주자 자연스럽게 옆에 눕는다. 역시 그런가…. 상호는 미묘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재빨리 옆에 누웠다. 그 상태로 병찬이 말한다.
"상호야. 아마 내일부터는 뭘 들을 텐데 꼭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알았지?"
"? 네. 알았어요.“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병찬이 누운 채로 상호에게 등을 보인다. 상호는 그 뒷모습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합숙 훈련 때의 병찬을 문득 떠올린다. 그때는 오른쪽으로 누워 자던데 이번엔 왼쪽이네. 깊이 생각할 것은 아니었기에 상호도 눈을 감았다. 잠을 많이 잔 상태라 바로 잠들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계속 눈을 감고 있으면 결국 잠이 든다. 그러는 동안에도 상호는 제 옆의 병찬 역시 잠이 들지 못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상호는 그다음 날 새벽같이 일어났다. 병찬은 아직 자는 것 같길래 아주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오려고 했건만 얼마나 예민한 건지, 몸을 일으키고 슬그머니 병찬의 위로 조심스럽게 지나가려고 할 때 번쩍 뜬 눈의 병찬과 시선이 마주쳤다. 아니 일부러 깨우려던 건 아니고…. 의미 없는 변명을 주워섬기다 상호는 민망함을 참고 물었다.
"밥은 어데서 먹어요?“
꼬르륵, 그 질문의 의도를 착각하게 하지 않겠다는 듯 배꼽시계가 울린다. 어쩔 수 없었다. 상호는 점심을 먹은 후 훈련하는 도중에 여기로 끌려왔고 깨끗이 씻은 뒤엔 저녁도 못 먹고 낮에 잠을 자서 새벽에 깼다. 저녁을 걸렀으니 배고플 수밖에…. 그것에 병찬은 하품을 하면서 아침 시간이 되면 식당에서 먹을 수 있고, 같이 가자고 답했다. 그래서 상호는 알겠다고 했다. 그날 입을만한 옷은 병찬이 골라주었다. 하나같이 어두침침한 옷밖에 없어서 그냥 주는 대로 대충 입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서는 여전히 침묵이다. 와중에 병찬이 스트레칭을 하길래 상호도 엉거주춤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했다. 그렇게 몸을 풀고 나서는 같이 뛰겠냐고 물어오기에 그러자 했더니 그대로 나가서 운동장으로 보이는 곳으로 갔다. 이미 많은 사람이 뛰거나 운동을 하고 있었고 모두가 병찬에게 인사를 했다. 상호에게도 건네지는 인사가 많아 그저 고개만 꾸벅꾸벅 숙여대고 말았다.
그러고 병찬을 따라서 좀 뛰다가 우렁찬 음악 소리가 들리자 병찬이 러닝을 멈추고 상호를 식당으로 데려갔다. 식당 밥은 엄청 맛있어서 흘끔 눈치를 보니 다시 가서 받을 수 있다는 말에 세 그릇을 끝장내버린다. 그 뒤 다시 병찬이 시키는 대로 숙소로 돌아와 한 번 씻고 옷을 갈아입으니 또 어딘가로 이동 한다. 도착한 곳은 정보실이라고 적혀있었다. 병찬은 거기다가 상호를 놔두고 가버렸기에 상호는 그냥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니 웬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앞에는 하얀 스크린이 내려와 있었고 중간에 빔프로젝터가 보인다. 앞에 앉으세요. 라는 안내에 따라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색하게 앞의 사람만 쳐다보니 익숙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시는 것에 상호도 어색하게나마 웃어 보였다.
들어보니 현재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굉장히 많았고, 그로 인한 피해자들을 분석하여 만든 대처 방법에 따라 관련 정보를 쉽게 알려주기 위한 시간이란다. 특히나 피해자들이 이 세계에서 가이드, 혹은 센티넬일 경우 이쪽으로 강제적으로 교체된 이들도 원래의 이들처럼 관련 적성이 있는 경우가 보통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자신이 가이드 적성이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이며 그럴 경우 강제할 수는 없으나 인력이 넉넉하지 않은 만큼 자신에게 관련 업무를 처리해주길 바란다는 거였다.
그리고서는 책자에 적힌 것보다 좀 더 세세한 정보들을 알려준다. 상호는 별 다른 말 없이, 종종 궁금한 게 있으면 손을 들면서 가르쳐주는 것을 익혔고 수업? 이 끝난 뒤에 어쩌겠냐 의사를 묻는 것에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생각 없이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여기는 할 것도 없었고 보아하니 가이드 업무라는 게 오전에는 서류 업무를 돕다가 오후부터는 체력단련을 하고 중간중간 호출이 오면 센티넬들 가이딩을 해주러 가는 게 전부인 것 같았다. 게다가 당장 상호는 아는 게 없으니 서류 업무도 할 수 없어 그냥 체력 단련만 열심히 하고, 중간중간 전담 파트너인 병찬만 가이딩을 해주면 된단다.
들어보니 가이드 수가 센티넬보다도 적은 편이라 한 명 한 명이 소중하다는데 상호는… 자신이 할 수 있다는 일을 거절하기에는 영 마음이 걸렸다. 남이랑 스킨쉽을 하는 게 좀 꺼려지긴 했지만 아까 밥도 얻어먹었고… 특히나 자신은 아직 성인이 아니라 최대가 포옹이라는 말을 들어서 조금 안심하는 것도 있었다. 밥값 해야지. 응. 대충 그런 말로 자신을 토닥인 상호는 내미는 계약서를 나름 꼼꼼히 읽고 사인했다.
그렇게 밖으로 나오니 이번엔 다른 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따라가니 검사실이라는 곳이 보인다. 들어가니 병원에서 볼법한 장비들이 보였고 차가운 패드 같은 것들을 제 몸 이곳저곳에 붙인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기계 소리가 잔뜩 흘러갔고 조금 있다가 종이가 나온다. 그것을 가져간 뒤 한참 있다가 다시 사람이 들어온다.
"확인 결과 가이드 적성이 있으십니다. 원본처럼 B등급이시고 박병찬 센티넬과 그대로 파트너를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추가 질문 있나요?"
"어… 없습니다."
"좋습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아시나요?"
"아니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번에도 또 다른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안내에 따라 숙소로 돌아가면서 오늘 오후부터는 훈련실에 출석하여 체력단련을 받고, 종종 가이딩을 해야 할 때가 오겠으나 원하면 거절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받은 상호는 계속 고개만 끄덕여 보이다가 숙소에 도착했다.
돌아온 숙소에서 시간을 확인해보면… 수업 시간이 길지 않았던 터라 아마 점심시간이지 않을까 싶은 12시는 멀었다. 그 동안 뭘 하나… 상호는 의미 없이 방을 서성거리다가 그냥 침대에 누워버린다. 그 뒤 오늘 하루를 곰곰이 곱씹는 것이다.
솔직히 좀 현실감이 들지 않았는데 이제 생각해보면… 이거 좀 엄청 멋있는 거 아닌가. 이왕 이런 이세계에 온 김에 센티넬이었으면 좋았을 걸. 멋지게 불을 쏘거나 막 염력 같은 걸 쓰면 더 재밌었을 텐데. 그래도 일반인이 아니라 나름 뭔가 할 수 있는 가이드라는 건 나쁘지 않았다. 남한테 도움 되는 것도 좋지. 근데 B등급이면 턱걸이 아닌가. C등급부터는 민간인 취급이라던데. 내는 여기서도 고만고만하구먼…
상호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점심시간을 알리는 듯한 음악 소리가 들리자 밥을 먹으러 갔고 오후에는 물어물어 훈련실로 가서 훈련을 받았다. 솔직히 말해서 농구부 연습 보다 수십 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체력은 어디 가서 뒤지지 않는 편이라 어찌저찌 따라갈 만했다. 여기서도 막내 롤인 모양인지 아직 자신이 바뀐 걸 모르는 것 같은 사람들이 말을 걸면서 냅다 헤드록을 걸 때는 좀 곤란했지만… 진짜 아팠지만… 눈물 찔끔하면서 사정을 설명하면 모두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해주고 신경 써줘서 괜찮았다.
한참 몸을 굴리고 나면 또 저녁 시간이다. 그 후에는 자율 훈련이라는데 이쯤 되면 체력으론 자신 있는 기상호도 슬슬 힘들다. 그래서 상호는 튀었다. 밥 든든히 먹고 냅다 숙소로 날랐다는 뜻이다. 그렇게 숙소에 가서 씻고 침대에 처박혀있으면 살살 졸렸다. 시계를 보니 8시. 원래라면 다들 씻으면서 조금씩 잘 준비를 하는 시간이라 그런가. 지금 잠들면 진짜 꿀잠이겠는데. 이대로 자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리 생각한 상호는 몸에 힘을 쭉 빼고 눈을 감았다.
잠이 들락 말락 할 때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병찬햄이 왔구나. 졸린데. 그냥 잘까? 근데 인사는 해야지… 상호는 마음속으로 5초를 세고 눈을 떴고 어느새 제 옆에 와있는 병찬을 보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병찬은 그런 상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입꼬리를 슬쩍 올린다.
"안 잤었네?"
"네? 네…"
"형이 왔는데 인사도 안 해?"
"어서 오십쇼, 병찬햄!“
장난인가? 싶은데 어쩐지 장난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상호는 벌떡 몸을 일으키고 무릎을 꿇었다. 그 모습에 병찬은 한쪽 눈썹을 올리더니 가볍게 웃음을 흘린다. 기분 좋아 보이시는데 장난이셨던 듯?? 상호는 눈치를 봤고 병찬은 손을 휘적거린 뒤 욕실로 들어갔다. 편히 앉으라는 거겠지? 그대로 다리를 풀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어서 어제 병찬이 쓰고 정리해뒀던 위치를 떠올리고 드라이기를 꺼내 들었다.
물소리가 끝나면 병찬이 나온다. 이번에도 목에 수건을 걸고 있었다. 상호는 뿌듯한 얼굴로 드라이기를 들어 보인다.
"이번에도 제가 말려드릴게요!"
"…그래~“
어제는 좀 어색하게 굴더니 오늘은 좀 편하게 대해준다. 짐작해보자면 아마 자신을 어떻게 대할 건지 결정한 게 아닐까 싶었다. 하긴, 하루면 태도를 결정할 때가 되기도 했다. 침대에 걸터앉은 병찬에게 무릎으로 다가가 드라이기를 켠다. 여기 병찬햄은 26살이랬지. 자신과 10살이나 차이가 나서 그런 건지 아니면 사는 세계가 다른 건지. 병찬은 제 쪽의 병찬보다 훨씬 단단하고 어른스러워 보였지만 방금 전의 장난스러운 태도 덕인지 상호도 묘하게 벽이 내려갔다. 그래서 상호는 머리를 말려주며 말한다.
"저 여기서 가이드하기로 했거든요."
"어, 들었어."
"제 파트너는 병찬햄이랬잖아요."
"그랬지."
"근데 저는 아직 성인이 아니어서 포옹만 하면 된다고 하던데 그건 병찬햄도 마찬가지예요?"
"당연하지…“
혀차는 소리 하나로도 지금 병찬이 기가 찬다는 반응을 보인 게 눈에 선하다. 그것에 상호는 헤헤… 비굴하게 웃으며 괜히 드라이기를 더 현란하게 움직이며 입도 열심히 움직였다.
"원래 제 쪽의 병찬햄은 엄청 멋진 사람이거든요. 여기 와서 본 병찬햄도 엄청 멋졌구요! 근데 그런 대단한 사람하고 내가 그래 파트너 같은 거 되고 했다니까 쪼매 신기하고 좀 기분 좋네요."
"그러냐. 여기의 상호는 좀 징그러운데."
"저기서도 듣던 말이라 아마 별로 안 다르지 싶어요."
"귀염성 좀 떨어지는 건 똑같긴 하다."
"아아앙…"
"이상한 애교도 똑같고…"
"이잉…“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다 드라이기를 끈다. 병찬이 딱, 손을 튕기자 불이 꺼진다. 우와; 그러다 병찬이 몸을 돌리면 상호는 눈치 빠르게 벽 쪽으로 붙으며 자리를 만들었다. 병찬이 옆에 눕고, 상호도 옆에 눕는다. 상호는 어둠 속에서 병찬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등을 보이더니 제 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어두워서 얼굴은 거의 안 보였다. 상호는 가만히 누워있다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햄."
"그래, 상호 너도.“
상호는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슬쩍 뻗어 시트를 찬찬히 더듬으며 병찬의 손을 찾았다. 가이딩은 모자란 게 문제지 넘치는 건 문제가 아니라서, 파트너들끼리는 계속 붙어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잘 때도 붙어서 자는 게 권장된다고 했던 것을 아직 기억하고 있던 탓이다. 처음 손을 잡았을 때는 장갑을 끼고 있었는데 지금은 벗은 탓에 손 이곳저곳에 배긴 굳은 살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손을 잡고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그리 조심스럽지는 않았는데, 병찬은 잠들지 않은 상태로도 그 손을 밀어내지 않아서 상호는 조금 더 만지작거리다가 눈을 감고 자기로 했다.
그 뒤로는 비슷한 나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병찬과 함께 아침 러닝을 나가고 밥을 먹은 뒤 간단한 수업을 받았다. 이 세계의 상식 같은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기상호는 그동안 센티넬과 가이드에 대해 좀 더 깊이 알 수 있었고 그들이 이곳에서 어떤 취급인지, 또 정부가 적으로 규정한 게 무엇인지를 들을 수 있었다. 듣기로는 센티넬과 가이드는 한국에선 공무원 취급이었고 등급이 높은 경우 일정의 의무기간으로 국가에 헌신해야 한다나. 물론 그렇게 헌신한 만큼 연금이나 추후 취업에 가산점을 준단다. 그래서 상호는 그냥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질문을 했다.
"병찬햄은 몇 등급이에요?"
"박병찬 센티넬의 경우에는 S급 센티넬이었는데 사정이 생겨서 A급 센티넬로 강등되었답니다."
"사정?"
"개인적인 사정이라 제가 말씀드리기는 어렵고 나중에 따로 물어보시는 게 어떨까요?"
"아하…“
보통 개인적인 사정이라고 하면 묻지 말란 소리지… 상호는 실수로라도 물어보지 말아야겠다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짧은 수업이 끝나면 점심시간 전까지는 농구공을 튀겼다. 돌아갈 때를 대비하여 여기서는 최대한 그 전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한다나. 그 전에 농구선수가 온 적이 있기 때문에 간단한 야외코트가 있었다. 덕에 상호는 점심시간 전까지 계속 슛연습을 했다.
그리고 점심을 먹고 힘든 체력 훈련을 하고 나면 또 저녁이다. 그렇게 너덜너덜해져 들어와 씻고 기다리면 병찬이 들어왔다. 병찬은 항상 상태가 달랐다. 대체로 병찬은 아침처럼 멀끔한 모습으로 돌아왔으나 가끔은 흙먼지가 잔뜩 묻거나 옷이 찢긴 몰골로 돌아오기도 했다. 사람 자체는 멀쩡했는데 옷만 그런 것도 재주다 싶었다. 사람도 멀쩡했던가? 가끔은 붕대를 칭칭 감고 와서 심장이 떨어질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병찬은 웃으면서 별거 아니라 일축하곤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별 거 아니야. 신경 쓰지 마. 병찬이 그런 말을 하면 상호는 그 말대로 했다. 괜히 시선도 주지 않았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냥 얌전히 있다가 병찬이 욕실 밖으로 나오면 웃으면서 머리를 말려드리겠다고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러면 병찬은 고맙다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가까이 다가와 등을 보이고 앉았다. 그럼 상호는 열심히 머리를 말려주고 그 뒤 같은 침대에 눕고. 경우에 따라선 작은 대화를 나누거나 혹은 너무 피곤한 날에는 곯아떨어졌다. 손을 꾹 잡은 채로.
일자가 지나간다. 보통은 2주 안에 돌아간다는데 상호는 그 날짜가 지나도 돌아가지 않았다. 폭주한 능력자는 하필 이동 관련 능력자가 붙어있던 덕에 도망을 가버려서 상호를 돌려주지도 못한다고 했다. 상호는 그렇군요. 괜찮아요. 하고 말았다. 사람이 바뀌어도 날짜는 계속 지나간다는데 그러면 이미 나가야 했던 경기는 시작 됐을 것이다. 내 없이 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바뀐 내를 집어넣어서 했으려나. 내 없으면 벤치멤버도 없는데 태성햄은 괜찮을까. 그 햄도 요즘엔 잘 하고 있긴 한데…
생각이 길어지면 그냥 머리 한 번 쓱쓱 저어 보이고 공을 던졌다. 처음에는 저녁 먹자마자 방에 박혀서 병찬만 마냥 기다렸는데 이제는 빈 시간에 공을 던지게 됐다. 애니라도 볼까 했는데 어쩐지 제가 살던 곳이랑 코드도 달랐고… 솔직히 말하자면 슬슬 불안해져서 그렇게 시간을 버리고 있는 것 같은 행동을 하면 불시에 허탈감이 몰려왔기 때문에 그랬다. 슛은 늘면 좋은 거니까. 돌아가서 연습 안 했냐고 하면 할 말 없는 것도 그러니까…
"상호야, 재밌어?“
또 다시 잡념에 빠져들어 하릴없이 공만 퉁퉁 튀기고 있으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돌리면 들어가는 중에 들렀는지 평소 입고 다니던 제복을 입은 병찬이 있었다. 맨날 반겨주기만 했지 병찬이 데리러 온 적은 처음이다. 상호는 그런 병찬을 가만히 지켜본다. 병찬햄도 경기에 나갔을까? 조형고랑은 또 마주했을까. 이제라도 돌아가면 경기에서 마주할 수 있으려나. 상호는 아직 지켜지지 않은 서로의 약속에 대해 떠올렸다가 그냥 환히 웃으며 병찬을 불렀다.
"햄!"
"응~ 햄이야."
"저 데리러 오신 거예요?"
"너 요즘 저녁에 여기서 뭐 한다길래 구경 왔지."
"슛 연습하고 있었어요."
"재밌어? 맨날 하네."
"재미는 없는데 연습해야 해서 그냥 해요. 훈련이죠, 뭐."
"그렇구나.“
병찬이 다가와 손을 내민다. 상호는 튀기던 공을 잡아 그의 손에 들려줬다. 상호를 따라 하듯 몇 번 바닥에 퉁퉁 공을 튀겨보던 병찬은 그대로 한 손으로 공을 던졌다.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던져진 공은 백보드를 맞고 튕겨 나온다. 이상한 곳으로 튀는 공에 병찬이 손 한 번을 까닥하자 공이 빨려 들어오듯이 병찬의 손으로 돌아왔다. 병찬은 다시 퉁퉁, 공을 튀기더니 던진다. 그것을 세 번 반복했을 때. 네 번째의 공은 깔끔히 림 안으로 들어갔다.
상호는 그러는 모습을 계속 쳐다보다가 공이 들어가고, 그 공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것을 시선으로 따라갔다. 센티넬들은 기본적으로 신체 능력이 좋다던데 병찬은 그 무거운 농구공을 한 손으로 가볍게 던지는 것으로 계속해서 3점 슛을 시도하고 끝내 성공했다. 별것도 아니라는 듯 놀라움은 없이 짧게 웃고 말았다. 그대로 병찬은 들어가자. 한 마디를 했고 상호는 네에. 대답한 뒤 공을 주워 왔다.
별 흥미도 없어 보이고 그저 무심하게 던지기만 하는 폼은, 제가 아는 병찬과 하나도 닮지 않았다. 그럼에도 재능은 있어 보였는데, 여기서도 병찬햄은 농구를 잘하는 걸까. 상호는 그게 좀 궁금했다. 그래서 병찬의 뒤를 졸졸 쫓아가면서 물었다.
"병찬햄은 농구 해본 적 있어요?"
"아니, 안 해봤는데."
"진짜요? 아까 보니까 잘 할 거 같던데."
"그런가? 근데 해서 뭐해. 어차피 여기 와서 굴러야 하는데 쓸데없는 거 안 하는 게 좋지.“
원래의 병찬햄이라면 그런 얘긴 안 했을 텐데. 상호는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지웠다. 아니지. 그렇게 단언하기에는 아직 많은 것을 모른다. 섣부른 판단은 하고 싶지 않다. 상호는 고개를 살짝 숙여 제 품의 농구공을 내려다보았다.
"여기 오기 전에는 뭐 했어요?"
"그냥 공부했어. 그래도 몸 쓰는 걸 꽤 잘해서 체육 교사를 할까 했는데 이렇게 됐네."
"여긴 언제 들어왔어요?"
"고등학교 들어와서 얼마 안 되어서 각성했어. 그때 바로 들어왔지."
"보통은 성인 되고 들어온다던데요?"
"뭐… 내가 워낙 강했어야지.“
숙소에 도착한다. 병찬이 먼저 씻는다고 들어갔고 상호는 꺼내두었던 천으로 농구공을 닦아낸다. 그 후 가만히 서서 기다리다가 병찬이 나오면 씻고 나온다. 병찬은 어색하게 침대에 앉아있었다. 상호는 그것에 웃어버리고 제 머리에 대충 수건을 말아놓은 다음 병찬의 머리부터 말려주었다. 너부터 하라는 말에 괜찮다며 굳이 등 뒤로 가려고 하니 병찬도 더 말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머리를 다 말리고 나면 눕는다. 이번에도 손을 잡았다. 상호는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감이 안 왔다. 그냥 당장… 어쩐지. 말하고 싶었다. 이제까지 일부러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말을 아껴놓고 지금 당장 말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호는 말했다.
"병찬햄."
"응?"
"제 쪽의 병찬햄은 농구를 했거든요. 엄청 잘했어요. 얼마나 잘했냐면… 진짜 저희가 농구 하는 곳에선 이길 사람이 없었어요. 비슷한 사람은 있었어도 딱 한 명 뿐이었고…“
상호는 제가 아는 박병찬을 꺼내 보인다. 농구를 무척 잘하는 박병찬. 농구를 사랑하는 박병찬. 세 번의 추락, 그런데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의지. 그리고 그가 저에게 주었던 용기, 그쪽의 병찬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저는 약속으로 받아들인 것 등을 다른 세계의 박병찬에게 말한다. 전에는 그저 제 앞의 병찬을 추켜세우기 위한 수단이었으나 이번에는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목적이다. 박병찬은 그 말을 가만히 들어주었다. 굉장히 흥미 있게 듣지는 않았으나 말하는 내내 상호의 눈을 쳐다보며 집중해주었다. 하지만 기상호는 박병찬을 많이 알지 못한다. 그 둘의 교류는 고작해야 그를 막아섰던 처음의 경기, 그리고 그 후의 합숙, 경기장에서 우연찮은 만남 외에는 어쩌다 가끔 안부나 주고받는 연락이 전부였다. 그렇기에 상호는 대부분의 사람이 알법한 박병찬의 과거 조금, 그리고 자신이 마주한 박병찬의 일면 조금을 말해줄 수 있었다.
길지 않은 말이었다. 병찬은 가만히 그것을 들어주다가 상호가 말을 마치고 긴 숨을 내뱉는 것까지 기다려주었다. 상호는 몇 번 숨을 쉬면서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머릿속에서 정리한다. 횡설수설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두서없는 말들이었다. 왜 저는 이쪽의 병찬햄에게 제가 아는 병찬햄에 대해 말했을까. 상호는 한참 생각하다가 답을 내놓는다.
"…제가 왜… 햄에게서 저희 쪽의 병찬햄을 겹쳐보면서도 정말 다르구나. 하고 느꼈는지 오늘 알았어요."
"뭔데?"
"병찬햄은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공을 던지러 오던 사람이니까. 그렇게 놓지 못하는, 좋아하는 게 있던 사람인데…"
"응."
"여기의 병찬햄은 좋아하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요.“
건방진 말이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른다. 그냥 상호가 보지 못했을 뿐일 수도 있지. 근데 그거 다 감안하고도 그렇게 말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냥, 농구에 흥미 없는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안 좋았다. 농구를 좋아해 본 적 없는 박병찬이라니… 다른 세계인 건 알지만 어쩐지 그게 굉장히 불합리하게만 느껴서 괜스레 투정을 부린다. 생판 타인이면 안 그랬을 텐데 제 앞에 있는 게 박병찬이라서, 기상호는 그래 버린다.
이론과 실제는 조금 다르다. 상호가 배웠을 때 가이딩을 할 경우 상대방의 정신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실제의 가이딩을 하면서 배운 것은 그 정신에 따른 영향이라는 것이 상대방의 감정이 어느 정도 느껴진다는 것이다. 상호는 이 순간 어쩌면 병찬이 화를 내거나 하다못해 짜증을 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하.“
상호는 눈을 둥그렇게 뜬다. 병찬이 웃고 있었다. 거부감은 하나도 없이, 되려 조금 더 마음이 열린 것 같았다. 상호는 그것에 조금 의아해했고 병찬은 좀 더 웃더니 상호에게 몸을 붙인다. 같은 바디워시에 같은 샴푸다. 냄새가 똑같으니 다를 것이 없음에도 가까이 다가오는 걸로 향이 강하게 느껴졌다. 병찬은 그 상태로 상호를 꾹 끌어안아 제 품에 묻는다. 상호는 얼떨결에 그에게 안긴 상태로 흘끔 시선을 올려 병찬의 얼굴을 살폈다.
병찬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리고 또한 굉장히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의 원인이 저와 뒤바뀐 자신이라는 것은 짐작이 가능했다. 병찬은 제 품에 안긴 상호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말했다.
"상호야, 이거 알아?"
"뭔데요?"
"사실 오늘까지 네가 기상호라는 게 영 감이 안 왔거든. 여기의 너는 좀 더 징글맞게 굴고 눈치도 더 안 봐. 근데 너는 눈치도 많이 보고 하지 말라면 바로 안 하고 팔 좀 잡아당기면 아프다고 소리를 내잖아."
"…어, 그. 죄송합니다?"
"됐어, 인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러던 놈이 뻔히 싫어할 거라고 짐작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꼭 하는 꼴이 똑 닮았다고. 어디를 가도 너는 좀 징그럽네."
"칭찬이죠?"
"칭찬으로 보여?"
"하지만 웃고 계시잖아요…"
"시끄러워, 얼른 자.“
병찬이 상호의 머리를 꾹 누른다. 탓에 상호의 얼굴이 병찬의 넓다란 가슴팍에 푹 짓눌렸다. 딴딴했다. 이어 손에 힘이 풀리고 여전히 병찬을 올려다보는 상호의 눈을 손수 감겨준다. 상호는 그것에 굳이 반항하지 않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여기 병찬햄은 여기의 내를 진짜 사랑하나 보네. 곧 든 생각은 우습게도 그런 감상이었다. 병찬은 내내 기상호를 어렵게 대했다. 티가 났다. 어리고 약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기상호. 당장 믿을만한 사람이 병찬 밖에 없는 탓에 같이 자고 머리도 말려주면서도 영 거리감을 줄이지 못하는 기상호를 박병찬은 어려워했다. 그런 주제에 한 번 대들듯이 속을 떠보려 하자 되려 웃으며 꾹 안아준다. 상호가 저쪽의 병찬과는 다른 점을 보고 괜히 투정을 부릴 때 병찬은 이쪽의 상호와 비슷한 점을 보고 왠지 안심했다.
센티넬도 가이드의 감정이 전해질까? 그래서 제 맘을 뻔히 알아서 이렇게 받아준 걸까. 상호는 그게 너무 궁금했고 한 편으로는 이쪽의 저 자신이 아주 조금 부러워졌다. 그저 같은 면이 있다는 이유로 안심하고 정을 주게 되는 사랑은 어떤 걸까. 어떻게 그렇게 사랑 받았어요? 상호는 그게 좀 부러웠다. 아니면, 그냥 병찬햄이 그런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을까. 상호는 그런 사랑을 하는 박병찬에 대해 조금 생각하다가 말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할 상상은 아니었으니까.
병찬의 품은 조금 딱딱했지만 충분히 따뜻했다. 닿은 이불도, 닿는 맨살들도 부드러웠다. 전의 날보다 가이딩이 잘 되는 것 역시 느껴진다. 느껴지는 병찬의 파동이 전보다 빠르게 안정되어 갔기 때문에. '가이드와 센티넬의 유대감이 높을수록 효율이 좋습니다.' 처음 읽었던 책자의 말이다. 그러면 병찬햄은 이 순간 내가 편해졌고… 나도 조금 편해진 건가. 상호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그냥 머리를 비웠다. 그냥 투정을 부리고 싶었을 뿐인 것 치고는 좋은 결과였으니까.
여전히 병찬은 상호에게 함부로 손을 뻗지 않았지만 조금 더 친하게 다가왔다. 그전에는 상호가 다가오는 것만 받았으면서 종종 피곤하다거나 가이딩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 상호는 다가가서 손을 잡아주었고 병찬은 그대로 팔을 벌려 보였다.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되고서는 그냥 포옹을 했다. 대부분은 병찬의 파동이 불안정하여 가이딩이 필요한 상황일 때가 있었지만 가끔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기도 했다.
어느 때고 포옹을 할 때면 병찬의 감정이 흘러들어왔다. 상호는 병찬의 변화로 깨닫는다. 전해지는 감정은 전하고 싶은 감정이다. 병찬은 가끔 너무 그리우면 상호가 제 품에 안기도록 했다. 그대로 꾹 끌어안고 가만히 그리움을 보내는 것이다.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병찬은 상호에게서 이 곳에 있었을 제 연인을 비춰보고 있었다. 상호는 그 그리움을 가만히 받아내면서 제 세계의 병찬을 떠올렸다. 병찬의 그리움 탓일까? 제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으나 결국 따지면 별 사이도 아닌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호 역시 병찬을 그리워했다. 공을 튀기고 코트를 가로질러 림을 쳐다보는 그 시선을 다시금 지켜보고 싶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상호 역시도 병찬에게서 병찬을 비추어봤다. 가끔 일을 빨리 마치고 돌아온 병찬의 손을 잡고 농구 코트로 가는 일이 그랬다. 상호는 병찬에게 슛 자세를 적당히 보여주었고 병찬은 그것을 빠르게 습득했다. 신체 능력이 아주 좋다더니 두 손을 쓰면 힘이 너무 들어가는 탓에 병찬은 되려 살살 던지는 법을 익혔다. 그러고도 병찬은 던지는 족족 공을 집어넣었다.
병찬은 상호가 그러는 것에 별다른 말 없이 맞춰주었다. 그래서 상호는 병찬을 상대로 1:1을 연습했다. 신체 능력이야 비교가 안 되겠지만 그거야 병찬이 어느 정도 봐주면 되는 일이고. 아직 농구로는 초짜인 병찬은 상호랑 부딪히지 않고, 그 와중에도 봐주려다 보니 좀 많이 뚝딱거렸다. 그게 딱 상호가 어떻게 안간힘을 쓰면 벗겨낼 수 있는 정도라서 상호는 병찬이랑 하고 나면 헉헉 거리면서 숨을 골라야 했다.
지금은 초짜지만 병찬은 배우는 게 빨랐으니 아마 하루 이틀만 지나면 상호를 쉬이 이기겠지. 이쪽의 병찬은 무릎도 다치지 않아서 더 그랬다. 정말 약점이 없는, 오히려 훨씬 더 건강한 박병찬. 상호는 땀을 닦아내며 림 밑에 구르다 멈춘 농구공을 집어 들었다. 병찬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상호를 몰아붙여도 뿌듯해하지 않았다. 그래도…
"햄."
"응.“
상호가 먼저 팔을 벌린다. 병찬은 다가와 상호에게 살짝 기대듯 몸을 붙이고 얹듯이 팔을 둘렀다. 숨기지 않는 병찬의 감정이 쏟아진다. 상호는 요즈음에 이 순간이 가장 기분이 좋았다. 조금은 즐거워해 준 듯 약간의 흥분이 느껴진다. 상호는 그것이 너무 좋아서, 헤헤. 바보 같이 웃으며 병찬을 꾹 끌어안았다. 농구가 아니어도 무언가를 하면서 즐거워하는 병찬은 좋았을 테지만 상호는 농구 밖에 몰랐기 때문에,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공유할 때 제일 기쁘기 때문에 상호는 지금이 너무 좋았다.
병찬도 요즘 부쩍 자신을 편하게 대하는 상호가 기꺼운지 다가오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자주 상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전에는 저녁에 들어오는 시간이 불규칙 했는데 요즈음에는 규칙적으로, 이렇게 밖에서 놀 수 있을 정도의 시간에 들어왔다.
변하지 않은 것은 상호가 머리를 말려주는 것 정도. 처음 봤을 때 어색하다 싶었더니 이 곳의 상호랑 같이 지낸 뒤에는 항상 자신이 머리를 말려주겠다고 우겨서 오랜만에 하려니까 좀 어색했다고 한다. 그 말에 상호는 웃으면서 아마 잘 보이려고 엄청 노력한 거 같다고 말했다. 병찬은 그 말에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 상호는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를 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제 앞의 병찬을 생각했다. 제가 아닌 다른 저를 사랑하는 박병찬. 그러면서도 그와 같은 존재라는 이유만으로 저를 아끼는 박병찬. 완전히 다른 사람이면서도 가끔 제가 아는 이를 떠올리게 만드는 박병찬. 어쩌면 상호는 저 쪽의 병찬에게 진작에 반해버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건방지게도.
그 날은 아침에 일어나서도 러닝을 나가지 않았다. 대신 옷을 하나 받았다. 저가 병찬을 처음 봤을 때 입고 있었던 옷과 비슷했다. 다시 말해, 전투복이다. 상호는 병찬의 도움을 받아 겨우 제대로 입고 숙소를 나섰다. 어느 정도 걸으니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거대한 차 앞에 서 있다. 병찬의 뒤를 쫓아가던 상호는 병찬이 사람들을 지나쳐 가장 앞쪽으로 가는 것에 당황했으나 티를 내지 않고 그 뒤를 계속 따른다.
병찬은 딱히 하는 말 없이 가장 먼저 차에 탑승했다. 상호는 눈치를 보다가 병찬이 웃으며 제 옆을 토닥이는 것에 바로 앉았다. 분위기가 날카로웠다. 그 전날 정보실에서 브리핑을 받고 병찬에게도 언질을 받았으나 여전히 현실감이 들지 않아서, 상호는 찬찬히 들은 것을 복습했다.
이번의 작전은 갑작스러운 적의 습격이 아니라 예정된 괴물들의 본거지 소탕이었다. 작전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1년이 걸렸단다. 듣기로는 이제 막 산란기가 끝난 상태이며 아직 부화까지는 한참 남았고, 또한 괴물들은 알을 부화시키기 위해 본거지 근처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이렇게 모여 있을 때 제대로 소탕을 해야 한다고 했다. 산란주기가 굉장히 길기 때문에 이번 기회를 놓치면 또 그것들이 퍼지고, 새로운 본거지를 만들고, 그렇게 수가 불어나고… 그런 사정 탓에 박병찬은 빠질 수 없었고, 그에 당연하게도 파트너인 기상호의 참석 역시 강제되었다.
며칠 전부터 박병찬은 마주치기만 하면 별일 아니라고, 그냥 안 가도 되니까 숙소에 있으라며 몇 번을 말했지만 기상호는 결국 박병찬의 옆에 앉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어제 병찬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정보실에서 브리핑을 한다기에 들으러 갔고, 돌아가는 길에 누군가가 다가와 언질을 주었거든.
"기상호 씨."
"네?"
"따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아, 네… 뭔데요?"
"혹시 박병찬 센티넬이 무엇이라 말하든 같이 가겠다고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제가 안 갈 수는 있나요?"
"사실 저희가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기상호 씨께서는 도와주고 계신 거지 저희 소속의 정식 가이드가 아니기 때문에 희망하신다면 다른 사람에게 임시 가이드를 맡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작전을 수행할 때 기상호 씨가 파트너로서 박병찬 센티넬의 옆에 있어 주길 바랍니다."
"따로 이유가 있을까요."
"전에는 그러지 않았지만… 현재 박병찬 센티넬은 다른 가이드와의 가이딩 효율이 굉장히 좋지 않습니다. 기상호 씨와의 가이딩만이 평균적인 효율을 내고 있습니다. 이번 작전은 박병찬 센티넬의 상태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저희는 위험 요소를 최대한 줄이고 싶습니다."
"…다른 가이드랑은 왜 효율이 안 좋은데요?"
"흔한 사례입니다만 개인 사정이라 직접적으로 언급하기가 곤란합니다. 관련 사례를 보내드릴 테니 나중에 읽어보시겠습니까?"
"아… 알겠습니다. 일단 읽어보고 생각해도 될까요?"
"네, 부디 좋은 결정을 내리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렇게 받은 사례는… 그러니까. 센티넬과 가이드가 연인이 생겼을 경우에 발생한 사례들이었다. 좋게 말해 유대감이었지, 보통 상대방을 향한 애정이나 의존도가 가이딩 효율에 영향을 미친다. 대부분은 센티넬과 가이드가 연인이 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종종 일반인이나 같은 직종의 능력자들끼리 연인이 될 경우 다른 이들과의 스킨쉽에 거부감이 생기면서 효율이 급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파트너 제도 또한 그런 상황에서의 거부감 등을 줄이려고 하는 거라고.
작전 전날인지라 훈련 대신 휴식이 주어졌기 때문에 기상호는 언제나처럼 농구코트에 나와 공을 튀기고 있었다. 머릿속이 조금 어지러웠다. 솔직히 엄청난 작전이고, 위험할 수 있다고 몇 번이고 경고를 받았다. 절대 강요가 아니라고 몇 번 들었다. 마음 같아선 그냥 쉬고 싶었다. 근데 그렇게 들어버리니까… 그럼 내가 빠지면, 큰일 나는 거 아닌가. 작전이 제대로 안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병찬햄이 크게 다칠 수도 있겠지. 가이딩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폭주도 한다던데. 센티넬의 폭주 사례는 기상호도 몇 개 수업을 받으면서 봤다. 대부분의 끝은 사살, 혹은 사망이었다.
그 뒤 농구코트로 찾아온 병찬이 자신에게 다시금 같이 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며 상호는 저도 갈 것이라 몇 번이고 답해주었다. 쓸모가 있고 싶어요. 병찬은 그런 것보다 목숨이 중요하다고 말했으나 상호는 그저.
"햄이 지켜주실 거 아니에요?“
라는 말로 고집을 부렸을 뿐이다. 병찬은 몇 번이고 상호를 회유하고, 심지어는 윽박지르려고도 했으나 결국 손 한 번 대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몇 번이고 쉬다가 결국 절대 거기서 제 말을 어기지 말라는 말을 하며 포기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곳은 허허벌판으로 보이는 거대한 공터의 외곽이었다. 듣기로는 통로가 아주 많았으나 어제 선발조가 이 일대를 모두 무너트려 완벽히 그것들을 고립시켰고, 원래라면 밖으로 튀어나왔을 놈들은 지켜야 할 일들 탓에 최대한 숨죽인 상태로 계속 있는 것을 방금까지도 확인했다고 한다. 그다음은 간단했다. 병찬의 능력으로 본거지의 반을 날려버리고 나머지 반을 몰려온 나머지가 싹 쓰는 계획이었다. 무식하다 못해 허황된 수준이었으나 박병찬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센티넬이라고. 브리핑을 하던 이는 확신에 차 말했다.
그럼 대체 뭐가 위험한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하여튼 상호는 병찬의 손을 잡고 병찬을 바라본다. 병찬은 한 손을 뻗은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상호는 알 수 있었다. 병찬의 파동이 아까부터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었다. 능력을 쓰고 있단 소리다. 솔직히 아직도 가이딩을 쏟아붓는 방법은 잘 모르겠다. 뭘 어떻게 하면 된다는데 상호는 영 감이 안 왔다. 그래서 상호는 슬쩍 병찬의 어깨에 제 머리를 기댄다. 집중을 하느라 아무런 감정도 넘어오지 않았지만 그 순간 미약한 변화가 스친다. 웃었구나. 상호는 괜히 머리를 부비적거렸다. 여전히 파동은 불안정해지고 있지만 아까보다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그러나 꾸준히 상태가 안 좋아진다. 상호는 이제 그 파동이 자신도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그 감각은 아주 기묘했다. 몸이 아니라 정신이 외부의 자극에 의해서 좋을 대로 흔들리는 감각. 말 그대로 영혼이 흔들리는 감각이었다. 이렇게 흔들려도 되나. 병찬이 능력을 쓰는 도중에 가이딩을 한 건 처음이라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상호는 자기 자신보다도, 이 흔들림을 견뎌내고 있을 병찬이 더 걱정이었다. 이러다가 꼭, 터지지 않을까. 순간적으로 그런 공포감이 드는 순간 병찬이 뻗었던 손으로 주먹을 꽉 쥔다.
거대한 공터가 한 순간에 거대한 구멍으로 변했다. 저 밑에서 기괴한 울음소리들이 들린다. 한순간에 생긴, 빛조차 제대로 닿지 않는 구덩이는 사람을 압도 시키기 충분했다. 상호는 숨을 멈췄고 옆에서 다른 이들 역시 숨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그러나 몇몇 이들이 '강하!'라고 외치며 뛰어들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들이 같이 뛰어내린다. 상호는 그 순간 병찬을 쳐다본다.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식은 땀을 뻘뻘 흘려대는 얼굴을 확인하고 상호는 급히 병찬을 꾹 끌어안았다. 병찬의 시선이 상호에게 닿는다. 병찬은 순간적으로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평소와는 비교도 안 되는 감정이 쏟아져 내려온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가질법한 마음의 벽은 정신이 불안정해질수록 약해진다. 당장 한계 직전까지 능력을 쓴 병찬은 이제 절박한 그리움을 쏟아내고 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병찬은 지금 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누군가가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했다. 그리하여 제 앞의 상호를 꾹 끌어안는다. 뻐근하게 아파지는 것에도 상호는 이를 꾹 물고 견뎌냈다. 짐작한다. 지금의 이 힘이 아마 평소에 다른 저를 끌어안았을 가장 익숙한 힘이었을 것이다.
병찬의 그리움이 또 다시 상호를 잠식한다. 상호는 이 순간, 자기 자신이 생각해도 비정상적일 만큼 병찬이 그리워진다.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다고, 그저 저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웃어줄 그 얼굴이 끔찍할 정도로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돌아가서 당신을 꾹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정말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텐데. 상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막혔던 숨을 터트리며 목소리를 쥐어짰다.
"병찬햄."
"…응."
"…저도, 저도 병찬햄이 너무 보고 싶어요…“
그 말에 병찬이 상호의 어깨에 얼굴을 묻는다. 순간적으로 파동이 더 심하게 요동치다가, 점점 안정을 찾아간다. 둘은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감정은 오직 둘만이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이었다. 상호는 병찬에게 이해한다고 말했고, 병찬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비록 상호의 감정이 병찬에 의해 강제적으로 피워 올려진 감정이라, 또한 둘은 결국 타인인 탓에 완벽히 채워주지는 못하더라도 당장의 위안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병찬은 서서히 진정한다. 상호는 그제야 숨을 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는 와중에도 아래에는 아비규환이다. 아무리 유리하게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난전이 시작되면 옆의 동료에게 공격을 당할 수 있고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적이 달려들 수도 있다. 병찬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병찬은 천천히 제정신을 가다듬었고 충분히 멀쩡해진 뒤에는 상호를 떨어트렸다.
"형 혼자 내려갔다 올 테니까 여기 있어."
"…같이 안 가요?"
"너 있으면 더 힘들어. 여기 있어. 알았지?"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돌아와야 해요."
"내가 너 보다 더 잘 알아 인마.“
병찬은 시원하게 웃어 보이곤 아래로 내려갔다. 상호는 끝에 쭈그려 앉아서 깊은 공동을 내려다본다. 아래에서는 빛이 나는 능력들로 인해 어느 정도 실루엣 등이 보였으나 너무 깊은 탓에 잘 구분이 가진 않았다. 그 와중에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보인다. 다른 사람보다 몇 배는 빨랐다. 저게 병찬햄이겠구나. 상호는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집중했다.
결국 병력의 5%는 사망, 반 이상이 중상, 나머지의 경상으로 작전은 끝났다. 규모에 비하면 괄목할 정도의 결과라고 한다. 그중에서 병찬은 경상을 입은 쪽으로, 오른팔 위쪽이 베여서 붕대로 감아놓은 상태였다. 그 상처 역시도 위로 도망가려던 괴물들 중 몇이 상호 쪽으로 향한 탓에 벽을 타고 뛰어 올라와 낚아챔과 동시에 같이 떨어지느라 생긴 상처였다. 상호는 돌아가는 내내 병찬의 손을 꾹 잡고 있었다. 병찬은 상호에게 기댄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움과 함께 불안감이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상호는 몇 번이고, 제게 닿지도 않았다며 병찬에게 속삭였다.
병찬은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머리를 말리는 와중에 잠들었고 상호는 그런 병찬을 끌어안고 낑낑거리며 어떻게든 바르게 눕힌 뒤 이불을 덮어주었다. 아직도 하늘에는 노을의 흔적이 옅게 남아있는 시간대였다. 그의 몸 밑에서 이불을 빼내기가 힘들어 결국 반으로 접어주는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오늘 저는 한 게 없는데. 밖에 나가서 조금만 던지다 올까? 상호는 잠깐 생각했다가 그냥 병찬의 옆에 자리 잡았다. 오는 내내 붙어있던 덕에 병찬의 파동은 매우 안정된 상태였으나… 그동안 계속 긴장하고 있었고, 또 병찬의 감정을 받아내느라 정신이 무척이나 피곤했다. 진정한 상태에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그리워할 것은 아니었는데. 아니, 글쎄. 사실 이제와서는 모를 일이다. 이제 상호는 버릇처럼 그를 그리워하게 되었으므로.
어쨌든 이번 작전이 성공했으니 며칠 간은 훈련이고 뭐고 쉬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공은 내일 던지지 뭐. 병찬햄이 상대해주면 더 좋을 테고. 상호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상호는 쉴 수 있었지만 병찬은 능력을 한계까지 쓴 탓에 이런저런 검사를 받는다고 바빴다. 그래서 상호는 그냥 혼자 공을 던지다가 누워서 농땡이를 피우다가 하면서 연습을 했다. 이제 상호가 여기 온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간다. 제일 길게 체류한 사람이 34일이라고 했는데 그 날짜를 지나면 정말 기약이 없었다. 이쯤이면 경기는 진작에 끝났을 것이다. 이제 돌아가면 일이 어떻게 되었든 간에 저는 아마 병찬햄을 못 보겠지… 상호는 그게 좀 아쉬웠다.
한참 그렇게 혼자 공을 튕기는데 인기척이 들린다. 상호는 뒤를 돌았고 처음 보는 사람과 눈을 마주했다. 옷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상호는 그 옷을 빤히 쳐다보다가 깨닫는다.
"여기서 뭐 해?"
"공 던져요."
"왜?"
"연습 해야 해서…"
"네가 박병찬의 파트너야?“
상호는 긴장감에 혀로 제 이 안쪽을 쓸면서 침묵한다. 알고 왔을까? 그럼 뭐라고 대답하든 의미가 없지 않나? 고민은 짧았고 상호는 툭 내뱉는다.
"아니오."
"그렇구나. 걔가 어디 있는지는 알아?"
"잘 몰라요. 다른 분에게 물어볼까요?"
"아니 됐어. 다른 데로 가면 또 찾아야 하잖아.“
그러고 제 쪽으로 다가오는 것에 상호는 머리를 굴린다. 농구코트는 야외에 있었고 건물에서 그리 멀지 않았으나 센티넬은 일반인보다 훨씬 빠르다. 심지어 비행이거나 신체 능력자면 더 하겠지. 나에게 해를 끼칠 목적일까? 상호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상대방의 얼굴을 쳐다보며 뒤로 주춤 물러난다. 그 뒤 눈을 한 번 깜빡이면 조금 거리가 있던 이가 제 앞에 선다. 상호는 쓸데없는 반항을 그만두기로 하고 얌전히 농구공을 떨어트린 뒤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반항 안 해?"
"얌전히 있으면 잘 대해주실까 해서…“
상대방은 깔깔 웃으면서 상호의 손을 잡았다. 흔들리는 파동이 느껴져 상호는 순간적으로 구역질이 나올 뻔했지만 빈손으로 제 입을 막는 것으로 가까스로 참았다. 저쪽도 어지간히 벽을 세우는 모양인지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상호는 얌전히 잡혀있었다. 거친 파동이 그래도 가이드에게 닿았다고 서서히 가라앉는다. 어쩌면 상호가 상대방에 대해 별 감정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고. 상대방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얌전히 따라가면 다치진 않을 거야."
"약속이에요?"
"그래, 약속.“
상호는 장난스럽게 제 앞에 내민 새끼손가락을 보다가 얌전히 그 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상대방이 다시 크게 깔깔 웃었다.
습격이 있었다. 어디서 정보가 새어나간 건지 부상자가 많아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 때를 노려 테러리스트 단체들이 쳐들어온 것이다. 납치 당한 가이드가 많았다. 대부분은 높은 등급, 특히나 센터에서 많이 활약한 센티넬들의 파트너들이었다. 정보가 새어나가도 단단히 새어나갔다. 습격은 눈 가리기 용이었다. 아마 조력자도 있었겠지. 사라진 이들 중에는 센티넬이나 일반 직원도 있었으니 그중 하나겠거니 생각할 뿐이다.
한 순간에 파트너를 빼앗긴 센티넬들은 대부분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려워했다. 당연한 일이다. 센티넬의 파트너는 비즈니스로 묶인 가이드가 아니라 대부분 친구, 연인, 혹은 가족이었으니까.
알고 있던 본거지는 습격했더니 이미 옮겼는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센터는 가이드들을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납치 당한 이들이 가지고 있을 위치추적기는 모두 먹통이었다. 하나 같이 박살을 내두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필 파트너가 납치된 센티넬 중에선 추적 전문이었던 이들도 많아서 더욱 문제가 생겼다. 남은 가이드들이 가이딩을 해준다고 해도 가이딩의 효율은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시간은 지진 부진하게 흐른다. 납치 사건이 벌어진 지 일주일이 지났다. 몇몇 센티넬은 결국 제정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폭주 직전의 상태가 되어 수면제를 투여해 강제로 재워두었다. 외부 센티넬의 협력을 받았지만 여전히 지진 부진 했고.
그리고 납치사건이 일어난 지 8일째 새벽. 박병찬은 전투복을 입고 그나마 멀쩡히 능력을 보존하고 있던 센티넬들과 함께 조용히 움직였다. 대부분이 능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기다리던 이들이었다. 어제저녁 하나의 신호가 잡혔다. 가이드가 달고 다니는 위치추적기의 신호였다. 그리고 신호의 대상자는, 기상호였다.
가이드가 달고 다니는 위치추적기는 센터의 특수한 기술로 특정한 파동을 방출하는 형식이었고 그렇기에 보통의 전파 차단 기술은 통하지 않았다. 모든 걸 완벽히 차단하는 센티넬이 있다면 모를까 아마 그런 센티넬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박병찬은 이번에 산 중턱에 다른 이들과 멈추어 선다. 저 멀리 앞에는 멀쩡한 건물들이 세워져 있었지만 모두의 목적지는 이곳, 지하였다.
어지간히 뭐 하나 딸리는 새끼들은 지하로 숨어든다니까. 박병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을 앞으로 뻗는다. 아쉽게도 쓸만한 공간이동 센티넬은 지금 수면제를 맞고 뻗어있었고 그 이외에는 출력이 별로 좋지 못해서 박병찬은 이번에도 무식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투시 능력자와 감각 공유 능력자의 도움을 받아 밑에 깔린 것을 파악한 박병찬은 그대로 능력을 사용한다. 밑에 파묻힌 공간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이러면 고맙지. 그대로 주먹을 쥐고 아주 천천히, 그 주먹을 들어 올리자 주변의 땅이 진동한다. 박병찬은 제정신이 조금씩 갈려 나가는 것을 느꼈으나 개의치 않고 주먹을 끝까지 들어 올렸다.
드드드득, 땅이 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저 아래에는 혹시 모를 산사태를 대비한 센티넬들이 배치되었으니 걱정할 일은 없었다. 이제 도움도 필요 없었던지라 감각 공유가 끊긴다. 하지만 박병찬은 집중하기 위해 계속 눈을 감은 채로 능력을 사용했다. 땅이 찢어지는 소리, 갈리는 소리, 파편이 떨어지는 소리. 온갖 굉음들 속에서도 박병찬은 계속 눈을 감았고… 이어 결국 모든 소리가 멈춘 뒤에 천천히 눈을 뜬다. 박병찬의 앞에는 완전히 뜯겨나온 지하의 건물이 둥둥 떠 있었다.
병찬은 그것을 들어다가 옆에 쓰러지지 않도록 잘 기대어 내버려 둔다. 그 뒤 주저앉았고, 이어 옆의 센티넬들이 진입한다. 마음 같아서야 같이 들어가고 싶지. 하지만 이것도 꽤 무리한 결과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흘러내리는 코피에 대기조 중 한 명이 손수건을 내밀기에 대충 고맙다는 말을 하고 안을 쳐다봤다.
센티넬들이 진입했던 통로, 그 안에서 누군가가 뛰쳐나온다. 적이라면 제압해야 하니 대기조들이 긴장한다. 그러나 곧 저 멀리 달려오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보이자 다들 다시 대기 상태가 됐고 박병찬은 벌떡 일어났다. 그동안 익숙해져 왔던 앳된 누군가가 아니라 박병찬이 아는, 박병찬에게 더없이 익숙한 이가 뛰어나오고 있었다.
상호는 눈을 깜박거렸다. 이번에도 환한 빛, 그리고 멀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게 있었다. 그러고 눈을 뜨면 깜깜한 건물 안이다. 상호는 누워서 이불을 덮고 있는 저 자신을 슬쩍 내려다본다. 눈을 깜박였고, 그대로 슬그머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발견한 것은 익숙한 지상고의 사람들이다. 근데 여긴 숙소가 아닌데. 시선을 좀 더 돌리면 지상고 만큼은 아니어도 익숙한 이들이 보인다. 조형고의 사람들이었다. 그제야 상호는 여기가 어딘지를 알았다.
상호는 눈이 어둠에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조형고가 있는 쪽을 좀 더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없나? 상호는 조금 고민하다가 조심스레 사람들을 피해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라도 갔을까 가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상호는 체육관 쪽으로 발을 옮겼다.
체육관 문을 연다. 지독히 익숙한 것 같으면서 낯선 것투성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상호는 멀끔히 그 모습을 바라본다. 저가 가르쳐주었던, 묘하게 어색한 느낌의 슛폼이 아니라 이미 몇만 번은 던져 습관으로 자리 잡은 깔끔한 슛폼이었다. 공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림 속으로 들어간다.
쌓아온 그리움은 옅지 않았으나 상호는 알았다. 이 그리움은 온전히 병찬에게서 받아온 것이다. 여전히 저에게 그를 이렇게나 그리워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상호는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았을 뿐이다.
다만 그러던 차 병찬이 뒤를 돌았다. 눈이 마주쳤고, 병찬은 상호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웃었다.
"상호야?"
"네. 안녕하세요."
"돌아왔어?"
"예?"
"돌아온 거 아니야?"
"…바뀐 거 아셨어요?"
"응, 말해주던데."
"진짜가… 햄은 그걸 믿었어요?"
"응.“
병찬이 다가온다. 상호는 그의 손에 들린, 있어야 마땅한 듯한 농구공을 바라보았다. 농구공을 들고, 조형고의 후드를 입은 박병찬. 사실 조형고의 유니폼을 입은 게 더 좋았겠지만 이 모습 또한 병찬에게 어울렸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병찬은 다가와 눈을 마주한다. 상호는 어쩐지 병찬이… 웃고 있는 게 조금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여기 온 상호가 그러던데. 거긴 능력도 쓰고 괴물도 있다고."
"예.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도 병찬햄이 있던데요."
"네가 보기엔 어땠는데?"
"똑같이 생겼는데 5살이 많았어요. 여전히 멋있고 엄청 세요."
"그래?"
"네. 근데, 제가 보기엔 여기 병찬햄이 더 멋있어요.“
그 말에 병찬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크게 웃었다. 병찬이 손을 뻗는다. 저쪽의 병찬이라면 머리를 쓰다듬었을 텐데 병찬은 그저 상호의 어깨를 토닥인 것이 전부다. 그것에 아쉬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저 안심했다.
병찬은 이미 땀을 흘린 상태인지 슬슬 정리해야겠다고 말했고 상호는 돕겠다고 했다. 그래서 둘은 공을 정리하고 체육관 문을 닫고 나왔다. 숙소로 돌아가면서 둘은 별것 아닌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병찬이 씻고 나올 때까지 밖에서 얌전히 기다린 상호는 자는 곳까지 함께 돌아왔다. 마련된 자리는 아주 멀었기 때문에 잠자리에 누운 둘은 아주 작은 소리로 잘 자라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말았다.
이곳의 병찬은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를 비추어 예뻐하지도 않았다. 갈 곳 잃은 사랑을 온전히 받아낸 것은 상호 뿐이었다. 이것 또한 만나지 않으면 차차 덜어질 마음이다. 그래서 상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덜어내야지. 어차피 내일부터 또 훈련을 하고, 합숙도 끝나면 다음 경기까지 만나지도 못할 사람이었다. 멋대로 커진 마음은 제가 덜어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럼에도 상호는 제게 웃어주었던 방금의 병찬을 떠올린다. 갑작스럽게 저쪽의 병찬이 조금 원망스러워졌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멋대로 그리워하고 멋대로 마음이 커지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원망의 대상은 이제 웬만해서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 갈 곳 없는 원망은 갈 곳 없는 마음과 함께 잘 버리는 수 밖에 없었다.
그동안 병찬의 품에 안겨 잤더니 혼자 이리 자는 것이 조금 어색하다. 그래서 그런가, 상호는 늦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오랜만에 마주친 상호는 기억에 들어있던 것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얼마나 그랬냐면… 사람이 이렇게 어른스러워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고작해야 아직 고1인 녀석이 키는 몇 센티는 큰 것 같았고 웨이트라도 한 건지 저지를 입고 있음에도 탄탄한 체격이 눈에 띄었다.
병찬은 음료수를 뽑으러 가다 마주친 상호를 빤히 쳐다보았고 그것에 옆에 있던 희찬은 환히 웃으면서 병찬의 주의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원래라면 희찬과 함께 이것저것 물어봤을 녀석은 그다지 웃지도 않고 그저 병찬을 마주 보았을 뿐이다. 희찬에게 웃으며 대답하다가도 병찬은 상호를 흘끔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상호는 계속 쳐다보는 건지 그럴 때마다 눈이 마주쳤다. 병찬은 어쩐지 제 목덜미가 쭈뼛 서는 감각을 느끼며 제 손으로 목덜미를 주물럭거렸다.
그 날 경기를 할 때에 상호는 벤치선수였다. 그래도 저가 나서면 당연히 나오리라고 생각했는데 상호는 병찬이 교체 된 순간에도 벤치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그저 병찬에게 여전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왜? 병찬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의 경기를 챙겨본 바로는 상호의 실력이면 스타팅으로 나오기 충분했고… 병찬은 자신 있었다 저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지상고에선 상호 뿐이다. 근데 내가 나서는데 상호를 안 내보낸다고? 저 정도 체급이면 저 자신도 좀 버거울 건데. 병찬은 미묘한 기분으로 공을 잡았다.
결론적으로 박병찬은 수월하게 점수를 따냈다. 다만 지상고도 투지가 꺾이진 않아서 병찬이 나가자마자 무섭게 점수를 쫓아왔다. 그래도 병찬이 벌려놓은 점수 차는 적지 않았기 때문에 승리는 조형고였다. 이제는 꽤 친분이 있는지라 모두가 적당히 대화를 주고, 받을 때도 상호는 벤치에 앉아서 가만히 있었다. 병찬은 다가가 말을 걸까 하다 말았다. 여전히 자신을 향해 있는 시선이 어딘가 낯설었기 때문에.
병찬은 조금 찝찝한 마음으로 화장실을 가겠다고 말하며 복도를 걸었다. 왜 나오지 않은 거지. 나와야 했잖아? 부상을 입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체격도 키도 더 커졌는데. 슛도 많이 늘었고… 왜? 아니다. 더 생각하지 말자. 병찬은 머리를 저어 생각을 떼어낸다. 의미 없는 짓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이겼고, 나머지 두 팀도 강팀은 아닌지라 잘하면 이번엔 1위로 올라갈지도 모를 일이다. 지상고도… 전보다 훨씬 실력이 좋아졌으니 8강에 올라올지도 모르지.
병찬은 생각에 잠겼다가 제 뒤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을 깨닫는다. 고개를 돌리면 지척에 상호가 있었다. 병찬은 새삼 자신이 살짝 올려다본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분이 미묘해졌다. 이렇게 쑥 자랄 수가 있나? 키도 그렇고, 근육도 그렇고. 병찬은 또 다시 미묘한 감각에 사로잡히느라 상호가 자신의 소매를 조심히 잡을 때까지 멍을 때렸다.
"병찬햄?"
"…어? 어. 상호야. 응."
"오늘 경기 정말 멋졌어요."
"그래? 고마워."
"네. 햄은 어디를 가서도 멋지네요.“
어딜가서도? 병찬은 여기서 기이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그러니까… 제 앞의 이가 상호가 맞나. 하는 것. 물론 저 낮게 가라앉은 날카로운 눈매도, 그 앞의 옅은 홍채도, 왼쪽 눈 밑에 찍힌 선명한 눈물점도 다 똑같았다. 근데 그 외엔 같은 게 없었다. 아직 남아있던 볼살도 빠져서 조금 얼굴선이 날카로워졌으며 키는 자신보다 큰 것 같고, 저와 비슷한가 싶은 체격에… 목소리도 앳된 기가 다 빠져서 전보다 훨씬 낮아진 것 같았다. 문득 상호의 변화가 훅 다가온다. 기묘한 감각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래서 병찬은 부러 아무렇지 않은 것을 꾸며내며 말했다.
"…근데 상호야."
"네."
"너 오늘 왜 안 나왔어?“
약간의 정적. 상호는 그 말에 다시 병찬을 빤히 쳐다본다. 하지만 여전히 상호는 아픈 곳 하나 없어 보였다. 어디 붕대를 하고 있지도 않았고 불편해 보이지도 않았고… 그러면 적어도 내가 나올 때는 너도 나왔어야 하는 게 아닌가. 당연히, 내 상대는 너여야 했던 거 아닌가? 병찬은 그렇게 생각하며 상호를 마주 본다. 그 끝에서 상호는.
"제가 하는 말, 모두 믿어주실 거예요?“
라고 말했다. 대체 무슨 이유가 있길래… 병찬은 괜스레 긴장하며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렇게 하는 말이란 게 자기는 다른 세계의 기상호인데 여기의 기상호랑 잠깐 바뀌었단다. 자기 나이는 21살이고 그 탓에 아직 감독님이 내보내도 될지 모르겠어서 쉬고 있다고. 병찬은 자기도 모르게 벙쪘다가 어쩐지 그걸 그렇구나 받아들였다. 그런 웃기지도 않을 말에 그렇구나. 하며 쉬이 넘어갈 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상호의 변화가 좀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하긴, 너무 확 바뀌긴 했어… 병찬은 아직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아를 꾹 누르며 여상한 낯으로 웃어 보인다.
"그렇구나. 그럼 다음 경기에는 나올 거야?"
"잘 모르겠어요. 저는 농구는 하나도 몰라서 쓸모 있을지도 모르겠고…"
"왜? 여기 너는 농구 잘하는데. 너도 잘하지 않을까?"
"…그럴까요?"
"에임이 구데기긴 하지만.“
그 말에도 상호는 삐진 티 없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 다른 사람인가 보네. 그러다 저 뒤에서 다른 지상고 인원이 상호를 부른다. 그것에 상호는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이고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사이에서 병찬은 새삼스레 무언가를 깨닫는다. 그러고 보니 다른 게 하나 더 있었지.
…쟤, 나를 저렇게 쳐다봤던가.
저렇게가 뭔데? 병찬은 불쑥 튀어 오른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그 뒤로도 상호는 종종 병찬에게 연락했다. 혹시 연락처를 줄 수 있냐는 것에 전에 줬잖아? 라고 답했더니 자신은 못 받았다고 하는 것에 그러려니 생각하며 번호를 교환했었다. 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말을 걸길래 하나하나 대답해주다 보니 서로에 관해 물어보는 게 많았다.
병찬은 상호의 세계를 물어봤고 상호는 병찬에 관해 물었다. 상호의 세계는 초능력자들이 있고 괴물도 있다고. 거기서도 저는 굉장히 강한 사람이라 다들 의지한다는 말에 병찬은 멋진 자신을 상상하다가 웃었다. 농구를 안 하는 저 자신이라니. 어쩐지 상상이 안 간다고 해야 하나. 혹시 농구는 안 했냐 물으니 했다는 말은 못 들었다고 해서 그렇구나 답했을 뿐이다.
상호는 병찬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언제부터 농구를 시작했는지, 얼마나 농구를 좋아하는지, 우여곡절은 없는지 등을. 악의 없는 물음일 것이고 이제 와서 삐죽거릴 것도 아니라 병찬은 그 모든 질문에 천천히 답해주었다. 어릴 때부터 농구를 시작했고, 여러 번의 시련이 있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농구를 하는 걸 보면 아마 저는 농구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다고.
그리 메시지를 보내니 5분 동안 답이 없던 상호는 딱 한 문장을 보냈다.
[저는 제 세계의 병찬 형이 제일 좋지만 여기의 병찬 형은 너무 멋진 거 같아요.]
그것에 병찬은 기분 좋게 웃었다. 그 뒤로는 상호가 아는 저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쪽의 병찬은 센티넬이라고 불리는 초능력자이고 아주 강해서 제일 높은 등급을 받았다가 모종의 이유로 강등당했다고 했다. 그 모종의 이유가 무엇이냐 물으니, 예전에 있었던 테러리스트 제압 작전에서 감정 쪽에 이상이 생겨 회복이 잘 안되는 탓에 많은 작전에 나가지 못하는 게 이유라고.
회복이 잘 안되는 게 뭐냐고 물어보니 가이딩이니 뭐니 말이 이어지는데 솔직히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어서 잠깐 답을 고민했더니 그냥 능력을 잘 못 쓰는 사람이 됐다고만 알아달라는 메시지가 덧붙여졌다.
그 후로 몇 번 더 이야기를 주고받은 뒤.
지금 병찬은 한창 경기가 치러지고 있는 와중에 초원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서 경기장 뒤편에 나와 있었다. 경기를 하고 있으니 볼 사람들은 다 안에 있어서 경기장 뒤편은 휑했다.
지상고와 조형고는 4강에서 마주쳤고 이번에도 스타팅으로 나오지 못했던 상호는 병찬이 나서자 같이 나왔다. 반응 속도 같은 건 전보다 더 좋아진 거 같은데 확실히 좀 미숙한 게 있더라. 드리블을 하면서 가다가 실수해서 놓쳤을 때는 병찬도 모르게 황당해서 실소가 나올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슛폼도 완전 엉망이던데. 그러는 와중에 병찬이랑 맞붙을 때는 끈덕지게 따라오니 전보다는 아니어도 충분히 버거워 이번에도 생각보다는 점수를 못 냈다.
언제 돌아오려나. 더 성장했을 그 애를 또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그러고 보면 또 보자고 했는데 이번에 그 약속도 미뤄진 꼴이 아닌가. 그런 생각까지 했을 때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생각을 한다고 숙인 고개를 들면 저 멀리서 상호가 보였다. 상호는 병찬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무표정이던 얼굴이 환해지더니 걸음을 빨리해 숫제 뛰어오는 꼴이었다. 저건… 또 똑같네. 아닌가? 병찬은 뛰어온 상호가 순간 자신에게 너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당황한다.
"햄~!"
"컥…“
그대로 꽉 안아온다. 병찬은 조금 당황하며 안겨있다가 팔을 들어서 일단 그 등을 마주 안고 토닥여주었다. 뭐 사실 못 받아줄 건 또 아니지. 애초에 왜 병찬이 경기를 봐야 할 상황에 뒤편으로 나왔는가? 그건 다 상호와 얘기를 하면서 병찬에 대해 말하던 상호가 실수로… 둘이 사귄다는 얘기를 했거든. 병찬은 그것에 당황하다가 그렇구나. 라는 답변 밖에 못했다.
그걸로 끝나면 다행인데, 상호는 아무렇지 않게 다른 얘기를 하다가 오늘 문자를 보냈다. 혹시 한 번만 만나주시면 안 될까요? 그 속에 담긴 함의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병찬이 둔하진 않았다. 하지만 뭐, 못 만나줄 건 또 없어서. 병찬은 나왔고 상호는 그런 병찬의 품에 구겨지듯이 파고들어서 꾹 끌어안고 있었다. 아이고 상호야… 어쨌든 네가 사랑하는 건 제가 아니라 다른 저 자신일 텐데도 좋다고 파고드는 꼴이 좀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서 병찬은 대충 안겨줘 있다가 상호가 떨어지고서야 마주 볼 수 있었다. 상기된 얼굴이 병찬을 빤히 쳐다본다. 병찬은 구겨진 후드티를 탁탁 피다가 시선을 마주한다.
아.
"정말 보고 싶었어요."
"…그래?"
"네. 아, 여기의 병찬햄은 제가 아는 병찬햄이 아니긴 하지만… 어쨌든 여기 병찬햄도 엄청 멋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감정에 병찬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한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얘, 왜 이렇게 날 쳐다보지. 병찬은 이번에도 묘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여전히 한껏 어른스러워진 상호가 보내는 알 수 없는, 혹은 외면하고픈 시선은 익숙해지질 않았다. 뒷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상호는 병찬의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떨어지긴 했는데 딱 얼굴을 마주할 정도로만 떨어졌다. 병찬은 한 손으론 제 허리를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제 등을 받쳐 들고 있는 자세가 마치 처음부터 그랬다는 듯이 너무 익숙해 보이는 것이 좀 이상했다. 아니, 이상하기로는 자신이 더 이상하지. 저쪽에서 둘이 사귀는 게 제 알 바인가. 그냥 모른 체 하면 됐다. 근데 계속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문자에 담긴 함의를 이해하고, 이제는 자신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꼴을 보면서도 병찬은 그 모든 것을 가만히 받아주고 있었다.
이건 좀 이상해. 뒤늦은 자각이 머리를 채운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게 특히나 더 이상했다. 다른 세계에서 상호와 저가 사귄다는 것도, 그렇게 사귀던 상호가 이곳에 와서 저 자신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것도. 병찬은 문득 생각한다. 나… 상호한테 너무… 약하게 굴어주고 있지 않나? 이렇게 해줄 이유가 하등 없는데도.
문득 상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온다. 여전히 시선은 병찬의 눈에 고정되어있었다. 병찬은 다가오는 얼굴에 넋이 나가 쳐다보다가 너무 가까워졌다는 자각을 하자마자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열기는 병찬의 옆을 지나간다. 상호는 다시 병찬을 꾹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올린 채로 끌어안았을 뿐이다. 병찬은 뒤늦게 열이 올랐다. 미쳤나 봐…
"저 오늘 병찬햄이랑 마주했는데, 역시 여기 병찬햄은 너무 멋진 거 같아요."
"어? 어, 그래."
"네. 다시 보고 싶을 정도로 엄청 멋있어요. 여기의 제가 좀 부러울 정도로요."
"너도 꽤 잘 했어. 저기 가서도 농구 한 번 해보는 건 어때?"
"음… 그건 괜찮아요. 계속 병찬햄 옆에 붙어 있어야 하니까."
"그렇구나. …너는 그쪽의 나?를 엄청 좋아하는 것 같네."
"사랑하죠. 저는 병찬햄을 엄청 사랑해요. 가능하다면 옆에 영원히 있고 싶을 정도로.“
절절한 사랑 고백에 병찬은 손을 올려 제 얼굴을 쓸어내린다. 수신자가 자기 자신이 아닌데도 그랬다. 이 순간 병찬은 앳되어 보이는 기상호를 떠올렸다. 귀엽기만 했던 그 녀석이 이렇게 크는 걸까. 아마 마찬가지로 키가 더 크고 성인이 되면 웨이트도 할 테니까 이런 모습이 되긴 하겠지.
병찬은 이쯤 되면 인정을 해야 했다. 어른이 된 기상호는 쓸데없을 만큼 섹시했다. 얼마나 그랬냐면, 이렇게 맞붙어있으면서 버릇인지 제 허리를 조심히 쓰다듬는 것에 긴장하면서도 바로 밀어내지 못할 정도로. 병찬은 머뭇거리다가 조심히 손을 올렸고.
빰빠빠 빠라빠빰 빠빠빠빠-!
"아. 죄송해요. 경기 끝났나보다."
"…그렇네. 어서 가."
"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응…“
상호는 미련 없이 전화를 받으며 떠난다. 병찬은 뒤에 남아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쭈그려 앉았고, 뒤이어 잔소리를 하던 선생님의 얼굴이 생각나 그냥 주저앉아버렸다. 나 지금 뭐 하려고 한 거지. 진짜 뭐 하려고 한 거지?? 병찬은 그 와중에 서지 않은 자신의 앞을 보며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섰으면 난 지금 죽었다… 두 손을 얼굴에 묻고 있으니 이젠 병찬의 휴대폰이 울린다. 화면에 뜬 초원이. 를 보고서야 병찬은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경기가 끝난 김에 이번에도 감독님들끼리의 인연으로 조형고와 지상고는 합숙을 할 수 있었다. 양쪽 다 그동안 실력을 키워온 게 있었고 이번 합숙부터는 병찬도 몇 번씩 참여할 수 있었던지라 연습 경기에서 점수 차가 크게 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종일 훈련하고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질 쯤, 병찬은 날마다 상호와 숙소 뒤편에서 만났다. 상호가 먼저 불렀지만 불렀다고 냅다 나가는 저 자신도 참 웃긴다고 생각하면서.
나가봤자 하는 건 없었다. 고작해야 봐서 좋다는 말 조금. 그러다가 꾹 끌어안는 녀석에게 계속 안겨있으면서 실없는 소리 좀 하다가 다시 훈련하러 돌아와서 슛연습 좀 했다.
글쎄. 실상 그건 박병찬이 최대한 모른 척을 한 결과였다. 상호는 계속해서 병찬과 눈을 마주치려 했고 병찬은 별별 방법으로 눈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냥 상호를 확 끌어안기도 했고 하늘을 쳐다보기도 했고 아니면 괜히 제 손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상호는 그런 병찬을 보채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병찬은 결국 어느 날, 뻔히 알면서도 상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상호는 언제나처럼 병찬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러니까, 알고 있었다. 이렇게 눈을 마주하면 어떻게 될 건지 정도는. 실없던 대화는 끊긴다. 둘은 그저 서로를 계속해서 쳐다본다. 병찬은 제 목덜미가 긴장으로 굳어지는 게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다. 그 순간 상호가 고개를 내민다. 이번은 분명 착각이 아님을 알고 있다. 병찬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사실 첫 키스는 아니었다. 병찬이 아예 경험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상호는 굉장히 능숙했다. 병찬의 팔을 잡아 올려 제 목에 두르게 하는 것이 그랬고 그대로 허리와 등을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도, 그대로 입 안을 훑고 가끔 입을 떼며 숨 쉴 텀을 만들어주는 것도 그랬다.
열이 오른 머리에 이래도 되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다가도 사라진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계속해서 혀를 얽혀오다가도 입천장을 살살 긁어주는 것도 좋았고 그 큰 손으로 제 허리를 문지르다 아랫배를 천천히 쓸어주는 것도 좋았다. 이제는 아예 제 위에 올라타 그 무거운 몸으로 자신을 짓누르는 것도 좋았다. 아래가 맞닿는 것이 느껴진다. 병찬은 눈을 질끈 감은 상태로 몰아치는 그 감각들을 느끼며 몸을 경직시킨다.
이어 눈을 떴을 때는 상호가 떨어진 뒤다. 상호의 얼굴이 열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병찬은 숨을 헐떡이며 그 얼굴을 올려다본다. 아마 저 자신도 상호처럼 얼빠진 얼굴일 게 뻔했다. 아직도 맞닿아있는 아래 탓에 병찬은 허리를 뒤척였고 상호는 살짝 떨어졌다.
침묵이 이어진다. 상호는 여전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고 병찬은 그 시선에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상태로 굳어있었다. 상호가 그 순간 다시 몸을 가까이 한다.
"저, 한 번만 더 해도 되나요…“
속삭임에 가까웠다. 못 들었다고 시치미를 뗄 수 있을 정도로. 상호는 그 와중에 제 소매로 병찬의 입을 문질러 닦아준다. 병찬은 여전히 숨을 헐떡이고 있다가 반쯤 풀려있던 팔에 힘을 주어 상호의 목을 끌어안았다. 상호가 좀 더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병찬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여전히 과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얼마나 오래 했는지 돌아간 체육관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상호는 일찍 자야 한다며 숙소로 돌아갔다. 병찬은 차마 일찍 잘 수가 없어서 모아둔 공을 가져와 슛을 던졌다. 어차피 이대로 자기에는 글렀다.
혼자 남아서 슛을 던지고 있으려니 온갖 상념이 머리에 들어찬다. 미쳤구나, 박병찬…. 뭐 한 거지 진짜?
자세한 시간은 모르겠지만 어림짐작을 해보자면 박병찬은 기상호랑 키스를 장장 30분은 했다. 후반 가서는 박병찬이 조르는 꼴이었다. 떨어지려는 기상호를 끌어안고 고개를 내밀고. 으악!!!
A부터 Z까지 모든 게 문제였다. 솔직히 얼마 마주하지도 않았던 기상호랑 그렇게 붙어먹은 것도 문제고 그 기상호가 제가 아는 기상호가 아니라 생판 남에 가까운 기상호인 것도 문제다. 아니, 심지어 그 상호는 다른 세계의 자신과 사귀고 있는데 이거 바람 아닌가? 박병찬은 제 뇌가 주르륵 녹아버린 것 같았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다. 근데 기상호랑은 했네. 왜? 몰라…
그러는 와중에 조심스럽게 체육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병찬은 던지려던 슛을 마저 던졌다. 우리 애들은 다 잘 것 같은데. 그럼 저건 기상호려나? 선생님이었다면 바로 제 이름을 불렀을 테니 아마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 깔끔히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돌린다.
마주하는 것은 익숙한 듯 낯선 기상호였다. 체격이 조금 줄어든 것도 그랬지만 가장 다른 점은 얼굴 곳곳에 앳된 기가 남아있었다. 볼살도 살짝 올라오고, 날카로운 눈매는 이제보니 조금 둥근 것 같기도 했다.
근데 눈빛은 여전했다. 이런 눈이었나.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 전의 상호와 매우 닮았다. 깊게 들여다보고 싶어 하면서…, 묘하게 제 목덜미를 긴장시키게 하던 시선.
그 순간 병찬은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진다. 대체 저 쪽의 저 자신은 무슨 사람이길래 저 쪽의 상호도, 이제는 너조차도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걸까. 하지만 그 감정을 냅다 꺼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병찬은 웃어 보였다.
"상호야?"
"네. 안녕하세요."
"돌아왔어?"
"예?"
"돌아온 거 아니야?"
"…바뀐 거 아셨어요?"
"응, 말해주던데."
"진짜가…, 햄은 그걸 믿었어요?"
"응.“
가까이 다가가니 원래라면 제게 꽂혔을 시선이 제가 들고 있는 농구공으로 내려간다. 그러더니 다시 올라온 시선, 상호는 웃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듯이. 몇 번이고 마주했던 시선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병찬은 그 차이점을 찾기 위해 계속해서 상호와 눈을 마주했다.
"여기 온 상호가 그러던데. 거긴 능력도 쓰고 괴물도 있다고."
"예. 있었어요. 그리고 거기도 병찬햄이 있던데요."
"네가 보기엔 어땠는데?"
"똑같이 생겼는데 5살이 많았어요. 여전히 멋있고 엄청 세요."
"그래?"
"네. 근데, 제가 보기엔 여기 병찬햄이 더 멋있어요.“
말 하나하나가 담담하면서도 가볍지 않다. 병찬은 제게 멋있다고 말하는 상호를 보고 불현듯 깨닫는다. 너는 나를 보고 있는 게 맞구나. 저쪽의 상호는 저 자신을 보며 다른 저 자신을 떠올렸다. 그 마음의 끝에 닿는 것은 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네 마음의 끝에 있는 것은 분명 저 자신이다. 병찬은 그 사실을 깨달으며 이상한 만족감에 사로잡힌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게 이상하다는 자각이 있음에도 그 만족감은 가시지 않는다.
손을 뻗는다. 어깨를 토닥였다. 그 모든 걸 가만히 받으면서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옅은 홍채의 눈을 마주한다. 병찬은 문득 생각한다. 갑작스럽게 바뀐 탓에 모든 게 흐트러진 것 같았다. 만약 상호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상호가 이런 눈을 했을까. 이런 눈을 했을 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미 일은 벌어졌으니 그것에 대해 맞다 아니다 바로 답을 내릴 순 없었다. 그런데도 병찬은 이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저 쪽에서도 사랑했던 만큼 우리는 그런 운명인 게 아닐까. 좋을 대로의 결론을 낼 뿐이다.
숙소로 돌아가 서로의 자리에 눕고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긴 뒤 병찬은 옆으로 돌아누웠다. 겹겹의 사람들 탓에 상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병찬은 상호가 있을 만한 곳을 어림짐작하며 눈을 감았다.
다시 돌아온 상호의 눈빛이 바뀌었던 상호와 똑같은 것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안도였음을 병찬은 아마 오랫동안 비밀로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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